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심의 평화
(良心의平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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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 리 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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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조부 때부터 시작하면 3대째 장로 교인으로서 |
장로교 신학교를 마치고 장로교 목사로서 만 10년간 |
이나 장로 교회에서 시무하던 내가 왜 새삼스럽게 교 |
회 지도자들의 그릇된 가르침을 지적하고 교회의 부 |
조리를 비판하게 되었으며 개인의 영혼 구원을 외침 |
으로써 일부 기성 교파 지도자들의 도전을 받게 되 |
었는가? 여기에 대하여 나는 나의 신앙 경험을 성경 |
을 토대로 하여 밝히고자 합니다. |
이 글을 쓰면서 나는 나의 양심에 추호도 부끄러움 |
이 없습니다. 따라서 이에 대하여 어떤 변론이나 시 |
비가 필요없고 양심의 진지한 의논만이 필요 할 뿐 |
입니다. |
졸필로 엮어진 작은 책자이나 읽으시고 독자 여러분 |
의 양심의 판단이 있으시길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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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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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신앙이란 무엇인가 ? |
믿음이란 말은 오늘날 교인들에게는 다분히 오해되고 |
있기 때문에 믿고 있다고 하면서도 모순되는 많은 문 |
제를 지니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
참된 믿음은 그것이 생기는 즉시 모든 문제는 종지부 |
를 찍게 되는 것입니다. |
믿음은 안시과 깊은 관계가 있기 때문에 믿음이 생김 |
과 동시에 주님 안에서 영이 완전히 쉬어 버리는 것 |
입니다. |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믿는다고 하면서도 갈등과 불안 |
을 가지고 있으며 이러한 모순에 대하여 아무런 문제 |
의식을 느끼지 못하고 있습니다. |
"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태복음 11:28) |
고 하셨는데 진실로 주님 안에서 영, 곧 양심이 쉬고 |
있는 교인이 몇 사람이나 되겠습니까 ? |
마음에 고달픔이 있다는 것은 주님께로 가지
않았다는 |
증거이며, 주님을 참으로 믿고 있지 않다는 것을 뜻 |
합니다, 주님을 믿는 자는 주님 안에 있어 주님의 모 |
든 것을 자기의 것으로 누리는 자입니다. |
그래서 주님 안에서 " 자기의것"
즉 죄나 죽음이나 |
기타 일체의 것이 다 끝나게 되는 것입니다. |
이것은 한마디로 쉬는 것을 뜻합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는다고 하는 많은 사람들이 오히 |
려 믿기 전보다 더 마음에 괴로움을 안고 고달프게 살 |
아 가고 있는 것은 웬일일까요? |
그것은 하나님을 마음에 믿고 있는 대신 |
믿으려고 노력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
당신은 혹시 이렇게 탄식하고 있지나 않습니까 ? |
"아, 참으로 괴롭다. |
안 믿으면 지옥 갈 것 같고 |
믿자니 힘이 들고 , |
차라리 믿지 않았더면 좋았을 것을 !" |
이러한 상태의 마음은 믿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
젖먹이 어린아이는 오로지 어머니 안에 있습니다. |
자신은 알지 못해도 어머니의 것은 전부 자기의 것입 |
니다. 자신은 어머니 안에서 모든 것을 소유하고 있기 |
때문에 스스로 염려하지 않습니다. 이것이야 말로 믿 |
음입니다. |
참으로 믿는다면 내 스스로 염려하지 않게 됩니다, |
이것이 안식이요, 양심의 평안입니다. |
또 영의 구원입니다. |
이와 같은 믿음으로 하나님의 관계가 성립 됩니다. |
믿음으로 나 자신은 하나님 안에서 없어지고
하나님의 |
것으로 내게 채워지는 것입니다. |
(참고: 오스왈드 스미스 목사가 쓴 나의 가장
사랑하는 나라 |
라는 소 책자나 존 번연이 쓴 천로역정을 읽으시면 도움이 되 |
리라 생각합니다.) |
2. 하나님은 영이시다 |
하나님을 예배 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
하나님을 어떻게 섬기느냐 하는 것입니다. |
여기서 한가지 밝히고 넘어가야 할 사항이 있습니다. |
그것은 하나님은 영이시라는 사실입니다. |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요한복음4:24) |
고 하셨습니다. |
여기서 중요한 점은 사람은 육이 있고 하나님은 영이 |
신데 육신을 가진 인간이 영이신 하나님을 어떻게 바 |
로 섬길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
육신에는 많은 문제가 있습니다. |
로마서 7장 24절에서 사도 바울은 |
"육신은 사망의 몸" 이라고
했습니다. |
육신은 사망을 지니고 있고 사망 안에 있는 것입니다. |
그러기에 |
"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 로마서 8
: 6 ) |
라고 했습니다. 이와 같이 사망 안에 있는 육신이 |
어떻게 영이신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가 말입니다. |
하나님은 영이시라는 말은 육신이나 물체가 아니라는 |
뜻입니다. |
물체가 아닌 하나님은 외형적인 것과 상관이 없습니다. |
그러나 육신을 가진 인간은 자기 육신에서 흘러 나오 |
는 성향으로 하나님을 섬기려고 하기 때문에
자연히 |
의식을 꾸미고 외부적인 조건을 가다듬게 됩니다. |
그래서 영이신 하나님에게서 떠난 각종 종교가 발생 |
하게 되는 것입니다. |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이는 모양으로 섬기려는
데서 |
우상은 발생합니다. |
성경에 "하나님은 중심을 보신다" |
"외모를 취하지 않으신다" |
"육체를 따라 판단치 않으신다"
등등의 말씀이 여러 |
곳에 있는 것은 의미 깊은 사실입니다. |
신명기 4장을 자세히 읽어 보십시오. |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 해 내신 하나님이 |
시며 호렙 산에서 말씀하신 하나님이십니다. |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분이시니 무슨 형상이든지 만들 |
지 말라 하셨습니다. |
이것이 곧 둘째 계명의 뜻입니다. |
즉 영이신 하나님,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섬김에 있어 |
서 어떠한 형상이나 외형, 의식이나 조직등을 가지고 |
섬겨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
