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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지 보고 전화를 드렸습니다."
"신사역 주유소에서 내려 전화를 주십시오."
문제는 회원가입비라고 하는 삼만원이었다. 세상이 그리 호락호락한 곳이 아니어서 애꿎은 돈만 날리는 경우가 많기에 호기심이라고는 하지만 신중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문제는 전화를 받는 여자의 목소리가 믿음이 가지 않는 톤의 목소리였다는 점이다. 사람이란 대체로 그 목소리만 들어도 그 사람의 성향을 어느 정도 파악할 수가 있지 않은가. 그건 그 목소리의 톤이라기 보다는 서두르는 듯한 말투와 또 지나친 확신이 주는 겉넘음 같은 것이었다.
"지금 어디세요?"
"그럼 조금 기다리세요. 지금 면담 중이거든요."
참 희한한 일이다. 면담을 한다고 다른 사람을 길거리에서 기다리라고 하는 것이 말이 되는가. 그렇다면 다른 사람들이 들으면 안 되는 그런 비밀한 사연이라도 있다는 걸까. 길거리 면접이라도 본다는 것인가. 하지만 조금 후 그 저음의 기분 나쁜 목소리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브로커 같은 기획사의 여자는 안마시술소 삼층의 사무실로 올라오면 된다고 말했다. 건물엔 영화제작이란 글씌가 버젓이 써 있고 실내에 들어서자 영화며 드라마의 포스터들이 즐비하게 붙어 있었다. 그 여자는 무언가를 속이는 사람처럼 서둘러 연출했다. 네 사장님, 사람이 필요하다구요. 어제 쌍둥이 둘은 일 나갔습니까. 하나만 나가고 하 나는 나가지 않았다구요. 여자는 목소리와는 달리 중후한 나이였다. 이를테면 방송일을 하는 사람들을 믿지 않으면 누굴 믿느냐는 말투였다.
"방송국이 부도나면, 우리 나라도 문을 닫아야 하는 것 아닌가요?"
그녀는 말을 앞세워 내가 가야 할 곳을 알려주었다. 방송 아카데미 칠층으로 가 김부장을 찾으라는 것이었다. 언제든 오전 열 한 시에서 저녁 여섯 시 사이에 나오면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여의도역 삼번 출구에서 셔틀버스를 기다리는데, 이전 용산에서 보았던 수학원리교재 판매 영감을 봤다. 그 영감은 이번에는 여의도로 옮겨 자신이 만들었다던 수학원리에 관한 책을 설명하고 있었다.이렇게 복잡한 식의 뺄셈이라고 해도 간단합니다. 같은 수를 뺄 때는 무조건 9에요... 그는 줄줄줄 자신이 수학셈을 하면서 얻어낸 묘수 풀이를 하듯 지나가던 사람들에게 수학원리를 설명했다. 깡마른 영감의 손에는 색분필이 오래도록 칠판에 글을 써 설명한 흔적으로 남아 있었다. 인도에서 왔다는 아라비아 숫자의 기원에 대해서도 그럴듯하게 설명을 하던 그였다. 교육타임즈에 자신의 기사가 소개 되었던 내용을 스크랩하면서 사람들에게 신뢰감을 주었는데, 사람들이 미적미적할 때 가까이 가서 자신의 이력과 함께 수학원리 하나를 더 설명하면서 결정적으로 주머니의 이만원을 끄집어내는데도 탁월했다. 그는 오늘 따라 책이 많이 팔린다면서 어린아이처럼 좋아했다. 방송 아카데미란 곳에 갔을 때 들려오는 노랫소리와 함께 어디선가 사람들이 몰려왔다. 그들은 다 엑스트라로 출연하기 위해 모여든 사람이었다. 정년 퇴직을 했다는 큰 등치의 남자는 자신이 요즘 출연하고 있는 사극에 대해 설명했다.
"지난 번에 난 장군역으로 출연을 했어요. 그런데 이건 나이 들어갈수록 힘들더라구요.밤잠 못자면서 일한다는 게. 더구나 이 뜨띠 더운 여름날 두터운 투구를 쓰고 밤새 돌아다니다 보면."
