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정원을 거닐다'
달은 가장 오래된 시계다/ 덕수궁 미술관(5.28~7.4:전시종료됨)
전시에 대해서는 http://www.moca.go.kr/exhibition/exhibitionManager.do?_method=exhView&retMethod=getExhProgressList&tpCd=&exhId=201003170002819 참조
국립현대미술관의 이벤트 당첨으로 오랫만에 현대 미술 전시인 '달은 가장 오래된 시계이다'를 보러 덕수궁 미술관에 다녀왔다.
전시는 크게 네 섹션으로 나누어서 '강-시간이 흐르듯', '물-시간이 번지듯', '달-시간이 차고 기울고 차듯' '끈-시간이 이어지듯' 이렇게 은유적인 주제를 형상화하고 있었는데, 주제에서도 느껴지듯 대부분의 작품은 차분하고 은유적인 동양적 관조미(觀照美)를 내포하고 있었다.
첫 번째 섹션이었던 '강-시간이 흐르듯'에서 처음 만난 작품은 이번 전시에 출품된 작품들 중에서도 가장 마음에 든 작품 중 하나였던 '흔들림,문득-공간을 느끼다'(김호득, 2009)였다. 마치 벼루를 연상케 하는 거대한 검은 얕은 (그러나 그 위로 얼굴을 드리우면 한 없이 깊음을 느끼게 하는) 수조위에 커다란 한지가 일정한 폭과 규칙적인 높낮이의 차이를 보이며 드리워져 있었는데, 수조 뒷쪽의 물구멍에서 조용히 물이 흘러 물결이 아주 잔잔하게 일렁이고 그 물결의 일렁임과 한지의 그림자가 겹치면서 전시장의 흰 벽에 그림자를 드리우는 것이 작품 자체뿐만 아니라 무척 인상적이었다. 이것은 어찌 보면 설치 작품만이 직접 작품과 조우(遭遇)한 관객에게만 줄 수 있는 공간성과 시간성을 느끼게 하는 점이 아닌가 싶다. 그래서 이번 전시에서는 작품 자체도 인상 깊었지만, 오브제의 그림자(이 역시 시간이 흐름을 극명하게 느낄 수 있는 예 아니겠는가!)도 작품 못지 않게 내게는 중요했다.
두 번째 섹션이었던 '끈-시간이 이어지듯'에선 뭐니뭐니해도 함연주의 올(All이라는 의미 뿐만 아니라 실이나 줄을 세는 단위인 그 '올'을 의미하는 것 같기도 하다. 실제로 이 작품은 머리카락으로 만들었으니)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마치 거미줄을 치듯 머리카락을 엮어 거기에 거미줄에 이슬이 맺히듯 투명 에폭시레진을 묻혀 여인의 베일처럼 만들어 너울너울 천장에 달았는데, 처음에는 그저 낚싯줄 같은 것으로 만들었으려니 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다가 머리카락으로 만든 것을 알고 깜짝 놀랐다. 이 작품에 대해서는 2층 벽에 영사기를 비춰 상영된 작가들과의 인터뷰에서 중요한 힌트를 얻었는데, 작가는 원래 과거에는 내 신체의 일부였던 소중한 부분(머리카락)이었으나 지금은 빠져서 버려야 할 것을 다시 작품으로 만들어 가치 있게 되돌린다고 하면서, 낚싯줄 같은 재료로 만들면 작품에서 에너지가 안 느껴진다고 했다. 그 말을 들으며 나는 작가가 마치 무당 같다고 느껴졌다. 본래 창작은 어느 정도의 神氣를 동반하는 일(특히나 미술쪽에선!)이긴 하지만, 이제는 오래되어 잊혀지다시피 한 과거의 원초적인 제의(祭儀)가 현대에서는 이런 식으로 변형되어 계승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김홍주의 무제 2009 연작은 첫 작품은 조지아 오키프의 작품을 연상케하는 거대한 꽃 그림이었고(미리 아는 것이 선입견을 갖는 죄?), 나머지 작품들은 산수화를 연상케하는 선의 흐름을 보여주었다. 희한하게 이 작품들을 보면서 왠지 모르게 박수근의 작품들이 생각났는데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소담하고 정적인 분위기 때문에?
존 배(John Pai)의 강의 시선(A river's gaze, 2009)에서도 작품의 그림자와 관객의 그림자가 겹치면서 그 순간, 그 공간만이 줄 수 있는 작품과 관객과의 한 순간의 접점(接點)이 생겼었는데, 사실 이런 느낌은 말로는 설명할 수 없다. 그저 작품과 대면하고, 작품을 주의 깊게 응시하고, 뛰어들고, 느껴보란 말 밖에...
