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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018. 묵상글 들 ( 성 루카 복음사가 축일. - 양이 이리와 평화로이 공존하듯.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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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018. 성 루카 복음사가 축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양이 이리와 평화로이 공존하듯
루카 복음사가 축일에 루카 복음을 듣는 것은 자연스럽고 당연하지요.
그리고 루카 복음이 다른 복음과 어떻게 다른지 보면
루카 복음사가가 주님의 어떤 점을 전하고 싶어 했는지 알 수 있지요.
오늘 복음은 주님께서 일흔두 제자를 파견하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일흔두 제자 파견을 얘기하면서 "주님께서는
다른 제자 일흔두 명을 지명하시어" 보내셨다고 하는데
열두 제자 외에 다른 제자를 또 파견하셨다는 얘기이고,
이 사실은 다른 복음에는 없는 얘기입니다.
오늘 복음의 특이한 점 또 하나는 열두 제자 파견 때는 없는,
"가거라"라는 명령어를 명백히 쓰신다는 점인데
다른 복음사가는 물론 루카 복음사가도 열두 사도 파견 때는 쓰지 않습니다.
이것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우리 프란치스칸들에게는 이 의미가 작지 않고 너무도 중요하지요.
프란치스코가 받은 소명이고 그래서 프란치스칸 생활 양식이기 때문이지요.
프란치스코도 "가서, 무너져가는 나의 집을 고쳐라!"라는 말을 들었잖아요.
그렇다면 "가거라"는 명령어에 담긴 의미는 무엇일까요?
제 생각에 '가거라'는 단순 강조 정도 이상입니다.
새로운 삶을 택하라는 엄중한 요구이며
경계를 뚫고 가고 넘어 가라는 명령일 것입니다.
우리는 정말 일어서야 할 때 주저앉아 있고,
가야할 때 안주하고 있습니다.
어떤 때는 집과 고향에 안주하기도 하고,
자기 나라와 민족에 안주하기도 하고,
편한 사람과 친한 사람만 만나기도 합니다.
그런데 복음을 전하려면 복음을 모르는 곳으로 가야 하고,
복음에 우호적이지 않고 오히려 잡아먹으려는 사람에게도 가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파견할 땐 하지 않은 말씀을 하십니다.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그리고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말라고 하시며
가는 길에 아는 사람과 인사도 하지 말고 노닥거리지도 말라고 하시고,
가서는 평화를 전하되 원치 않으면 발에 먼지를 털고 떠나라 하십니다.
그런데 아시다시피 아무것도 지니지 말라는 것은
그저 아무것도 소유하지 말라는 말씀이 아니라
복음과 평화 외에는 아무것도 지니지 말라는 말씀이요,
무엇에 의탁하지 말고 온전히 하느님께 의탁하라는 뜻이지요.
며칠 전 민족의 화해와 일치 위원회 회의를 하는데 실망을 하였습니다.
언제나 그랬듯 북쪽 사람들이 워낙 완강하게 복음을 거부하니까
선교는 잠시 미루고 인도적인 지원 쪽으로 기우는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말라는 것은
프란치스코가 이슬람의 술탄을 찾아갈 때 정말 아무것도 가져 가지 않고,
오직 하느님께 의지하여 복음과 평화의 정신만 가지고 간 것과 같습니다.
사실 루카 복음사가가 주님의 입을 빌어 이런 얘기를 한 것은
바오로 사도를 따라 이방인 선교를 하며
실제로 경험한 것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프란치스코가 복음 선포와 관련하여 특히 이슬람 선교를 얘기하며
싸우지 말라고 하는데 선교의 역사를 보면 복음 때문에 다투고 죽였지요.
오늘 주님께서는 양을 이리 때 가운데 보내는 것처럼 보낸다고 하시는데
우리는 양으로서 이리와도 평화롭게 공존하라는 가르침을 오늘 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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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018. 성 루카 복음사가 축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 병자를 고쳐주고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라”
오늘은 성 루카의 축일입니다. 오늘 <복음>은 루카복음사가만이 전하는 부분으로, 일흔 두 제자의 파견에 대한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를 파견하기에 앞서, 먼저 말씀하십니다.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루카 10,2)
이 말씀은 추수할 때가 되었음을, 곧 복음 선포의 시급성을 알려줍니다. 동시에, 먼저 필요한 것이 기도임을 알려줍니다. 왜냐하면 추수는 하느님께서 이루시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일반적으로 종말론적인 추수꾼은 천사를 표상하는데 여기서는 복음전파자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먼저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고 기도하기를 명하십니다. 그러니 첫 번째로 맨 먼저 필요한 것은 기도하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일흔 두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말씀하십니다.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루 카 10,3)
“이리 떼 가운데 양처럼” 보내신 것은 종말에 늑대와 새기 양이 평화롭게 뒹굴고 어린 아이가 그들을 몰고 다닐 것이라는 이사야 예언(이사 11,6;65,25 참조)을 이루는 것을 보여줍니다. 곧 하늘나라의 때가 왔음을 선언하십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파견 받은 제자들에게 ‘하지 말아야 할 것들’과 ‘해야 할 것들’을 당부하십니다.
‘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이렇습니다.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 하지도 말고,
이 집 저 집으로 옮겨 다니지 말라”
그리고 ‘해야 할 것’은 이렇습니다.
“어떤 집에 들어가든 먼저 평화를 빌어주며, 받아들여 차려주는 음식을 먹으며,
병자를 고쳐주고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라”
여기서도 해야 할 일의 첫 번째는 기도하는 일입니다. 곧 평화를 빌어주는 기도입니다. 사실, 루카복음에서는 “평화”는 하늘에서 내려온 기쁜 소식의 첫 번째 선물입니다. 예수님이 태어나실 때 천사들은 목동들에게 말합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루카 2,14-15)
천사들의 이 노래에는 ‘동사’가 없습니다. 이는 ‘평화가 있기를!’이라는 단순한 인사나 ‘평화가 있을 것이다’라는 예언의 노래가 아닌, 지금 그리고 여기 성취된 실재로 선포되고 있습니다. 곧 예수님의 탄생으로, 하느님께서는 지극히 높은 ‘하늘에는 영광’을 그리고 ‘땅에는 평화’를 성취하십니다. 곧 하느님께서는 하늘에서만이 아니라 땅에서도 구원을 일궈내시고 평화를 가져오심으로써 스스로 당신 이름을 영광되게 하십니다.
그러니 이제 평화를 빌어 줄뿐만 아니라, 제자들에게 건네 준 평화를 건네주어야 할 일입니다. 그리스도로부터 파견 받은 우리 역시 그렇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산상설교에서 말씀하신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마태 5,9)이 되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루카 10,3)
주님!
이리 떼에 둘러싸인다 하더라도, 결코 두려워하지 말게 하소서!
허리에는 돈주머니가 아니라, 사랑의 주머니를 차게 하소서.
등에는 여행보따리가 아니라, 믿음의 보따리를 지게 하소서.
발에는 신발이 아니라, 희망을 등불로 삼고 당신께만 의탁하게 하소서!
길에서 인사하느라 서성거리지 않고, 오로지 말씀의 씨앗을 뿌리는
당신 밭의 일꾼이 되게 하소서!
당신의 뜻을 따름이 오로지 저의 양식이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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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018. 성 루카 복음사가 축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한눈팔지 마라
고등학교를 다닐 때 자취생활을 하였습니다. 신부가 된 후에도 특수사목에 종사하다 보니 자취 아닌 자취생활을 할 때가 많았습니다. 안타까웠는지 많은 분이 맛있는 반찬도 해 주시고, 곰국도 끓여 주셨고 좋아하는 미역국도 준비해 주셨습니다. 참 행복했습니다. 그런데 가끔 냉장고에 있는 국을 꺼내 보면 국물에 기름이 떠올라 있습니다. 따뜻하게 데우면 기름이 잘 나타나지 않습니다.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이 뜨거울 땐 상대방의 단점이 보이지 않습니다. 좋은 것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콩깍지가 씌웠다고 합니다. 그러나 사랑이 식으면 상대편의 단점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그때부터 잔소리가 시작됩니다. 불평불만이 늘어 갑니다. 하느님께 대한 사랑의 열정도 그렇습니다. 뜨거운 열정이 있을 땐 기도 시간도 많고 성경도 읽으며 성체조배도 하고, 활동도 적극적입니다. 열정이 식으면 내 것 먼저 챙기고, 하느님의 몫을 뒤로 밀치게 됩니다. 해야 하는 일보다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다하고 그 다음에 하느님의 것을 챙기려 하니까 찜찜하기도 합니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사랑의 열정을 다시 일으켜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일흔두 명의 제자를 뽑아 파견하시면서 분부한 말씀을 기억합니다.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루가10,3).
이 말씀은 온전한 투신을 위해서는 한눈팔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선교사명을 받았으면 그것에 충실해야지 돈주머니나 식량 자루, 다른 어떤 것에도 마음을 빼앗겨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요. 장황하고 의례적인 인사에 허비할 틈도 주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이리떼 가운데’ 보내는 것처럼 안쓰러운 마음이 있지만 내 사랑이 그 안에 함께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라. 나의 사랑 안에 머물러 있으면 엉뚱한 생각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언제나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어라.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 사랑 안에 머물러 있듯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게 될 것이다”(요한15,9-10). 엉뚱한 것에 마음을 빼앗기면 근본이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따라서 분심잠념에 허비할 시간이 없습니다.
