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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에 대한 바른 의식 2018. 01,21.
지난 시간에는 <우리 기도가 응답될 수밖에 없는 이유들>에 대해서 살펴보았는데, 오늘은 “기도에 대한 바른 의식”이라는 제목으로 기도에 대한 우리의 오해를 불식시키고 기도 응답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가질 수 있는 새로운 의식전환이 이뤄지기를 소원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영적 성장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하나님이 보시는 영적 성장은 우리의 말에 있습니다. 야고보서 3장 2절에“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고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말로 죄짓지 않고, 말로 실수하지 않는 자가 곧 온전한 사람이라고 말씀합니다. 왜냐면, 신약에서 말하는 죄의 개념은 믿지 않는 것이 곧 죄(罪)이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14장 23절을 보면“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는 것은 다 죄니라”고 말씀합니다. 곧,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고, 믿음에 거슬리는 말을 하는 모든 것이 신약(新約)에서는 죄(罪)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지 않고, 믿음으로 말하는 사람이 곧, 온전한 사람이고 성숙한 자인 것입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이 나를 새 피조물이고, 새 생명을 가진 정복자보다 나은 자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그런데“나는 죄인이야” 이렇게 말하면, 이 사람은 말로서 하나님의 진리를 거역(offense)하는 것입니다.
또 다른 예를 든다면, 내 주머니에 돈이 별로 없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 고 말씀하기 때문에
“나는 돈에 여유가 없어서 그런 일은 엄두도 못 낸다.”라고 말하면, 이 사람은 성경에서 말씀하는 것과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말에 실수가 있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자신이 한 말로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지 않는 자가 곧, 영적으로 온전한 자인 것입니다.
기도에 대한 말씀을 하면서 왜, 혀에 대해서 강조하느냐 하면, 우리의 말이 영적 성장을 좌우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자주 “두려워하지 말라”혹은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은, 우리의 말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창조하는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내가 걱정하는 말을 하면, 내 말에 창조하는 능력이 나가기 때문에 걱정하는 그 일이 나에게서 만들어진다는 것입니다.
제가 얼마 전에 사람의 혀가 배의 키처럼, 우리의 진로를 설정해 준다고 말씀 드린 것을 기억하실 겁니다. 이처럼 우리는 우리의 말로 우리가 살아 갈 시스템이 프로그램 되기 때문에 부정적인 말을 함부로 해서는 안 됩니다. 많은 분들이 <예수님이 우리의 모든 질병을 짊어지셨기 때문에 우리는 이제 아프지 말아야 합니다.>라고 말씀드리면, 아멘! 하시고“이제부터 나는 아프지 말고 건강하게 살아야겠다.”라고 긍정적인 믿음으로 반응하면 좋은데, 부정적인 말로 반대의 의사를 표명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목사님, 아무개 집사는 새벽기도 가다가 교통사고가 나서 죽었데요. 우리 교회의 장로님은 중풍으로 쓰러져서 우리가 기도 많이 했는데도 죽었거든요,”이렇게 부정적인 말을 하는 분이 있는데, 이 사람은 말씀을 들을 때, 믿음으로 반응하는 의식구조로 바꿔져야 합니다. 그럼, 어떻게 믿음으로 사는 의식구조를 프로그래밍 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그 말씀을 그저 지식이나 정보로 취급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어떻게 받고, 어떻게 실행할까, 거기에 초점을 두고 말씀을 귀담아 듣고, 입술로 그 말씀을 여러 번 고백하면서 내 의식이 바뀌도록 성령의 기름부음을 구하셔야 합니다. 즉, 지난주에 강조했던 말씀을 권리증서로 사용할 수 있는 믿음의 정상에 도달하려고 하셔야 합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의 말씀에 “예수님이 질병을 담당하셨기 때문에 치유될 수 있다”는 말씀을 들었으면, 그 말씀에 집중해서“나는 치유 받을 수 있다. 나는 건강하게 살 수 있다.”라고 긍정적인 믿음의 말로 화답하면서 내 믿음을 강화시키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의 죄를 대신하셨다는 것은 나에게 있던 죄가 예수님에게로 넘어가서 예수님이 대신 심판을 받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내가 죄의식에 시달릴 필요가 없을 뿐 아니라 나는 완벽한 의인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 얼마나 복된 소식입니까? 