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2년 12월 경주 불국사 다보탑 앞의 동산대종사. |
“처음에 우리 수좌가 문자를 여의고 공부에 들어간다. 사집(四集)ㆍ사교(四敎)ㆍ대교(大敎)까지 다 간경(看經)해 마치고는 사교입선(捨敎入禪)하는 것이다.”
평생 간화선을 참구하며 수행 정진한 동산스님이었지만 교학(敎學) 연찬을 도외시 하지 않았다. 교학 역시 수행의 중요한 일부분임을 강조하며 참선 수행에 매진했다. 출가 전에는 유학과 신학문을 익히고, 불문(佛門)에 든 후에는 각종 경전을 두루 이수하며 교학의 뿌리를 튼튼하게 내렸다. 불교경전은 물론 내외전(內外典)을 겸비했다는 점에서 동산스님의 수행의 근간에는 교학이 자리 잡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구한말 충북 단양에서 태어난 동산스님은 7세의 나이에 향숙(鄕塾)에 들어갔다. 서당에 해당하는 향숙에서 7년간 유가의 ‘사서삼경’은 물론 역사를 공부하며 학문을 연찬한 스님은 15세에 익명보통학교(지금의 단양초등학교)에 입학해 신학문을 접했다.
세속서 익힌 전통학문 신학문
출가 사문으로 공부한 교학은
새의 양 날개같이 중요한 역할
후학과 불자들에게는 경전내용
납자 지도할 때는 선지식 어록
이어 서울로 상경해 중동중학교를 거쳐 의학전문학교에 진학해 공부의 깊이를 더하고 의학까지 공부했다. 1912년 출가하기 전까지 15년간 외전(外典)을 익혔다. 이는 훗날 스님의 수행에 디딤돌이 되었다. 비록 출가사문이지만 세상의 흐름을 놓치지 않는 혜안(慧眼)을 갖는 중요한 전기가 되었다.
동산스님은 출가한 뒤에는 각종 경전 등 내전을 익히며 불법(佛法)을 연마했다. 1913년 출가본사인 범어사 강원에서 <능엄경(楞嚴經)>을 배우고, 같은 해 10월에는 백양사 운문선원에 주석하고 있던 은사 용성스님 회상에서 <전등록(傳燈錄)> <염송(拈頌)> <범망경(梵網經)> <사분율(四分律)>을 두루 수학했다.
이듬해에는 평안도 맹산 우두암(牛頭庵)을 찾아가 한암스님에게 2년간 <능엄경> <기신론(起信論)> <금강경(金剛經)> <원각경(圓覺經)> 등의 교학을 고루 배웠다. 스님의 내전 연찬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1916년 범어사로 돌아와 당대의 대강백(大講伯)으로 존경받고 있던 영명(永明)스님에게 2년간 대교과(大敎科)를 수학하면서 경학 공부의 깊이를 더했다.
범어사는 총림 위상에 걸 맞는 수행 교육기관을 두루 구비했다. 사진은 율학승가대학원 전경. 사진제공=석공스님 |
이 같은 사실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동산스님은 1912년 출가한 이후 1918년까지 5~6년간 교학을 집중적으로 배웠던 것이다. 은사 용성스님을 비롯해 한암스님과 영명스님 등 당대의 선지식들에게 불법(佛法)의 진수를 배웠으며, 이는 평생 수행정진의 초석(礎石)이자 밑거름이 되었다.
세속에 있을 때 익힌 전통학문과 신학문, 그리고 출가 사문이 되어 공부한 교학은 마치 새의 양 날개와 같이 동산스님의 수행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신구학문과 내외전을 겸비한 동산스님은 교학의 튼튼한 기초를 근간으로 참선 수행에 더욱 몰두할 수 있었던 것이다.
내외전을 두루 공부한 후 동산스님은 1919년 은사 용성스님이 3·1 독립운동으로 투옥되자, 상경하여 옥바라지를 했다. 1921년 용성스님 출옥 후에는 교학을 근간으로 ‘사교입선’ 수행에 몰두했다. 납자들의 수행에 대해 흔히 ‘사교입선(捨敎入禪)’을 강조한다. 사전적 의미는 ‘교를 버리고 선에 들어간다’는 것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동산스님은 보여주었다.
