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단어 및 관련 단어 소개 21≫◆하느님 나라◆
◆하느님 나라◆
‘나라’라는 용어는 하느님이 왕으로 인식되고 모든 것이 그분께 굴복하는 상태를 뜻한다. 하느님 나라는 하늘나라와 같은 말이다. 하느님 나라는 요한 세례자가 선포하였고(가해 대림 시기 제2주일 - 복음) 예수께서 시작하셨으며(사순 시기 제2주간 수요일 - 복음) 교회 안에서 계속되고(연중 시기 제14주간 수요일 - 복음과 가해 연중 시기 제21주일 - 복음) 재림 때 다시 오시는 그리스도의 영광 안에서 결정적으로 이루어질 것이다(다해 대림 시기 제1주일 - 복음).
하느님 나라의 구성원들은 하느님의 자녀이며 이 세상에서도 미래 세계에서 완전히 성취될 영원한 생명을 맛본다(나해 사순 시기 제4주일 - 복음).
하느님 나라는 그리스도 왕 대축일에 명백히 언급된다. 그리스도께서는 영원하고 보편적인 나라, 진리와 생명의 나라, 성성과 은총의 나라, 정의와 사랑과 평화의 나라를 다스리신다(감사송). 지상에서 나라는 불완전하지만 천상에서는 완전하다. 우리가 예수님의 복음에 따라 살면 그분 나라의 기쁨에로 나아갈 것이다(영성체 후 기도).
출처 : [전례사전]
◆하느님의 백성◆
교회에 속한 모든 사람. 원래 성서적인 용어이나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회헌장에서 부각된 개념이며, 하느님과 일정한 인간 공동체 즉 이스라엘, 교회, 인류와의 관계를 특징짓는 말이다. 이스라엘은 구약성서에서 야훼의 백성이라 불린다. 이는 출애굽과 시나이산의 계약 등 신앙적 체험을 통해서 뿐 아니라 그들 국가의 성립과 존속이 야훼의 역사적인 간섭에 힘입은 것이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백성’에 있어서 ‘백성’은 구체적인 역사의 하느님께 충성을 바칠 의무를 지고 ‘하느님’은 백성의 주인으로서 백성을 보호하는 관계에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공동체는 그분의 피를 바탕으로 성립된 새로운 계약의 소산이요 성령 안에 새로워진 이스라엘이다. 이 공동체는 실제적이고 참되고 명확한 하느님의 백성인 것이다. 이는 국경을 모르고 모든 민족을 포함하며 '육체에 따라서'가 아니라 성령과 신앙의 바탕 위에 형성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전혀 새롭게 창설된 모임이 아니라 고대 하느님의 백성을 합법적으로 계승한 단체이다. 구약시대 하느님의 백성은 신약시대 하느님의 백성을 전재하는 그림자적인 약속이다(마르 14:24, 사도 3:25, 로마 1:7). 그러므로 전자를 지칭하는 상징, 즉 새로운 ‘예루살렘’, ‘성도’(聖都)(갈라 4:26, 필립 3:20), ‘신부’(마태 9:15, 에페 5:30-) 등은 후자에 적용되는 것이다. 하느님 백성의 교의적 의미는 하느님이 인간을 구원하기 위하여 그들을 선택할 때 고립된 개인별로 하지 않고 역사적 사회적 관련을 맺고 있는 집단단위로 선택하신다는 점이다. 그 집단의 유대는 역사적 사회적 일치 외에 이웃 간의 사랑의 결속과 하느님과의 사랑의 일치로 공고해졌다. 이 일치는 역사적으로 나타났고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부활안에 종말론적으로 확고부동한 것이 되었다. 이런 뜻에서 하느님의 백성이 존재하는 것이다.
하느님의 백성을 사회적으로 구성된 백성으로 보아 교계조직의 교회와 동일시할 수도 있겠으나, 이런 관점은 신학적인 중요실재를 간과하는 흠이 있다. 하느님의 백성을 모든 의로운 자들의 영적인 총체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 여기에는 교계적 교회에 ‘충분히’ 소속되지 않는 자들도 포함된다. 이런 의미에서 하느님의 백성은 교회에 어떤 방식으로든지 속하는 모든 사람을 포함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백성과 교회는 구별된다. 예컨대 세례자로 죄 중에 있는 교회에, 따라서 하느님의 백성에, 몸으로는(corpore) 속해 있으나(교회헌장 14) 마음으로는(Corde) 속해 있지 않은 것이다. 이처럼 구성성이 교회에 귀속하는 정도가 다양하므로 교회의 개념도 광협의 차이가 있다. 수식어 없이 ‘교회’라 할 때는 협의의 교회를 뜻하며 교회 헌장 8항에 ‘교회는’ 가톨릭 교회 내에 ‘존속한다’는 표현이 그 적례이다. 하느님의 백성은 광의의 교회로 보는 것이 바람직하다. 나아가 인류자체를 하느님의 백성이라 부를 수 있는지가 문제된다. 인류는 그 기원과 운명을 공통으로 지니고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가 속한 하나의 역사를 갖고 있다. 인류는 하느님의 구원의지 안에 포함되어 있고 초자연적 존재로 구속되었으며, 인류역사의 움직임은 하느님의 계시로 떠받쳐지고 있으며, 이 하나의 역사는 예정된 복된 결과의 영향을 느껴왔다. 그러므로 이는 개인의 개별적 결단이나 교회의 형성에 앞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하느님의 은총의 작용으로 구성된 것이다. 이 사실에 대하여 어떤 이름을 붙이고자 한다면 하느님의 백성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 교회1
◆하느님의 말씀◆
말의 중요성에 대한 고대인의 인식에 의하면 말은 마력을 지니고 있어서 신(神)들의 의사를 강제하기도 하고 신의 능력을 나타내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구약성서에서 창조주 하느님의 능력과 지혜는 말씀으로 계시되었다. 세상의 창조와 보존 및 이스라엘의 역사적 행로는 하느님의 말씀에 힘입은 것이기에 하느님의 말씀은 창조적이며 구원적이라는 관념이 형성되었다(시편 147:1). 하느님의 말씀은 예언서에서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예언자를 부르신 이야기에는 하느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내용이 특징을 이루며(예레 1:9-, 이사 6:1-, 에제 2:8-), 그 전달은 절대적인 힘을 발휘한다. 예언자의 입을 통하여 전해지는 하느님의 말씀은 진리를 계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역사를 창조하고(1열왕 17:1), 새 계약을 체결하며(예레 31:31-, 이사 54:10), 새로운 생명을 주고(에제 37:1-, 시편 119:50), 온전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섬기도록 의무짓는다(신명 6:4, 이사 7:13).
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구약성서의 개념은 신약성서에서도 계승되어 구약의 모든 계시를 하느님의 말씀이라 부르고(마태 1:22, 로마 15:10), 예수님의 입술을 거쳐 나온 하느님의 말씀은 구원 사건을 일으키는(루가 5:1, 8:11) 능력을 나타낸다고 한다(마태 7:28-). 한편 하느님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와 동일시된다. 즉 예수님의 말씀을 부끄러워하는 자는 주님 자신을 부끄러워하는 것이며(마르 8:38), 하느님의 말씀은 마침내 당신의 아들을 통하여 전해졌고(히브 1:1-),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말씀이다(요한 1:1-). 그리스도한테서 강생한 하느님의 말씀은 교회 안에 존속한다. 그러므로 말씀의 봉사자인 사도들이 전하는 것은 교리라기보다 그리스도 안에 도래한 구원이다. 즉 ‘하느님의 말씀’ 혹은 ‘주님의 말씀’(사도 13:46-, 1고린 14:36, 골로 13:16)은 단순히 주님의 메시지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사도들의 인간적인 언어 가운데 성령의 작용으로 청중들에게 전달하는 그리스도 자신의 말씀인 것이다. 하느님의 말씀은 길이 설교되어야 하므로 사도들은 자신들의 직무를 계승할 말씀의 봉사자를 선발하였고 그 직무는 구두의 설교뿐 아니라 서한을 통하여 이행하였다. 그리스도 안에 도래한 구원을 기록한 것을 복음이라 부른다(마르 1:1, 14:9, 마태 24:14, 26:13).
초대 교회에는 기록된 사도들의 설교 혹은 기록된 구약과 예수님의 말씀을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부르는 한편(로마의 주교 글레멘스), 비유를 써서 성서는 강생하신 말씀의 살과 피이고(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 로고스의 완전한 몸이며(오리제네스) 영혼의 약이라(요한 크리소스토모)하였다. 아우구스티노는 하느님의 말씀을 영원한 구원능력을 지닌 것으로 보았고 성서 안에 하느님의 말씀이 생존한다고 하며 “말씀과 성사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태어난다”고 함으로써 말씀과 성사를 결합시켰다. 중세기에 이르러 성서와 이에 대한 설교는 구원의 효과를 내는 수단이라 하여 설교자는 천국의 왕을 위한 새 자녀를 탄생시킨다(알퀸)고까지 하였으나 수도원 생활의 영성화(靈性化)로 인하여 하느님의 행위와 은총의 신비적인 차원을 주목하게 되면서 성서의 설교가 어떻게 구원을 주는 효과적인 수단이 되는지가 문제되었다. 이에 대하여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은 은총의 생명을 전달하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하였다(토마스 아퀴나스). 한편 성사에 대한 관심의 증대로 설교의 구원적 기능을 소홀히 여기게 되기도 했으나 전혀 무시한 것은 아니며 성서는 사람을 다시 태어나게 하는 씨앗이라는 믿음(보나벤투라)에는 변함없었다.
초자연적인 하느님의 말씀은 역사 안에서 인간의 언어를 매개로 하여 사람에게 전달되므로 그 말씀에 대한 신학적인 탐구는 인간 언어의 철학적인 해명에서 도움을 받는다. 인간이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신앙과 은총이 필요하나 그렇다고 하여 인간의 역사와 언어로 표현되는 말씀의 중요성이 감소되는 것은 아니다. 그 말씀은 ‘사람이 되신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 역사의 절정에 달하였고 교회 내에 말씀의 다양한 형태로 발전되어왔다. 성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간직하고 있을 뿐 아니라 영감을 받은 것이므로 참으로 하느님의 말씀이다(계시헌장 24). 그러나 성서의 문헌은 설교 도중에 말씀의 새 생명에 이르게 하는 디딤돌에 불과하다. 오늘의 설교에서 과거의 사도들에 의하여 선포된 하느님 말씀의 원(原)생명이 재생하는 것이다. 성서는 또한 사도와 초대 교회가 계시를 증거한 것이며 이 인간적 증언은 신앙 안에서 말씀에 대하여 응답한 내용이기에 하느님의 말씀이다. 이와 같이 성서를 증언으로 이해할 때 성서는 바로 계시가 아니고 계시를 표시하는 것이며 그 표시하는 상징(즉 증언)을 또한 지니므로 마치 성사적인 방법으로 증언하는 바를 재현시킨다. 하느님의 말씀은 교회의 설교에서만이 참으로 하느님의 말씀이 된다. 하느님의 말씀이 오늘날 인간 설교자를 통하여 충만한 실재로 나타날 수 있는 것은, 설교자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의해서 파견되며(로마 10:15), 설교는 성서에 표현된 계시와 그 증언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구원 사건으로서의 하느님의 말씀과 성사와의 관계에 대하여 양자는 구원행위의 불필요한 중복이 아님과 동시에 어느 하나를 결하고는 완전할 수 없다. 말씀과 성사는 쌍방적인 움직임이어서 전자는 하느님께로부터 인간에게 오는 것이요 후자는 인간이 하느님을 지향하는 것이며(O. Semmeloth), 양자는 말과 행위의 단일성으로 묘사되고(G. Sohngen), 성사는 효과를 발생하는 말씀의 최고 구현형태인 것이다(K. Rahner).
