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충주시 역사와 년혁
구석기 시대
우리 지역은 내륙을 관통하는 남한강이 흐르고 주변에 석화암 지대가 널리 발달되어 있기 때문에 동굴과 바위를 이용한 구석기 시대의 주거 유적이 많이 남아 있어요. 유적으로는 사기리, 명오리, 금릉동,용탄동,조동 유적 등이 있습니다.
특히,남한강 주변의 유적과 연결된 동굴 유적은 석기 제작 과정과 문화 발달 과정을 살필 수 있는 유적으로, 주로 강을 낀 지역에 집중 분포되어 있어요. 이는 세계 주요 문명들이 강과 인접한 지역에서 발달한 것과 밀접한 연관이 있답니다.
신석기 시대
우리 지역에서는 신석기 시대의 움집터는 발견되지는 않았으나 강기슭 지역에서 신석기 문화층이 발견되고 있어요. 유적은 동량면의 조동리,지동리,하천리,산척면의 명서리 등 남한강 중류에 분포하고 있습니다.
이들 유적은 대체로 신석기 후기에 속하는 것으로 보이며, 토기의 형태와 무늬에서 중서부 지방의 문화와 많은 공통점을 보입니다. 다만 남해안 지역으로 주로 보이는 굵은 줄무늬의 겹아가리 토기와 같이 남해안 신석기 문화의 요소도 일부 나타나고 있어요.
청동기 시대
충주지역의 청동기 문화는 여러 지역의 문화를 흡수하여 독특한 문화를 이루어 왔어요.충주 지방에서 출토되는 각종 민무늬토기는 남부지방으로 문화가 변화되는 과정을 살필 수 있기 때문에 학술적 가치가 높습니다.
주요 유적지로는 동량면의 지동리,사기리,함암리,용교리,금가면의 월상리,오석리,중앙탑면 장천리,탑평리 유적 등이 있어요. 이 중 조동리 유적에서 발견된 조동리 지석묘는 청동기 시대의 대표적인 무덤양식인 바둑판식 고인돌로써 충주지역의 청동기 시대 생활문화상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입니다.
출토 유물로는 붉은간토기,검은간토기,덧띠토기,변형팽이토기,깊은바리형토기 등 민무늬토기와 바퀴날토기,돌도끼,돌칼,화살촉 등의 각종의 석기류가 있습니다.
이상과 같이 충주 지역의 선사문화는 남한강변을 중심으로 구석기부터 신석기까지 한반도의 다른 지역에서는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집중적으로 밀집되어 있어요. 이것은 중원문화의 중심지로서 충주가 가지고 있는 특징이라 볼 수 있답니다.
삼국 시대
충주는 삼국시대 이전에는 삼한 중 마한의 일부였으나, 백제의 근초고왕 5년(350년경)에는 백제의 영역이 되었어요.
그 후 5세기 중엽에 고구려가 남하하여 중원지방을 지배하게 되자 고구려는 충주를 국원성이라 부르고 충주고구려비를 세웠습니다.
고구려의 남하정책에 대해 백제는 신라와 나제동맹을 맺고 고구려 세려을 한강유역에서 물리쳤어요.
신라는 이어서 백제가 수복한 한강 상류지역까지 빼앗아 전 한강유역을 지배하게 되었어요. 신라 진흫왕은 557년 국원에 소경을 설치하여 다음 해에 중앙 즉 경주의 다음 가는 부도(副都)로 삼았어요. 또한 통일 후 이곳에 중앙탑을 세웠습니다.
이상과 같이 중원지역은 삼국이 번갈아 차지함으로써 삼국의 문화가 재통합되는 특성을 지니게 되어 독특한 중원문화로 나타나게 되었어요.
문화유산으로는 중앙탑,충주고구려비,건흥 5년명 금동불,누암리 고분 등이 있습니다.
고려 시대
고려 건국의 주체 세력은 신라의 지배력이 약화된 틈을 타 지방을 지배하고 있던 호족들이었어요. 충주 지역의 대표적인 호족은 충주유(劉)씨였으며, 이 시기의 충주는 중부지역의 중심도시로서 위상이 높았습니다.
그 일례로 충주 호족인 유긍달의 딸이 태조 왕건의 세 번째 부인이었던 것을 보면 그 사실을 충분히 짐작해 볼 수 있지요. 왕건은 나라를 세운 후 전국에 주.부.군현의 제도를 도입하는데, 이때 중원의 이름을 충주로 바꾸어 오늘날까지 이 지명이 이어오고 있답니다.