수많은 사람들이 이전에 일했던 일당을 받으러 왔는데 그들이 받으러 오는 돈은 그들이 두 달 전에 일한 것에 대한 보수였다.
"이 바닥이 그래요. 일을 하고 나면 두 달 후에야 돈을 준답니다."
등에 문신을 한 중년의 여자가 들어선 이후에 사무실은 시끄러워졌다.
"지부장 어디 갔냐니까?"
"조금 기다리라고 안 그래요. 지금 식사하러 갔으니까."
"그럼 언제 들어올지도 모르는데 무작정 기다리라고. 여섯 시가 넘어서도 안 오면..."
"그렇게 못 믿으면 어떻게 일을 해요."
"난 원주에서 왔어."
"홍천에서 오는 사람도 있어."
"아니 왜 화를 내고 그래."
"누가 먼저 화를 냈는데."
기획사의 직원의 불친절에 대해 자신이 일한 걸 받으러온 여자는 발끈 화를 냈다.
"뭐 이런 게 다 있어. 돈 받으러 온 사람을 죄인 취급 해."
곳곳에 이전에 방영되었던 프로들의 포스터가 붙어 있고 지부별로 사진이 붙어 있는 보조연기자들의 프로필이 보였다. 뚱뚱한 지부장이란 여자는 사진과 함께 내 이력을 묻는 서류를 작성하게 하고 젊은 사람들은 부지런하면 꾸준히 일을 할 수 있다고 했다. 사채업자처럼 생긴 기획사의 여자는 오래도록 이 바닥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상대해 온 이력을 얼굴에 가득 담은 표정이었다. 각 방송사의 로고가 새겨져 있고, 방송국에서 요구 받은 프로의 엑스트라 인원을 공급해주는 일을 맡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엑스트라는 전형적인 일용직 노동자였다.하지만 일용직이라고 겉으로는 소개 해놓고 그들이 일한 대가는 두 달이나 지나서야 돈을 주는 식으로 철저히 방송국과 기획사에게 유리한 조건으로 되어 있었다. 그것이 엑스트라 인생의 노동조건이라니, 그래서 일까 그 일을 꾸준히 하는 사람은 많지 않은 듯 보였고 뭣 모르고 자꾸만 광고를 보고 일을 하러 오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다.
한 밤중 여의도의 방송국 별관에 모인 사람들은 자정이 지나도록 수없이 몰려들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다 엑스트라로 출연을 한다니, 방송국의 대형 프로젝트들이 창출해내는 고용효과도 대단했다. 사극은 문경에서 거의 대부분 촬영을 많이 한다고 했다. 이전 태조 왕건으로부터 그곳 세트장을 이용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지금은 인기 절정의 고주몽, 그리고 SBS의 연개소문이 뜨면서 사극에 동원되는 인원이 대단했다. 그렇지 않아도 <포도밭...>으로 가느냐 아니면 <서울 1945>에 편을 갈라서면서 자신의 출연일지를 제출하는 사람들로 자정의 방송국 별관은 술렁거렸다. 대규모 엑스트라 인원을 필요로 하는 방송국을 위해 인원조달을 하고 그 인건비를 받아내는 브로커 같은 기획사들의 지부별 인원관리 체제에 의해 모여든 사람들이 자신의 지부가 적힌 일지를 제출하면서 그날 시작될 일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일은 자정에 시작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는데, 그 인건비 지출규정이라고 하는 것이 오고 가는 시간은 일하는 시간에서 제외되는 식으로 일용직 엑스트라들에게 불리한 조건으로 되어 있었다. 모여든 사람들은 나이든 할머니 할아버지부터 어린 아이들까지 다양했다.