긍정적으로 받아드리는 것이 믿음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다”는 것은 나의 질병이 예수님에게 다 넘겨져서 그 질병으로 인한 아픔과 고통을 예수님이 대신 짊어지셨기 때문에 이제 더 이상 아프지 말아야 합니다. 건강하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유하신 분으로 가난하게 되셨다는 것은, 내 가난으로 예수님이 대신 가난하게 되어 가난을 담당하셨다는 것이며, 그러기 때문에 이제 나는 가난하지 않기로 결정을 해야 하고, 내가 부유하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그렇습니다. 나의 모든 것, 그것이 가난이든, 질병이든, 죄든, 예수님에게 다 전가가 되어서 예수님이 다 담당하셨기 때문에, 나는 그렇게 살지 말아야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기독교 마인드입니다. 이제는 어떤 죄로 인한 질병이라도, 그것 때문에 치유 받지 못할 질병은 아주 없습니다. 왜냐면, 우리의 모든 죄가 십자가에서 이미 그 값이 다 치러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제“예수님이 채찍에 맞음으로 나았다”는 말씀을 들으면, 아멘! 하시고 “나는 이제 건강하다.”라고 믿음으로 반응하는 의식 전환이 되셔야 합니다. 그런데 아직도 많은 분들 부정적인 말을 함부로 하는 걸 보면 이 부정적인 패러다임을 벗지 못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18장 1~8절을 함께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비유로 말씀하여 이르시되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장이 있는데 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하되 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후에 속으로 생각하되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나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였느니라. 주께서 또 이르시되 불의한 재판장이 말한 것을 들으라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많은 분들이 이 말씀을 어떻게 보는가 하면, 어린 아이가 엄마에게 끝까지 떼를 쓰면 엄마가 주고 싶지 않았어도 어쩔 수 없이 주는 것처럼 불의한 재판관도 과부가 끈질기게 졸라 대었더니 들어 준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에게도 포기하지 말고 끈질기게 매달리면 마침내 응답해 주신다.”는 식으로 설교를 하는 분들이 상당히 많은데, 그렇게 비유를 해석하는 것은 합당치 않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에게서 나왔기 때문에 절대로 하나님의 본질과 그의 성품에 상충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분들이 불의한 재판관을 하나님으로 보고 하나님께 떼를 쓰고, 끈질기게 매달리면 결국은 응답해 주시는 분으로 해석한다면, 하나님은 매우 인색한 분이라는 이미지로 남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어떤 말씀이든지 그 말씀을 해석할 때에, 하나님의 성품이나 특성과 어긋나면, 그 해석은 잘못된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이는 말씀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해석이 잘못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럼 이 말씀 해석에서 무엇이 잘못 된 것입니까?
불의한 재판관을 하나님으로 비유할 수 있나요? 아닙니다. 불의한 재판관은 사탄을 비유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불의한 재판관과 하나님을 똑같이 보시고“과부가 불의한 재판관에게 떼를 썼더니 들어주었다. 그러므로 내가 하나님께 떼를 쓰면 들어주신다.”는 식으로 말하면 그건 잘못된 해석인 것입니다. 불의한 재판관이 어떻게 생각한 것입니까? “나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데,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한 것을 봅니다. 어느 쪽이 더 당당해 보입니까? 과부가 아닙니까? 괴로워하는 쪽이 누구입니까? 불의한 재판관입니다. 그런데 이 장면을 반대로 상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불쌍한 과부가 재판장에게 와서 무릎을 꿇고 “살려주세요! 원한을 풀어주세요! 원한을 풀어주시면, 이 은혜를 잊지 않겠어요.”라고 아주 비굴하고 불쌍한 모습으로 상상하고 있는데, 그런 모습이 아닙니다. 과부가 당당하게“원한을 풀어주소서”하니까, 재판관이 속으로 괴로워하고 있지 않습니까? 과부가 불의한 재판관에게 말했을 때, 그 말이 너무나 확실하고 정당했기 때문에 하나님도 두려워하지 않는 재판관도 견디지 못하고 그냥 풀어주어야겠다고 말한 것입니다. 이와 같이 불의한 재판관도 과부의 원한을 풀어 주었는데, “하물며 하나님이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 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하신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의 문제는 “인자가 올 때에 믿음을 보겠느냐?”고 하신 것입니다. 어떻게 이 해석이 달라진 것입니까? 어떤 해석이 성경과 일치한다고 보십니까?
이 말씀은 불의한 재판관을 하나님으로 비유한 것이 아닙니다. 과부가 불의한 재판관에게 정정 당당하게 요구를 했기에 그 마음이 괴로워서 들어 준 것처럼 하나님도 확실한 언약관계 속에서 응답하신다는 믿음의 중요성을 말씀해 준 것입니다.