일상 안에서도 내 본업이 무엇이고 그것에 충실하고 있는가? 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혹 다른 부업에 마음을 더 쏟는 것은 아닌지…….아버지는 아버지로서, 어머니는 어머니로서 그리고 자녀는 자녀로서의 본분이 있고 윗사람은 윗사람으로서 아랫사람은 아랫사람으로서의 마땅히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사실, 근본을 잃으면 모든 것을 다 잃은 것입니다. 한눈 팔지 말고 각자의 본분에 충실해야 합니다.
우리는 나 혼자만의 구원을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이웃을 구원해야 할 소명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루카10,2)하신 말씀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그 일꾼이 바로 우리 자신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사실 온 세상이 우리의 활동 무대입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곳이면 어디든지 주저하지 말고 나아가야 합니다. 주님의 부르짖음이 우리 안에 숨겨지지 않도록 우리는 능력에 따라 하느님 나라를 이웃에게 전해야 합니다. 선교의 사명은 우리 모두의 의무입니다.
기왕이면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않은 채 더욱이 길에서 인사하느라 지체함도 없이 오로지 주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또 그 말씀을 전할 수 있는 일꾼이 나오길 희망합니다. 말씀을 전하는 자가 있어야 말씀을 들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능력을 주시는 한, 잘난 사람에게나 못난 사람에게나 가난한 이에게나 부자에게나 모든 계층과 연령의 모든 사람에게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 하느님의 온갖 뜻을 꾸준히 전파하도록 합시다!”(성 그레고리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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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018. 성 루카 복음사가 축일. 이기우 사도요한 신부님.
◈선교사들을 위한 복음사가, 루카
마르코는 십자가에 달리시기까지 당신 목숨을 바쳐 하느님의 사랑을 증거하신 예수님을 알아야 비로소 그분을 온전히 믿을 수 있다는 깨달음으로 복음서를 썼습니다. 마태오는 십자가의 신비에 대한 마르코의 깨달음 위에서, 믿는 이들이 모인 교회 안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날 수 있도록 그분의 가르침을 집대성하여 상세히 전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교회가 기념하는 루카는 좀 더 시야를 넓혀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하기 위한 선교적 안목에서 마르코와 마태오가 미처 전하지 못한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을 전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루카는 이 세상에 출생하시는 첫 순간부터,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위해 세상에 오신 하느님의 아드님이시고(1,35), 구원자이시며 또한 주님이심(2,11)을 강조하였고, 성모 마리아께서만 아시는 출생의 신비 즉 성령으로 인한 잉태와 역시 성령의 개입으로 탄생한 세례자 요한과의 기묘한 만남을 알려주었습니다. 이는 선교란 하느님께서 인간 역사에 개입하시는 손길을 받아들이는 일이라는 뜻이 됩니다.
또한 마르코나 마태오가 하느님 나라 또는 하늘 나라로 소개하는 예수님의 메시지를 모든 민족 가운데에서 가난한 이들이 들어야 할 복음으로 소개하였습니다(4,18-19). 루카는 같은 이유에서 예수님께서 사도로 양성하시고자 부르신 열두 제자를 종종 ‘사도’라고 앞당겨 부릅니다. 이미 사도들이 활약하는 교회 시대까지 염두에 두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그들이 교회 안에서 수행해야 하는 임무(9,13; 12,41-48; 22,14-20), 그리고 그들이 사명을 수행할 때에 도와줄 협조자들까지 고려하여 기록해 놓았습니다(10,1. 그리고 8,2-3. 참조). 그래서 복음서들 사이의 차이점들은 예수님께서 하신 가르침이나 처신에게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제자들의 태도와 처지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루카의 관점에서 사도란 단순히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아니라 부활하신 그분을 뵙고 체험했으며 증언하는, 다시 말하면 그분처럼 복음을 살고자 하는 사람들입니다. 자선과 용서, 기도와 자비가 강조되는 것도 다 같은 맥락입니다. 선교란 수동적으로 예수님을 마음속으로 믿는 것을 넘어서 능동적으로 자신의 삶과 활동으로 예수님을 세상에 보여주는 일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선교 활동은 사도직입니다. 세상은 사도직을 수행하는 믿는 이들의 삶을 통해서 복음을 듣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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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018. 성 루카 복음사가 축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중세 때, 어느 기사가 전쟁에 나가게 되었습니다. 이 기사의 부모님께서는 위험한 전쟁터이기에 쇠로 만든 아주 튼튼한 갑옷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어떤 화살도 또 칼날도 뚫을 수 없는 아주 튼튼한 갑옷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갑옷을 입자, 큰 문제가 생겼습니다. 너무 무거운 것입니다.
무거운 갑옷을 입고서는 제대로 움직일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이 갑옷을 벗어 던지고 대신 종이로 된 갑옷을 입었습니다. ‘이것도 갑옷이니까’라는 생각을 하면서 말이지요.
이 사람은 과연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무겁고 힘들어도 튼튼한 쇠로 만든 갑옷을 입어야 안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갑옷의 무게를 이겨낼 힘을 갖추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 갑옷 탓을 하면서 종이로 만든 갑옷으로 갈아입어서는 안 됩니다. 순간의 편함이 큰 후회를 남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것이 마치 이 무거운 쇠로 만든 갑옷과 같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이 갑옷을 입어야 세상의 모든 유혹을 거뜬히 막아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무게가 참 무겁습니다. 때로는 고통과 시련을 주는 갑옷을 입고 있는 것이 어리석게 보여서 종이로 만든 세상의 갑옷을 입고 싶은 마음이 밀려옵니다. 그러나 유혹에 쉽게 넘어가면 더 힘든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께서 일흔두 명의 제자들을 세상에 보내십니다. 그러면서 주의사항을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루카 10,4)
세상의 종이 갑옷이 아닌, 주님의 튼튼한 쇠로 만든 갑옷을 입으라는 것입니다. 돈주머니, 여행 보따리, 신발, 다른 사람은 모두 세상 안에서 나에게 도움을 줄 것들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오로지 주님께만 도움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불편이 가득할 수밖에 없으며, 어렵고 힘든 상황의 연속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의 유혹에서는 자유로워집니다. 세상의 유혹이 침범할 수 없기에, 주님께서 주시는 참된 기쁨과 행복을 얻을 수 있게 됩니다.
주님을 따르는 데 많은 것이 있어야만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세상의 것은 실상 필요하지 않습니다. 오직 주님만 있다면, 그리고 주님의 뜻만을 따른다면 세상의 것이 하나도 없어도 그 안에서 하느님 나라를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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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사에는 안정된 것이 하나도 없음을 기억하라. 그러므로 성공에 들뜨거나 역경에 지나치게 의기소침하지 마라(소크라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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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노력을 먼저 생각합시다.
‘~면 좋겠다’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예를 들면, 돈을 많이 벌었으면 좋겠다, 내 배우자가 더 많이 신경 써줬으면 좋겠다, 이번에 승진했으면 좋겠다 등의 말을 얼마나 많이 또 자주하고 있습니까? 그런데 이런 말의 뜻은 이와 똑같지 않나요?
“내 행동은 아무것도 바꾸고 싶지 않아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한 노력과 인내는 전혀 생각하지도 또 행동하지도 않으면서 그냥 자신에게 주어지길 바라는 공짜 심리입니다.
자신의 의도에 맞춰 살기 위한 자신의 노력을 생각해야 합니다. 이 노력을 먼저 생각하고 행동하게 될 때, 실제로 더 나은 ‘나’, 내가 원하는 ‘나’가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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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018. 성 루카 복음사가 축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한 일이 아니라 아메리고 베스푸치가 한 일입니다. 콜럼버스는 새로운 대륙을 찾을 목적으로 대양을 건넜지만 결국 대륙을 발견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콜럼버스의 삶에 대해서는 자세히 아는데 베스푸치의 생애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베스푸치에게는 전기 작가가 없었던 반면 콜럼버스에게는 한 사람의 전기 작가가 있었습니다. 콜럼버스의 전기 작가는 바로 그의 아들입니다. 그 아들은 자기 아버지가 대륙을 발견하는 일에 있어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으므로 마땅히 인정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아버지의 삶에 관한 책을 쓰는 일에 매달렸습니다. 플라톤이 없었다면 우리는 소크라테스를 알 수 없었을 것입니다. 미슐레가 프랑스인들에게 프로이센의 침입자들을 몰아낼 의지를 고취시키기 위해서 잔다르크를 재 발굴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잔다르크를 알 수 없었을 것입니다. 복음사가들이 없었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생애를 알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오늘은 루카 복음사가 축일입니다. 모든 복음서가 예수님의 생애를 이야기하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루카 복음서를 좋아합니다. 2장의 ‘마리아의 노래와 즈카르야의 노래’는 성무일도에 수록될 정도로 아름다운 기도입니다. 4장의 ‘회당에서의 예수님의 선포’는 신앙인이 가져야 할 삶의 태도를 알려줍니다. 10장의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는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한 방법을 알려줍니다. 지금 강도당한 사람의 이웃이 되어주는 것, 지금 굶주린 사람의 이웃이 되어주는 것입니다. 15장의 ‘돌아온 아들’의 이야기는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느끼게 해 줍니다. 우리의 죄가 크기 때문에 구원에서 멀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회개하고 하느님께 돌아가기만 하면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우리를 받아주시고, 잔치를 베풀어 주십니다. 19장의 ‘자캐오’이야기는 신앙은 관념이 아니라 실천임을 알려줍니다. 행동이 없는 믿음은 참된 믿음이 아닙니다. 24장의 ‘엠마오’이야기는 참 아름다운 이야기입니다. 엠마오는 장소가 아닙니다. 마음을 열고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있는 곳에서 주님의 말씀을 들으면 그곳이 구원의 엠마오가 되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로마인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루어집니다.” 세례를 받아 신앙인이 된 사람은, 성체를 받아 모시는 사람은 모두 복음을 전하는 복음사가가 되어야 합니다. 매일 복음을 묵상하고 묵상한 복음을 인터넷이라는 공간에서 나누는 것은 좋은 복음나누기입니다. 지치고 힘든 이들에게 따뜻한 말로 위로해 주고, 이웃의 짐을 함께 들어주는 것도 멋진 복음 선포입니다. 나에게 잘못한 이를 기쁜 마음으로 용서하는 것은 복음의 실천입니다 자존심이 상하지만 이웃에게 먼저 화해의 손을 내미는 것은 복음이 꽃피는 것입니다. 홀로 되신 어머니에게 자주 전화 드리고, 시간 내서 함께 여행가는 것은 엠마오의 길에서 제자들의 마음을 열어 주셨던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저는 매일 ‘가브리엘 복음’을 나누려 합니다. 오늘 루카 복음사가 축일을 지내면서 우리들 각자는 삶의 자리에서 아름다운 복음을 나누면 좋겠습니다.