1953년 영도서 화엄경산림법회
동래 법륜사에서 화엄경 강설
화엄사상 전파에도 남다른 공
불교성전 용성어록 서문도 써
동산스님에게 교학은 깨달음의
걸림돌이 아니라 ‘디딤돌’
근원적인 공부에 있어 참선 수행의 수승함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교학을 완전히 버리거나 소홀히 여겨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불교의 이치를 교학적으로 익히는 것 역시 수행자의 중요한 과정이다. 동산스님의 수행 역시 ‘사교입선’이라고 할 수 있지만, 스님의 생애를 조명하면 신구학문, 내외전 등 교학을 충실하게 이수하고 참선 수행에 집중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간화선을 수행의 중심으로 삼았지만 후학과 불자들에게 법문이나 설법을 할 때 스님은 경전의 내용을 자주 인용했다. 납자들을 지도할 때에는 역대 선지식들의 어록(語錄)을 인용하며 가르침을 전했다. 스님은 특히 보조국사의 <간화결의론(看話決疑論)>을 탐독하고, <보제존자어록(普濟尊者語錄)>과 <몽산화상어록(蒙山和尙語錄)> 등을 자주 거론하며 지남(指南)을 제시했다.
또한 선종의 깨달음의 내용을 칠언(七言) 운문으로 설명한 영가스님의 <증도가(證道歌)>에 의거해 ‘무일물(無一物)’을 강조하며 수행정진의 중요성을 피력하기도 했다.
범어사승가대학 학인들의 발우공양. 사진제공=석공스님 |
동산스님의 설법 가운데는 각종 경전 등을 인용한 구절이 다수 있다. 다음은 동산스님 법문의 일부이다.
“경에 이르기를, ‘다만 모든 인연을 여의면 여여(如如)한 부처라’하였다. 우리의 보는 경계가 다름 아니다. 이름과 말과 뜻 이 세 가지 인연이 합하여 경계가 됨이요, 그 명언(名言)을 잊고 다 놓아버리면 나의 이 본래 통해 있는 성품이 환하여 천진면목(天眞面目)은 본래 그러한 것이다. 일체 경계에 걸림이 없고 재재처처(在在處處)에 자유자재(自由自在)하며 조금도 업을 짓지 않고 모든 부처님의 법을 행하게 되는 원상(圓相)의 유심경계(唯心境界)에 들게 된다.”
동산스님은 인도의 용수보살이 저술한 것으로 알려진 <대지도론(大智度論)>을 거론하며 설법을 하기도 했다.
“<대지도론>에 이르되, 땅은 견고하고 마음은 형질(形質)이 없다. 땅은 형상이 있어 견고하지만 마음은 본래 모양이 없고 바탕이 없는 것이다. 마음이 바탕 없고 모양이 없으니 무슨 걸림이 있겠는가! 이러므로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마음의 힘이 위대하여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고(故)로 산하대지(山河大地)를 흩어버리길 미진(微塵)과 같이 한다’고 하셨다. 마음이 힘이 커서 마음대로 한다는 것이다.”
동산스님의 법문 가운데 일부이다. “도무지 마음 밖에 한 물건도 없는 줄 알았을진대, 번뇌 습기가 무슨 물건이건대 그것을 다하고자 하느냐 말이다. 부처님의 경계는 법신을 깨달아 한 물건도 없으나 미(迷)한 중생경계는 자기의 계교하는 분별을 따라 있다(有), 없다(無),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니다(非有), 없는 것도 아니다(非無), 성문ㆍ연각ㆍ보살ㆍ불 등의 차별이 있어 지는 것이다.”
동산스님은 2년간 범어사 원효암에서 단식 정진한 이력이 있다. 이때 스님은 보조스님의 <간화결의론>을 암송했다. 전하는 말에 따르면 “스님께서는 <간화결의론>과 <원돈성불론>을 처음 입수하고 애지중지하셨다. 그 무렵 법문을 하실 때면 의례히 <간화결의론>의 내용을 말씀하셨다.”고 한다.
