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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때였다. 우연히 학교 합창단에 들었다. 악보도 볼 줄 몰랐다. 남이 내는 소릴 그대로 따라 했다. 그래도 합창단의 일원이 되고 싶었다. 가난했지만, 부모님은 사과박스보다 빳빳한 와이셔츠를 사주셨다. 하지만, 발표회는 성공적이지 못했다. 반대였다. 중간에 가사를 잊었다. 음도 제멋대로였다. 동료의 원망 어린 눈빛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발표회가 끝나고 1년 치 눈물을 쏟아냈다. 세상에 나란 소년은 사라지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눈이 ‘퉁퉁’ 불은 막내를 보고 아버지는 자초지종을 물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시간이 지나면 네가 눈물을 흘린 1984년은 아무도 기억하지 않을 거다. 때를 기다리면 분명히 다시 기회가 찾아올 거야. ”
27년이 지나고. 1984년 엉터리 가사를 엉뚱한 박자로 노래한 소년을 기억하는 이는 아무도 없다. 물론 만회할 기회는 찾아오진 않았다. 하지만, 지금도 때를 기다린다. 정확한 가사와 박자로 무대의 주인공이 될 나를 말이다.
4월 5일 목동구장에서 만난 두산 임재철도 ‘때’를 기다리는 사내였다. 프로 13년 차의 임재철에게 그가 기다리는 때가 무엇인지 물었다. 그는 아무 말도 없이 빙긋 웃었다. 그리고 잠시 후, 조용히 말문을 열었다.
유망주에서 저니맨으로 지난 2월 일본 미야자키 캠프에서 열린 요미우리 자이언츠 2군과 연습경기에서 임재철이 1루 주자로 나와 있다(사진=줌인스포츠 강명호 기자)
1999년 부산 경성대를 졸업하고 롯데에 입단한 임재철은 당시만 해도 ‘공·수·주’ 3박자를 갖춘 대형 외야재목으로 주목받았다. 국가대표 출신인데다 대학 때 성적도 나쁘지 않았다. 임재철은 최고 인기팀 롯데의 주전 외야수가 돼 자신의 이름을 전국에 알리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기회가 찾아오지 않았다. 입단하자마자 2군에서 뛰었다. 임재철은 좌절하지 않았다. 때를 기다렸다.
“당시 입단 동기 가운데 정원욱이란 투수가 있었어요. 경성대 동기이기도 한데, 그 친구가 정말 잘했어요. 신문 1면에도 ‘정원욱, 신인왕 후보 0순위’하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고요. 하지만, 전 줄곧 2군에 있었습니다. 솔직히 부럽더라고요.”
이때만 해도 1군은 ‘부러움’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 즈음이었다. 2군 훈련을 마친 임재철은 친구 정원욱을 만나러 부산 사직구장을 찾았다. 한참을 기다리던 정원욱은 경기가 끝나고, 구장 출구를 빠져나왔다. 그때였다. 수많은 팬이 정원욱을 둘러싸고 사인을 요청했다. 임재철은 나무망치로 뒷머리를 얻어맞은 듯 큰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바로 머리를 삭발했다.
“프로는 누구를 부러워하는 데서 끝나면 안 된다는 걸 깨달았어요. 부러운 대상을 극복하려고 노력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지금부터 시작’이란 마음으로 머리를 죄다 밀었어요.”
처음으로 때가 찾아온 건 그해 7월이었다. 임수혁의 부상으로 타선에 공백이 생기자 롯데 코칭스태프는 2군에서 맹활약 중인 임재철을 1군으로 불렀다. 이때부터 임재철은 시쳇말로 날아다녔다.
“정말 날개만 없었지, 그라운드에서 날아다녔어요. 만루홈런에다 6연타석 출루까지 했으니까요. 얼마나 잘했으면 신문 제목이 뭐였는지 아세요? ‘너희가 임재철을 아느냐’였어요(웃음).”
짧은 시간에 이름을 알린 임재철은 그해 포스트 시즌에 출전해 다시 맹활약했다. 결정적인 순간은 삼성과의 플레이오프 7차전이었다. 당시 롯데와 삼성은 연장 10회까지 5대 5로 맞섰다. 팽팽한 균형을 깬 건 11회 초 선두타자로 나온 임재철이었다.
