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손님들께 삼겹살구이를 대접합니다. 상추와 쌈장도 준비해 놓았습니다. 손님들이 상추에 삼겹살을 얹고 쌈장도 얹어서 드시면 참 좋을 것입니다. 그 동안은 삼겹살을 대접한다는 것은 꿈도 꿀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며칠 전에 고마운 분이 “차핑디쉬”라는 전기 음식 보온기를 두 대나 선물해주셨습니다. 삼겹살을 구워 “차핑디쉬”에 담아서 손님상에 내면 모든 손님들이 충분히 맛있게 삼겹살을 맛보실 수 있습니다. 고맙습니다. 삼겹살은 이름을 알려주지 않는 고마운 분께서 그제 저녁에 삼겹살을 세 상자나 민들레국수집 앞에 내려놓고 가셨기 때문입니다.
어제는 손님들께 살이 듬뿍 붙은 돼지등뼈와 우거지를 넣고 푹 끓인 감자탕을 내었습니다. 손님들이 감자탕을 참 좋아합니다. 두세 그릇씩 양껏 먹는 분도 있습니다. 국물도 남김없이 싹 비운 것을 보면 기분이 좋습니다. 고마운 분께서 민들레국수집에 보내는 돼지등뼈는 특별히 손질해서 보내주십니다. 좀 더 맛있는 부위에 살이 듬뿍 붙어 있게 보내주십니다.
아주 재미있게 봉사활동을 하는 재미난연구소에서 케이챱이라는 고추장 소스와 깨끗하게 손질된 자반고등어를 다섯 상자나 보내주셨습니다. 케이챱은 손님들이 맛있게 비벼먹기 좋습니다. 그리고 자반고등어를 바싹 구워서 드리면 손님들이 참 좋아합니다.
민들레국수집은 1930년 미국 뉴욕에서 도로시 데이와 피터 모린이 연 “환대의 집”을 흉내 냅니다. 2003년 4월 1일에 문을 연 민들레국수집은 제가 마흔아홉 때 시작했습니다. 이제는 세월이 흘러 일흔 이라는 늙은 나이가 되었습니다. 나이가 드니 좋은 것이 있습니다. 손님들 환대하기가 조금은 쉬워진 것 같습니다.
화도고개에 있는 민들레국수집은 처음에는 아주 조그마한 식당이었습니다. 겨우 세 평(10㎡ 정도)의 넓이에 중고 식탁 하나에 간이의자 여섯 개가 전부였습니다. 그러다가 2005년에는 민들레국수집이 세 들어 있던 건물 주인이신 모세 어르신이 당신이 쓰시던 조그만 사무실을 그냥 쓰라고 내어주셔서 식당이 20㎡가 되었습니다. 두 배로 넓어지면서 민들레국수집은 간단한 뷔페식으로 상차림을 바꾸었습니다. 2009년에는 쌀가게를 하던 바로 옆 건물로 옮겼습니다. 처음 식당을 했던 자리는 주방으로 바뀌었고 식당은 4인용 식탁을 여섯 개나 놓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한꺼번에 스물네 명이나 식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민들레국수집을 찾아오는 손님은 온갖 곳에서 옵니다. 처음에는 민들레국수집 주변과 동인천역 주변에서 노숙하는 분이 우리 VIP 손님이었습니다. 그러다가 더 먼 곳에서도 찾아오기 시작했습니다. 차비가 없어서 한두 시간을 걸어서 오는 분들도 있었습니다. 석바위, 신기촌, 주안, 부평에서 차를 타고 올 형편이 안 되는 분들이 힘겹게 걸어서 왔다가 걸어서 돌아가곤 했습니다. 그러다가 주안역, 부평역, 부천역, 영등포역, 서울역, 종로, 청량리역, 의정부와 수원역에서 노숙하는 분들도 왔었습니다. 언젠가는 부산역에서 노숙하는 분이 찾아온 적도 있습니다. 대다수의 노숙 손님들은 무임승차를 합니다. 그래서 동인천역에서는 한 때는 무임승차 감시가 아주 심했습니다. 그래서 한 정거장 전인 도원역에 내려서 민들레국수집까지 걸어왔다가 또 도원역까지 걸어가서 전철을 타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민들레국수집을 찾아오는 손님들이 사는 곳도 참 다양합니다. 화도진공원, 자유공원, 동인천역 지하도, 지하상가, 병원 대기실, 여인숙, 찜질방, 고시원, 월세 방, 만화방, 피시방, 계단 밑, 버려진 옷장, 헌 옷 수집 통, 폐가, 야산의 동굴, 비닐하우스 등 사람이 웅크리고 숨어있을 수 있는 공간이 우리 손님들의 삶의 자리입니다. 집 없는 사람은 조그만 몸 하나 편히 누일 곳이 없습니다.
