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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尙容
1월22일, 강화도가 함락되자 김상용은 스스로 목숨을 끊고 청에게 항거했으며
역시 골초인 처칠은 자신 안에 정치인적 소질과 문인적 소질이 공존하는데 후자가 발동하는 시간에 전자보다 세곱의 담배를 피운다고 했다. 한국사상 골초를 들라면 인조반정의 공신으로 글 그림 문장으로 손꼽는 장유(張維)를 든다. 글을 짓고 그림을 그리는 동안 내내 담뱃대를 물고 있었다면 알 만하다. 그의 장인인 충신 김상용(金尙容)이 요초(妖草)에게 홀린 사위를 구해달라고 임금에게 상소까지 했을 지경이다.
안동 김씨가 유명해지게 된 계기는 선원(仙源) 김상용(金尙容·1561~1637)과 청음(靑陰) 김상헌(金尙憲·1570~1652)의 걸출한 행적 때문이었다. 이들 형제는 서울에서 태어나 자란 서울사람들이었다. 김상용과 김상헌의 증조부 때 벼슬을 하면서 안동을 떠나 서울에서 자리를 잡고 살았던 것이다. 서울의 장의동(壯義洞)이 바로 그 근거지였다. 경복궁의 서북쪽 지역인 자하문(紫霞門) 밑의 동네가 '장의동'이다. 지금의 옥인동과 청운동 일대이다.
이들 김씨는 '장동 김씨'라고 불렸다. 족보에는 안동 김씨이지만, 실제 거주한 곳은 장동(장의동)이었기 때문이다. 이 장동 김씨들이 가지고 있던 유명한 저택이 청풍계(淸風溪)이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단원의 그림으로 남아있는 청풍계 전경을 보면 바위 암벽과 소나무, 그리고 우아한 기와집들이 조화를 이룬 서울 최고의 저택이었음을 알 수 있다. 현대 정주영 회장이 살았던 집이 청풍계 터라고 전해진다. 단단한 화강암을 바닥에 깔고 있어서 기가 아주 강한 집터이다.
장동 김씨(壯洞 金氏)가 조선 최고의 명문가로서 입지를 굳히게 되는 계기는 선원 김상용, 청음 김상헌이라는 걸출한 형제의 등장인데, 선원과 청음의 외할아버지가 바로 정유길(1515~1588)이다. 동래정씨 집안의 인물인 정유길은 당대의 퇴계 이황, 하서 김인후와 함께 독서당에서 공부를 같이 한 대학자이자 벼슬도 대제학, 좌의정에 이르렀다. 두 외손자는 외할아버지의 훈도를 받으며 컸던 것이다.
“김성달이 조선 인조 15년 병자호란 때 빈궁과 원손을 수행해 강화도로 피난했다가 강화도가 청나라에 함락되자 남문루(인천 강화군 강화읍 관청리)에서 화약고에 불을 지르고 순절한 선원(仙源) 김상용(1561∼1637)의 증손자”라며 “조선의 선비정신이 김좌진 장군의 독립 사상에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지금의 청와대 맞은 편에 저택을 갖고 있던 우의정 김상용은 겸재 정선의 그림 ‘청풍재’에 그의 집이 나올 정도로 한 시대를 풍미한 지도자였다. 그러나 청나라가 쳐들어오자 1636년 왕족을 데리고 강화도 피난길에 올랐고 김상용의 동생 김상헌(1570∼1652)은 소현세자가 볼모로 청국에 끌려갈 때 동행한 인물로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보자 한강수야…”라는 유명한 시조를 지었다
. 삼학사는 병자호란 당시 언관(言官)이었던 화포(花浦) 홍익한(1586~1637), 임계(林溪) 윤집(1606~1637), 그리고 추담(秋潭) 오달제(1609~1637)를 일컬으며 척화(斥和)를 주창해 주화(主和)를 내세우던 화의론자(和義論者)들과 극렬히 맞섰던 인물들이다. 그들은 모두 기호학파이자 서인에 속했으며 당시 홍익한은 52세, 윤집은 32세, 그리고 오달제는 29세였다.
여초(如初) 김응현(金膺顯·1927~2007)
여초의 친형인 일중(一中) 김충현(金忠顯·1921~2006)도 대단한 서예가였고, 여초의 바로 위 형인 백아(白牙) 김창현(金彰顯·1922~1991)도 한학과 조선 사대부문화에 정통했던 학자였다. 이 3형제는 모두 서울을 대표했던 노론 명문가 집안의 후손이었다. 바로 장동(壯洞)김씨 집안이었다.
