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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긴이의 말
이형우 아빠스
『아우구스티누스 규칙서』는 고대 수도 규칙서들 가운데 비교적 짧은 규칙서다. 본문이 10여 쪽밖에 안 된다. 그러나 현존하는 서방 수도 규칙서들 중에서 가장 오래된 『아우구스티누스 규칙서』는 『베네딕도 규칙서』보다 무려 120년 앞섰으며 후기 서방 수도 규칙서들에 큰 영향을 미쳤다. (8쪽)
교부학자로서 아우구스티누스가 차지하는 위치와 중요성에 대해서 길게 소개할 필요는 없겠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개종하면서부터 수도생활을 열망했고 또 실제로 수도생활을 하였으며, 사제로 또 주교가 되어서도 자신이 세운 수도원을 지도하면서 수도자적인 생활을 계속하였다. (8쪽)
밀라노에서 세례를 받은 아우구스티누스는 고향인 아프리카의 타가스테로 돌아와 친구 알리피우스와 아들 아데오다투스와 함께 수도생활을 시작하였
다. (9쪽)
아우구스티누스는 히포의 수도원을 위해 자신의 규칙서를 썼는데, 이 규칙서의 원래 이름은 『계명집』 또는 『하느님의 종들을 위한 규칙서』였다. 우리는 이 규칙서를 흔히 『아우구스티누스 규칙서』라고 부른다. (9쪽)
영역본 편집자의 말
존 레텔 신부
저명한 사학자 아돌라르 줌켈러 신부는 1956년 『아우구스티누스 규칙서』에 대한 주석서를 썼다. 이 규칙서는 1961년 위스콘신 주 드피르에 있는 성 노르베르투스 수도원 수도자들에 의해 영어로 번역되었다. 짧지만 깊은 내용이 담긴 이 책은 아우구스티누스의 규칙을 따르는 많은 공동체에 큰 도움을 주었다. (14쪽)
줌켈러 신부가 쓴 주석서와 그 외 다른 저서들을 수년간 읽어 온 나는, 이분이야말로 아우구스티누스회의 역사와 전통에 정통할 뿐 아니라 성인의 마음을 이해하는 예리한 통찰력과 그 사상의 깊이를 꿰뚫어 보는 능력이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15쪽)
줌켈러 신부는, 아우구스티누스가 참으로 살아 숨쉬는 양 명료하고 예리한 필치로 글을 쓴다. 이 책은 하나의 주석서라는 의미를 넘어 규칙서에 대한 묵상집이기도 하다. 여러분이 이 책을 읽을 때 기도하는 마음으로 여러분 자신을 규칙서에 비추어 보게 될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가 그의 형제들에게 요청했던 것처럼 여러분은 마치 거울처럼 규칙서에 자신을 비주어 보게 될 것이다. (15-6쪽)
☕ 이 책은 주석서를 뛰어넘어 묵상서다.
머리말
아우구스티누스와 수도생활
현대 그리스도인들은 아우구스티누스를 하느님을 찾는 사람, 주교, 신학자로 생각하고 있으나, 수도자로서의 그의 삶은 대부분 잊고 있다. (17쪽)
☕ 아우구스타누스는 신학자이자, 수도자였다.
그가 그리스도적 수도생활을 처음으로 접한 것은 386년 밀라노에서였는데, 이때 그는 생애의 중요한 전환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이 중대한 갈림길에서 아프리카인 동료였던 폰티키아누스가 그에게 그리스도교 수도승들이 어떻게 완덕을 향해 애쓰고 있는지 들려주었다. 이 최초의 접촉은 그의 회개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그때부터 그는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하느님의 종’이 되는 것, 즉 수도자의 생활 방식에 따라 완전한 포기를 통해 완덕과 지혜를 추구하는 사람이 되는 것임을 이해하게 되었다. (17-18쪽)
세례를 받아 회개한 그는 388년에 고향으로 돌아와 타가스테에 있는 양친의 집에서 자신과 친구들을 위한 수도 공동체를 설립하였다. "그는 온갖 세속적 관심사들을 떨쳐 버리고 단식과 기도와 선행을 하면서 하느님을 섬기는 데 뜻을 같이한 친구들과 하나가 되었으며, 밤낮으로 주님의 법을 묵상하였다”(전기,3,1).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가 이 관상 수도원에서 조용히 살수 있었던 기간은 3년뿐이었다. 391년 뜻밖에 히포의 사제로 서품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34년 후에는 보좌주교직을 받아들여야 했으며 얼마 안 있다가 교구장 발레리우스 주교가 서거하자 히포의 교구장이 되어 전권을 받았다. (18쪽)
이 모든 상황 변화에도 불구하고 그는 수도생활의 이상을 포기할 수 없었다. 타가스테에서의 수도원 설립에 이어 히포에서는 391년에 평신도를 위한 수도원을 설립했고, 사제품을 받은 후에도 이 수도원을 직접 지도하였으며, 4~5년 후에는 주교관 내에 ‘성직자 수도원을 설립했다. (18-19쪽)
☕ 그는 주교에 앞서 수도자였다.
