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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과 누룩의 사명(마 13:33)
우리는 지금까지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3장에서 말씀하신 천국에 대한 비유를 세 가지를 살펴보았습니다. 첫번째 비유는 천국은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 마음 밭에 받아들이는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씨뿌리는 비유입니다. 우리 마음 밭이 옥토가 되어야 뿌리가 내리고 싹이 나서 100배, 60배, 30배의 결실을 맺게 되는 복을 얻게 된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옥토는 어떤 마음 밭입니까?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라고 하였습니다. 깨닫는다는 것은 말씀을 삶의 현장에 그대로 실천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두번째 비유는 가라지 비유입니다. 주인이 좋은 씨를 제밭에 심었는데 심지도 않은 가라지와 함께 자라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교회는 바로 하나님 나라가 현재 실현되는 현장입니다. 현재의 하나님 나라는 완전하지 않습니다. 원수가 사람들이 잠잘 때 몰래 와서 가라지를 심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영적으로 깨어 있어야 하고 가라지로 인한 고통과 어려움이 있을 것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세번째 비유는 겨자씨 비유입니다. 겨자씨는 매우 작지만 그 안에 생명이 있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시작이 아주 미미하게 보입니다. 그러나 그 안에 예수의 생명이 있습니다. 세상이 어찌할 수 없는 생명이 그 안에 있어 자라간다는 것입니다. 하늘 나라는 이처럼 시작은 미약하지만 끝은 창대하게 되어진다는 것입니다.
작은 겨자씨가 자라서 큰 나무가 되어서 새들이 와서 안식하게 되는 것처럼 하나님 나라는 그렇게 놀라운 확장성을 갖고 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천국에 대한 네 번째 비유는 누룩비유입니다. 천국은 마치 한 여자가 가루 서 말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다는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누룩을 통해서 천국의 사명을 말씀하십니다. 이 비유에서 천국의 또 다른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1. 누룩은 세상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습니다.
겨자씨 비유에서는 지극히 작은 하나의 씨가 큰 나무로 자란다고 했는데 그것은 겨자씨 자체가 성장하는 것입니다. 누룩과 겨자씨의 비유는 아주 비슷합니다. 작은 씨를 심었는데 큰 나무가 되었다는 것과 밀가루 반죽에 지극히 작은 누룩을 넣어 반죽하였는데 크게 부풀었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차이점이 있습니다. 겨자씨는 다른 무엇을 변화시킨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성장한 반면, 누룩은 다른 것을 변화시켰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누룩의 비유의 요점입니다.
가루 서말은 보통 가정에서 빵만드는 데 쓰는 평균 분량입니다. 이것은 꽤 많은 양입니다. 주부가 맛있고 부푼 빵을 만들기 위해서는 미리 반죽을 조금 떼서 거기에 누룩을 넣어 보관해 둡니다. 다음에 새로 반죽할 때 그것을 넣고 반죽하는 것입니다. 큰 밀가루 반죽에다 누룩이 든 작은 반죽을 섞어 반죽해서 놓으면 시간이 지나면서 아주 부드럽고 곱게 부풀어 오릅니다. 이 부풀어 오른 반죽을 구워서 빵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면 누룩이 밀가루 반죽을 변화시켰다는 것과 천국은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천국은 누룩처럼 자기자신이 변화될 뿐 아니라 주위도, 세계도 변화시킨다는 것입니다. 이 변화시키는 힘은 마치 전염병과 같습니다. 누가복음 12:1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바리새인들의 누룩 곧 외식을 주의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외식주의는 누룩처럼 전염성이 강한 것이다. 그들의 외식이 신앙의 이름으로 다른 사람들을 다 외식주의, 형식주의로 바꾸어 버린다"고 하셨습니다.
고린도전서 5:6에 "너희가 자랑하는 것이 옳지 아니하도다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잘못된 생각들, 악한 생각들이 순식간에 온 세계를 변화시켜 버린다는 것을 누룩의 전염성에 비유해서 설명하셨습니다. 물론 이 두 가지 경우에는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었지만 누룩이 순식간에 강력하게 상대방 속에 스며들어 변화시킨다는 것입니다.
소량의 누룩이 밀가루 반죽 전부를 순식간에 변화시키는 것처럼, 천국을 소유한 소수의 그리스도인들은 그가 살고있는 세상을 변화시키고 새롭게 하는 능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자기가 변할 뿐만 아니라 자기가 살고있는 세상을 변화시킵니다. 고린도후서 5:17에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면 먼저 우리의 성품이 변하게 됩니다.
