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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창세기 4:1-8
제목: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를 드리라
일시: 2020. 6. 28
장소: 라이프찌히 한인교회
I. 6월 마지막 주가 되면 늘 긴장하며 자주 얘기하던 테마가 있다. “예배 빠지지 말고 꼭 드리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7월부터 휴가철이 7월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어 지체들이 이곳 저곳으로 흩어지기 때문이다. “어디를 가더라도 호텔부터 잡지 말고 거기서 예배드릴 곳이 어디인지 먼저 알아보라”고 했다. 혹은 여행 오는 지인들을 호스트하는 경우, “누가 오면 주일 함께 어디 여행 다니는 것이 아니라 함께 예배하러 오라”고 했다. 올해는 비록 코로나로 인해 어디 가기도 쉽지 않고 한국에서 방문하는 친구들도 없겠지만 여전히 잊지 않고 또 말하고 싶다. 이번 여름 여전히 예배를 귀히 여기고 최선을 다하자는 것이다. 오늘 우리는 가인과 아벨의 제사를 통해서 예배를 다시 한번 조명해 보고자 한다.
II. 가인과 아벨의 최우선 일은 제사였다.
사람들은 수많은 일들을 한다. 돈 버는 일, 취미 생활하는 일, 공부하는 일, 시장가는 일, 극장 출근하여 해야 하는 일, 작업하는 일, 애보는 일... 그런데 그 모든 일들은 수평적인 일들이다. 중요하지만 제2차적인 일들이다. 일들 가운데 가장 기본이 되고 우선되어야 할 일은 나를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과 해야 할 일이다. 그것은 수직적 관계의 일이다. 우리가 아담과 하와의 케이스에서 잘 아는 바와 같이, 이 수직적인 관계가 깨어질 때 다른 모든 수평적인 관계도 깨어지게 되었고 수많은 아르바이트들이 발생하게 되었다. 일을 독일어로 Dienst 라고 하는데 인간이 해야 할 수많은 딘스트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하나님께 예배하는 Gottesdienst 이다.
성경에 보면 창세기 3장까지 인간과 연관된 핵심적인 여러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엄청나게 중요한 일이다. 창조, 타락, 사망선고... 이 일로 인해 인간의 일거리 딘스트들이 수없이 생겨났다. 에덴동산에서 추방되었고 출산의 고통과 땀을 흘리고 땅을 파야 먹을 수 있는 일들이었다. 아담과 하와 이후 제 2세대 인류였던 가인과 아벨 역시 그렇게 아르바이트를 했던 것이다. 그 이야기는 창세기 4장에서부터 나온다. 아벨은 양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짓는 자였다. 그러나 그러한 직업은 그들의 핵심적인 딘스트가 아니었고 중요한 것은 그들이 Gottesdienst 즉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아담과 하와가 제사를 드렸다는 말이 없다. 그러나 제2세대 인간인 가인과 아벨에 이르러 제사 이야기가 나오게 된다. 그 제사를 통해서 단절된 하나님과 우리 인간 사이의 관계가 소통되는 것이다. 이후 성경은 계속해서 제사를 드리는 것이 핵심 메시지임을 말하고 있다.
코로나가 터지자 가장 마지막까지 양보할 수 없고 사수하고자 하는 마지노선이 예배를 드릴 수 있는가였고 사회가 오픈을 시도할 때도 예배를 드릴 수 있는가가 첫 번째 출발선이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할 때 축복 받는 것, 윤리, 도덕적으로 사는 것도 중요하고, 삶에 꼬인 문제를 해결하는 것과 마음속에 바라는 소망을 이루는 것 등등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우선 되어야 하는 것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깨어진 관계를 다시 연결하는 것이다. 그 수직적 연결이 바로 제사 즉 예배이다. 그 수직적인 딘스트는 하나님과 관련된 일이기에 거룩하고 신령과 진정으로 드려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예배보러 간다 하지 않고 예배드리러 간다” 고 한다. 예배는 하나님과의 일이기에 인간과 관련된 수평적인 것은 제외하려고 노력한다. 그래서 늘 고민하고 있는 것이 예배 순서에서 교회소식을 나누는 시간이다. 광고시간을 예배 전에 하기도 한다. 사업예배, 돌예배, 헌신예배, 감사예배, 졸업예배 결혼예배, 장례예배 등등 예배의 종류도 많지만 초점은 하나님께 영광을 드린다는 것이지 예배는 어떠한 다른 목적을 가질 수 없다.