자신이 일생 동안 짊어져야 할 주교직의 소명에 대한 책임을 잘 알고 있었고 또한 관상생활에 대한 열망을 결코 버리지 않았던 그는 회수도생활의 전통적인 이상과 영혼의 목자로서의 사도직 활동을 조화시킬 수 있었다. 교회를 위한 봉사는 하느님께서 수도자들에게 원하시는 것이고 수도생활의 관상적인 면은 그다음이어야 한다고 그는 점점 깨닫게 되었다. "어머니인 교회가 여러분의 봉사를 요청한다면 높이 올라가려는 야망에서 이를 수락해서는 안 되며, 무위자작하고 싶어서 임무를 옳게 수행하지 못하는 일이 있어서도 안 됩니다. … 교회가 필요로 하는 것을 제쳐 두고 한가한 생활을 택하지 마
십시오”(「서간」 48,2).
☕ 그리스도인의 삶은 치열한 투쟁이다. 세상에 대한 도피가 아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죽을 때까지 많은 수도원을 세웠다. 그는 수도 공동체 안에서 사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회개한 후 곧 그는 저서들을 통하여 수도생활을 권장하기 시작했다. 그는 수도 규칙서, 그리고 많은 저서와 서간과 설교를 통해 동방교회의 전통적 수도생활의 이상을 설명하고 그것에 더 깊은 성서적 · 신학적 근거를 제시하는 데 온 정열을 쏟았다. (19-20쪽)
☕ 성인은 수도생활의 기틀을 세운 사람이기도 하다.
400년경에 아우구스티누스는 『수도자들의 노동』이라는 책을 썼는데, 이것은 후기 수도생활의 표어인 “기도하고 일하라"(Ora et labora)의 기원이 되었다. 일 년 후에 그는 『거룩한 동정성』올 출간했는데, 이 저서는 봉헌된 동정성과 절제에 관한 교부 시대의 가장 심오한 신학 저서 가운데 하나이다. (20쪽)
☕ “기도하고 일하라"(Ora et labora)는 베네딕도회의 모토가 아우구스티누스에게 나왔다.
410년경에 그는 자신의 주교좌 대성당에서 시편 132(133)에 관한 설교를 했는데, 비유적 해설을 통해 이 시편을 그리스도교 수도자들이 추구하는 이상을 찬양하는 노래로 바꾸어 놓았다. 마지막으로 425~426년 사이의 겨울에 행한 『설교』 355 · 356을 주목해야 하는데, 이 두 편의 설교는 후대 수도생활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이 두 편의 설교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그의 주교관 내에 있었던 수도원을 특징짓는 사랑과 나늄의 공동생활을 생생히 묘사해 주고 있다. (20쪽)
수도생활을 하면서 이러한 저서들을 남긴 아우구스티누스는 그 당시는 물론, 후대 수도원들의 위대한 스승이 되었다. 그리스도교 수도회 제도와 수도생활의 역사에 있어서 그의 중요성을 지나치게 과대평가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신학과 종교의 많은 다른 분야에서처럼 그가 이 분야에서도 훌륭한 이상을 제시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의 수도 규칙서는 그의 수도생활의 이상이 새롭고 독창적인 것이었음을 나타내는 뚜렷한 증거인 것이다. (21쪽)
☕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수도생활의 스승이기도 하다.