◆하느님 자비◆
사랑과 구원의 만남에서 인간 가까이 오시려는 하느님의 의지를 가리킨다. 과거에는 하느님께서 인간과 맺으신 계약과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로써 확증된 새 계약에서 하느님 자비가 드러났다. 구원 역사의 세 번째 단계를 사는 백성에게 그리스도의 파스카 신비가 다시 드러나면서 하느님께서 당신 자비를 보여 주시는 최고의 길은 전례이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1980년에 반포한 회칙 「자비로우신 하느님」에서 하느님의 자비를 길게 분석하면서 다음과 같은 결론에 이른다(13항). “교회는 하느님의 자비를 고백하고 선포하지 않으면 안 된다. 계시로 우리에게 전수된 그대로 자비의 진리 전부를 고백하고 선포하지 않으면 안 된다. 교회의 일상생활을 보면 성서에 표현된 하느님의 자비에 대한 진리가 성서의 여러 독서를 통해 영구히 울려 퍼지고 있다.”
더 나아가 “교회는 사람들을 구세주의 자비의 샘에 가까이 가게 만들 때에 본연의 삶을 사는 것이다. 교회는 그 자비의 관리자요 분배자이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꾸준히 묵상하고 성체성사와 고해성사에 의식적이고 성숙하게 참여하는 일이 크나큰 비중을 갖는다. 성체성사는 죽음보다 더 강한 그 사랑에 좀더 가까이 가게 만들어 준다. 우리는 영광 중에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실 적마다’ 구세주의 죽음만 전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부활도 선포하기 때문이다”(1고린 11,26과 기념 환호송 참조).
그리스도인들은 회개를 통해 하느님 자비를 나누어 받는다. 자애로우신 사랑의 하느님에 대한 올바른 지식은 항구하고 끝없는 회개의 원천이 된다. 회개는 순간적인 내적 행위로 그치지 않고 지속적인 마음 상태를 유지케 하는 원천이다. 이런 식으로 하느님을 알게 된 사람, 이런 식으로 하느님을 뵙게 된 사람은 끊임없이 하느님을 향하여 살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그들은 ‘남에게 자비를 행하라’는 그리스도의 권면을 따라 남에게 자비를 베풀 것이다. “자비를 베푸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마태 5,7). 구원 역사(救援 歷史 History of Salvation), 계약(契約 Covenant), 사랑(Love), 하느님(God), 회개(悔改 Conversion) 참조.
◆하느님 나라와 백성◆
하느님 나라란 하늘 나라, 즉 천국을 말한다. 이는 예수께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하신 데에서 그 근원을 찾을 수 있다. 여기의 하늘 나라란 하느님이 사람의 심성과 세상 만사의 주님으로 군림하시는 상태를 의미한다. 그러기에 세상 만민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섬기며, 세상 만사가 하느님의 뜻대로 이루어지는 날은 바로 하느님 나라의 완성이다.
하느님의 백성이란 원래는 이스라엘 민족을 일컬었으나, 지금은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신자를 말한다. 따라서 누구든지 세례로써 하느님의 백성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서로 사랑하라는 법도를 지키고 하느님의 자녀라는 새 신분을 누리면, 이는 하느님의 백성인 것이다”(마르 14,24; 사도 3,25; 로마 1,7).
출처 : [용어사전]
◆신의 존재◆
[ 1. 의의: 하느님의 존재는 논리적으로 그 증명이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신에 대한 인식은 인간의 노력이나 연구에 의한 결과가 아니라, 신의 계시(啓示)에 의한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자연계, 개인이나 인간 상호 관계를 통한 체험, 혹은 역사를 통하여 다소 알 뿐이다.
2. 철학적 논리 : 철학자들은 결과가 있으면 반드시 그 원인이 있다는 인과율(因果律), 혹은 인과 관계(因果關係)로 신의 존재를 입증하려 하였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반드시 제일 원인(第一原因)이 있고, 움직이는 모든 것은 그것을 움직이게 한 원동력(原動力)이 있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또한 우주 만물의 존재나 운행 질서는 결코 우연일 수 없다. 따라서 이 모든 것은 인간을 초월하는 어떤 존재에 의한 것임에 틀림없으며, 필연적으로 인간의 한계를 초월하는 초월자, 즉 제1원인이며 원동력인 분에 의한 것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의 욕망은 무한하나 인간은 유한하다. 그래서 유한한 인간은 무한한 진선미(眞善美)를 추구하게 마련이다. 따라서 필연적으로 완전 무결하고 전지 전능하며 영원한 분이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인간의 양심법은 인간을 초월하는 존재를 확신케 한다. 언제나 선을 행하며 악을 피하도록 타이르는 분은 진리와 정의의 원천이신 하느님일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인간은 인간에게 끊임없이 주어지는 하느님의 은총에 의해 하느님을 체험하게 된다.
3. 무신론 : 무신론 중에도 신의 존재나 종교의 제반 문제는 현세에 속하지 않으므로 후세에서나 알 수 있기에 복잡하게 따지지 말고, 또 따져 봐야 알 수 없으므로 접어 두자는 소극적(消極的)인 무신론을 주장하는 이도 있다. 그러나 이는 현실에 완전히 선을 긋는 근시안적인 생각이다. 보이지 않아도 있고, 보지 않고도 믿고 아는 것은 세상에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비판적(批判的)인 무신론은 인간이 신을 인정하고 추구하는 것은 결국 인간의 두뇌이기 때문에, 신은 인간의 지성을 초월하지 못한다는 주장이다. 따라서 신이나 종교는 인간이 생각해 낸 결과이므로, 인간의 생각이 소멸하면 신은 없어지게 마련이라는 것이다.
또한 적극적(積極的)인 무신론은 신이 없거나, 있으면 죽여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는 신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불신론(不信論)이다. 그래서 신이 있다면 인간에게서 추방해야 하며, 사실은 신은 없는데 인간이 공상하고 있다는 주장이다. 그러기에 쓸데없이 인간이 공상을 하는 기회를 없애야 한다는 것이다.
이로써 공산주의자들은 유신론자들을 죽이고 유물 사관(唯物史觀)을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 유물론
이들은 인간의 머리에서 신을 쫓고 자신들이 신의 자리에 앉게 되었다. 그러나 결국 물질 만능주의를 만연케 하였으며, 결코 자신들이 절대자가 될 수는 없었다.
그들에게는 상대가 있게 마련이었고, 상대와의 다툼은 비극으로 결말을 맞게 되었다. 이는 오히려 인간의 무상함과 유한성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으며, 무한하고 절대자인 하느님의 존재를 더욱더 확실하게 입증했을 뿐이었다.
4. 유신론 : 유신론자(有神論者)들은 인간을 제거하거나 무시하지 않고, 그 안에서 신을 발견한다(요한 1,1). 그래서 인간을 중심으로 제1원인인 하느님의 존재를 인식하였다. 또한 신의 존재를 부정한다면, 결국 스스로 자신을 파멸의 길로 이끌고, 자기 존재의 의의까지를 부정하는 불신의 결과를 가져오게 됨을 깨달았다.
이러한 신에 대한 증언은 바로 계시(啓示)에 의한 것이었다. → 계시
창세기(14장)는 하늘과 땅을 만드신 분의 칭호를 기록하고. 여기서 하느님은 초월적인 존재일 뿐만 아니라, 내재적인 존재임을 알린다. 그리고 그분은 오직 유일한 분(이사 45,1-8; 예레 10,10-12)이시고, 전능하시며 만물을 초월하시고(예레 32,17; 시편 135; 이사 35장), 영원하시다(애가 5,17-20; 시편 39).
또한 장소의 제약을 받지 않으시는 무한하신 분(1열왕 8,27; 예레 23,24)이시며, 영(靈)이시기 때문에 모든 것을 포괄하시고(지혜 1,7), 지혜로우시기 때문에 모든 것을 질서 있게 안배하며(지혜 8장), 우리의 능력을 초월하신다(시편 139; 욥기 42,2).
요한 복음(8,48-54)에 의하면, 하느님은 구약에서처럼 살아 계신 참 하느님이시다. 그리고 우리 주 그리스도의 아버지시고(히브 1,1-2), 당신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분이시다(갈라 4,4). 또한 예수께서는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불렀다(마르 14,36). 이는 누구도 침해할 수 없는 가장 친밀한 부자 관계를 나타낸다.
초대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의 능력과 현존을 자유나 용서, 일치나 평화 그리고 사랑의 실천 등을 통하여 체험하였다. 이로써 그들은 성령의 선물을 깨달았고,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깨달았으며(1고린 12,3), 또한 예수께서 그들과 함께 성령을 나누시며, 예언적, 구원적 사명을 나누심을 깨달았던 것이다(요한 20,21-23).
출처 : [용어사전]
◆하느님의 종◆
하느님을 섬기는 이들과 하느님에게서 특수한 사명을 받아 수행하는 일꾼들을 이르는 칭호.
예수 그리스도뿐 아니라 교회의 직무를 수행하는 이들도 하느님의 종이다. 교황은 ‘하느님의 종들의 종’(servus servorum Dei)이라 하여 자신의 직무가 하느님의 종인 그리스도인들에게 봉사하는 것이라는 겸손한 표현을 한다.
또한 교회에서는 일반적으로 시복 시성 안건이 시작된 가톨릭 신자를 ‘하느님의 종’으로 부른다.
출처 : [천주교용어자료집]
◆천주◆
전지전능하시고 하늘에 계시는 분, 곧 하느님을 가리키는 옛말. 중국, 일본 등 한자 문화권에서 하느님과 동의어로 사용한 말이다.
이 말은 16세기 말에서 17세기 초 중국의 천주교 서적을 통해 우리나라에 들어왔고, 한국 교회에서도 정식으로 사용해 오늘에 이르렀다. 예전에는 ‘천부’(天父) 또는 ‘상주’(上主)라고도 했다.
천주교에서는 오늘날도 ‘천주’를 ‘하느님’과 병행하여 쓰고 있다.
◆삼위일체◆
천주교 4대 교리의 하나.
성부, 성자, 성령 삼위(三位)가 한 분이신 하느님이라는 뜻으로, 세 위격(位格, persona)이 완전히 서로 구별되면서도 동시에 한 신성(神性)을 이룬다는 뜻이다.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령에 힘입어 하느님에게 구원을 받는다는 그리스도교의 구원 진리를 요약한 개념이다.
출처 : [천주교용어자료집]
◆구약 성경◆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 맺어진 계약,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 예수 그리스도의 강생 전까지 하느님의 계시를 담은 거룩한 책.
한편,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증언을 모은 책들은 ‘새로운 계약’이라는 뜻으로 신약 성경이라 부른다(구약성경 46권의 각권 명칭은 148쪽 참조).