예)2006년 6월 18일 독일 월드컵 당시 주일 저녁에 한국과 프랑스의 예선이 있었다. 이 주일이 되기 오래 전에 여러 목사님들과 영향력있는 분들이 예배를 함께 드리자고 했다. 당시 우리는 니콜라이교회 교육관 건물을 오랫동안 사용하고 있었는데 권사님이 어렵사리 니콜라이 교회 휘러 목사님께 부탁하여 그날 만큼은 교육관이 아닌 니콜라이교회 본당에 보통 예배시간보다 한시간 늦춘 13:00에 예배를 드리기로 했다. 많이 올 것으로 생각해서. 그 날 예배순서는 많은 외부 인사들이 담당했다. 회중석에는 붉은 악마들도 가득했다. 그러나 예배를 드리는데 정작 우리 교회식구들은 순서를 맡은 자 외에는 거의 없어 보였다. 예배를 드리는 내내 다시는 이런 예배를 드리지 말아야지라고 생각했다. 예배는 활기차 보였지만 돗대기 시장 같았다. 그리고 어느 순서를 맡은 목사님은 승리를 염원하는 예배를 드린다고 한다. 승리를 바라는 것은 이해하지만 월드컵 경기에서 이기는 예배를 드리는 것은 또 뭔가? 경기는 이기기도 하고 지기도 하지. 그때 결국 한국이 1:1로 비겼다. 그날 주일 국회의원들도 오고 연예인도 오고 많이들 왔지만 헌금이 1279.05유로, 249달러, 한국원화 1만원이었다. 제사 예배는 그러한 것이다. 내 삶의 그 어떠한 일보다 하나님과 풀어야 할 일을 하는 가장 중요한 일이다.
III. 가인의 예배는 거절하시고 아벨의 예배를 받으신 결정적인 이유는 무엇인가? 제물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제사에서 가장 핵심은 제물이다. 타락이전에는 제물이 필요 없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매개체가 필요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타락이후에 직접적으로 하나님과 대면할 수 없었던 인간들은 제물이 필요했다. 가인이나 아벨이나 각자 자기의 제물이 있었다. 그런데 제물도 다 드려질 수 있는 제물인가? 어떠한 제물을 드려야 하는가? 드리는 자가 드리고 싶은 것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받는 자가 받을 만한 제물을 드려야 한다. 제물의 무게중심은 “드리는 자”에게 있지 않고 “받는 자”에게 있다. 아벨의 제물은 하나님께서 선히 여기셨고 가인의 제물은 하나님이 거절하셨다. 하나님은 제물에 까다로우셨다. 설렁설렁 아무거나 주어진 대로 받지 않으셨다. 하나님을 거지로 아는가? 하나님이 우리의 헌신과 제물을 못 받아 굶고 계시는 것이 아니다. 열납하시고 싶은 제물이 있으신 것이다.