그러면 영이신 하나님을 육신을 가진 인간이 어떻게 |
섬길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
결국 영이신 하나님을 섬기자면 영으로 섬기는 수밖에 |
다른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
3. 하나님 형상대로 |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
창조 하셨다고 했습니다. (창세기1:27) |
영이신 하나님은 영이 없는 존재에게서 섬김을 받을 |
수 없고 영이 없는 존재와 교재 할 수도 없기 때문에 |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신 것입니다. |
하나님의 형상이란 사람의 육체의 형태를 의미하지 않 |
습니다. |
육체 속에 거하고 있는 영을 의미 하고 있는
것입니다. |
거듭 말해서 하나님은 영이시고 육신이 아니십니다. |
이 세상 만물 중에 인간만이 영이 있는 이유는 영으로 |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섬길 수 있도록 창조 되었기 때 |
문입니다. |
개, 돼지나 소와 같은 짐승이 하나님을 섬길 수
없는 |
이유는 그것들은 영이 없기 때문입니다. |
로마서 1장 19절에 |
"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
고 했습니다. |
사람은 그 속에 있는 영으로 하나님을 알 수
있도록 |
되어 있습니다. |
그런데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나 믿지 않는 |
사람들이나 영을 알지 못하는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
영이 있다고 생각 하는 사람 조차도 영이 무엇인지 알 |
지 못 하고 있습니다. |
그래서 영을 자기의 인격적 활동과 혼돈하여
인격의 |
일부인 이지(理智)나 감정이나 의지로써 영이신 하나 |
님과 접하고자 합니다. |
그러나 그것은 전혀 불가능 합니다. |
어떤 사람은 지적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인식 하고 있 |
으면서 그것을 신앙인 줄 잘못 알고 있습니다. |
곧 지적인 신앙입니다. |
어떤 사람은 감정에 호소해서 흥분되는 것이 신앙인줄 |
알고 있습니다. 곧 신비주의적 신앙입니다. |
어떤 사람은 의지의 힘으로 믿기를 결심하고 하나님의 |
말씀대로 실천해 가려고 합니다. 곧 의지의 결단력입 |
니다. |
다시 말해서 의지적 신앙이라 할 수있습니다. |
그러나 그들은 이것이 영이신 하나님을 참으로 섬기는 |
것이 아님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
4. 영의 활동은 양심 |
그와 같이 인격적인 세 방면 (지적,신비주의적,의지적 |
신앙)으로 하나님을 믿어도 깊은 속에는 갈등과 문제가
풀 |
리지 않습니다. |
그것은 영이 하나님을 만나지 못 했으며 근본적인 해 |
결을 보지 못했음을 밝혀 줍니다. |
영이 하나님을 접하는 일은 양심으로 알 수 있습니다. |
양심은 인격이 내 마음과 다릅니다. |
내가 무엇을 하려 하면 양심은 소송 기관으로서
비판 |
을 하며 잘못을 정죄 합니다. |
바로 이러한 양심의 활동이 영의 기능인 것입니다. |
따라서 앞서 언급한 = 인식하고, 느끼고, 결심하는
믿 |
음을 가진다 해도 참된 평안을 누릴 수 없습니다. |
그러므로 영이신 하나님을 섬기자면 = 영이 하나님의 |
진리의 빛을 받아 해방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
문제는 = 영이 죄로 말미암아 더러워져 있다는데 있습 |
니다. |
영이 죄로 더러워져 있고 죽어 있는 것이 인생 최대의 |
비애이며 문제입니다. 에베소서 2장 1절에 |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
라고 한 말씀은 영이 죄로 더러워져서 죽은 상태에 |
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
더러워진 영으로 인한 양심의 가책은 하나님과 다툼이 |
있음을 나타냅니다. |
아담이 선.악을 알게 하는 실과를 먹은 즉시 영이 죽 |
고 양심의 괴로움과 부끄러움 그리고 다툼과
불안이 |
생겼습니다. |
무화과 잎으로 치마를 한 것은 양심을 가리우려는
행 |
동으로 종교의 상징입니다. |
그러나 하나님의 음성 앞에 아담은 스스로 벗었다고 |
고백 했습니다. |
양심의 괴로움을 가리우려는 인간의 노력인 종교는 하 |
나님의 음성 앞에는 너무도 무력하여 벌거벗은 수치는 |
가리워지지 않는 것입니다. |
하나님을 섬기자면 영이 살아야 하고 양심의
괴로움이 |
없어야 합니다. 베드로전서 1장22절에 |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
라고 했고 또 23절에 |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
고 하셨습니다. 즉 진리를 받아들임으로써 영혼을 깨 |
끗하게 씻은 것 ,이것이 말씀으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
요한복음 17장 17절에 |
"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
라고 했습니다 . |
진리의 말씀으로 영혼이 깨끗하게 되는 것이 거듭나는 |
것이요, 거듭남으로써 양심은 비로소 해방을
맛보게 |
됩니다. |
양심의 가책은 영의 더러움입니다. |
양심의 억눌림은 영의 억눌림이며 양심의 시달림은 영 |
이 죄의 사슬에 매여 있는 것입니다. |
그러나 진리가 와서 비출 때에 죄의 사슬이 끊어지고 |
더러움은 씻어집니다. |
양심의 해방을 받아 자유로와 지는것이 영의 구원이며 |
거듭나는 것입니다. |
베드로 전서 3장 21절에 |
"물은 예수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 |
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 |
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 |
여 찾아가는 것이라" |
고 했습니다. |
선한 양심만이 하나님을 찾아 갑니다. |
선한 양심이 아니면 하나님을 만날수 없다고 하십니다. |
노아의 홍수는 이 구원의 예표입니다. |
이제 그 노아의 홍수의 물에 대하여 말하고자 합니다. |
방주는 물 위에 떠서 노아의 여덟 식구가 구원을 받았 |
습니다.이것이 또한 세례의 의미 곧 침례의 의미입니다 |
침례는 육체가 깨끗해 진다는 의미가 아니라 영이 깨끗 |
하게 되는 것을 뜻합니다. 즉 영의 세례입니다. |
진정한 세례는 죄에서 해방된 선한 양심을 지닌 영혼이 |
깨끗하게 된 상태인 것입니다. |
이러한 상태에서 비로소 하나님을 예배하고 섬길 수 있 |
는 것입니다. |
훌륭한 의식이나, 장소나, 모양이나,억지의
행동이나 |
거창한 종교 형식은 모두 육체의 깨끗함을 의미합니다. |
그러나 이러한 육체의 깨끗함으로 하나님께 가까이
갈 |
수 없습니다. |
양심의 영이 깨끗함으로만 가까이 갈 수 있습니다. |
아무리 행동이 깨끗하다 하더라도 구원을 받기
전에는 |
영(양심)은 더러운 상태에 놓여 있게 됩니다. |
이유인즉,인간은 완전한행동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
인간의 행동으로는 양심이 완전히 깨끗 해질 수
없기 |