출처 : [천주교용어자료집]
◆십계명◆
하느님께서 시나이 산에서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계시하신 열 가지 계명. 그리스도교 윤리의 기초이며 출발점이기도 하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일. 한 분이신 하느님을 흠숭하여라.
이. 하느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마라.
삼. 주일을 거룩히 지내라.
사. 부모에게 효도하여라.
오. 사람을 죽이지 마라.
육. 간음하지 마라.
칠. 도둑질을 하지 마라.
팔. 거짓 증언을 하지 마라.
구. 남의 아내를 탐내지 마라.
십. 남의 재물을 탐내지 마라.
◆십계명 해설◆
1. 1계 : “한 분이신 하느님을 흠숭하여라”
이는 하느님을 창조주, 가장 높으신 주님으로 알아, 최고의 공경과 흠숭을 드리라는 것이다. 즉 하느님을 내적으로 흠숭(신, 망, 애 삼덕으로 하느님을 흠숭)하고, 기도, 전례 성사 등 외적 공경을 드리라는 것이다.
또한 이는 하느님께만 드릴 공경을 다른 이에게 바치지 말라는 것이다. 그래서 미신, 마술, 마법, 신강술, 관상, 토정 비결, 손금 등을 금하며, 축성된 성물을 매매하는 행위, 신앙을 거스르거나 해치는 말이나 독서, 하느님의 전지 전능이나 지혜, 인자 등을 시험하는 행위도 금한다. 이는 신덕을 거스르는 행위이기 때문이다(마태 4,7; 레위 19,31).
그리고 하느님의 약속에 신뢰하지 않거나 하느님께 모든 것을 미루어 의탁하기만 하고, 자기의 할 일을 소홀히 하지 말아야 한다. 이는 망덕을 거스르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또한 하느님의 은혜에 감사하지 않거나 갖가지 죄를 범하는 행위도 금한다. 이는 애덕을 거스르기 때문이다.
2. 2계 : “하느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마라”
이는 하느님의 거룩한 이름을 정성되이 부름과 맹세와 허원을 지키라는 것이다. 맹세(盟誓)란 전능하신 하느님을 사실의 증거자로 부름을 말한다. 그러므로 합당한 맹세가 되기 위해서는 진실되고 의로우며 신중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그리고 맹세가 유효하기 위해서는 맹세할 의향을 갖고 외적 형식으로 표현되어야 하며, 이는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
허원(許願)이란 하느님을 위해 어떤 특정한 선행을 하기로 결심하고, 그것을 완수하지 않으면 죄가 되는 것을 하느님께 자유 의지로 하는 약속을 말한다. 이는 일반적으로 결심이나 의향이 아니고, 의무를 지니는 하느님께 대한 약속이다.
그런데 허원은 사적, 공적 두 가지 경우가 있다. 사적 허원은 신자가 개인적으로 하는 허원이며, 공적 허원은 수도자가 공적으로 청빈, 정결, 순명으로 일생을 하느님께 봉헌하겠다는 것을 말한다. → 서원
2계에서 금하는 것은 하느님의 거룩한 이름을 모독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는 하느님을 업신여기는 마음을 갖거나 멸시하는 것, 혹은 하느님의 이름을 빌려 남에게 재앙이 되기를 비는 것 등을 말한다. 특히 참된 종교를 욕하는 것도 하느님을 욕되게 하는 것이다.
3. 3계 : “주일을 거룩히 지내라”
교회는 사도 시대 전통을 따라 그리스도 부활 날에 그 기원을 두고, 8일째마다 파스카의 신비를 경축한다. 이날은 주일(主日)로서 신자들이 함께 모여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미사 성제에 참여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과 영광을 기념하며 하느님께 감사를 드린다.
주일은 원래 안식일(安息日)이었다. 안식일은 하느님의 창조 사업과 이스라엘을 이집트의 노예 생활에서 구출하신 것을 기념하는 일이다. 그리고 신약 시대에는 모든 이에게 기쁨과 희망의 원인이 된 그리스도의 부활과 성령이 강림하시어 구원 사업을 완성하심을 기념하는 날로 연결되었다. 그러나 그날이 일요일이었으므로 토요일이었던 안식일이 일요일로 바뀌었다. → 안식일
주일을 거룩하게 지내기 위해서는 미사 성제에 참여하고, 과중한 노동을 피함으로써 신심의 휴식을 취하며, 주님을 섬기는 날이 되도록 해야 한다. 그러나 시대와 환경의 변화로 주일을 지키기 어려운 이들에게, 교회는 주일의 본분을 다른 날에 이행할 수 있도록 특전도 베풀고 있다.
즉 일요일과 의무적 축일 미사를 전날 저녁 미사에 참여(土曜 特典 미사)함로써 주일 의무를 대신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 특전(特典) 미사는 2차 바티칸 공의회 후, 주일 미사의 참여 기회를 넓히기 위해 단행한 전례 개혁 중 하나이다.
또한 유다인들은 하루를 일몰(日沒)부터 계산하였고, 교회력에 있어서 축일이 그 전날부터 시작되는 데에 근거를 두었다. 한국 주교 회의는 교황청의 허가를 얻어, 1970년부터 교구별로 실시하고 있다. 그러나 안이함과 편안함만을 위해, 그리고 단지 일요일에 휴식만을 위한 방편으로 이 특전 미사를 이용하지 말아야 한다.
4. 4계 : “부모에게 효도하여라”
부모는 자녀들의 영혼과 육신을 돌보고, 자녀는 부모를 공경하고 부모에게 순종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윗사람도 공경하며 사랑해야 한다. 또한 부모는 자녀들을 위해 기도하고 모범으로 자녀들을 가르치며, 신앙을 굳게 하고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보호하고 잘못을 사랑으로 고치도록 해야 한다(에페 6,4).
특히 부모는 자녀에 대한 신앙 교육의 임무에 충실해야 한다. 자녀들은 가정의 산 멤버로 그들 나름대로 부모들의 성화에 이바지하며, 감사하는 마음과 효심과 신뢰로써 부모에게서 받은 은혜에 보답해야 한다. 그리고 부모가 역경에 처하거나 노후의 고독 중에 있을 때, 자녀답게 봉양해야 한다(사목 헌장 48항 참조).
5. 5계 : “사람을 죽이지 마라”
이는 인간의 육신 생명을 존중하고 구원에 힘써야 한다는 것이다. 즉 인간의 생명은 하느님의 선물인 만큼, 자기가 타인의 생명 또는 이에 직결되는 육체에 대해서 존엄성을 인정해야 한다. 따라서 남이나 자기의 생명과 영혼을 해치지 말아야 한다.
부당하게 남을 죽이거나 남의 건강을 상해하거나 모욕하거나 학대하지 말아야 한다. 이는 하느님의 사랑을 거스르는 행위이며, 남의 권리를 직접 침해하는 것이고, 이웃 사랑의 계명을 어기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마태 18,6). 그래서 자살(自殺)은 자신의 생명의 존엄성을 해치는 큰 잘못이다.
이상은 생명에 대한 절대권을 가진 하느님의 권위를 침해하고 하느님의 사랑을 거스르는 행위이다. 그래서 교회에서는 확실하게 자살한 자를 위한 공식 예절, 즉 위령 미사나 고별 기도 등을 금하고 있다. 따라서 인간은 육신 생명을 경솔하게 여기지 말고, 하느님께서 창조하셨고 세상 마치는 날에 부활시키실 육신을 존중해야 한다(마태 5,8). → 안락사, 낙태
6. 6계 : “간음하지 마라”
이 계명은 정조(貞操)를 보호하고 정당한 부부 관계 외에 모든 정조의 남용을 금하는 것을 말한다. 만일 남용을 허용한다면 혼인의 목적 달성이 불가능하며, 인간 사회에 큰 혼란이 일어나 인간이 동물과 같게 될 것이다.
따라서 간음과 사음뿐만 아니라, 온갖 음란하고 부정한 행실과 그러한 행위로 이끄는 모든 위험한 기회까지 금한다.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되었으며 그분의 자녀이다. 그러므로 거룩하고 결백하게 살도록 해야 한다(1고린 6,9-11; 에페 5,3-5; 갈라 5,20-22). → 간음, 사음
7. 7계 : “도둑질을 하지 마라”
남의 재물을 존중하라는 이 계명은 사유 재산권을 보호하고 그것을 인정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 인간은 누구나 가족의 생활, 자유와 행복을 위해 재물을 소유할 권리가 있다. 그러나 하느님이 정하신 대로 인간은 자기의 활동으로 이 권리를 확보해야 한다. 공정한 분배와 질서를 지키는 사회 제도는 하느님 계명의 요구에 맞갖은 것이다.
따라서 지상의 것은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사용하고 나누며, 사회 공익을 위해 선용해야 한다. 그러므로 남의 소유물에 대한 강도, 사기, 절도, 부당한 고리 대금, 부당한 수단으로 남에게 손해를 끼치는 일은 없어야 한다. 그 밖에도 지나친 유흥, 가산의 탕진, 남의 생계 수단을 빼앗거나 방해하는 일도 없어야 한다. 그리고 직업에의 불충, 재산의 낭비 등도 금한다(마태 25,42).
8. 8계 : “거짓 증언을 하지 마라”
이는 말과 행실을 성실히 하고 남의 명예를 존중하라는 것이다. 정직하고 남의 명예를 존중하며,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고 타인의 모범이 되고, 자신의 의무를 완수하기 위해서 필요하다면 자신의 명예도 존중해야 한다(마태 23,12).
따라서 거짓말, 위선, 허세, 위증, 비방, 억측, 남의 명예를 손상시키는 모든 일을 금한다. 특히 자만하거나 악담을 하는 것은 자신의 명예를 높이는 것이 아니라, 겸손의 덕을 거스르게 된다(마태 7,1-2; 12,36-37).
9. 9계 : “남의 아내를 탐내지 마라”
부부는 마음과 몸의 정결을 지키고 서로에게 충실해야 한다. 부부 자신도 하느님의 모상으로 인간의 참된 존엄성을 향유하면서, 같은 애정과 같은 생각과 서로를 성화시키려는 노력으로 하나가 되어야 한다. 따라서 6계에 금하는 것 외에 그러한 행위에 대한 마음까지도 금하는 것이다(에페 5,3).
10. 10계 : “남의 재물을 탐내지 마라”
이 계명 역시 남의 재물을 존중하라는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물건에 대한 소유권을 인정받으면서 행사하고 싶어한다. 그렇다면 우리도 남의 소유권을 존중해 주어야 한다. 따라서 남의 재산을 부당한 수단으로 취득하려는 욕망까지도 금한다. 즉 사기, 횡령, 도둑질할 마음, 남에게 손해를 끼쳐 재물을 모을 생각, 자기의 이익을 위해 남의 손해를 바라는 마음까지도 없애야 한다(1디모 6,7-9).
◆흠숭◆
하느님께만 드릴 수 있는 최고의 예배 행위.
이 말은 오직 하느님에게만 쓸 수 있다. 하느님 외의 대상을 ‘흠숭한다’는 말은 틀린 표현이며, 성모 마리아와 성인께는 ‘공경’을 드린다고 한다.
출처 : [천주교용어자료집]
◆신성 모독◆
하느님께 봉헌된 사람이나 장소 또는 물건을 모독하는 행위.
