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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문화 속 교회 이야기] 인사말
박해시대에 전파된 ‘찬미예수’... 인사 때마다 주님 기억하게 해
사람과 사람이 만나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인사’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서로 만나거나 헤어질 때는 인사를 하면서 서로의 안부를 확인한다. 교회는 오랜 역사 속에서, 만남의 첫 단추이자 마지막 단추인 이 인사에도 영향을 미쳤다.
특히 교회의 역사가 긴 서양 국가 중 많은 수가 인사말을 통해 하느님의 축복을 기원했다. 그 대표적인 말이 ‘굿바이’(Goodbye)다. 어린 아이들도 ‘빠이빠이’(Bye-bye)라는 인사를 사용할 정도로 우리에게도 친숙한 말이다.
‘굿바이’의 ‘굿(good)’은 ‘좋은’이라는 의미로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 하느님(God)이란 말에서 왔다. ‘굿바이’가 하느님이 곁에서 축복해주시기를 비는 고대영어(God be by ye 또는 God by ye)가 변형된 것이기 때문이다. ‘굿모닝’(Good-morning), ‘굿이브닝’(Good-evening), ‘굿나잇’(Good-night)도 같은 맥락이다.
스페인어에서 헤어질 때 인사말인 아디오스(Adios), 바이아 콘 디오스(Vaya con Dios)도 ‘하느님께로’, ‘하느님과 함께 가라’라는 의미다. 프랑스어에서 긴 이별을 할 때 사용하는 인사말 ‘아듀’(Adieu)도 ‘하느님 앞에서’라는 뜻이다. 다시 말해 다시 만나기 어려운 이에게 ‘하느님 앞에서 다시 만나자’고 기약하는 말이다.
1984년 방한 당시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우리나라를 두루 방문하고 신자들을 만날 때마다 우리 교회에서 탄생한 인사말로 인사했다. 바로 ‘찬미예수’다. ‘예수를 찬미합시다’(laudate Jesum)를 줄인 인사말 ‘찬미예수’는 박해시대에 탄생해 이어오는 우리 신자들 고유의 인사다.
‘찬미예수’가 정확히 언제부터 사용됐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1862년 미리내에서 사목하던 파리외방전교회 칼레 신부가 작성한 서한에 따르면, 선교사들은 ‘찬미예수’라는 인사를 장려하고 이를 통해 잠벌을 일부 면해주는 ‘한대사’를 얻을 수 있게 했다.
신앙선조들은 ‘찬미예수’라 인사하고 ‘아멘’이라 응답하는 인사말을 사용했다. 신자들은 신분도 성별도 가리지 않고 이 인사말을 사용하면서 우리가 본받아 따르고 찬양해야 할 분이 누구인지 늘 기억했던 것이다.
[우리말 바루기] 고해성사 (1)
고백? 고해?… 2000년부터 ‘고해성사’
가톨릭 신자라면 누구나 한 번쯤 이 앞에서 주저하거나 고민하지 않았던 사람은 없을 듯합니다. 그 갈등이 너무나 커서 아예 교회와 멀어지는 경우도 심심찮게 볼 수 있습니다. 짐작하셨겠지만, 바로 가톨릭 신자가 되면서부터 그리스도인의 정체성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고해성사를 보는 고해소입니다.
텔레비전이나 외신 등을 통해 수시로 고해소에서 고해성사는 보시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모습을 접하며 예전에 비해 조금은 더 친숙해진 듯하지만 여전히 고해성사에 따르는 불편한(?) 생각이나 기분은 남아 있는 게 사실입니다.
고해성사는 가톨릭교회가 지니고 있는 ‘칠성사(七聖事)’ 가운데 하나입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성사는 하느님의 은총을 받는 도구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영적 양식을 얻을 수 있는 길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고해성사 역시 주님 은총을 받을 수 있는 소중한 통로가 되어야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한 듯합니다. 적잖은 그리스도인들이 이토록 어려워하는 고해성사는 초세기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박해 가운데서 생겨난 배교자들을 다시 공동체로 받아들이는 문제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여기에서 ‘공적 참회’가 생겨났고 시간이 흐르면서 아일랜드 영국에서 ‘사적 참회’로 발전하여 오늘날의 고해성사 형식이 되었습니다. 고해성사가 지닌 매력은 죄로 인해 끊어진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우리 눈으로 볼 수 있고 또 우리가 속해 있는 ‘교회’가 이어준다는 데에 있습니다.