열 두 시까지 모이라던 사람들을 파악하는데 한 시가 넘어가고, 백 이삼십명의 인원들이 버스를 기다렸다. 엑스트라 경험이 많은 사람들에게 엑스트라 상황을 물었다. 오십 줄에 들어섰지만 아직 젊어보이는 사내는 군포에서 왔다고 했다. 자신은 연개소문에 출연을 했었는데, 이상하게도 당나라 군대에 들어가게 되어 고초를 겪었던 일을 말해주었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옛날 군대에 들어갔다고 생각하면 되요. 고구려 군대에게 ?i기는 장면이었는데 하루 종일 고구려 군대에게 ?i겨 우왕좌왕하는 장면을 찍은 거예요. 밤새 잠도 못자고 헤매야 했다니까요."
그래도 현대물은 낫나고 했다. 사극들에 동원되는 일들은 힘들어 나이 드신 분들이 감당하기에는 힘에 부치고 그러다 보니 젊은 사람들이 일을 많이 한다고 했다. 텔레비전에서 보는 사극 속의 인물들 모습이 눈에 선하게 떠올랐다. 왠지 맹하고, 무언가 전투적인 모습이라고 하기에는 어색한 노인네의 모습이 가끔 비치는 것을 보면서 엑스트라 치고는 너무 안 어울린다고 생각했는데 그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젊은 인원을 다 댈 수가 없어 정년 퇴직한 노인을 데려다 찍다 보니 그렇게 전의가 느껴지지 않는 표정의 노인 군대를 만들어놓았던 것이었다.
아닌게 아니라, 버스를 타고 합천으로 가는 길에 만난 옆 자리의 남자는 정년 퇴직을 하고 마땅한 일자리를 찾지 못해 집에 있기도 그래, 엑스트라를 하면서 용돈도 벌고 전국 각지의 여행을 다니고 있었다.
"좋지 뭐, 내 돈 안 들이고 여행도 하고 또 텔레비전 속의 인물도 되어보고."
그는 며칠 전 일본에 다녀왔는데 일본에선 지하철 말고 지상철인 전철과 모노레일등이 도시 곳곳에서 그 기능을 하기 때문에 거리가 그렇게 밀리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서서히 한강을 넘어서 고속도로를 달려가고 있었다. 번개불에 콩 구워 먹듯 갑작스럽게 떠난 엑스트라 여행이었다. 불편한 자세로 꾸벅구벅 졸면서 떠나는 무수한 사람들, 거의 대부분은 처음 나오는 사람이었고 엑스트라 일에 재미를 붙이고 있는 몇몇 엑스트라 고정출연자들도 있었다.
" 이 일도 재미를 붙이면 다른 일 못 해요. 그래도 막일 보다는 낫잖아요. 무언가 만들어낸다는 재미도 있고..."
아침이 되어서야 도착한 합천읍내로, 식사를 하기 위해 버스를 타고 떠났다. 식사란 것도 자기 돈 내고 밥을 사 먹는 조건이었다. 물론 돈이야 나중에 식대로 나온다고 했지만 그 사실도 모른 채 떠나온 사람들은 꼼짝 없이 밥을 굶으면서 그것도 밤샘 촬영을 해야 했다. 급작스러운 엑스트라 출연일정 앞에 대책없이 따라나선 대학생들과 돈 삼만원이 아까워 일을 시작한 사람들은 그야말로 급작스러운 엑스트라 출연 앞에 당황해 하는 눈치였다. 모든 것이 외상이었다. 자신의 돈을 들여 밥을 사먹고 일을 해주는 조건으로 두 달 후에 돈을 받는 일방적인 계약이었다. 어쩌면 방송국처럼 힘이 있는 곳에서 그저 엑스트라들을 위한 최소한의 배려도 없이 그저 일방적인 조건으로 그들이 인기연예인들을 만나기 위해 불편함을 감수하면서까지 방송출연을 고집하는 팬들로 전락시키고 있었다. 권부에 갈수록 그저 끄나풀 하나 없는 인생들이 더 불평등 앞에 자신의 처지를 실감하듯, 엑스트라들에게는 선택이란 것이 있을 수 없었다. 새벽, 버스를 타고 합천 읍내에 갔을 때 곳곳에 인민군 복장을 한 사내들이 식당을 전전했다. 합천이 갑자기 빨갱이 세상이 된 것이었다. 주민들은 그런 인민군들의 출연을 신기한 눈으로 쳐다봤다.
