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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수사의 본찰인 대한불교 조계종 제14교구 본사인 금정총림 범어사에 대해 우리 같이 알아 보도록 합시다🙏
범어사 개요
대한불교조계종 제 14교구본사 금정총림 범어사(梵魚寺)는 신라 문무왕 18년(678)의상(義湘)대사가 당나라 유학에서 돌아와 영주 부석사에 이어 화엄십찰(華嚴十刹)의 하나로 화엄경(華嚴經)의 이상향인 맑고 청정하며 서로 돕고 이해하고 행복이 충만한 아름다운 삶을 지상에 실현하고자 하는 화장(華藏)세계의 구현과 왜구를 막는 호국(護國)사찰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창건된 사찰로 11개의 산내암자와 2백여 개의 산외말사를 거느리고 있으며 통도사, 해인사와 함께 영남 3대 사찰 중 하나로 자리잡고 있다.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동국(東國)의 남산에 명산이 있어서 그 산정에 높이 50여 척의 거암(巨岩)이 있고, 그 바위 한가운데 샘이 있으며 그 우물은 항상 금색이며 사시사철 언제나 가득 차 마르지 않고, 그 우물에는 범천으로부터 오색구름을 타고 온 금어(金魚)들이 헤엄치며 놀았다. 그래서 산명을 금정산(金井山)이라 하고, 절을 범어사(梵魚寺)라 한다.''고 하였다.
범어사는 창건 이후 고려와 조선 중엽에 이르기까지 그 면모를 유지해 오다가, 조선 선조 25년(1592년) 임진왜란의 병화를 만나 모두 소실되어 10여 년 동안 거의 폐허나 다름이 없었는데 선조 35년(1602년)에 관(觀)선사가 중건하였으나 얼마 있지 않아 또 화재로 소실되고 말았다. 그 후 광해군 5년(1613년)에 묘전(妙全)화상과 그 문도들이 대웅전, 용화전, 관음전, 나한전, 일주문, 심검당(현 원주실)을 건립하였다. 또한 1684년에는 해민(海敏)화상이 비로전을, 1700년에는 명학 화상이 팔상전, 종루, 불이문, 보제루, 천왕문을 건립하였다. 이후에도 사세의 확장에 따라 크고 작은 개수 및 중수를 거듭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호국 사찰로서 임진왜란 때는 서산대사께서 범어사를 사령부로 삼아 승병활동을 한 곳으로 유명하며 구한말(舊韓末)에는 선풍(禪風) 진작을 통한 민족불교운동의 구심점으로서 선찰대본산(禪刹大本山)이 되었고, 3.1독립만세운동 때는 범어사 학림의거를 주도하였고 전국에서 사용할 태극기를 이곳 암자에서 만드는 등 항일운동을 펼쳤다.
범어사는 역사적으로 많은 고승대덕을 길러내고 선승을 배출한 수행사찰로 오랜 전통과 많은 문화재가 있는 곳이다. 의상대사를 비롯하여 원효대사.표훈대덕.낭백선사.명학스님과 그 대에 경허선사.용성선사.성월선사.만해 한용운선사.동산선사 등 고승들이 수행 정진하여 명실상부한 한국의 명찰로서 그 역사적 의미를 지닌다.
1950년대에는 동산(東山)대종사가 주도한 불교정화운동의 중심지로서 한국근대불교에 큰 족적을 남겼으며 2000년대에 접어들면서 조사스님들의 뜻을 받들어 수행공간을 지속접으로 확충하였고, 사부대중의 수행 정진과 화합을 바탕으로 2012년 11월 총림으로 지정되었다. 지유대종사를 초대방장으로 모시고 부산과 영남 지역은 물론, 우리나라 불교의 중심 '선찰대본산 금정총림' 으로 자리매김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범어사에는 일주문(보물 제 1461호), 삼층섭탑(보물 제 250호), 대웅전(보물 제 434호), 목조석가여래삼존좌상(보물 제 1526호), 금강요집경(보물 제 1525호), 주범망경(보물 제 894-2호), 불조삼경(보물 제 1224-2호), 삼국유사(보물 제 419-3호)보물 8점과 당간지주(부산광역시 지방유형화재 제 15호), 석등(제16호), 백의관음도(제53호), 금고(제5호), 사천왕도(제51호), 대웅전 석가영산회상도(제67호), 대웅전 삼장보살도(제68호), 대웅전 재석신중도(제69호), 목조관음보살좌상(제70호), 목조비로자나삼존불좌상(제71호), 목조미륵불좌상(제72호), 미륵전섭조연화대좌하대석(제73호), 팔상독성낭산전(제63호)등 많은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다.
☆ 낭백스님(낙안스님)-설화
낙안 스님은 흔히 낭백수좌(浪伯수座)혹은 만행수좌(萬行首座)라고 불린다. 일찍이 범어사에 출가하여 부지런히 수행하였으며, 특히 보시행을 발원하여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다 남을 위하여 이바지하였다.
그리고 스님에게 특기할 만한 일은 커다란 원력을 세워서 생을 거듭하면서까지 그 원력을 이룩한 사실이다. 이런 이야기가 전하여 지고 있다.
이 나라에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건국되면서 융성하던 불교가 쇠망하기 시작한다. 조선시대의 배불승유(排佛乘儒) 정책이 빚은 불교의 폐해는 필설로 이루 다 형언할 수 없다. 조선 중엽에 이르러 불교의 박해는 그 극에 달하는데, 승려들을 핍박하기 위하여 일개 사찰에 부여된 부역의 수가 무려 30종에서 40종에 이르렀다고 하는 기록이 전한다. 종이, 붓, 노끈, 짚신, 새끼, 지게 등 그리고 특수 곡물 등 온갖 농작물에 이르기까지 범어사에 철마다 부여된 부역의 수만도 36종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 무렵의 승려들은 자신들의 공부는 전혀 돌아볼 겨를도 없이 오로지 일생을 나라에서 부과된 부역에 종사하기도 바쁜 나날이었다.