이러한 성사를 두고 지금도 신자들 사이에서는 ‘고해성사’인지 ‘고백성사’인지 헷갈리는 분들이 적지 않으신 듯합니다. 그럴 만도 합니다. 몇 번 그 이름이 바뀌었기 때문에 신앙생활을 해온 연륜에 따라 기억하는 용어가 조금씩 다른 것입니다. 과거 한국교회는 이 성사의 이름을 줄곧 고해성사로 번역해 사용해왔습니다. 그러다가 1967년 고백성사로 바꿔 쓰기 시작했습니다. 2000년 천주교 용어집이 나오면서 고해라는 말이 이 성사의 본뜻이 더 가깝다는 의견에 따라 다시 고해성사로 환원돼 오늘날까지 쓰이고 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자비의 희년’을 발표하면서 “죄를 고백할 줄 아는 것은 하느님의 은사, 선물, 하느님의 작품”이라며 두려워하지 말고 고해소에 들어가라고 재촉하고 있습니다. [가톨릭신문, 2016년 9월 11일, 서상덕 기자]
[우리말 바루기] 고해성사 (2)
소원해진 하느님과 관계 회복하는 성사
가톨릭 신자들이 고해소 앞에서 주춤대는 것은 어쩌면 인간으로서 당연한 모습일지 모르겠습니다. 어떠한 형태로든 자신의 부끄러운 모습을 드러내는 일은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고해성사는 자신이 행한 일에 대한 성찰이 전제되어 있는 행위입니다.
고해성사 경험이 있는 신자라면 이러한 성찰이 이뤄지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뇌와 실천에 옮기기까지 얼마나 큰 용기가 필요했는지 체험했을 것입니다. 결국 끊어지거나 멀어진 하느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싶다는 열망이 고해소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용기를 불러일으키는 것입니다. 잘 알고 있는 대로 고해성사는 5단계로 이뤄집니다. 첫 단계인 성찰로 시작해, 고해성사를 받을 신자가 해야 할 의무 중 가장 중요한 조건이며 성사의 핵심인 통회로 이어집니다. 통회에 이어 다시는 그런 죄를 짓지 않겠다는 다짐이 자연스럽게 따라오게 됩니다. 그러나 결심할 때 조심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바로 교만과 자포자기입니다. 진심으로 뉘우치고 결심했다 할지라도 다시 죄의 유혹에 빠질 수 있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러기에 결심에서 가장 중요한 자세는 자신의 힘으로만이 아닌 끊임없이 주님의 도우심을 청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신자들에게 부족한 것이 바로 성찰과 통회와 결심입니다. 잘 준비된 성사란 바로 이 세 가지를 잘 준비하는 것입니다. 세 단계가 잘 이뤄졌을 때 이어지는 단계가 고백입니다. 고백하는 대상은 사제이지만 하느님께 하듯 솔직하게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내보여야 합니다. 고백할 때 주의해야 할 점은 남의 잘못을 함께 고발하는 태도나, 변명하는 자세, 추상적인 말로 두루뭉술하게 넘어가려는 모습은 피해야 합니다. 왜냐면 고해성사는 오로지 자신의 잘못을 하느님 앞에 고백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국교회는 ‘부활판공성사를 받지 못한 신자가 성탄판공이나 일 년 중 어느 때라도 고해성사를 받았다면 판공성사를 받은 것으로 인정한다’는 「한국 천주교 사목지침서」 제90조 2항에 대한 주교회의의 해석을 근거로 1년에 한 번만 고해성사를 보면 교회법상 의무를 다한 것으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고해성사는 신앙생활을 하는 데 장애가 아니라 더 나은 삶으로 넘어갈 수 있도록 돕는 다리라는 생각을 갖고 하느님께 기쁘게 나아갈 수 있길 바랍니다. 그 다리를 건널 용기는 바로 우리들의 몫입니다
[우리말 바루기] 교중미사
주일 · 의무 축일에 전체 본당 신자 위해 봉헌
세례를 받고 처음 신앙생활을 시작한 신자들에게 미사는 가장 기다려지는 시간이면서 궁금증이 이는 장이기도 합니다.
겉으로 보기엔 별반 차이를 알 수 없는 미사인데 감사미사, 위령미사, 추모미사, ‘산 이를 위한 미사’, ‘죽은 이를 위한 미사’, 평일미사, 특전미사, 주일미사, 시국미사 등 이름도 다양합니다. 내용과 형식에 따라 다양한 미사가 존재하니 그럴 만도 합니다. 다른 미사들은 그런 대로 알겠는데, “교중미사 마치고 보자”는 대부님의 말에 무슨 큰 잘못을 들킨 것처럼 낯이 달아오르기도 합니다.
간간이 듣게 되는 교중(敎中)미사는, 교구장 주교와 본당 주임사제가 모든 주일과 의무적 축일에 미사 예물을 받지 않고 자신에게 맡겨진 신자들을 위해 봉헌해야 하는 미사를 말합니다. 라틴어로 ‘Missa pro populo’(백성을 위한 미사)라 불리며 전적으로 전체 본당 신자를 위한 지향으로 봉헌되는 것입니다.
