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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평
줄에 걸린 빨래처럼 마음의 바람에 펄럭이는
2024년 <산림문학> 가을호를 읽고
권대근
, 문학평론가, 대신대학원대학교 교수
Ⅰ.
다양한 학문이 분화되고 과학기술이 번창하고 산업이 발전하였다. 이념투쟁은 사라지고 사람들은 보다 실리를 추구하게 되었다. 그러나 과연 우리는 그로 인하여 우리 자신을 더 많이 알게 되었는가? 그래서 우리는 얼마나 더 지혜로워지고 현명해졌는가? 광야의 예언자나 영웅, 개척자나 위대한 정신적 지도자는 사라지고 문단에는 원로가 안 보이는 사이 물질적 풍요를 신봉하는 대중 집단의 시대가 열렸다. 비록 제1, 2차 세계대전 같은 큰 규모의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으나 이스라엘과 하마스간의 전쟁,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전쟁 등 세계 도처에서 종교적 이념이나 인종간의 대립 또는 살상이 끊이지 않고 있다. 인간은 여전히 증오와 상호비난의 수렁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지금이야말로 융이 말하는 그림자의 인격화가 절실하게 필요한 시점이다. 수필을 쓰면서 얻는 가장 큰 이득은 자기 성찰을 통해 자기실현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20세기가 가고 21세기가 시작되는 전환의 시대에 인간의 내면, 특히 그 어두운 측면을 성찰하는 시간을 갖는다는 것은 하나의 축복일지도 모른다. 모든 재앙의 근원이 인간에게 있다고 한 융은 사실 인간의 마음 속에서 그 재앙의 근원뿐 아니라 이른바 ‘구원’의 근원도 발견할 수 있다고 주장했던 사람이었다. 삶 속에는 끝없는 욕망과 좌절과 갈등이 있다. 또 극복과 회피라는 심리 과정을 겪으면서 한 인간의 자아가 형성된다. 형성된 자아의 뒤편에는 무의식의 그림자도 악마처럼 웅크리고 있다. 그림자는 끊임없이 심역에 출몰하여 인간을 괴롭힌다. 무의식의 열등한 부분인 이 그림자를 의식의 세계로 불러내는 것이 그림자의 인격화다. 산림문학 가을호에 실린 수필 중에서 김철희, 홍만희, 이종삼 세 분의 수필에 나타난 그림자의 인격화 과정을 살펴보려 한다. 수필창작은 바로 그림자의 인격화를 이루어내는 가장 좋은 방법 중에 하나다.
글쓰기의 출발점은 인식에 있다. 인식이란 인간을 바르게 파악하는 것이다. 인도의 기업인 라메슈와 다스는 “말은 줄에 걸린 빨래처럼 마음의 바람에 펄럭인다.”고 했다. ‘나도 모르는 내 마음’ ‘나도 어쩔 수 없는 내 마음’을 한탄하고 ‘열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의 마음 속은 모른다’고 실토한다. 이로써 우리는 나와 남이 모두 가지고 있으나 평소에 모르고 지내는 속마음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일시적이나마 시인하는 것이다. 작가 스콧 피츠제랄드는 “최고의 지적 능력은 동시에 반대되는 두 가지 생각을 할 수 있는지 여부로 판단된다.”고 하였다. 마법사 멀린은 “슬플 때 뭔가를 배워야 한다.”고 했다. 인생은 길지 않지만 예의를 생각할 수 있을 만큼은 길다고 하였다. 마음을 갈고 닦아 타인의 마음을 얻는 기술을 터득해야겠다. 수필에서의 설득이란 공감이다. 공감의 문을 열 수 있는 것은 자기 영혼과의 대화다.