자기밖에 모르는 못된 성품, 사탄에게 미혹된 어둠의 성품들이 그리스도의 성품으로 변하기 시작합니다. 예수 믿고 성품과 성격이 변하지 않으면 다 가짜입니다. 옛날 모습 그대로 있다면 예수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예수 믿으면 반드시 성품이 변하기 시작합니다. 자기밖에 모르던 성격이 이웃을 배려하게 되고 아무리 급한 성격도 온유해집니다. 화를 못내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화를 절제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성령 하나님께서 내 안에서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가치관의 변화가 옵니다. 사물을 보는 시각이 달라집니다. 돈을 보는 시각, 성공을 보는 시각, 세상을 보는 시각이 달라집니다. 선과 악에 대한 기준이 달라집니다. 그는 새롭게 태어난 것입니다. 그는 이제 어렸을 때부터 익숙하던 습관이나 생활에 대해 새로운 가치관을 갖게 됩니다. 세속적인 가치관에서 떠나 성경의 가치관을 갖기 시작합니다.
예수님처럼 생각하고, 예수님과 같은 마음을 갖고 예수님과 같은 행동을 합니다. 진정한 사랑을시작했습니다. 거룩해지기 시작합니다.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천국을 진정으로 소유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회복하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세상을 변화시킵니다. 예수님께서 너희는 세상의 빛이요 소금이라 말씀하셨습니다.
부패한 세상, 불의와 부정이 만연한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들은 비록 소수이며 아무 힘없는 존재일지라도 그 자체가 소금입니다. 소금은 소리지르지 않습니다. 가만히 자기를 녹임으로 주위가 변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회 개혁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원리입니다.
옥스포드 대학에 성자처럼 산 한 여자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26세에 죽었는데 늘 기도하며 살았던 여자였습니다. 스튜어트 목사님의 글에 의하면, 이 여자가 지나가면 음담패설을 하던 대학생들이 침묵하고 주위사람들이 얼어붙을 정도로 경건해진다고 합니다. 이 여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지나가는 데도 얼마나 경건하던지, 얼마나 기도의 영이 크던지 그녀가 있기만 하여도 사람들이 감전된 것처럼 충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녀가 죽었을 때. 그녀의 주머니에서 수첩이 나왔는데 400여명의 선교사 이름이 적혀 있었다고 합니다. 그 여자를 무덤에 묻은 무덤지기는 자기가 수많은 사람을 무덤에 묻었지만 그녀를 묻을 때처럼 경건했던 적은 없었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녀는 남에게 충고하거나 설교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삶이 주위를 변화시킨 것입니다. 그의 삶이 많은 사람에게 영적인 충격을 준 것입니다. 그리스인들은 세상의 소금입니다.
이들은 누구에게 설교하기 위해서, 누구를 고치기 위해서 어떤 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의 생명의 그 안에 그를 지배하고 그분의 뜻앞에 순복하며 그분과 동행하는 삶을 살 때 그 영향력이 밖으로 퍼져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초대 교회의 소수의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이 소유한 복음의 능력으로 로마제국을 정복하였습니다. 종교개혁 당시에 몇몇 사람들의 마음속에 불탔던 그 복음은 유럽 전체를 변화시켰습니다.
주님의 뜻대로 살기 위해 신대륙을 찾아 떠났던 청교도들, 새로운 국가를 세우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주님을 잘 섬기기 위하여 떠났던 그들은 미국 사회를 변화시켰습니다. 우리는 오늘 우리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을 향하여 담대히 문을 열고 뛰어 들어가야 하는 이유를 누룩의 비유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사회에서 과연 누룩과 같은 역할을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아직은 아닙니다. 어쩌면 우리는 누룩의 흉내를 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이 땅에 교회가 그렇게 많고 그리스도인들이 그렇게 많지만 이 사회는 너무나 이념의 갈등, 편협한 자기 욕망에 사로잡혀 죄를 범하는 데 너무 잔인하고 비인간적인 특성이 드러나는 시대, 죄악이 관영하다고 말할 수 밖에 없는 시대, 노아방주 이전에 시대, 소돔과 고모라시대를 방불하는 시대가 되어 가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사회를 위해서 빛과 소금의 직분을 감당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탓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가 민족의 죄악을 끌어 안고 내 죄라고, 내가 온전히 사명을 감당하지 못해서 이런 결과를 가져왔다고 통곡했던 것처럼 이 세대를 끌어안고 우는 성도가 없어서 그런 것입니다. 다시말하면 천국의 본질에 대해 오해하였거나 진정한 누룩의 모습을 갖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나 혼자만 예수 믿고 천당 가면 되는 것이 아니요, 나만 축복받고 건강하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살고있는 이 세상을 변화시키지 않는다면 누룩의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아닌 내가 사랑하는 우리 가정, 우리 가족들, 우리 교회 하나만이라도, 나한 사람만이라도 세상에 나아가서 소금과 빛의 역할을 진정 감당한다면 분명히 우리가 살고있는 이 사회에 도전을 줄 것입니다. 희망을 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진 누룩과 같은 존재입니다. 여러분이 온전히 바로 서기만 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믿고 순종하기만 한다면 여러분의 가정이 변화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자녀들이 변화될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만나는 사람들이 주님의 향기를 접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진정으로 천국 누룩같은 사명을 감당하시는 성도가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누룩은 세상속에 들어가야 합니다.
