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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827 살림교회 주일공동예배(성령강림 후 제13주)
침묵의 공간-하나님의 지혜
출1:8~22; 롬12:1~8; 마16:13~20
처서가 지나면서 스치는 바람 냄새가 조금 달라졌습니다. 정말 무더운 날은 지나간 것 같습니다. 더운 여름 지내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아침저녁 불어오는 새 바람 맞으며 이제 다시 정신 차리고, 우리의 일상 하루하루를 진짜의 삶에 천착해 가야 할 시간입니다. 다시금 박노해 시인의 “길 잃은 날의 지혜”라는 시를 떠올려 봅니다.
큰 것을 잃어버렸을 때는/ 작은 진실부터 살려 가십시오.
큰 강물이 말라갈 때는/ 작은 물길부터 살펴 주십시오.
꽃과 열매를 보려거든 먼저/ 흙과 뿌리를 보살펴주십시오.
오늘 비록 앞이 안 보인다고/ 그저 손 놓고 흘러가지 마십시오.
현실을 긍정하고 세상을 배우면서도/ 세상을 닮지 마십시오./ 세상을 따르지 마십시오.
작은 일 작은 옳음 작은 차이/ 작은 진보를 소중히 여기십시오.
작은 것 속에 이미/ 큰 길로 나가는 빛이 있고/ 큰 것은 작은 것들을/ 비추는 방편일 뿐입니다.
현실 속에/ 생활 속에 이미 와 있는/ 좋은 세상을/ 앞서 사는 희망이 되십시오.
현실 속에, 생활 속에 이미 와 있는, 좋은 세상을, 앞서 사는 희망이 되십시오.
우리는 현실 속에, 생활 속에 좋은 세상이 와 있는 것을 보고, 그런 삶을 진정 살 수 있는 능력을 “희망”이라고 부릅니다. 갑작스럽게 찾아오는 큰 믿음, 큰 사랑, 큰 희망을 찾고 구하기 전에(이런 것들은 우리의 상황이 갑자기 좋아지고 형편이 나아져야 한다는 전제가 우리에게 깔려 있습니다), 그 전에, 우리 안에 있는 작은 믿음, 작은 사랑, 작은 희망을 소중히 여기며, 그 희망의 불싸를 살려내는 것, 우리는 그것을 “지혜”라고 부릅니다.
시인은 작은 진실부터 살려가고, 작은 물길부터 살피고, 흙과 뿌리부터 보살피라고 권면합니다. 갑작스럽게 우리에게 큰 믿음, 큰 사랑, 큰 희망이 생길 수는 없습니다. 그저 상황이 좋아지고 형편이 나아져서 우리의 “존재 가치”가 바뀐다면, 그것은 “진짜 가치”가 아니고 그리 오래 가지도 못할 것입니다. 상황이 좋아지고 형편이 나아지면 감사한 일이지요. 그러나 그것이 우리 삶을 떠받치는 유일한 목표가 되고, 우리의 가치가 그것에 종속될 때, 우리의 참된 가치는 거의 접근할 수 없게 됩니다.
이럴 때 작은 진실, 작은 물길, 흙과 뿌리를 먼저 돌아보는 것이 지혜입니다. 이런 것들을 돌아보는 길은, 우리 삶에 공간, 틈을 내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돈이, 성공이, 힘과 영향력이 이런 공간과 틈을 벌여준다고 강력하게 주장합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여유”라고 부르지요. 분명 돈의 여유, 성공의 여유, 힘과 영향력의 여유가 있지요. 소위 “가진 자의 여유”입니다. 우리는 “가진 것에 의존하는 여유”가 아니라, 그런 것들에 덜 의존하는 “참 존재로서의 자유”, 즉 “그리스도인의 자유”,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자유”가 필요합니다.
오늘 마태복음 본문에는 베드로의 유명한 고백이 나옵니다. “선생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 베드로의 이 고백에 예수님은 큰 칭찬을 하십니다. “시몬 바요나야, 너는 복이 있다. 너에게 이것을 알려주신(드러내주신) 분은, 사람(육과 피<사륵스 카이 하이마>; 혈육)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시다. 너는 베드로(페트로스)다. 나는 이 반석(페트라) 위에 내 교회를 세우겠다. 죽음의 문(하데스의 문)들이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베드로의 고백을 매우 귀하게 여깁니다. 이 고백이 왜 그리도 중요할까요? 베드로가 정답을 맞추어서? 예수님이 좋아할만한 대답을 해서?