“그때 (임)창용이를 상대로 좌전안타를 쳤을 거예요. 그리고 희생번트로 2루까지 갔어요. 1사 2루에서 (김)민재 형이 중전안타를 쳤는데, 사실 그때 홈까지 들어오는 게 불가능한 상황이었어요. 하지만, 주루코치님이 계속 팔을 돌리더라고요. ‘에라, 모르겠다’하고 홈에서 슬라이딩을 했어요. 뒤를 돌아보니까 무슨 영문인지 공이 안 왔더라고요. 홈에서 일어나 어리둥절하고 있는데, 동료가 뛰쳐나와서 ‘막’ 저를 부둥켜안고 기뻐하더군요. 그때 동료의 땀 냄새로 알았어요. 우리가 삼성을 이겼다는 걸.”
삼성을 상대로 플레이오프에서 맹활약을 펼친 임재철은 한국시리즈에서도 한화 투수진을 상대로 13타수 5안타 3타점을 기록하며 분전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가을의 전설’은 한화 차지였다.
“때를 기다린 보람이 있나 싶었어요. 데뷔 첫해 타율이 3할2푼2리였고, 포스트 시즌에서도 나름대로 잘했거든요. 하지만, 그때가 ‘때’가 아니었다는 걸 다음 해에 알았어요.”
2000년 임재철은 40경기에 출전해 타율 2할3푼6리에 그쳤다. 부상과 부진이 한꺼번에 찾아왔다. 2001년 114경기에 출전해 타율 2할6푼9리, 3홈런, 26타점을 기록했지만, 인상적인 활약은 아니었다.
2002년 임재철은 트레이드 카드로 시장에 나왔다. 당시 FA(자유계약선수)였던 유격수 김민재를 잡지 못한 롯데는 삼성 김태균을 영입해 구멍 난 유격수 자리를 메우려 했다. 삼성은 수비가 좋은 임재철을 외야 백업 겸 대타로 활용할 계획이었다.
“삼성으로 트레이드 되고 크게 낙담하지 않았어요. 롯데보다 삼성은 모든 지원이 정말 좋았거든요. 속으로 ‘삼성에선 꼭 기회를 잡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삼성에서 때를 기다린 임재철은 주로 왼손 투수가 나올 때 대타로 출전하거나 경기 막바지 대수비 요원으로 그라운드를 밟았다. 다행히 성적은 롯데 시절보다 좋았다. 게다가 트레이드 된 첫해 삼성은 한국시리즈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2003시즌이 시작하고 출전기회가 많아지리라 예상했어요. 당시 (양)준혁이 형이 부상으로 좌익수로 출전하지 못했거든요. 그래서 주로 대수비 요원으로 출전하면서 때를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야구계엔 ‘저니맨(Journey Man)’이란 말이 있다. 한 팀에 뿌리내리지 못하고 여행하듯 이리저리 자주 옮겨 다니는 선수를 뜻한다. 14년 동안 6번의 트레이드를 경험한 최익성은 “트레이드 카드는 신용카드와 같다”는 말을 했다. 한번 쓰면 자꾸 사용하게 된다는 의미였다. 임재철도 그랬다.
“시즌이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제가 트레이드될 것이란 소문이 돌았어요. 알고 보니 한화 유승안 감독님이 삼성 김응룡 감독님께 절 달라고 하셨나 봐요. 처음엔 김 감독님이 ‘안 된다’고 하셨대요. 그래서 ‘삼성에 남는가 보다 ’했어요. 그런데 준혁이 형 대신 좌익수로 나가야 할 경기에 제 이름이 전광판에 없는 거예요. 이상하다 싶었죠.”
경기 시작 바로 전. 김 감독이 임재철을 불렀다. 평소 말이 없던 김 감독이 가족의 안부를 묻자 임재철은 곧바로 트레이드를 직감했다.
“(유)승안이가 ‘널 한화로 보내주면 2번 타자에 주전 외야수로 쓰겠다’고 했다. 열심히 해라.”
임재철은 다시 한화에서 때를 기다려야 하는 형편이 됐다.