하느님께 예배하기 위해 세속적인 용도에서 분리해 특별히 축성된 사람과 장소와 물건은 하느님께 속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를 침해하거나 남용함은 곧 거룩함을 모독하는 것이다.
출처 : [천주교용어자료집]
◆구원◆
인류를 죄악과 고통, 죽음 등에서 건져 내어 하느님께서 주신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게 하는 것.
출처 : [천주교용어자료집]
◆엘로힘◆
이는 히브리어로,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을 지칭한 말로, 엘로아(Eloah)의 복수형이나, 보통 단수로 사용되었다. 신약 시대 엘리(마태 27,46)는 엘로힘이 변형된 말이다. 이 밖에 엘로힘은 천사들(창세 6,1-4), 왕(시편 45,6), 영(靈 : 1사무 28,13), 이교도의 신(神 : 출애 18,11), 다윗 왕조(즈가 12,8) 등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하느님 아버지◆
이는 하느님께서 우리의 아버지이심을 나타내는 말이다. 하느님은 세상을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며 보존하시고, 권능과 자비로 세상을 다스리신다. 하느님은 당신 자신을 인간에게 드러내심(계시)으로써, 인간을 당신의 자녀로 삼으시고, 당신의 생명에 참여시키기에 하느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시다. 따라서 우리는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된 것이다(이사 63,16; 1요한 3,1-19).
출처 : [용어사전]
◆전지 전능◆
전지(全知)란 모든 것에 대하여 절대적으로 알고 있음을 말한다. 그리고 전능(全能)이란 하느님께서 당신의 본성에 모순되지 않는 한, 하고자 하시는 것은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따라서 전지전능이란 하느님께서 자신에 관하여 뿐만 아니라, 당신께서 창조하신 피조물의 모든 것(과거, 현재, 미래)까지도 알며, 원하는 것은 무엇이나 하실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전지전능은 하느님의 속성을 말하는데, 이 속성은 유일하고, 영원하며, 무량이고, 진리와 선, 그리고 무소 부재 등의 존재 자체와 관련된 경우와, 하느님께 내재하는 지성과 의지의 작용과 섭리에 관련되는 경우가 있다. 이 속성들은 각각 다른 속성을 포함하며 한 분의 절대자이신 하느님의 존재를 나타낸다.
◆천사와 악마◆
1. 의의 : 천사란 그리스어로 ‘하느님의 심부름꾼’이다. 이는 하느님을 모시는 사신이며 영적 존재로 구약에서는 하느님의 심부름꾼(창세 19,1-22; 민수 22,22-35), 사람을 보호하거나 처벌하는 존재였다(창세 24,7; 시편 91,11). 또한 하느님의 신하요 군대로(여호 5,14), 때로는 하느님의 발현이라고 기록하고 있기도 하다(창세 16,10).
2. 성서상의 천사 : 그러나 기원전 6세기 바빌론 유배 시대를 전후해서는 이들에 대한 인식이 달라진다. 하느님의 아들(욥기 1,2), 거룩한 사자, 수호자 영(靈) 등으로 묘사된다. 그리고 그 수는 대단히 많고(욥기 33,23; 다니 7,10), 몇 개의 그룹으로 나누어져 있다. 신학자들은 이때부터 천사들의 등급과 선하고 악한 천사의 구별을 하기 시작하였다.
신약에서는 하느님의 사자로 파견되고(마태 1,20; 사도 8,26), 꿈에 나타나며(마태 2,13), 영체이고 하느님의 군대이다(골로 1,16; 마태 26,53). 그리고 그리스도를 섬기고 사도들에게 봉사하며 어린이들을 보호한다(마태 4,11; 사도 5,19).
또한 그리스도는 천사들에게 옹위되어 심판하러 오시고(마태 16,27), 모든 천사들을 지배하신다(마르 13,32; 골로 1,16). 서간에는 세력과 능력의 천사, 권세와 주권의 천사 등으로 구별하여 부르나, 일반적으로 성서는 그 본성을 강조하지 않고, 오히려 사명과 행위를 나타내는 데 치중한다.
3. 교부와 교회의 가르침 : 교부들은 성서와 유다이즘, 그리고 이교도의 관념을 합하여, 천사의 본성은 창조된 영체요, 자유와 지혜를 가지고 창조되었다고 주장하였다. 그런데 그중 일부는 타락하여 악마(惡魔, Satan)가 되고, 착한 천사는 하느님의 사자요 인간의 수호자가 되었다고 했다.
성 토마스는 모든 피조물 중에 가장 출중하고 하느님과 가장 유사한 존재라고 하였다. 그러나 교회의 신조는 단 한 가지밖에 없다. 즉 하느님께서는 감각의 대상인 세상과 감각을 초월하는 영의 세계를 창조하셨다는 것이다(13세기 제4차 라테라노 공의회).
교회는 본질과 역할, 천사의 계급, 개인 수호 천사 등의 문제에 대해서는 아무런 결정을 하지 않았다. 다만 3대 천사(미카엘, 가브리엘, 라파엘) 이름 외에, 위경에 나오는 이름의 사용은 금하였고, 3대 천사의 축일을 9월 29일, 수호 천사의 기념일을 10월 2일로 정하였을 뿐이다.
4차 라테라노 공의회는 하느님에 의해 창조된 사탄과 모든 악마는 본질적으로 선하였으나, 그들 자신의 행동으로 악하게 된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성 토마스는 천사들의 선과 악에 대한 최초의 선택은 변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묵시 12,9). 그런데 성 암브로시오 시대부터 교부들과 신학자들은 천사를 9품으로 인식해 왔고, 6세기 초 디오니시오는 이를 세 계급씩 도식화하였다.
4. 교부들의 분류 : 상급 천사로 치품(熾品, Seraphim : 이사 6,2), 지품(知品, Cherubim : 창세 3,24), 좌품(座品, Thrones : 골로 1,16) 천사가 있다. 그리고 중급 천사로는 권품(權品, Dominates : 골로 1,16), 능품(能品, Principatus : 골로 1,16), 역품(力品, Potestates : 골로 1,16) 천사가 있으며, 하급 천사로는 주품(主品, Virtus : 에페 1,21), 대천사(大天使, Archangelus : 1데살 4,16), 천사(天使, Angelus : 창세 19,1; 묵시 5,2)가 있다.
5. 3대 천사 : 이중에 미카엘(Michael)은 “누가 하느님과 같으냐”라는 뜻으로, 이는 악마의 두목 루치펠과 그의 일당들을 거슬러 싸운 천사의 구호였다. 미카엘은 악마를 축출하는 임무를 지녔다(다니 10,13; 묵시 12,7-8). 그래서 1950년 교황 비오 12세는 경찰의 수호자로, 악마의 세력으로부터 영혼을 보호하고 임종 때 피난처가 되는 수호 천사로 정하였다.
라파엘(Raphael)은 “하느님께서 낫게 하셨다”는 의미이다. 라파엘 천사는 토비아를 도와 주고 이렇게 말했다. “나는 주 대전에 서 있는 일곱 천사 중 하나인 라파엘이다”(토비 12,15). 여기의 일곱 천사는 위경 에녹에 나오는 말이다.
가브리엘(Gabriel)은 ‘하느님의 영웅’이라는 뜻으로, 즈가리야와 마리아에게 나타나 하느님의 소식을 전하였다(루가 1,13. 28). 그리고 요셉의 꿈에도 나타나는 등 구원 사업에 관한 일이면 언제든지 나타났다.
6. 악마 : 악마(惡魔)는 구약에 사탄(Satan, 적대자, 거역하는 자)으로 기록되어 있으며(민수 22,22; 1사무 29,4), 창세기에는 하느님을 증오하는 어떤 악의 세력에 의한 인간이 타락했음을 암시한다. 신약에서는 예수께서 인간의 악한 의지를 바로잡아 하느님께 이끌고,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선한 의지에 도전하는 막강한 힘에 대항하여 고난을 당하신다(1요한 3,8).
결국 악마는 하느님이 창조하신 것들을 파괴하며 혼란과 어둠을 가져오는 존재이다. 그들은 강한 증오와 자만심으로 하느님께 대항하고, 인간의 죄 가운데 자신을 드러내는 존재였다. 신학자들은 그 두목 루치펠(Lucifer)은 ‘빛을 지니고 있는 자’(이사 14,12)로서, 원래는 천사 중에 뛰어난 존재였으나 교만하여 하느님과 같아지려고 하였다고 한다.
또한 루치펠은 신약에서 사탄이라고 하였고(루가 11,18) 그의 졸개들을 마귀라고 하였다. 그러나 미카엘 대천사에게 지옥으로 쫓기었다(2베드 2,4). 사람을 죄로 유인하는 악마는 신약에서 우상과 마술과의 그 관계가 확실히 밝혀져 있다(1고린 10,20; 갈라 5,20; 묵시 9,21).
예를 들어 마습(魔襲)은 마귀가 사람을 습격하여 괴롭히거나 심한 공포를 주는 것이고, 부마(附魔)는 마귀가 사람에게 접하여 비정상적으로 행동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마귀는 하느님의 지배를 벗어나거나 영혼을 침범하지는 못하며, 인간의 의지 역시 완전히 점령하지 못한다(마르 5,2-4).
출처 : [용어사전]
◆가슴 치기◆=통회
이는 고백 기도를 할 때, 하느님과 이웃 앞에서 자신의 죄가 많음을 고백하면서, “제 탓이요, 제 탓이요, 저의 큰 탓이옵니다” 하며, 오른손으로 가슴을 두드리는 동작을 말한다. 따라서 이는 우리 내심 세계의 문을 두드려 열어젖뜨리는 동작이다.
미사 때나 사사로이 기도할 때는 자기 자신을 진심으로 뉘우치고 반성하게 한다. 결국 자신을 일깨워 내심의 세계를 경각시킴으로써, 하느님의 부르심을 들으려는 동작이며, 뉘우치는 마음에 자성과 자책을 독촉하는 행위이다.
출처 : [용어사전]
◆성소◆
1. 의의 : 이는 넓은 의미로 소명(召命)을 말한다. 원래 소명이란 신하를 부르는 임금의 명령이나, 여기서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말한다. 좁은 의미로는 성직자나 수도자로 하느님께서 부르심을 의미한다. 이를 사제 성소 혹은 수도 성소라고 한다.
2. 응답 : 성소는 이스라엘 민족을 부르신 것과 같이 집단적 성소와, 아브라함, 모세, 사무엘, 다윗, 예레미야 등이 받은 개별적인 성소가 있다. 그러나 문제는 응답이며, 하느님의 부르심은 언제나 응답과 결단에 앞서 있어야 하기에, 응답 없는 부르심은 은혜로움이 되지 못한다.
부르심의 은혜가 아무리 크다고는 하나, 전폭적으로 그분을 믿고 따름이 없는 부름은 구원이 없다. 그리고 하느님은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 우리를 부르신다. 따라서 부르심에 충실한 것만이 신앙인의 바른 자세이다.
