1. 퇴임예배
어느 교회의 주보에 실린 글을 통하여 그의 퇴임 소식을 접하였다. 선생은 퇴임예배에 여러 사람들이 찾아온 것을 두고 번거롭게 해서 미안하다는 말을 하였다. 그의 말은 단순히 인사치레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왜냐면 그의 세 아들이 “이런 일로 직장에 빠지면 안 된다”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모두 직장에 출근하였다. 선생은 자신이 거창고등학교에 입학하여 예수님을 알게 된 뒤 배운 모든 것을 한마디로 표현하였다. “어 맨 오투 비…”(A man ought to be…), 사람다운 사람,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는 사람, 무엇보다 사람 귀한 줄 아는 사람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었다고 회고하였다. 일부러 웃으려고 한 것은 아니지만 날마다 웃음으로 아침을 맞을 수 있었다고 하였으며, 퇴임의 아쉬움은 없지만 웃음으로 만났던 학생들과 떨어지게 된 사실이 서운하다고 하였다. 선생은 이 말을 하다가 잠시 목이 메었다.
2. 꿈
중학교에 다닐 때 선생은 왕복 오십 리 길을 걸어서 다녔다. 나이가 든 뒤에 돌아보아도 힘들었다는 기억이 없었다. 하숙비를 아껴서라도 진학할 수 있어서 기뻤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선생은 고등학교 진학을 꿈꿀 수 없었다. 거창고등학교에 합격한 뒤 부모님께 각서를 쓰고 입학하였다. 한 학기 동안 공부하여 장학생이 되겠다는 약속이었다. 선생은 약속을 지켰다. 거창고등학교에서 선생은 평생의 스승인 전영창 선생을 만났고, 전영창 선생의 영향으로 기독교인이 되었다.
전영창 선생은 자주 꿈에 대하여 말하였다. “보이즈 비 앰비셔서”(Boys, be ambitious), “노 크로스 노 크라운”(No cross, no crown)을 자주 언급하였다. 선생은 그때의 기억을 아직 또렷이 간직하였고, 삶으로써 튼튼히 다졌다. 대학은 돈으로 가는 게 아니라 의지와 노력으로 간다는 말도 기쁨으로 새겼다. 전영창 선생은 형편이 어려운 아이들에게 대학의 첫 등록금을 대주었다. 그렇게만 하면 아이들은 어떻게든 학업을 마쳤다. 선생은 전영창 선생의 그런 가르침과 도움을 고스란히 받아 대학에 진학하였다. 대학을 나와 돈을 많이 벌고자 하였다.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하여 부를 이룬 노벨을 생각하여 화학공학과를 선택하였다. 돈을 많이 벌어 가난한 학생들에게 학비를 대주고 싶었다. 선생은 대학을 다니면서 아르바이트를 하였고, 그래도 어려우면 고향에 내려와 전영창 선생의 권유로 거창고등학교의 교사 일을 하였다. 자격증이 없어도 그렇게 할 수 있는 시절이었다. 학비가 모이면 복학을 하고, 또 내려오고, 군에 입대하고, 그러느라 대학을 졸업하는 데 꼬박 십 년이 걸렸다.
대학 4학년 때 선생의 진로는 결정되었다. 그 무렵 고향에 내려와 늘 그랬듯이 전영창 선생의 집으로 인사를 하러 갔다. 언제나 건강하였던 전영창 선생이 감기로 누워있었다. 안부를 묻자 “야 이놈아! 선생이 없어 학교도 못 하겠다”며 한숨을 쉬었다. 마음이 아렸다. 그로부터 깊은 감화를 받았으며, 외국에서 유학까지 한 어른이 대학의 부총장 자리도 물리치고 이 시골에서 바른 교육을 하려고 애쓰는데, 다른 것도 아니고 선생이 없어 학교를 못 하겠다니….
“선생님 제가 내려오겠습니다.”
불쑥 나온 대답에 전영창 선생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벌떡 일어나 “그래? 그러면 점심이나 먹자”며 선생의 손을 이끌고 자장면 가게로 향하였다.