실제 예를 들어 말해보면, 내가 암에게“너는 내 몸에 있는 것이 불법이다. 내 몸에서 떠나가라!”고 계속 선포하면, 내 말이 너무도 분명하고 정당하기 때문에 암이 찔려서 떠나간다는 말입니다. 내가 안 믿는 가족을 위한 기도도 이렇게 하십시오. “주 예수님이 내 가족들을 위해서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고, 그 피로 값 주고 사셨다. 내 가족들을 더 이상 괴롭히지 말고 떠나라”고 계속 선포하면 마귀가“아이고, 더 있다가는 나만 괴롭힘 당하겠구나. 떠나야겠다.”라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기도에 대한 우리의 의식을 바꿔야 합니다. 그래야 기도하는 것이 훨씬 쉬어지고 그 응답도 확실해 집니다.
이제는 무엇이 하나님의 성품과 다른지를 분별할 줄 아셔야 합니다. 우리가 거듭났을 때 우리 안에 하나님의 성품과 그의 능력이 주어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렇게 살지 못한 것은, 그동안의 경험이나 교육이나 잘못된 정보로 만들어진 거짓 시스템이 우리의 믿음을 방해했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우리가 크리스천으로서 잘못 인식하고 있는 부정적인 것들에 대해서 바른 의식을 회복해야 합니다. 우리가 잘못 인식하고 있었던 개념들은 대략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성경에서“고백”이란 단어가 나오면, 죄를 고백하는 것으로 생각을 하고, 묵상이라고 하면,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것이란 통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회개하라”하면 죄를 고백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분들이 많은 것을 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씀하는 ‘고백하다. 시인하다’를 원어로 보면 <homologio>입니다. 이 말의 정의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동의하여 말한다.”(Definition: speaking the same things in consent or agreement.)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이 말하는 고백은 죄를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을 말로 동의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10장 9~10절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고백)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고백)하여 구원(final salvation)에 이르느니라.”하신 말씀을 보시면 구원의 조건이 죄를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주(主)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사탄의 권세를 다 파하고,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가 예수님에게 다 넘어왔으며, 그 예수님이 하늘과 땅의 주님이고, 그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고백을 붙들어야 합니다. 히브리서 10장 23절에“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며 굳게 잡아”라고 했는데, 이 구절을 KJV으로 보면 “약속하신 분은 신실하시니 우리 믿음의 고백을 흔들림 없이 굳게 붙들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분명히 보십시오. “죄의 고백을 붙들자”라고 하지 않고 “믿음의 고백을 흔들리지 않게 굳게 붙들자”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믿음의 고백을 붙들어야 합니까? - 이는 흔들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4장14절에“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승천하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우리는 우리의 고백을 계속 붙들어야 하리라).”
그렇습니다. 우리가 살다가 보면, 분명히 나에게 하나님의 생명이 있는데도 하나님의 생명을 의심하게 만드는 거슬리는 환경이 올 때가 있습니다. 질병이 오거나 물질적으로 어려운 상황이 올 때도 있습니다. 심지어 영생이나 내가 고백한 내용을 부정하게 하는 상황이 닥칠 경우라도 그 고백을 붙들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끝까지 놓지 말고 붙들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의인이 믿음으로 사는 전형적인 모습인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의 고백을 굳게 붙들 수 있을까요? 그건 포기하지 않고 계속 고백하는 것입니다. 부정적인 고백을 하지 마시고, 계속 긍정적인 고백을 하라는 것입니다.
어떤 성도가 욥기를 공부 했었는데, 말씀을 듣고 나서 이제부터는 긍정적인 고백을 해야겠다고 결심하고 하나님께 감사하고 잤는데, 주일 날 헌금을 하다가 결제할 돈이 들어 있는 돈 봉투를 성경책에 끼어 놓았는데, 빠진 것을 알고서 집에 가서 찾아보았지만 없었습니다. 그 성도가 말했습니다. “제가 긍정적인 고백을 처음으로 하게 되었는데 이런 일이 일어났어요. 그렇지만 저는 ”돈을 잃어버렸다”고 부정적으로 말하지 않았어요. 그 때, 불현 듯
성경에서 도둑을 현장에서 잡으면 7배로 변상시킨다는 말씀이 생각나서 저는 그 돈을 가져간 도둑의 영을 묶고, 7배로 변상하라고 선포하고, 돈에게 다시 돌아오라고 명령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그 때, 별다른 역사는 없었지만 마음을 지킬 수 있었는데, 그리고 한 달이 지나서 정확하게 잃어버린 돈의 7배가 들어왔다는 간증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이 간증의 요지는 믿음을 놓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어떤 부정적인 상황이 오더라도, 부정적인 상황이 나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게 하려면 계속해서 믿음의 고백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아픈 상황이 계속 되더라도 “나는 치유를 받았다”고 계속 고백을 해야 합니다.