'장김'은 세도가(勢道家)라는 부정적인 측면과, 학문과 예술을 사랑한 문한가(文翰家)라는 긍정적인 측면을 모두 지니고 있다. 세도와 거리를 두었던 문한가의 계보는 선원 김상용과 청음 김상헌에서부터 시작되어 그 증손자대에 '6창(昌)'이 나왔다. 창집(昌集), 창협(昌協), 창흡(昌翕), 창업(昌業), 창즙(昌緝), 창립(昌立)이 그 6형제이다. 여섯 번째 창립의 11대손이 바로 일중, 백아, 여초이다.
말년에 서울 창문여고 교장을 지냈던 백아 김창현으로부터 한학과 사대부 문화를 배웠던 제자가 간송미술관의 최완수 선생이다. 그래서 최완수는 '내가 마지막 노론학자'라고 자처하는 것이다. 일중의 제자는 일사(一史) 구자무(具滋武)이다. 시(詩), 서(書), 화(畵)에 모두 일가를 이루었고, 평소에 보내는 편지도 한자 붓글씨로 써서 보내는 양반이다
청음 김상헌의 손자
청음 김상헌의 형 선원(仙源) 김상용(金尙容)도 학문이 높고 절개가 곧은 학자로 병자호란 때 강화성이 함락되자 화약에 불을 질러 자결하였다.
퇴우(退憂): 김수항의 형인 퇴우당(退憂堂) 김수흥(金壽興)
문곡(文谷): 김수항(金壽恒)
장남 몽와(夢窩) 김창집(金昌集),
차남 농연(農淵) 농암(農巖) 김창협(金昌協)
삼남 삼연(三淵) 김창흡(金昌翕)
사남 노포택(老圃澤) 노가재(老稼齋) 金昌業 오남 포음(圃陰) 김창즙(金昌緝)
육남 택재(澤齋) 김창립(金昌立)
자호란 와중에 강화성이 함락되자 자결을 택했던 김상용(金尙容)은 오죽(烏竹)으로 만든 지팡이에 이렇게 새겼다. “엎어질 땐 붙들어주고, 위태로울 땐 붙잡아준다. 만약 네가 아니라면, 나를 도울 자가 그 누구랴. 아아! 너에게 의지하니, 지팡이여 나를 버리지 말아다오(顚則扶 危則持 微爾之 相吾誰 依嗟爾 杖莫相違, 烏竹杖銘).” 비틀거릴 몸을 붙잡아 달라는 부탁이 간절한데, 그 안에는 자신의 마음이 바로 가기를 염원한 뜻이 깃들어 있다.
원래 김상용이 지팡이를 짚고 가고팠던 길이 비장한 죽음의 길은 아니었을 것이다. 푸른 용 모양을 한 다른 지팡이를 읊은 작품을 보니 그는 그 단단한 지팡이를 짚고 구속 없는 평화로운 삶을 누리고 싶어했다. ‘이 지팡이를 짚고 하늘이 허락해준 자유로움을 즐기리라(杖乎杖 樂天放, 蒼龍杖銘)’고 했던 그 희망이 김상용의 진짜 꿈이지 않았을까.
백사의 묘소가 너무나 쓸쓸했다. 당대의 대제학에 영의정을 지낸 상촌 신흠이 글을 짓고, 문묘(文廟)에 배향되어 선정(先正)인 학자로 칭송받는 신독재(愼獨齋) 김집(金集)이 글씨를 쓰고, 우의정으로 병자호란의 강화도 함락에 순절한 천하의 충신 선원(仙源) 김상용(金尙容 : 청음 김상헌의 형)의 전서(篆書)에 중국 황제가 선물한 운석(雲石 : 운남성에서 나오는 옥석(玉石))으로 세워진 신도비(神道碑)가 있다.
김상용의 집터인 청풍계(淸風溪)의 바위에 ‘대명일월(大明日月) 백세청풍(百世淸風)’의 글씨를 새겨 놓은 것을 묘사한 것이다. 지금도 청운동의 주택에 ‘백세청풍’이라는 바위 글씨가 남아 있다.
이 글은 3.1운동 이후 설립된 항일 지하조직 가운데 가장 규모가 컸던 ‘조선민족대동단’이 1919년 11월 28일에 발표한 독립선언서이다. 이른바 ‘대동단선언’으로 일컬어지는 이 선언서를 기초한 사람은 과거 대한제국의 대신으로서 대동단 총재로 추대된 동농(東農) 김가진(金嘉鎭)으로 알려져 있다.