"롯데, 삼성, 한화에서 야구를 했고, 두산에서 비로소 야구를 배웠다" 임재철의 외야 수비는 정평이 나 있다. 정확한 타구 지점 포착과 강한 어깨로 그는 '최고의 우익수'로 꼽힌다(사진=줌인스포츠 강명호 기자)
약속대로였다. 한화 유승안 감독은 임재철이 오자마자 전폭적으로 지원했다. 몇 경기 안타를 치지 못해도 계속 주전으로 기용했다. 주변에서 “임재철을 지나치게 편애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천안북일고 출신의 임재철은 고향팀에 돌아와 기뻤고, 감독의 무한신뢰에 감사했다. 하지만, 그는 “한화에서 야구를 잘한 기억이 없다”고 말한다.
“누가 봐도 표가 날 정도로 잘해주시니까 되레 그게 부담이 되더라고요. 정말 날 믿고 기회를 주는 팀과 감독님을 위해 잘해야겠다는 생각이 독으로 작용한 것 같아요. 2003년은 그런대로 했지만, 2004년엔 타율이 1할대였어요. 어쩔 수 없이 2군으로 내려가야 했습니다.”
2004년 6월 5일. 한화는 임재철을 두산에 보내는 대신 투수 차명주와 현금 5천만 원을 받는 트레이드를 단행했다고 발표했다. 프로 입단 5년 만에 3번째 트레이드를 경험한 임재철은 수액이 끊긴 나무처럼 한참을 멍하니 있었다.
“(차)명주 형의 트레이드 카드로 저밖에 없었다고 하더라고요. 머리가 복잡했어요. 이렇게 야구인생이 끝나나 싶기도 하고. 하지만, 어쩌겠어요. 다시 때를 기다려야지. 신발끈을 질끈 묶고 열심히 훈련했습니다. 이를 악물고 이전보다 더 많이 훈련에 매달렸습니다.”
프로에서 빛을 내려면 개인의 능력과 노력만으론 불가능하다. 코칭스태프가 기회를 제공해야만 한다. 한국프로야구처럼 감독의 영향력이 센 리그에선 얼마나 감독이 기회를 주느냐에 따라 선수의 운명이 뒤바뀐다. 그런 의미에서 임재철은 두산 김경문 감독을 만난 걸 행운이라 생각한다.
“트레이드 되고 두산에 오니까 김경문 감독님이 ‘딱’ 한마디만 하시더라고요. ‘넌 수비가 좋으니까 가능한 수비에 신경을 많이 쓰라’고. ‘때를 기다리면 기회를 주겠다’고. 확실히 이전 팀들에 있을 때보다 부담이 덜 했어요.”
임재철은 타격폼에도 변화를 줬다.
“롯데, 삼성, 한화에 있을 땐 스윙이 컸어요. 이전 감독님들께선 제게 ‘한방’을 주문하셨고요. 하지만, 큰 스윙은 제게 맞지가 않았어요. 원래 전 한방보다는 계속 파울을 치면서 투수들을 괴롭히는 스타일이었어요. 그래서 생각했죠.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기보다 내 몸에 맞는 옷을 입고 야구를 해보자’고요.”
중장거리 타자에서 교타자로 변신을 선언한 임재철은 그에 맞는 스윙을 하려고 무진 애를 썼다. 결과는 좋았다. 2005년 프로 데뷔 후 처음으로 타율 3할을 기록했다.
“타율 3할1푼, 3홈런, 30타점을 기록했을 거예요. 무엇보다 그해 처음으로 400타석 이상에 들어섰습니다. 그야말로 기다리고 기다리던 주전을 꿰찬 거죠. 전 지금도 그런 생각을 합니다. ‘난 롯데, 삼성, 한화에서 야구를 했고, 두산에서 비로소 야구를 배웠다’고요.”
당시 그의 나이 서른이었다. 누군가에겐 서른이 ‘잔치가 끝날 시간’이지만, 임재철에겐 ‘잔치가 시작하는 시간’이었던 것이다.
36살에도 때를 기다리는 임재철 지난 시즌 삼성과의 플레이오프 5차전에서 2회 초 1사 2, 3루에서 2타점 적시타를 친 후 임재철이 팬의 환호에 손을 쥐며 답례하고 있다(사진=두산)
2006시즌을 시작하며 많은 야구전문가는 임재철을 두산의 주전 외야수로 꼽았다. 하지만, 전해와 상황은 달랐다. 시즌 내내 슬럼프가 지속했다. 그리고 결국. 그해 시즌 종료와 함께 임재철은 나라의 부름을 받았다.