디모데전서 6장 12, 13절에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받았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언을 하였도다(선한 고백으로 고백하였느니라).만물을 살게 하신 하나님 앞과 본디오 빌라도를 향하여 선한 증언(선한 고백)을 하신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내가 너를 명하노니”
여기를 보면 “영생을 취하라(붙잡으라)”했는데, 이 말은 내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을 의심하게 만드는 어려운 상황이나 사건이 벌어졌을 때, 영생에 대한 믿음을 놓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때“선한 증언을 하였도다.”했는데, 이는 선한 고백을 붙잡으라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본디오 빌라도에게 하셨던 선한 고백이 무엇입니까? 빌라도 앞에 예수님이 끌려 가셨을 때, 죽으러 가는 상황이었는데, 빌라도가 예수님에게“네가 왕이냐?”고 물을 때에 예수님이“그렇다. 나는 왕이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빌라도가 “저 사람들이 너를 고소했다”고 하니까, 예수님은 아무 말도 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선한 증언은 할 말은 꼭 하고, 하지 말아야 하는 말은 결단코 하지 않는 믿음의 고백을 말씀한 것입니다. 우리가 바로 이 태도를 배워야 합니다.
우리의 실제 상황을 말해 보면, “예수님이 채찍에 맞음으로 나는 나았다”고 고백하고 나은 줄로 믿고 있었는데, 병원에 갔더니 “당신의 혹이 더 커졌다”고 한다면 어떻게 할 것입니까? 선한 고백을 붙잡아야 합니다. “나는 예수님이 채찍에 맞음으로 치유를 받았다”고 계속 선한 고백을 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고백의 사도와 대제사장이십니다. 예수님이 안 믿는 사람들과 하나님 사이에는 중보자이지만, 거듭난 우리들에게는 더 이상 중보자는 아닙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의 아버지인 것처럼, 하나님이 거듭난 우리의 아버지이기 때문에 예수님은 더 이상 중보자가 아닙니다.
히브리서 3장 1절에“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가 믿는 도리(고백)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하셨습니다. 사도는 보내심을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사도바울이 하나님으로부터 이방인을 위하여 보냄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이방인의 사도인 나 바울은”이라고 말했고, 베드로는 하나님으로 부터 유대인을 위하여 보냄을 받았기 때문에“유대인의 사도인 베드로는”이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사도는 보냄을 받은 자인데, 예수님이 하나님에게서 우리를 위해서 보내심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고백을 하나님에게 갖다 주도록 보냄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 고백의 대제사장이라고 했는데, 예수님은 대제사장으로서 우리의 예물을 하나님 앞에다 갖다 드리는데, 우리가 고백하는 모든 내용을 예수님이 받아서 아버지 하나님에게 가져다주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0장 32절에“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내 말들을 고백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너희가 말한 것을 시인할 것이다. 너희는 아버지 앞에 알현을 얻게 될 것이다).”그렇습니다. 주님은 대제사장으로서 우리의 제물을 드리는 자입니다. 우리의 영적인 제물은 무엇일까요?
히브리서 13장 15절을 보면“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그분을 통해서 찬양의 제물을 하나님께 계속 드리자: 이것이 그의 이름에 감사하는 우리 입술의 열매(homologio:고백)니라.”우리의 영적 제물은 우리의 고백입니다. 우리 입술의 열매는 우리의 고백입니다.
호세아 14장 2절에“너는 말씀을 가지고 여호와께로 돌아와서 아뢰기를 모든 불의를 제거하시고 선한 바를 받으소서! 우리가 수송아지를 대신하여 입술의 열매를 주께 드리리이다.”그렇습니다. 우리는“내 안에 하나님의 생명이 있습니다.”라는 고백을 통해 송아지 한 마리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나는 예수님이 채찍에 맞음으로 나음을 입었다”고 하면 송아지를 또 한 마리 바친 것입니다.