낭백 스님은 이러한 당시의 사정을 뼈아프게 개탄하시고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이 부역만은 면하고 살아야겠다고 결심하기에 이르렀다. 설사 금생에 안되면 내생에라도 부역을 면하고 마음껏 공부할 수 있게 하리라 마음먹고 원력을 세웠다.
''금생에는 복을 많이 지어서 내생에는 나라의 고급관리가 되리라.그리고 그 관리의 특권으로 범어사 스님들의 부역을 혁파하리라'' 하고,
그 날부터 힘이 닿는 대로 복을 짓기 시작하였는데, 지금의 기찰 부근 그러니까 동래를 들어가고 나가는 길목에 큰 소나무 밑에 샘물을 파서 행인들의 식수를 제공하고, 넓은 밭을 개간하여 참외, 오이, 수박 등을 심어서 지나가는 행인에게 무한정 보시하였으며, 그런 여가에 짚신을 삼아서 모든 인연 있는 사람들에게 신을 보시하는 등 온갖 일로써 많은 사람을 구제하시다가 마지막 늙은 몽뚱이까지도 보시하고자 돌아가실 때에는 범어사 뒷산 밀림 속에서 삼일동안 헤매다가 굶주린 호랑이에게 먹히는 바 되었다고 한다.
스님은 돌아가시기 전에 스스로 숙명통, 천안통을 못하였으므로 세 가지의 증명할 일을 남겨 놓기로 하였다. 나라의 고급관리가 되어 올 때에는 모든 관리가 일주문 앞에서 말에서 내리는데 자신은 어산교앞에서 내리겠으며, 자신이 쓰던 방을 봉해 두었다가 스님 스스로가 열 것이며, 사찰의 어러움을 들어서 해결할 것을 약속하리라 라는 것이었다.
이후 많은 세월이 흘러 낭백 스님의 그 눈물겨운 원력이 성취될 날만을 가다리던 어느날, 순상국(巡相國)이라는 중앙의 높은 벼슬을 지내는 사람이 온다는 전갈을 받고 범어사 스님들은 언제나 지방관리가 와도 그러했듯이 주지스님 이하 모든 대중들은 어산교까지 나가서 행렬을지어 부복하고 기다렸던 것이다. 이 사람은 반드시 일주문까지 말을 타고 올라가는 상례를 깨고 어산교 앞에서 말에서 내리는 것이다. 그리고 사찰을 자세히 돌아본 뒤 수 십 년 동안 봉해둔 낭백스님의 방 앞에 와서는 기어이 문을 열라하여 봉함을 뜯고 열어보니, 개문자시폐문인(개문자시폐문인)이란 스님의 진필유묵이 몇 십년의 세월속에 얼룩져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주지스님의 차대접을 받으면서 사찰의 어려움을 묻고 36종의 부역을 혁파해 줄 것을 약속하고 돌아가서 그 즉시 동래부사에게 명하여 시행하게 되었다고 전한다. 그 증거로써 지금 어산교에서 500~600m 정도를 아래로 내려가면 옛날에 사용하던 길옆에 몇 개의 비석이 있는데 그 중에서 '순상국조공엄혁거사폐영세불망단(巡相國趙公嚴革祛寺弊永世不忘壇)이라는 비가 그것이다.
순상국 조공은 스스로 낭백 스님의 후신이라고 한 일은 없다.그러나 그 분은 낭백 스님의 원력을 성취시킨 사람이므로 낭백 스님의 환생임에 틀 림없다.
범어사의 소니무
비석군 내의 순상국 조공 불망비
부도전 내의 낭백스님(낙안당)부도탑
1. 당간지주(幢竿支柱)
(부산광역시 지방 유형 문화재 제 15호)
당간지주는 사찰 입구에 설치하는 것으로,
도량의 경계를 표시하거나 절에 행사가 있을때 이곳에 당이라는 깃발을 걸어둔다. 깃뱔을 다는 나무, 철 등으로 밀들어진 길쭉한 장대를 당간이라 하며, 당간을 양 옆에서 지탱해 주는 한 쌍의 돌기둥을 당간지주라 한다. 드물게 당간이 있으나 범어사를 비롯한 대부분의 사찰에는 두 기둥만 남아있다.이 당간지주는 고려시대 말기 또는 조선시대 초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현재 기단(基檀)부와 당간의 받침돌(竿石)이 모두 사라지고 양쪽의 두 기둥(지주)만 남아 있는 상태이다.
2. 일주문(一柱門)
(보물 제 1461호)
일주문은 주 법당에 도착하기 전에 거쳐야 하는 세 가지(혹은 네 가지) 산문 중 첫 번째 문으로 일직선상의 기둥 위에 맞배지붕을 한 독특한 양식으로 되어있으며 기둥이 일직선상에 한 줄로 되어 있어 일주문이라 하며 이는 수행자의 일념(일심)을 상징한다.우리가 사는 중생의 세계와 부처님의 세계를 구분 짓는 곳으로서 문밖을 속계(사바세계) 문 안을 진계(부처님 세계)라하며 일주문을 넘어서는 그 순간 온갖 번뇌와 망상을 여의고 깨달음을 향한 일념(일심)으로 들어서는 문이다.따라서 우리는 오로지 진리를 구하는 마음으로 이 문을 들어서야 하며 이 문 앞에서는 합장 반배를 한다.