의무를 가진 사제는 정당한 사유가 없는 한 당일에 해당 본당에서 교중미사를 봉헌해야 합니다. 교중미사는 직책상의 의무이기 때문에 교구장 서리, 교구장 대행, 본당의 임시 주임사제에게도 의무가 있습니다. 그러나 교구장이 아닌 주교와 부주교, 보좌주교 및 부교구장과 교구청 근무 사제들, 본당의 보좌신부들, 신학교 교수신부들, 군종사제들에게는 의무가 없습니다.(1951년 4월 23일자 교황청 추기원의회 훈령).
다른 미사들과 가장 눈에 띄는 차이는 교중미사 때는 미사예물을 받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다른 미사 때에는 ‘산 이를 위한 미사’, ‘죽은 이를 위한 미사’라고 해서 특별한 지향을 요청하는 미사예물을 봉헌할 수 있지만 교중미사에는 미사예물이 없습니다.
한국교회에서는 포교지방의 특전을 얻어 본당사목에 종사하는 본당신부들은 1년 중 11번의 대축일에만 미사예물 없이 교중미사를 봉헌할 의무를 지닙니다. 즉 주님 공현 대축일, 성 요셉 대축일(3월 19일), 예수 부활 대축일, 주님 승천 대축일, 성령 강림 대축일, 그리스도의 성체성혈 대축일, 성 베드로와 바오로 사도 대축일(6월 29일), 성모 승천 대축일(8월 15일), 모든 성인 대축일(11월 1일), 원죄 없이 잉태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12월 8일), 예수 성탄 대축일(12월 25일)에 교중미사를 지내야 합니다.
[우리말 바루기] 냉담교우
잠시 쉬는건데 왜 ‘냉담자’라고 하나요
신자들의 ‘냉담’ 문제는 교회의 비전을 얘기하는 자리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중요한 주제로 부각된 지 이미 오래입니다.
근래 들어 프란치스코 교황을 필두로 전 교회가 새로운 복음화의 기치 아래 교회 쇄신을 논의하고 있는 상황에서도 ‘냉담’을 둘러싼 문제는 반드시 풀고 가야 할 요소로 끊임없이 지적되고 있습니다.
얼마 전까지 가톨릭교회 안에서 자주 쓰였던 ‘냉담자(冷淡者)’라는 단어의 사전적 의미는 ‘사물에 흥미나 관심을 보이지 않는 사람’입니다. 이 말이 가톨릭과 성공회 등 몇몇 종교에서는 ‘교회에 장기간 나가지 않은 신자’를 지칭하는 말로 쓰이게 된 것입니다.
가톨릭교회에서는 1년에 두 번 부활 대축일과 성탄 대축일을 앞두고 의무적으로 고해성사를 받도록 하고 있습니다. 이를 판공성사라고 합니다. 최근 3년 이내에 판공성사를 받지 않았을 때, 다시 말해 고해성사를 6회 이상 빠졌을 때 ‘냉담’하는 신자로 분류하게 됩니다.
이에 비해 성공회에서는 미사 참석률이 1년에 절반 미만일 경우에 ‘냉담’하는 것으로 분류하기도 합니다. ‘냉담자’라는 어감이 싫어 가톨릭교회에서는 ‘쉬는 교우’라고 부른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주위에는 신앙이 차갑게 식어버린 것이 아니라 마음도 의지도 있지만 어쩔 수 없는 개인 사정으로 신앙생활을 못 하는 이들도 적지 않은 것 같습니다. 요즘 같이 경제가 어려운 시기에는 생활고에 시달려 신앙생활을 할 여유가 없는 사람도 있고, 하느님을 느낄 수 없어 신앙에 회의를 느끼고 교회에 발길을 끊은 사람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어쨌든 적잖은 이들이 형제의 울타리를 벗어난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들을 자신과 다른 사람으로 낙인찍기보다는 하느님 안에 한 형제로 받아들이려는 노력이 필요한 것으로 보입니다.
주교회의 용어위원회는 이러한 뜻을 고려해 지난 2009년 ‘냉담자’와 ‘쉬는교우’로 부르던 쉬는 신자들을 ‘냉담교우’로 순화해서 사용하기로 했습니다. ‘냉담교우’들이 오랜 쉼에서 깨어나 다시 하느님께로 나아갈 수 있도록 사랑을 보여주는 것이 참다운 형제애가 아닐까요.
[우리말 바루기] ‘야훼’와 ‘여호와’ (상)
하느님의 이름은?
신자들 가운데 ‘여호와의 증인’이라고 불리는 이들과 곤혹스러운 만남을 가져본 경험이 있는 분들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알고 지내던 교우가 ‘여호와의 증인’이 됐다는 소식을 접할 땐 당혹감마저 드는 게 사실입니다.