때문에 하나님은 진리로써 깨끗해지는 복음을 마련해 |
주신 것입니다. |
이 진리는 행동의 법이 아니라 은혜의 법이며 복음의 |
진리입니다. 그래서 |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썪 |
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 |
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 |
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벧전1:23~25) |
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
복음의 말씀이 영, 즉 양심 속에 투입되어
깨달아 |
질때에 양심이 깨끗해 져서 하나님을 섬기게 됩니다. |
히브리서 9장 9절에 |
" 이 장막은 현재까지의 비유니 이에
의지하여 드리는 |
예물과 제사가 섬기는 자로 그 양심상으로 온전케 할 |
수 없나니" |
라고 했는데, 이는 구약 시대의 제사제도를 따라 염소 |
나 양을 잡아 성소 안에서 제사 드리는 것은
비유에 |
불과해서 양심을 온전케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
그러므로 비유가 아닌 실제의 제물이 드려져야 합니다. |
이 양심상으로 온전케 하는 실제의 제물은 예수그리스 |
도이십니다. |
다시 말하면 예수를 믿는다면 양심이 온전케
되어야 |
한다는 뜻입니다. |
독자여, 당신의 양심에는 티 하나, 구름 한 점
없다고 |
자부할 수 있겠습니까? |
당신의 양심은 하나님과 다투고 있지 않습니까? |
양심의 송사가 전혀 없습니까? |
양심이 완전히 깨끗하기 전에 하나님 앞에 설 수는 없 |
습니다. |
양심이 깨끗하지 못 하다는 것은 영이신 하나님과 당신 |
의 영 사이에 죄가 가로막혀 있다는 뜻입니다. |
영에 빛이 없다는 뜻입니다. |
당신의 영이 사망 이편에서 헤매면서 부활 저 편을 맛 |
보지 못했다는 뜻이며 거듭나지 못했음을 말해
주고 |
있습니다. |
거듭나는 것은 = 양심의 해방입니다. |
이것이 영의 구원입니다. 베드로전서 1장 9절에 |
" 믿음의 결국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
고 했습니다. |
영혼의 구원은 = 진리를 깨닫는 순간 찾아오는 |
양심의 자유 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8장32절에 |
"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 |
고 예수님은 말씀 하셨습니다. |
당신은 진리를 깨닫고 양심의 평안을 얻었습니까? |
거짓 진리에 의한 괴로움으로부터 양심의 해방을 받았 |
습니까? 요한복음 1장 4절과 9절에 |
"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 |
이라 .. 참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
빛이 있었나니" 라고 했습니다. |
진리는 이성에 비추어서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영에 |
비추어서 양심을 풀어주는 계시입니다. |
묶여있는 영을 풀어 주는 계시의 진리입니다. |
5. 송사자와 사화하라 |
마태복음 5장 25절에 |
"너를 송사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 |
하라 그 송사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주고 재 |
판관이 관예에게 내어 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
고 예수님께서 말씀 하셨습니다. |
이것은 인간의 일생을 송사자에 의해 끌려가는 죄수의 |
길에 비유해서 하신 말씀입니다. |
송사자는 곧 양심으로서 검사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고 |
길에 있을 때란 심판대 앞에 서기 전까지 인생의 과정 |
입니다. 이것은 이 세상에 태어나는 모든
사람에게 |
적용 됩니다. |
"내가 이제 세상 모든 사람의 가는 길로
가게 되었 |
노니 .. (열왕기 상 2 : 2 ) |
라고 한 말씀과 같습니다. |
재판자은 심판주 하나님이시며 옥은
지옥입니다. |
송사자와 길에 있을 때에, 그리고 심판대 앞에 가기 |
전에 급히 사화 하라고 하신 것은 죽기 전이나
또는 |
예수님께서 오시기 전 이 육신으로 있을 동안
안에서 |
송사하고 잇는 양심과 사화 하라는 것입니다. |
히브리서 9장 27절에 |
"한번 죽은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
심판이 있으리니" |
라고 했습니다. 아무리 재판관이 기다리고 있어도 검 |
사가 불기소 처분해 버리면 판결할 수 없습니다. |
송사자 곧 양심과 사화하는 것은 바로 진리를 깨닫고 |
죄에서 해방받는 것입니다. |
로마서 2장 14~16절에 |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는 |
..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
서로 혹은 송사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 |
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곧 내 복음에 이른 바와 같 |
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은밀 |
한 것을 심판하시는 그날이라 " |
고 했습니다, 요컨대 양심의 투쟁 곧 가책이 있는 사 |
람은 마지막 심판이 있다는 뜻입니다. |
양심의 한 구석에는 '잘못이다' '죄다' '거짓이다' |
소리치는 송사가 있고 또 한편 구석에서는 열심히 그 |
소리를 막고자 하는 변명이 있습니다. |
그래서 속에서는 두 소리가 싸웁니다. |
창세기4장에 가인을 향하여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10절) |
인간의 귀에도 양심에서 하나님께 송사하는 정죄의 소 |
리가 끊임 없이 들려 옵니다. |
그러나 가인은 그 소리를 듣고 계시는 하나님이 무서워 |
하나님 앞을 피했습니다. 그 자손들도 그 소리를 막기 |
위해서 퉁소를 만들어 그 소리를 피하려고 했고 또 농 |
사를 짓고 날카로운 기계를 만들어 냈습니다. |
오늘도 사람들은 양심의 송사하는 소리를 피하려고 온 |
갖 수단을 다 동원합니다. |
양심의 소리를 피하려고쾌락을 일삼으며 세상
영광을 |
추구하고 또는 전쟁으로 자기를 숨깁니다. |
그러나 양심은 여전히불안합니다. |
안락을 찾으나 없습니다. 행복을 구하나 없습니다. |
빌라도는 물로 손을 씻었고, 가룟유다는 은 30을
성전 |
에 던지고 목매어 죽었습니다. |
이것은 양심의 괴로움을 견디지 못해서입니다. |
예수님이 죄 없이 심판 받는 것을 보는 순간, 마귀가 |
유다의 마음을 풀어 놓아 그의 양심이 활동하게 된 것 |
입니다. |
마찬가지로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죄를 범하고, 소리 |
치는 양심의 송사를 여러가지 방법으로 변명해서 숨겨 |
버립니다. |
그리고는 죄를 은밀한 구석으로 몰아넣어 버립니다. |
그런 후 자신의 기억 선상에 떠오르지 않으면 그 죄는 |
없었던 것으로 하고 살아갑니다. |
그러다가 그것들이 '부흥회'때 되 살아나 자신의 마음 |
