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5장 전체를 리뷰한다.
7월 첫째 주일에 1-18절까지 살펴보았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38년 된 병자를 고치셨다(8-9). 소위 '베데스다의 기적'
하지만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공격했다(16-18)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안식일 규정을 어겼고, 자신을 하나님과 친아들이라고 주장하셨기 때문이다.
7월 둘째 주 본문은 19-29절까지이다.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 자신 스스로를 변호하셨다(19-29).
일종의 변론서를 법원에 제출한 것이다.
안식일에 노동을 했다는 고소 고발건에 대해서는 자신은 생명을 살리는 사람이다라고 반박했다(21).
예수님은 절대로 하나님의 친아들이 될 수 없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자신은 하나님이 친히 사랑하는 아들이었다고 반박했다(19-20).
결국, 예수님 자신이 메시야임을 선언하셨다.
오늘 본문은 지난 주 단락과 연계되는 본문이다.
예수님이 선포하신 ‘내가 곧 하나님의 아들이다’라는 엄청난 주장에 대해 증인들을 내세워 입증하는 내용이다.
율법에 따르면 혼자만의 주장은 증거 효력이 없기 때문이다(31절)
판결은? 증거재판주의의 입각한다.
배심원과 재판부는 객관적인 증거로 판결을 내린다.
예수님은 자신이 메시아라는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 네 가지 결정적인 증거(증인)를 제시한다.
예수님이 제시하신 4대 증인(증거)
1) 세례 요한의 증언 (33-35절) '자신은 메시야가 아니고 자신 뒤에 오는 이가 메시아이다'
2) 예수님이 행하시는 역사(표적) (36절) 수많은 표적과 이적들
3) 아버지 하나님의 친히 하시는 증언 (37-38절) 예수님이 세례 받을 때, 변화산상에서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4) 모세의 글과 성경 (39,46절) 예수님 시대의 성경은 구약성경 특히 모세오경을 가리킨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배척했다(38, 40, 43, 47).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변론서를 읽었고, 예수님이 요청한 증거와 증인들이 객관적인 자료를 제시했음에도
예수님의 메시아 되심을 믿지 않는다.
예수님은 왜 유대인들이 이 지경이 되었는지 두 가지 칼날 같은 진단을 내리셨다.
첫째, 그들의 마음속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42절).
예수님은 하나님의 본질과 마음을 완벽하게 닮은 유일한 분이시다.
우리가 어떤 대상을 진심으로 사랑하면 그 대상의 성품, 음성, 특징을 알아채기 마련이다.
유대인들이 정말 하나님을 사랑했다면, 하나님의 성품을 그대로 닮은 예수님을 보는 순간 본능적으로 그분이 메시아임을 알아보고 사랑했을 것이다.
어떤 자산가가 세계적인 거장의 그림을 너무나 동경하고 사랑하여, 평생 그 화가의 화풍과 붓 터치, 색감, 예술 철학을 깊이 연구했다고 한다.
어느 날 이 자산가가 허름한 시골의 벼룩시장을 지나다가, 먼지가 가득 쌓인 채 액자도 없이 버려지듯 놓여 있는 그림 한 점을 발견했다.
다른 행인들은 유행 지난 잡동사니로 보고 지나치지만, 화가를 사랑했던 자신 가는 한눈에 그 그림이 그토록 자신이 찾아 헤매던 거장의 숨겨진 진품임을 알아보고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전문가의 감정서가 붙어있지 않아도, 화가의 기법과 영혼이 그림에 그대로 묻어있음을 알아본 것이다.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했다면 그분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바로 메시아라는 사실을 금방 알아봤을 것이다.
그들이 예수님을 거부했다는 것은 애초에 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었거나
사랑한다고 주장하던 하나님은 진짜 하나님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2026년 현재, 성경 지식이나 신학적 정보는 챗GPT나 AI를 통해 몇 초 만에 완벽하게 찾아낼 수 있다.