여기서 먼저 가질 필요가 없는 선입견은 제물은 “정성이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열납 받은 아벨의 제물이나 거절당한 가인의 제물이나 정성이 많았고 정성이 부족했다는 말은 없다. 하나님이 열납 하시는 제물은 “지극정성”이 들어간 제물이 아니라 “어떠한 종류의 제물인가”하는 것이었다. 히브리서11장에서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물을 받으신 것은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히11:4)이라 한다. 그 예물들이 어떠한데 그런가? 아벨의 제물은 양을 잡은 피의 제물이었고 가인의 제물은 땅의 소산이었다. 피는 성경에서 언약을 말하는 것이고 땅은 죄를 말하는 것이다.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창세기 3:17). 저주를 받고 죄된 땅에서는 하나님께 흡족한 제물을 드릴 수 없다. 드릴 수 있는 제물은 언약을 의미하는 피의 제물뿐이었다. 구약에서 언약은 동물의 피로 표현되었다. 신약에 와서 그 피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는 피로 언약이 완성이 되었다. 히브리서에서 아벨은 믿음으로 제사를 드렸다고 하는데 그 근거가 바로 양이라는 피의 제물이다. 그 피의 제물을 드린 것이 바로 믿음으로 제사를 드린 것이다. “믿음”이라고 할 때 우리의 정성과 노력으로 믿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믿음은 약속에 근거하며 그 약속은 피의 제물에 근거하며 피의 제물을 아벨이 드렸던 것이다. 그 피의 제물이 아벨의 의의 근거가 되는 것이다.
우리가 믿는다고 말할 때 뭘 믿는가? 제물이 그 근거가 된다. 우리가 의롭게 되었다고 말할 때 그 피의 제물이 그 근거가 된다. 아벨의 양의 제물은 유월절 어린양을 말하는 것이고 그 유월절 어린양은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말한다. 아벨이 양을 제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듯이 우리는 예배드릴 때 예수 그리스도를 앞세우는 예배드린다.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하나님이 받으실 그런 예배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는 어린양의 피가 필요한 것이다. 예배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빠지면 예배가 되지 않는다. 프로그램이 좋고 멧시지가 좋고 찬양이 좋고 시설이 좋아도 피의 제물되시는 예수님이 없으면 무효이다. 우리가 예배드리기 위해 성소에 들어올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피 때문이다.
예)코로나로 인해 교회의 개념이 피부로 확실하게 느껴졌다. 집이든 교회공간이든 상관이 없다. 공원에서도 괜찮다. 수가성여인에게 주님이 예배할 곳이 꼭 예루살렘도 아니요 그리심산도 아니다고 하셨다. 예배순서와 프로그램도 일정하지 않고 할 수 없는 것도 많다. 성가대가 없어도, 악기팀이 없어도,... 다 없어도... 예수님이 없으면 안된다. 예수 안에서 드리면 되는 것이다. 시간도 다르다. 11:00 13:30에... 주일날 지구가 한바퀴 돌아가면서 시간단위별로 달라지는 예배도 얼마나 멋진가? 주일날 태양이 떠오르면서 마치 운동장에서 파도타기 응원하듯이 시간이 지나면서 지구상의 사람들이 각각 손을 들고 찬양한다.
IV. 제사를 받으시는 하나님이 우리의 제물을 받으시는 것이 중요하기에 우리의 예배는 의무가 아니라 특권이다.
가인이 예배에 실패하자 그의 안색이 변하였다.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안색이 변하면 안 된다. 안색이 변하면 삶이 황폐해지기 시작한다. 예배성공이 인생 승리가 되는 것이다. 예배가 흔들릴 때 삶의 질서가 깨어지는 것이다. 예배에 흩뜨러지면 내 삶이 흩뜨러지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삐걱거리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예배를 받으시기를 간절히 사모해야 한다. 가인과 아벨의 제사와 같이 우리는 예배드린다는 것보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예배를 받으실까에 노심초사해야 한다. “나의 입술의 모든 말과 나의 마음의 묵상이 주께 열납되기를 원하네”라고 하는 노래와 표현처럼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하나님이 우리의 예배를 받으시는가하는 것이다. 갑과 을의 관계라고 하는데 우리는 드린다고 생각하니 무슨 갑인 줄 안다. 그러나 갑이 아니라 을인 것이다. 받아주시면 감사하지요가 우리의 고백이 되어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제사를 드리고 예배드리고 예물을 드릴 때, 큰 선심을 쓰듯이 하는 것이 아니라 떨리는 마음으로 이 제사를 받으실지 겸손하게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이렇게 예배할 수 있는 것은 참으로 감사한 일이다. 예배는 의무인가? 주일성수를 한다고 한다.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니 의무가 된다. 그러나 예배는 꼭해야 하는 번거로운 아르바이트가 아니라 예배할 수 있는 자격증이 주어진 특권인 것이다. 의무는 할 수 없이 하는 것이지만 특권은 알아서 찾아먹는 것이고 말려도 얻고자 하는 것이다. 안 그러면 바보이니까. 똑똑한 사람은 지금 이 일들이 의무인지 특권인지 잘 구분할 수 있는 사람이다.