그런데 가톨릭교회에서 말하는 ‘야훼’와 ‘여호와의 증인’을 비롯한 많은 개신교에서 쓰고 있는 ‘여호와’가 본디 같은 이름이라는 사실을 아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이렇게 각기 다르게 부르고 있는 호칭은 구약성경에 나오는 하느님 이름입니다. 다른 이의 이름을 틀리게 말하는 것은 실례입니다. 하물며 지존하신 하느님 이름을 달리 부르는 것은 큰 결례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러한 사태의 배경에는 긴 역사와 아직까지도 완전히 풀리지 않는 어려운 문제가 들어있습니다. 오래전 이스라엘 사람들은 22자로 된 알파벳을 썼습니다. 이스라엘인들이 사용한 히브리말 알파벳은, 영어 알파벳과 달리 자음으로만 되어 있습니다. 한 예로 ‘정의(正義)’에 해당하는 히브리말은 ‘ㅊㄷㅋ’식으로만 썼던 것입니다. 또 우리와는 달리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썼습니다. 그리고 읽을 때는 이 자음들에 ‘ㅓ, ㅏ, ㅏ’ 모음을 붙여 ‘처다카’라고 발음했습니다. 구약성경 전체가 이런 식으로 기록되었습니다. 구약의 히브리말을 바탕으로 해서 만든 현대 히브리말도 같은 방식으로 쓰고 읽습니다.
말의 표기법이나 발음법은 시대가 흐르면서 변하기 마련입니다. 마치 오늘날 우리말에 있어 표준어가 시대에 따라 변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역사가 오랜 히브리말도 마찬가지입니다. 기원전 6세기 후반, 메소포타미아에 들어선 페르시아 제국과 더불어 히브리말과 비슷한 아람말이 전 근동지방의 관용어가 됩니다. 그래서 (제2경전을 빼고) 히브리말로 쓰인 성경에까지 아람말이 들어갑니다.(에즈 4,8-6,12와 다니 2,4-7,28 등) 이미 예수님 시대에는 유다인들이 아람말의 유다식 사투리를 일상어로 쓰고 있었습니다.
성경은 계속 히브리말로 봉독됐지만, 교육을 받지 않은 일반대중은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이 때문에 회당에서 성경이 히브리말로 봉독되면, 곧바로 아람말로 통역을 했습니다. 이런 역사적 배경이 하느님을 부르는 호칭에도 영향을 끼치게 된 것입니다. [가톨릭신문, 2016년 4월 24일, 서상덕 기자]
[우리말 바루기] ‘야훼’와 ‘여호와’ (하)
‘야훼’ 대신 ‘주님’으로 표현
기원전 587년 예루살렘이 함락돼 많은 이들이 바빌론 땅으로 끌려가면서, 유다인들은 점점 하느님 이름을 발음하지 않게 됐습니다. 하느님 뜻을 거역하고, 큰 불행을 불러들인 것이 자신들이라는 자책감 등으로 감히 하느님 이름을 부르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에 6000번 넘게 나오는 하느님 이름을 (때로는 우물우물 넘어가거나) ‘아도나이(나의 주님)’라고 읽었습니다.
750~1000년경 사이 유다인 성경 전문가들은 큰 작업을 벌입니다. 히브리말 모음 체계를 확립해 자음으로만 쓰인 성경 본문에 모음 부호를 붙이는 일이었습니다. 성경을 정확히 봉독하려는 뜻에서였습니다. 히브리어를 보면 아래위 작은 점들이 있는데 모음 표시입니다. 모음 부호를 어디에 찍느냐에 따라 야훼(Yahweh)로 읽히기도 하고 여호와(Jehovah)가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오래전 조상들이 쓰던 옛 히브리말 발음과 당시 발음 사이에는 적잖은 차이가 있었습니다. 하느님 이름은 네 개의 자음 ‘YHWH’으로 되어 있는데, 성경학자들은 사람들이 성경을 봉독할 때 혹시라도 하느님 이름을 부르는 실수를 저지르지 않을까 염려해서 이 이름에다 ‘아도나이’ 또는 ‘엘로힘(하느님)’의 모음들을 붙였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유다인 성경학자들이 모음을 붙인 히브리말 성경을 읽고 하느님 이름이 ‘여호봐(Jehovah)’라고 믿게 됐습니다. 이 발음을 널리 퍼뜨린 사람은 가톨릭 사제였습니다. 1518년에 레오 10세 교황의 고해신부였던 갈라티누스(Petrus Galatinus)가 처음으로 하느님 이름의 발음을 라틴어식 발음 ‘여호와’로 제안했습니다. 그러나 이 발음도 오해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갈라티누스는 자음으로만 쓰인 히브리어 성경 본문에 모음을 붙인 ‘맛소라 학파’가 붙여놓은 모음을 하느님 이름의 발음으로 오해해 ‘여호와’로 음역했던 것입니다.