을 괴롭히기도 하고 눈물을 흘리게도 합니다. |
그러나 이것도 하나의 변명입니다. |
눈물을 흘리는것까지는 좋으나, 사단은 찾아와서 '눈 |
물을 흘렸으니이젠됐다;고 후련한 기분을 넣어주어 일 |
단 안심 시켜 주며 그의 죄는 무화가나무 잎으로
만든 |
치맛자락 밑으로 은밀히 숨어 버립니다. |
울어도 못하네; 하고 찬송을 부르나 그것이 무엇을 |
의미하는지도 모르는 가운데 울면서 기도하고 또 다시 |
그 찬송을 부르곤 합니다. |
그러는 동안 죄는 은밀한 창고속에 자꾸 쌓여만갑니다 |
아렇게 은밀히 숨어가는 죄를 예레미야는 말했습니다. |
"주 여호와 내가 말하노라 내가 잿물로
스스로 씻으 |
며 수다한 비누를 쓸지라도 네 죄악이 오히려 내 앞 |
에 그저 있으리니" (예레미야 2: 22) |
죄는 잿물이나 비누로 씻어지지 않습니다. |
어떠한 종교적인 의식으로도 씻을 수 없습니다. |
양심과 하나님 사이에 있는 죄는 그런 것으로 씻어지 |
지 않는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
짓는 죄마다 영이신 하나님 앞에 가는 것이며 그 곳에 |
은밀히 숨어 있는 것입니다. |
동시에 하나님과만 상대하는 사람의 영, 곧 양심에는 |
자꾸만 때가 끼는 것입니다. |
두 사람이 다투어 한 사람이 뺨을 맞으면 때린 사람은 |
얼마 후 잊어버린다 해도 맞은 사람은 기억하고 있습 |
니다. 때린자의 죄는 맞은자 속에 도사리고 있어 다른 |
기회를 노리게 하고 있습니다. |
죄가 있는 장소는 하나님 앞입니다. |
그 하나님 앞에는 사람의 영이 있고 그 사람의 죄가
그 |
사이에 있습니다. 우리의 모든 죄는 - 그것은 하나님 |
의 법을 범한 것이기 때문에- 한번이라도 양심을 스쳐 |
간 것은, 자신은 비록 잊어버렸더라도 은밀히 하나님 |
책에 기록되어 있다가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하나님 |
앞에서 판결의 제목이 됩니다. |
6. 하나님은 완전히 공의로우심 |
어떤 사람들은 큰 죄는 심판 받으나 작은 죄는 심판
받 |
지 않고 너그러우신 하나님 앞을 그대로
지나간다고 |
생각 합니다. |
그러나 하나님은 완전 하시고 깨끗하시고 거룩하신 분 |
이기에, 머리털 하나라도 남김 없이 다 세시며 참새
한 |
마리 떨어지는 것도 아실 만큼 세밀 하십니다. |
마태복음 5장 22절 중에 |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 |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
고 하셨습니다 또 26절 중에는 |
"…호리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단코 거기 |
서 나오지 못하리라" |
고 하셨습니다. |
호리라고 하는 것은 척도(尺度)에 있어서 가장
작은 |
단위 입니다. 화폐의 단위에서도 리(釐)는 푼(分)의 |
십분의 1이며 호(毫)는 리의 십분의 1 입니다. |
죄를 갚는데 이렇게 단위가 작은 호. 리만한 죄의 값 |
까지도 갚아지지 않으면 죄는 해결되지 않고
지옥에 |
영원히 있게 된다는 뜻입니다. |
지옥은 있느니 없느니 따질 것이 못됩니다. |
없다고 말하는 사람도 들어가는 곳이 지옥인 것입니다. |
그러므로 사람이 마음대로 없다고 하든 있다고 하든 |
어떻게 생각해도 진리에는 변동이 없습니다. |
지옥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공의가 완성되는 곳입니다. |
이 세상에서는 십자가 외에는 공의가 완성되지
않으며 |
십자가 밖에 있는 영과 육에 하나님의 공의가 완성되 |
는 곳이 지옥입니다. |
아무리 호.리의 값어지 밖에 안되는 죄도 응분의 벌을 |
대가로 받는 곳이 지옥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20 |
장 12절~15절에 |
죽은 자(구원 받지 못한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
책들에 기록된 대로..심판을 받고.. 불못에
던지우더라" |
고 되어 있습니다. 사화되지 않는 양심에 의하여 기소 |
된 사람이 심판을 받습니다. |
양심과 사화된 사람은 불기소 처분을 받은
사람이기 |
때문에 심판이 없습니다. 요한복음 3장 18절에 |
" 저를 믿지 않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
라고 했습니다. |
그러나 양심의 해방이 없는 사람은 세상에서 크든
작든 |
그 행위대로 지옥 앞에서 형벌의 양이 언도 됩니다. |
돈의 단위로 비교해 말 하자면 원, 양, 전,
푼,리,호 |
만큼의 죄의
분량대로 언도 됩니다. |
이와 같이 하나님은 죄인이라도 억울하지 않도록 공평 |
하게 하십니다. |
가룟 유다는 양심을 쥐어 뜯다가 죽었습니다. |
지옥은 양심의 불꽃이 활활 타는 곳입니다. |
양심의 불이 죄의 정도 만큼 타는 곳입니다. |
그 불은 우리가 쓰는 불과는 달라 꺼지지도 않습니다. |
양심의 불꽃이 타는 그 괴로움은 견딜 수 없을
것입니다 |
7. 선 악을 몰랐다면 |
인간은 선악과를 먹은 아담의 자손입니다. |
선악과를 먹었다는 것은 선악을 알게 된 것을
말합니다. |
창세기 2장 17절에 |
"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년 죽으리라 " |
고 하나님이 말씀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생각해 보십 |
시오. |
먹으면 선악을 알게되고, |
그것을 (선악을) 알게 되면 죽는다고 한
것입니다. |
아담은 과연 선과 악을 알게 되었고 죽었습니다. |
물론 육신도 죽었으나 당장에 죽지는 않았습니다. |
그러나 당장 죽은 것이 있습니다. |
그것은 영이었습니다. |
즉 영이 죽은것 입니다. |
영이 죽었다는 것은 영이 없어진 것을 뜻하는
것이 |
아닙니다. |
영이신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지고 자유를 잃었다는 |
뜻입니다. |
하나님 앞에서 두려움과 부끄러움이 동시에 닥쳐 왔습 |
니다. |
그것이 영의 죽음입니다. |
양심의 괴로움입니다. 영의 죽음입니다. |
선을 알게된 까닭입니다. |
당신은 어떻습니까 ? |
선을 알기 때문에 양심의 부담이 있지 않습니까 ? |
개, 돼지와 같은 짐승은 선을 알지 못합니다. |
그렇기 때문에 양심의 괴로움이나 두려움이 없습니다. |
사자는 사람의 팔을 잘라 먹어도, 개는 사람을 물어도 |
또 소는 남의 곡식을 뜯어 먹어도 양심의 괴로움이 없 |
습니다. |
선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
그러나 당신은 영의 존재이며 아담의 후손이니
선을 |
알고 있습니다. |
선을 알기 때문에 당신의 영은 죽었습니다. |
양심의 괴로움과 두려움이 있습니다. |
왜냐하면 선을 알기만 하고 양심에는 선이 없기 때문 |
입니다. |
당신이 선을 아는 것과 양심에 비추이는 것이 맞지 않 |
아 갈등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
아담은 그것을 가리우기 위해서 무화과 잎을 엮어 치 |
마를 해 입었습니다. |
그것은 양심을 가리우기 위한 수단이었습니다. |
여기에 종교의 기원이 있습니다. |
모든 종교는 자기의 힘에 의해서 자기 양심의 부끄러움 |
을 가리워 보려는 수단입니다. |
오늘 날 기독교는 다 그렇다는 것이 아니겠으나, 열 |
심히 양심의 괴로움을 가려보려는 노력을 기울려 왔습 |
니다. |
참 평안과 자유가 결핍된 기도, |