3. 성소자 : 사제 성소를 받은 사제는 성품 성사의 힘으로 영원한 대사제이신 그리스도의 모습을 따라, 이 세상에서 복음을 전하고 신자들을 사목하며, 하느님께 예배를 드리기 위해 축성된다. 수도 성소를 받은 수도자는 청빈, 정결, 순명의 복음적 권고를 따라 “하늘의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같이 여러분도 완전해야 한다”(마태 5,48)는 말씀을 실천하는 성소를 받는다.
출처 : [용어사전]
◆모든 성인의 통공◆ =그리스도의 신비체
1. 세 가지 교회 :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신비체의 교회는 세 가지의 상태가 있다. 세상에 있는 순례 교회(地上敎會), 연옥을 말하는 정화 교회(鍛鍊敎會), 천국인 승리 교회(凱旋敎會)가 있다.
그런데 순례 교회는 주님의 나라를 얻기 위하여 악마와 세속과 욕망과 싸우고 있는 지상 여정(巡禮) 교회를 말한다. 그래서 이를 신전(神戰) 교회라 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투쟁 교회(鬪爭敎會)라고 한다.
그리고 정화 교회는 죽어서 심판을 받은 후 하늘 나라에 가기까지 정화(淨化)되어 가는 연옥의 공동체를 말한다. 그래서 이를 단련(鍛鍊) 교회라고 했다.
또한 승리 교회는 지상 영신 전쟁에서 승리(勝利)한 천상 공동체를 말한다. 그래서 이를 개선(凱旋) 교회라고 했으나 지금은 승리 교회라고 한다.
2. 통공(通功) : 그런데 이 교회들은 그리스도를 머리로 해서 서로 돕고 기도하며 서로 이 공(功)을 나눈다. 그러기에 이를 ‘모든 성인의 통공(通功)’이라고 한다. 통공이란 기도와 선행의 대가를 당사자에게만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교회 공동체, 즉 순례 교회, 승리 교회, 정화 교회 등에 속한, 다른 이에게도 주고받을 수 있음을 말한다.
예를 들어 천상의 성인에게 지상의 자신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청할 수 있다. 또한 연옥에 있는 영혼을 위한 우리의 기도가 하느님을 통해 전달된다. 이처럼 기도나 선행의 대가(功勞)가 당사자에게만이 아니라, 천국이나 연옥의 다른 이에게도 통하기에 모든 성인의 통공이라고 한다.
이러한 일치는 가장 숭고한 방법으로, 성령의 능력이 성사의 표시를 통하여 우리에게 이루어지므로, 미사 성제 때 천상 교회와 가장 잘 결합된다.
출처 : [용어사전]
◆수호성인◆
하느님 앞에서 변호인이자 특수한 장소나 지역, 수도 가족 또는 법인의 보호자이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성인들 또는 복자들을 가리킨다. 수호성인들은 어떤 성당이나 기관 또는 공동체의 주보성인(Titular Saint)과 구별되어야 한다. 그러나 주보성인이 수호성인의 칭호를 갖는 경우도 더러 있다.
수호성인의 선택
국가부터 작은 본당 사목구에 이르기까지 모든 장소, 수도 가족, 법인, 기관, 동우회, 동아리와 같은 교회 모임이나 평신도 모임은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칭호, 천사들, 성인들, 복자들(특별한 관면을 얻어야 함)을 수호성인으로 선택할 수 있다. 수호성인은 한 분만 선택해야 한다. 이전부터 이차적인 수호성인이 있었다면 그 수호성인은 계속해서 그 역할을 할 수 있다. 장소의 수호성인은 성직자들과 신도들이 선택한다. 그들은 수호성인의 보호를 받는다. 수도 가족과 법인의 수호성인은 책임을 맡은 사람이나 그 단체의 회원들이 선택하며 이때 자문을 받거나 투표를 통해 결정한다.
인준과 확인
수호성인을 선택하면 지역 교회 관할권자의 인준을 받아야 한다. 수호성인이 국제적 성격을 띠었으면 성좌가 이를 인준한다. 지역 관할권자는 경신성사성에 서면으로 신청하여 인준을 받아야 한다. 신청 서류에는 절차에 관한 보고와 그 수호성인 선택을 인준한 지역 관할권자의 증거가 포함된다.
전례 거행
장소의 수호성인, 곧 도시나 군, 법인, 동우회, 기관 또는 동아리의 수호성인만을 대축일의 등급으로 경축할 수 있으며 보편 전례력에서 다른 모든 축일들, 성탄 시기와 연중 시기 주일들보다 우선한다. 교구, 관구, 지구, 국가 또는 더 큰 지역의 수호성인은 축일의 등급이며 고유한 전례력을 가지고 있는 수도회에서도 거행된다. 이전의 이차적인 수호성인은 의무 기념일 등급으로 거행될 수 있다. 다른 수호성인들은 공경하지 않는다. 수도 가족들은 그들의 수호성인, 주보성인 또는 성인 등급의 창설자를 대축일로 거행할 수 있다. 그들은 특별한 이유가 있으면 이 성인들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여 또 다른 대축일로 지낼 수 있다. 수도회 관구의 수호성인은 축일의 등급이다.
개인을 위한 수호성인
세례성사 때 부모가 자녀들을 위해 선택해 주는 성인의 이름은 세속명과 구별되는 그리스도교 이름, 곧 세례명이다. 성인은 그 어린이를 위해 하느님께 특별히 중개하는 분으로 여겨진다. 어른이 되어 견진성사를 받을 때나 수련자가 수도 생활을 시작하면서 새 이름을 선택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세례명 참조).
직업의 수호성인
교회는 공식으로 특별한 성인들을 회사나 전문직의 수호성인으로 지정하였다. 성인들을 수호성인으로 모시는 것은 그들의 삶에서 있었던 사건이나 어떤 특성 때문이다. 성체대회를 위한 성 파스칼 베일론, 도서관 직원들을 위한 성 예로니모, 항공 여행자들과 조종사들을 위한 꾸뻬르띠노의 성 요셉, 지진을 위한 성 에미지우스를 그 예로 들 수 있다.
◆하느님의 모상◆
하느님께서는 자신의 계시하는 수단. 세상에 아무도 그분을 본 적이 없고 볼 수도 없으며 오직 그분의 모상을 통하여 알아 볼 수 있을 뿐이다(요한 1:18). 그 분은 전능과 지혜를 통하여 자신을 계시하였으나 마침내 자신이 완전한 모상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계시하였다. 십계명에서 우상을 만들지 못하게 한 것은 완전한 모상의 강생을 소극적으로 준비시키려는 뜻도 있다. 인간이 하느님의 모상인 것은 세상의 피조물을 지배하고(창세 1:26) 불멸성을 지니기 때문이다(창세 2:23).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같이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마태 5:48)고 한 말은 인간이 하느님의 모상이라는 교리의 논리적 귀결이었다. 한편 인간은 불완전하고 죄 많은 모상이기도 하기에 구약성서의 지혜로 윤곽이 잡히고 그리스도에 의해 실현된 바를 필요로 한다.
지혜는 “하느님의 활동력을 비추어 주는 티 없는 거울이며 하느님의 선하심을 보여 주는 모상”(지혜 7:26)이다. 신약성서는 지혜를 하느님의 말씀이신 그리스도와 동일시한다. 그리스도가 하느님의 모상임은 요한복음에 나타나 있다. “나를 보았으면 곧 아버지를 본 것이다”(요한 14:9). 이는 바울로 서간에서도 강조되어 있다. 그리스도가 하느님의 모상인 까닭은 그가 하느님의 아들이며(로마 8:29) 불멸성을 지녔고 죽은 자 가운데 처음으로 태어난 자이자 하느님의 계획을 일치시키는 자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창조의 원리요(골로 3:10) 새로운 창조로 인한 회복의 원리이다. 하느님의 불완전한 모상인 지상의 아담은 부활하신 천상의 아담의 모상으로 변화되어야 하는 것이다(1고린 15:49). (⇒) 인간, 창조1
출처 : [가톨릭대사전]
◆하느님의 속성◆
하느님이 필연적으로 지니시는, 단일의 완전성. 인간의 유한한 인식 양식에 따를 때 이 완전성은 신적(神的) 존재의 본질을 구성하거나 그 본질에서 연역된 개념으로 이해된다. 하느님의 본질에서 연역된 하느님의 속성은 다시 존재적 속성과 작용적 속성으로 구분된다. 존재적 속성은 하느님의 존재 자체와 관련되는 속성이며, 유일성, 무한, 영원, 무량(無量), 진리, 선(善), 무소부재(無所不在) 등과 같은 완전성을 말한다. 한편 작용적 속성은 하느님께 내재하는 지성과 의지의 작용과 같이 하느님의 섭리에 관련되는 속성이며 그 섭리의 결과인 세상의 창조와 보존 등을 가리킨다.
이와 같은 하느님의 속성들은 명확히 구별되는 것이 아니고 각 속성은 다른 속성을 포함하는 관계에 있으며 모슨 속성들이 한 분의 절대자이신 하느님의 존재를 나타낸다. 하느님의 단일한 완전성이 다양한 속성으로 비치는 것은 인간 지성의 한계 때문인 것이다.
◆교회1◆
1. 명칭: 구약성서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야훼의 백성'(Qahal Yahwe)이라고 부른 것을 70인역 그리스성서가 '하느님의 백성'(ekklesia tou theou)이라고 번역하였다. 신약성서에서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단체를 구약의 하느님의 백성의 계승자라는 의미로 Ecclesia로 부른 것이 라틴어와 라틴계통 현대어의 어원이 되었다. 결국 교회란 하느님의 백성이란 뜻이다.
2. 교회의 기원: 그리스도교 신자단체가 출현한 것은 그리스도 기원후의 역사적 사실이지만, 인간 구원을 위한 하느님의 경륜으로서 교회는 우주창조에서 부터 암시되고, 구약시대를 통하여 오랫동안 준비되고 그리스도로 인하여 설립되고 세상종말에서 완성되는 신비이다(교회헌장 2). 그래서 교회의 기원을 논하자면 단순히 현세 교회의 출현만을 고려할 수 없고 하느님의 구원의 경륜의 실현으로서 교회 기원을 생각하게 된다.
① 교회의 준비 단계: 하느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은 인간들이 하느님께 의합한 백성이 되어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하는데 있다. 인간들이 범죄하여 하느님의 뜻을 거역하였지만, 하느님은 구원의 계획을 포기하지 않으셨다(창세 3:15, 9:16). 하느님은 인간역사에 구체적으로 개입하시어 아브라함을 선택하시고(창세 12:1-9) 그의 후손을 통하여 구세사(救世史)를 전개할 것을 약속하셨고(창세 15:1-7, 17:1-8) 아브라함은 구원의 약속을 조건 없이 믿음으로써(창세 12:4, 15-7) 모든 신앙인의 표본이 되었다(갈라 3:7-9).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서 양의 피로써 구원되어 해방된 것은(출애 12:1-4) 그리스도의 피로써 이루어질 구원의 상징이며(1고린 5:7, 루가 22:15-20), 이스라엘이 율법을 받고 계약을 맺어(출애 20:7-17) 하느님의 백성이 되었음은(출애 19:5-6, 신명 7:1-6) 신약의 하느님의 백성의 예표(豫表)가 된다(1데살 2:12, 1베드 2:9-10). 이스라엘이 약속된 땅에 들어가서 왕을 세웠는데 다윗왕은 야훼의 영이 머무르는 이스라엘의 목자로 축성되어 그의 왕권이 영구하리라는 보장을 받았으나(2사무 7:5-16) 그들은 계약에 충실하지 않아서 망국의 비운을 맞았다(2열왕 25,2, 역대 36:17-21). 바빌론 유배 생활을 통하여 그들은 정화되고 그들의 민족적 현세적 구원관은 보편적 영성적 구원관으로 승화되어 갔다.