본래 발음에 가장 가까운 것은 ‘야훼’입니다. 야훼는 유다인들이 자신들의 말로 ‘하느님’을 부르는 소리인 것입니다. 서양에서는 하느님 이름을 ‘여호봐’나 ‘여호와’로 발음하지 않습니다.
한국 주교회의는 지난 2008년 ‘야훼’라는 말 대신 ‘주님’이란 표현을 쓰기로 했습니다. ‘거룩한 네 글자’로 표현되는 하느님 이름을 ‘전례에서 사용하지 말 것’을 권고한 교황청 지침을 따른 것입니다. 유다인의 발음이 아니라 자국의 발음으로 ‘하느님’을 부르자는 것이 교회의 뜻입니다.
[우리말 바루기] ‘가톨릭’ 교회 / ‘카톨릭’ 교회
말은 그 말을 쓰는 이의 정신을 담고 있다. 말에서는 그 말을 쓰는 이들의 정체성이 드러난다. 이 때문에 말을 통해 하나가 되기도 하고 갈라지기도 한다.
그리스도인의 삶도 말과 떼려야 뗄 수가 없는 관계에 있다. 그리스도인이 쓰는 말은 하느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을 이어주는 소통의 도구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말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그리스도인 생활에 있어 참다운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나기 위한 전제이기도 하다.
믿는다는 행위는 단순히 표현의 문제만이 아니다. 무엇을, 어떻게 믿느냐에 따라 믿음의 방향도, 깊이도 달라진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비롯한 초월적인 존재를 믿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결국 함께 쓰는 말을 어떻게 공유하느냐에 따라 다양한 모습을 지니게 된다.
가톨릭신문은 이 땅의 그리스도인이 쓰는 말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도움으로써 신앙에 깊이를 더할 수 있는 기획을 통해 독자들의 신앙생활에 도움이 되고자 한다.
■ 왜 ‘가톨릭’이라고 할까요 (상)
우리가 믿는 종교를 표현할 때 보통 ‘천주교’ ‘가톨릭’이라고 합니다. 전에는 프로테스탄트(개신교)에 대비해 ‘구교’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천주교의 영어 표기가 「catholic」이니 ‘카톨릭’으로 불러야 하는 게 아니냐는 말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일반적으로 쓰는 ‘가톨릭’이라는 말은 ‘보편적’이라는 뜻을 지닌 그리스말 καθολικοs(catholicos)에서 유래한 라틴어라는데 답이 숨겨져 있습니다. 외래어 표기법의 최우선 기준은 현지 발음에 최대한 가깝게 쓰는 것입니다. 이에 따라 「catholic」의 라틴어 발음에 가까운 ‘가톨릭’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보편’(普遍)은 ‘특수’(特殊)와 반대되는 말로 ‘모든 것에 두루 미침’을 뜻합니다. ‘보편적’이라는 뜻을 지닌 ‘가톨릭’이란 말을 처음 사용한 이는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 성인입니다. 안티오키아는 소아시아 남쪽, 오늘날 시리아 국경과 가까운 터키 남부 지중해 연안에 있는 도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제자들이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게 된 곳도 안티오키아였습니다.(사도 11,26 참조) [가톨릭신문, 2016년 1월 24일, 서상덕 기자]
[우리말 바루기] 왜 ‘가톨릭’이라고 할까요 (하)
가톨릭, 보편적이고 참된 교회 의미
앞서 ‘가톨릭’이란 말이 초세기 교회에서 예루살렘, 로마, 알렉산드리아 등과 함께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가 있던 중요한 도시 안티오키아 교회의 주교 이냐시오 성인에게서 비롯된 것임을 말씀드렸습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 곁으로 돌아가신 뒤 기원 후 50년쯤 안티오키아에서 태어난 이냐시오 성인은 주님의 기쁜 소식을 전하다 98-117년 사이 로마에서 순교하게 됩니다. 이냐시오 성인이 순교의 월계관을 받으러 로마로 가는 도중 소아시아 지방 7개 교회 가운데 하나인 스미르나 교회에 보낸 편지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느님 아버지를 따르시듯이 여러분은 주교를 따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는 곳에 ‘가톨릭 교회’가 있듯이, 주교가 있는 곳에 교회 공동체들도 있습니다.”
이후 ‘가톨릭’이란 표현은 그리스도인 공동체와 관련해 널리 쓰이게 됩니다. ‘보편적’이란 뜻 외에 ‘참된’ ‘하나이고 유일한’ 같은 의미들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가톨릭 교회라고 하면 보편적인 교회, 참된 교회, 하나이고 유일한 교회 등으로 받아들여지게 된 것입니다.