“주님께서는 내 곁에 계시면서 나를 굳세게 해 주셨습니다. 나를 통하여 복음 선포가 완수되고 모든 민족들이 그것을 듣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병자들을 고쳐 주며, ‘하느님의 나라가 여러분에게 가까이 왔습니다.’ 하고 말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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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018. 성 루카 복음사가 축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우리 하나하나가 ‘하느님의 나라’이다
- 하느님 꿈의 현실화 -
“주님은 하시는 일마다 진실하시고,
이루신 일마다 자애로우시니이다.“(시편145,16)
오늘은 성 루카 복음 사가 축일입니다. 시리아의 안티오키아 출신으로 그의 직업은 의사였으며 오늘 제1독서에서 보다시피 바오로 사도의 전교 여행에 함께 했던 분입니다. 루카복음과 사도행전이 그의 작품에 속합니다. 바오로 사도와 함께 하느님의 꿈을 실현시켜 하느님 나라를 살았던 분입니다.
꿈이, 희망이, 비전이 있어야 삽니다. 궁극의 꿈, 희망, 비전은 하느님이자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찾아 나섰던 옛 사막 수도승들의 궁극의 삶의 목표도 단 하나, ‘참으로 사는 것’이었습니다. 평생 살아도 헛 사는 이들도 많을 것입니다.
참 삶의 잣대는 무엇일까요? 하느님이, 하느님의 나라가 궁극의 꿈이요, 우리 믿는 이들의 참 삶의 잣대입니다. 이런 꿈이 있는 사람은 살아있는 사람이고, 이런 꿈이 없는 사람은 살아있다 하나 실상 죽은 사람입니다.
며칠전 분도계간지 편집인으로부터 원고청탁을 받았습니다. ‘신부님의 소중한 체험과 원숙한 지혜가 담긴 글을 게재하고자 이렇게 서신을 보냅니다. 부탁드리는 원고는 계간지 겨울호 ’바람(희망)’이라는 초점(특집)에 실립니다.’ 바람이 꿈입니다. 수도생활중 많은 자작시에 등장한 ‘꿈’이란 제목입니다.
“창문밖 가난한 언덕
보랏빛 은은했던 제비꽃 그 자리에
샛노란 민들레꽃 감동의 그 자리에
하얀눈 덮여 있다
흰눈 덮인 하얀땅
보랏빛, 샛노란 빛 ‘봄꿈’을 꾸고 있겠지”-1998.1.22.
“풀잎들 밤새 ‘별꿈’ 꾸며 뒤척이며
잠못 이루더니
아침 풀잎마다 맺힌
영롱한 별무리 이슬 방울들”-2001.10.1
“살아있는 것들만 꿈꾼다
죽어있는 것들은 꿈꾸지 않는다
연초록 새싹으로
화사한 꽃들로
피어나는 ‘봄꿈’의 나무들
살아있는 것들만 꿈꾼다”-2009.4
지금도 작시하던 당시의 상황이 눈에 선합니다. 꿈중의 꿈이, 진짜 살아있음의 꿈이 하늘 꿈, 하느님 꿈, 하느님 나라 꿈입니다. ‘나 하늘의 무지개만 보면 가슴이 뛴다’ 노래했던 ‘무지개’의 워드워즈 시인, ‘나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러움이 없기를’ 노래했던 ‘서시’의 윤동주 시인,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하리라’ 노래한 귀천의 천상병 시인, 모두가 하늘을 꿈꾸며 하늘 나라를 살았던 하늘의 시인들입니다.
참으로 믿는 이들은 하늘 꿈을, 하늘 나라의 꿈을 실현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 자체가 하느님 나라 꿈의 실현이었습니다. 우리 또한 예수님과 일치가 깊어지면서 그대로 하느님 나라 꿈을 실현하며 살 수 있습니다. 바로 오늘 강론 주제입니다.
하느님의 간절한 소망도, 하느님의 참 기쁨도 우리 하나하나가 하느님 나라 꿈을 실현하며 하느님의 영광을 환히 드러내는 것입니다. 사실 이것이 우리 삶의 궁극 목표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주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바라시는 것이기도 합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장소가 아닌 사람입니다. 주님과 사랑의 일치의 관계가 깊어질수록 그 사람을 통해 환히 드러나는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이런 면에서 예수님은 하느님의 나라 자체였습니다. 바오로 사도 역시 하느님 나라의 실현이었습니다. 옥중에서도 주님과 일치한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 나라를 사는 참 자유인입니다. 마지막 고백이 이를 입증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내 곁에 계시면서 나를 굳세게 해 주셨습니다. 나를 통하여 복음 선포가 완수되고 모든 민족들이 그것을 듣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대로 언제 어디서나 하느님 나라를 살면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는 바오로의 삶이었습니다. 오늘 주님은 다른 일흔 두명을 지명하시어, 몸소 가시려는 모든 고을과 고장으로 당신에 앞서 둘씩 파견하십니다. 흡사 제자 하나하나가 파견되는 하느님 나라같습니다.
“수확할 것은 많은 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바로 우리의 일은 이리 떼 세상 한 복판 ‘내 삶의 자리’에서 하느님 나라의 일꾼이 되어 하느님 나라를 실현하며 사는 것입니다. 주님께 일꾼들을 보내주십사 청할뿐 아니라, 우선 나부터 하늘 나라의 일꾼이 되어 사는 것입니다.
“돈 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먼저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하고 말하여라.”
가능한 최소한의 소유로, 무소유의 정신, 무욕의 영성으로 환상이 걷힌 투명한 이탈의 본질적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주님과의 일치가 깊어지면서 하느님 나라의 꿈이 실현될 때 저절로 이탈의 삶에 이웃에게 평화와 치유를 선물하며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같은 집에 머무르면서 주는 것을 먹고 마셔라, 일꾼이 품삯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이집 저집으로 옮겨 다니지 마라.”
민폐를 최소화 하면서 신도들의 환대의 사랑에 의탁하며, 감사하며, 하느님 나라의 복음 선포의 본질적 사명에 충실하라는 것입니다. 바로 오늘 지금 여기 우리 삶의 자리가 바로 하느님 나라를 실현하며 살아야 할 곳입니다. 이웃의 환대에 감사할 뿐 아니라, 우리 또한 환대의 사람이 되어, 주님의 평화와 치유를 선물하며 살 때 비로소 실현되는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하느님의 나라 꿈을 실현하며 살도록 도와 주십니다. 각자 삶의 자리에서 세상의 빛이, 세상의 소금이 되어 하느님 나라를 살도록 파견되는 우리들입니다. 그러니 우리 하나하나가 하느님 나라요. 하느님 꿈의 현실화입니다.
“당신께 비옵는 누구에게나, 진정으로 비는 누구에게나, 주님은 가까이 계시나이다.”(시편145,17).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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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018. 성 루카 복음사가 축일.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성 루카 복음사가 축일인 오늘, 미사의 말씀은 복음 선포의 기본을 보여 주십니다.
"주님께서는 다른 제자 일흔 두 명을 지명하시어"(루카 10,1)
열두 제자의 이름을 우리는 익히 들어 알고 있지요. 그들의 부르심부터 활동상까지 복음서에 잘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파견하시는 "일흔두 명의 다른 제자들"에 대해서는 그저 숫자만 알 뿐 이름이나 활동에 대해 잘 모릅니다. 그들은 서운할지 몰라도 저는 이 익명성에서 다른 의미를 봅니다. 주님께 부르심을 받아 파견된 이라면 이 일흔두 명 중 하나였을 수도 있었겠다는 가능성입니다. 아울러 주님의 복음을 선포하는 우리에게도 열려 있는 가능성이 되겠지요.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루카 10,3)
복음 선포의 여정은 아무 근심 걱정 도전 없는 꽃놀이 여행이 아닙니다. 오늘 예수님의 강도 높은 비유에 의하면 순하디 순한 양들이 굶주린 이리떼 우리 안에 던져지는 극적이고 잔인한 장면과 비슷합니다.