이렇게 작은 누룩이 밀가루 반죽 전체를 변화시키고 부풀게 하는 그 원동력은 무엇입니까? 누룩속에 있는 좋은 곰팡이가 번식하는 능력때문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누룩의 능력이란 무엇을 의미합니까? 말씀의 능력이요 복음의 능력을 말합니다. 변화시키는 것은 우리들이 아닙니다. 우리 속에 계시는 예수님이십니다. 능력은 내가 아니라 내 안에 있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처음 교회나온 이야기를 하면 모두가 할 말이 많습니다. 그러나 처음에는 반대도 하고 핍박도 하고 그렇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내가 예수 그리스도안으로 들어왔습니다. 전에는 저 사람이 미쳤다고 비난했는데 내가 들어와 보니까 미친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정신을 차린 것입니다. 어둠에서 빛으로 나아온 것입니다.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것입니다. 이것이 누룩의 영향력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누구에게 영향력을 미치고 있습니까?
큰 소리치지 않아도 내 삶과 인격을 보면서 저들에게 영향력을 끼쳐야 합니다. 그런데 말은 그럴싸 한대 실제로는 그렇지못하는 껍데기 그리스도인들이 많습니다. 내가 성공하고, 내가 건강하고, 내가 축복받기만 바라는 사람들은 교회안에 아무리 많아도 세상은 변화되지 않습니다. 교회를 다니지만 여전히 이기적으로 자기밖에 모르는 그리스도인들, 자기만 구원받고 자기만 복받으면 된다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다면 어떻게 세상을 변화되겠습니까?
누룩은 반죽된 밀가루에 접촉이 안되면 소용이 없습니다. 누룩이 그대로 가만있으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반죽된 밀가루 속에 스며 들어가 접촉이 되어야만 그 누룩은 사명을 다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영향력입니다. 우리가 교회 안에서 "할렐루야, 아멘" 하고 아무리 외친들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교회는 세상속으로 들어가서 부딪치고 만나고 깨어지고 부비고 나누어 주고 서로 공감대를 가져야 합니다. 물론 쉽지는 않습니다.
이런 과정에서는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고 손해를 봅니다. 이런 과정에서는 고통당하고 상처받으며, 희생해야 하기때문에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세상을 변화시키는 일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 내 안에 있는 복음의 능력이 합니다. 그러면 그 복음의 능력과 예수님의 삶은 어떤 것입니까?
예수님이 세상의 빛이 된 것은 예수님 자신을 나타내고 권세를 자랑해서 찬란한 빛을 발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취하셨습니다. 섬김을 받는 자가 아니라 도리어 섬기는 자가 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내어 놓으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자기를 다 내어놓으시고 죽음으로 사랑을 증거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때 놀라운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3일 후에 무덤 문이 열리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절망에 빠져있던 제자들에게 부활을 증거하셨습니다. 그러자 교회가 일어났습니다. 120명, 3천명, 5천명, 허다한 무리들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겠다고 변화되기 시작하였습니다. 결국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짐으로 진정으로 주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 누룩처럼 영향력이 나타내며 그속에 생명의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왜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습니까? 내가 여전히 살아있어서 그런 것입니다. 내속에 있는 죄성을 십자가에 못박고 오로지 주님이 내안에 살아계시면 변화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다시말하면 내가 죽어야 예수가 삽니다. 거기에 의가 나타납니다. 나를 희생하고 내가 손해보고 내가 아픔을 겪지만 거기에 생명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이것이 없으면 울리는 꽹과리입니다. 소리만 쳤지 변화는 없습니다. 이러한 삶의 유형이 누룩의 사명인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능력인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태도를 바꾸어야 합니다. 모험적이고 도전적이어야 합니다. 상식을 벗어나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런 일들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너무나 많은 상식과 합리성 속에 살았고 너무나 많은 것을 타협하고 살아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환경인 세상이 변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세상을 변화시키려면 지금까지 살아왔던 우리의 태도를 바꾸어야 합니다. 내 육신의 생각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을 선택하라는 것입니다.
