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 4:20]
내가 이제라도 너희와 함께 있어 내 음성을 변하려 함은 너희를 대하여 의심이 있음이라...."
내 음성을 변하려 함은 - 바울은 자신의 심정을 음성에 비유하고 있다. 그는 지금까지 강경한 어조로 말해 왔지만 갈라디아 교인들을 만나게 되면 부드럽고 온유한 말로 격려하고 싶다는 의사를 표현하고 있다. 이는 바울이 직접 그들과 만나서 말로 가르치는 것이 서신으로 말하는 것보다 더 낫다고 인식한 때문일 것이다.
의심이 있음이라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포루마이'는 '당황하다', '어찌할 바를 모르다'를 뜻한다. 이는 갈라디아 교인들이 어떠한 상태에 있는지를 정확하게 모르므로 당혹스럽다는 표현이며 그들을 직접 만나 그 의문을 풀고 싶다는 생각을 나타내는 말이다. 바울이 어떠한 일로 인하여 직접 갈라디아를 방문할 수 없었는지는 정확하게 알수 없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여전히 갈라디아 교인들을 향한 깊은 사랑과 관심이 남아 있었다. 그래서 바울은 지금 거짓 교사들의 미혹에 흔들리고 있는 갈라디아 교인들이 깊이 타락하지 않고 바로 돌아올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갈 4:21]
내게 말하라 율법 아래 있고자 하는 자들아 율법을 듣지 못하였느냐...."
율법 아래 있고자 하는 자들 - 본절의 '율법' 역시 4절과 3:23등과 같이 정관사 없이 사용됨으로 '율법적 제도'를 가리키는 단어로 쓰여졌다. 따라서 '율법 아래 있고자 하는 자들'은 주의 계명을 사랑하고 존경하며 지키려는 자들이 아니라 외식에 치우쳐 인간의 자유를 구속하려는 갈라디아 교회의 변절자들을 가리킨다.
하고자'에 해당하는 헬라어 '델론테스'는 '원하다', '지지하다', '좋아하다' 등의 의미를 가진 '델로'의 현재 분사형으로 과거에 율법을 따랐던 적이 있는 사람을 가리키지 않고 현재 의도적으로 율법주의를 따르며 지지하고 있는 자들을 구체적으로 지시한다.
[갈 4:22]
기록된 바 아브라함이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계집 종에게서, 하나는 자유하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나...."
두 아들이 있으니 - 실제로 아브라함에게는 이스마엘과 이삭 외에도 후처 그두라를 통한 여섯명의 아들들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두 자녀만 언급한 것은 그들의 탄생에 관계된 사건에 있어서 근본적으로 서로 판이한 출발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는 약속과 관계된 반면, 다른 하나는 약속과 관계없이 육신을 따라 난 것이다.
계집 종에게서 - '계집 종'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이디스케'는 신약성경에서 언제나 '노예로서의 여자'를 뜻하는 단어로 쓰였다. 본절에서 이 단어는 사라의 여종인 '하갈'을 지시하며 나아가 그녀에게서 난 '이스마엘의 신분'과 '율법의 신분'을 암시한다.
[갈 4:23]
계집 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하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육체를 따라 났고 - '육체를 따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타 사르카'는 수태의 방법이 육체의 질서와 법칙으로 인해 태어났음을 보여주고 그 아들을 잉태한 어머니의 신분을 시사한다. 여기서 '육체'는 보통 '영'이라는 말과 대조되어 사용되는데 그것은 때때로 평범하고 자연적인 과정으로 이해되기도 하였다.
대부분의 경우에 있어서 '육체'는 영적이며 비가시적인 세계와 대조되는 세상의 현실적 삶을 묘사할 때 사용되었다.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 '약속'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팡겔리아스'는 본절에서 관사없이 사용되었다. 관사가 있는 경우에는 명백하게 아브라함의 허리에서 날 메시야를 가리키는 것이지만, 관사없이 사용된 본절의 '약속'은 이삭이 태어난 원인이며 수단이다.
출생의 신비는 초자연적인 것이며 인간이 구할 수 없는 가운데서 얻은 하나님의 은혜이다.
[갈 4:24]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가라..."
이것은 비유니 - 비유를 뜻하는 헬라어 '알레고루메나'는 '알레고레오'의 현재 분사형이다. 이는 '알로스''다른'와 '아고류오''말하다'의 합성 동사로 그 문자적인 의미는 '다른 뜻으로 말하다'이지만 보통 '우의적(禹意的)으로 말하다' 또는 '어떤 사물을 비유로 설명하다' 등의 뜻으로 사용되었다.
바울은 역사적 사실을 의심하지 않고 과거의 교훈을 현재상황에 적용시켜 하나님의 섭리의 일관성을 논증하고 있다. 이렇듯 현재를 포함하여 모든 시대의 사건들은 하나님의 계시 역사를 살펴볼 때, 그 의미가 분명하게 드러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