예수님께서는 먼저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인자)를 누구라고 하더냐?”라는 질문을 했었지요. 이에 제자들은 세례자 요한, 예레미야, 예언자 중의 하나라고 합니다, 대답합니다. 이런 세간의 호칭들은 예수님 마음에 안 들었던 건가요? 오늘 예수님의 말씀으로 보면, 이런 세간의 호칭들은 “혈육”에서 나온 것이지요. 하늘 아버지가 알려주신(드러내어 주신)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다시 말하면, 들어서 안 것이고, 배워서 안 것이고, 전통으로 안 것이라는 것이지요. 인간의 지식으로, 머리로 안 것이지, 그것을 넘어서서 안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자신의 생각에서 혹은 자신의 신념에서 예수님을 그런 호칭으로 부른 겁니다.
그래서 혈육으로 안 것이지 하늘 아버지가 알려준 것이(드러내어 준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다시 말해, 세례자 요한이다, 예레미야다, 예언자 중의 하나다, 라는 말은 자신들의 지식이나 배움으로, 자신들이 어떤 사람인가는 상관없이 할 수 있는 말이라는 겁니다.
그렇지만, “당신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십니다.”라는 말은 단순히 배워서, 보아서 (혈육으로) 안 것이 아니라, 자신 안에 있는 그리스도를 통해, 그리스도가 그리스도에게 말을 한 것입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참 존재는 세상의 것에 휘둘리는 “피와 살”이라는 사실을 넘어, 하나님께서 이미 자신 안에 심어 놓으신 그리스도를 통해,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을 통해, 예수님을 그리스도라,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할 수 있었다는 겁니다. 그리스도가 그리스도를 알아본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혈육(살과 피)으로 알게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알려주셨다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 안에 있는 참 존재가 페트로스, 즉 반석(페트라)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를 “마카리오스” 즉 “복이 있는 사람”이라고 불렀습니다.
우리가 다 알다시피 본디 시몬은 한계가 많고 실수가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처음 예수님을 만났을 때 그의 자존감은 바닥이었습니다 맨 처음 예수님을 만났을 때 시몬 베드로는 뭐라고 합니까? “주님, 저에게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 지상에서 예수님과의 마지막 자리에서도, 베드로는 “나는 그를 모르겠노라”고 강하게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강점은 자신의 잘못이 끝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는 주님을 부인한 잘못을 되돌릴 수는 없었지만, 자신을 새롭게 바라봄으로써 과거에 머물러 있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위기의 순간에 저지른 잘못 자체를 없애버릴 수는 없었지만, 변화된 인간이 됨으로써 그 잘못을 만회할 수 있었습니다. 그럴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자신이 한 일에서 자신을 분리시킬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실수, 자신의 잘못 사이에 공간을 두고 바라볼 수 있었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이미 자신 안에 심어놓으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는 자신의 잘잘못과 실수로 훼손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깊이 체험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잘못, 실패, 실수에 언제까지 달라붙어 있지 마십시오. 그 사이에 틈을 내십시오. 침묵의 공간을 마련하십시오. 자신이 한 일에서 자신을 분리시키십시오. 그것이 실패든 성공이든, 잘못이든 공이든, 너무 오래 끄달리지 마십시오. 자신을 변명하고 변호하느라, 자신을 입증하느라, 힘을 너무 쓰지 마십시오. 그 틈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십시오. 여러분 삶의 침묵의 공간은, 그 여백은 하나님이 현존하시며 활동하시는 공간입니다. 그냥 묵묵히 자신의 할 일을 하십시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떻게 해서든지, 우리가 달라붙어 있는 모든 것에서 틈을 벌여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쓰라린 감정이든, 옛 상처든, 우리가 집착하는 대상이든, 틈을 벌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시고 온전히 받아주신다는 말은 바로 그 틈을 벌릴 여유를 주신다는 말입니다. 오직 주님을 바라보라는 말은 그 사이에 틈을 내라는 말입니다.