그렇다면 제 발로 안위가 보장되지 않고 목숨마저 위협받는 상황으로 걸어들어가라는 것인데, 거기에 더해 돈이나 여행 물품 등의 안전 장치마저 지니지 말라고 하시네요. 복음 선포 여행이 일반 출장이나 유람이 아닌 이상, 재물과 무기와 힘과 인맥에 의지하지 말고 오직 하느님 말씀과 그분 섭리에 의탁하라는 의미일 겁니다.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루카 10,5)
복음 선포자는 평화를 전달하는 사람입니다. 모든 피조물은 가장 자기다울 때 평화가 유지됩니다. 누구에 의해서 공격 당하고 훼손되고 파괴되면 이 평화가 깨져버리고 말지요. 복음은 하느님께서 이 세상에 품으신 기대를 회복시키고 완성하는 하느님 말씀이기에, 누구를 만나든 평화의 축복으로써 상대의 창조적 온점함을 빌어 주어야 합니다.
갈망 가득한 마음을 말씀의 샘물로 적셔 주고 친구가 되어 주며 병자를 치유하고 더러운 영을 쫓아내는 것 모두 누군가의 평화를 되돌려 주는 행위입니다. 복음 선포자는 평화의 건설자입니다.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습니다."(루카 10,9)
하느님 나라의 도래가 복음 선포의 내용입니다. 이 세상에 강생하여 오신 하느님과 함께 '하느님 나라'는 우리 곁에 우리 가운데 성큼 들어왔습니다. 또 그 주님께서 파견하신 제자들로 인해 아주 가깝게 실질적으로 확장되어 가고 있는 중이지요.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복음 선포의 두 협력자를 언급합니다.
"루카만 나와 함께 있습니다. 마르코는 내 직무에 요긴한 사람이니 함께 데리고 오십시오."(1티모 4,11)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루카 복음사가는 바오로 사도와 선교 여행을 함께하면서 주님의 복음과 복음 선포의 내용을 기록하여 전한 인물입니다.
그런데 바르나바의 사촌 마르코 복음사가는 사실 선교여행 중 바오로를 버려두고 떠난 적이 있어 나중에 바오로와 바르나바가 결별하게 된 이유를 제공한 인물이기도 합니다.(사도 15,37-39) 하지만 우여곡절 끝에 다시 바오로의 신임을 얻게 되었고, 베드로의 협력자로 활동하면서 복음서를 집필하였지요.
예수님과 함께 지내면서 그분의 인격과 가르침, 기적을 생생하게 전달할 열두 제자나 일흔두 제자들이 아직 살아 있을 때 누군가 그 역사를 집필하고 후대에 전해야 했지요. 복음사가 루카와 마르코는 사도들 곁에 머물며 훌륭히 이 사명을 완수했을 뿐만 아니라, 후대의 제자들이 대대로 선포해야 할 복음의 내용을 남겨 준 것입니다.
"주님께서 내 곁에 계시면서 나를 굳세게 해주셨습니다. 나를 통하여 복음 선포가 완수되고 모든 민족들이 그것을 듣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2티모 4,17)
바오로 사도의 고백을 통해 복음사가 루카와 마르코가 바오로 곁에서 어떤 마음으로 복음서를 집필했는지 알 수 있지요. 그들은 성령께 의지해 각자에게 맡겨진 복음 선포의 사명을 복음서 집필로 완수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 복음서를 통해 이 세상 모든 민족이 복음을 접하고 하느님 나라를 희망하며 살도록 초대한 것입니다.
"평화를 빕니다."
아무리 반복해도 넘치지 않는 이 축복의 인사를 자기 자신과 이웃과 온 세상 사람들과 모든 피조물에게 전하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코로나19로 많은 사람들을 만날 수는 없지만 우리와 스치는 그 누구에게라도 평화가 흘러가길 바라면 반드시 그리될 것입니다. 평화의 복음을 선포하는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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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018. 성 루카 복음사가 축일. 이병우 루카 신부님.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루카10,2)
오늘은 루카 복음과 사도행전의 저자인 '성 루카를 기억하는 날'입니다. 먼저 오늘 영명축일을 맞이한 모든 분들에게 축하의 인사를 드립니다.
"루카만 나와 함께 있습니다."(2티모4,11)
루카 복음사가는 오늘 독서에서 언급되고 있는 것처럼, 사도 바오로의 선교 여행 때 함께했는데, 그것도 루카를 상징하는 '소'처럼 우직하게 사도 바오로와 끝까지 함께 했습니다. 그리고 루카의 직업은 의사이고 화가였다고 전해집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예수님의 탄생에 관한 말씀'과 '가난한 이들과 죄인들을 향한 예수님의 사랑과 자비에 관한 말씀'과 '모든 사람을 구원하고자 하는 하느님의 뜻'을 다른 복음보다 더 상세하게 잘 전해주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일흔두 명의 제자를 당신에 앞서 파견하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루카10,2)
제64대 교황(590-604년)인 성 대 그레고리오 교황은 '복음서에 대한 강론'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들이 적습니다. 나는 이 말을 할 때 서글픔을 금할 수 없습니다. 기쁜 소식을 듣는 사람이 적지 않지만 그것을 전하는 사람은 적습니다. 보십시오. 세상은 사제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밀밭에서 일하는 일꾼들을 찾아내기란 너무도 힘듭니다. 우리가 사제의 직분을 받았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직분을 완수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루카 복음사가가 전하고 있는 모두의 구원을 위한 예수님의 크신 자비와 사랑을 잘 간직한 사제들과 이를 위해 땀 흘리는 일꾼들이 우리 안에 많아질 수 있도록 기도하고, 나 자신부터 먼저 그렇게 될 수 있도록 더 노력했으면 좋겠습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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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018. 성 루카 복음사가 축일. 박형순 바오로 신부님.
오늘의 묵상
오늘은 루카 복음사가 축일입니다.
그는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일대기를 기록하였습니다.
그가 남긴 복음서로 말미암아 우리는 이천 년이라는
긴 시간이 지난 오늘날에도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루카 복음서는 다른 복음서들과 구별되는 특징이 있습니다.
먼저, 예수님의 탄생과 그 전후의 이야기를 비교적 자세하게 들려줍니다.
세례자 요한의 출생 예고와 탄생, 예수님의 탄생 예고와
유년 시절 이야기, 특히 성모님과 관련된 이야기는
루카 복음서가 지닌 고유한 특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루카의 시선은 예수님과 함께 그분 곁에 있는
가난하고 버림받은 사람들을 향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을 가장 먼저 맞이하고 하느님을 찬양한
사람들은 이름 없는 목자들이었습니다(루카 2,15-20 참조).
이처럼 루카는, 예수님의 탄생이 힘과 능력을 지닌
사람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힘없고 미천한 사람들을 위한
구원의 기쁜 소식이라는 사실을 알려 줍니다.
예수님의 탄생을 바라보는 루카의 마음은 ‘마리아의 노래’에도
잘 담겨 있습니다(루카 1,51-53 참조).
오늘 복음에 나오는 제자 일흔두 명의 파견도
가난하고 병든 이들에게 향하고 있습니다.
루카가 전하는 하느님 나라의 선포는 그 누구보다도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에게 먼저 주어집니다.
루카는 사도는 아니었지만, 사도들과 함께하는 가운데
예수님의 탄생과 공생활 그리고 죽음과 부활을 경험하고,
이를 복음서를 통해서 우리에게 전해 주었습니다.
루카 복음사가의 축일을 지내는 오늘,
그가 전해 준 예수님을 다시 떠올리고,
우리는 어떠한 방법으로 예수님을 전할 수
있을지 곰곰이 생각하면서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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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018. 성 루카 복음사가 축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루카 복음사가는 바오로 사도의 동반자로서 복음서를 썼고 ‘사도행전’에서 교회 초기부터 바오로가 로마에 체류하기까지의 복음 선포 상황을 기록으로 남겼다. 루카는 예수님의 제자로서 복음의 내용의 목격자도 아니었다. 바오로와 같이 2~3차 여행에 수행하였고, 바오로 사도가 순교한 후에 희랍으로 건너갔다. 루카는 전승에 의하면 장가가지 않고 살았으며 84세에 하늘나라에 가셨다고 한다. 루카 복음은 소로 표상되는데 그것은 복음의 시작이 성전에서의 예절로 시작되기 때문에 제사 때 쓰인 소를 의미하는 것 같다. 성인은 화가와 의사의 수호성인이시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둘씩 짝지어 파견하시면서(둘 사이에 주님 현존을 위해) 복음을 전파하면서 그들이 지켜야 할 바를 말씀해 주신다. 우선 무엇보다도 물질적인 것들로 마음을 어지럽혀서는 안 되기 때문에 여장도 가볍게 차려야 한다는 것이다. 물품도 갖지 말고 모든 것을 하느님께 맡기라는 것이다. 또한, 대접을 받으려 하지 말고 주기 위해서 떠나라는 것이다. 복음을 전파하는 사람은 자기 일에 충실해야지 사소한 일에 관심과 마음을 빼앗겨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4절) 하신 것이다.