‘가톨릭’이란 말이 널리 퍼져서 사용되었음은 니케아 신경의 “하나이고 거룩하고 보편되며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교회”라는 표현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공번된, 보편된’은 성 빈첸시오가 말했듯이 “모든 사람이 모든 시대에 모든 장소에서 믿어 온 것”을 의미합니다.
1054년 그리스도교가 동방교회(정교회)와 서방교회로 갈라지면서 두 교회에서 모두 ‘가톨릭’이란 표현을 사용하다보니 구별이 쉽지 않았습니다. 이에 따른 혼란을 피하고자 서방교회를 ‘로마교회’ 또는 ‘로마 가톨릭’이라고 부르게 된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천주교가 전래된 이후 서학(西學), 천주학(天主學), 천주교(天主敎), 가톨릭교 등으로 혼용해 부르다가 주교회의에서 ‘천주교 또는 가톨릭교’를 공인하여 「가톨릭 지도서」(Directorium, 1932년)에 규정함으로써 공식명칭이 되었습니다.
숫자 1(하느님의 수)
곡식이 익어 노랗게 된 너른 들판에 있는 죽산성지의 저녁은 황혼이 아름답습니다. 비록 많은 논에는 벼들이 이미 베어져, 수확 뒤의 처량한 모습들을 보이고 있지만, 그래도 아름답습니다. 옥잠화와 구절초의 가냘픈 꽃받침들과 샛노란 소국과 씀바귀꽃, 가지각색의 빛깔을 지닌 코스모스, 보랏빛 쑥부쟁이, 붉은빛의 백일홍과 맨드라미와 나팔꽃, 그리고 예전에는 태양을 닮아 화려했겠지만 지금은 까맣게 익은 씨만 남아 무겁게 고개를 숙인 해바라기들, 그 밖에 별처럼 생기거나 새부리나 포도송이처럼 생긴 갖가지 다른 꽃들이 노랗게 익어 수확을 기다리는 호박들 사이에서 벼들과 함께 죽어갑니다. 이미 꽃잎들에 내리어 마지막 빛을 받아 반짝이는 이슬은 금가루를 뿌려 놓은 듯이 반짝입니다. 여러 빛깔의 머플러로 체온을 감싼 순례자들은 잔디밭에 머리를 내미는 하얀 메밀꽃, 분홍색 분꽃, 샐비어, 보랏빛 비비추꽃 같아 보입니다. 이제는 불타는 듯한 해넘이의 마지막 붉은 빛에 이어 황혼의 보랏빛 감도는 어두움만이 세상을 채웁니다. 장엄한 광경은 참으로 영원합니다. 그리고 그 장엄함의 음표 사이에 잠시 쉼표를 찍고 사라지는 우리의 삶은 덧없습니다. 그러나 비록 순교 성인들처럼 칼 아래 스러지는 일은 없어도 우리가 의로운 사람으로 생을 마치면, 푸르게 빛나는 순결로 꾸며진 완전한 아름다움으로 들어 올려져 예수님의 영원한 승리 속에 많은 의인들과 함께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신비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바로 이 한 생에 모든 것을 집중해야만 할 의무가 있으며, 이것은 모든 인간 존재의 일회성에서 비롯되기 때문입니다. 숫자 1이 곧잘 똑바로 서 있는 인간의 모습을 나타내는 것으로 해석된 것처럼 말입니다. 마이스터 에크하르트가 “하느님 안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바로 숫자 1이며, 인간은 그것을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듯이, 숫자1, 즉 오직 한 번은 실제로는 무엇이라고 표현될 수 없는 하나의 신비입니다. 숫자 1을 바라보는 것은 거울을 들여다보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그 거울은 원형(圓形)입니다. 1이 원으로 표현되는 원리를 그리스어로 모나드(Monad)라고 하는데, 이는 안전함, 통일성, 그리고 모든 모양의 원천인 자궁을 뜻하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 모나드는 숨을 쉬면서 그다음에 이어지는 모든 수를 만들어낸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경향잡지 2006년 1월호 참조)
111111111 x 111111111 = 12345678987654321