형식적이며 감정적인 찬송, |
이성(理性)과 감정 혹은 의지에 영향을 주는 설교, |
그리고 눈을 끄는 의식과 건물, 교육적 내지 사회적 |
사업, 기타의 모든 행사에 노력을 기울려 왔습니다. |
양심에 물어 보십시오. 위에 열거한 것들 속에 양심의 |
참 평안과 행복이 있었습니까 ? |
하나님께 참으로 감사한 것이 있었습니까? |
없어지지 않고 변하지도 않는 안식이 있었습니까? |
참으로 양심 속에 |
"
나는 사화하였음에 확실하다고"하는 증거가 있었 |
다면 의식이든 무엇이든 다 의미가 있습니다. |
그러나 그러한 증거가 없었다면, 하나님의 음성을 듣 |
는 순간에 무화과 잎을 두르고 두려워 하던 아담과 같 |
은 것입니다. |
무화과 잎 치마를 입고 "나는
벗었다"고 하며 두려워 |
했던 아담이었습니다. |
방언을 하고 병을 고치고 떨리고 뜨겁고 전기가 통하 |
는 듯 하는 체험을 한 후에도 깊은 마음 속에서는 갈 |
등이 해소되지 않는 원인이 무엇입니까? |
그것은 영에 빛이 없고 양심의 해방이 없기 때문이며 |
모든 경험들은 무화과 잎과 같기 때문입니다. |
당신의 판단 기준과 고매한 인격에서 우러나오는
선의 |
기준은 사회를 위해서는 유효하나 그것은 단지 선악과 |
를 따먹은 아담의 선일 뿐입니다. |
그러한 선의 기준은 사회를 위해서는 유효하나 그것은 |
단지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의 선일 뿐입니다. |
그러한 선의 기준에서 신앙을 논하니 종교가 생기고 |
인생을 논하니 실존주의 철학이 생기며, 윤리를 논하니 |
사회 윤리관이 생기고, 정치를 논하니 무신론을 토대 |
로 한 사회 주의와 공산주의가 생깁니다. |
또 성경을 논 할 때에 여러가지 인본주의 신학과 중생 |
의 체험을 도외시 하는 지식 주의나 영에 관계
없는 |
신앙관이 생깁니다. |
위에 열거한 일체는 계시에 의한 하나님의 선
이하의 |
것으로서 하나님의 진리가 거꾸로 뒤집힌 현상들입니다 |
하나님 앞에서는 인간의 모든 것이 부정되는
십자가가 |
있을 뿐입니다. |
"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
구원을 얻은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1:18) |
고 했으며, 사람이 자기 지혜로는 하나님을 알지 못한 |
다고 했습니다. |
여기에 진리의 탈선이 생기며 또 이단이 생기는 것입 |
니다. 이 모든 것은 종교의 분야이며 무화과 잎에 불 |
과합니다. |
8. 종교에서 해방 |
참된 복음은 바로 종교에서 해방 받는 것입니다. |
종교는 양심의 해방 이전의 양심의 활동입니다. |
복음은 양심의 해방을 가져옵니다. |
"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는 |
주님의 음성은 유대인의 종교 의식과 율법의 멍에로 |
인해 양심에 시달린 유대인을 향하여 자유를 준다는 |
것을 의미합니다. |
율법은 종교였습니다. |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께서 죄를 깨닫게 하기 위하여 |
주신 것입니다. |
율법은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몽학 선생이라고 (갈 |
라디아서3:24)했고 초등 학문이라고도 했습니다. |
주님은 그 몽학 선생에게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시려고 |
오셨습니다. 그것이 복음입니다. |
무화과 나무 잎을 입고 괴로와 하는 아담과 하와에게 |
하나님께서 친히 입혀 주신 가죽 옷(창세기3:21)은 |
해방이요 복음입니다. |
여기서 주의 할것은 이 복음은 지식이 아니라는 것입 |
니다. |
진정한 복음은 영혼에 얻어지는 사실입니다. |
이것는 환상도 육신의 체험도 아니며 추상도 지식도 |
아닙니다. |
양심에 구체적으로 이루어지는 사실입니다. |
9. 영혼에 비치는 빛 |
주께서 우리의 죄악을 주의 앞에 놓으시며 우리의 |
은밀한 죄를 주의 얼굴 빛 가운데 두셨사오니 우리 |
의 모든 날이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가며 우리의 평생 |
이 일식간에 다 하였나이다.(시편90:8~9) |
당신의 은밀한 죄, 그리고 당신이 선이라고 생각하는 |
것마저 주의 얼굴 빛 앞에서 비쳐져야 합니다. |
당신은 당신의 운명이 주님의 분노 중에
순식간에 |
지나 가는 것을 보았습니까 ? |
즉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죄로 말미암아 파멸되는 그 |
것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
진리의 빛이 비치기 전에는 새로와 지는 것은 없습니다 |
새로운 피조물이 되지 않습니다. |
무디, 찰스피니, 요한웨슬레, 칼빈, 루터, 그외의
많 |
은 믿음의 선배들이 거듭나는 경험을 했습니다. |
그런데도 대부분의 교회에서 왜 거듭나는 성령의 역사 |
와 그 경험을 부인하는지 모르겠습니다. |
혹 인정을 한다 해도 신비주의적 경험이나 외부적인
것 |
을 주장할 뿐 영의 깊은 경험은 부인합니다. |
그리고도 천국에 간다고 가르치며, 평안이 없으면서도 |
평안하다 평안하다고 가르치고 있지 않습니까 ? |
성경은 사람을 속이지 않습니다. 에베소서1:13절에 |
"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라고했고 |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로마서8;16)라고 했으며 |
또 유다서 3절에는 |
" 내가 우리의 일반으로 얻은 구원을
들어…성도에게 |
단번에(오랜기간이 아니고)주신 믿음의 도(道).라고
했습니다 |
의심이 있거나 양심에 참 평안이 없는 것은 믿음이 아 |
닙니다. 성경은 진리입니다. |
영혼이 깨끗해 지고 양심이 온전해 지며 선한
양심이 |
하나님을 향해 가는 것이 구원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
이 성경은 변할 수 없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않는다고 하 |
셨습니다. |
그러므로 이 역사 속에 뿐만 아니라 당신의 영, 당신 |
의 양심 속에도 이루어 져야 합니다. |
시편 107편 19~20절에 |
" 이에 저희가 그 근심 중에서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
그 고통에서 구원하시되 저가 그 말씀을 보내어 저희 |
를 고치사 위경에서 건지시는도다" 라고 했습니다 |
하나님의 말씀의 빛이 당신의 양심을 죄의 고통과 두 |
려움에서 참으로 고친 일이 없으면 당신은 하나님을 |
만날 수 없습니다. |
계시록 21장에는 무엇이든지 속된(깨끗치 못한)
것은 |
결코 천국에 들어오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
10. 영원한 문제 앞에 자신을 세우라 |
인간의 현생은 짤막한 순간입니다. |
이 짤막한 순간에도 복잡한 많은 문제와 중대하게 생 |
각되는 많은 문제들이 있습니다. |
기독교 교단만 보더라도 여러 교파가 있으며 다 그 나 |
름대로 자기 교파의 주장을 옳게 여겨 따르고있습니다. |
각 파의 주장에는 다 일장 일단이 잇어 보입니다. |
보통 무엇이 진짜인가 가짜인가를 생각할 때 |
우선 교인 수가 많으냐, 교회가 성장하며 잘 되어가고 |
있는가 하는 것을 생각합니다. |
그러나 하나님의 위치에서 생각하면 그런것이 문제이 |