배역을 정하는 일은 유격훈련을 시키는 조교들처럼 챙이 긴 모자를 쓴 젊은 반장들의 지휘 하에 일사불란하게 이뤄졌다. 이쪽에 계신 분들은 노인입니다. 여기 여기 여기, 이 분들은 노인이구요. 또 이 분들은 서민, 또 이분들은 인민군, 요기 요 분들은 남로당 청년들... 그렇게 정해진 사람들은 배역에 맞는 의상으로 갈아 입고 분장을 했는데 어리숙한 사람들이 갑자기 변신을 거듭했다. 홀쭉한 볼을 가진 사내가 갓을 쓰고 수염을 달고 나오는가 하면, 수염이 긴 사내 또한 흰 모시옷을 입은 상투차림으로 변했고, 순식간에 사람들의 변신은 대단했다. 갑자기 육십 년 전의 상황으로 사람들이 순식간에 변해버렸다. 머리에 풀 같은 걸 바르면서 머리칼을 고정시키면서 분장을 해주는 사람은 오래도록 그 일에 전문적인 능력을 가졌다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 순식간에 사람들의 표정과 분위기를 바꿔놓았다. 아주머니들은 오십년대 복장으로 보따리까지 챙겨들고 나타났다. 지팡이를 짚고 나타난 노인, 가방을 든 인텔레겐챠가 된 지식인 신사에 이어 나는 남로당의 청년이 되었는데 내게 주어진 건 시퍼런 대나무 죽창이었다.
곳곳에 씌여진 김일성 장군 만세,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만세의 깃발 그리고 거대한 서울역과 그 주변 건물들의 세팅 장 앞에 한 드라마를 찍기 위해 얼마나 많은 수고로운 작업들이 함께 하는 지를 실감했다. 텔레비전에서 보았던 세트장이었다. 그 옆으로는 태극기 휘날리며를 찍었던 몇 개의 세트장이 남아 있었고, 끊어진 한강다리, 이층 양주옥, 인민위원회 건물 등 한 마을이 스티로폼에 칠해진 구조물로 만들어져 있었다. 그 수 많은 사람들의 피난행렬과 차, 그 속에서 만나고 헤어지는 혜경과 동우의 관계며, 인민군 소좌인 원혁 사이에서 벌어지는 드라마틱한 사건들이 펼쳐지는 것이었다.
"텔레비전을 끊어버렸어요."
"그래도 서울 1945 프로 같은 건 괜찮찮어."
이런 이야기를 들을 만큼 글을 쓴다는 사람에게도 상당히 괜찮다는 평가를 받았던 터였지만, 실제 그 드라마를 찍기 위해 들인 공력을 생각하면 참으로 대단했다.
그날 찍을 주요한 사건은 서울역 앞에서 벌어지는 인민재판이었다. 악덕 친일 자본가인 이인평과 한만수에 대한 인민재판이었다. 그곳에 앉아 있는 다른 집안의 아들, 인민군 소좌의 최운혁 그리고 재판관 등의 표정이 엄숙했다. 곳곳에는 인민재판을 알리는 공고문이 나붙어 있었다. 스탈린과 김일성의 사진이 나붙은 건물을 바라보면서 서울역으로 모여든 사람들, 스탭들은 곳곳에서 방향을 정한 채 걸어가고 있는 거리의 풍경을 연출했다. 자연스럽게 사람들이 어울어지는 움직임을 연출하는 일들을 위해 반장들의 역할이 중요했다. 상투를 맨 노인들, 짐을 든 아주머니와 노인들, 그리고 수 많은 학생들어 어우러졌다. 인민군이 진주한 서울, 그곳에 남겨진 사람들 속에서 벌어지는 서울의 이야기였다. 인민재판이 벌어지는 서울역 앞으로 이인평이 끌려나왔다. 민족의 죄인이란 글귀를 붙인 노인과 최운혁의 팽팽한 시선이 만났다. 강석경, 김혜경, 그리고 이인평의 집에서 일하던 집사와 아주머니의 증언 그리고 그들을 심문하는 검사의 날카로운 심문이 이어졌다.