모나드는 하느님의 수이며 우주의 공통분모입니다. 어떤 수에 1을 곱하거나 나누어도 항상 그 자신의 수가 되듯 말입니다. 마찬가지로 아무것도 없는 무차원의 중심으로부터 무한히 많은 원주 위의 점들로 팽창해 가는 원은 무(無)에서 만물이 생겨난 신비로운 창조를 의미합니다. 즉, 원은 기하학적으로 숫자1을 뜻하며, 우리가 느끼든 느끼지 않든 항상 모든 것 속에 존재하는 완전성과 신성한 상태를 나타내는 상징으로 사용되어 왔습니다. 원의 반지름과 원둘레의 길이는 결코 비슷한 단위로 측정될 수 없습니다. 서로의 관계가 π=3.1415926…의 초월값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의 원은 유한과 무한을 동시에 갖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중세의 학자들은 원이 하느님의 목소리를 은유적으로 나타낸다고 믿었습니다. 원을 자세히 들여다보십시오. 원은 만들어지기를 간청하는 모양입니다. 채 완성되지 않은 원을 보는 것은 어딘지 모르게 부담스러워 완성시키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합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의 중심, 즉 점을 자신도 모르게 응시하게 됩니다. 점은 전체 중의 전체의 근원입니다. 이해의 경지를 넘어서는 알 수 없는 대상이며, 침묵 속에서 스스로를 향해 접혀있습니다. 그러나 점은 마치 씨앗처럼 팽창하여 원으로 자신을 완성합니다. 이 점이 우리 자신의 무게중심이라고 상상해 봅니다. 공간에 존재하는 것이 아닌 우리가 이 단어를 잘 이해하고 있는 장소인 순수한 영혼에 존재한다고 말입니다. 데이비드 소로가 “육체는 영혼의 첫 번째 제자”라고 말하듯, 성령께서 무한한 사랑과 무한한 참을성으로 영혼을 타이르시고 격려하시는 그곳은 영혼이 육체를 올바르게 이끌어 비로소 육체의 참다운 스승이 되는 곳입니다.
박해와 순교에 직면한 선조들의 아직은 인간적인 한계가 있는 영혼과 정신과 육체에 초자연적인 도움을 주시는 주님. 비난과 모욕의 고통, 고문의 고통, 혈육과 헤어지는 고통, 생명과 그 밖의 모든 고통에 굴복하지 않고 오히려 순교자들의 마음이 벌써 가 있는 곳, 즉 하늘로 가기 위하여 기꺼이 목과 사지를 고문에 내맡기게 하는 주님의 인자(仁慈)는 무한하십니다. 이 무한한 인자에 힘입은 사랑은 공로이며, 희생도 공로이며, 영웅적인 신앙고백도 공로이기에 순교자들은 세 겹으로 깨끗합니다. 그리고 이기적이고 불평등한 고통과 슬픔, 비루함과 실망으로 더이상 기쁨을 느끼지 못하게 된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도 마음은 하늘을 바라보며 이웃과 사랑을 나누고 가르치며 꾸준히 하느님의 뜻을 행하며 살기에, 우리 또한 하늘나라에서 순교자로 받아들여질 것이기 때문에 행복합니다. 인생은 숨 한 번 쉬는 순간이고, 영원은 영원한 현재임을 상기하며 기쁨과 바람의 노래를 읊어 봅니다. 샬롬!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부르실 때에 하나의 희망을 주신 것처럼, 그리스도의 몸도 하나이고 성령도 한 분이십니다. 주님도 한 분이시고 믿음도 하나이며 세례도 하나이고, 만물의 아버지이신 하느님도 한 분이십니다. 그분은 만물 위에, 만물을 통하여, 만물 안에 계십니다.(에페 4,5-6)
숫자 ‘Ο’ · 비움(kenosis)과 충만(pleroma)
아직 세상은 고요하고 이슬이 반짝일 뿐입니다. 밤새 세상을 지켜준 별들이 점점 더 엷어져, 민물에 잠기는 해변같이 새벽빛의 물속에 잠겨 점점 더 약해져가는 눈빛을 보내다가 마치 원래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모습을 감춥니다. 장밋빛 섬광이 동쪽 하늘의 비취색 비단을 양쪽으로 갈라놓자, 숨결 같은 바람이 산과 들판을 지나며 “잠에서 깨어나라. 새 날이 밝았다” 하고 아르페지오의 선율을 곁들인 찬양을 시작합니다. 밤의 수의 밑에서 꿈틀거리며 세상은 영원한 아름다움을 되찾고, ‘無’에서 돌아오고, 죽었다가 다시 살아납니다. 동쪽의 땅과 맑은 하늘 사이에는 감당할 수 없는 불덩어리로 인해 일종의 사다리가 놓여있는 듯합니다. 사다리의 양끝에는 침묵이 펼쳐져 있습니다. 아무리 설득력을 가진 말과 글일지라도 그저 중간 계단일 뿐, 거기에는 발을 아주 가볍게 얹을 수 있을 뿐입니다. 오직 침묵만이 왜곡됨이 없으니, 침묵은 알파요 오메가며 동시에 無와 有일 것입니다. 無를 뜻하는 단어 아인(ain)이 ‘나는 존재한다(I Am)’는 뜻인 아니(ani)와 같은 문자들로 이루어져 있음은 의미가 깊습니다. 말씀에 의해 無에서 有가 생겨났습니다. 그리고 인간의 약함을 불쌍히 여기신 하느님의 인자(仁慈)께는 다른 길이 없었습니다. 오직 하나밖에 없는 길과 오직 하나밖에 없는 문을 통해 빈 무덤과 구원이 세상에 주어졌습니다.
