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골 여행’
역사에 정통한 학자들은 레바논 사람들, 특히 레바논 중부 주민들과 남부 주민들이 북쪽에서 그것도 산악지방에서 왔다고 말한다.
어떤 레바논 사람에게 ‘당신 조상은 누구요’라고 묻는다면 바빌론 사람들이 그들의 조상이요, 산악지방이 그들의 발상지라고 대답할 사람이 드물지 모르나 페니키아 역사와 지식을 아는 사람이라면 즉각적으로 그렇다고 대답할 것이다.
바빌론과 그 자손에 영광이 있기를 바라면서 나는 레바논 인종의 요람지로 간주 되는 산악지방에 가서 원시적인 지표하에서, 영광스러웠던 해안가에서 또는 변함없는 바위 틈에서 고고학적 흔적을 찾아보는 한편, 도시생활에서 긴장에 지치고 사람들에 부대껴 시달린 몸을 쉬려고 했다.
내 생각으로는 오늘날 우리 동포에게 기쁨을 주는 원천의 하나 중에 산에 가는 것도 있으며 나도 산악지방 인종의 자손으로 이 기쁨을 나누어 갖는 데에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다. 나의 몇 대조는 수백 년 전에 산악지대로부터 이주해 와 알파리카라는 계곡 근처에 정주하여 농사를 짓기도 하고 상업에 종사하게 되었다.
나의 할아버지는 언제나 조상의 고향인 산악지방에 가기를 원했고 그곳에 힘든 여행을 하게 되면 지구들에게 그곳 명물인 마른 무화과와 열매나 담배나 또는 가축들을 데리고 오곤 했다.
그때 나의 조부는 상인이었는데 당시의 장사는 현금거래보다 현물교환이었다. 요새 식으로 이야기 하면 바터제였다. 물론 내 조부의 장사도 다른 상인들처럼 남을 때도 있고 밑질 때도 있지만 이 양반이 지닌 조상의 산에 대한 집념은 아주 강하여 장사에서 얻은 것을 모두 털어 자기 조상처럼 그곳 산악지대의 땅을 꽤 넓게 소유하였다.
나도 할아버지나 아버지처럼 바빌론의 고향, 페니키아 문화를 이룬 선조의 땅을 내 할아버지가 사 놓은 북부의 산악지대에 가서 땅의 소유권을 확인할 겸 오랜만에 맑은 공기를 마실 겸 여행을 떠났다.
고고학적 가치가 있을 만한 낡은 마차를 탔다. 산악지대라 자동차 도로가 나지 않아 여윈 두 말이 배고픔을 참고 억지로 끄는 마차가 이곳의 유일한 교통수단이었다. 자동차나 철도시대보다 이런 마차가 판을 치던 우리 할아버지 시대가 한편 생각해보면 행복한 시절일지도 모른다. 이 마차에 흔들리면서 이브라힘 강에 도착하였다.
강가에는 이미 마차를 끄는 말이나 당나귀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마차로서는 이 이상 산길을 올라 갈 수 없었기 때문에 이 강가로 오는 마차가 드물었다. 여기서 겨우 당나귀 한 필을 세냈다. 그러나 말 주인이 산으로 가는 길을 잘 모르기 때문에 안내인 한 사람을 또 채용했다.
우리는 이브라힘 강 계곡과 아드니스 계곡을 따라 올라갔다. 우리들 페니키아 부락 사람들의 행렬은, 내가 가운데 당나귀를 타고 있었고 당나귀 옆에 안내인이 섰고, 그 뒤에는 버드나무 회초리를 든 당나귀 주인으로 구성하였다.
당나귀가 자기 소리에 도취하여 연방 멩멩 하면서 콧소리를 내니 앞서 가던 안내인은 소리를 내지 못 하도록 한다. 그는 당나귀 소리를 아주 싫어하는데 그의 산길을 걷는 자연적인 흥을 당나귀가 깨뜨린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연방 당나귀가 소리를 지를 때마다 소리를 내지 못하게 한다. 이렇게 우리는 우리 가문의 보물이 묻혔다고 알려진 분지가 내려다보이는 곳까지 산길을 탔다.
