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만수 金萬秀 (1892 ~ 1924)】
"하얼빈 일본총영사관 습격, 악질 경찰간부 암살 거사 추진 "
1892년 12월 25일 경상북도 안동군(安東郡) 풍북면(豊北面) 오미동(현 안동시 풍산읍 오미리)에서 김낙운(金洛雲)과 분성 이씨盆城李氏의 아들로 태어났다. 다만, 다른 자료에 의하면 1894년 11월 15일에 태어났다는 의견도 있다. 본관은 풍산(豊山)이고, 자(字)는 회일(會一)이다. 손 위 친족이면서 지사의 길로 나가던 김응섭(金應燮)·김지섭(金祉燮)·김재봉(金在鳳)의 훈도와 감화를 어릴 적부터 받고 자랐으며,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비분강개하던 끝에 1913년 만주로 건너갔다.
1918년 봄에 안동 출신 망명지사 이상룡(李相龍)이 지린성(吉林省) 화뎬현(樺甸縣)에 둔전(屯田) 형태의 병영인 길남장(吉南庄)을 설치하고 농병(農兵)이 될 20세 이상의 장정들을 모집하자 선뜻 응하여 군사가 되어서 지도받았다. 이때 “키는 작으나 꼼꼼하고 날쌔며 인내심이 많은 사람”이라는 평을 받았다. 길남장에서 몇 달 지낸 후 이상룡의 곁을 떠났다가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가 조직되고 이상룡이 독판(督辦)으로 취임한 때인 1919년 가을에 다시 찾아갔다.
1922년 서로군정서 안에 헌병대가 조직되자 그 대원이 되어 본격적인 활동을 개시하였다. 1923년에 헌병대원으로 들어온 최병호(崔炳鎬)와 막역한 동지가 되었다. 그 무렵 하얼빈(哈爾濱) 일본 총영사관의 고등정탐부장인 구니요시 세이호國吉精保 경부보(警部補)와 형사부장 마쓰시마(松島)가 창춘(長春)·하얼빈 일대의 한인들을 무단히 탄압하고 함부로 해쳐서 악명이 높았다. 최병호와 함께 일본 총영사관을 습격하여 구니요시 등을 암살 응징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리고 동지 10여 명을 모아서 건국청년모험단(建國靑年冒險團)을 결성하였다. 1923년 12월 초에 하얼빈으로 가서, 시 외곽 남십팔도가(南十八道街)의 중국인 집에 거처를 정하고 거사 기회를 엿보았다. 1924년 4월 초 우연히 재회한 길남장 시절 친구인 류기동(柳基東)을 거사 동지로 합류시켰다.
이러한 동향이 일본 경찰 정보망에 탐지되어 4월 7일 자정 무렵 구니요시와 9명의 순사에게 거처가 포위되었다. 일본 총영사의 압력에 굴하고 만 하얼빈도(道) 교섭서(交涉署)의 요구로 빈장진수사(濱江鎭守使) 장짜오탕(張召棠)이 보낸 중국군 보(步)·기병(騎兵) 각 1개 중대와 경청(警廳) 특경대장 장쩐동(張鎭東) 인솔 하에 출동한 40명의 경관대에 의해서도 겹으로 포위되었다. 장쩐동이 대화를 청하며 신원을 묻자 한국독립군 일원임을 밝히고 “왜적과 사생결단의 승부를 겨루려 한다”라고 말하였다. 장쩐동이 “조용히 잡혀주면 국사범(國事犯)으로 대우하고 일본에 인도하지 않겠다”라고 회유하자, 일언지하에 거절하고 그냥 물러가주기를 요구하였다. 대화를 끝내고 집안으로 들어가는데 구니요시가 순사 2명을 데리고 총을 겨누며 쳐들어왔다. 재빨리 권총으로 구니요시를 쏴서 가슴을 명중시켜 죽였다.
이에 일본 경찰은 뒤로 물러나고 일본 총영사가 1인당 300원의 현상금을 걸고 중국 군경의 적극적인 진압을 유도하니, 수백 발의 총탄이 난사되는 공격이 시작되었다. 이에 맞서 권총으로 응사하며 날이 밝을 때까지 대치하였다. 4월 8일 오후 1시경, 중국 경찰이 지붕에 올라가서 기와를 부수고 구멍을 내어 5~6개의 폭탄을 집안으로 던짐과 동시에 사방에서 총탄을 퍼부었다. 그런 상황에서 5분 정도 총격전을 벌이다 탄환이 떨어져가자 가슴에 총을 쏘아 자결하였다. 시신은 하얼빈 적십자회가 수습하여 한인 공동묘지에 묻어주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