“따지고 보면 2005년에 때를 잡은 건 맞아요. 하지만, 그 ‘때’가 길지 않았던 게 문제였어요. 서른둘에 입대하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나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영영’ 때가 다시 찾아오지 않을 것 같아 두려웠던 게 사실이었어요.”
상근예비역으로 복무한 임재철은 한때 은퇴를 결심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때를 기다리기로 했다. 프로 데뷔 후 6년 만에 때가 왔듯이 2년이 지나서도 열심히 노력만 하면 때는 다시 찾아올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2009년 서른넷의 나이에 두산으로 복귀한 임재철은 자신의 믿음을 실천으로 증명했다. 121경기에 출전해 타율 2할8푼1리, 6홈런, 50타점, 11도루를 기록한 것이다. 특히나 투수를 괴롭히는 능력은 그대로였다. 이해 임재철의 타석당 투구수는 4.13개로 리그에서 4번째로 많았다. 두산 특유의 ‘뚝심의 야구’를 임재철은 타석에서 투수를 괴롭히는 것으로 표현한 셈이었다. 2005년에 이어 두 번째로 400타석 이상에 들어서며 임재철은 뒤늦은 전성기를 맞는가 싶었다.
그러나 다음 해는 과거의 되풀이였다. 한해 좋으면 한해가 나빴던 임재철은 2009년 뛰어난 활약에도 지난해 벤치를 지켰다.
“지난 시즌엔 4개월 동안 거의 벤치에만 있었어요. 후배들이 잘했으니까 어쩔 도리가 없었어요. 서운하지 않았느냐고요? 글쎄요. 전 일단 두산이 좋습니다. 팬들 수준도 ‘일희일비’하지 않고 꾸준히 응원해주시는 수준 높은 분들이고요. 그래서 불만은 없었어요. 감독님도 ‘네가 못해서 벤치에 있는 게 아니라 선참으로서 희생하는 것’이라고 하셨어요.”
물론 아쉬움이 없던 건 아니었다. 하지만, 집을 나설 때마다 아내가 들려주는 말 한마디가 용기를 줬다. “아내가 매일 그래요. ‘당신은 야구장에 뛴다는 것만으로 만족하고, 밝게 행동하라’고요.”
지난 시즌 두산을 취재하면서 임재철을 지켜본 적이 있다. 선발로 출전하지 못한 임재철은 1회부터 9회까지 더그아웃에서 동료의 플레이를 격려하고, 응원하다가도 어느새 배트를 들고 스윙연습을 반복했다. 경기가 끝날 때까지 그는 그라운드를 밟지 못했지만, 다음날에도 묵묵히 응원과 스윙연습을 되풀이했다. 그런 그를 가리켜 두산 관계자는 “다른 팀에서 뛰었으면 당장 주전감”이라며 아쉬워했다.
“전 생각이 달라요. 명문대에 진학한 학생들도 거기서 또 등급이 나뉘잖아요. 야구도 마찬가지에요. 두산의 외야진이 화려하다 해도 제가 여기서 살아남지 못하면 다른 팀에 가서도 마찬가집니다. 지난 시즌 포스트 시즌에서 조금 팬들께 제 존재를 보여 드렸지만, 프로야구 선수는 은퇴할 때까지 계속 뭔가를 보여줘야 하는 사람이에요. 그러려면 더그아웃에 있을 때도 계속 준비를 해야 합니다.”
36살의 임재철은 지금도 때를 기다리고 있다. 그 ‘때’가 찾아올 때를 대비해 술을 끊었다.
“확실히 30대 초반 때와 체력이 달라요. 예전엔 술을 마셔도 다음날이면 회복이 됐어요. 그런데 33살이 지날 무렵부터 술을 마시면 이틀을 쉬어야 몸이 풀리더군요. 그래서 곰곰이 생각해봤어요. ‘동갑인 이승엽, 홍성흔, 임창용, 조성환이 지금까지 야구를 잘하는 비결이 뭘까’하고요. 답은 하나였어요. 그 친구들은 술을 마시지 않아요. (이)승엽이는 원래 술을 좋아하지 않고, (홍)성흔이는 일전에 물었더니 ‘술을 입에도 대지 않는다’고 하더라고요. (임)창용이는 술자리는 좋아하지만, 술이 안 받는 체질이고, (조)성환이는 거의 술을 마시지 않는 친구예요. 그래서 결심했습니다. 아무리 괴로워도 술을 마시지 않겠다고요.”