일주문은 기둥 4개가 한 줄로 늘어선 3간의 구조(一柱三間)인데 이는 법화경의 회삼기일 사상 즉 중생의 바탕과 능력에 따라 성문(聲聞) 연각(緣覺) 보살(菩薩) 로 나누어진 불교의 여러 교법을 오직 성불을 지향하는 일불승(一佛乘)의 길로 향하겠끔 한다는 사상적 의미가 담겨있다.
범어사 일주문은 1614년 묘전화상이 처음으로 창건하였다. 숙종44년 1718년 명흡(明洽)스님의 주관으로 높이 1.45m의 배흘림 석주로 개조하였으며 1781년 이 석주 위에 짧은 두리나무 기둥을 세우고 다포식의 공포위에 겹처마 맞배지붕을 얹어 현재 한국에서 가장 독특하고 아름다운 문으로 중건하였다.
세 개의 문 위에는 각각의 편액이 걸려있는데 가운데 '조계문(曹溪門)' 이라는 작은 편액은 석가모니 부처님으로부터 마하가섭 존자 달마대사 육조 혜능 대사의 법맥을 이은 조계종 사찰임을 나타내는 일주문의 명패이며 오른쪽 '선찰대본산(禪刹大本山)'이라는 편액은 범어사가 선종의 으뜸 사찰임을 알려주고 있으며 왼쪽의 '금정산범어사(金井山梵魚寺)'는 산명과 사명을 밝힌 것이다.
범어사 조계문(일주문)에 걸려있는 좌우의 두 편액은 조선후기 '성균관대사성' '전라도 관찰사' '규장각 직제학' '홍문관 제학' '이조판서' '예조판서'를 지냈으며 한말 의정부 참정과 탁지부 대신을 지냈고 대한제국 수립 후 '법부대신' '탁지부 대신'을 지낸 해사 김성근 선생(1835~1919)의 필적인데 그는 서재필 박사의 외숙이기도 하다.
편액의 관지를 살펴보면 오른편에 ''壬子小春下浣(임자소춘하완)''이라 쓰여 있는데 소춘은 음력 10월이며 하완은 하순이니 임자년(1912년) 시월 하순을 뜻한다. 1912년10월15일 조선 총독부로부터 ''선찰대본산''이란 종지를 인가 받았음을 뒷받침하는 사실이기도 하다.
왼편 ''七十八翁海鹵堂(칠십팔옹해로당)''은 해로당이 78세 때 관서했음을 말한다. 해사 김성근 선생은 국권을 침탈 당한 1910년 이전에 海士로 이후에는 해로당으로 낙관하였는데 여기서 ''로''는 소금鹵(로)의 속자로 ''염전'' ''척박한 땅'' ''포로의 땅''을 뜻하는 글자인데 선생의 빼앗긴 땅의 아픔을 이렇게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3. 천왕문(天王門)
천왕문은 일반적으로 사찰의 두 번째 문이며, 불법을 수호하기 위해 네 방위를 지키는
사천왕을 모신 곳으로 구도자가 일주문을 통과하면서 지녔던 일심이 수많은 역경과 유혹 등에 의해 심신이 지칠 대로 지쳐있는 상황에서 다시 한 번 힘을 내어 수미산 정상까지 포기하지 말고 오를 수 있도록 격려하며 선을 정려하고 악을 물리치는 역할을 한다.
사천왕은 수미산 정상인 도리천의 재석천왕을 섬기며 아래로는 팔부중을 거느리고 불법과 불법에 귀의하는 자들을 보호하는 역할을 하는데 원래는 고대 인도의 토속신 왕들 이었으나 부처님의 법문을 듣고 불법에 귀의하였다고 한다.
숙종 25년 1699년에 전면 보수하였으나 2010년12월15일 방화로 전소되었다. 2012년3월23일 복원불사 회향및 사천왕상 봉안법회를 열었는데 현재의 모습은 1964년 재건 당시의 설계를 토대로 복원된 것이다.
☆천왕문 주련
재석천왕혜감명(宰釋天王慧監明)
재석천왕의 지혜는 밝게 빛나니
사주인사일념지(四州人事一念知)
세상사를 한 생각에 알도다
애민중생여적자(哀愍衆生如赤子)
중생을 친자식처럼 가엾게 여기니
시고아금공경례(시고아금공경례)
그러므로 나 이제 공손히 예를 올립니다.
동방 지국천왕(비파) 남방 증장천왕(칼)
서방광목천왕(용.여의주)북방다문천왕(창.보탑)
동방 지국천왕은
불법으로써 중생을 보살피고 국토를 지키므로 지물을 비파를 들고 있으며
남방 증장천왕은
자신의 덕망으로 중생에게 지혜를 증장시키고 번뇌를 제거하므로 지물은 칼을 들고 있고
서방 과옥천왕은
눈을 크게 뜨고 중생들의 선.악 행위를 살피어 선행은 여의주로 보상을 하고 악행은 용으로 다스린다고 한다.
북방 다문천왕은
도량을 지키면서 항상 법문을 들으며 모든 중생을 열반으로 인도하므로 열반(니르바나)의 상징인 보탑을 들고 있다.
그러므로 천왕문을 통과 할 때는 탐욕과 분노 어리석은 마음의 삼독심을 버릴 수 있도록 계율과 고요한 마음, 지혜를 구하고자 하는 다짐을 하여야 한다.
4.불이문(不二門)
주 법당을 도달하기 전 통과해야 할 사찰의 마지막 문 불이문은 해탈문, 안양문, 자하문, 진여문이라고도 한다.