김가진은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에서 분신 자결한 선원(仙源) 김상용(金尙容)의 11대손이다. 장동 김씨(壯洞金氏)로 일컬어지는 그의 집안은 조선 후기 세도정치의 핵심이었다
김병기 선생은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 끝까지 주전론(主戰論)을 주장하다가 청(淸)나라로 압송되어 고초를 겪었던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의 후손으로, 명문 안동 김씨(安東金氏) 가문이었습니다. 선생은 34살 때 과거에 급제하여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 우세마(右洗馬) 등을 지내다가 이후 지방관으로 발령받아 장련 군수(長連郡守), 용궁 현령(龍宮縣令)을 역임했죠. 하지만 구한말의 어지러운 현실은 그를 가만두지 않았습니다. 위정척사를 내세우던 강직한 선비였던 선생은 조정에서 지방 수령들에게까지 강제로 단발령(斷髮令)을 시행하자 이에 반발하여 1907년(고종 44) 벼슬을 내버리고 은거했습니다. 늘 나랏일을 염려하며 번민하던 선생은 때로는 손으로 땅을 내리치거나 하늘을 향해 “이래 살아서 무엇하랴!”라고 탄식하며 가슴에 맺힌 울분을 표출하곤 했습니다. 하지만 벼슬도 내던진 쉰 살 넘은 가난한 시골 선비가 이런 암울한 현실에서 무언가 적극적으로 항거할 수 있는 수단은 별로 없었습니다.
하루는 선생이 벗인 송병화 선생의 집을 찾았다가 우연히 벽에 걸린 자경문(自警文) 한 구를 보았습니다. “사람이 사람답지 못하다면 살아서 무엇하리오![人而不人 生何爲哉]”, 이 여덟 글자는 고뇌하던 한 우국지사의 심장을 마구 후벼 팠고, 선생은 끝내 오열하며 “나랏일을 생각하니 산들 무엇하겠는가!”라고 부르짖었습니다.
오윤겸(吳允謙)·김상용(金尙容) 과 함께 파산(坡山)에서 성혼(成渾)을 사사하였다.
본래 최명길의 집안은 부친 최기남(崔起南, 1559~1619) 때부터 김상헌 집안과 가까운 사이였다. 최기남과 김상헌의 형 김상용(金尙容, 1561~1637)은 우계(牛溪) 성혼(成渾)의 문하에서 함께 수학한 동문이었으며, 김상헌은 당시 나이가 어려 함께 배우지는 못했으나 성혼의 신도비명과 성혼 문인들의 비문을 여러 편 지을 만큼 성혼 문하와는 깊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중세의 암흑기를 걷어내고 14세기 후반에서 15세기 유럽 전역에 걸쳐 사상 문학 미술 건축 등 여러 분야에서 일어났던 문예부흥운동, 즉 르네상스는 이탈리아 피렌체가 발상지다. 피렌체에서 르네상스가 힘차게 시동을 걸 수 있었던 것은 메디치가의 예술적 후원 덕분이다. 미켈란젤로, 보티첼리, 레오나르도 다빈치 등 르네상스 대표 화가들이 모두 메디치가의 지원을 받았다. 조선 땅에도 메디치가에 버금가는 예술 후견인 가문이 있었다. 안동김씨, 반남박씨, 풍양조씨…. 누대에 걸쳐 수도 한양에서 관료생활을 했던 벌열가이자 세도가들이 그들이다.
벌열가문들의 예술 후원 활동은 한양의 급속한 도시화와 관련 있다. 한양은 17세기 이후 상업의 발달과 함께 하루하루 세련되어지고 번창했다. 길은 넓어지고 저잣거리엔 물건들이 넘쳐났다. 서울과 그 근교에 살면서 여러 대에 걸쳐 벼슬을 지냈던 이들 벌열가문, 즉 ‘경화사족(京華士族)’의 자제들은 한양의 도시 문화를 이끌었던 주역이다. 미술과 문학도 그렇게 그들에게서 사랑받았다.
이 가운데 안동김씨는 ‘조선의 메디치가(家)’라 불러도 손색이 없다. 16세기 이후 서울에 세거한 안동김씨 가문은 특히 ‘장동 김문(壯洞 金門)’으로 불리며 조선 후기 최대의 예술 후원 가문으로 평가받는다.
장동 김문은 본거지 안동 소산에서 서울 청풍계((淸風溪: 청운동 청운초등학교 뒤쪽 계곡)로 이주한 이후 유력 문벌로 성장한 김상용(金尙容 1561∼1637), 김상헌(金尙憲 1570∼1652) 형제의 후예를 가리킨다.