계시록에 보면 천사가 금향로에 받아 가지고 가서 하나님께로 올라가면, 하나님이 그것을 땅에다 쏟아 부으라고 하시는 것을 보는데, 그것을 성도의 기도만이 아니라, 우리의 입술이 고백도 포함됩니다. 우리가 고백을 많이 할수록 예수님이 그 고백을 하나님 앞에서 보증을 하시면, 하나님이 그 말한 것에 대해서 이 땅에서 실재가 될 수 있도록 그것을 쏟아 부으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돈이 없어도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다”는 고백을 하면 하나님이 그것을 이 땅에다 쏟아 부으실 때, 나도 모르는 사업이 형통케 되고,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사람들이 나를 도와주러 온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내가 하나님의 말씀에 일치하는 고백을 계속하면 마음이 바른 생각으로 바꿔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말씀을 묵상하는 것도 입술로 고백하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는 걸 아셔야 합니다. 흔히 사람들은 묵상(meditation)이라고 하면 일반적으로 눈을 감고, 사람이 없는 곳에 들어가서 조용하게 생각하는 것이라고 보는데 그렇지가 않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묵상은 히브리어로 <하가>라고 하는데 이는 본래 비둘기 우는 소리나 먹이를 앞에든 사자의 으르렁거림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래서 묵상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라 입술로 중얼거리면서(to mutter) 이것은 ‘내 것이다’고 사자가 포효(to roar) 하듯이 말하는 것입니다.
내 영은 내 목소리에 제일 민감하게 반응하고 변화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묵상은 자기 목소리로 하나님의 말씀을 내 것이라 말하면 이는 마치 권리증서로 주장하는 것과 같다는 겁니다.
여호수아 1장 8절을 보시면“이 율법 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했는데, 이렇게 묵상은 생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입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묵상하면 할수록 하나님이 나를 번영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고, 내가 나를 번영하게 하는 것입니다.
얼핏 생각하면“자기가 할 일은 안하고 말만 한다고 과연 될까?”하는 의심이 들 수도 있겠지만, 내가“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부족함이 없다”고 고백을 하면서 늘 웃는 낯으로 살면 내가 하는 사업에 생각지도 않았던 계약이 이루어지고, 사람들이 나를 도와서 형통한 삶이 만들어 진다는 것입니다.
어느 심리학자가 이런 시험을 해 봤다고 합니다. 아이들에게 똑같은 교실에서 공부를 해도몇몇 아이들을 따로 불러서“너는 탁월한 머리를 가졌다”고 하면서, 그것을 여러 번 고백을 하게 했는데, 놀랍게도 그 아이는 다른 아이들보다 탁월하게 공부를 잘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수학을 싫어하는 아이에게 너는 “수학을 잘 할 수 있는 머리를 가졌다”고 말하고 수학이 재미있다고 반복해서 말하게 하면 1년 정도만 지나면 실제로“수학이 너무나 재미있네.”하면서 공부를 잘 할 수 있게 된다고 합니다. 그것은 입술의 고백을 통해 그의 영이 활성화되었기 때문이라는 연구결과를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말하는 회개는 자기 지은 죄를 후회하고 용서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하는 방식을 바꾸는 것입니다.(Repent, Change your mind, change the way of your thinking) 그렇습니다. 회개는 생각을 바꾸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약의 회개는 “내가 다시는 불법도, 실수도 기억하지 않겠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자, 이제 지금까지 들은 말씀을 종합해서 기도에 관한 잘못된 의식을 바꾸셔야 합니다.
1. 하나님께 끈질기게 반복해서 졸라대면 응답하신다! 이건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오해에서 나온 잘못된 의식입니다. 성경을 펴서 검토해 보겠습니다.
마태복음 6장 7절을 보면“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5장 7~8절에“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는 내 제자가 되리라”
요한일서 5장 14-15절을 보시면“그를 향하여 우리가 가진 바 담대함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고 하신 말씀을 보면 무조건 열심을 가지고 끈질기게 떼를 쓴다고 기도가 응답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기도할 때, 응답되는 것입니다. 믿음의 기도는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을 권리증서로 가졌을 때에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보실 때에 우리는 신문 기자가 사건을 취재하듯이 보셔야 합니다. 한 번도 들었던 적이 없는 새로운 뉴스로 듣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 말씀의 내용과 저 말씀의 내용이 서로 상충되지 않고, 서로 모순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만일, 내가 볼 때에 이 말씀과 저 말씀의 내용이 서로 반대되는 것 같다면, 그건 나의 해석이 잘못된 것입니다. 예를 들면 “예수님이 채찍에 맞음으로 나음을 입었다”고 말씀하는데 야고보서는“고난을 기뻐하라”고 했다고 그 병을 하나님의 뜻으로 여긴다면 그건 내 해석이 잘못 되었다는 것입니다. 야고보서가 말하는 “고난을 기뻐하라”는 것은‘고난 가운데서도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앞에서 말씀한 누가복음 18장에 나오는 불의한 재판관을 향한 과부의 요구는 하나님 앞에 끈질기게 기도하면 들어주신다는 비유가 아닙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하는 자세와 태도에 관한 말씀입니다. 우리에게 어떤 자세로 기도하라는 것입니까? 믿음으로 담대히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얼마나 눈물로 간절히 기도하느냐에 따라 응답하시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기도할 때 응답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자녀의 권세를 가진 자로서 예수의 이름을 사용할 수 있는 자로 기도하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거지같은 모습으로 애걸복걸하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왕 같은 제사장들입니다. 이제는 왕의 기도를 하시고 제사장의 축복기도를 하시기 바랍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 제가 안 믿는 가족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우리 가족을 위해 분명히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을 저는 왕으로 선포하겠습니다. 사탄아! 우리 가족에게서 손을 떼고 떠날지어다.”이렇게 왕으로 선포하는 기도를 하시기 바랍니다.