겠습니까?. |
하나님께서 외부의 것을 보시겠는가 말입니다. |
무슨 교회의 구별이 있겠는가 말입니다. |
하나님 앞에는 그것이 문제가 아니라 |
개개인의 영혼과 양심이 어찌 되어 있나 하는 것이
문 |
제일 뿐입니다. |
모든 것은 영원 이전에 잇는 것입니다. |
이 시간안에 국한된것, 당신의 현재에 관계된 것이 |
모조리 그 영원으로 뻗어갈 때에 과연 그 영원에 연결 |
되어 남아 있을 자신이 있는가도 문제입니다. |
자기 나름대로 예리한 두뇌로써 진리를 전공한
것이 |
이 문제에 해결을 가져올 수 없습니다. |
정통적인 교리를 전공하는 것은 분명히 의미있고 가치 |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당신 안에서 생명의 |
실현이 되지 않는 다면 진리가 아닙니다. |
진리는 참이요, 참은 사실입니다. |
한 그릇의 밥을 놓고 칼로리를 따지고 기타 모든 성분 |
을 분해 하는 것은 과학적인 진리는 될지 모르나 먹지 |
않으면 체력과 건강에 보탬이 되는 사실은 발생
하지 |
않습니다. |
밥을 먹을 때에 그 속에 잇는 칼로리가 사람 안에서 |
진리가 되는 것입니다. |
이론적으로 알고만 있어서는 안됩니다. |
십자가는 사실이지 이론이 아닙니다. |
사실이 양심 속에 역사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교리에 |
불과 할 뿐 진리는 아닙니다. |
당신은 십자가의 진리로 양심이 해방된 적이 있습니까? |
인간적인 훈련이나 의지의 작용이 아니라 당신의 양심 |
을 포박하고 잇는 죄의 사슬에서 놓인 일이 있습니까? |
11. 이제는 온전하여 부끄럽지 않은가 ? |
과연 " 하나님께서 나의 구원 되시니 나에게
정죄함 |
없네." 그리고 " 내 영혼의
그윽히 깊은데서 맑은 가 |
락이 울려나네" 하는 찬송이 흘러 나옵니까
? |
당신은 사도신경을 읽을 때에 죽은자 가운데서
다시 |
살아나시며,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
앉아 계신 주님께 참으로 깊은데서 영광을 돌리며 우 |
러러 보며 그 사실 떄문에 솟구쳐 오르는 소망과 감격 |
을 누리십니까 ? |
그리고 성령을 믿고 성도의 참된 교재를 알고 하나님 |
과의 교재까지도 아십니까 ? |
무릎을 꿇고 영이신 하나님 앞에 물어 보십시오. |
나 자신이 믿고 산다는 것이 육신을 위해서 인가
영을 |
위해서 인가를 . 또 성취된 사실을 보고 구원을 받아 |
기뻐하는 것을 감히 이단이라고 몰아 붙이는 것이 과 |
연 정당 하겠습니까? |
교인을 잃을 염려와 손해를 따지는 잠재 의식 때문에 |
성령의 하시는 일을 이단이라고 정죄하고 있지나 않습 |
니까 ? |
참으로 목적이 영혼에 있지 아니하고 육신에 있을
때 |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
당신은 아무것도 지킬 수 없습니다. |
오직 주님만이 참다운 의미에서 당신을 지킬 수 있습 |
니다. 요한복음 10장 28절에 |
"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
아니 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뺴앗을 |
자가 없는니라" |
고 했습니다. |
당신의 것으로 그냥 있기 때문에 당신이 수고하고 있 |
지 않습니까? |
참으로 주님의 것이라면 주님이 지키시지 않겠습니까? |
"구원파"에 속한 "
주님의 " 양 때를 다 빼앗아 가 보 |
십시오. |
아무 상관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
그러나 어디에 가 있든지 주님의 것은 빼앗기지 |
않을 것입니다. |
우리가 나사렛 이단에 속한다면 참으로 감사 할 |
따름입니다. |
2. 빛을 받은 그 사실 ( 저자의 거듭난 간증 ) |
1. 암흑의 여정 |
어느 초 겨울 저녁놀이 짙어갈 무렵, 제법 차가운 날 |
씨에 예배당 옆 초가집 안방에서 내 인생의 한
꿈을 |
어린 가슴에 심어 준 사건이 있었습니다. |
덜덜 떨면서 한 걸인이 밥을 좀 사달라고
찾아왔습니다. |
그를 한참 지켜보시던 아버지께서 추우냐고
물으셨습니다. |
"예-, 춥습니다." |
말 없이 보시던 아버지는 입으셨던 저고리를 그 자리 |
에서 벗으시더니 "여기있다, 입고
가거라," 하시면서 |
입혀 주셨습니다. |
그 인상적인 광경은 무엇인가 내 가슴에 작은
씨앗이 |
되어 잊혀지지 않는 감격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
그 후 5~6년쯤 지난 12세 때에 한 자리에 나란히
누었 |
을 때 아버지께서 말씀하셨습니다. |
" 너는 커서 목사가 되어라 . " |
이 한마디로 내 생애의 방향이 정해졌습니다. |
그러나 목사가 되어서도 아버지 처럼 참으로 남을 사 |
랑하는 교회의 목사가 되어야 한다는 어렴풋한 사명감 |
을 가졌던 것입니다. |
고향 지방에서는 널리 알려진 일이지만 아버지는 참으 |
로 사랑이 많으셨습니다. |
어려운 사정을 보시면 눈물을 흘리시며 하나님과 사람 |
에게 호소하셨고, 심지어는 거지를 방에서 함게 재워 |
온 방에 이가 기어다니는 등 여러 일화가 많이 있었습 |
니다. |
신학교를 졸업하고 29세에 나는 목사가 되었습니다. |
그러나 문제는 이미 목사가 되기까지의 과정에서
벌써 |
시작 되었습니다. |
천사들이 모인 곳인줄 알았던 신학교와 기숙사에서 받 |
은 상처는 지워지지 못할 상처로 남아 끝내 환멸을 느 |
끼게 되었습니다. |
졸업 당시에는 안수를 거부하려 하였으나 부친의 책망 |
과 이웃의 권면에 못 이겨 안수를 받고 목사가 되었습 |
니다. |
해방 후 교회의 내분에서 갈등은 더욱 깊어져
갔습니다. |
그래서 나만이라도 진흙 속의 옥처럼 이상적인
목회를 |
해 보리라 다짐하고 옷깃을 여미면서 하나님 앞에 맹 |
세를 했습니다. |
새벽이면 두시간 세시간 울면서 기도하기도 했습니다 |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교만한 생각이었을 뿐입니다. |
그러는 중에도 아버지 처럼 살아 가리라는 생각에서 |
이웃 사람, 특히 곤경에 있는 이웃 사람들을 향해서 |
도움을 주려고 주의를 기울이게 되었습니다. |
그러나 이웃 사랑 하기를 네 몸 같이 하라는
말씀은 |
언제나 양심의 구석에서 노한 얼굴로 나를 노려보는 |
것 같았습니다. |
내가 행할 수 있는 방법과 힘을 다해서 이웃을 돕고 |
어려운 사람을 도왔으나 그것이 "네 몸과
같이이냐" |
하는 소리는 날이 갈수록 더해 가기만 하였습니다. |
어떻게 살았는가에 대해서 낱낱이 설명하지는 않겠으 |
나 극단적인 방법으로 살았던 것은 틀림 없었었습니다. |
그랬기에 가정에서는 "그렇게 살면서 가정은
어떻게 |
하라는가" 하는 불평을 들었습니다. |
어느날 밤 대구의 한 골목을 지나가다가 거지가 남의
집 연 |
탄 아궁이 위에 앉은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
나는 다음 날 설교가 완전히 거짓말이 되느냐 아니면
그대 |
로 진실이 되느냐 하는 갈등 때문에 발걸음을 옮길
수가 없 |
었습니다. |
집으로 데려 갈까 망설여 보았습니다. 그러나 집으로
데려 |
가면 온 집안이 발칵 뒤집힐 것이기에 차마 용기가
나지 않 |
아 남감 했습니다. |
문득 생각 끝에 됐다!. |
집에가서 이불을 한채 갖다 주자'. 이렇게 생각
하고는 집 |
으로 갔습니다. 그러나 대문을 열고 들어선 순간
마음이 동 |
요되기 시작 했습니다. |
따뜻한 이불 속에 누운 나에게 나의 양심은 요란하게
소리 |
고 있었습니다. |
위선자 !. 위선자 !.