13세기에는 몽고군의 침입으로 의주와 개경이 함락되는데, 고려는 일단 몽고와 강화를 맺고 몽고의 군사들을 돌려 보냈습니다. 이때 일부의 별동부대가 광주,충주,청주 등 여러 성을 공격하였는데 오직 충주만이 충주성을 지키던 노군잡류별초에 의해 끝까지 저항하여 몽고군을 물리쳤다고 합니다.
또한 5차 침입(1252)때는 처인성(용인)에서 살리타이를 사살한 김윤후가 충주산성 방호별감으로 재직하면서 몽고군과 70여일 동안 혈전을 벌여 몽고군을 격퇴시키게 되었다고 하네요. 고종 42년(1255)에는 몽고병이 남쪽을 차지하고 다시 하늘재를 넘어 북으로 돌아가는 길에 충주의 다인철소(지금의 이류면)의 사람들이 용감히 싸워 몽고군을 물리쳤어요.
이러한 사실은 중원인들이 외세로부터 내 고장을 지키겠다는 뚜렷한 의식에 얻어진 결과라 할 것입니다. 이 시대의 문화로는 불교문화를 바탕으로 한 미륵리 대석굴사원, 문숭리의 숭선사지 법경대사자등탑비, 송계의 사자빈신사지석탑, 월광사 원량선사탑비 등이 현재까지 남아 있습니다.
조선 시대
세종 31년(1449년)에는 행정구역을 변경하여 충청도라 개칭하고 좌감사를 배치하였어요.
세조 3년(1457)에는 다시 충주진영이라 개칭하고 전국을 7도로 분할하여 충주영장으로 하여금 단양, 영춘, 제천, 청풍, 음성, 천안 등 8군의 군정사무를 관장하도록 하였어요. 그러나 선조 25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게 되자 신립장군이 탄금대에 배수진을 치고 8천명의 군졸과 함께 왜적과 대적하였으나 애석하게 패전하고 말았습니다.
이후 고종 33년에는 도청 소재지로서 관찰사를 배치하여 충청도의 중심을 이루게 되었습니다.그러나 도청 소재지로 된 지 14년만에 교통이 불편하다는 이유로 순종 2년에 도청을 청주로 이전하고 충주는 군청 소재지가 되어 군수가 배치되었다고 해요.
한일협방 이후 1913년 군면 폐합으로 충주는 충주군 읍내면에 속하다가 1917년 충주면으로 개칭하고 1931년 5월에 지방제도의 개정에 의하여 충주읍으로 승격한 후 해방을 맞이하였습니다.
해방 이후
해방된 지 12년만인 1956년 7월 8일 충주읍은 충주시로 승격되고 나머지 지역은 중원군으로 개칭되었다가 1995 1월 1일 도농통합에 의하여 충주시와 중원군이 충주시로 통합된 후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연혁
3~4세기경 삼한 중 마한에 속함 |
고구려 장수왕 63년 국원성 (일명 미을성, 완장성) |
신라 경덕왕 16년 중원경으로 개칭, 신라의 중앙표방 |
고려 태조 23년 충주부로 개칭 |
고려 성종 2년 12주 중 하나인 충주목으로 개칭 |
고려 현종 9년 8목 중 충주목 설치 |
고려 고종 41년 국원경으로 개칭 |
고려 충렬왕 3년 충주성 개축 때 성벽에 연화를 조각하여 예성이라 함 |
조선 태조 4년 충청도로 개칭, 충주에 도감영 설치 |
세조 3년 충주진영이라 개칭, 충주영장이 8군을 관장함 (8군:단양군,영춘군,제천군,청풍군,괴산군,연풍군,음성군,청안군) |
조선 고종 33년 관찰사를 배치, 충청북도 도청소재지가 됨 |
조선 순종 2년 도청을 청주로 이전, 충주군수 배치 |
충주면을 충주읍으로 승격, 충주군(1읍12면)으로 정하고 충주읍을(4구역:본정,영정,금정,대수정1구,2구)으로 나눔 |
충주읍이 시로 승격 되면서 충주시와 중원군으로 분리 |
정부의 도농 통합정책에 따라 충주시로 통합 |
충주시 홍페이지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