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호르무즈 (Hormuz)
17세기 영국 시인이자 정치가였던 존 밀턴의 실낙원 (失樂園)에 '호르무즈'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여기서 필자는 '호르무즈'를
악마가 앉아 있는 왕좌로 묘사하며 “호르무즈의 화려함이 인도의
부를 능가한다”고 묘사하였다.
호르무즈는 11~15세기 호르무즈 해협을 지배한 이란 남부지역 왕국 이름이다. 당시 유럽인에게 호르무즈는 사치스럽고 풍요로운 곳의 대명사였다. 조로아스터교의 최고 神인 ‘아후라 마즈다’가 페르시아
에서 긴 세월 변화를 거치며 ‘호르무즈’가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라비아해와 페르시아만을 연결하는 호르무즈 해협은 중세
시대에도 동서양을 연결하는 무역 관문이었다. 이곳을 통해
중국의 비단과 도자기, 동남아시아의 각종 진귀한 향신료가
유럽으로 건너갔다.
마르코 폴로는 동방견문록에 “인도에서 온 상인들이 보석, 진주,
비단, 상아를 팔기 위해 모여드는 세계 최고의 시장”이라고 썼다.
그 당시 호르무즈 왕국은 항구에 정박하는 모든 배에 통행세를
부과해 막대한 부를 쌓았다.
이런 천혜의 요충지를 유럽 열강이 가만히 둘 리 없다.
1507년 포르투갈 알부케르크 제독이 함대를 이끌고 호르무즈
왕국을 정복한 뒤 해협 가운데 호르무즈섬에 요새를 세웠다.
이 섬부터 맞은편 아라비아반도까지의 거리는 39㎞로 비교적 짧다.
서울 남산타워에서 영종도 앞바다까지의 거리쯤 된다.
맑은 날에는 망원경 없이 큰 배가 지나가는 것을 볼 수 있을 정도다.
알부케르크 제독은 호르무즈섬을 “이슬람의 숨통을 조이는
코르크 마개”라고 불렀다. 그러던 중 20세기 초 페르시아만에서
원유가 발견되기 시작하면서 이 해협의 전략적 가치는 차원을
달리하기 시작했다.
총 길이 167㎞, 폭 34~54㎞인 이 좁은 해협을 하루 세계 원유
물동량의 20%인 2천 백만 배럴이 통과한다. 많은 암초와 얕은
수심을 고려하면 대형 유조선이 다닐 수 있는 항로는 왕복 각각
3.2㎞밖에 안 된다.
중간에 충돌 방지를 위한 2마일을 합치면 총 9.6㎞의 좁은 왕복
2차선 도로 위를 거대한 유조선들이 교차하는 것이다.
미국 에너지 안보 전문가인 '더글러스 유반'은 ‘제국의 숨통’이란
책에서 호르무즈 해협을 ‘세계 경제라는 거인이 숨을 쉬는
가느다란 빨대’에 비유했다. 그 가는 빨대가 미국과 이란의
전쟁으로 인해 막혀버렸다.
'유반'은 1개월 이내 봉쇄는 심리적 공포를 자극할 뿐 세계 실물
경제에 대한 충격은 크지 않다고 봤다. 하지만 1~3개월의
봉쇄는 원유 부족으로 이어져 세계 경제 성장률을 무려 2.5~5%
포인트까지 떨어뜨릴 것으로 전망한다.
만약 봉쇄가 국제에너지기구의 전략비축유 권장기간
(90일분)을 넘으면 예측 불가능한 수준의 대공황이 발생할 수
있다고 경고한다. 부디 그런 일이 없기를 바랄 뿐이다.
조선일보 나지홍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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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속의 세계7대 강국 변천사
첫번째. 애굽(이집트)
두번째. 앗수르(아시리아)
세번째. 바빌론(바벨론)
네번째. 메데-바사(메디아 페르시아)
다섯번째. 희랍(그리스)
여섯번째. 로마
일곱번째. 영.미
이란이 성경속의 세계 네번째 강국 페르시아의
중심지로서 한때는 세계최강이었으니 나름 저력.
자존심은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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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교가 문제의 원인인가?
교직자이자 작가인 조너선 스위프트는 18세기 초에,
“증오심을 유발하는 종교는 충분하지만 서로 사랑하게 만드는
종교는 부족”하다고 기술했습니다. 종교가 실제로는 화합이
아닌 분열을 조장하는 세력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하지만 모두가 그에 동의하는 것은 아닙니다.
일례로, 영국 브래드퍼드 대학교 평화 연구학과의 연구진이
내린 결론을 고려해 보겠습니다. 이 연구진은 영국 BBC
방송국으로부터 종교가 평화를 조성하는지, 전쟁을 부추기는
지의 여부에 대한 합리적인 답을 조사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습니다.
연구진이 발표한 보고서의 내용은 이러합니다.
“여러 전문가들이 분석한 역사 기록을 검토한 결과 우리는
진정으로 종교 때문에 일어난 전쟁은 지난 100년간 거의
없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동 연구진은, “언론을 비롯한 사회 각층에서” 일부 전쟁을
“종교 전쟁 혹은 종교 간의 불화로 일어난 전쟁으로 흔히
묘사하지만, 실은 국가주의나 영토 회복이나 국방 때문에
일어난 전쟁이었다”고 설명했습니다.
