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함경도 한백겸의 고향 단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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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jy9713
2023.12.31. 21:52조회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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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백겸의 고향 단천
이원군 북쪽에 단천시가 있다. 여진족이 살았던 시기에는 오림금촌(吳林金村)이라 불렀으나 고려 우왕 때 단주(端州)라고 고쳤고, 지금의 이름을 얻은 것은 조선 태종 14년 때였다. 1896년에 함경남도 단천군이 되었고, 1982년 8월에 단천시로 승격하였다.
고을이 마운령과 마천령 두 커다란 고개 사이에 있어서 함경남도와 함경북도로 가는 길이 교차한다. 토지는 메마르고 백성은 가난하여 각각 논밭이라도 있는 곳에서만 사는 까닭에 마을에는 지붕이 맞닿거나 울타리가 이어진 곳이 없다.
사람들은 서로 다투어 송사하기를 좋아한다. 부역은 무거운데, 살아갈 만한 일정한 생업이 없어서 도망하여 거주지를 옮기는 일을 가벼이 여긴다. 게으르고 느릿하여 농사일에 부지런하지 않다. 부정한 귀신들에게 제사 드리는 것을 좋아하여 재물을 허비하며, 복을 내려주고 재앙을 물러가게 해달라고 빈다. 서울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서 학문과 무예를 익힌 사람도 모두 과거 공부를 중히 여기지 않는다.
오로지 상례(喪禮)를 정중히 지켜서 비록 신분이 낮고 천하거나 매우 어리석은 사람이라도 모두 상례를 마칠 때까지 슬퍼함을 다하며, 병에 걸려 죽더라도 임기응변하지 않고 절차대로 상을 치른다. 입고 먹는 데 매우 어려움을 겪는다. 다만 날삼[생마(生麻)] 한 종류만 생산한다.
『여지도서』 「풍속」조에 실린 글이다.
백두대간이 지나는 길목에 있는 용연산ㆍ검덕산ㆍ만탑산ㆍ관암산ㆍ오보산 등의 아랫자락을 흐르는 남대천의 하류에 단천평야가 펼쳐진다. 이 지역은 산이 높기 때문에 고개도 높은데, 해발 1892미터의 쾌산령은 단천과 길주를 잇는 고갯길로 단천시와 함경북도 길주군 경계에 있으며, 해발 705미터의 마천령은 함경북도 김책시와 경계를 이루는 고개다. 옛날에 이 고개는 관북의 관문으로서 전략적 요충지였다.
단천
압록강 유역에는 비교적 넓은 평지가 있어 주거지와 경작지로 이용된다. 해안선은 짧지만 여해진 앞바다에 바닷길이 있어 연안항로의 기항지가 되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마천령은 본군 동쪽 66리에 있다. 옛날에는 이판령(伊板嶺)이라 불렸다. 여진 사람들은 소를 이판이라 불렀다. 속설에 전하기를, 옛날에 어떤 사람이 산 아래서 송아지를 팔았더니 그 어미 소가 송아지를 찾아 고개를 넘어갔다. 이에 주인이 뒤를 쫓아간 곳이 바로 길이 되었기 때문에 이판령이라 이름 했다”라고 실려 있다. 이 고개를 넘던 정흠지는 “물이 겹치고 산이 겹쳐서 지경이 한층 더 그윽하네. 난간을 의지하여 오랫동안 머물러 있었노라” 하며 먼 곳으로 떠나온 심사를 노래하였다.
또한 이 지역 관아의 서북쪽 380여 리에 마등령(馬謄嶺)이라는 고개가 있다. “두리산 뒤쪽 줄기로, 쌍청보 북쪽 150리에 있다. 야인들이 오가는 길이므로 적의 동태를 감시하는 곳이다”라고 실려 있는 것을 보면 영조 때도 여진족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았음을 알 수가 있다. 이곳을 지나던 조선시대의 문신 이안눌은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단천은 옛 여진 땅이다. 서울에서 1278리 떨어져 있다. 바닷가를 따라 고을이 있다. 땅은 북녘의 산이 닿아 있으니 마운령이 그 앞에 우뚝 솟아 있으며, 마천령이 그 뒤에 높이 서 있다. 두 고개는 험난하니 구불구불한 양의 창자 같은 길이 오히려 평탄한 셈이다. 비록 임금의 은혜를 입어 옥으로 된 부절(符節)을 지니거나 임금의 명령을 받들고 사신으로 가는 수레를 타도 친한 벗을 등지고 멀리 가야 하며 험난한 길을 거듭 지나며 어려움을 많이 겪으니 오히려 다시 고삐를 잡아 두려워 조심을 하더라도 재능이 있어 고생이 많다는 탄식을 할 것이다.
하물며 쫓겨난 신하나 좌천된 사람, 멀리 나온 군사나 길 떠난 나그네들이 험한 산을 넘고 거친 바다를 건너 황량한 벌판을 떠돌면서 끝없는 북쪽 바다를 굽어보거나 보이지 않는 남쪽 나라를 바라볼 때 바람을 맞으며 그리워하거나 한탄하면서 눈물 흘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에 「마운곡(磨雲曲)」과 「마천곡(磨天曲)」을 지어 손님을 보내는 음악으로 삼고, 「관산사(關山詞)」 3수를 지어 손님을 머무르게 하는 뜻으로 바친다.