이사야, 예레미아, 에제키엘 등 대예언자들은 야훼께 충실한 '남은 사람들'(이사 4:2-3, 예레 5:18, 에제 5:3) 중에서 메시아가 출현하여 이스라엘과 만백성을 구원할 것이며(이사 49:5-6), 메시아는 충실한 야훼의 종으로서 야훼의 말씀을 전하고(이사 42:3) 학대와 고난을 받고 불명예스러운 죽음을 당함으로써(이사 53:4) 세상을 구할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야훼의 고난받는 종은 예수 그리스도를 예시한다. 그 후로 이스라엘 중에 많은 사람들이 하느님의 나라의 실현을 기다리고 있었다.
②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 창립: 예수는 당신의 강생으로써 하느님 나라가 지상에 왔음을 설파하셨다(마태 12:28, 루가 16:16). 새로운 하느님의 나라는 정신적 해방이며(마태 1:21, 마르 1:15), 예수의 피로써 맺는 새로운 계약의 나라이며(루가 22:20), 만민을 포함하는 것이며(마태 8:11, 요한 12:32), 작은 씨앗으로 출발하여(마르 4:30-32) 선인과 악인을 포함하여 자라나(마태 13:24-30) 세상 종말에 완성되어(마르 9:47, 루가 13:25-30) 하느님과 친교를 이루게 하는 것이다(루가 12:32, 마태 25:31-46, 마르 10:29).
이러한 하느님의 나라는 예수 자신을 통하여 실현된다. 그는 구약을 완성하려 오신(마태 5:17) '사람의 아들'(다니 7:13-28, 마태 26:64)이며 그리스도이시며(마르 14:61-62) 백성을 위하여 고난을 받고 죽으실 것이다(마태 16:21-23). 그는 무수한 기적으로 하느님의 능력이 세상에 왔음을 증거하고(루가 11:20, 마태 12:28) 그것을 믿지 않는 유태인들을 책망하셨다(마태 11:20-24). 예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의 나라는 영신적이면서 현세에서는 성장하는 백성으로 나타난다. 그래서 그는 이스라엘 12지파를 상징하는 12명 사도들을 선택하시고(마르 3:13-19) 그들 중에서 베드로를 특히 간택하시어 그 위에 당신의 교회를 세우실 것을 약속하셨다(마태 16:15-19). 최후의 만찬석에서 예수는 성체성사와 신품성사를 세우시고 당신의 피로써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새롭고 영원한 계약을 맺으실 것을 다짐하시고(루가 22:20, 1고린 11:25) 마침내 십자가상의 죽음으로써 인간구원의 대업을 이루셨다(루가 23:43, 요한 19:30). 그리고 그는 부활하여 '주님이요 그리스도이시며 영원한 대사제로서'(사도 2:36, 히브 5:6) 하느님의 나라를 확립하시고, 구원의 복된 소식을 전하도록 사도들에게 권한을 주어 천하에 파견하셨다(마르 16:15-17, 마태 28:19-20, 루가 24:47, 사도 1:8). 그래서 교회는 그리스도의 빠스카 신비에서 탄생한 것이다(교회헌장 3).
주께서 약속하신대로 성령이 강림하시어 사도들이 진리를 깨닫고 용감히 선포케 하셨으며(사도 2:14-36) 믿는 이들은 성령의 능력을 받아서(사도 22:1-36) 하느님의 백성이 되었다. 성령의 강림은 교회의 창립을 완성하고 세상에 선포하였으며 항상 교회에 계시면서 교회를 인도하신다(교회헌장 4).
3. 교회의 본성 : 성서는 한 번도 교회가 무엇이라고 정의한 일이 없지만,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포도원, 건축, 목자와 양떼, 야훼의 짝이라는 표현과 하느님의 백성이라는 개념으로 교회를 묘사하였고, 바울로는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이미지를 즐겨 사용하였다.
① 교회는 하느님의 백성이다 : 구약의 백성이 계약으로 야훼께 맺어진 백성인 것처럼 하느님의 모든 구원의 약속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졌으니(2고린 1:20) 그리스도를 믿는 백성은 그리스도의 성혈(1고린 11:25)과 성령의 힘(2고린 3:6) 으로 새로운 계약을 맺은 하느님의 백성이다(1베드 2:9).
이 백성은 구약의 율법의 속박에서 벗어나 성령의 자유를 얻은(갈라 4:7) 자녀이고, 누구든지 신앙으로 구원되는 보편적 백성이다(에페 2:15, 로마 10:12). 또 이 백성은 현세에서 성장하여 세말에 완성될 것이므로(1고린 15:28, 묵시 2:3) 세상의 복음화를 위하여 계속적으로 파견되는 백성이다(로마 10:14-15, 1고린 9:16-18). 이 백성의 으뜸은 그리스도이시고(에페 1:22, 골로 1:18), 백성의 신분은 하느님의 자녀이며(로마 8:15), 법률은 사랑의 계명이며(요한 13:34-35), 이 백성의 목적은 하느님 나라의 구현이다(마태 6:33). 이를 위하여 이 백성은 사도단을 계승하는 주교단에 의하여 인도되고 여러 가지 봉사직에 의하여(1고린 12:27-28) 유기적 조직체로 형성되어 있다. 사람은 성세성사(1고린 12:13)와 성체성사(1고린 11:23-26)로 이 백성에 가입하여 그리스도의 구세사업에 참여한다. 그리스도의 예언직에 참여하여 구원의 진리를 선포하고(교회헌장 9), 그 사제직에 참여하여 자신과 세상을 성화하고(교회헌장 10, 11), 그의 왕직에 참여하여 복음적 원리가 세상에 실현되도록 노력한다(교회헌장 31, 36).
현세에서 순례하는 하느님의 백성은 세속의 유혹(묵시 13:11-17)과 박해를 당하지만(요한 15:18-23, 묵시 13:1-10) 믿음과 사랑으로 시련을 극복하고 세속을 이긴다(1요한 4:15-17, 5:1-5). 그리하여 세말에 이르러 모든 수고를 그치고 하느님의 본질을 직관하는 완전한 친교에 들어갈 것이다(묵시 22:3-4). 그러나 현세의 교회와 내세의 교회는 유일한 교회의 두 가지 양상(樣相)에 불과하다. "교회는 두 가지 상태를 가지고 있다. 현세에서는 은총의 상태에 있고, 내세에서는 영광의 상태에 있을 것이다"(St. Thomas, In Col. c. 1, lect. 5).
②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비체이다 : 하느님의 백성이라는 개념만으로는 교회의 신비를 충분히 표현하지 못한다. 교회가 하느님의 백성이 되려면 그리스도와 함께 공동 상속자가 되어야 하고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어야 한다(갈라 3:26-29). 신앙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고 세례로써 예수와 일치한 모든 사람은 서로 한 몸이며(갈라 3:26-29) 성체와 성혈을 영하는 우리는 한 몸이고(1고린 10:16-17) 그리스도의 지체이다(1고린 6:15-17).
신자들은 모두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구원되어 그리스도의 몸이 되며(1고린 12:12-14, 골로 1:18, 에페 1:23)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가 되신다(에페 1:22, 골로 2:19, 에페 4:15-16). 교회는 머리이신 그리스도로부터 성령과 은총을 받아서(에페 4:11-12, 5:18, 골로 2:19) 믿음과 인식에 있어서 일치하고 성숙한다(에페 3:19, 4:13). 이리하여 머리이신 그리스도는 당신의 몸인 교회를 통하여 구원의 경륜을 펴시고(에페 2:15-16) 만물을 다스리신다(에페 1:22-23).
이 신비체의 신적 생명의 원리는 성령이시다. 성령은 신자들을 신앙에로 부르시고(갈라 3:2-3), 그들을 거룩하게 하시고(1고린 2:10-14, 로마 8:15), 진리를 믿고 가르치는데 오류가 없도록 인도하시고(요한 16:13-15, 1요한 2:20 · 27, 2디모 1:14), 그들을 그리스도와 일치시키시며(로마 8:9, 1고린 6:17, 필립 2:1) 여러 가지 직무와 은사를 주시어(1고린 12:4-11, 로마 12:6-8) 교회를 다스리신다. 그래서 토마스는 성령의 역할을 심장에 비유하였고(S. Theol, III. q8, a. 1, ad 3), 아우구스티노는 영혼에 비유하였으며(Sermo. 267:4), 신비체 회칙(n. 55)과 교회헌장도 성령을 교회의 혼이라 한다(교회헌장 7). 교황 비오 12세는 '신비체 회칙'에서 그리스도는 모든 피조물에서 첫째가 되시고 우리와 같은 인간성을 가지심으로써 신자들의 공동체의 머리가 되시고 당신이 가진 영수은총(領首恩寵)을 지체에게 나누어 주시어 지체인 교회가 그리스도의 광명과 거룩함과 생명을 누리게 하신다고 설명하고 있다(신비체 회칙 35, 45, 47, 48). 그러나 그리스도와 교회의 일치는 물리적 윤리적 일치가 아니고, 개체는 여럿이지만 영신적 생명은 하나인 신비스러운 일치다.
4. 교회의 구조와 조직 : 교회는 하느님과 인간의 만남의 장(場)이요 만남의 수단이기 때문에 그 구조는 신적(神的)인 면과 인간적인 면을 아울러 가지고 있으며, 이러한 구조는 어떤 형태의 조직으로 구현될 것이니 교회는 사도단 위에 위계적(位階的)으로 조직되어 있다.
① 교회 구조의 양면성 : 그리스도의 신비체인 교회는 머리이신 그리스도께서 신성과 인성을 가지신 것처럼 신적인 면과 인간적인 면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는 아리아니즘, 네스토리아니즘은 교회의 불가시(不可視)한 면을 배격하였고, 그리스도의 인간성을 부인하는 도세티즘은 교회의 가시성(可視性)을 배격하였다. 교회는 하느님께서 설립하시고 인간의 지혜를 초월하는 계시진리를 가지고 있으며 보이지 않는 은총을 간직하고 있으므로 불가시적 · 신적 구조를 가지고 있지만, 동시에 신자들의 공동체요 신자들을 인도하는 가시적 제도와 방법을 가지고 있으니 가시적 · 인간적 구조를 가지고 있다. 교회의 본질은 하느님과 인간의 친교(親交)의 신비이지만, 이 신비는 역사 안에 인간들로 구성된 공동체로서 나타난다. 교회는 하느님의 말씀을 믿고 고백하고 전파하는 말씀의 공동체요, 칠성사를 통하여 인간을 성화(聖化)하는 성사적 공동체이며, 위계적으로 조직된 사랑의 공동체로서 하느님과 인간에게 봉사한다. 그래서 교회는 변하지 않는 은총과 신앙의 신적인 구조로서는 역사를 초월하고, 가변적인 인간의 구조로서는 영고성쇠(榮枯盛衰)의 역사에 속한다.