한편 다른 많은 이들은 교직자들이 행동이나 침묵을 통해
여러 전쟁을 용인하거나 적극 지지했다고 다음과 같이
반론을 제기합니다.
● “종교는 거의 모든 곳에서 폭력과 연루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 근년에 들어 종교로 인한 폭력 사태가 미국의
보수주의 기독교인들 간에, 중동의 분노한 이슬람교도와
유대교인들 간에 일어났으며, 남아시아에서는 힌두교인과
이슬람교도들이 서로 다투고, 아프리카와 인도네시아에서는
토속 종교 집단들이 충돌했다. ··· 이러한 폭력 사태에 가담한
사람들은 종교의 힘을 빌려 정치적 정체성을 찾고 이념을
근거로 복수하는 일을 정당화하려 한다.”—「신(神)의 생각과
테러—세계적으로 점증하는 종교 분쟁」(Terror in the Mind
of God—The Global Rise of Religious Violence).
●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신앙심이 깊다는 나라들이 대개
가장 극심한 사회악에 시달린다. ··· 종교가 넘쳐흘러도
치솟는 범죄율을 막지 못한다. ··· 증거로 볼 때 자명한 사실은
이러하다.
안전하고 품위 있고 질서 있고 ‘문명화’된 곳에서 살고 싶다면,
종교의 영향력이 강한 곳은 피해야 한다.”—
「거룩한 증오」(Holy Hatred).
● “침례교인들은 평화를 추구하기보다는 분쟁에 가담한
것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 [미국] 노예 제도를 비롯한
여러 가지 문제로 교파들이 사분오열되어 있었을 때 그리고
19세기에 나라가 분열되어 있었을 때, 남부와 북부의 침례
교인들은 정의를 실현한다는 명분으로 전쟁을 지원하였으며
하나님이 자신들 편이라고 단정하였다. 나라에서 영국
(1812년), 멕시코(1845년), 스페인(1898년)과 전쟁을
벌였을 때에도 적극 지지하였다.
그중 멕시코와 스페인과의 전쟁에 대해서는 ‘압제받는 사람들
에게 종교의 자유를 가져다주고 새로 선교할 지역을 개척
한다는 명분을 주로’ 내세웠다. 요점은 침례교인들이 평화보다
전쟁을 좋아했다는 것이 아니라 전쟁이 일어나면, 대개 지지
하고 참여했다는 것이다.”—「논평 및 해설자—침례교 신학
저널」(Review and Expositor—A Baptist Theological
Journal).
● “역사가들이 살펴본 바에 따르면, 거의 모든 시대와 민족과
문화권에서 종교심에 호소하여 전쟁을 부추기는 사례를 찾아
볼 수 있었으며, 대개 교전 당사국 양측에서 그렇게 하고 있었다.
‘신(神)은 우리의 편이다’라는 낯익은 구호는 전쟁터에 나가
도록 독려하는 가장 진부하면서도 가장 효과적인 구호에
속한다.”—「종교 전쟁 시대, 1000-1650년—세계 전쟁과 문명
백과사전」(The Age of Wars of Religion, 1000-1650—An Encyclopedia of Global Warfare and Civilization).
● “종교 지도자들은 ··· 좀 더 효과적으로 인도를 베풀고
각자의 신앙의 진정한 근본적 가치관을 알리지 못한 것에
대해 냉철하게 숙고해 볼 필요가 있다. ··· 모든 종교가 평화를
염원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에 걸맞은 역할을 수행한 적이
있는지는 의문이다.”—「신(神)의 이름으로 자행된 폭력—
분쟁 시대의 종교」(Violence in God’s Name—Religion
in an Age of Conflict).
역사를 통틀어 기독교국의 모든 주요 교파(가톨릭, 정교회,
프로테스탄트)의 교직자들은 사제와 군목들을 끊임없이
배출하여 교전 당사국 양측에서 군대의 사기를 북돋우고
사상자들을 위해 기도하게 했습니다. 이러한 지원을 통해
그들은 유혈 사태를 용인하고 모든 군대를 축복했습니다.
그렇다 해도 전쟁을 종교 탓으로 돌릴 수는 없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러한 문제가 있습니다.
과연 종교가 인류의 화합을 이루어 낸 사례가 있습니까?
“매디슨 가(街) 침례 교회의 목회자인 찰스 A. 이턴 박사는
교회 건물을 육해군 지원병 모집 장소로 사용할 예정이라고
어제 공식 발표하였다.
이턴 박사 외에도 여러 명의 뉴욕 시 교직자들이 정규 주일
예배에서 전쟁에 관해 설교하였다. 남녀 모두 최대한 빨리
전쟁에 참여하여 국가와 민주주의에 충성을 다하도록 촉구
하는 내용이었다. 많은 교회에서 국기를 게양하였다.”—
「뉴욕 타임스」, 1917년 4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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