누가복음 18장의 비유를 잘못 이해한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의 자화상을 그 불쌍한 과부로 만들어 놓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과부가 한 말을 보십시오. 문맥을 자세하게 보면 그 과부는 애처롭게 애걸복걸하지 않았습니다. 재판관에게 들어서는 순간부터 단호한 모습으로 요청한 것입니다.
“당신이 불의하게 재판했으니까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시오”라고 담대하게 주장한 것을 봅니다. 그 과부는 아무 의지할 것도 가진 것도 없었지만, 자신의 주장이 너무나 정당하기 때문에 담대하게 주장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분명한 약속을 받은 사람은 구걸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이 내 권리임을 알기 때문에 당당한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사건이나 상황이나 질병에 대해서 명령할 때, 구걸하지 마시고, 권세를 가진 왕으로서 선포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사탄 앞에서만 왕과 제사장으로 삼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도 왕과 제사장으로 삼으셨다는 것을 아셔야합니다.
그래서 불의한 재판관이 “내가 너무 괴로워서 못 견디겠다.”고 한 것처럼, 우리 가족을
잡고 있는 사탄에게 내가 명령할 때, 우리의 정당한 요구에 사탄이 괴로워서 못 견디고 떠나게 되는 것입니다.
2. 우리가 하는 기도의 내용이 하나님의 뜻이라야 응답된다는 것에 지나치게 얽매이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이렇게 기도하는 분을 보았습니다. “하나님! 엄마가 중풍으로 누워 있습니다. 그런데 엄마를 낫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낫게 해주세요. 그런데 이것을 내 뜻대로 하지 마시고, 하나님의 뜻대로 해주세요.”라고 기도를 하는 것을 보았는데, 어머니의 병이 낫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물을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병에서 자유케 되는 것은 무조건 주님이 기뻐하시는 뜻인 것입니다. 그런데 “주여,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원합니다.”라는 이 기도는 사실, 성경에 딱 한번 나오는데,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한 기도입니다. 이 기도는 헌신의 기도인 것입니다. 헌신 중에서도 하나님의 사역을 두고 일생일대의 결단을 하는 기도인 것입니다.
예를 들어 “주님! 제가 아프리카의 선교로 헌신하기를 원하십니까?”라고 기도할 때에 하는 기도인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일상생활에 대해서 그렇게 기도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승진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승진하게 해주세요. 엄마의 병이 낫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낫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하는 것은 합당한 기도자세가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너희가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5장 7절에“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요한복음 16장 23절“ 그 날에는 너희가 아무 것도 내게 묻지 아니하리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하셨습니다. 그러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요한일서 5장 14~15절에“그를 향하여 우리가 가진 바 담대함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을 보시면,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조건은 하나님의 뜻대로 구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이 지시하시는 원리대로 기도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들으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들으시는 언어가 따로 있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을 더 높여 놓았습니다. 하나님이시라도 하나님이 세우신 말씀의 원리를 벗어나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하나님은 우리 믿는 자들이 믿음으로 살도록 믿음의 원리를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하나님이라도 믿음의 원리를 벗어나서 우리에게 응답하지 않습니다. 이 원리는 지난 시간을 통해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들으시는 것으로 모든 권세를 위임받은 그 아들 예수의 이름으로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기도의 응답은 믿음으로 얻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기도입니다. 이는 기도하는 방법에 관해서 말이지 기도하는 내용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들으시는 믿음의 언어가 무엇입니까?