교회의 은총과 신앙과 윤리가 거룩하고 인간을 성화하므로 거룩한 백성이지만(출애 19:6, 에페 5:25-27, 1베드 2:9), 이 백성 안에는 잡초와 나쁜 고기가 섞여 있기 때문에(마태 13:24-30, 47-50), 성인들로 구성된 교회를 주장하는 몬타니즘 · 도나티즘 · 얀세니즘을 이단으로 배척한다. 교회는 거룩하면서도 항상 정화되어야 한다(교회헌장 8). 구원의 진리에 대한 인간들의 인식과 실천은 불완전하기 때문에 교회의 모든 인간적 제도나 방법은 불완전하다. 그래서 교회는 시대와 환경에 따라서 복음을 선포하는 제도와 방법을 경신하고 활동을 현실에 맞게끔 계속해서 연구 조정하여야 한다(일치교령 6).
② 교회의 위계적 조직 : 교회는 그리스도의 뜻에 의하여 사도단의 후계자인 주교단에 의하여 사목되고, 모든 신자들이 응분의 권리와 의무를 가지는 서열로써 조직되어 있다. 이러한 교회조직을 교계제도(敎階制度, Hierarchia)라고 한다. 주께서 12사도를 선택하시고(루가 6:13-16) 그들에게 권한을 주어서 세상에 파견하셨기 때문에(마르 16:15, 마태 28:19-20) 사도들은 주의 이름으로(사도 4:17) 말씀의 직무(사도 2:42)와 성사의 직무(사도 8:14-17)와 사목의 직무(1고린 4:14-21)를 수행하였고, 바울로는 “여러분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으로 여기며 하느님의 심오한 진리를 맡은 관리인으로 생각해야 합니다”(1고린 4:1) 하였다.
사도들의 후계자 문제를 명시적으로 주께서 명하신 성서귀절은 없지만 교회와 더불어 계속되어야 할 이 직무의 성격 때문에(교회헌장 20) 사도들은 강론 · 감독 · 보조자 등을 선정하여 그들에게 사목직무를 안수(按手)로써 전하여 주었다(1디모 4:14, 사도 20:28, 1베드 4:2, 디도 1:5, 2:15). 사도들이 별세함에 따라서 사도들의 협력자들은 그들을 계승하였고, 초대 교회의 글레멘스, 이냐시오, 이레네오, 테르툴리아노, 치프리아노 등의 증언에 의하면 초기에는 집단지도 체제였으나 차츰 일정 지역에 정주(定住)하는 단일지도체로 발전하였다. 교계제도가 오늘의 형태로(주교, 신부, 부제) 확립되기까지 1세기 이상의 발전과정을 거쳤다.
다른 한편 그리스도는 베드로를 사도단의 으뜸으로 세우셨고(마태 16:18-19, 루가 22:31-32, 요한 21:15-17), 베드로는 초기 교회에서 사도단의 단장으로서 행세하였다(사도 1:15, 2:14, 4:8, 10:24-48, 15:7-22). 그리고 베드로는 그의 활동의 후기를 로마에서 보내고 거기서 순교하였기에(64년), 로마의 주교가 베드로를 계승하여 주교단의 으뜸인 교황이 되었다. 이렇게 교회는 교황을 단장으로 하는 세계 주교단에 의하여 사목되고, 주교단은 하느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교도권(敎導權)과 성사로써 신자들은 성화하는 신품권(神品權)과 신자들을 다스리는 통치권(統治權)으로써 교회를 사목한다. 그리고 교황이 교황의 직권을 가지고 신앙과 도덕에 관한 교리를 선언할 때와, 주교단이 교황과 함께 이러한 선언을 할 때에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절대로 그르치지 않는다[無謬性].
주교의 직무를 보좌하는 하위 성직자(신부, 부제)도 있다. 신부는 신부품을 받아서 주교의 감독하에 주교의 사목직을 보필하고, 부제는 부제품을 받아서 주교 · 신부를 보필하는데, 신부와 부제는 그런 권한을 신부품 · 부제품을 통하여 그리스도께로부터 받지만, 그 권한의 행사에 있어서는 주교의 통치권에 종속되어 있다(교회헌장 28, 29). 주교 · 신부 · 부제의 신품을 받지 아니한 모든 평신자는 세속 가운데서 세속사물을 관리하면서 세상의 복음화를 위하여 신앙생활을 영위한다(교회헌장 31). 성직자나 평신자 중에서 청빈 · 정결 · 순명의 서원(誓願)을 하고 자신을 오로지 봉헌하여 거룩함을 증거하고 완성된 교회의 모습을 미리 보여 주는 신자를 수도자라 한다. 이렇게 교회의 구성원을 직무상으로는 성직자와 평신자로 구분하고 생활형태상으로는 수도자와 비수도자[在俗人]로 구분할 수 있다.
5. 교회의 사명과 직능 : 교회의 사명은 세말까지 모든 인간들에게 구원의 복음을 전하여 그들을 하느님의 백성으로 만들고 그들을 통하여 세상 만물을 그리스도 안에 수렴하여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것이다(1고린 15:18, 교회헌장 17). 따라서 교회의 사명은 만인과 만물을 대상으로 하는 보편적인 것이고, 보편적이므로 유일한 길이다.
① 교회는 보편적 구원의 길이다 : “너희는 온 세상을 두루 다니며 모든 사람에게 이 복음을 전하라”(마르 16:15)하신 파견의 말씀은 교회로 하여금 주님의 구원사업을 계속하라는 뜻이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신비체로서 그리스도의 사업을 계속하는 활동을 복음화(福音化)라 한다. 교회의 복음화 활동의 대상은 모든 인간이다. 교회는 처음부터 민족종교가 아니고 모든 종족과 문화를 포용하는 보편적 종교로서 출발하였다. 묵시록은 하느님의 백성이 ‘모든 나라와 민족과 백성과 언어에서 나온 사람들’(묵시 7:9)이라 하였다. 1세기말에 이냐시오는 교회의 보편성을 강조하여 처음으로 우리 교회를 ‘가톨릭 교회’라 불렀다(Ep. Smyrn. 8:2). 교회의 사명이 보편적이므로 “교회는 어떠한 민족이나 국가에도, 또 어떠한 특수 생활형태나 고금의 어떠한 관습에도 불가분의 배타적 관계로 얽매이지 않는다”(사목헌장 58). 그러면서도 같은 이유 때문에 교회는 “어느 민족의 현세적 재보도 감소시키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여러 민족들의 재능과 보화와 관습들 중에서 좋은 것을 촉진하고 수용하여 그것을 정화하고 강화하며 높인다”(교회헌장 13). 그래서 교회는 특정 문화를 초월하면서도 모든 문화에 내재(內在)하며, 다양성 안에서 통일을 유지하고, 모든 분파주의를 배격하면서 동시에 폐쇄적 획일주의를 반대한다. 교회의 복음화의 대상은 인간 뿐 아니라 인간의 업적과 그 존재상황까지 포함한다. 그래서 교회는 인간 활동의 모든 분야와 인간사회의 모든 영역이 인간의 구원에 이바지할 수 있게 복음화하려 한다. 왜냐하면 인간의 존재상활 중에서 특히 윤리적 차원이 개재된 사회와 문화의 복음화를 도외시하고서는 구체적인 인간의 구원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② 교회는 유일한 구원의 길이다 : 교회가 모든 사람의 구원의 길이라면 동시에 유일한 구원이 길이다. “그리스도의 몸도 하나이며 성령도 하나이며 … 희망도 하나이다. 주님도 한분이시고 믿음도 하나이고 세례도 하나이며 만민의 아버지인 하느님도 한 분이시다”(에페4:3-6). 바울로는 교회가 하나일 수밖에 없는 내적 이유를 성부 · 성자 · 성령의 일치에 두고, 구체적 이유를 하나의 신앙과 하나의 세례와 하나의 몸이라고 지적한다. ㉮ 동일한 신앙 : 그리스도교의 계시는 각자의 양심에 부어준 것이 아니고 교회에 맡겨 주신 공식적인 것이다. 그리고 이 계시를 선포하는 기관이 성서와 성전(聖傳)이므로 각자는 “성서의 어떤 예언도 임의로 해석해서는 안 되며”(1베드 1:20) 성서의 보관자인 교회의 성전이 해석하는 바에 의하여 모든 신자들은 동일한 신앙을 견지한다(신학대전 π-π, q. 5, p. 3). ㉯ 동일한 예배 : 예배는 가장 현저한 신앙고백이다. 교회의 예배인 전례는 인간 구원의 원천인 그리스도의 빠스카 신비를 성사적 방법으로 기념하고 재현하므로, 동일한 전례를 통하여 신자들은 같은 믿음 · 희망 · 사랑의 공동체를 형성한다. 특히 성체성사는 그리스도와 신자들 사이에, 그리고 신자들 상호간의 일치의 근본이 된다. “우리가 빵을 떼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을 나누어 먹는 것이 아닙니까. 빵은 하나이고 모두가 그 한 덩어리의 빵을 나누어 먹는 사람들이니 비록 우리가 여럿이지만 모두 한 몸인 것입니다”(1고린 10:16-17). ㉰ 동일한 사랑의 봉사 : 교회는 같은 신앙과 같은 예배에 의하여 같은 은총을 누리고 동일한 교계제도의 봉사를 받아서 하나인 사랑의 공동체를 이룬다. 교계제도는 공동체의 일치를 유지시키는 사랑의 봉사 체계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같은 신앙과 예배를 가지면서도 사랑의 봉사제도가 제대로 공동체에 봉사하지 못하거나 교인들이 교계의 지도를 따르지 않으면 교회는 분열되었던 것이다.
③ 교회의 직능 : 주께서는 교회가 그 사명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직능을 부여하셨다. “너희는 가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내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 것을 지키도록 가르쳐라”(마태 28:19-20). 이 말씀은 이미 사도시대의 교회가 자신에게 주어진 가르치는 직능(예언직)과 사람을 성화하는 직능(사제직)과 다스리는 직능(왕직)을 자각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 교도권(예언직) : 바울로에 의하면 교회의 첫째 임무가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다(로마 10:14). 교회가 가르치는 복음은 그리스도의 계시이므로 교회는 계시에 다른 내용을 가감할 수 없고, 다만 계시된 것을 해설하여 가르칠 따름이다. “교도권은 … 하느님의 말씀에 봉사하고 전해진 것만을 가르친다. 하느님의 명령과 성령의 도우심으로 그것을 경건히 듣고 거룩하게 보존하며 성실하게 진술하고 신앙의 유산에서 믿을 것으로 제시된 것을 알아내는 것이다”(계시헌장 10).
교회는 교황과 주교단을 통하여 구원의 진리를 유권적으로 교시하는데, 교황이 교좌(Ex cathedra)에서 선언할 때와 주교단이 공의회를 통하여 선언할 때는 장엄 교도권이라 하고, 장엄 교도권으로 신앙과 도덕에 관한 것을 선언하면 그 가르침은 그르칠 수 없다. 주교들의 일상적인 유권적 가르침을 통상 교도권이라 한다. 또 교회는 교리의 해설 · 격려 · 권고 등으로 구성되는 설교를 통하여 가르치고, 계시의 학문적(신학) 연구와 교수를 통하여 복음을 선포한다. 그리고 유권적으로 가르치는 성직자가 아닌 일반 신자들도 자기 나름대로 복음을 선포할 중대한 의무를 지고 있다.