가난한 산골의 소년은 청년이 되었을 무렵 전영창 선생의 ‘교육’에 동참하는 교사가 되어 후배인 학생들 앞에 서 있었다. 거기까지 지치지 않고 달려온 힘은 ‘꿈’ 때문이었다. 교사가 되어 선생은 전영창 선생이 그랬던 것처럼 학생들에게 꿈을 가지고 살 것을 자주 말하였다. 그의 꿈 이야기에는 늘 한 사람의 이야기가 따라다녔다.
“미국 흑인의 선구자요 교육자인 부커 T. 워싱턴 역시 꿈을 가지고 산 사람이다. 자기가 먼저 글을 배워서 자기 동족에게 가르친다는 꿈이다. 그래서 노예로 태어난 그가 해방 후에는 남의 집 머슴살이, 광부노릇을 해서 먹고 살면서도 공부를 하여 터스키기에서 마침내 동족들에게 글을 가르치게 되었다. 그 사람의 꿈 때문에 많은 흑인들이 글을 배우고 삶의 수단을 터득하여 인간다운 삶을 누리게 되었다. 이렇게 꿈을 가지고 산 사람은 자신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도 혜택을 주게 된다.”
3. 정의
1969년 박정희 정권은 3선을 목적으로 개헌을 추진하였다. 장기독재로 가는 길목에서 세상은 어수선하였다. ‘양민학살’의 현장으로 알려진 거창에서 그 무렵 300여 명의 거창고등학생들을 중심으로 3선 개헌을 반대하는 시위가 일어났다. 아직 대학가에서조차 뚜렷한 조짐이 안 보이던 때였으므로 중앙정보부의 서슬은 더욱 날카로웠다. 관할 도교육위원회를 통하여 곧 20명의 학생 명단이 내려왔고, 그들을 퇴학 처리하도록 요구하였다.
전영창 선생과 토론하여 그 요구를 묵살하였다. 학생들은 무엇보다 교사가 가르쳐준 민주주의와 우리의 현실이 맞지 않았고, 목에 칼이 들어와도 불의와 타협하지 말라고 가르쳤으니 학생들로선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처벌을 할 요량이면 교사를 처벌하라고 맞섰다. 이 일로 이듬해 표적감사를 받았고, 전영창 교장이 잠시 파면을 당해야 했다.
도재원 선생은 ‘교육’이 죽지 않고 살려면 희생이 뒤따를 수밖에 없고 학교가 어쩔 수 없이 희생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였다. 이런 생각은 교사의 자리에서 언제나 놓칠 수 없는 가치가 되었다.
1980년 신군부가 광주에서 시민을 학살한 뒤 삼청교육대를 설립하였을 때도 선생의 ‘교육’은 위기를 맞았다. 삼청교육대에 보낼 학생 세 명을 뽑아 명단을 보고하라는 지시가 내려온 것이었다. 선생이 교감으로 있을 때였다. 밤을 새워 회의를 하였고 결론은 ‘보내지 말자’는 쪽이었다. 광주항쟁이 일어났을 때 학생들을 모아놓고 “광주시민은 폭도가 아니다, 이것은 민주화운동이다”고 이미 가르쳤으므로 학교는 눈 밖에 나있던 때였다. 이번 지시까지 거부할 경우 폐교까지도 각오해야 할 상황이었다. 세 명의 학생을 보내면 학교는 살겠지만 늘 정의를 가르쳐온 교육은 죽을 것이고, 그 반대라면 학교가 죽더라도 교육이 살 테고, 교육이 살아 있는 한 때가 이르면 다시 학교를 살릴 수도 있으리라고 믿었다. 학교가 살지 않더라도 그 정신이라도 살아남으리라 믿었다.
교감으로서 그는 교육위원회에 참여하였다. 명단을 내놓으라고 하였다. 우리는 보낼 사람이 없습니다, 우리가 다 지도합니다. 그렇게 말하면서 선생은 자신의 변명이 구차하게 느껴졌다. 자신도 모르게 어디서 용기가 생겼는지 예상도 못한 그 다음 말이 나오고 말았다.