실제의 예를 들어 보면, 내가 남편을 구원하고 싶은데 “우리 남편은 더 나빠지고 있어요. 날마다 술만 먹고 있어요. 게임중독에 빠져 있어요. 구해주세요 ”라고 부정적인 언어로 기도하면 이것은 믿음의 기도가 되지 못합니다. “오, 주님! 내 몸에서 혹이 더 켜지고 있어요.”이렇게 기도하면 이는 하나님이 들으시는 언어가 아닙니다. 내가 아무리 철야기도를 하고 금식기도를 해도 이런 불신이 가득한 기도는 응답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들으시는 믿음의 언어로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축복하실 때에는 그 이름을 바꿔주신 후 축복하십니다. 아브람을 아브라함으로 사래를 사라로 바꿔주신 것 잘 아시죠? 아직 아들이 하나도 없는 상태였지만 열국의 아비와 어미로 그 이름이 바꿔진 상태로 서로를 부르게 하셨습니다. 그 이름을 부를 때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떠오르게 하시면서 저들의 의식을 바꿔주시고 저들의 언어를 바꾸신 후에 저들은 이삭을 얻었던 것입니다.
야곱을 축복하시기 전에도 그 이름을 사기꾼으로 축복하실 수가 없었기 때문에 그 이름을 이스라엘로 바꿔주신 후에 축복하셨습니다. 그 이름의 의미는 하나님을 이긴 자 즉 하나님의 왕자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보십시오. ‘남편이 나빠지고 있다’고 불신의 말하는데 어떻게 하나님이 그를 축복할 수 있겠습니까?
‘혹’이 점점 더 커지고 말하는데 어떻게 응답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예비하신 목적과 뜻에 일치하는 기도를 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들으시는 조건은 그의 뜻대로, 그의 말씀대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그의 뜻대로 기도한다면, 응답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항상 좋은 것을 예비해 놓으신 것입니다. 믿으시면 아멘!!
3. 고난에 대한 잘못된 이해를 일소해야 합니다. 흔히 사람들은 <하나님은 나를 겸손케 하기 위하여 이 고난을 주셨다>고 말하기를 좋아합니다.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런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요한삼서1장 2절을 보면“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하신 말씀을 보면 하나님은 우리 영혼이 잘됨 같이 범사에 모든 일이 잘되고 건강하기를 진정으로 원하시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3장 8절을 보면“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 함이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마귀는 우리를 죽이고 멸망시키려고 하는 자입니다. 주님이 바로 이 세력을 멸하신 것입니다. 할렐루야!!
누가복음 8장 22~25절을 보면 “하루는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오르사 그들에게 이르시되 호수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매 이에 떠나 행선할 때에 예수께서 잠이 드셨더니 마침 광풍이 호수로 내리치매 배에 물이 가득하게 되어 위태한지라 제자들이 나아와 깨워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죽겠나이다. 한대 예수께서 잠을 깨사 바람과 물결을 꾸짖으시니 이에 그쳐 잔잔하여지더라.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하시니 그들이 두려워하고 놀랍게 여겨 서로 말하되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물을 명하매 순종하는가 하더라.”
주님은 우리를 삼키려는 마귀의 일을 꾸짖으시고 잠잠하게 하시는 분입니다. 우리를 평화롭고 안전한 곳에 두시길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이것은 하나님이 나를 겸손케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마귀가 괴롭게 하는 일을 그저 순응하고 견뎌내려고 하는 것처럼 생각게 되기 때문에 이는 하나님의 말씀과 상충되는 생각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이름으로 이런 풍파를 거절하고 책망하고 물리쳐야 합니다. 이런 어려움을 부질없이 당할 필요가 없습니다. 고난을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고 말하면 기도할 이유도 없고, 기도 응답에 대한 확신도 가질 수 없게 됩니다.
질병이 있는데 하나님이 나를 겸손하게 하기 위해서 나에게 주신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내가 치유를 받아야한다는 확신이 없게 되며, 질병에 대해서도 담대하게 명령할 수가 없습니다. 설령, 내가 죄를 지어서 질병이 생겼더라도 하나님은 그 질병을 치유하기를 원하고 예수님이 채찍에 맞음으로 나았다는 말씀에 대한 확신이 있다면, 우리는 그 질병을 향해 담대하게 떠나라고 명령할 수 있는 것입니다.
승진이 안 되었다면, 하나님이 나를 겸손케 하려고 승진이 안 된 것이라고 해석을 할 경우에는 “다음에는 승진될지어다. 나는 이 상황을 거부한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 나는 이 승진과 상관없이 번성하게 된다.”라고 담대하게 주장할 수 없게 되며, 이 상황을 변화시킬 수 없는 것입니다. 문제는 담대함입니다. 어떤 상황이나 사건에 대해서 나의 해석에 의해, 담대함이 생길 수도 있고, 뒤로 물러나 침륜에 빠질 수도 있는 겁니다.