수필은 소설과 시와 비교하여 다른 측면이 있다. 허구가 아닌 사실 자체가 바탕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앤서니 엘리엇은 오늘의 자아가 형성되기까지 내가 걸어온 길을 되짚어 보고 표현하는 글이 수필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자아의 형성 과정이 개개인마다 다르니 글도 사람에 따라서 달라져야 한다고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찰이라는 과정을 통해서 자신을 정확하게 바라볼 줄 알아야 하고, 또 성찰이라는 과정을 통하여 자기규정을 하여야 한다고 했다. 성찰은 엘리엇이 말하는 자아이론의 핵심이다. 성찰하는 과정은 삶의 궤적에 관하여 심리적이고, 사회적인 정보를 주시하고 되돌아보는 과정이다. 수필쓰기에는 자아 성찰이라는 과정이 들어간다. 수필의 개념에는 내면의 고백 못지않게 자아성찰이 주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자신의 내면을 수필을 통하여 고백하는 동시에 자기 성찰을 하므로 자신을 알게 되는 것이 수필이다. 그런 수필을 융의 분석심리학 이론으로 살펴볼 차례다.
Ⅱ.
수필은 무의식을 탐구하는 간접적 방법에 가장 효과적으로 유용할 수 있는 문학 장르다. 우리가 가지고 있고, 시시각각 생활에 영향을 주고 있으면서도 모르고 있는 마음의 세계는 모두 무의식이다. 무의식의 상당 부분은 우리가 의식화함으로써 의식의 내용에 적극적으로 수용할 수 있다. 수필에서 성찰의 한 방법은 자신의 무의식을 살펴보는 과정인 분석작업이다. 또한 종교적 수행은 어떤 면에서는 무의식의 의식화를 통한 인격의 창조적 변환에 기여한다. 왜냐하면 종교는 일상적인 자아의식이나 페르조나를 초월하는 신성한 힘의 세계와의 접촉을 통해 마음의 변화를 시도하기 때문이다. 김철희는 ‘장미’를 화소로 중세 타락한 종교의 문제를 거론하는데, 그의 수필은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 ‘장미의 이름’에 관한 내용이다. 작가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2권>에 얽힌 대립의 암투를 언급하면서, 죽임을 당한 수도사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종교의 고정화된 진리를 넌지시 비판하고 있다. 중세 카톨릭 사제들은 ‘자신들의 권위를 지키기 위해 희생양을 만들어 악마라는 공포를 조장시키며 마녀사냥을 일삼았다.’고 하였다. 이 모든 중세적 죄악이 ‘새로운 변화에서도 신 중심의 중세적 세계관을 가져야 한다는 장님 수도사 호르헤의 맹목적인 믿음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고 한 지점이 이 수필의 핵심이 아닐까.
누군가는 장미를 이야기할 때 가시에 찔려 죽어간 릴케의 사랑을 말하지만, 나는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 ‘장미의 이름’ 마지막 장을 왼다. ‘지난날의 장미는 이제 그 이름뿐, 우리에게 남은 것은 그 덧없는 이름뿐.’ 작가가 1980년에 발표한 이 소설은 도서관 장서를 둘러싼 음모를 다루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제2권』이 존재한다는 가정하에 그곳을 봉인하려는 자와 세상에 꺼내 놓으려는 자가 대결을 벌이는 이야기이다. 『시학 2권』은 고대 그리스 철학자인 아리스토텔레스가 웃음에 대한 원리를 담았다고 전해지는 전설 속의 책이다. 범인은 웃음을 하느님이 허락하지 않은 죄악이라고 생각한다. 당시 신학자들은 신앙은 근엄해야 하고, 사람들은 신에 대한 두려움을 가져야 한다고 믿으며 웃음을 멀리했다. 죽임을 당한 수도사들은 웃음을 유발하는 우화와 관련한 작업을 할 만큼 호기심 많고 진보적인 성격을 갖고 있었다
- 김철희 <우리가 장미를 이야기할 때> 중에서
사람들은 장미를 이야기할 때 가시에 찔려 죽어간 릴케의 사랑을 말하지만, 작가는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 마지막 장을 이야기한다. 지난 2004년 일본의 플로리진이란 회사가 유전자 변형을 통해 ‘파란 장미’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포기하지 않는 사랑’의 탄생이다. 이렇게 장미는 새로운 변화를 거듭해왔다. 그렇지만 작가는 ‘영원한 사랑’을 믿지 않는다. 그는 ‘존재하는 것은 늘 양면성을 갖는다. 최고의 꽃이라 불리는 장미도 이를 벗어날 수 없다.’라고 단언한다. ‘인생을 통해 갈구하는 행복은 찰나처럼 순간으로 다가오기에 영원불변의 바람은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이다. 장미의 아름다움에 갇혀 자유의 빈곤에 허덕이는 것이 얼마나 슬픈 일인가.’라고 하면서, 그는 ‘아름다운 배면에는 가시와 독이 있’음을 경고한다. 무심히 내리던 비가 그치고, 쨍한 볕을 온몸으로 받는 장미가 눈에 들어온다. 결말부에 가서 그는 윌리엄 블레이크의 “한 송이 들꽃에서 천국을 본다”라고 노래하지만, 자신은 ‘지금 내 눈에 한 떨기 장미는 그저 장미’라고 말한다.