불이不二란 있음과 없음 삶과 죽음 선과 악 세간과 출세간 등 법계의 실상이 둘이 아니며, 양극단에 치우치지 않는 중도적 관점을 뜻한다.
즉,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홀로 존재 하는 것이 아니고 서로 관련되어 있으니 존재하는 모든 법은 실체가 없는 제법무아를 의미하기도 한다.
숙종 20년(1694)에 자수自修장로가 창건했으며, 2012년 보제루菩濟樓를 대대적으로 중창할 때 철거한 후 다시 지었다.
가운데 어칸 좌우 기둥에는 서산대사가 지어신 선가귀감에 나오는 구절을 동산東山 대종사가 직접 쓰신
'신광불매만고휘유神光不昧萬古輝猷'와
'입차문래막존지해入此門來莫存知解'라는 주련이 걸려 있다.
신광(신령스러운 빛: 부처님의 가르침)의 오묘한 뜻을 알기 위해서 이 문을 들어서면서부터
분별심(세속의 알음알이)을 내지말아야 한다는 뜻으로 산사山寺에 들어서는 마음 자세를 지적한 것이다. 이문을 통과 함으로써 명실공히 사파를 떠나 정토애로 통하는 길이 열리는 것이다.
불이문의 주련
5.보제루(菩濟樓)
보제菩濟란 널리 중생을 제도한다는 뜻처럼 보제루는 많은 대중들을 위한 법회용 건물로 사용된다. 흔히 이러한 중정누각中庭樓閣은 대웅전大雄殿 앞마당 입구의 축대에 걸쳐서 벽체가 없는 2층 별서식別墅式으로 짓지만, 이후로는 법회를 여는 강당으로 사용하면서 벽체를 친 경우가 많다.이 건물도 숙종26년(1700)자수自修장로가 별서식 누각으로 창건했으나 순조12년(1812) 중건 때 단층으로 바뀌었고, 일제 강점기에는 벽체가 쳐지고 일본식으로 일부 변개되었다. 2012년에 전통법식으로 복구하기 위해서 대대적인 중창공사로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
한편 범어사 보제루는 보살계, 사미계, 비구계 등을 수계하는 금강계단金剛戒檀으로 사용된다.
6.종루(鐘樓)
종루鐘樓는 부처님의 진리를 중생에게 전하고 교화하기 위하여 소리와 관련된 불전사물佛殿四物(지옥과 천상의 중생을 위한 범종梵鐘, 축생을 위한 법고法鼓, 물고기를 위한 목어木魚, 날짐승을 위한 운판雲版)을 봉안하는 전각이다.
숙종 26년(1700)명학明學대사가 보제루를 지으면서 종루를 대웅전大雄殿앞마당 왼편으로 옮겨 지었다가 일제 강점기에 현재 위치로 옮겨서 지금에 이른다.
범종은 조석 예불과 사찰에 큰 행사가 있을 때 울리는 것으로, 지옥과 천상에 있는 중생들을 구제하며 새벽에는 28번(마하가섭존자 부터 중국 보리 달마대사까지 28대 조사, 또는 욕계, 색계, 무색계의 28천을 상징) 저녁에는 33번(욕계 2천의 도리천 정상33천을 상징)을 친다.
☆범종의 연뢰와 연곽 : 범종의 표면에 9개의 연뢰 4방향의 연곽은 사생 구계를 상징한다.
사생四生 : 태생, 난생, 습생, 화생의 탄생방법
구계九界 : 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 인간, 천상, 성문, 연각, 보살의 세계.
상부의 용뉴는 불계(부처님의 세계)를 상징
법고는 법을 전하는 북으로 북소리가 축생들의 마음을 울려 일심을 깨우치게 하는 것으로 북의 가죽은 암소와 수소의 각죽을 각기 양면에 부착하여 음양의 조화를 상징한다.
목어는 물에 사는 중생들을 구제하기 위하여 치는 것이며 또한 수행자들로 하여금 물고기처럼 늘 깨어있는 상태에서 부지런히 정진해야 된다는 의미도 가진다.
운판은 공중을 날아다니는 조류나 허공을 떠도는 영혼들을 천도하기 위하여 치며 청동으로 된 판을 구름 모양으로 만들어 운판이라고 한다. 선종의 사찰에서는 재당齋堂이나 부엌에 달고 대중에게 끼니 때를 알리기 위하여 울리는 기구로도 사용된다.
7. 영주선제(瀛州禪齊)
옛 부터 금정산은 산세가 좋아 신선들이 살던 곳으로 그 경치와 절경을 자랑해 왔습니다. 그래서 금정산을 영주瀛州라 했으며 신선들이 사는 곳이라 하였습니다. 영주선제瀛州禪齊도 신선사상과 불교의 만남을 의미하며 대문을 들어서면 청풍당 또는 금어선원金魚禪院이라고 하는 선원이 있으며 스님들이 마음을 깨닫고자 정진하는 수행처로 옛부터 훌륭한 선사들이 거쳐 갔으며 경허 스님과 동산 스님께서 오랫동안 주석하시면 선풍을 진작 시킨 곳이다.
☆ 문 손잡이가 거북이 모양을 하고 있는 것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동화 토끼와 거북이의 내용에서처럼 선 수행은 끊이없이 정진함을 의미하기 위해서이다.
☆십우도十牛圖 : 범어사 율원 벽화임
선禪의 수행단계를 소와 동자에 비유하여 도해한 그림을 말하며 여기서 소는 수행자의 마음을 동자는 수행자를 의미하며 우리나라에는 중국 송나라 때 보명스님의 목우도와 곽암스님의 심우도에서 비롯되어 조선시대까지는 이 두 종류의 그림이 함께 그려졌으나 최근에는 곽암스님의 심우도가 법당벽화에 주로 그려지고 있다. 현재 범어사에는 율원의 벽화가 곽암스님의 심우도이다.