나는 내내 서울역에서 죽창을 든 남로당 청년으로 자리를 지켰다. 최운원혁의 아버지로 나오는 정한용과 그 아들의 연기, 김호진이 연기한 동우란 인물의 밀짚모자 아래의 눈빛, 그리고 혜경의 애간장이 타는 듯한 표정연기, 흡인력 있으면서 날카로운 최원혁이란 인물의 설정이 이전의 우익 일변도의 드라마와는 또 상당히 다른 드라마의 분위기를 살려주었다. 공산당 치하로 떨어진 서울에서 벌어지는 일들이라니, 그것도 좌익을 일방적으로 괴뢰군이라고 몰아붙이지 않고 그 안에서 벌어지는 인간사의 문제를 조금 더 객관적으로 보려는 시각이 돋보였다. 자신의 선택이 아니라 급작스럽게 합천으로 떠나와 남로당의 청년이 된 나는 졸리는 눈을 뜬 채 피곤한 몸으로 죽창을 들고 재판을 호위했다.
감독이라고 불리우는 피디는 쉰 목소리로, 자자... 고우...를 외쳐댔다. 조명, 카메라 감독들은 보조들의 도움을 받아 수없이 방향을 달리하면서 연기자들의 표정과 눈빛을 담아내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 서둘러 찍느라 카메라 감독이 불편한 심기를 보이자 감독은 카메라 감독의 어깨를 주물러 주라고 했다. 허스키한 경상도 말투에 추진력이 대단해 보이는 감독은 대피디가 사라진 자리에서 반장들에게 작업지시를 내리면서 전체를 아우르면서 드라마를 연출했다. 드라마를 찍는다는 건 하나의 거대한 조직을 움직이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주변에서는 공포탄을 쏘면서 또 다른 장면을 찍는 총소리가 밤하늘에 울려퍼졌다. 재판장 옆에 앉은 엑스트라는 어깨가 젖혀지도록 연기를 했는데, 그 남자는 이전에 상투를 쓴 노인으로 출연을 했던 자였다. 실제보다 말라 보이는 연기자들, 그리고 별반 다르지 않은 탤런트들에게 다른 건 그들이 몰입해 들어가는 드라마 속의 인물연기였다. 그들은 현실 속의 인물이 아니라 드라마 속의 동우와 운혁, 그리고 혜경과 석경으로 불리우고 있었다. 또한 눈빛 하나의 움직임을 위해 근거리 촬영을 함서 그 눈빛과 표정 하나하나를 잡아내는 세심한 촬영 또한 돋보였다. 더우기 연기자의 시선이 어느 곳을 향해야 하는 지를 감독은 몇 번이고 확인하면서 촬영을 했다.
드라마를 찍으면서 다른 사람의 배역을 위해 자신의 대사를 외워주는 원혁의 배려와 그 분위기 있는 연기에의 몰입이 돋보였다. 드라마 하나를 찍기 위해 들어가는 분장과 소품, 그리고 조명과 카메라, 등 수 많은 스탭, 그리고 인원을 효과적으로 움직이기 위한 보조 반장들의 일사불란한 통제가 감독의 입끝에서 자 오케이...고우...로 살아났다. 연기자들과 감독은 계속 줄담배를 피워대면서 혼신의 힘을 기울여 드라마를 찍고 있었다. 어둔 밤 총을 쏘면서 엑스트라들의 반응을 직접 만들어내는 실감나는 연기유도도 특별했지만 홍요섭으로 나오는 재판장의 그 중후하면서도 완전히 소화해낸 듯한 내면연기, 최종원이 열연하는 이인평 역 또한 그저 평범할지도 모르는 대사가 그 연기자에 의해 어떻게 실감나는 상황으로 살아나는지를 느낄 수 있었다.