김철희의 수필은 종교적 수행이나 무의식의 분석작업을 하지 않아도 무의식을 깨달아나갈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것은 무의식 자체가 그 사람의 의식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의도를 가지고 끊임없이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무의식이 그 자체의 자율적인 의지에 의해서 의식을 자극하여 무의식을 깨닫도록 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즉 무의식은 자아가 무의식을 경시하고, 그것과의 대면을 피할 때, 자아로 하여금 그것을 보지 않을 수 없도록 자극함으로써 무의식의 경향을 의식화할 수 있는 '기회'를 자아에게 준다. 프로이트는 인간의 마음을 바다 위에 떠있는 ‘빙산’에 비유했지만, 융은 ‘섬’에 비유했다. 우리가 언뜻 보면 섬은 서로 분리되어 동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섬과 섬은 사실상 해저면을 통해 서로 연결되어 있다. 이처럼 융에 따르면 언뜻 사람과 사람이 달라 보이지만 깊은 집단무의식 층에 들어가면 사실은 ‘서로 이어져 있는 하나’다. 그리하여 인간의 삶 속에서 우리가 무수히 겪고 지나가야 하는 시련, 고통, 갈등, 절망, 상실의 아픔이 자기성찰의 귀중한 기회이며, 성숙에의 의미 있는 고통이듯이 인간은 언제나 무의식에서 올라오는 창조적 자극의 영향 아래 있다는 사실을 이 수필은 잘 나타내고 있다.
걸으면서 나는 또 하나의 사실을 깨닫는다. 내가 만나는 모든 것들이 나와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자각이다. 연꽃만 아니라 나무나 새나 풀벌레, 그리고 하늘의 별과 바람이 모두 나와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나는 가슴으로 느끼고 있다. 그것들은 마치 식구처럼 나의 일상이 되고, 또 나의 마음에 식구처럼 자리하고 있다. 만약 걸어서 이 세상을 주유한다면 나는 감히 세상의 모든 존재를 나의 식구라고 말할 수 있을 것만 같다. 걷는다는 것은 다만 다리로 하는 공간 이동을 뜻하는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닫힌 마음에서 열린 마음으로의 이동을 의미하기도 한다.
- 홍만희 <관곡지 연지를 걸으며> 중에서
홍만희의 위 수필은 인문학적인 사유가 빛난다. 대상을 객체화하는 하먼의 객체 지향 존재론적 사유도 돋보이고, 네일의 관계적 존재론으로 세상의 사물을 대하는 자세도 수필을 위대하게 하는 철학성을 띠고 있다. 자아가 그 고통의 의미를 알아차리느냐 모르고 지나가느냐 하는 것은 순전히 자아의 문제다. 이와 같은 무의식의 창조적 작용은 융의 심리학적 용어로는 자율autonomy과 보상과정compensation으로 표현된다. 마치 자율신경계가 외부에서 오는 스트레스에 대응하여 신체기능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자율적으로 신체생리를 조절하는 것과 같다. 이를테면 피가 모자랄 때 피가 부족한 피를 체내에 많이 공급하기 위해서 심장이 자동적으로 빨리 뛰는 것과도 같다. 무의식은 자아의식이 한 방향으로 일방적으로 나가면 그렇게 되지 않도록 의식의 방향과는 다른 방향의 이미지를 활발히 보내서 그것을 보상한다. 홍만희가 ‘걸으면서 또 하나의 사실을 깨닫는 것’도 무의식의 창조적 작용의 한 예다. 지나치게 소심한 사람의 꿈에서 깃발을 들고 데모행진의 선두를 달리는 영웅상을 보여주는 것도 마찬가지다. 이것은 욕구충족을 위해서가 아니라 의식의 일방성을 깨우치고 의식이 소홀히 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주기 위한 무의식의 의도를 드러낸 것이다.