지난 주에 보았던 요셉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 틈을 벌이고 침묵의 공간을 가졌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으로 그는 형들에게 팔려 이집트의 종으로 끌려갔을 때도, 보디발의 아내의 모함으로 감옥에 갔을 때에도 한결 같았습니다. 그는 평상심을 갖고 할 일을 묵묵히 했던 것입니다. 그때 성경은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셔서 하는 일마다 잘되었다”고 말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경지에 갑자기 도달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여러분의 삶 속에서 작은 진실부터 살려가고, 작은 물길부터 살펴주고, 흙과 뿌리를 먼저 보살펴준다면, 비록 오늘 앞이 안 보인다고, 그저 손 놓고 흘러가게 두지 않는다면, 여러분 안에 “작은 희망”이 쌓이기 시작하는 겁니다. 이렇게 하는 길은 여러분이 하는 작은 일에서 잠시 물러나 바라보는 것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습관적이고 무의식적으로 행하고 있는 일에서 잠시 떨어져서 “내가 뭐하고 있지?”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아니면, 자신이 과몰두, 과몰입되어 있는 것을 알아차리고, “주님, 저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주님 어서 오사 절 도우소서” 천천히 말씀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주님을 바라보는 것이고, 이것이 깨어남의 시작입니다. 이것을 의도적으로 수련하는 것이 말씀묵상이고 침묵수업이고 향심기도입니다.
오늘 출애굽기 본문에는 요셉의 지원으로 야곱 식구들이 이집트로 이주해 와서 오랜 세월이 지나자, 야곱의 일흔 명의 자손들이 큰 민족으로 불어났다는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이렇게 크게 불어난 세력으로 인해 이집트의 파라오는 위협을 느끼게 되고 마침내 히브리 민족을 압제하고 탄압하기 시작합니다. 이런 탄압 중에 출애굽의 인도자 모세가 태어나지요. 그리고 이스라엘은 이집트에서 탈출합니다. 이렇게 되기까지에는 대상에서 떨어져서 틈을 벌이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출애굽기 1장 1절에는 이집트로 이주했던 야곱의 아들들의 이름을 밝히고 있는데, 르우벤, 시므온, 레위, 유다... 죽 말하다가 5절에 보면, 이런 말이 나오지요. “이미 이집트에 내려가 있는 요셉까지 합하여, 야곱의 혈통에서 태어난 사람은 모두 일흔 명이다.” 요셉이 총리로 있던 맨 처음에 가나안 땅에서 이집트로 이주해온 식구들이 모두 70명이었다는 겁니다. 여기서 “야곱의 혈통에서 태어난 사람은...”이라고 할 때, “혈통”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단어는 <예렉>입니다. 이 <예렉>(원형은 야렉)이란 말은 넓적다리, 골반, 혹은 근거(base)라는 뜻이 있고, 사타구니를 완곡하게 이르는 말입니다.
그러면 출애굽기 1장 5절, “야곱의 예렉에서 나온 모든 사람은 일흔 명이다” 라는 말은, “야곱의 골반, 혹은 근거, 혹은 사타구니에서 나온 모든 사람은 일흔 명이다” 이렇게 번역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는 창세기 32장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야곱이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도망해서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할 때, 얍복강 나루터에서 어떤 사람과 밤새도록 씨름을 했던 것을 기억합니다. 그때 그 어떤 사람은 야곱과 씨름하다가 야곱의 “엉덩이뼈”를 쳐서 야곱을 주저앉힙니다. 야곱은 거기서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얻고, 엉덩이뼈가 어긋나 절뚝거리며 걸었습니다. 야곱은 그곳 이름을 <브니엘> 하나님의 얼굴이라고 했지요.
이 때 다친 “엉덩이뼈”가 바로 <야렉>입니다. 야곱은 힘의 근거인 엉덩이뼈가 뿌러짐으로써 이스라엘로 바뀌었습니다. “남의 발을 붙잡는다”“남을 속인다”는 뜻의 야곱이 “하나님께서 다스리신다, 하나님이여 다스리소서”라는 뜻의 이스라엘로 바뀌는데는, <야렉>이 부러져야 했고, 그 <야렉>에서 이스라엘 민족의 기원이 되는 야곱의 아들들이 태어난 것입니다.