장동 김문은 병자호란 때 김상용이 순절하고 김상헌이 척화삼학사가 됨으로써 척화와 충의를 상징하는 집안으로 이미지를 굳히며 정계에 무게감을 드러냈다. 이후 장동김씨 문중은 사화로 대변되는 양반 계급의 격렬한 권력투쟁 와중에서 극심한 부침을 겪지만 순조대에 이르러서는 누구도 넘보지 못하는 최대 세도 가문으로 등극한다.
장동김씨 사람들은 권력의 한가운데 있거나, 권력을 멀리하거나 상관없이 언제나 예술을 가까이했다. 메디치가와 같은 그들의 미술 후원 활동을 살펴보자.
우선 김상용 김상헌 형제가 서화에 조예가 깊었다. 김상용은 청풍계에 정자를 지어놓고 글씨와 그림을 즐겨 감상했다. 정자 이름부터가 유유자적하다. 와유암(臥游庵)이다. 당시 대표적 화가 이정과 이징이 그의 사랑을 받았다.
김상헌도 그림을 좋아했다. 어려서부터 유명한 그림이 있다는 소리를 들으면 단번에 달려가 빌려보았을 정도. 그림을 잘 그리지는 못하지만 좋아하는 정도가 고개지와 미불을 뛰어넘는다고 자부했다. 무엇보다 ‘학예일치’는 사대부의 기본 덕목이었던 시대였던 것이다.
안변(安邊) 관아에 누정이 있었다. 이름은 향설헌(香雪軒)으로, 선원(仙源) 김상용(金尙容, 1561~1637)이 부사(府使)로 재직할 당시에 관아 건물을 지었는데, 그 뜰에 배나무를 심고 누정을 지은 후 이름을 그렇게 붙였다고 했다.
김상용의 사랑이 거짓말이
사랑이 거짓말이 님 날 사랑 거짓말이
꿈에 와 뵈단 말이 긔 더욱 거짓말이
나같이 잠 아니 오면 어느 꿈에 뵈이리.
김상용(金尙容, 1561-1637) 선조․광해․인조 때의 문신
자는 경택(景擇)/호는 선원(仙源)/본관은 안동
30살에 문과에 급제하여 검열이 되었다. 임란 때 부모를 강화의 선원촌(仙源村)에 피난시키고, 체찰사 정철의 종사관이 되었다. 33살에 정언, 병조․이조좌랑을 거쳐 부수찬, 형조참의, 좌부승지 등을 지냈다.
40살에 우승지, 대사성, 병조참의를 거쳐 이듬해 대사간이 되어 언로 경색과 궁중 법도의 해이를 직간하기도 했다. 42살에 정주(定州)목사를 거쳐 상주목사, 안변부사 등을 지냈으며, 광해군 즉위 후에 호조참판, 도승지, 대사헌 등을 지내고 형조판서가 되었다.
폐모론이 일어나자 참여치 않고 7년간 산수간에 노닐었고, 필운산 아래 청풍계(淸風溪)에 와유각(臥遊閣)을 지었으며, 부모상을 당하였다.
인조반정 후 집권당인 서인(西人)의 한 사람으로 판돈녕부사, 병조․예조판서 등을 역임했고, 정묘호란 때는 유도대장이 되었다. 68살에 이조판서를 거쳐 72살에 우의정이 되고, 영돈녕부사가 되었다. 병자호란에 왕족을 시종하여 강화(江華)에 피란했으나 강화성이 함락되자 화약에 불을 질러 자살했다. 성품이 중후․근신하였으며 겸손하고 검소하였다. 산수를 좋아하고 글씨를 잘 썼다.
회동정씨(會洞鄭氏) 집안이다. 원래 동래정씨지만 서울 회동(회현방·會賢坊)에 자리 잡고 살았기 때문에 보통 회동정씨라고 부른다. 이 집안은 문익(文翼) 정광필(鄭光弼·1462~1538)이 이 집터에 이사 오면서부터 '정승 벼슬'이 시작되었다. 정광필부터 시작해서 조선 말기까지 정승이 무려 13명 배출된 집안인 것이다. 정광필은 다른 데서 태어나서 여기로 이사 왔으니까 빼고 나머지 12명이 모두 우리은행 본점 자리로 변한 이 집터에서 태어났다. 원래 이 터는 터가 세서 집이 흉가 비슷한 상태로 있었다
'회동정씨'가 사람들의 입에 회자되기 시작한 본격적인 계기는 정광필의 손자인 임당(林塘) 정유길(鄭惟吉·1515 ~1588)부터였다. 정유길은 당대의 명사 였다. 글씨도 명필에다가 박람강기의 석학으로 불리며 대제학, 좌의정을 지냈다. 정유길의 외손자가 그 유명한 김상용, 김상헌이다. 조선 후기 '장동김씨(壯洞金氏)'의 시대를 연 김상헌과 김상용도 바로 이 집터에서 태어났으며, 외조부인 정유길의 무릎에서 자라면서 많은 이야기를 듣고 컸다. 장동의 뿌리도 회동에 맞닿아 있었다.
