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저, 우리 이번에 제사 지내고 나서 좀 있다. 집을 내주게 됐다."
소년은 소녀네가 이사해 오기 전에 벌써 어른들의 이야기를 들어서,
윤 초시 손자(孫子)가 서울서 사업에 실패해 가지고 고향에 돌아오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것이 이번에는 고향집 마저 남의 손에 넘기게 된 모양이었다.
"왜 그런지 난 이사 가는 게 싫어졌다. 어른들이 하는 일이니 어쩔 수 없지만……."
전에 없이, 소녀의 까만 눈에 쓸쓸한 빛이 떠돌았다.
소녀와 헤어져 돌아오는 길에, 소년은 혼잣속으로, 소녀가 이사를 간다는 말을 수없이 되뇌어 보았다.
무어 그리 안타까울 것도 서러울 것도 없었다.
그렇건만, 소년은 지금 자기가 씹고 있는 대추알의 단맛을 모르고 있었다.
이날 밤, 소년은 몰래 덕쇠 할아버지네 호두밭으로 갔다.
낯에 봐 두었던 나무로 올라갔다.
그리고, 봐 두었던 가지를 향해 작대기를 내리쳤다.
호두송이 떨어지는 소리가 별나게 크게 들렸다.
가슴이 선뜩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굵은 호두야 많이 떨어져라, 많이 떨어져라,
저도 모를 힘에 이끌려 마구 작대기를 내리 치는 것이었다.
돌아오는 길에는 열 이틀 달이 지우는 그늘만 골라 디뎠다.
그늘의 고마움을 처음 느꼈다.
불룩한 주머니를 어루만졌다.
호두송이를 맨손으로 깠다가는 옴이 오르기 쉽다는 말 같은 건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저 근동에서 제일 가는 이 덕쇠 할아버지네 호두를 어서 소녀에게 맛보여야 한다는 생각만이 앞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