심우도는 소를 찿는 과정을 단순하게 그리고 있는 것 같지만 그 이면에는 인간의 본성을 찿아 깨달음의 세계에 이르는 깊고 심오한 선종禪宗의 사상을 담고 있다.
8. 미륵전(彌勒殿)
목조미륵여래좌상
(부산광역시 지방 유형 문화재 제 72호)
미륵전은 석가모니 부처님으로부터 수기를 받아 미래 세상에 출현할 부처님인 미륵불(彌勒佛미륵은 자비로운 사람이라는 뜻)을 모신 전각으로서 미륵불은 56억7천만년 후 용화수龍華樹나무 아래서 성불하여 중생들을 널리 구제할 부처이다.
그러므로 미륵전은 용화전(龍華殿), 자씨전(慈氏殿)이라 부르기도 한다. 협시보살로서 법화림보살과 대묘상보살(김제 금산사)또는 묘향보살과 법륜보살을 모시기도 하지만 범어사에는 아미타수인을 한 목조미륵불상 한 분만 모셨으며 후불탱화는 아미타삼존불도이다.
범어사 미륵전에 모셔진 미륵부처님은 다른 전각의 부처님과 달리 서쪽을 향하고 있는데, 이는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던 미륵전 밑을 파보니 미륵부처님께서 일본을 등지고 않아 있어 그대로 안치하였다고 한다. 의상義湘대사의 사찰 창건 때부터 있었던 건물로,임진왜란으로 소실된 후 숙종9년(1683) 해민海敏대사가 중창하였고, 경종원년(1721)진열進悅스님 등이 중수 했다.
목조미륵불상과 석조연화좌대하대석은 각각 부산시 지정 유형문화재 72호, 73호로 지정 되었다.
9. 비로전(毘盧殿)
비로전은 진리 그 자체를 뜻하는 법신불(法身佛), 즉 비로자나불毘盧慈那佛(비로자나는 태양처럼 널리 비추는 분이라는 뜻)을 모신 전각이다. 본전일 경우 대적광전大寂光殿 또는 대광명전大光明殿이라 하며 이때는 좌우 협시불로 노사나불과 석가모니 부처님을 모시며, 비로전, 화엄전으로 불릴경우 좌,우 협시보살로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을 모신다.
수인은 지권인智券印이며 이는 이理와 지智, 중생과 부처, 생生과 사死, 어리석음迷과 깨달음悟이 본래 둘이 아니라는 것을 상징한다.
후불 탱화는 화엄경변상도이다.
☆ 지권인智券印 은 좌우 두 손의 엄지를 손에 넣고 주먹을 쥔 다음 왼손의 검지를 펴서 바른손으로 감싸쥐고, 바른손의 엄지와 왼손의 검지 끝을 서로 맞대는 손모양으로 이때 바른손은 불계, 왼손은 중생계를 상징한다. 즉, 무명과 번뇌를 부처님의 지혜로써 감싸는 형국으로 부처와 중생은 둘이 아니요 미혹과 깨달음이 아니라는 불이의 중도, 연기법을 상징하는 것이다.
비로자나삼존불상은 부산시 지정유형문화재 제71호이다.
10. 심검당尋劍堂
검劍은 지혜慧를 상징하는 말이며 심검당은 지혜를 찿는 집이란 뜻으로 원래는 초심납자들의 선바미었으나 사찰 규모가 커지면서 선방의 기승은 금어선원으로 옮기고 지금은 원주실로 사용하고 있다.
뒤쪽으로 들어가면 승가대학 강원과 범종각이 있다.
11. 석등石燈
석등石燈은 흔히 불전佛殿앞마당에 등불을 안치하는 일종의 공양구供養具이다. 불교에서 등불은 중생의 어리석음을 다스리는 지혜를 상징하며, 이를 밝히는 것은 공양 중에서도 으뜸으로 여겼으므로 일찍부터 석등을 제작했다. 석등은 조명시설로서뿐 아니라 신앙심을 일으키는 조형물로서 다양한 형식이 있다. 범어사 석등은 연꽃잎을 새긴 상, 하대석 위에 화사석火舍石과 옥개석屋蓋石을 올린 팔각당八角堂형식으로 삼층석탑과 비슷한 통일신라말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석등에 있는 네개의 창은 사성제의 진리를 팔각은 팔정도를 의미한다.
본래 미륵전 앞에 있던 것을 일제 때 심검당 앞에 종루를 옮길때 현 위치로 옮겨졌다.
부산광역시 지정 유형문화재 제 16호 이다.
12. 삼층석탑三層石塔(보물 제250호)
석탑石塔은 불사리佛舍利 신앙을 바탕으로 발생한 불교 특유의 조형물로서 흔히 대웅전大雄殿 앞마당의 자오선상에 일탑一塔 또는 쌍탑雙塔으로 배치된다.사리는 부처님의 열반 후 다비茶毘의 과정에서 나온 구슬 모양의 유골로서 진신사리眞身舍利라고도 하며, 이를 봉안하는 탑도 불전 내의 존상尊像처럼 신앙의 대상이 되고 있다. 초기불교에서는 신앙대상의 중심이었으나 불상이 조성되면서 신앙의 대상이 불상으로 바뀌었다.
최초 부처님의 사리를 봉안한 8개의 탑을 근본 8탑이라고 하여 사리가 들어있었던 병을 병탑, 남은 재를 봉안한 회탑을 포함하여 근본 십탑이라 부른다.