헌금하는 자세, 시간을 바치는 자세, 이웃을 대하는 자세, 섬기는 자세에서 구체적으로 변혁이 일어나지 않는 한 누룩이 될 수 없습니다. 복음은 결단을 요구합니다. 복음은 행동을 요구합니다. 누룩이 있으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것을 반죽된 밀가루 속에 집어넣어야 합니다. 섞여야만 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직업을 통해서든지, 자기의 삶을 통해서든지 무엇인가 대담한 결단이 없는 한, 안일한 생각을 하고 있는 한 결코 세상은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3. 누룩은 조용히 섬김으로 퍼집니다
섬김은 사랑의 표현입니다. 누룩은 밀가루 속에 들어가 자기를 다 녹여 전체를 변화시킵니다. 이는 겨자씨 비유와 아주 비슷합니다. 변화는 눈에 보이지 않게 일어납니다. 지극히 작은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한 사람이 소리없이 그가 있는 현장에서 소리없이 섬김의 삶을 삽니다. 그들의 연약함을 돌보아 주고 자기가 가진 것으로 나누어 주기도 합니다. 그들의 때묻은 얼굴을 닦아 주고 발을 씻어 주고 옷을 입혀 주는 일들을 계속합니다.
그때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사랑은 나누어 주는 것입니다. 누룩의 삶은 소리치고 선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누룩은 조용히 소리없이 섬김으로 변화를 일으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하는 일을 잘 광고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교회의 문제와 죄악은 세상이 광고를 해줍니다. 세상이 교회를 책망합니다. 교회는 크게 상처를 받습니다. 그러나 저는 거기에도 하나님의 뜻이 있다고 믿습니다. 그런 세상의 책망을 듣고 교회가 깨어나는 것입니다.
요나가 하나님의 명령을 거스리고 다시스로 배를 타고 도망갑니다. 아무도 모르게 배밑창에 들어가 잠을 잡니다. 요나의 깊은 잠, 평안하다고 느꼈을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매우 불안한 가운데 잠을 청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때에 믿지않는 선장에 찾아옵니다. 그리고 잠자는 요나를 깨우며 이렇게 말합니다. 요나서 1:6, "선장이 그에게 가서 이르되 자는 자여 어찌함이냐 일어나서 네 하나님께 구하라 혹시 하나님이 우리를 생각하사 망하지 아니하게 하시리라 하니라"
바로 그렇습니다. 죄악의 깊은 잠에서 우리를 깨우기 위해서 교회의 수치를 메스컴에서 대서특필하고 교회를 책망하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잠에서 깨어나야 합니다.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며 하나님앞에 엎드려 기도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우리 현장을 변화시키는 누룩과 같은 사명성도의 길입니다. 예수님은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요 소금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우리에게 사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누룩은 누룩자신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밀가루반죽인 세상을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살고있는 삶의 현장을 위해 보내어진 사람들인 것입니다. 우리는 겨자씨만할 정도로 작고 미미하지만 우리 속에 예수생명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통해서 생명의 역사가 나타나야 합니다. 내 속에 있는 생명이 싹을 내고 꽃을 피려면 반드시 껍데기인 내가 깨어지고 부서져야 합니다. 그럴 때 생명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천국을 소유하고 변화된 은혜의 삶을 살고 있다면, 우리는 조용히 세상을 향해 눈을 떠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앞에 모험과 결단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세상이 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우리에게 누룩의 사명이 있습니다. 천국은 바로 이렇게 누룩의 사명을 다하는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여러분은 지금까지 어떤 누룩의 삶을 사셨습니까? 누룩은 선한 영향력으로 세상을 변화시킵니다. 누룩은 세상을 변화시킬 능력이 있습니다. 그 능력은 내 안에 계신 예수생명의 능력입니다. 말씀의 능력입니다. 그리고 누룩의 사명은 내가 만나는 이웃에게, 나의 삶의 현장에서 섬김으로 예수의 생명을 가득 채우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천국백성으로 지금 누룩의 사명을 다하고 있습니까? 누룩은 자기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누룩은 세상을 위해 구원받은 것입니다. 나로 인해 내 가정이 변하고 내 직장이 변하고 나를 만나는 사람들이 변화되는 누룩의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여 예수생명으로 가득 채우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