우리는 어떤 상황이나 사건에 대해서 하나님의 성품과 본질에 어긋나면 해석이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는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아멘!! 이 권능은 어떤 상황이든지 변화시킬 수 있는 힘입니다. 성령을 받은 사람에게 상황을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너를 겸손케 하려고 주신 것이니 그대로 순응하라”한다면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성품이나 본질에 어긋나기 때문에 이건 모순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사탄의 도구를 사용해서 우리를 연단시키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연단시키는 것은 성령님과 말씀을 통해서 하는 것입니다. 고난을 통해서 연단이 조금은 될 수 있지만, 대부분이 쓴 뿌리가 더 많이 생깁니다.
4. “믿었으면 아무 말하지 않아도 된다.”하는데 이건 말씀과 상충되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11장 23절을 보면“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하셨는데. 우리가 그렇게 말하는 것은 우리가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말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우리의 믿음이고, 우리의 영인 것입니다. 나의 말은 나의 믿음이고 나의 영입니다. 창세기에서 “하나님의 음성이 동산에 거니시더라.”고 했는데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말씀으로 다가오시고 말씀으로 응답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만남도 우리의 믿음도 모두가 우리의 말로 이뤄집니다. 그래서 우리는 말해야 합니다. 내 말은 우리의 믿음이며 영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도했을 때 응답된 것을 믿으면 어떤 때는 시간이 걸릴 수도 있지만 반드시 응답됩니다. 그런데 왜 기도가 실패했을까요? 그건 원리대로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질병은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떠나갈 지어다!”라고 명령했으면, 그 다음에도 계속해서 이렇게 명령하는 것이 맞는 기도일까요? 그렇게 명령했으면 치유된 것을 믿고 “건강은 내 것이다. 나는 걸을 수 있다. 나는 치유 받았다”이렇게 믿음에 동의하는 고백을 계속하는 것입니다.
많은 분들의 기도가 응답되지 않는 이유는 기도를 해놓고 그 다음에 자기의 부정적인 고백으로 기도를 무효화시키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4장 2절에“그들과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들은 바 그 말씀이 그들에게 유익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과 결부시키지 아니함이라”
영의 세계에서는 말에 의해서 움직여지기 때문에 나의 부정적인 말이 충분히 그전에 한 말을 무효화시키고 마는 것입니다.
내가“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돈은 올지어다.”고 명령하면, 나의 주위에 있는 천사들이 그 말을 듣고, 천사들이 돈을 보고 “이쪽이야. 이쪽으로 와!” 하다가 내가“정말 나는 되는 것이 없어” 이렇게 부정적으로 말하면, 천사가 “어쩌라는 거야” 하면서 그 기도가 무효화되는 것입니다. “암세포는 떠나라”고 명령하고 난 다음에 “해봐도 소용이 없네, 낫기는 뭘 소용이 없네!” 이렇게 말한다면 암세포가 떠나가다가 “살아도 되네. 계속 번져라! 번져!”이렇게 나의 부정적인 말로 상황을 더 악화시키는 것입니다.
이렇게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지혜롭지 못한 말로 자신들의 기도를 무효화시킵니다. 문제를 붙들지 말고 놓아 버려야 합니다. 해답을 붙들어야 합니다. 질병을 붙들지 말고 치유를 붙들어야 합니다. 가난한 것을 붙들지 말고 부유를 붙들어야 합니다.
고린도후서 4장 6절에“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했는데 여기서 “빛이 있으라.”는 <out of darkness>입니다. 이는“어둠에서 빛이 나오라”는 말입니다. 곧, 어둠에서 빛을 끄집어내라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문제에는 반드시 해답이 있습니다. 어려운 상황 속에 분명히 해답이 있습니다. 정확하게 기도하는 법을 아는 것은 승리의 삶을 위한 열쇠 중의 하나입니다.
성경은 반드시 내 질병이 치유된다고 하는데, 내가 아직도 아프다고 말하고, 악화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비성경적인 말입니다. 기도하는 것은 영적인 법칙에서 움직이는 것입니다.
기도의 본질은 내가 하나님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내 자신을 하나님의 말씀에 맞추어 변화시킴으로서 하나님이 나를 위하여 자유롭게 역사하실 수 있도록 내 자신의 위치를 바꾸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기도가 응답될 것인지 아닌지를 결정하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나 자신인 것입니다. 기도를 움직이는 것은 믿음이지 기도 그 자체가 아닙니다. 기도는 법적 계약에 근거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언약하신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축복하신 것처럼 하나님이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와의 언약의 관계에서 우리가 기도하면 반드시 들어준다는 법적인 계약을 근거하여 기도를 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기도에 대한 바른 의식입니다. 아멘!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