“아니, 있어도 못 보냅니다.”
관계자는 “뭐야? 당신네 학교만 학교요?” 하며 발끈하였다. 그 다음부터 선생의 입에서 나온 말은 어쩌면 그 자신조차 의식하지 못한 그의 깊은 데서부터 나온 말이었는지 모른다.
“교육은 전문적인 분야입니다. 법을 전문가가 다루듯 교육도 전문가인 교사가 합니다. 의사가 환자를 아무에게나 맡길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사람이란 무력 앞에서 머리를 숙일지 모르지만 그것은 신체를 굴복시키는 것일 뿐 혼을 굴복시킬 수는 없습니다. 물리력으로 그런 혼을 고칠 수 있다는 발상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대가는 혹독하였다. 각 중학교 교장에게 거창고에 학생을 보내지 말라고 지시를 내렸으며, 거창고의 교사들은 가가호호 방문하여 입학을 독려해야 했다. 결국 30명이나 미달된 채 입학식을 치러야 했다. 그러나 이 일이 전국에 소문이 났고, 거창고의 위상은 더욱 뚜렷해졌다.
학교를 죽이더라도 교육을 살리는 교육, 그것은 도재원 선생의 ‘성공관’이었다. 그는 말하였다.
“성공은 자신의 삶을 어디에 바치느냐에 달려 있다. 성공은 정의, 자유, 평등, 사랑을 구현하는 데 삶을 바친 사람들의 생애에 대해서 주어지는 칭호이다. 아무리 유명해지고, 한 분야의 대가가 되고, 사업에 성공하고, 자기가 어릴 때부터 바라던 소망을 이루었다 하더라도 ‘정의와 사랑’의 사회를 건설하는 데 일익을 담당하는 삶을 살지 않았다면 그 생애는 결코 성공한 삶이라고 말할 수 없다.”
4. 한 사람
선생이 담임을 맡고 있던 반의 한 학생이 퇴학을 당하는 일이 생겼다. 이미 교장의 결재까지 난 상태였다. 퇴학당하기가 쉽지 않은 학교였다. 선생은 교장인 전영창 선생을 찾아가 내가 사람을 만들어볼 테니 사면해 달라고 간청하였다. 선생의 간청이 이어지자 전영창 선생은 교장실 문을 잠그고 열어주지 않았다. 선생은 결국 2층에 있는 교장실에 들어가기 위하여 벽을 타고 창문으로 올라가서 애걸하였다. 선생의 간청이 간절하였던지 전영창 선생은 사면하여 주었다. 그러나 그 학생은 결국 또 문제를 일으키고 퇴학되었고, 퇴학이 되고 나서도 선생을 찾아와 감사의 치레를 하였다.
선생이 교장으로 일할 때는 새벽에 전화가 걸려오면 불안감에 몸을 떨었다. 전화번호가 다방 전화번호와 비슷하여 자주 새벽전화가 걸려왔으나 잘못 걸려온 전화가 오히려 반가웠다고 했다. 그러나 사고가 터져서 전화가 올 때도 있었다. 그날도 사고가 생긴 날이었다. 파출소장이 선생에 대하여 호감을 가지고 있어서 먼저 선생의 집으로 전화를 넣은 것이었다. 파출소로 달려가 보니 학생은 술에 취해 행패를 부리다 잠이 들어 있었다. 퇴학 조치가 날 것 같아 두려웠다. 그날 학교에서 교사회의가 열렸다. 거창고에서는 교사들이 자유롭게 토론하고 결정할 수 있도록 교사회의에 교장이 참석하지 않았다. 교사회의에서는 그 학생을 퇴학을 시키지 않기로 결정하였다. 입학한 지 두 달밖에 안 되었으므로 아직 교육을 받지도 않은 것이나 다름없는데 퇴학을 시키면 그 학생으로부터 교육받을 기회조차 박탈하는 결과가 되기 때문이라는 게 교사들의 의견이었다. 선생은 교사들에게 “고맙다”고 인사하였다. 선생은 그 뒤 이 학생에게 관심을 기울였다. 우연히 만난 것처럼 하여 조심스럽게 말을 붙였다. 그들에게 인기 있는 가수의 노래를 일부러 들어두었다가 그런 소재로 말을 붙이기도 하였고, 점심 먹는 자리로 다가가 커피 심부름을 시켜 함께 마시면서 대화하기도 하였다. 그렇게 하여 이 학생이 졸업할 때 선생은 더욱 기쁨에 겨웠다.