또 수입을 바라고 그 일을 해서는 안 된다. 아무 음식이나 잘 먹고, 더 좋은 음식, 더 나은 숙소를 바라거나 찾아다녀서도 안 된다. 손님 접대는 당시에는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거룩한 의무였다. 낯선 여행자가 마을에 들어왔을 때 손님 접대는 그 마을의 의무였고 풍습이었다. 그러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현세적인 어떤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복음의 전파만을 위하여 주님께 의지하며 헌신하는 것임을 예수님께서는 가르쳐 주신다.
그런데 그런 일을 하기 위한 일꾼이 적다는 것이 예수님의 아쉬움으로 보인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2절) 분부하신다. 그러면 우리는 오늘 똑같은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어떠한 일꾼을 얼마나 많이 가지고 있는가? 지금 상황으로는 성직자들도 부족하지만, 우리 신자들로서도 일꾼이 너무나 부족하다. 나 자신의 봉사가 이 공동체에 필요한 줄 알면서도 뒷짐 지고 있는 신자들이 많다. 일꾼이 부족하면 일을 할 수 없는 것이며, 일꾼도 어떤 질을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도 문제가 된다.
여기서 말하는 일꾼은 누구를 위해 일하는 것이며, 무엇을 위해서 일하는 것인가? 어느 사람만이 아니라 우리가 모두 서로의 축복과 구원을 위해 일을 할 사람이고, 그런 일꾼으로 부름을 받은 것이며 현세적인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이 전파되도록 그래서 하늘나라를 이 땅 위에 이루도록 일하는 사람들이다. 우리 가운데서, 우리 공동체 안에서 더 많은 훌륭한 일꾼이 나오도록 우리 자신부터 먼저 투신하도록 하고 현재와 미래의 일꾼들을 위해 기도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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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018. 성 루카 복음사가 축일.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루카 10, 2)
이미 넘치는
은총의 삶이다.
인생의
다양한 길을
루카 복음을
통하여
만나게된다.
삶이 내뿜는
다양한
색채들이다.
루카 복음사가는
말씀으로 마음을
흔드는
매력이 있다.
우리의 삶과
함께하시는
예수님을
자연스레
보게된다.
삶이 있는 곳에
복음이 있다.
삶속에
숨어 있는
보화들을
만난다.
루카가
들려주는
이야기들은
모두 사람이
사는 행복을
되찾아주는
이야기들이다.
인생의
전부가 되시는
예수님이시다.
일상에서
평범에서
예수님을
만난다.
루카는
모두가
다르지 않는
참된 평등을
강조한다.
진정한 회개는
외부가 아니라
내부에 있다.
기쁨의 회개는
남이 해줄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우리자신이
해야할
참된 기쁨이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루카는 잘
보여주고 있다.
쉬운 것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쉬운 것이
어려운 것이다.
제대로
보는 일이다.
양 극단에서
중도를 만난다.
마르타와 마리아
큰 아들과
작은 아들
바리사이와 세리가
예수님을 통해
하나가 된다.
거기에서
인생의 의미를
다시 만나는
것이다.
루카는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체험을 기쁘게
나누고 있다.
루카 복음을
다시 읽는
이유이다.
보이는 것
이상의 깊은
하느님 사랑을
우리 일상에서
다시 만나게 하는
루카 복음사가의
수확의 기쁨이다.
일상의 기쁨이
복음의 기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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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018. 성 루카 복음사가 축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성경>
루카복음을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명령하셨습니다.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루카 24,47-48).”
이 말씀의 뜻은,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모든 민족들에게, 예수님을 믿고
회개하면 죄를 용서받는다고(구원을 받는다고) 선포하여라.”입니다.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 라는 말씀은, “증인이 되어라.”,
즉 “복음을 선포하여라.” 라는 명령입니다.
사도들은 이 명령에 따라 온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을 선포했습니다.
그 일은 ‘말’로도 이루어졌고, ‘글’로도 이루어졌습니다.
‘복음사가’들은 ‘글’로 복음을 선포한 사람들입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자신이 루카복음을 기록한 이유를 이렇게 적었습니다.
“이는 귀하께서 배우신 것들이 진실임을 알게 해 드리려는 것입니다(루카 1,4).”
‘배우신 것들’이라는 말은, 세례를 받기 위해서 배운 것들과
세례를 받은 후에 배운 것들을 모두 가리키는 말입니다.
아마도 사도들은, 예수님이 구약성경에 예언되어 있는 바로 그 메시아라는 것과
예수님의 말씀들과 행적들과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충실하게 살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서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다는 것을 가르쳤을 것입니다.
‘복음서’는 사도들이 예수님에 관해서 ‘말’로 가르친 것들을
‘글’로 정리한 것입니다.
여기서 ‘진실’이라는 말은, ‘진리’로 해석됩니다.
이 말은, 사도들이 가르친 것들은 ‘구원의 진리’ 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배우신 것들이 진실임을 알게 해 드리려는 것입니다.” 라는 말은,
예수님의 복음은 곧 구원의 진리라는 것을 증언한다는 뜻입니다.
요한 사도는 자신이 복음서를 쓴 목적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책에 기록되지 않은 다른 많은 표징도 제자들 앞에서
일으키셨다. 이것들을 기록한 목적은 예수님께서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여러분이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그분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20,30-31).”
1) 성경은 ‘믿음의 책’이고, ‘생명의 책’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믿음을 갖게 되고, 믿음을 통해서 생명을 얻게 됩니다.
<창세기를 예로 들면, 천지창조 이야기는 ‘하느님은 조물주이신 분’이라는
믿음을 기록한 것이고, 그 믿음으로 우리를 인도해 주는 이야기입니다.
성경은 과학 교과서가 아닙니다.
진화론과 천지창조 이야기를 비교할 필요도, 이유도 없습니다.
신앙을 과학과 대립시키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2) 성경은 하느님의 말씀을 인간의 언어로 기록한 책입니다.
그런데 그 인간의 언어는 수천 년 전의 언어이고,
세월이 흐르면서 오늘날의 우리가 이해하기 어려운 언어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번역과 해석이 필요하고, 공부가 필요합니다.
3) 성경은 성령의 인도를 받아서 사람이 기록한 책입니다.
만일에 사람의 손을 빌리지 않고 성령께서 직접 기록한 책이라고만 믿는다면,
아마도 사람들은 성경에 들어 있는 말씀은 읽지 않고
성경이라는 책 자체를 우상 숭배하듯이 숭배할 것입니다.
반대로, 성령의 인도를 받지 않고 사람이 기록한 책으로만 생각한다면,
사람들은 성경을 세속의 수많은 책들 가운데 하나로 취급할 것입니다.
4) 우리는 하느님을 ‘살아계시는 분’으로 믿고 있습니다.
따라서 성경은 살아계시는 하느님의 ‘살아 있는 말씀’을 기록한 책입니다.
옛날이야기를 기록한 책이 아니라,
바로 지금 여기에서 ‘나에게’ 하시는 하느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날마다 꾸준히 성경을 읽고, 묵상하고, 실천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사도들의 편지들도 성경에 포함됩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는 그분의 언약에 따라, 의로움이 깃든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이러한 것들을 기다리고 있으니, 티 없고 흠 없는 사람으로
평화로이 그분 앞에 나설 수 있도록 애쓰십시오.
그리고 우리 주님께서 참고 기다리시는 것을 구원의 기회로 생각하십시오.
이는 우리가 사랑하는 바오로 형제가 하느님에게서 받은 지혜에 따라
여러분에게 써 보낸 바와 같습니다. 사실 그는 모든 편지에서 이러한 것들을
이야기합니다. 그 가운데에는 더러 알아듣기 어려운 것들이 있는데,
무식하고 믿음이 확고하지 못한 자들은 다른 성경 구절들을 곡해하듯이
그것들도 곡해하여 스스로 멸망을 불러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이 사실을 이미 알고 있으니, 무법한 자들의 오류에 휩쓸려
확신을 잃는 일이 없도록 주의하십시오. 그리고 우리의 주님이시며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받은 은총과 그분에 대한 앎을
더욱 키워 나아가십시오(2베드 3,13-18ㄱ).”
이 말을 보면, 바오로 사도의 편지들도 사도시대 때부터 이미
성경으로 인정받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그 가운데에는 더러 알아듣기 어려운 것들’이 있다고 말하는데,
내용이 어렵다는 것인지, 뜻이 불분명하다는 것인지, 확실하지 않습니다.
어떻든 성경을 마음대로 해석해서 왜곡하는 것은,
‘무식하고 믿음이 확고하지 못한 자들’이 하는 짓이고,
스스로 멸망을 불러오는 일이라고, 베드로 사도는 경고하고 있습니다.
(성경 해석을 잘못하면 이단이 되고, 그런 오류에 휩쓸리면 믿음을 잃게 됩니다.
처음에는 구원을 얻으려고 성경 공부를 시작했더라도,
잘못된 성경 공부 때문에 구원에서 멀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 해석을 올바르게 하려면, 예수님께서 무엇을 가르치셨는지,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를 정확하게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성경으로 해석해야 한다.”가 정답입니다.