1998년 발간된 <동산대종사문집>에는 “(동산대종사의) 법문은 <신심명>과 영가 <증도가>를 가장 많이 말씀하셨다. 달마스님의 어록과 몽산법어도 자주 말씀하시고, 화두는 의례히 만법귀일(萬法歸一) 일귀하처(一歸何處)를 권하셨다.
세모와 정월 초하루에는 반드시 조사 스님들의 어록을 제창하시어 해이해지기 쉬운 납자들의 공부를 잡드리기에 애를 쓰셨다”는 내용이 나온다. 범어사 조실로 수좌들을 지도할 때 설봉스님에게 경전과 <선문촬요> 등으로 강설하게 했다고 한다.
선찰대본산(禪刹大本山)인 범어사는 간화선 수행의 근원도량임에 틀림없다. 근현대 역사만 살펴보더라도 경허스님이 주석한 이래 역대 선지식들이 참선 정진의 고삐를 놓지 않고, 지금까지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 이와함께 범어사는 <삼국유사>에 나오는 부산 지역 유일의 사찰로 의상대사가 창건한 화엄십찰(華嚴十刹) 가운데 하나이다.
즉 <화엄경>을 중심에 둔 화엄사상의 전통도 간직한 유서 깊은 도량이다. 동산스님의 스승인 용성스님이 1928년 3월28일 <화엄경> 12권을 완역했는데, 이는 훈민정음 창제 후 첫 <화엄경> 번역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동산스님은 1953년 9월 부산 영도 법화사에서 ‘화엄경산림법회’를 열었고, 동래 법륜사에서도 수차례나 <화엄경>을 강설하는 등 화엄사상 전파에도 남다른 공을 들였다.
1964년 서울 안양암 보살계 수계법회 기념사진. 앞에서 두 번째 줄 왼쪽에서 다섯 번째가 동산스님, 여섯 번째가 고암스님이다. |
동산스님은 <불교성전> <용성어록> 등 각종 문헌에도 서문을 직접 쓰기도 했다. <불교성전> 서문에서 동산스님은 “천차만별의 말씀과 팔만법장의 도를 모아 이를 이름하여 불교성전이라 하였다”면서 “미로의 중생이 오염과 청정을 모두 잊고 본래 차별이 없는 일심의 법계를 깨닫는 도는 이를 버리고 다시 무엇이 있겠는가”라고 강조했다.
이어 스님은 “위대하다. 불교성전이여. 이는 미로(迷路)의 지남이요, 혼구(昏衢)의 촛불이다. 그 누가 따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찬탄해 마지않는 바이다”라고 했다.
이같은 사실을 종합할 때 동산스님은 문자를 자유자재로 활용하며 가르침을 전했다. 문자나 교학에 얽매이지 않으면서, 내용을 완전히 소화해 대중을 인도하는 방편으로 사용했던 것이다. 참선수행이 근간이지만 교학 연찬과 역대 선지식들의 어록, 저서 등을 나침반으로 삼았다. 즉 동산스님에게 교학은 깨달음의 걸림돌이 아니라 주춧돌이며 디딤돌이었다.
조계종 종정을 지낸 월하스님은 “부지런히 정진을 행하시어 종지(宗旨)를 붙들고 교법(敎法)을 세우시니, 서리 내린 소나무의 맑은 지조는 종사(宗師)님의 행리처(行履處)이시고 물에 비친 달빛과 같은 텅 빈 마음은 큰스님의 정신”이라고 했다. 참선수행과 교학연찬을 통해 부처님의 가르침을 표현한 교법(敎法)을 세우기 위해 정진한 동산스님의 이력을 확인할 수 있다.
금정총림 범어사는 교학 전통을 온전히 계승해 교단을 책임질 동량(棟樑)을 양성하기 위해 강원(승가대학)을 운영하고 있다. 근대 범어사 강원의 역사는 1900년에 시작됐다. 혼해스님이 강백을 지냈다는 기록이 전하며, 청풍당, 금당, 청련암, 대성암 등 4곳을 강당(講堂)으로 지정했다고 한다.