저 거리를 보아라. 얼마나 많은 불 |
쌍한 자들이 떨고 배고파 하고 있는가. |
그러나 너는 따뜻한 이불 밑에서 잘 자고 아침에는 흰
쌀밥 |
으로 배를 채우겠지. |
그리고 설교 단상에서 "사랑하라"
고 소리치겠지. |
너는 위선자가 아닌가!. |
이리저리 생각하다 잠이 들었습니다. |
다음날 주일 오전 설교 시간은 단상에 서서 제대로
들지도 |
못하고 겨우 원고만 읽은 채 지나갔습니다. |
차츰 차츰 설교가 싫어지고 설교의 의미를 잃어가기
시작했 |
습니다. |
왜 나는 설교를 해야하나 ' 결국 먹기 위해서가
아닌가. |
하나님 맙소사. 먹기 위해서라면 이 세상에 훨씬
떳떳한 방 |
법이 있지 않겠는가." |
그리하여 내 생활은 완전히 의미를 잃어 갔습니다. |
노동자 에게는 생산이 있고 농민에게도 소출이 있는데 |
나 목사에게는 생산이 무엇인가 ? |
나 목사는 선한 말을 가장 많이 하고 있으나 생활에는
그것 |
이 없지 않는가!' 하고 양심은 소리쳤습니다. |
언젠가 어는 바닷가에서 목사들만의 수양회가 있었는데, |
둘러 앉아서 방담하는 시간에 나는 동료 목사들에게 말
했 |
습니다. 나는 이제 목사로써 목회 할 자신이 없다고
했습니 |
다. 그 때에 어는 목사가 말하기를 "
권목사는 목회의 성공 |
자라고 이름이 났는데 그것이 무슨 말인가? |
권목사가 못한다면 누가 하겠는가 ?" 라고
했습니다. |
나는 말했습니다. |
" 내 가정의 쌀독에 쌀 2되가 있으면
한되는 굶은 자에게 |
주고 한되는 먹어야 할 터인데 나는 그것을 할 수가
없습니 |
다." |
그랬더니 주위의 목사들이 " 아- 그것은
너무 심각한 이야 |
기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 |
그러나 나는 "하나님 말씀인데 어떻게
하겠습니까?" |
라고 했으나 아무런 대답을 얻을 수 없었습니다. |
내가 평신자이거나 또는 설교를 하지 않는다면 모르나
설교 |
를 하고 남을 가르치고 잇으면서 자신은 이웃을 내
몸같이 |
사랑할 수 없는 이율 배반적인 법칙이 있다는데에
문제가 |
잇엇던 것입니다. |
자신이 행할 수 없는 것을 어떻게 설교할 수 있는가
말입니 |
다. 그렇다면 그것은 위선이고 거짓말이었습니다. |
설교하기가 죽기보다 싫어졌고 어떻게 목사를 포기하고
살 |
아 갈 수 있을까 하는 것만이 문제였습니다. |
그러던 어느날 사상계라는 잡지를 읽던 중 어느분이
이렇게 |
쓴 것을 읽었습니다. |
"- 창녀는 먹고 살기 위하여 몸을 팔고,
선생은 먹고 살기 |
위하여 지식을 팔고, 목사는 먹고 살기 위하여
교회에서 윤 |
리 도덕을 판다- 무엇이 다릅니까 ? " |
나는 그 글을 읽으면서 양심에 예리한 칼로 쪼개지는
아픔을 |
느꼈습니다. |
차라리 창녀가 더 솔직하다. |
그는 만 천하에 자신이 죄인임을 폭로하고 짓 밟히면서
살아 |
간다. |
그러나 나는 설교단에 서면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와
같이 |
모든 존경이 대상이 되어 있으나 내 속에도 창녀 못지
않은 |
죄가 중심에 있지 않는가 ? |
미모의 여성을 보았을 때 비록 육신으로써의 죄는 짓지
않 |
는다 하더라도 마음에는 유혹을 느끼며 돈 뭉치를 보면
욕 |
심이 나지 않은가 ? .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 |
며칠 후 설교 준비를 마친 토요일 밤에 괴롭고 어두운
양심 |
을 달랠 길 없어 대성 통곡을 했습니다. |
하나님' 나에게 다른 직업을 주십시오. |
아니면 내 생명을 거두어 주십시오. |
더 이상 목사의 일을 할 수 없습니다. |
너무 큰 소리로 울었기 때문에 이웃 사람이 무슨 일이
생겼 |
는가 하여 밤중에 예배당에 찾아 온 일도 있었습니다. |
이것이 나의 암흑의 여정이었습니다. |
2. 빛을 받은 그 후 |
그러던 어느 날, 유럽에서 온 어떤 선교사의 설교를
듣던 중 |
" 여러분 거듭 났습니까 ?
" |
라는 소리에 가슴이 철렁 하였습니다. |
설교 후 그 선교사와 마주 앉아 1 : 1로 담판을
했습니다. |
" 나는 믿고 있는데 |
왜 거듭 났느냐는 질문에 대답이 나오지 않습니까?
" |
라고 되 물었습니다. 그때 나는 |
" 의심은 없습니다. 나는 확실히 믿기
때문에 지금 죽으면 |
천국에 갈 수 있다고 확신 합니다." |
고 대답 했습니다. 그러자 그 선교사는 "
그러면 됐습니다. |
의심 없이 천당에 갈 수 있으면 됐지요." |
하고 말했습니다. |
이 말에 나는 안도감을 느끼는 듯 했으나 마음 한
구석에는 |
그래도 석연치 않는 것이 있었습니다. |
그 후 3주가 지난 1961년 11월18일 토요일
아침 부터 설교 |
준비를 시작 했습니다. |
본문은 로마서 1장 17절에서 취하고 제목은 '
의인은 믿음 |
으로 말미암아 산다' 는 것이며, 제 일
대지(大旨=큰 뜻) |
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 났다고 기록 했습니다. |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
하나니…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
고 했기 떄문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는 것이 즉
첫째 대 |
지의 내용이 된 것입니다. |
이것을 더 자세히 풀어 나가는 과정에서 나는 로마서
3장 |
21절에 바로 내가 설교 하려고 하는 말이 들어
있으므로 그 |
말씀을 사용 하기로 하였습니다. 거기에는 |
"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
라고 했는데 이
말씀을 생각 할 때에, |
율법외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나는 |
율법의 의로써가 아니라 율법의 의와는 상관 없는 하나님 |
의 의이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의롭게 되고 하나님 앞에 |
설 수있음을" 나의 양심 속에서 알게" 되었습니다. |
이제까지 ' 이웃 사랑하기를 내 몸과 같이 해야지'
하고 양 |
심에 괴로왔던 것은 율법의 의로서 나의 양심을 내리
누르 |
은 의(義)였으나 , |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의 (義)로서 나에게
덧입혀졌습 |
니다. 로마서 10장 2~3절에 |
"…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 |
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 |
의 의를 복종치 아니 하였느니라" 고
했습니다. |
나는 깨달았습니다. |
그 뜻을 이해 하는데 그치지 않고 |
내 양심의 문제가 해결된 것입니다. |
십 수년간 나의 양심을 칭칭 동여 매었던 죄의 사슬이
한꺼 |
번에 풀어졌습니다. |
문제를 찾으려고 아무리 돌아 보아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
조금 후에 마음 속 깊이 하나님께 참된 감사와 찬송이
흘러 |
나왔습니다. |
내 죄 사함 받고서 구주를 안 뒤에 |
모든 것이 변화 하여서 |
지금 내가 밟은 길 천국 길이요 |
주의 피 내 죄를 씻으셨네. |
나의 모든 것 변하고 |
그 피로 구속 받았네. |
하나님께서 나의 구원 되시니 |
나에게 정죄함 없네. " (합동 411) |
이 찬송을 오후 2 시부터 해가 지도록 불렀습니다. |
그러나 그 후 또 놀란 것은 |
참으로 성경이 전의 성경과 달랐습니다. |
모두가 처음 보는 말씀이 되었고 |
성경이 나에게 열리기 시작 했습니다. |
또 이상한 것은 |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졌습니다. |
전부가 시시한 것 뿐이었습니다. 또한 |
나의 설교가 달라지고 설교하는 나의 안목이
달라졌습니다. |