시간이 흘러 13세기경, 십자군 전쟁을 통하여 예수살렘에 당도한 그리스도인들은 구세주의 무덤이 정말로 ‘비어 있다’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하고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비로소 실감합니다. 교회와 서구는 오랜 잠에서 깨어납니다. “예수님의 무덤이 비어 있다”라는 표현과 “그렇게 해서 인류는 죽음의 마비상태에서 깨어났다”라는 훌륭한 논리적 인과관계에 의해 교황 실베스텔 II세가 도입하려고 했으나 실패한 숫자 ‘Ο’이 서구에 도입됩니다. ‘비어 있는 무덤’을 체험하는 것과 성서의 구절을 일치시키는 것은 신학적이고 철학적인 시각에서 볼 때 혁명적인 충격을 가져왔기 때문입니다. ‘비어 있는 무덤’은 없음과 공백의 발견, 그리고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가능성에 이어 마침내 없음과 공백이 쭉 존재해 왔다는 생각 자체와 일치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무질서와 無가 의미하는 공백은 이제 더 이상 사람들에게 공포가 되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확실한 것처럼 ‘없음과 비어 있음’이 가능하고 생각할 수 있고 또 용인된다면 ‘Ο’의 개념 역시 그러할 것이며, 동시에 33과 303을 구별하는 위치적 명수법도 자연스럽게 그러할 것입니다. 사람들은 ‘Ο’이라는 기이한 숫자를 더 이상 사탄의 창조물로 생각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오히려 텅 빈 자기 비움(kenosis)과 충만(pleroma)으로서 그리스도의 표상과 일치시킵니다. 2세기경에 순교하신 성 엠마누엘(Emmanuel)의 일기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고 합니다.
“오늘 무서운 것을 보았다. 서재에 들어가니 조카가 소리를 내지 않고 책을 읽고 있었다.”당시 묵독(默讀)은 악마의 독서법이었으며, 사람들에게 묵독이 허용된 시기는 ‘Ο’가 도입되는 12세기에 이르러서라고 합니다.
세상에 아로새겨진 숫자를 통해 하느님의 지혜가 드러난다.(아우구스티누스)
9세기 무렵의 희곡 작가인 간더사임의 로비타(Hrovita) 수녀의 희곡 사피엔티아(Sapientia)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있습니다.
“창조주는 무에서 이 세상을 창조하셨고, 모든 사물에 대하여 그 수와 크기, 무게를 알맞게 정하셨다. 그리고 적절한 때에 사람의 나이에 알맞도록 정리정돈하셨으며, 더 깊이 연구하면 할수록 생생한 기적이 드러나는 수학을 창조하셨다.”
과연 숫자의 속성은 속임수가 허락되지 않습니다. 거짓은 숫자의 본성으로 살펴 볼 때 가장 적대적입니다. 그러므로 신비를 감지하고, 조화를 규명하며, 섭리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사라져가는 사물들 뒤에 숨겨진 숫자의 관계와 영원한 조화를 통찰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숫자는 단순히 미적으로 아름다울 뿐 아니라 비밀스럽게 배열되어 있기도 한 창조와 구원의 질서와 필연성을 대표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Ο’은 ‘없음’을 뜻하지만 역설적으로 ‘영원히 있음’을 상징합니다. 숫자의 개념과 함께 철학적 의미로 존재합니다. 숫자, ‘Ο’ 즉 ‘비어 있는 무덤’이 상기시키는 수난과 부활을 통해 하느님께서는 시간과 공간과 방법에 있어 어떠한 한계와 제약 없이 구원 사업을 완성하십니다.
시간으로 한정되지 않습니다. 아무리 강한 것도 영원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나라는 영원합니다.
공간으로 한정되지 않습니다. 동쪽에서 서쪽 끝까지, 남쪽에서 북쪽 끝까지, 즉 사람이 있는 곳은 어디까지든지 전파됩니다.
방법으로 한정되지 않습니다. 인자(仁慈)이신 하느님의 방식은 오직 사랑입니다. 사랑은 사랑을 받기 때문에 결코 제약이 없습니다.
두렵고 혼란스러운 이 시대, 목자이며 나침반인 복음의 핵심인 숫자 ‘Ο’( ‘비어 있는 무덤’)의 신비를 상기하며, 하느님의 인자(仁慈)와 구원의 바람을 노래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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