『아우구스티누스 규칙서』의 친저성과 기원
『아우구스티누스 규칙서』는 10여 쪽밖에 안 되는 짧은 책이지만, 서방교회의 수도생활 관련 도서 가운데 이 책만큼 큰 영향을 끼친 것도 드물 것이다. (21쪽)
프랑스 코르비 베네딕도회 수도원에 소장된 6~7세기 사본으로서 가장 오래된 필사본에서도, 이 규칙서는 두 개의 본문을 포함하고 있다:
『수도원 규정서』는 400 단어가 채 안 되는 분량인데, 수도원의 기도생활, 하루 일과와 생활양식에 관한 일련의 가르침이 들어 있으며, 『규칙서』는 『수도원 규정서』의 약 다섯 배 정도 되는 규칙서다. 『규칙서』의 저자가 아우구스티누스라는 점을 의심해야 할 이유는 없다. 약 300개에 달하는 필사본의 전승이 이를 증명하고 있으며(이들 중 15개의 필사본은 천 년 전의 것들임), 또한 이 문헌의 문체와 내용도 이를 증명해 주고 있다. 1959년에 타르키시우스 반 바벨(Tarcisius van Bavel)이 근거를 제시했듯이, 어휘와 성경 인용구와 사상이 아우구스티누스의 그것들과 완전히 일치한다. 한편 매우 오래된 『수도원 규정서』는 초기부터 『규칙서』와 함께 묶여져 전해 왔지만, 이러한 문체 연구를 통해 아우구스티누스 친저가 아니라는 결론이 내려졌다. (21-22쪽)
오늘날 『아우구스티누스 규칙서』로 여겨지는 본문의 친저성 문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앞서 인용한 첫 문장을 제외한 본문 전체는 성인의 『고백록』이나 『신국론』과 마찬가지로 문체와 내용에서 정확히 아우구스티누스의 것이다. (23쪽)
『아우구스티누스 규칙서』의 중요성
『아우구스티누스 규칙서』는 수도생활 초기에 집필되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이 규칙서를 저술하였을 때는 이미 이집트의 젊은이 안토니우스가 사막에서 침묵과 고독 속에서 하느님을 섬기는 데 자신을 완전히 바친 지 100여 년이 지난 후였다. 『아우구스티누스 규칙서』는 서방교회에 현존하는 수도 규칙서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베네딕도 규칙서』보다는 120여 년,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규칙서』보다는 800여 년 앞서 쓰여졌다. (24쪽)
우리는 아우구스티누스가 규칙서를 쓴 시대가 우리 시대와 매우 비슷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 당시 사람들도 몹시 불안한 상태에 있었다. 야만인들의 침략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 당시 사람들의 앞날은 오늘의 우리의 앞날과 마찬가지로 암울하고 위급했다. 그들은 고대 세계의 수많은 귀중한 문화적 업적이 붕괴되는 것을 보았으며, 근본적으로 새로운 무엇이 일어나고 있음을 느꼈던 것이다. 그들은 앞으로 그리스도교에 어떤 일이 닥칠지 알 도리가 없었다. 따라서 아우구스티누스와 그가 창설한 여러 수도원의 수도 형제자매들은 오늘날 우리가 체험하고 있는 것과 같은 위기와 변혁의 시대에 살고 있었다. (24-5쪽)
『아우구스티누스 규칙서』가 여러 시대를 거치면서 그 중요성을 지녀 왔으며 그리스도교 수도생활에 초석이 되었던 것은 이 규칙서가 지닌 영적 풍요로움 때문이다. (25쪽)
이 규칙서가 묘사하는 복음적 생활 방식의 아름다움과 폭은, 이것이 교회의 가장 훌륭한 신학자인 한 성인의 작품임을 보여 준다. 이 규칙서에 내포되어 있는 인간 본성에 관한 깊은 통찰과 사상 그리고 사랑이라는 그리스도적 완덕의 고원한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수도생활, 이 모든 것은 여러 시대를 관통하여 이 규칙서에 중요성을 부여하고 있다. (25쪽)
이 규칙서는 아우구스티누스 자신의 카리스마적 개성, 하느님과의 친교, 형제자매들에 대한 사랑, 사도적 가난과 헌신, 봉사 자세, 친절한 마음 등을 반영하고 있다. 그가 이 규칙서에 기록하고 있는 것은 자신의 생활 계획표와 같다. 그는 40년 이상을 몸소 이 영적 원칙에 따라 살려고 노력했다. 또한 그는 이 작은 문헌에서 매우 개인적인 면, 즉 영성생활 및 수도생활에서 자신의 신앙적인 체험의 일면도 우리에게 보여 준다. (25-6쪽)
아우구스티누스는 규칙서에서 수도생활 순서와 생활양식에 관한 극히 세세한 점이나 외적 구조 문제들에 대해서는 별로 큰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이 점에서 그의 규칙서는 수도원 안에서의 모든 일상생활의 세부 사항들을 규정하려 하는 『베네딕도 규칙서』와는 전혀 다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본질적 요소들을 중요시한다. 그는 공동체 안에서 실현되고 오로지 그리스도의 복음에 의해서 영위되어야 하는 수도생활의 요체들을 서술하고 있다. (26쪽)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치열한 투쟁이다. 세상에 대한 도피가 아니다.
"기도하고 일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