그러나 무의식이 자율적으로 보상작용을 발휘하므로 누구든지 의식화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다고 해서 적극적으로 진정한 자기를 인식하려는 노력을 소홀히 해도 좋은 것은 아니다. 자기인식의 작업을 소홀하게 하면 할수록 무의식의 보상작용의 강도가 높아지고 무의식의 과보상overcompensation은 결국 의식의 기능을 일시적으로 마비시키거나 교란시켜 노이로제의 증상이나 생리적 이상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홍만희에게 있어서 만나는 모든 것들이 나와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자각은 그림자의 인격화를 돕는 대목이다. 무의식의 의식화가 일어난 것이다. 연꽃만 아니라 나무나 새나 풀벌레, 그리고 하늘의 별과 바람이 모두 자신과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작가는 가슴으로 느끼고 있다. 그것들은 마치 식구처럼 자신의 일상이 되고, 또 자신의 마음에 식구처럼 자리하고 있다고 고백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는 무의식을 깨달아 나간다. 그런 만남이 ‘걷는다는 것은 다만 다리로 하는 공간 이동을 뜻하는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닫힌 마음에서 열린 마음으로의 이동을 의미하기도 한다.’라는 자각으로 확장되고 있다.
칠월이 되면서 밤꽃은 모두 지고 수락산은 짙은 녹음이 더욱 싱그럽다. 바야흐로 녹음방초승화시綠陰芳草勝花時다. 예전 이맘때면 멀리서 꿩소리가 들리고 다람쥐와 청설모를 흔히 볼 수 있었는데 이제 꿩소리는 들리지 않고 청설모만 간혹 눈에 띌뿐 다람쥐는 자취없이 사라졌다. 서울 상계동에서 수락산으로 드는 길은 수락골(벽운계곡)과 노원골이 있는데 내가 사는 집이 수락골 어귀여서 아내와 나는 자주 수락골 걷기를 한다, 수락골 초입에서 깔딱고개 밑 새광장까지는 3km 남짓 한 거리인데 수락교, 장락교, 벽운교, 신선교 등 제법 운치있는 이름이 붙은 네 개의 나무다리를 건너고 시공원詩公園을 거쳐 새광장까지 가노라면 여기저기서 다람쥐와 청설모가 재롱을 떨었는데 다람쥐를 볼 수 없으니 영문을 모르겠다.
- 이종삼 <그 많던 다람쥐는 어디 갔을까> 중에서
무의식의 의식화과정에서 제일 먼저 만나는 것이 그림자라고 부르는 심리적 내용들이다. 다시 말해 자아로부터 배척되어 무의식에 억압된 성격 측면이다. 그래서 그림자는 자아와 비슷하면서도 자아와는 대조가 되는, 자아가 가장 싫어하는 성격을 지니고 있다. 자아의식이 한쪽 면을 지나치게 강조하면 그림자는 그만큼 반대편 극단을 나타낸다. 그림자는 본래 의식에 가까운 무의식의 내용이다. 그래서 그림자가 다른 행위소에게 투사될 때는 나와 비슷한 부류의, 나와 같은 성별의 대상에 투사되며, 거기서 우리는 자신이 가장 싫어하는 행위소를 보게 된다. 그 많던 다람쥐가 사라진 배경을 두고, 작가는 그 근거로 다람쥐와 청설모의 천적인 족제비, 담비, 삵, 참매 등 맹금류를 지목하는데, ‘수락산에서 족제비나 담비, 삵은 본 적도 없고 들고양이만 불쑥불쑥 나타나니 다람쥐가 자취를 감춘 건 아무래도 고양이 때문이 아닌가 의심된다’는 것이다. 그는 편견일지 모르지만 집고양이가 들고양이로 변한 것은 다분히 사람 탓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고양이를 유기한 사람들이 미워하고 들고양이들도 싫어한다.