㉯ 신품권(사제직) : 사제직은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서 하느님의 은총을 사람에게 전하고 사람들의 정성을 하느님께 바치는 직책이다. 그리스도는 신약의 중개자인 대사제이며(히브 5:5-10) 그의 신비체인 교회도 이 사제직에 참여하고 있다. “하느님은 … 사람들을 당신과 화해시키는 임무를 우리에게 주셨다”(2고린 5:8). 그래서 우리는 “선택된 민족이고 왕의 사제이며 거룩한 겨레이고 하느님의 백성이다”(1베드 2:9-10). “세례를 받은 사람들은 재생(再生)과 성령의 도유(塗油)로 축성되어 영적인 건물과 거룩한 사제가 된다”(교회헌장 10). 모든 신자들이 하느님과 인간 사이를 연결하는 사제직을 수행하고 있는데 이것을 공통 사제 직이라 한다. 공통 사제직을 가지고 있기에 모든 신자들은 성사배령과 기도와 선행과 희생으로 하느님께 영적인 제사를 드리고 이 세상을 거룩하게 할 수 있다. 신품성사를 받은 성직자들은 유권적으로 철성사를 위시한 전례를 집전하여 신자들에게 필요한 은총을 전달하고, 특히 미사성제와 전례적 기도를 통하여 하느님을 예배하는 제사를 드리고, 신자들과 함께 사제적 백성을 형성하는 공격 사제직을 수행한다(교회헌장 10, 사제교령 2). 이러한 직위적 사제직은 성직자들이 받은 신품권으로써 수행하며, 다른 이에게 신품성사로써 신품권을 전달하여 공적 사제직을 계속시킨다.
㉰ 통치권(왕직) : “하느님께서는 만물을 그리스도의 발 아래 굴복시키셨으며 그분을 교회의 머리로 삼아 모든 것을 지배하게 하셨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며 만물을 완성하시는 분의 계획이 그 안에서 완전히 이루어집니다”(에페 1:22-23). 교회를 통하여 만물을 완성시키려는 것이 하느님의 계획이라면 교회도 그리스도의 왕직에 참여하고 있다. 그래서 사도들은 신자들이 지켜야 할 규정을 세우고(사도 15:6-29, 1고린 11:1-34) 위반자를 징계하였다(사도 5:1-11, 1디모 1:20). 이러한 통치권은 입법 · 사법 · 행정을 포함하는 것이고 교도권과 신품권을 지탱하는 권한이다. 신품성사를 받아 교계제도에 참여한 성직자들은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역할에 참여하고 있어서 유권적으로 교회를 다스린다. 그러나 하위 성직자들은 주교에게 종속되어 통치권을 행사한다. 성직자들의 이 통치권(협의의 사목권)을 교회법적 통치권이라 한다. 성직자를 포함한 모든 신자들은 그들의 신앙인다운 생활과 증거로써 이 세상 모든 인간 생활에 그리스도의 복음적 원리가 실천되도록 노력한다. 이러한 노력을 사회참여라 하며, 교회의 사회참여는 교회가 그리스도의 왕직에 참여하는데서 우러나는 권리요 의무이다. (鄭夏權)
◆원죄◆
죄에 대한 이해의 하나로서 원조 아담의 범죄와 이로 인한 은총의 결핍상태. 이는 3세기에 유아세례 문제를 계기로 이론적인 발전을 하였다. 유아는 태어날 때부터 ‘죄의 얼룩’이 있다는 믿음에 대하여 펠라지우스파의 사람들은 그것을 악한 표양의 문제로 보았다. 즉 한 두 차례 어떤 범죄 행위가 이루어질 때 그 행위를 상상조차 못했던 다른 사람들이 그러한 행위를 하기가 용이해진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아우구스티노는 아담을 근본적 범죄자로 보고 그 안에 모든 후손들을 결합시켜 주는 사람으로 여겼으며 아담이 범죄했을 때 자기 후손들을 존재의 근원에 있어서 오염시켰다고 하였다.
원죄에 대한 성서적 근거는 창세기 2장과 제 3장 및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 제5장이며, 트리엔트 공의회가 원죄에 관하여 규정한 교리가 전통적인 교리로 남아 있다. 즉 원죄의 본질은 아담의 불순명으로 인한 거룩함과 의로움의 결핍이며 그 결과는 욕망과 고통과 죽음이요, 그 결핍의 상태가 번식에 의하여 후손에게 그 책임을 묻는 이유는 인류를 하나의 연대적인 인격체로 보기 때문이다.
성서의 고전적인 해석에 기초를 둔 이러한 전통적인 원죄 교리를 우리 시대에 의미가 있으면서 전통에도 맞는 표현으로 새롭게 이해하려는 노력이 신학자들 사이에 계속되고 있다. 헬비히, 레켄즈 등은 성서 기자의 관점으로 돌아갈 것을 촉구하면서, 아담과 하와의 이야기는 인류사의 연대기가 아니라 현재의 인간조건의 의미를 밝히려는 의도로 쓰여진 고전적 이야기 형식이라 한다. 아담 즉 남자와, 하와 즉 살아있는 자의 어머니는 하느님의 모상으로 하느님에 의하여 존재한다. 그들의 존재는 전인적(全人的)이고 완전하고 통일되었다. 그러나 그들의 범죄로 한 가지 죄가 다른 죄를 유발하고 한 세대의 죄가 다음 세대의 죄로 이전되어 온 인류가 죄악의 상태 속에 뒤얽히게 된다. 이처럼 죄악에 빠져 있는 인류의 보편적인 혼란상태 즉 ‘세상의 죄’가 바로 원죄에 대한 근본적 성서적 개념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상태는 인간이 하느님의 은총에로 나아가는 길을 막는 저항의 벽을 구축하는 것이 된다.
쇼넨베르크(Piet Schoonenberg)에 의하면, 인간은 출생함으로써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이러한 상태의 영향을 받게 된다. 인간이 말도 못하고 자아의식이 분명치 못한 채 태어나서, 성장하여 스스로 자신의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시점에 도달하기 전에, 많은 선택이 그를 대신하여 다른 사람에 의하여 이루어지고 조건지어지고 방향지어졌으므로, 인간이 태어난 상황이란 그 사람 자신의 일부분이며 유전에 못지 않는 큰 부분이다. 갓난 유아라 할지라도 보편적인 죄의 상태 때문에 그 유아의 인생 출발은 어느 정도 훼손되어 있고 난관에 처하게 되어 있다. 즉 인간은 생식에 의하여 그런 상황을 전수받았으나 한편 생식행위 자체와는 무관한 것이기도 하다. 이런 상황에 대하여 모든 사람은 공동으로, 각자는 개인적으로 그 책임을 져야한다. 인간은 앞서간 사람들의 선행 때문에 덕을 보는 동시에 그들의 악덕이나 실패 때문에 고통을 당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설명은 인류 다원조론(多元祖論)과도 조화될 수 있다. 교황 비오 12세는 회칙 <인류>(Humani generis, 1950)에서, 또 바오로 6세는 1966년 7월 로마에서 열린 원죄에 관한 심포지움에서 다원조론이 원죄교리와 일치되지 않는다고 한 적이 있으나 이에 대한 연구가 계속되고 있다. (⇒) 죄
◆관상◆
하느님을 직관적으로 인식하고 사랑하는 행위. 하느님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당신의 본성에 참여하여 친밀한 친교를 누리도록 부르시고 있다. 그 친교의 온전한 형태는 천국에서 지복직관(至福直觀)을 통하여 이루어지나 그리스도인은 세례를 받음으로써 그 직관능력의 씨앗을 받게 된다. 관상은 그 씨앗을 이 세상에서 어느 정도 싹트게 하여 꽃피우게 하는 방법의 하나로서, 교회내 많은 성인들이 영성생활의 '일치의 단계'에 도달하여 기도하는 가운데 이를 실천하였다.
관상은 염경기도나 일반적 묵상기도와 달리 단순 · 본질의 직관적 성격을 갖는 것으로 본질적인 것의 터득에서 오는 것이므로 직관의 기도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하느님과의 친교가 직접적이고 내재적인 일치로 발전한 나머지 하느님을 단순히 바라보는 것이다. 자신 안에 특별히 긴밀한 양식으로 내재하는 하느님을 본질적으로 바라보고 직접적으로 사랑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하느님과 친교하기 위해서 우리는 여러 언어와 개념과 이미지 등에 매개수단을 사용한다. 그러나 친교가 깊어지고 하느님이 사람에게 가까이 현존하심에 따라 그러한 매체가 불필요해지며 마침내 하느님의 영(靈)이 사람 안에 직접 내재하여 활동하실 때에는 사람의 사고와 감정과 상상은 하느님과의 '침묵의 일치'를 방해하는 소음이 되기에 이른다. 더욱이 인간의 언어와 개념 등은 하느님이 인간 안에서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 계시하고 활동하시려는 자유를 제한하기에 이른다. 관상은 이러한 단계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관상자는 인간의 자연적인 능력을 모두 침묵시키고 단순히 하느님을 바라보고 사랑하는 것이다. 이처럼 관상을 통하여 하느님과 친밀한 친교를 체험하는 가운데 사람은 자신 안에 내재하는 하느님의 존재가 본질적인 것임을 깨닫게 된다. 하느님은 그 사람에게 도달해야 할 목적이라기보다는 삶의 주제요 내용이며 생명의 원리가 되기에 이른다.
관상은 이에 도달하는 양식에 따라 수득적(修得的) 관상과 주부적(注賦的) 관상으로 나누어진다. 전자는 개인의 노력으로써 직관의 능력에 도달하는 것으로 능동적 관상이라고도 한다. 마음을 가다듬어 번뇌를 끊고 진리를 깊이 생각하여 무아정적(無我靜寂)의 경지에 몰입하는 불교의 선(禪)은 이에 해당한다 하겠다(비그리스도교 선언문 2). 한편 후자 즉 주부적 관상은 하느님의 은혜로 인하여 신적(神的) 영역을 체험하고 신비에 대한 깊은 깨달음을 얻는 것으로 수동적 관상이라고도 한다. 일상생활 가운데 성령의 감화를 받아 하느님의 본성을 체험하는 경우가 이의 대표적인 예이다. 이러한 구분에 대하여 과연 인간의 노력으로 관상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는지를 의문스럽게 여기는 견해도 있어서 학설은 일치되지 않고 있다. 관상은 완덕에 도달하는 하나의 수단이지 완덕 자체가 아니다. 모든 사람을 여러 가지 모양으로 완덕에 부르시는 하느님은 일반 신자들의 일상생활이나 활동수도회의 활동생활 가운데 관상의 경지에 도달하게 도와 주시기도 하고 교회내 관상생활을 위주로 하는 관상수도회에 사람을 초대하시기도 한다. 관상은 본직적인 것과 '단 한 가지의 필요한 것'(루카 10:41) 즉 하느님께 집중하게 함으로써 우리를 더욱 겸손하고 관대하게 하며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게 한다. 성 이냐시오의 영신수련에서 나오는 관상 및 관상기도는 또 다른 의미가 있다.
출처 : [가톨릭대사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