우린 여기서부터 모두가 걸어서 당나귀를 앞세우고 분지에 도착할 때까지 내려갔다. 분지에 닿으면서 우리는 마을 사람들에게 할아버지가 뼈대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이들에게 위엄을 보이기 위해 행렬을 다시 정비했다.
나는 다시 당나귀를 올라타 안내인을 내 앞에 걷게 하고 말 주인은 고삐를 잡게 하여 천연요새인 이 마을에 우리의 위엄을 은근히 돋보이려 했다. 우리 행렬이 할아버지가 산 땅을 경작하고 있는 한 마을 사람 앞에 도착했을 때는 이들이 우리들 두려움으로 맞는 감을 느꼈다. 그러나 그와 처는 암탉을 아랍식으로 배를 가르고 그 고장의 버터를 발라 통째로 구워 내주었다.
마을 사람들이 차례차례 인사를 와서 도시에 사는 그를 친척의 소식, 도중에 올 때 본 뽕나무의 작황, 보리 가격, 비누 가격과 올리브유 시세 등을 물어보고, 심지어는 내가 잘 알지 못하는 소시장 시세까지도 물어본다.
순진하다고 할지, 도시인과는 사고방식이 다른 것을 느꼈다. 하긴 이것이 알고자 하는 인간 본연의 원시적인 표현인지 모르겠고 산마을의 철학적인 웅변인지도 모르겠다.
할아버지의 땅을 관리하고 있는 관리인의 부인은 아직 쑥 냄새가 물큰 나고 있는 원두막 위에 우리의 잠자리를 펴 주었다. 하늘의 별들을 하나 둘 세면서 이 산마을의 공기를 폐부 깊이 들이마시면서 잔다는 것도 마술에 걸린 것 이상으로 나를 잊어버리게 하는 것이었다.
쑥 냄새와 하늘의 별 때문에 좀처럼 잠을 못 이루어 나는 별만 세면서 어느 시인이 깨끗한 레바논의 밤의 천문학 속에서 시상(詩想)을 일으켰다는 말을 회상하면서 밤을 밝혔다.
환상의 날개는 황금빛 꿈으로 물들었다. 내일이면 할아버지 땅의 관리인에게 20년 동안의 수고비로 땅의 얼마를 그의 명의로 변경해주리라. 그리고 나는 나의 조상들처럼 이 산악지방에 집을 짓고 산을 벗삼아 밝은 공기를 마시면서 살리라 등등.
아침이 되자 내 꿈은 무산되었다. 할아버지 땅의 관리인은 처음부터 끝까지 넋두리 투쟁이었다. 관리의 고생이 많다든가, 댓가가 적다는 등이 이유였다.
이 산악지대의 맑은 공기가 탁한 인간의 냄새에 의해 더럽혀지고 내 아름다운 꿈이 부숴져버린 체 실망을 느꼈다.
할아버지여! 당신께서는 이 고장을 그리워하면서 땅을 사 놓았는데 자손인 내가 그 관리인의 불평을 듣고 이곳을 도시의 연장, 생활의 한 끝으로 서로 얽메어야 하는 것을 아시지요? 나는 그에게 할아버지의 땅을 2년 후에 모두 넘겨주겠다고 했다. 그가 나한테 넋두리를 털어 놓지 않았으면 내 스스로가 기꺼이 이 일을 처리했을 텐데 하고 속으로 쓴 약을 마시듯이 입맛을 다시면서------.
다시 올 때처럼 당나귀를 올라탔다. 천연 그대로의 환경도 인간의 조그마한 감정 변화에 따라 느낌이 달라지는 것 같다. 올 때 가슴 속 깊이 마시던 깨끗한 공기도 갈 때에는 그 관리인의 입김이 섞인 것 같아서 불쾌감 마저 든다. 인간이 물들지 않은 자연 그리고 공기는 어디에서 찾을까?
당나귀는 여전히 소리를 지를려 하고 안내인은 이를 막기에 여념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