범어사 삼층석탑은 높이가 4m에 이르는 규모가 작고, 옥개석과 받침, 면석과 우주등이 간소화되었고 이중 기단 위에 돌로 만든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석탑 양식이다. 아래층 기단(基壇, 밑받침)은 각 면에 3구씩의 안상을 조각하였고, 윗층 기단은 각 면석에 꽉 들어차게 안상 한 구씩을 조각한 수법이 특이하다. 탑 중간의 탑신부는 1층 탑신에 비해 2층부터 매우 작게 줄였으며, 옥개석은 평평하고 얇아 신라 하대의 석탑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탑의 위쪽 부분인 상륜부相輪部는 노반(露盤, 이슬받이)이 거꾸로 놓여 있고, 후대에 보충한 보주寶珠만이 있을 뿐 다른 부분은 없어졌다.
기단부 아래의 석단과 주위 난간은 일제강점기에 보수 할 때 설치 하였으나, 2010년 4월23일 해체 복원 완료하였으며, 새로 봉안한 사리함(29cm*29cm*13.5cm의 도자기)에는 동래 법륜사 선래 화상이 미얀마 양곤시 수도원에 봉안된 것을 모시고 온 부처님 진신사리 6과와 삼층석탑 역사자료, 대중명단, 탑다라니, 반야심경, 신묘장구대다라니, 금강경, 법화경 등 각종 경전과 오색천, 오색실, 오보(금, 은, 수정, 유리, 산호), 오향(침향, 백단향, 정향, 울금향, 용뇌향), 오약, 오곡 등이 봉안되었다.
☆ 안상眼象: 인도에서 정며에서 바라본 코끼리 눈과 귀의 형상을 본떠 만든 장식 문양으로 일찍부터 많은 미술품이 조각되었다. 우리나라 불교 예술품에도 석탑과 부도의 기단부, 석등의 하대석, 불상 대좌의 기단부, 당간지주의 기단부 등 많은 미술품에 장식되었다. 통일 신라시대의 안상 문양은 높은 돋을 새김을 하였으며 좌우 대칭 수법을 보여준다. 고려시대에는 안상내에 꽃무늬를 중앙에 배치하기도 하였으며, 조선시대에는 기하학적 무늬 형태의 안상이 유행하였다. 부처님은 고대 인도에서 코끼리를 타고 세상에 출현하심을 알리셨는데 지금도 코끼리는 부처님을 모시는 상징적인 동물로 인식되는 까닭에 초파일 봉축행사 때 아기 부처님이 코끼리를 타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시대가 흘러가면서 이 안상 모양도 연꽃모양을 가미한 다양한 형태로 변화하였지만 명칭은 그대로 안상이라 부르고 있다.
13. 괘불대掛佛臺
선원과 미륵전 앞에 위치한 괘불대는 사찰의 큰 마당에서 불교의식을 거행할 때 걸어 놓는 예배용 걸개 그림(괘불)을 걸어두는 것으로서 고려 말 조선 초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범어사에 소장되어 있는 괘불은 광무9년(1905)의 작품으로 화면 중앙에 입상형의 아미타본존을 중심으로 왼쪽에 관음보살, 오른쪽에 대세지보살이 있고 보살 뒤편에 가섭과 아난존자가 묘사되어 있다.
모양은 당간 지주와 유사하나 일반적으로 당간지주는 사찰의 입구, 즉 일주문 밖에 위치하며 괘불대는 사찰의 법당 앞 마당에 위치한다.
14.관음전觀音殿
관음전은 자비의 보살인 관세음보살을 모신 전각이며, 원통전圓通殿 또는 보타전(補陀殿:보타는 관음보살이 거주하는 곳인 보타낙가補陀洛迦의 줄인 말)이라고도 한다. 관세음보살(관세음은 세상의 소리를 듣고 관조하는 분이라는 뜻)은 고난에 빠진 중생들을 일심으로 자신의 이름을 부르면 그들을 구제한다고 한다.
법화경法華經관세음보살보문품觀世音菩薩菩門品에서는 관세음보살은 고통 받는 온갖 중생들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그들을 구제하기 위하여 33가지의 갖가지 모습을 나투어서 중생들을 구제한다고 한다. 관음은 관세음의 줄인 말이며, 관자재觀自在라고도 한다. 관자재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재재롭게 관조한다는 뜻이다.
머리에 보관을 쓰고 보관의 정수리에 아미타불의 화현을 모시고 계시다. 왼손에는 연꽃, 오른손에는 감로수병을 들고 계신다. 왼손에 든 연꽃은 중생이 본래 갖춘 불성을 표시하고, 그 꽃이 핀 것은 불성이 드러나서 성불한다는 뜻을, 그 봉우리는 불성이 번뇌에 물들지 않고 장차 필 것을 나타낸다. 관세음보살은 보통 6관음(성, 천수관음, 마두, 십일면, 준제, 여의륜)을 일컫는다. 그 중 성관음이 본신이고 다른 것은 보문시현의 변화신이다.
☆보문시현
관세음보살이 세상을 교화함에는 중생의 근기에 맞추어 여러가지 형태를 나타낸다. 이를 보문시현이라 하며 33응신이 있다고 한다.
대웅전과 함께 광해군 6년(1614)에 묘전화상이 중창하였으나 지금의 건물은 양식으로 보아 뒤에 크게 개조된 것으로 보인다. 정면 5칸, 측면 3칸에 주심포식으로 공포를 짜올린 맞배지붕이다.