1909년 10월에는 학당을 침계료(枕溪寮)로 옮겼으며, 1919년 삼일운동에 학인들이 연루되어 강제 폐교되는 아픔을 겪었다. 이후 명정지방학교로 이름을 바꿔 신구학문을 교육하다, 해방 후에는 금정중학교와 강원을 분리 운영해 왔다.
한국전쟁 등으로 한동안 공백기가 있었지만, 1966년 강원 졸업생을 배출하며 승가교육의 전당이 됐다. 현재는 용학스님이 강주(승가대학장)를 맡아 학인들을 지도하며 교학 연찬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
금정총림 범어사 주지 수불스님은 “동산대종사는 부처님 가르침을 바르게 배우고 익혀, 후학들에게 전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면서 “간화선 수행의 전통을 면면히 이어 오늘에 이르게 했고, 교학을 소홀히 하지 않아야 한다는 교훈도 전해 주었다”고 밝혔다.
동산대종사 친필 승찬대사의 신심명. |
■ 동산대종사와 ‘신심명’
동산스님은 매일 <신심명(信心銘)>을 독송했다고 한다. 선종의 제3대 조사인 승찬대사(僧粲大師, ?~606년)가 저술한 선어록인 신심명을 손수 사경한 동산스님은 하루도 빠짐없이 독송하며 수행 정진의 지침으로 삼았다.
‘문자로는 최고의 문장’으로 알려진 신심명은 중도(中道)의 가르침을 핵심으로 하고 있다. 구절마다 네 글자로 되어 있어 독송하기에 불편하지 않다. <신심명>은 총 147구(句), 584자(字)의 운문체(韻文體)로 된 글이다. 특히 신심명의 전체 내용 가운데 처음 네 구절이 요체로 여겨지고 있는데, 다음과 같다.
“至道無難(지도무난) 唯嫌揀擇(유혐간택) 但莫憎愛(단막증애) 洞然明白(통연명백)” 우리말로 옮기면 이렇다.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음이요. 오직 간택함을 꺼릴 뿐이니, 미워하고 사랑하지 않으면, 통연히 명백하리라”
■ 동산대종사 어록
“천상(天上)에 일월(日月)이요 암야(暗夜)에 명등(明燈)인 불타의 교단이 세상에 출현하야 국가에 복전(福田)되고 민중에 안목(眼目)되야 불일(佛日)이 증휘(增輝)하는 법륜(法輪)이 상전(常轉)하기를 바라마지 않노라”
“무슨 종교든지 일체 중생의 고원(苦源)을 낙원으로 인도하여 현 세계를 광명세계로 전화(轉化)함이 원리일 것이다. 그러면 고원과 낙원을 추궁(推窮)치 아니하며 아니된다.”
“부처님 원리는 일체가 유심(唯心)이다. 이 유심의 근본은 불(佛)도 아니요, 중생도 아니요, 물(物)도 아니요, 심(心)도 아니다.”
“이 마음은 본시 두렷하여 어디는 있고, 어디는 없고, 어디는 더 생각하고, 어디는 덜 생각하고 하는 치우침이 없고 본래 평등하여 피차(彼此)가 없는 것이다. 법(法)이 다른 것이 아니요, 사람이 다른 것이다. 참으로 바르고 철저한 신심(信心)으로 마음을 순종(順從)하여 법을 듣는 사람은 지혜를 이룰 것이고, 그 마음을 거슬려 순종치 않으면 지혜가 변하여 번뇌망상의 독해(毒害) 되는 것이다.”
“만약 터럭 끝만큼이라도 제하여 버릴 번뇌 습기가 남아 있다면, 이것은 아직도 마음을 뚜렷이 깨치지 못한 까닭이니, 이런 사람은 다만 다시 분발하여 크게 깨치기를 기약할 따름인 것이다.”
“성품을 보면 이것이 부처요, 성품을 보지 못하면 중생이니라. 만일 중생성을 여의고 따로 불성이 있다고 한다면, 부처는 지금 어느 곳에 있는가. 중생성이 곧 불성인 것이다. 성품 밖에 불(佛)이 없고, 불(佛)이 곧 이 성품이니 …”
[불교신문3098호/2015년4월18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