묵시록을 보면, 이런 말이 나옵니다.
“나는 이 책에 기록된 예언의 말씀을 듣는 모든 이에게 증언합니다.
누구든지 여기에 무엇을 보태면, 하느님께서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보태실 것입니다. 또 누구든지 이 예언의 책에 기록된 말씀 가운데에서
무엇을 빼면, 하느님께서 이 책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거룩한 도성에서 얻을 그의 몫을 빼어 버리실 것입니다(묵시 22,18-19).”
무엇을 보태거나 빼면 안 된다는 것은,
묵시록뿐만 아니라 성경 전체에 적용되는 원칙입니다.
성경에서 자기 마음에 안 드는 내용을 마음대로 빼거나,
없는 말을 집어넣는 것은 이단자들이 흔히 하는 짓입니다.
그런 짓은 하느님의 말씀을 모독하는 죄이고, 하느님을 모독하는 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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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018. 성 루카 복음사가 축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모두를 바쳐 충실히 선포하는 복음♣
루카는 안티오키아에서 태어난 그리스인 의사였습니다(콜로4,14). 그는 스승인 사도 바오로의 전교여행에 동행하였습니다. 또한 그는 바오로가 감옥에 갇혔을 때는 물론 데마스가 현세를 사랑하여 바오로에게서 떠나가고, 알렉산드로스가 바오로에게 해를 입히고, 첫 변론 때에 모두가 바오로를 저버렸음에도 끝까지 그의 곁을 지켰습니다(2티모 4,11).
루카는 이렇듯 복음을 선포하는 사도 바오로를 수행하였고, 어려움을 겪는 바오로 곁에 머물렀습니다. 복음이 선포되도록 어떤 상황에서든 복음을 선포하는 바오로 사도와 함께한 것입니다. 이처럼 복음은 한 개인의 힘만으로 선포되는 것이 아닙니다. 임마누엘이신 하느님의 사랑은 삶과 고통을 ‘함께함으로써’ 전해지는 것이지요.
루카는 사도 바오로를 동행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사도 바오로의 제2차 전교여행에 수행하였다가 57년까지 필리피에 머물면서 그곳의 공동체를 지도하였습니다. 67년 바오로가 순교하자 그리스로 건너가서 아카이아에서 전교합니다. 그렇게 그는 “복음을 선포하는 일로 모든 교회에서 칭송을 받던”(2코린 8,18) 인물이었습니다.
우리도 성 루카 복음사가처럼 나 자신이나 내가 지닌 재물과 지위나 능력으로 남에게 인정받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선포하고, 하느님의 정의와 선을 드러내는 것을 통해 칭송받는 사람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복음은 나를 선전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전하는 것이고 주님의 평화와 선을 나누는 것임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복음선포란 예수님의 말씀처럼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말며, 평화를 빌어주는”(루카 10,4-5) 것입니다. 따라서 아무것도 지니지 않는 절대 가난의 상태, 곧 ‘소유 없이’(sine proprio) 오직 하느님만을 소유할 때 주시는 주님의 평화와 기쁨을 선포하는데 집중해야 합니다.
루카는 언제 어디서든 말과 행동, 기록 등 모든 방법을 통해 복음을 선포하고 주님을 전하려고 고난을 감수했습니다. 파견된 이는 “이리떼 가운데 보내지는 양들처럼”(10,3) 주님의 일을 위해 불안정과 불확실한 미래에 보내집니다. 복음선포의 길은 그런 가운데서 고통과 박해와 위협을 뚫고 가는 십자가의 길입니다.
한편 루카 복음사가는 자신이 보고, 듣고, 체험했던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기록으로 전해주었습니다. 구원의 역사, 사랑의 역사의 체험을 생생하게 전해줌으로써 하느님의 사랑을 영원히 기억하고, 기억한 것을 현재화하며 살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놓은 것입니다.
또한 루카는 복음서를 통해 순례하는 예수그리스도, 가난한 이를 특히 사랑하시는 예수그리스도의 말씀과 행적을 전해줌으로써 그런 길을 가도록 촉구합니다. 우리도 루카 복음사가를 본받아 주님께 철저히 의지하며, 주님의 일에 집중하여 어떤 고통과 박해가 닥쳐온다 하여도 헌신적으로 가난한 이를 섬기고 복음을 선포하는 주님 포도밭의 일꾼이 되도록 힘써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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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018. 성 루카 복음사가 축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가난한 사람들의 복음서’ ‘자비의 복음서’ ‘여인들의 복음서’인 루카복음서!
돌아보니 25년 세월 부끄럽고 보잘 것 없는 글들을 줄기차게 쓰며 살아왔습니다.
무슨 용기로 그랬는지, 신문이나 잡지에, 주보나 방송에...쓰기도 참 많이도 썼습니다.
때로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는 글들, 너무나 부끄러워 지우고 싶을 때도 많습니다.
한때 비장한 각오로 목숨 걸고 썼던 글들, 때로 지나치게 날이 선 글들이 누군가에게는 큰 상처를 드리기도 했겠구나, 하는 후회도 만만치 않습니다.
보다 심사숙고한 글, 그래서 균형 잡힌 글, 보다 사랑이 담길 글, 그래서 마음이 따뜻해지는 글, 보다 복음적인 글, 그래서 주님께 영광을 드리는 글, 결국 생명과 구원의 길로 안내하는 길잡이가 되는 글을 썼어야 했었는데...
이런 면에서 오늘 축일을 맞이하시는 루카복음사가의 저작들은 오늘 제게 참으로 큰 본보기가 되고 있습니다.
루카복음사가가 이방인 출신이어서 그런지, 그에게 있어 하느님 백성에 대한 개념은 보다 보편적입니다.
참 하느님 백성은 율법을 목숨처럼 소중이 여기는 율법학자나 바리사이들, 유다인들에게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참 하느님으로 고백하는 모든 이들에게 활짝 열려 있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유연하고 개방적인 역사관입니다. 하느님 자비의 역사관이라고나 할까요?
특히 루카복음사가는 당시 유다인들의 시각에서 절대로 구원의 대상에 들 수 없을 것이라고 여겨졌던 태생적 죄인들, 이방인들, 세리들, 창녀들, 양치는 사람들, 고리대금업자들, 개똥 수거인들 까지도 모두 구원의 대상에 포함시켰습니다.
이처럼 루카복음사가는 아무도 돌보지 않던 가난하고 방황하던 양떼를 향한 예수님의 사랑과 구원의지가
얼마나 각별하고 강렬한 것인지를 잘 소개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복음서를 일컬어 ‘가난한 사람들의 복음서’ ‘자비의 복음서’ ‘여인들의 복음서’라고까지 칭합니다.
당시 사람들이 만나기만 하면‘쳐 죽일 놈’ ‘민족의 배신자’로 생각하며 침까지 뱉던 세리들, 죄인의 대명사들이었던 이방인들, 악령 들린 이들에게 가까이 다가가셔서, 친히 그들과 눈을 맞추시고, 손을 잡아 일으켜 세우시는 예수님의 따뜻하고 자상한 모습을 상세히 우리에게 전해주신 루카복음사가에게
마음 깊이 감사해야겠습니다.
루카복음사가를 본받아 부족하고 나약한 이웃을 매몰찬 시선이 아니라 따뜻하고 호의적인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우리의 하느님께서 냉혹한 관찰자, 심판자로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라 더없이 자상하고 한없이 부드러운 위로자 예수님으로 오신 것에 대해 진심으로 감사하는 노력을 계속해야겠습니다.
펼치기만 해도 마음이 따뜻해지고 편안해지는 복음, 구절구절 우리 죄인들을 향한 하느님의 자비가
역동적으로 펼쳐지는 복음, 힘들 때 마다 손에 들면 다시 살아갈 힘과 용기를 주는 루카 복음서를 좀 더 자주 읽고 묵상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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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018. 성 루카 복음사가 축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선교의 방법?: 매력적인 공동체를 먼저 만들라!
오늘은 성 루카 복음사가 축일입니다.
성 루카는 바오로 사도 공동체의 일원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성모 마리아에 대해 어떤 복음보다 더 구체적으로 기록하였고 가난한 이들에 대해 특별한 애정을 지닌 인물로 평가받습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 철저한 자료수집을 통해 복음서를 쓰고 또 바오로 사도와 베드로 등이 복음을 전하는 과정을 사도행전으로 기록하였습니다.
그는 이렇듯이 사도단 안에 머무르며 자신이 배우고 익힌 것을 선교를 위해 사용하였습니다.
선교는 모든 그리스도인의 의무입니다.
선교만큼 큰 사랑실천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선교의 열정이 이전보다 많이 떨어진 것이 사실입니다.
선교의 열정이 떨어지자 선교의 ‘방법’에 대한 논의가 새롭게 벌어지고 있습니다.
고해성사가 어려워서 성당에 나오지 않는 것 같으니 SNS나 인터넷을 통해 편하게 성사를 볼 수 있게 해야 하고, 코로나 시대에 TV로 인사하여 성당에 와서는 자판기 같은 것으로 성체를 영하게 하자는 식의 의견도 제시됩니다.
물론 말도 안 되는 의견들이지만 설사 그렇게 한다고 해서 더 많은 신앙인이 성당에 나올 것 같지는 않아 보입니다.