관음전의 후불탱화는 대부분의 사찰에서는 수월관음도이나 범어사 관음전의 후불탱화는 청색치마에 백의를 걸친 백의관음도로 대웅전의 3개의 탱화와 같이 1882년 3월에 조성 봉안된 것으로 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 53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목조 관음 보살좌상은 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 70호 이다.
☆백의관음도白衣觀音圖
(부산광역시 지정 유형문화재 제 53호)
관음전 안에 모셔진 목조관음보살좌상(1772)의 뒷벽에 있는 백의관음도는 관음보살의 자비로운 모습을 잘 표현한 후불화이다.
현재 전각 내에 모신 것은 2002년에 만들어진 모사본이며, 진본은 현재 성보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 사각형의 화면에 커다란 원을 그리고, 그 원안에 보관(菩冠: 보살이 쓰는 모자)에서부터 양 어깨를 감싸고 발 아래로 곡선을 이루면서 몇 가닥으로 흘러 내리고 있는 흰 천의天衣를 입은 모습과 함께 거신광(擧身光 : 몸 전체에서 드러나는 신령한 빛)과 다양한 대상들을 표현하고 있다.
또한 관음보살의 왼쪽 발 언저리에 선재동자가 합장하고 있으며, 반대편에는 남녀가 관음보살에게 경배를 올리고 있다. 이와 같은 모습은 고려 말과 조선 전기에 나타나는 수월관음도水月觀音圖를 종합화한 것으로서 조선 후기의 특징을 보여준다.
☆잡상雜像
잡상雜像은 추녀마루나 내림마루 위에 사람 형상의 장식을 제일 앞에 두고 그 뒤로 연이어 동물 형상의 장식을 올린 것을 지칭한다. 이러한 장식은 화재와 액을 막아준다는 벽사의 의미로 사용되며, 선인상 외에 주수상 10상이 나타나 있는데, (1)용龍, (2)봉鳳, (3)사자獅子, (4)기린麒麟, (5)천마天馬, (6)해마海馬, (7)고기魚, (8)해치, (9)후, (10)원숭이潺 상으로 선인상과 합하면 11상이 된다.
선인상은 닭(봉)을 탄 듯한 도인이나, 어떤 곳은 그냥 도인만 서 있는 모습도 보인다.
15. 대웅전大雄殿
대웅전은 크나큰 영웅(大雄)이신 석가모니 부처님을 모신 곳 즉 법력으로 이 세상을 밝힌 참 영웅이 계신 전각 이란 뜻이다. 대웅이란 법화경에서 석가모니 부처님을 칭한 말로서 인도어 마하비라에서 유래하였다.
범어사 대웅전은 광해군 6년(1614)에 건립하고 1713년(숙종39년)에 다시 건축한 것으로 간박하고 힘찬 다포식 가구와 소박한 맞배지붕의 양식으로 뛰어난 건축 기술을 보여주고 있어서 목조 건축 양식 발전을 연구하는데 크게 주목되는 예 이며, 보물 제 434호로 지정 되어있는 중요한 건축 문화재이다.
대웅전 주련
대웅전 4기둥의 주련은 금강경 오가해 서문에 나오는 글로서 동산스님께서 쓰시고 무진장 스님께서 판각 하신 작품이다.
마하대법왕(摩?大法王)
거룩하고 위대하신 법왕이시여
무단역무장(無短亦無長)
짧지도 또한 길지도 않으며
본래비조백(本來非조白)
본래 검지도 희지도 않고
수처현청황(隨處現靑黃)
모든 곳에 인연 따라 청 황으로 나타나신다
☆대웅전 좌우에는 대웅전을 협시하는 관음전과 지장전이 배열되어 있는 독특한 가람 배치의 구도로 되어 있다.
대웅전을 오르는 계단은 가운데 하나였으나 후대에 좌우에 하나씩 더 두어 3중 계단으로 하였다.
계단중심 좌우에 마치 투구를 쓴 사자같은 해학적인 모양의 상이 있다.
대웅전의 기단은 석계와 함께 초창기 때 축조된 그대로인 것으로 생각되며, 다섯 단 석계의 면석에는 동백꽃을 그리고 동백나무잎을 얇게 돋을새김 하였다.
대웅전 계단 면석
대웅전 기단 면석
대웅전 기단 면석 명문
康熙 十九年 庚申 四月 造成이라고 세겨져 있음 강희19년은 1680년이며, 경신년임.
내부 목조 닷집(=보개 :寶蓋)이나 불단의 조각은 매우 섬세하여 조선시대의 목공예술의 진가를 느끼게 한다. 그 아래 불단의 조각 역시 생동감이 흘러 넘치며, 여러가지 화문花紋과 천의를 날리는 비천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나타냄으로서 불단의 주변을 화려하게 장식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천정에는 보상화문寶相華紋과 연화문등의 조각을 나타내어 불전 상에 나오는 천우 보화의 의미를 상징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별화 (보물 제 434호)
별화 (보물 제 434호)
대웅전 닷집
대웅전 수미단 문양
천장 왼쪽(곁칸) 둘례의 연화문 우물 빗반자와 그 밑에 내려 걸쳐진 벽 위의 도리와 장혀 부분 그리고 어간 왼쪽의 대들보 쪽을 어간에서 올려다 본 화려한 별화이다. 빗반자의 큼직한 연화문과 가름틀인 졸대 만남점의 모란송이와 국화송이 조각, 그리고 도리에 그려진 병머리초 단청 사이의 용몸 천녀와 도리를 받친 장혀에 가득한 연당초무늬와의 구성미가 찬란하다.