교사를 선발할 때는 무엇보다 마음가짐을 보았다. 선생은 교장으로서 마지막 면접과정을 담당하였다. 면접을 보기 위하여 교장실에 들어오면 선생은 그들에게 눈을 감아보도록 하였다. 그리고 “삶이 얼마나 귀한지 한번 생각해보세요” 하고 생각할 시간을 주었다. 그리고 눈을 뜨면 선생은 다음 말을 이어갔다.
“선생님들의 삶이 참 귀하지요? 선생님들 한 분 한 분의 삶처럼 꼭 같이 귀한 학생들이 여러분들에게 맡겨집니다. 선생님을 안 만났으면 불행할지 모를 학생이 선생님을 만남으로서 행복해지는 길을 발견하게 된다면 얼마나 기쁠까요? 이것은 선생님과 학생 모두의 행복이겠지요. 선생님들, 이 일에 동참하시겠습니까?”
이 물음은 교사들에게 ‘한 사람’의 존재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도록 만들고, 꾸준히 그 생각을 놓치지 않게 만드는 첫 걸음이었다.
거창고에서 일찍부터 능력에 따른 수업을 한 까닭도 교사들이 힘든 대신, 수업에서 한 사람이라도 소외되지 않도록 하려는 의도였다. 그것이야말로 섬김이라는 도를 실천하는 것이라고 선생은 말하였다.
“섬김의 가장 기본은 사람을 사람으로 대우하는 것입니다. 이 땅에 태어난 어떤 사람도 독립된 존재로서 하나님의 뜻에 의해 태어난 것이므로 귀하게 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떠한 사람이라도 사회적 통념이나 개인의 판단으로 그 가치를 정하여 무시하거나 멸시해서 안 되는 것입니다. 사람을 사람으로 봐야 한다는 또 다른 의미는 차이를 우열로 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의사나 변호사, 농부나 환경미화원은 분명히 차이가 있지만 상호 보조적이지 우열이 아닙니다. 사람은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으며, 그 차이를 통하여 서로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그 차이를 존중해야 합니다. 이것이 섬기는 삶입니다.”
유명한 거창고의 ‘직업 선택의 십계’ 곧 월급이 적은 쪽을 택하라, 내가 원하는 곳이 아니라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을 택하라, 승진의 기회가 거의 없는 곳을 택하라, 모든 조건이 갖추어진 곳을 피하고 처음부터 시작해야 하는 황무지를 택하라, 한가운데가 아니라 가장자리로 가라 등의 가르침은 바로 여기서부터 출발하였다.
5. 자유인
도재원 선생은 참 자유인의 조건들을 이야기하였다. 선생은 자유를 목숨과 함께 중시하였다. 자유는 천부(天賦)의 권리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자유를 누리며 사는 자유인이어야 한다고 가르쳤다.
“자유인이 되려면 진리와 양심에 따라 살아야 한다. 현재에만 집착하여 사는 자가 아니고 영원한 미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참 자유인은 더 많이 가지려는 욕심에서 해방하여 자기를 부인하는 사람이다. 그는 군중의 눈으로부터 해방된 사람이며, 무엇이 되느냐에 관심을 두지 않고 어떻게 사느냐의 본질에 관심을 둔다. 그리고 타인에게서 나와 같은 귀중함을 발견하고 섬기는 사람이다.”
그가 제시한 참 자유인의 조건들은 선생의 삶과 멀리 있지 않았다. 가야산과 덕유산과 지리산의 가운데에서 살아온 선생의 평생은 그래서 산처럼 높고 깊고 따뜻하였다.
◈ 기독교사상 2005년 4월호 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