우리는 무언가 핵심을 놓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선교의 목적이 세례를 받고 성사에 참여하게 하기 위함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성사는 공동체 형성을 위해 있는 것입니다.
아이가 엄마를 통해 아빠를 만나게 되는 것처럼 우선 믿지 않는 사람들이 만나게 만들어야 하는 것은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리스도 공동체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은 일흔두 명의 제자들을 모으시고 그들을 둘씩 파견하셨습니다.
믿지 않는 이들이 먼저 만나게 되는 것은 그리스도가 아닙니다. 그리스도 공동체입니다.
파견된 것을 먼저 만나지 못하면 파견하신 분은 너무 멀리 계십니다.
마찬가지로 교회에서 시행되는 성사는 선교의 목적이 아닌 공동체 형성에 있습니다.
허성 야고보 신부님은 한 때 가정법원 옆에 있는 부산의 모 성당에서 본당 신부를 하고 계셨습니다.
한 번은 이혼하려는 부부가 성당에서 서성이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사정을 물으니 이혼하려고 법원에 왔는데 점심시간이라 2시간을 기다려야 하는데 갈 데가 없어서
성당으로 찾아왔다는 것입니다.
성당에 잠깐 앉아 있었지만, 기도가 되지 않아서 다시 나왔다는 것입니다.
신부님은 무엇 때문에 이혼하려고 하느냐고 물었는데, 남편이 먼저 “이 사람은 제가 무슨 일만 하려고 하면 반대를 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자매가 “당신이 잘했어 봐라.
내가 반대하나?”라고 하며 언성이 높아지고 마구 싸우더라는 것입니다.
신부님은 화를 내시며 “아니, 싸우다가도 어른이 오시면 싸움을 멈추는 법인데 신부 앞에서 이게 뭐 하는 짓이야?” 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은 잘못했다고 용서를 청했고 신부님은 그러면 보속으로 2시간 동안 성체조배를 하라고 하셨다고 합니다.
2시간 뒤 사제관에 두 사람이 손을 잡고 울면서 들어왔습니다.
2시간 동안 있다 보니 서로의 잘못이 자기에게 있었음을 깨닫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신부님이 보는 앞에서 이혼서류를 찢어버렸고, 신부님은 바로 혼인 갱신 예식을 해 주었습니다.
둘은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더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사를 영하는 목적과 같습니다.
하느님을 만남의 목적은 공동체 형성에 있습니다.
공동체가 형성되면 비로소 자녀가 탄생하게 됩니다. 이것이 선교입니다.
우리가 선교를 위해 먼저 신경 써야 하는 것은 소공동체 시스템의 재정립입니다.
문제는 아직도 3년에 한 번 고해성사만 하면 냉담자가 아니라는 정책을 쓰고 있는 것에 있는 것 같습니다.
성사의 목적은 공동체의 형성을 위한 힘을 주는 데 있는데도 그냥 오랜만에 나와서 잠깐 고해성사와 성체성사만 하면 신자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성사의 참례 여부로 냉담자를 가려내는 것은 공동체 친교의 중요성을 감소시킬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 제자들에게 서로 사랑하는 모습을 보이면 세상 사람들이 그들을 당신 제자로 알아볼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공동체를 형성하시고 그 형성된 공동체가 선교하게 만드셨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람은 특별한 것의 일부가 되고 싶어 합니다.
1973년 할리데이비슨은 미국 오토바이 시장의 77.5%라는 거의 독보적인 시장점유율을 차지했습니다.
1969년 잭 니컬슨과 대니스 호퍼의 ‘이지라이더’가 상영된 이후 할리데이비슨은 미국 남성들의 로망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모터사이클은 말론 브란도의 ‘위험한 질주’(1953)에서처럼 ‘반항의 아이콘’이란 이미지도 새겨지고 있었습니다.
특히 1948년 구성된 헬스 엔젤스(지옥의 천사들)는 수십 대의 모터사이클을 타고 다니며 폭동을 일으키기도 해서 할리데이비슨을 타는 사람들이 폭력조직과 비슷하게 여겨졌습니다.
엔젤스 단원들은 한때 유명 가수들의 공연 안전요원을 맡기도 했는데 폭력과 살인 사건까지 발생하였습니다.
이때 저렴하고 가볍고 고성능인 오토바이들이 미국을 침략했습니다.
바로 일본의 야마하, 혼다, 스즈키 오토바이들이었습니다.
할리 데이비드슨을 타면 갱스터라는 이미지를 벗어나기 위해 많은 이들이 일본 모터사이클을 선호했습니다.
이때 혼다의 로고는 이랬습니다.
“혼다를 탄 가장 친절한 사람들을 만나세요.”(You meet the nicest people on Honda)
이렇게 80년대 들어와서는 미국에서 반 이상이 일본 모터사이클을 탔고 할리 데이비드슨은 25% 수준까지 떨어졌습니다.
그렇다고 할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1983년 할리 마케팅팀은 ‘우리가 직접 새로운 오토바이 갱을 만들면 어떨까?’라는 아이디어를 내고 할리의 본질적인 무게감은 유지하면서 범죄집단이라는 오명을 벗어버리는 ‘호그’(Harley Owner’s Group)을 만들었습니다.
처음 4년 동안 7만 3,000명의 멤버들이 등록했고, 오늘날 그 숫자는 거의 50만 명에 육박합니다.
할리데이비슨 회사에서는 그저 그들의 모임과 경주 등의 이벤트를 제공하며 자랑스러움을 주는 일을 하면
모든 홍보는 그들 자체가 수행하고 고정적인 매출원이 되는 것입니다.
현재 방탄소년단이 안정적일 수 있는 이유도 엄청난 숫자의 아미가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들은 방탄소년단이 일일이 다 이름을 알 수도 없고 친분을 가질 수도 없지만, 그저 방탄소년단의 가장 강력한 지지층이라는 것에 만족감을 얻고 충성을 다합니다.
결국, 자신을 홍보하는 것은 자신을 지지해주는 공동체를 만들고 그들이 행복하고 자랑스럽게 만들어주는 일이 가장 중요합니다.
교회 소공동체나 단체에서 행복하기만 하면 사람들이 안 모일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교회는 이 시스템을 만들어주고 자랑스러움을 넣어주는 일만 하면 됩니다.
호그의 웹사이트 제작자들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인간에겐 자기 자신보다 더 위대한 뭔가의 일부가 되고 싶어 하는 기본적인 욕구가 있습니다.
최고경영자에서부터 새로 할리를 구입한 오너와 라이더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할리데이비슨을 하나의 크고 행복한 가족으로 여깁니다.
당신이 속하고 싶은 곳처럼 들리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오늘 당장 H.O.G에 가입하십시오.”
우리 선교의 마인드도 “할리 데이비드슨을 타보세요. 얼마나 좋은데요?”라는 다소 황망한 방식이어서는 안 됩니다.
“성체를 영해 보세요. 안 그러면 구원 못 받아요.”라는 식의 마인드는 벗어버려야 합니다.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욕구는 ‘소속감을 느끼고 싶은 욕구’입니다.
아이가 태어나면 사실 젖보다는 엄마의 따듯한 품을 더 찾습니다.
소속은 근원적인 존재의 불안함을 달래주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 성당 가족 공동체는 너무 행복합니다. 그 공동체어 머무는 것이 너무 자랑스럽습니다.” 라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선교의 방법? 방법은 이것입니다.
모든 성당 가족 구성원들이 공동체에 속하여 세상 누구보다 행복하여 우리 공동체가 자랑스럽게 만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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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018. 성 루카 복음사가 축일. 이승화 시몬 신부님.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씨앗을 뿌리는 이와
결실을 맺는 이는 다릅니다.
하지만 둘 다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수확할 수 있도록 자라나는 것은
인간의 힘이 아닌 하느님께 맡겨져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노력이 도움이 될 수는 있지만
결국 어떤 과정을 통해 결실이 맺어질지는
오늘 하느님 뜻에 달려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수확할 사람들에게 한 가지 자세를 요구합니다.
인간적인 자만에 빠지거나 무기력해지지 않으며
하느님 뜻에 온전히 내어맡기는 자세가 요구됩니다.
바로 겸손된 자세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파견할 때 하신 말씀,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낸다는 의미가
바로 이런 겸손의 자세를 말해줍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이익을 먼저 생각하게 됩니다.
이왕이면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바꾸려고 합니다.
그러는 사이에 하느님의 뜻을 어지럽히곤 합니다.
이들이 바로 이리떼입니다.
그러나 양들은 온전히 목자를 따라갑니다.
때때로 자신의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기도 하고
때대로 양들끼리 부딪칠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목자의 손짓을 따라 먹이를 찾아 나아갑니다.
하느님의 뜻을 있는 그대로 살아가는
그런 겸손의 모습이 그리스도인들에게 필요합니다.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것은
아직 오직 않았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동시에 곧 온다는 희망을 말해줍니다.
아직 오지 않았기에 성실한 자세가 요구된다면
곧 오기에 희망을 잃지 않는 자세가 요구됩니다.
이 두 자세가 만나 겸손의 삶을 살아가게 될 때,
우리 삶의 중심에는 하느님이 계시고
그분의 일에 동참하며 그분이 원하시는 뜻을 수행하게 됩니다.