추강(秋江) 밝은 달에 김광욱(1579∼1656)
추강 밝은 달에 일엽주(一葉舟) 혼자 저어
낚대를 떨쳐드니 자는 백구(白鷗) 다 놀란다
어디서 일성어적(一聲漁笛)은 조차 흥(興)을 돕나니
-『청구영언』 진본(珍本)
운명을 좌우하는 인간 관계
가을의 정취가 함뿍 담겨 있는 시조다. 우조이수대엽(羽調二數大葉) 창(唱)으로도 즐겨 불렸다. 부귀공명을 모두 물리치고 강호에 묻혀 유유자적하던 산림학파의 전형적인 작품이다.
‘가을 강 밝은 달빛 아래 일엽편주를 혼자 저어나가, 낚싯대를 떨쳐 들어 올리니 잠들었던 갈매기가 모두 놀라 날아오른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어부의 한 줄기 피리소리가 더하여 흥을 돕는구나.’
김광욱(金光煜)은 충절을 세워 청사를 빛낸 김상용(金尙容)·김상헌(金尙憲) 형제의 재종질(再從姪)이다. 선조 39년에 문과에 급제하고, 벼슬이 형조판서를 거쳐 우참찬(右參贊)에 이르렀다. 광해군 때 권신 정인홍이 성리학의 태두이던 이언적과 이황을 헐뜯자 단독으로 정인홍을 논척(論斥)했다.
그는 용모와 행동이 옥같이 맑고 단정하여 고아(高雅)하기 이를 데 없었으나 아쉽게도 교우가 깊지 못하였다. 예나 오늘이나 인간관계가 운명을 좌우하는 경우가 많다. 늘 자신과 주위를 되돌아보아야 할 이유이다. 어쩌면 현실이 그의 이상과 맞지 않았을 수도 있다. 역사는 현실주의자와 이상주의자의 끊임없는 갈등의 연속이었다.
자료를 보면 성씨별 정승 배출 순위에서 전주 이씨(22명), 동래 정씨(16명) 다음으로 안동 김씨(15명)가 바로 뒤를 잇는다.청송 심씨(13명), 청주 한씨(12명), 파평 윤씨(11명), 여흥 민씨(11명)
조선 중후기 안동 김씨의 도약은 김상헌(金尙憲·1570~1652년)에서 비롯된다. 사실 그는 한양에서 태어났고 집안은 그저 그런 정도였다. 할아버지는 군수를 지낸 것이 전부였고 아버지 김극효(金克孝·1542~1618년) 또한 문과에는 급제하지 못한 진사였고 정승 정유길(鄭惟吉)에게서 학문을 익히고 그의 사위가 되면서 돈령부(敦寧府) 동지사가 된 것이 전부다. 돈령부란 외척을 관리하는 부서이고 종친을 관리하는 종친부(宗親府)와 대비를 이룬다. 즉 김상헌 외할아버지가 정유길이었다.
김극효에게는 김상용(金尙容·1561~1637년)과 김상헌을 포함한 다섯 아들이 있었다. 김상용은 장남, 김상헌은 넷째였다. 김상용은 임진왜란 직전인 1590년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들어섰고 좌의정 정철(鄭澈)의 종사관을 지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처삼촌인 도원수 권율(權慄·1537~1599년)을 따라 영호남을 누볐다. 권율은 이항복(李恒福·1556~1618년)의 장인이었으니 김상용은 이항복과도 인척지간인 셈이었다.
전란이 한창이던 1594년 한 살 아래 부인 권씨가 33세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후에 김상용은 김장생(金長生)의 누이와 재혼하여 1남 4녀를 두었다. 1598년 승지에 올랐다. 그의 졸기(卒記)는 이렇다.
“사람됨이 중후하고 근신했으며 선조를 섬겨 청직(淸職)과 화직(華職)을 두루 역임했으며 임금이 싫어해도 해야 할 일을 만나면 극언하였다. 광해군 때에 참여하지 않아 화가 임박했는데 두려워하지 않았다.”
김상용은 병자호란 때 강화도에 먼저 들어가 사태가 급박해지자 남문루에 올라 화약을 장치한 뒤 손자 한 명, 노비 한 명과 함께 불에 뛰어들어 분사(焚死)했다. 그래서 졸기는 “정승으로서 칭송할 만한 업적은 없다 하더라도 한 시대의 모범이 되기에는 충분하다”고 평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