유대인들이 성경을 열심히 연구했던 것처럼, 현대인도 지식으로서의 종교는 쉽게 소유할 수 있다.
지식의 양이 신앙의 크기를 증명하지 못한다.
성경을 많이 안다고 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성경 데이터의 축적이 아니라, 그분과 '인격적인 사랑의 관계'이다.
신앙생활의 본질은 관계에 있다.
그래서 눈에 보이는 '성과'보다 '동기'를 점검해야 한다.
현대 교회와 사회는 눈에 보이는 성공, 직분, 출석, 봉사의 마일리지(스펙)를 중요하게 여긴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철저히 지켰고 율법을 완성하려 했지만 예수님께 책망받았다.
왜? 신앙의 동기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빠졌기 때문이다.
신앙생활이 자기를 증명해 보이려는 종교 비즈니스가 되어서는 안 된다.
고로 날마다 우리는 자신의 모든 헌신이 '자신의 의로움'을 증명하기 위한 것인지, '하나님을 사랑해서'인지 매일 점검해야 한다.
2. 하나님의 영광보다 사람의 영광을 취했기 때문이다(44)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한다"라고 지적했다.
'서로 영광을 취하고'? '너희가 사람에게서 서로 칭찬을 받으려고'(현대어성경)
당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자기들끼리 칭찬하고 높여주는 '종교적 카르텔'을 형성하고 있었다.
'카르텔'? 사익을 위해 기득권을 유지하거나 부당한 영향력을 제시하는 비밀 담합조직을 가리킨다.
범죄조직들이 자기들의 이익을 위해 담합 조직을 구성한다.
교회가 그렇게 될 수 있다.
"당신은 정말 율법을 잘 지키십니다", "당신의 기도는 참 거룩합니다"라는 사람들의 평가와 시선 그리고 박수소리에 중독되어 있었다.
이런 소리와 칭찬으로 위로받고 격려받았다.
이들의 신앙생활의 진짜 목적은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들의 인정'이었다.
이렇게 하면 신앙이 인간관계의 평판을 유지하기 위한 도구로 전락한 상태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인정과 영광만을 구하게 되어있다.
반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들은 인간의 전통, 기득권, 사람들의 평판에 취중 한다.
예수님은 세상의 영광이 아닌 오직 하나님의 뜻만 행하러 오셨기 때문에, 자기 영광을 좇던 유대인들의 눈에는 예수님이 메시아로 보일 수 없었다.
39절을 보라.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과 유대 종교 지도자들에게 성경(구약)을 연구하는 것은 삶의 전부였다.
당시 랍비 문헌을 보면 "토라(율법)의 말씀을 많이 읽는 자는 영생을 얻는다"라는 가르침이 지배적이었다.
그들은 성경을 주야로 암송하고 연구하는 행위 '자체'에 구원하는 마술적인 힘이 있다고 믿었다.
그들에게 성경은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성경을 많이 알고 율법을 철저히 지키는 자신들의 의로움을 증명하는 '종교적 스펙'이 되어버렸다.
성경이라는 텍스트 자체를 우상화(성경 숭배, Bibliolatry) 한 것이다.
그들이 성경을 연구하고 율법을 지킨 진짜 이유는 하나님이 너무 좋아서가 아니었다.
그것을 통해 자신의 의로움을 증명하고, 사람들에게 칭찬과 인정을 받기 위함이었다.
하나님은 그들의 목적이 아니라, 자기 의를 쌓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했다." (수직적 관계의 파산)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이란, 오직 하나님 한 분께만 인정받기를 갈망하는 순전한 중심을 가리킨다.
유대인들은 사람들의 눈을 의식하느라, 정작 나를 은밀한 중에 보고 계시는 하나님의 평가에는 완전히 무감각해져 있었다. 수평적인 인간의 눈치만 보느라 수직적인 하나님과의 관계가 파산한 것이다.
대표적인 현대 기독교 영성학자이자 미국의 영성 작가이자 목회자였던 브레넌 매닝(Brennan Manning)이라는 인물이 있다.