오늘 함께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나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손길에 감사하며
나의 뜻과 감정이 아닌 하느님을 먼저 바라볼 수 있기를
그리하여 더 많은 결실을 수확하며
하느님 나라를 전하는 그런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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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018. 성 루카 복음사가 축일. 김 로마노 형제님.
루카 복음사가 축일 제1독서 (2티모4,10-17ㄴ)
"루카만 나와 함께 있습니다. 마르코는 내 직무에 요긴한 사람이니 함께 데리고 오십시오." (11)
음침하고 축축한 로마의 토굴 감옥에 수감되어 말년을 쓸쓸하게 보내고 있던 노(老)사도 바오로 곁에 여전히 남아 있었던 인물이 바로 루카였다.
루카는 루카복음과 사도행전의 저자로서 사도 바오로의 선교 여행에 동행했었다.
사도행전 27장을 보면, 단순히 동행한 정도가 아니고 팔레스티나에서부터 로마까지의 멀고도 험난한 해상 여행에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사도 바오로를 수행하였다.
그는 사도 바오로와 함께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였다.
또한 그는 콜로사이서 4장 14절에서언급된 대로 '사랑하는 의사'이기도 했다. 그는 감옥에서 죽음과 대면하고 있는 노(老)사도였던 사도 바오로의 건강과 안위를 돌볼 수 있는 실질적인 능력을 지닌 의사였던 것이다.
나아가 그는 사도 바오로의 제1, 2차 로마 수감 생활 동안 그와 함께 있어서 (콜로4,14; 필레몬1,1,24; 2티모4,11)서신을 대필하기도 한 비서요, 신실한 친구이기도 했었다.
그는 그리스도인, 선교사, 의사, 비서, 친구로서 사도 바오로와 언제나 함께한 진실한 주님의 종이었다.
이제 티모테오가 올 것임을 확신한 사도 바오로가 그에게 감옥에 갇혀 있는 자신을 방문할 때에 '마르코를 데려올 것'을 요청한다.
요한 마르코는 예루살렘 출신으로서(사도12,12) 사도 바오로의 제1차 선교 여행에서 사도 바오로 일행을 떠나 개인적으로 행동했던 불명예스러운 전력을 가지고 있었다(사도13,13).
제2차 선교 여행 때 사도 바오로는 이런 전력이 있는 마르코라고 하는 요한의 동행을 거부했으며, 이로 말미암아 바르나바와 결별하기도 했다(사도15,36~41).
그러나 콜로사이서 4장 10절이나 필레몬서 1장 24절을 참고하면, 마르코는 사도 바오로가 1차로 로마 감옥에 수감되었을 때에 그와 함께 있었음이 분명하다.
또한 베드로 전서 5장 13절에 따르면, 마르코는 사도 베드로와 함께 로마에서 복음을 증거하였다.
전승에 따르면 사도 베드로가 로마에서 순교한 후, 이전의 사도 바오로와의 반목을 털어버리고 다시 그의 신실한 협력자가 되었다고 한다.
한때는 서로 반목했던 자들이 복음 안에서 다시 화해하고, 한 뜻으로 주님 복음을 위해 힘쓰는 모습은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모습일 것이다.
한편, 여기서 사도 바오로가 티모테오에게 마르코와 동행할 것을 요청하고 있는 이유는 마르코가 사도 바오로 자신의 일에 유익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특히 원문을 보면, 사도 바오로는 자신의 '일'을 '디아코니안'(diakonian)이라는 단어로 표현하였다. 이 단어는 교회와 관련된 봉사, 또는 하느님 나라와 관련된 봉사와 일을 나타내는 단어이다.
이것을 볼때, 사도 바오로는 자신이 관계하고 있는 복음 선포에 마르코가 절실히 필요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셈이다.
'특히 양피지 책들을 가져 오십시오.'(13)
사도 바오로가 티모테오에게 가져올 것을 부탁한 것은 외투(겉옷) 이외에 '책들, 특히 양피지 책들'로 번역된 '타 비블리아, 말리스타 타스 멤브라나스'(ta biblia, malista tas membranas; my scrolls, especially the parchments)였다.
여기서 '책들'로 번역된 '타 비블리아'는 일반적으로 '파피루스 두루마리'를 지칭하는 단어이지만, 본문에서는 '특별히 가죽 종이에 쓴 것'이라는 문구로 한정되어 있어 양피지 책을 지칭한다.
여기에서 '양피지 책들'로 번역된 '멤브라나스'(membranas)는 라틴어의 '멤브라나'(membrana)로 표현되는 단어로서 '얇은 가죽'을 뜻한다.
무두질한 가죽이 페르가모에서 최초로 제작되었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이 단어는 일반적으로 'parchments'로 표기되는 양피지를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즉 여기서 언급된 '멤브라나스'는 '양이나 염소나 송아지 가죽 위에 필사한 책'을 뜻한다.
그런데 이런 종류의 가죽 종이는 파피루스에 비해 훨씬 비쌌기 때문에 대부분의 책들, 곧 일반적인 책에는 파피루스가 사용되었다.
그렇다면 사도 바오로가 가져오기를 부탁한 '양피지 책들'은 도대체 무엇인가?
어떤 학자는 이것을 재판을 대비하기 위한 로마 시민권 증명서라고 하기도 하며, 다른 학자들은 희랍어 구약 성경이나 주님의 말씀을 기록한 것으로 본다.
이에 대해 여러 가지 견해들이 있을 수 있지만, 모두 추정에 불과할 뿐이다. 이것은 말년의 사도 바오로가 특별히 보기를 원한 귀중한 내용의 책임에는 틀림없다.
루카 복음사가 축일 복음(루카10,1~9)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2~3)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갑작스런 도래와 함께 그때 올 악한 자에 대한 심판의 준엄함에 대해 '그날에는 소돔이 그 고을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루카12,12)고 말씀하셨다.
복음을 직접 전해 듣고 회개할 시간을 충분히 가진 고을들이 그렇지 못한 소돔보다 훨씬 더 무거운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하느님의 나라가 이런 심판의 엄정섬을 전제하고 급격하게 온다면, 시급하게 선교가 이루어져야 할 것은 당연하다.
따라서 추수하는 행동은 그들을 하느님의 나라로 모으는 종말론적인 과업을 뜻한다.
여기서 '수확'에 해당하는 '테리스모스'(therismos; harvest)는 '수확' 그 자체 뿐만 아니라 수확의 대상인 거두어 들여야 할 곡식 및 수확의 과정을 의미할 때도 사용된다.
무르익은 곡식을 거두어 들이는 수확은 농경 사회의 사람들에게는 평범한 주제이다.
하지만 '수확'이란 예수님께 있어서 하느님의 나라의 여러 국면들을 설명하는 좋은 소재였다.
여기서는 하느님께서 이미 복음을 받아들일 소지를 미리 마련해 놓으셨기 때문에, 사람들은 수확을 기다리는 완전한 무르익은 곡식과도 같다는 의미를 전달해 준다.
따라서 여기서의 예수님의 명령은 사람들로 하여금 하느님의 나라로 빨리 들어오게 하라는 말씀이다.
따라서 루카 복음 10장 2절은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는 일이 시급한 데 비해서, 이 일을 몸소 행할 일꾼이 너무나 부족하다는 안타까움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내용이다.
또한 지금 파견을 받고 있는 일흔두 제자들의 책임이 중대하다는 사실도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부르심을 받은 일꾼들은 자신들의 책임을 다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주인에게 또 다른 일꾼들을 더 보내달라고 요청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로 번역된 '데에테테'(deethete; ask; pray)는 단순히 '요청하다'는 의미 이상의 '기도하다', '간구하다'는 뜻을 가진 동사 '테오마이'(deomai)의 부정 과거 명령법으로서, '너희들은 간구하라'는 매우 간절하면서도 강력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천국의 복음이 전해지기 시작할 당시의 그 복음을 알지 못한 채 죽어가는 영혼들을 보시는 주님의 안타까움이 묻어있는 말씀이다.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사실은 루카 복음 10장 3절과 유사한 내용을 담고 있는 마태오 복음 10장 16절에는 제자들을 상징하는 단어가 '양'('프로바타'; probata)이라고 되어 있는 반면에, 여기서는 '어린 양'('아렌'; aren; lamb)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루카 복음사가는 마태오 복음사가보다 이 단어를 통해 제자들의 '연약함'을 더 부각시키고 있다.
양은 목자의 보호가 없으면 이리에게 무방비 상태로 당할 수 밖에 없는 나약한 짐승이다. 또한 '양'이 착한 것의 상징이라면, '이리'는 악한 것의 상징이다.
그러니까 이 구절은 양과 같은 제자들이 이리 떼와 같은 세상의 악한 세력들과 영적 싸움을 수행해야 한다는 것을 나타낸다.
특히 '가운데로'에 해당하는 '엔 메소'(en meso; among)라는 전치사구는 이미 그 자체로 '가운데'라는 뜻이 있는 '메소'(meso)와 '~안에'라는 뜻의 전치사 '엔'(en; in)이 결합되어 '한가운데 속에'라는 뜻이다.
이것은 어린 양과 같이 연약하고 착한 예수님의 제자들이 선교하기 위해 험악하고 공격적인 세상 한가운데로 들어가지 않으면 안된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그러기에 복음 전파자들은 험하고 공격적인 세상 속에서 마땅히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처럼 온순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마태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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