별화에 나타나는 굽이치는 용의 몸뚱이에 상체는 여인의 모습을 한 인물은 불꽃무늬를 날리는 날개옷을 걸치고 새깃이 양쪽에 꽂힌 투구 꼴 모자에 여의주를 쥐고 있는 이른바 용녀로 이는 여덟살에 성불한다는 영특한 존재를 상징한다.바깥으로는 이 장혀에서 공포가 끝나 곧 장혀를 받치고 이 위에 도리에 서까래 끝 쪽이 걸쳐진다.
대들보 쪽 천녀는 소라 꼴의 길쭉한 은 그릇에 여의주와 석류 따위의 과일을 담아 두 손으로 받치고 있는 특징을 보이고 있다.
목조 석가여래삼존불
목조석가여래삼존불(보물 제 1526호, 1661년)
상단에는 향마촉지인을 한 석가모니 부처님을 모시고 왼쪽에는 미륵보살을 오른쪽에는 제화갈라보살을 협시불로 모신 수기 삼존불의 형상으로 과거, 현재, 미래불을 한자리에 모신 것이다.
후불탱화는 영상회상도로 우견편단에 향마촉지인을 한 석가모니 부처님을 그리고 그 좌우로 8보살을 배치하였고 본존을 중심으로 위쪽에는 2구의 분신불을 비롯 10대 제자와 기타 신중들을, 본존 무릅아래 오른쪽에 아난과 범천을 왼쪽에는 가섭존자와 재석천를 그렸으며, 좌우에 사천왕을 표현하였다.
후불 석가영산회상도는 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 67호로 지정 되어있다.
신중탱화
신중탱화
신중탱화 위족 벽화
아미타불 좌우에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상
대웅전안 오른쪽에 벽에 봉안되어 있는 신중탱화는 비단바탕에 맨 위의 상단에 마혜수라천을 중앙 왼쪽에
일천자, 인드라(제석천왕), 오른쪽에 월천자, 브라흐만(대범천)이 모셔져 있으며, 그 주위로 무장을 한 천병 즉 팔부중을 배치하였으며, 신중탱화에는 마혜수라천외 53명이 등장한다.
신중탱화는 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 69호로 지정 되었으며, 1882년 3월에 조성 되었다.
삼장탱화
삼장탱화
삼장탱화위 벽화
약사여래불 좌 일광보살 우 월광보살
왼쪽 벽에 봉안되어 있는 삼장탱화는 중앙에 천장보살, 왼쪽에 지지보살, 오른쪽에 지장보살이 배치되어 있는 우리나라에만 있는 탱화이며, 임진왜란 직전에 등장한 불화이다.
중앙의 천장보살 무릅아래 협시인 진주보살, 대진주보살이 합장하고 서 있으며, 일월천상을 비롯한 천부중들과 권속들이 배치되어 있다.
왼쪽의 지지보살 역시 무릅아래 용수보살, 다라니보살이 합장하고 서 있으며, 견뢰신중과 금강신중을 비롯한 여러 권속들이 배열되어 있다.
오른쪽의 지장보살은 협시로 도명존자와 무독귀왕이 무릅 아래에서 합장하고 있으며, 시왕(十王)및 명부중 사자들이 배치되어 있다.
삼장탱화는 부산시 유형문화재 제68호로 지정되어 있다.
♧ 삼장탬화 윗단의 벽화는 약사여래와 그 좌우에 협시로 일광보살, 월광보살이 그려져 있다.
♧ 본존불 후불탱화, 신중탱화, 삼장탱화는 모두 1882년 3월에 조성된 것이다.
♧ 범어사 대웅전 상단에는 특이하게도 업경대 2개가 있다. 업경대業鏡臺란 지옥의 염라대왕이 갖고 있다는 거울로 여기에 비추어 보 면 죽은이가 생전에 지었던 선악의 행적이 그대로 나타난다.
업경대業鏡臺
화광대火光臺
화광대火光臺란 낮에는 물그릇을 두어 불전佛殿에 들어가기 전에 손을 씻을 수 있도록 하기도 하고, 또는 불전에 올릴 공양물을 잠시 내려놓는 장소로, 그리고 밤에는 전기가 없었던 시절에 관솔불을 피워 법당앞을 밝히는데 이용하기도 하였다. 범어사에는 대웅전 앞 좌우에 2개가 잘 보존되어 있다.
대웅전 공포
대웅전 앞 금고
금고金鼓란 금구金口 또는 반자返子라고도 하며, 절에서 대중을 불러 모으거나 급한 일이나 의식의 시작을 알리는데 두드리는 도구로서 쇠북이라는 뜻이다.
♧치미
지붕마루 중에서 격식이 있는 건물의 용마루 양쪽 끝단에 얹어놓은 장식기와를 지칭한다. 비슷한 용어로는 취두鷲頭, 취와鷲瓦, 치문, 치미, 망새등이 있다. 조선시대 이전에는 새 날개나 물고기 꼬리모양의 장식기와를 사용하였는데, 이것을 치미라고 한다.
조선시대 이후로는 점차 치미 대신에 용마루 양쪽을 물고 있는 용머리 모양의 장식으로 바뀌었는데, 이것을 취두라고 한다.
치미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가 있으나 길상吉祥과 벽사僻邪의 상징으로서 의장意匠된 상상의 새인 봉황에서 비롯하였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고려시대부터 중국 당나라 후엽부터 유형된 치문의 영향을 받아 화재를 방지하기 위한 목적에서 물을 뿜어내는 어룡형魚龍形으로 그 의장이 변형되고 점차 용두龍頭.취두鷲頭등의 새로운 장식기와로 바뀌면서 전통적인 치미의 형태에서 벗어나 퇴화되었다.
16.범어사 지장전
다음회에 지장전이 기재됩니다. 寶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