야곱의 야렉이 부러지는 사건은, 그의 약싹바름, 자기중심, 수완, 욕심, 자기 꾀가 부서지는 사건이기도 합니다. 그는 문제의 상황에 집착해 있었고, 어떤 수를 쓰던지 성취해내고야 마는 끈질김도 있었습니다. 그는 틈이 없었고 거리를 둘 만큼의 여유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인생은 스스로 말한 “험악한 세월”(창47:9)(가톨릭: “불행하였다”)을 보내야 했습니다. 그가 다 나쁘고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그는 틈을 벌릴 필요가 있었습니다. 거리를 두고 바라보아야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자신 안에 침묵의 공간을 마련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의 “부러진 엉덩이뼈”(야렉)는 바로 이런 내면의 공간을 상징합니다. 그는 자신의 성공에서 자신을 분리시킬 필요가 있었고, 자신의 실패에서 자신을 분리시킬 필요가 있었습니다. 자신의 집착에서 자신을 떼어놓아야 할 필요가 있었고, 자신의 혐오에서 자신을 떼어놓아야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 상징이 “부러진 야렉”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부러진 야렉에서 하나님은 그의 자손을 땅에 가득하게 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지 못했지만, 이어지는 본문에서는, 이집트의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파라오)가 일어나서 이스라엘 자손들을 억압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집트의 새 왕은 이스라엘 자손의 세력이 번성하고 강한 것을 보고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 백성 곧 이스라엘 자손이 우리보다 수도 많고, 힘도 강하다. 그러니 이제 우리는 그들에게 신중히 대처하여야 한다.(직역하면: 자, 우리가 그들에게 대하여 우리 스스로를 지혜롭게 하자.)” 그는 전쟁이라도 일어나면 이들이 우리를 칠 것이라고 두려워합니다.
여러분, 당시 중동의 선진 최강대국인 피라밋 문명국, 이집트 파라오의 말 속에 깔려 있는 놀라움과 두려움이 느껴지십니까? 이집트의 태양신 “레”의 화신이라고 일컬어졌던 파라오의 두려움에서 우리는 어떤 “자유의 공간”, 어떤 틈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는 스스로를 지혜롭게 하자고 하며, 히브리 산파들에게 히브리인 중에 남자아이가 태어나면 죽이라고 명령합니다. 그러나 파라오의 지혜보다 하나님의 지혜는 더욱 강했습니다.
제가 오늘 자세하게 말씀드리지 못하지만, 남자 아이면 죽이라는 명령을 받은 히브리의 산파들이나, 나일강에 버려진 갈대상자를 지켜보고 있던 모세의 누이나, 물에서 건진 모세를 양자로 삼은 이집트의 공주는 하나님께서 숨겨두신 하나님의 지혜였습니다. 모세를 살린 이 사람들이 바로 다 여자들이었음을 기억하십시오. 이 당시 여자들이란 가장 힘이 없는 연약한 사람의 대표들이었습니다. 심지어 이집트의 공주까지도 파라오의 권력 앞에서는 그야말로 파리 목숨이었으니까요.
그러나 이 연약한 여자들은 모두 지켜보고 바라볼 수 있는 여유가 있었습니다. 파라오의 지엄한 명령 앞에서 히브리 산파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할 수 있는”(출1:21) 틈이 있었습니다. 모세의 누이는 강가에 놓아둔 갈대상자를 “멀찍이 서서” “지켜볼 수 있는”(출2:4) 여유와 공간이 있었습니다. 물에서 아기를 발견한 이집트의 공주는 아이를 “불쌍히 여길 수 있는”(출2:6) 내적 공간이 있었습니다.
살림교회 식구 여러분, 우리는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들에 많은 스트레스를 받고, 압박을 느끼고, 떨어져 분리시키지 못합니다. 밖이 톱니가 돌아갈 때 우리의 내면의 톱니도 맹렬이 돌아갑니다. 모든 일에 여유가 없고, 틈이 없습니다. 우리의 감정에, 우리의 자녀들에, 우리의 할 일에, 우리의 미래에까지 우리는 우리의 영역을 넘어 어떻게 해보려고 듭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불어난 것을 보고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두려워했던 이집트 파라오의 두려움이 우리의 두려움이기도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의 지혜보다 더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함이 사람의 강함보다 더 강합니다.”(고전1:25)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이며, 여러분 안에는 그리스도께서 계십니다. 여러분의 그리스도가 일하십니다. 먼저 이 그리스도 의식에 깨어나도록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십시오. 여러분을 어지럽히는 대상에서 잠시 눈을 돌려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주님을 바라보는 좋은 방법은 “단순한 말씀”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미 여러분 안에 마련하신 침묵의 공간을 알아차리십시오. 이 모든 일에 성령님의 도움을 청하십시오. 성령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