높은 마운령은 위로 구름에 맞닿아
북극성도 손으로 어루만질 수 있네.
천길 높이로 깎아지른 듯 선 장검문(壯劍門)
위태로운 길의 험난함 이루 다 말할 수 없네.
가까이 할 수 없네.
술동이 속엔 구더기 만 동이의 술이니
노래하고 연주하며 나그네를 위로하리라.
이것이 손님을 맞이하는 「마운곡」이고, 다음은 손님을 보내는 「마천곡」이다.
마천령 위로 나무들은 짙푸르고
마천령 아래로 바다는 아득해라, 바다는 아득해라.
해는 지고 구름에 잠기나 갈 곳은 멀어
어느 곳에 말을 멈추고 고향을 바라볼까.
관북(關北)과 관남(關南)은 이 고개로 나누어진다네.
고향에서 오는 소식 아득해 듣기 어려워, 아득해 듣기 어려워
만리장성 바람과 모래에 멀리 벗들과 헤어져
잠깐 머물러 술 마시며 거나하게 취해보세.
다음은 「관산사」다.
변방의 산 높고 구름 속 나무 빽빽해라.
너른 바다 넘실대니 하늘과 땅은 떠 있다네.
시골 풍속은 모질고 갈 길은 어득히 멀어라.
그대는 무엇 때문에 멀리 와서 노니는가.
하늘은 그윽하고 구름 많아 그늘지며
거센 바람 일어나니 물결 더욱 거세지네.
서울을 바라보니 삼각산 언덕에 가려 있고,
임을 그리려니 머리 하얗게 세려 하네.
술 있는데 마시지 않으면 시름을 어이하리.
거문고 연주하니 초나라 노래 높이 드날리고
두약(杜若)의 향기 흩날리니 초록 소매 들려지네.
술잔을 가져다가 맛 좋은 술을 따르지만,
시름에 겨워 슬프니 누구와 얘기할 수 있으리
그대는 취하지 않고는 돌아가지 말아주오.
한편 관아의 서북쪽 250리에 황토령(黃土嶺)1)이라는 고개가 있다. 이곳을 지나던 허균의 스승인 손곡 이달이 시 한 편을 남겼다.
북풍 불어와 느릅나무에 떨어지고
변방 산화에 역말 길은 아득히 멀다네.
객지에 있다가 아흐레 만에 돌아오다.
말 위에 앉아서 국화꽃을 꺾어드네.
떠돌며 근심함에 일정한 곳이 없고,
날씨도 좋으니 고향 생각이 더하다.
아득히 멀리 외로운 망루 바라보니
성가퀴에 슬픈 풀피리 소리 아련하네.
이곳의 특산물은 은어(銀魚)라고 부르는 도루묵, 곤포(昆布)라고 부르는 다시마, 황어(黃魚)와 연어(鰱魚) 등이었다. 단천에는 『동국지리지(東國地理志)』를 지은 한백겸의 자취가 남아 있다. 명종 7년(1552)에 태어난 서경덕의 문인인 한백겸은 판관을 지낸 한효윤의 삼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579년에 생원시에 합격하였고 1585년에 교정청이 신설되자 교정낭청에 임명되어 『경서훈해(經書訓解)』의 교정을 보았다. 1586년에 병으로 벼슬을 사퇴하였다.
1589년에 정여립의 난(기축옥사)이 일어나 처형된 이진길의 시체를 거둔 죄로 심한 고문을 받고 함경도 지방에 유배되었는데, 그가 갔던 곳이 단천 지방이었던 듯하다. 함흥에 황초령비, 단천에 순수비가 있다고 기록하였기 때문이다. 한백겸은 유배 갔을 때 마운령의 옛날 비를 직접 찾아보고 이를 판독하여 순수비로 단정하였다.
한백겸은 임진왜란2)이 일어나자 대사면령으로 풀려났으며, 그 지방에서 왜군에 아부하여 반란을 선동했던 주모자를 참살한 공으로 내자시직장(內資寺直掌)에 임명되었다. 다시 곧 한성부 참군에 임명되었으나 난민에게 죽을 끓여 먹이는 일을 맡았을 때 불평자들의 항의가 있어 해직되었다. 그러나 임진왜란 후 지방 행정을 수습하기 위해 수령이 될 만한 자를 신료들에게 천거토록 하였을 때 추천된 30명 중 그가 으뜸이었다고 한다.
형조좌랑과 청주목사를 역임한 그는 1611년 파주목사를 지내다가 사임하고 양주의 물이촌에 퇴거하여 연구에 몰두하였다. 한백겸은 실학의 선구자로서 실증적이며 고증학적인 방법으로 조선의 역사와 지리를 연구하고 종래 역사가들의 학설을 비판, 수정하여 그 방면에 새로운 관심을 고양시켰다. 『동국지리지』, 『기전고(箕田考)』, 『구암집(久菴集)』 등의 저작을 남겼다.
정일봉
침엽수림 뒤편으로 김정일이 태어났다는 정일봉이 보인다. 백두산 자락에 있으며, 1988년 ‘장수봉’이었던 것을 개명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한백겸의 고향 단천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6 : 북한, 2012. 10. 5., 신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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