이 수필은 인간정신의 의식인 자아와 무의식인 그림자간 명암의 대립을 그리고 있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겉으로 보아 부정적인 작용을 나타내는 그림자를 창조적으로 전환시킬 것인가, 그 열쇠는 자아의식이 무의식에 대하여 어느 만큼 관심을 가지고 그림자의 존재를 깨닫고자 노력하느냐에 달려 있다. 즉 자기반성을 통해 다른 사람이나 대상에게 투사된 자신의 무의식적 그림자를 다시금 나에게 되돌려 나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작업을 하여 자신의 그림자가 깨달아질 때 의식의 변화가 생기고, 그 결과 그림자의 부정적인 작용은 해소되어, 자아의 삶을 돕는 건설적이고 창조적인 기능으로 바뀐다. 이 수필은 이런 메카니즘을 잘 보여준다. 인간의 마음 속에 얼마나 무서운 그림자가 있을 수 있는가를 직시하는 것이 심리적 의미에서 진정한 성숙의 첫단계라고 할 수 있다. ‘고양이 때문’이라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으면 그림자의 상호투사는 두 행위소 사이 오해의 골을 더욱 깊게 만들고, 그 행위소가 조금이라도 투사된 그림자의 내용과 비슷한 행동을 보이면 “그것봐, 내 말이 틀림없잖아.”라고 단정지음으로써 투사를 강화시키는 것이다.
Ⅲ.
로마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인생은 생각대로 흘러간다.”고 했다. 우리가 말하는 방식이 세상을 보는 눈을 결정하는 법이다. 앨런 클라인, 전 미국유머협회 회장은 “우리의 태도가 세상을 색칠하는 크레용이다.”고 했다. 그림자의 투사는 삶을 부담으로, 투쟁의 대상으로 보게 한다. 진실이 과장되면 상대는 분노하기 마련이다. 대화의 정확성이 중요하다. 우리 시대에는 더욱 그렇다. 틀렸다거나 오해를 유발하는 말이 돌발행동만큼이나 비극적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걸 명심해야 한다. 그림자의 투사는 인간 행위소 사이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모든 행위소 관계에서 크든 작든 자주 일어난다. 권위적 존재와의 관계에서도 그림자의 상호투사는 일어날 수 있다. 행위소 사이의 ‘오해’는 항상 그림자의 무의식적 투사에 의해서 비롯된다. 온 가족이 미워하는 구박둥이이며 ‘미운오리새끼’를 만들어 내는 것도 구성원의 그림자 투사에서 비롯된다. 이 경우에는 그림자의 개인적인 투사라기보다는 집단적인 투사의 결과다. 구성원 중에서 독특한 성격을 지닌 한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에게 나머지 구성원들의 그림자가 무의식적으로 투사되고, 그가 그 역할을 무의식적으로 수용하게 되면 한 행위소가 희생양이 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제 때문에 되는 일이 없어’ 등의 표현에 바로 그림자의 투사로 인한 ‘희생양’의 의미가 담겨 있다.
융 심리학에서 그림자 개념은 매우 중요하다. 무의식을 성찰할 때 성찰의 장애 요인으로 ‘그림자’라고 하는 심상과 부딪힌다. 그림자는 한 마디로 무의식에 들어 있는 인격의 열등한 부분이다. 그림자가 무의식에 남에서 출몰할 때마다 우리는 여러 증상들로 고통받는다. 증상들이 외부로 드러나지 않고 순전히 심리 영역에 머문다하여도 고통스럽기는 육체적인 것보다 더 심하였으면 심하였지 절대 가벼운 것이 아니다. 그림자의 인격화는 정서의 소통을 의미하기도 한다. 우리의 정신은 여러 경로를 통하여 소통한다. 눈빛으로, 표정으로, 몸의 자세로도 소통한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직접적인 방법은 수필 쓰기다. 수필은 언어를 매개로 하여 소통에 참여한다. 수필은 감정과 생각, 의지까지도 표현하므로 소통의 길이 된다. 말하자면 수필에는 인간 행위소의 감정만이 아니고 정보와 사고까지도 실린다. 수필을 통해서 우리는 여러 행위소에 관한 다양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사고 개념을 통해서 작가가 살아온 사회의 가치관에 어떻게 순응하고, 어떻게 저항하였는가를 알 수 있다. 더욱이 그들의 감정 상태도 알 수 있다. 우리는 수필을 통해서 한 인간을 총체적으로 인지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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