지금도 임재철은 동료 가운데 경기에 출전하지 못해 괴로워하는 선수가 있으면 이렇게 말한다. “괴롭다고 술을 입에 대면 결국 네가 지는 거다”라고.
때는 기다리는 사람에게 찾아오지 않는다
임재철에게 '때'는 부러지 방망이와 같다. 제아무리 강속구에 배트가 두동강이 나도 절대 배트를 손에 놓지 않듯, 임재철은 갖은 역경과 난관에도 '때'를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사진=두산) |
“FA보다 중요한 건 성적이에요. 제 성적이 나쁘고, 팀이 우승하지 못하면 FA도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FA보다 제가 정말 기다리는 ‘때’는 마흔 살이 됐을 때입니다.”
마흔 살이 됐을 때라, 정확히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물었다.
“제 또래들이 정말 야구를 잘했어요. 하지만, 그 많은 선수 가운데 앞에서 말한 승엽이, 성흔이, 창용이, 성환이 그리고 저만 살아남았어요. 사실 성환이는 저보다 못했지만, 지금은 ‘확’ 떴죠(웃음). 솔직히 그 친구들보다 제 실력이 떨어지는 게 사실이에요. 하지만, 그 친구들보다 야구를 오래하는 게 소원입니다. 그래서 세운 목표가 마흔이에요. 그때까지 체력이 돼서 현역으로 뛴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어요.”
임재철은 지금도 구장에 들어서면 밝게 웃으려 노력한다. 설령 주전으로 뛰지 못해도 밝은 미소로 동료를 대하고, 냉철한 자세로 타석에 설 준비를 한다. 하지만, 올 시즌은 유독 각별하다. FA가 걸리기도 했지만, 현역생활의 분수령이 될 것이라 예상하기 때문이다.
“이제 제 나이 서른여섯입니다. 적지 않은 나이에요. 정직하게 말씀드려 올 시즌 기회를 잡지 못하고 백업으로 뛰면 마흔 살 이전에 은퇴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요. 정말…때를 기다린다는 게 가장 힘듭니다. 언제 출전하지 모르고, 언제 기회가 올지도 모른 상태에서 하염없이 기다려야만 하니까요. 그래도 한 가지 확실한 건.”
임재철은 자리에서 일어서며 짧게 심호흡을 하고서 말문을 열었다.
“제가 프로 13년 동안 터득한 경험이 있다면 딱 하나에요. ‘때는 기다리는 사람에게 오는 게 아니라 준비한 사람에게 찾아온다.’ 이겁니다.”
4월 5일 목동구장에서 열린 넥센과의 경기에서 두산과 임재철 모두 좋지 않았다. 팀도 패하고, 임재철도 안타를 치지 못했다. 그러나 두산 팬들은 승패에 관계없이 가슴에 새겨진 '두산'이란 이름과 등에 새겨진 선수들의 등번호에 집중했다. 임재철은 "FA보다 이렇듯 수준높은 팬들을 위해 뭔가를 보여줘야 한다"는 생각이 더 강하다. 어느 두산 선수가 그렇지 않겠는가(동영상=스포츠춘추 박동희 기자)
2001년 이후 두산은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하지 못했다. 두산 김경문 감독 역시 ‘한국프로야구 최고 명장 가운데 한 명’이란 찬사를 받았지만, 정작 한국시리즈 우승컵은 안지 못했다. 두산과 김 감독은 때를 기다려왔다. 임재철과 같은 운명이었던 것이다.
시즌 초반이지만, 두산은 1승2패(4월 5일 기준)로 스타트가 좋지 않다. 임재철도 6타수 무안타로 출발이 나쁘다. 하지만, 아직 염려하긴 이르다. 왜냐? 두산과 김 감독 그리고 임재철 모두 때가 찾아오길 기다리기보다 때가 찾아올 날을 대비해 최상의 준비를 했기 때문이다.
때는 분명히 찾아온다. 그날이 오면 잠실구장은 때를 기다려온 수많은 임재철들의 함성이 대기에 울려 퍼질 것이다.
( + 4월 7일 목동 넥센전에서 두산은 넥센을 5대 2로 꺾었다. 임재철은 선발 출전하지 않았다. 그러나 1회부터 8회까지 스윙연습을 하며 때를 기다렸다. 결국, 9회 대타로 나와 2루타를 치며 시즌 첫 안타를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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