사람들을 볼 때에 헌금 많이 하는것, 지위 있는
교인, 열심 |
있거나 일 잘하는 교인, 또는 목사 잘 받드는 교인
등등이 |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영혼이 어떻게
되었을까, |
참으로 구원이 되어서 천국에 갈 수 있을까 하는 생각
이외 |
에는 나지 않았습니다. |
그래서 듣기 싫어 하든 말든 그들의 영의 각성을
위하여 촉 |
구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
나의 월급이 잘 나올지 어떨지, 지위 있는 장로나 돈
있는 |
사람들을 두려워 할 것이 없이 그들의 영혼을 위하여
줄기 |
차게 공격해 갔습니다. |
전도사를 통하여 교인들의 염려하는 소리가 전해
왔습니다. |
전에는 설교를 잘하던 우리 목사가 어째서 저렇게
되어가고 |
있는가 하는 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
그러나 나는 내 마음에 동요가 없음을 말하고 |
" 나를 배척하면 보따리를 싸가지고 대문을
나서면서라도 |
여러분의 영혼을 위하여 부르짖지 않으면 안되겠습니다. |
내가 굶어 죽는 한이 있더라도 먹기 위하여 귀를
즐겁게 하 |
는 소리를 할 수 없습니다." |
그런지 6개월이 지난 후 부터 한 두 사람씩 깨달아
가는 일 |
이 일어 났습니다. |
이렇게 해서 구원 받은 역사가 일어 났으나 교파 안의
문제 |
로 인하여 나는 소속 교파에서 끊기고 말았습니다. |
그 후 많은 가난과 괴로움의 기간이 지나 현재에
이르고 있 |
으나, 참으로 이 복음 운동은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
이것은 인간의 계획적인 힘으로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므로 |
오직 주님 당신이 일하심을 감사 할 따름입니다. |
부언해서 말하면 " 권목사는 구원 받으면
죄를 지어도 상관 |
없다고 가르친다"는 낭설을 퍼뜨리는 이들이
있으나 전혀 |
근거 없는 말입니다. |
구원이라함은 이론이 아니라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이며
구 |
원은 말로만이 아닌 어떤 힘인 것입니다. |
그래서 율법에 의하여 인도되던 종교 생활에서 해방되어
자 |
유가 왔으나 이제는 성령에 인도되기 때문에 함부로
죄를 |
짓는 방종의 생활이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
로마서 5장 20절에 |
"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
라 했고 동 6장 1~2절에 |
"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
라고 했습니다. |
참으로 그렇습니다. |
율법 밑에 있으면 죄를 더욱 짓게 되고 |
은혜 아래 있으면 죄를 이기게 되는 것이 |
로마서 6장의 가르치신 내용입니다. |
그래서 구원을 받고, 나는
하나님의 세밀한 뜻에 순종하 |
기 위하여 침례를 받은 것입니다. |
침례는 전혀 구원의 조건이 되는 것은 아니나 구원
받은 |
자이면 그 생활의 첫째 원리는 하나님의 뜻에 대한 순종이 |
며, 침례는 순종하는 생활의 제 일보이므로 받는
것입니다. |
그러나 그 침례가 교파의 근거는 아니며 어느 특정
교파에 |
가담되는 상징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
주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 뿐입니다. |
주님의 뜻에 순종하여 받은 침례가 교파에서는 정죄
되었으 |
니 그 교파의 교리는 주님의 뜻 밖에 있다는 것은
분명한 |
사실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 |
침례가 주님의 뜻임은 그 내용의 진리가 참으로 깊은
것이 |
기 때문에 그 깊은 뜻을 알아야 깨달을 수 있습니다. |
교파에서는 죄를 지었을지라도 주님께는 침례로써 죄를
지 |
은 것이 아님은 분명한 것입니다. |
참으로 주님의 뜻을 알고 따르고자 하면 주님의 말씀에
순 |
종해야 하느냐 교파의 법에 순종 해야 하느냐는 참으로
깨 |
끗한 양심으로 주님을 섬기는 사람의 양심은 알 수
있을것 |
입니다. 주님은 말씀 하셨습니다. |
"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 |
하는도다" ( 마 15 : 8~9 ) |
과연 이 말씀 그대로입니다. |
한 가지 끝으로 말씀 드리고자 하는 것은 |
제가 목사다 혹은 아니다 하는 데 대한 시비입니다. |
혹자는 " 권 목사는 목사가 아니다. 장로교에서 목사 면직 |
을 당했다" 고 선전을 합니다. |
제가 목사라도 좋고 아니라도 상관이 없으나 밝혀 두는
것은 |
안수는 한번 받으면 두번 다시 받을 수 없는 것이
목사 안수 |
입니다. |
면직된 자를 복직 시킬 때는 안수 없이 목사로
복직되는 것 |
입니다. |
그러면 장로교에서 면직 되었다고 해서 다른 곳에서 또
안수 |
해서 목사로 취임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 곳에든지
목사로 |
받으면 그곳의 목사로 되는 것입니다. |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짓고 또 세상에서 파렴치한 범죄를
한 |
일이 아닌 다른 어떤 이유로 목사직이 면직 되었으면,
목사 |
로 받으면 목사이기에 방송국에서 그 사실을 알고 방송
목사 |
로 받았고, 성동교회(독립교회)에서 당회의 결의에
의해서 |
목사로 청빙되었던 것입니다. |
이 책을 읽은 여러분 ! |
생각해 보십시오. 진리가 세상에서 대중과 영합되었고
환영 |
받은 일이 있습니까? |
아벨로 부터 노아, 아브라함과 이사야, 예레미야 등의 선 |
지자, 또 사도 바울, 그리고 근세사에서 주의 빛
안에 있던 |
믿음의 선배들을 보십시오. |
더욱이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자취를 살펴 보십시오. |
십자가의 험한 길이 그 과정이었으며 진리가 그
목표이었습 |
니다. |
아담의 아내인 하와를 이용하여 아담을 속인 사단은
인류의 |
긴 역사 속에서 줄곧 활기찬 생명의 역사를 잠재우는
명수 |
였습니다. |
이처럼 사단의 손에 등이 두들겨지고 자장가를 들으며
깊은 |
잠에 취해 있는 것이 곧 인류의 역사였다면 초대
교회와 카 |
타콤의 순교 생활의 역사와 함께 살펴볼 때 어느 편이
잠꼬 |
대인가 하는 것을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 |
아- 어떻게 이 분명한 사실을 알게 할 수
있겠습니까? |
그러나 성경 말씀대로 하나님께서는 최후의 승리와
성취를 |
위해서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으시니 감사 할
따름입니다. |
그렇게 생각 할 때 참으로 감사한 것은 |
고차원의 학문도 고매한 인격도 구비치 못한 자를
진리로 |
눈을 뜨게 해 주셨다는 분명한 사실입니다. |
이것이 없었고 이 사실을 몰랐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고 |
생각하면 눈 앞이 아찔합니다. |
빗발치는 듯한 비방과 이단이란 규탄과 교파에서
끊기었을 |
당시부터의 극한에 도달한 가난과 전국 교회의 미움과
질시 |
의 눈초리 앞에서도 참으로 후회해 본 일이 없고
후회할 수 |
도 없었던 것은, 주님을 통해서 너무도 풍성하고
넘치는 보 |
배와 영광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란 것을 생각할
때에, |
보배는 질그릇 속에서 더욱 귀함을 느낄 뿐입니다. |
1984년 |
권 신 찬 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