그는 자신의 저서들을 통해 사람들의 눈치와 평판에 매몰된 신앙을 '종교적 서커스'라고 강도 높게 비판했다.
브레넌 매닝은 그의 대표작인 《아바의 자녀 (Abba's Child)》와 《부랑자 복음 (The Ragamuffin Gospel)》에서 이 개념을 상세히 다루었다.
예배를 '가짜 자아(False Self)'의 무대라고 불렀다.
그는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의 내 모습을 잃어버리고, 타인의 인정과 칭찬을 받기 위해 만들어낸 꾸며진 모습을 '가짜 자아'라고 불렀다.
봉사를 관객을 위한 곡예라고 부른다.
이 가짜 자아를 유지하기 위해 교회 안에서 완벽하고 경건한 척 행동하는 삶을 "관객(사람들)의 박수를 받기 위해 외줄 타기를 하는 '종교적 서커스(Religious Circus)'"에 불과하다고 지적했다.
매닝은 이러한 서커스를 끝내고,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 안에서 사람들의 눈치로부터 자유해져 '진짜 자아'로 살아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44)
믿음이 불가능한 이유를 말한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안 믿는 것이 아니라, 이런 상태로는 "믿는 것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라고 선포하신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유대인들의 모습은 참으로 충격적이다.
그들은 성경을 달달 외우던 사람들이었다(39절).
예배를 빠지지 않았고, 종교적인 의무에 목숨을 걸었던 사람들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내면을 관통하는 뼈아픈 진실을 폭로하셨다.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 (요한복음 5:44)
그들의 신앙을 움직였던 진짜 동기는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들의 눈치와 평판'이었다.
사람들에게 경건하게 보이고 싶고,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었던 그 갈망이, 결국 그들 앞에 서 계신 구원자 예수님을 보지 못하게 만드는 영적 맹인이 되게 만들었다.
영성학자 브레넌 매닝은 이처럼 하나님의 시선이 아닌, 사람들의 박수와 눈치에 매몰되어 겉모습만 완벽하게 꾸며내는 신앙을 가리켜 ‘종교적 서커스’라고 불렀다.
오늘 우리는 어떻게?
혹시 우리도 하나님 앞에서의 '진짜 내 모습'은 잃어버린 채, 사람들의 시선이라는 관객들 앞에서 아슬아슬한 종교적 곡예를 펼치는 서커스 단원으로 살아가고 있지는 않는가?
내가 직분을 맡았으니까, 남들이 나를 믿음 좋은 사람으로 봐주니까, 그 평판을 유지하기 위해 가면을 쓰고 외줄 타기를 하고 있지는 않는가?
기억하십시오. 서커스 공연은 화려하지만, 무대의 불이 꺼지고 관객이 떠나면 잔인할 정도의 공허함만 남는다.
사람의 영광을 구하는 신앙의 끝은 영적 파산이다.
이제 우리 모두는 이 위태롭고 피곤한 종교적 서커스를 끝내야 한다.
사람들의 눈치라는 감옥에서 걸어 나와야 한다.
오늘 이 시간, 예수님은 우리에게 단 하나의 동기만을 요구하신다.
"너는 사람의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고 있느냐?"
"네가 종교적인 행위를 하는 진짜 동기는 나를 사랑해서이냐, 아니면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함이냐?"
성도 여러분,
사람들의 눈치를 보며 가짜 자아를 꾸며내는 삶을 멈추십시오.
우리의 진짜 동기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오직 '하나님의 영광'이 되기를 소망한다.
사람의 박수가 없어도, 알아주는 이가 없어도, 오직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시선 하나만으로 충분한 진짜 신앙인으로 살아가셔야 한다.
화려한 서커스 단원이 아니라, 주님의 은밀한 골방으로 들어가는 참된 예배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같이 기도하겠습니다.
내 신앙의 '진짜 동기' 점검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