빵과 국수를 삶아 놓은 소품들을 이용해 찍는 어둠 속의 노인과 아들의 대사는 우리가 익히 보아온 모습이지만 그 하나를 찍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 주위를 오고가야 하는 지를 보여주었다. 나는 내내 드라마를 찍는 장면을 보면서 글을 쓴다는 건 무얼까 생각했다. 하나의 상황을 연출한다는 것 그 안의 세팅과 소품 분장과 연기력이 만나 이루어지는 작품을 보았기 때문이다. 작가는 수많은 연기자들의 연기와 흐름을 전체적으로 파악하면서 컷을 외치는 감독과 같다. 지문과 대사 사이에 줄을 그어 놓은 대본을 보면서 끝없이 모니터에 뜨는 연기자들의 화면을 보면서 ... 감독은 자아 좋아... 자아... 아주 좋아... 자 다시 한 번...을 외치는 그 선택을 하고 있었다. 그건 비쳐지는 상황을 누구보다도 잘 읽고 있는 감독의 연출력이었다. 어둠 속 한 시 두 시를 넘어 세 시로 접어드는 시각에도 촬영은 이어졌다. 한 작품을 만들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수많은 잠못 이루는 밤이 그곳에 쏟아지는 지를 보았다. 피난을 가고 한강 다리가 부서지고, 그곳에서 쓰러진 채 가마니를 둘러쓰는 동우, 그 이전 서대문 형무소에서의 총살 장면과 그 안에서 살아남은 혜경, 죽은 동지의 시신을 찾지 못하는 운혁...역사적인 다큐멘터리 화면과 함께 펼쳐지는 인물들의 사연과 가족사, 그리고 서울에서 펼쳐지는 일들의 드라마틱한 장면 하나 하나가 그렇게 밤새워 만들어지는 걸 확인했다.
돌아오는 길 내내 불편한 자세로 꾸벅꾸벅 졸면서 돌아오면서 생각했다. 얼마나 작품 하나를 만들어내기 위한 열정이 뜨거워야 하는 지를 말이다. 그저 엑스트라 인생과 다를 바 없는 내 인생의 어느 한 날을 나는 합천에서 보냈다. 본의 아니게 난 남로당의 청년으로 죽창을 들고 꼬박 하루를 보냈다. 돌아오는 길, 나는 우리 주변 곳곳에 설치 되어 있는 수 많은 세트장을 보았다. 글을 쓰는 일이란 어쩌면 저토록 번거로운 연출을 위해 밤을 새는 일과 다르지 않으리라. 역사는 너무 냉철한데, 작품은 그 안에서 또 다른 연결고리를 만들어준다. 새로운 관계의 끈을 가지고 깨어난다. 드라마 속의 인물과 소설 속의 인물은 다르지 않다. 작품 속에 살아 있는 인물들의 이미지와 표정, 그 생생한 눈빛을 그려내야 하는 건 작가의 몫이다. 작가는 또 다른 세상의 연출가이기 때문이다. 이미 작가는 그 많은 연출의 이면을 읽어낸다. 번거로운 장면을 넘어선 상상력은 연출자들에게 풍부한 에너지를 공급한다. 세상은 연출된 것 이상으로 더 많은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갑작스럽게 떠난 인생의 또 한 바닥, 그곳에서 엑스트라들을 움직이는 연출의 밤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런데도 도시는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정도 이상으로 밝고 환했다.
첫댓글 너 나온 줄 알았으면 자세히 볼 걸!!! 일본 전국시대 '대망' 좀 읽느라고 모처럼 들어왔더니 읽을 것도 많고, 친구에게 미안키도 하네. 잘 있었지?
지리한 장마철에 '대망' 같은 대하소설을 읽는 게 딱 어울리는군. 급작스럽게 찍었던 프로의 방송은 이번 주말에 나오는데, 전국적으로 얼굴이 팔리는 일이어서 쑥쓰럽구만. 그저 몇 푼 벌어보려고 나간 것인데 갑자기 남로당 청년이 되어 버렸어. 엑스트라를 하면서도 나는 최대한 나를 숨겼는데 카메라의 앵글이 어찌나 크던지 나를 감출 수가 없더라구. 안경을 벗어 흐릿한 또 다른 세상 저편에서 조명과 함께 카메라의 필름이 돌아가고 있었지. 짧았지만 그래도 독특한 경험이었네. 병록이도 더위에 잘 지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