'물- 시간이 번지듯' 섹션의 작품들은 대체적으로 기존 화풍을 답습한 듯한 작품들이 많아 그닥 인상적이지 않았으나(너무 구태의연한 발상이랄까?) 한은선의 '너른 문으로 가는 길'(2008)은 마치 여자의 생식기를 연상케하는 그 무엇이었다. 의도적이었는지, 아니면 나만 그렇게 느꼈는지는 모르겠으나 물과 달, 여자, 태아를 감싸고 있는 양수(羊水)가 모두 '태초의' 시간과 최고로 밀접하게 관련 있다는 점을 생각해 볼 때 한 번 쯤 짚고 넘어가 볼 만한 점이라고 생각했다.
마지막 섹션인 '달-시간이 차고 기울고 차듯'에서는 이 전시의 제목을 차용해 온 백남준의 '달은 가장 오래된 텔레비전이다'(1065-1967)이 설치되어 있었는데, 과연 그러고도 남을만큼 전시의 대표적인 상징성을 띠고 있는 작품이었다. 개인적으로 백남준의 국내에 있는 작품들은 어지간한 작품을 다 봤다 싶을만큼 많이 보았는데, 나는 정말 백남준의 작품들이 너무 좋다. 백남준이 활동했던 바로 그 시대만이 줄 수 있는 그 특유의 색감과 지금에 와서는 촌스럽게 느껴지는 사각 브라운관이 주는 물성(物性)까지 말이다. (백남준의 작품을 LCD나 PDP로 상영한다고 생각 해 보면...으~ 속된 말로 '분위기 확 깰 것이다') 설치 작품 뿐만 아니라 나를 감탄하게 했던 작품은 동판화 중에서 주역의 64괘를 찍은 '역경(易經)'이었고(백남준이 추구하고자 했던 것은 한 마디로 'flexible zen'이 아니었을까? ㅎㅎ) '토끼와 달'(1988)은 예전에도 많이 보았던 작품이었지만 다시 TV수상기 나무상자 안 달 위에 앉은 도자기 토끼 양쪽 귀에 달린 안테나를 보면서 어쩌면 작가는 굉장히 천진했던 사람이 아니었을까- 그 귀여운 발상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전시의 마지막을 장식하고 있던 것은 강익중의 '강을 지나서'(2008-2010)라는 거대한 설치 작품이었는데, 마치 명기(明器: 무덤에 묻던 그릇 모양의 미니어처)를 연상케하는 작은 미니어처 달항아리(직경 5cm?)수십개가 바닥에 놓여 있었고, 그 위로 마치 눈밭에 찍힌 발자국처럼 짚신들이 다리(橋) 모양으로 매달려 있었다. 마치 허공을 건너는 자의 자취가 남은 것 같기도 했고, 또한 명기(明器)를 연상케 하는 달항아리 때문인지, 아님 제목 때문인지 삼도천(三途川)을 건너는 망인(亡人)의 발자욱 같기도 했다. 하긴 비단 이승에서만 시간이 흐르랴...저승에서도 시간이 흐르는 것은 마찬가지일테니, 현세에서의 시간 뿐만 아니라 다리를 건너 저 세상에서의 시간까지 아우르는 말 그대로 '차고 기울고 다시 차는' 강익중의 작품으로 전시를 마무리한 것은 매우 좋은 기획이라 생각했다.
이 번 전시는 기존의 국립현대미술관의 기획전시와 비교해 보았을 때 눈이 번쩍 뜨일만큼의 신선한 기획이 돋보이는 전시는 아니었으나, 큐레이터의 말 마따나 정신없이 시간이 흘러가는 도시의 한 복판 속에서 그 보다 더한 시간들을 켜켜이 쌓은 고궁 안에서 관람객들이 시간의 정원을 거닐며 침묵에 잠기고, 발길이 조금은 느려지기엔 충분한 전시였다.
첫댓글 하는 일 없이 정신없는 요즈음이라 문화생활은 많이 뒷전이네요...제가 한때 친구들 사이에선 '문화부장'이었습니다만...^^ '달은 가장 오래된 시계다'라는 전시제목을 보며, 전 왜 갑자기 살바토르 달리의 'persistence of memory'가 생각나는지요..전시의 내용과 상관없이, 어떤 개인적 이메이지때문인가 합니다. 단골극장 '씨네큐브'가 문을 닫는다는 뉴스에 가슴아파하고, 씨네큐브를 가노라면 늘 보곤하던 강익중의 '아름다운 강산'등등...새삼 서울시내, 제가 혼자 즐기던 나만의 '문화의 場'이 몹시 애틋하게 느껴지는 밤이네요..이젠 제주에서 구석구석 찾아다닐까 합니다..^^
제주에서 또 좋은 문화적 향취를 느끼신다면, spo카페에도 올려주세요~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덕수궁현대에서 그런 전시했었군요. 아쉽네요. 요즘 볼 전시도 너무 많아서...마리솔 님은 음악뿐 아니라 전시도 열심히 다니시나봐요. 저도 김홍주 그림 좋아합니다. 지난번 국제에서 개인전했었는데 은은한 색의 세필로 그린 커다란 나뭇잎 하나 갖고 싶었습니다. 그의 그림은 아주 명상적인 면이 있습니다. 제가 자주 보는 곳에 걸어놓고 싶었는데 너무 비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