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옥 의사
영화 ‘암살’을 보셨는지요!
일본 경찰과 총격전을 벌인 광경은 바로
김상옥 의사의 내용을 전개한 사건입니다.
여기 김상옥 의사의 손녀딸이 작곡한 ‘평화통일포럼의 행진곡’이 있습니다.
이 곡은 본 회의 고문이 정진태(김상옥의사 기념사업회 회장) 장군께서 부탁하여 작곡한 곡입니다.
<김상옥 의사께서 거사에 앞서 남긴 말씀>
남아로서 세상에
태어나 구구하게 살지 않겠다 _丈夫此世 安事區區
나의 생사가 이번 거사에 달렸소, 만약 실패하면 내세에서 만나봅시다.
나는 자결하여 뜻을 지킬지언정 적의 포로가
되지는 않겠소
_1922년 12월 임정을 떠나며..
김상옥(金相玉, 1890.1.5~1923.1.22)
김상옥 의사는 1890년 1월 5일 서울에서 군관 김귀현의2남으로
출생하여 13세에 서울 동대문감리교회의 '信軍夜學' 다니면서 어의동 공립보통학교(현 효제초등학교)에 다녔다.
1909년 3월 동흥야학교(東興夜學校)를 설립하여 불우한 청소년들에게 배움의 길을 제공하고 1912년에는
동대문 밖 창신동에 永德鐵物商을 설립하였다
1916년 5월 한훈, 유장열
등과 전남 보성의 조성헌병대를 기습하여 무기를 탈취하여 반민족분자 2명을 처단하였다.
1917년 4월 일화배척(日貨排斥)을
목적으로 국산품 생산 보급(말총모자 창안, 양말, 장갑, 농기구 등) 및
물산장려운동을 전개하여 철물상이 더욱 번창하자 '공인조합(工人組合)'을 만들어 근로자들의 권익을 보호하고, '동업조합(同業組合)'을 묶어서 동업 경영주들의 이익과 편의를 도모하는데 앞장섰다.
1919년 직공 50여명을 인솔 3•1운동에 참여하고, 귀가 길에 만세를 부르는 여학생을 협박하는 일경(日警)을 단신으로 가격하고 장검 1개 및 단검 2개를 탈취하고 여학생 구출하였다.
4월에는 동대문교회의 영국인
피어슨여사 댁에서 항일비밀 결사인 '혁신단'을 조직, '혁신공보'를 발행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독립사상을 계몽에 전념하다
일경에 체포되어 종로경찰서에서 40여 일간 고문과 고초를 당하셨다.
1919년 12월 '혁신단' 중심으로 '암살단'을 조직하여 바로 김좌진 부대 요원 김동순 등과 조직을 강화하고
1920년 3월 김동순 편에 만주 길림군정서에 군자금 지원하고, 8월에는 미국 의원단의 서울방문 계기로 총독처단-총독부 폭파 및
시가전을 추진했으나, 일본경찰에 의해 동지들 전원이 붙잡혀 추진하지 못하고, 암살단 동지 유득신과 군자금을 모금하여 1920년 10월말 상해로 망명하였다.
일본경찰은 '김상옥사건 궐석재판'에서
사형 선고를 내리고 수배대상에 올렸다.
1920년 11월 상해 임정요인 김구, 이시영,
조소앙, 조완구, 신익희, 이동휘, 윤기섭, 김원봉
등과 군자금 모금방안 및 거사행동계획을 협의하고
1920년 11월 배중세, 고인덕 동지들과 귀국한 후 밀양 마산리 한봉인 집에서
폭탄 2개를 밀조하여 최경학에게 밀양서 투탄케 하고 다시 상해로 망명하였다. (제2차 망명)
상해에서 다시
의열단을 조직한 후 1921년 7월 독립자금 모금 및 거사
준비 목적으로 권총, 폭탄, 무기 등을 휴대하고 서울에 잠입 후, 서울, 충청, 전라 등지에서 임시정부 원조자금(軍資金) 모금한 후 다시 상해로 3차
망명하였다.
1922년 4월 상해에서 <한당(韓黨)> 혁명사령부장이 된 후, 1922년 12월 1일 임정 요인들과 총독 주살 및 총독부 폭파 협의 후 의열단장 김원봉으로부터
권총 2정, 신익희로부터 권총 1정, 임시정부
등에서 폭탄 6개(대형 4개, 호형 2개) 및 실탄 800발을 받아 안홍한,
오복영 등을 대동 선편으로 상해-안동(현 단동)을 경유 압록강을 건너 경의선 화차를 이용하여 일산역에서 내려 서울에 잠입하였다.
1923년 1월 12일 독립운동 탄압 본거지인 종로경찰서를 폭파시키고 일경 및
일본기관지 매일신보 사원 등 10여명에게 중경상을 입혀 일제의 간담을 서늘케 하였으나 일경은 주인공이
누구인지 몰라 수색 중에, 김의사는1923년 1월 17일 日本議會에 참석차 동경에 가는 사이토 총독을 서울역에서
처단코자 후암동 매부 고봉근(高奉根) 집에서 준비 중에 있었는데
매부집 행랑방에 들어 있는 여자가 종로경찰서에 있는 친정오빠에게 밀고하여
종로경찰서는
1월 17일 새벽 5시에
우메다(梅田新太郎)·이마세(今瀨金太郎) 두 경부 지휘 아래 20여
명의 무장경찰에게 은신처가 포위되었다.
은신처가 탄로나자
단신으로 두 손에 권총을 들고 총격전을 벌였다.
먼저 종로경찰서
유도사범이며 형사부장인 다무라(田村振七)를 사살하였다. 우메다.이마세 경부 등 수명에게 중상을 입힌 뒤 추격하는 500여명의 일본경찰에게 사격을 가하면서 눈 덮인 남산을 넘어 왕십리(금호동)에 있는 안장사(安藏寺)에서
승복을 빌려 변장하고, 짚신을 거꾸로 신고, 수유리 이모
댁에 들어가 잠시 휴식 후, 1월 22일 시내 효제동 생가집
옆 이혜수 동지댁에 은신 동상 치료 중 새벽 5시반경 경기도경찰부장 우마노(馬野) 총지휘 아래 보안과장 후지모토(藤本)가 부지휘관이 되어 시내 4대
경찰서에 총비상령이 내린 가운데 기마대와 무장경관 등 군경 1,000여 명이 삼엄한
경계를 한 가운데 500명이 4중으로 은신처를 중심으로 효제동 일대를 겹겹이 포위하였다.
이번에도 단신으로
양 손에 권총을 쥐고 대총격전을 3시간 반 동안 벌였다. 구리다
경부를 비롯한 16여 명을 살상했으나 중과부적이었다. 탄환마저
다하여, 마지막 남은 탄환 한발을 가슴에 겨누고 벽에 기댄 채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면서 자결, 순국하였다. (34세)
※11방의
총알을 맞은 독립운동가 김상옥 의사는 일본경찰에 잡히지 않으려고 마지막 총알 하나로 자결했다.
▷기념식에서 개식사를 하시는 평화통일포럼 고문 정진태 기념사업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