민들레국수집은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문이 열려있습니다. 하루에 두세 번 와서 밥 먹을 수 있습니다. 어떤 때는 하루에 다섯 번이나 와서 식사한 사람도 있을 정도입니다. 그리고 토, 일, 월, 화, 수요일은 문을 열고 목, 금은 문을 열지 않습니다. 목요일과 금요일에는 교도소에 갇혀 있는 형제들을 찾아가기 때문입니다. 명절에는 그날만 쉬고 전날과 다음날은 문을 엽니다. 왜냐하면, 노숙하는 우리 손님들이 제일 힘들 때가 황금연휴라고 합니다. 그리고 문을 열지 않는 날인데도 배가 고파서 문이 열렸나 기웃거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제가 있는 경우라면 컵라면이라도 먹을 수 있도록 합니다.
민들레국수집은 운영을 참으로 희한하게 하고 있습니다. 처음 민들레국수집을 열면서 네 가지만은 지키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정부 지원을 받지 않는다. 예산을 확보하기 위한 프로그램을 하지 않는다. 생색내는 돈은 받지 않는다. 조직을 만들지 않는다. 오로지 하느님의 섭리에 의지하면서 선의의 개인들이 희생으로 나눠주는 도움으로 운영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산도 없고 내일 일은 어찌 될지 모릅니다. 그런데도 참으로 많은 분이 도와줍니다. 쌀과 반찬거리를 문 앞에 놓고 갑니다. 온갖 곳에서 택배로 쌀과 물품을 보내줍니다. 그리고 민들레국수집은 연말정산에 필요한 영수증도 발급할 수 없는 곳인데도 불구하고 아무런 조건도 없이 그냥 도와줍니다. 왜 민들레국수집이 정부 지원이나 생색내기 지원은 받지 않으려고 하는가 하면 1930년 미국 뉴욕에서 환대의 집을 열고 노동자 신문을 내었던 도로시 데이와 피터 모린 때문입니다. 피터 모린은 환대는 개인의 희생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했습니다. 인정머리 없는 제도화된 자선이 아니라 어루만지는 다정한 손길로 인격적으로 어려운 이웃을 환대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오랫동안 민들레국수집을 운영해 오면서 힘들었던 때가 몇 번 있었습니다. 민들레국수집도 제도화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존의 사회복지시설처럼 운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마다 고민하고 고민하다가 그냥 처음에 시작한 것처럼 도로시 데이와 피터 모린의 “환대의 집”처럼 운영하기로 마음을 다잡았습니다. 또 하나 힘들었던 것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어려운 사람이 많이 있는데 멀리 필리핀까지 도와줄 필요가 있느냐고 것입니다. 도로시 데이는 하느님이 국경선을 긋지 않으셨다고 했습니다. 할 수만 있다면 형제애로 어려운 이웃을 도와야 하므로 필리핀의 가난한 곳에도 ‘환대의 집’처럼 운영되는 민들레국수집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일을 겪을 당시에는 죽을 것처럼 힘들었지만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다행스런 일이 2016년 봄에 일어났습니다. 인천교구는 민들레국수집이 인천교구 소속의 인준시설이 아님을 공지하는 입장문을 인천교구 주보에 실었습니다. 그 일로 민들레국수집은 너무너무 어려워졌습니다. 문을 닫아야 할 정도였습니다. 결국 필리핀 민들레국수집을 정리하고 인천으로 돌아왔습니다. 아슬아슬하게 배고픈 손님들 대접을 겨우겨우 이어나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코로나19가 터졌습니다. 도시락 나눔으로나마 겨우 민들레국수집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2022년 9월 어느 날이었습니다. KBS2 TV 인간극장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12년 전인 2010년에 방영되었던 “사랑이 꽃피는 국수집”을 유튜브에 추석 특집으로 올린다는 것입니다. 유투브에 올린지 일 년이 조금 넘었습니다. 조회수 2,408,000회라는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민들레국수집은 재미있는 집입니다. 고마운 분들이 십시일반 끊임없이 도와줍니다. 덕분에 오랜 세월 참 재미있게 살았습니다. 고맙습니다.
하느님의 소꿉놀이처럼 오순도순 작은 민들레국수집이 꾸는 꿈은 가난한 사람, 배고픈 사람도 행복하게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 곁에서 가난하게 함께 사는 것입니다. 계획도 없습니다. 그저 옆에 있으면서 마음을 나누는 것입니다.
갑진년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