예)입시철이다. 학교에 들어간다. 의무로 들어가는가? 특권이다. 등록금 내고 싶은데 합격을 안시켜주고 안받아줘서 못들어 간다. 극장이나 오케스트라, 혹은 어떠한 직장에서 아인라둥이 와서 오디션을 보자고 한다. 그것은 떨리는 일이고 긴장되는 일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귀찮은 일이 생겨서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일이 아니요 특권이다. 겸손은 의무인가? 특권인가? 겸손해야 한다고 하니 의무와 같지만 뭐가 있어야 겸손할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그러니 특권이다. 다들 겸손하고 싶어서 높아지고 많은 것을 갖고 영향력을 넓히려는 것 아닌가! 거지는 없다고 겸손할 수 없다. 무능한자는 자신을 절제할 수 있는 기회가 없다. 헌신을 한다는 것은 특권인가 의무인가? 헌신을 한다는 것은 번거로운 일이고 손해가 날 것 같은 생각이 들 수 있다. 그러나 헌신의 기회가 있으면 “나 좀 끼워줘”라고 할 수 있기를 바란다.
예)교회가 아주 어려울 때 성백영목사를 찾아갔다. 그리고 아시아선교에 대해서 열을 내면서 말했다. 그랬더니 “나도 좀 끼워줘”라고 한다. 성경말씀이 아니지만 끼워달라고 하는데 얼마나 감사한지 그 친구는 잊을 수 없다. 지금 돈내라는 말인데 의무나 번거로운 일일 것인데도 끼워달라고 한다. 그런 말을 어디 책에서 배웠는지... 그 교회에 부임해서 있던지 얼마 되지 않은 때였다. 개인적으로 100만원을 해 주었다.
우리가 이렇게 더운 날임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교회에서 또는 가정에서 시간을 맞추어 예배를 드리고 있지만 해야하기 때문에 하는 것이 아니라, 할 수 있기에 감사해서 드리는 예배인 것이다. 가인이 자신의 제물이 열납되지 않았을 때 그는 특권 잃은 것이다. 아벨은 하나님이 열납하셨기에 특권을 누린 것이다.
V. 올 한해의 절반을 보내면서 어떻게 예배하였는가? 예배하는 일에 사투를 벌인 것 같은 느낌이다. 어느 때보다 예배의 소중함으로 보낸 시간과 같다. 이제 휴가철이기도 머쓱한 7월을 맞으면서 여전히 강조하던 이야기를 또 드린다. 예배에 성공하라. 어디를 가든지 호텔을 정하기 앞서 예배할 장소를 찾으라. 이곳을 방문하는 지인들이 있다면 함께 예배의 자리에 서라.
예배에 관련해 릭워렌의 명언처럼 “worship is not a part of our life, but worship is our life." 예배는 삶의 악세사리나 일부가 아니라 예배는 우리의 삶의 전부이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우리의 삶은 이미 열납되어진 예배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아르바이트 즉 Gottesdienst로부터 시작할 때 우리 삶의 모든 일들이 소통하게 된다.
예배는 알고보면 우리의 특권이기에 더 풍성하게 그 특권을 누리며 내 예배를 받으시고 내 삶을 열납하시는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의 한 주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