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최초의 족보는 1423년(세종 5년)에 간행된 문화류씨 『영락보(永樂譜)』입니다. 비록 현재는 서문(序文)만 전할 뿐이지만, 우리나라 족보 편찬의 효시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문화류씨의 본관은 황해도 문화(文化)입니다. 흔히 서애(西厓) 류성룡으로 대표되는 풍산류씨와 혼동하는 경우가 있으나, 풍산류씨는 경상북도 안동시 풍산읍을 본관으로 하는 전혀 다른 본관 성씨입니다.
『영락보』에 이어 두 번째로 중요한 초기 족보는 1476년(성종 7년)에 간행된 안동권씨 『성화보(成化譜) 입니다. 『영락보』가 서문만 남아 있는 데 비해 『성화보』는 완전한 형태의 족보가 전해지며,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문화류씨와 안동권씨가 흔히 명문 성씨로 불리는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지만, 다른 성씨보다 훨씬 이른 시기에 족보를 편찬한 점도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입니다. 족보 편찬은 단순히 책을 만드는 작업이 아닙니다. 막대한 재정이 필요할 뿐 아니라, 전국에 흩어진 종인을 찾아 수단(收單)하고 계통을 확인하는 치밀한 작업이 뒤따라야 합니다.
무엇보다 문중의 단합된 조직력이 없으면 성공하기 어려운 대사업입니다.
최근 우리 장흥위씨도 최대 문회 조직인 도문회에서 차기 족보 편찬을 위해 임시 족보편찬위원회를 구성하였습니다. 관계자의 말에 따르면 "전국에 흩어진 종인을 얼마나 찾아내어 수단하느냐가 편찬 사업의 성패를 좌우한다."고 합니다. 그만큼 족보 편찬은 어려우면서도 의미 있는 사업입니다.
장흥위씨 최초의 족보는 1759년(영조 35년)에 간행된 『기묘초보(己卯初譜)』입니다. 이 초보 편찬에는 존재(存齋) 위백규 선생의 부친께서 도유사(都有司)로 참여하였습니다. 도유사는 오늘날로 말하면 족보 편찬 사업의 총책임자에 해당하는 직책입니다.
우리 족보는 우리나라 최초의 족보보다 약 300년 뒤에 간행되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크게 늦은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18세기 중엽에 초보를 간행한 것은 상당히 이른 편에 속합니다. 많은 성씨들이 족보를 본격적으로 간행한 시기가 조선 말기였음을 감안하면, 장흥위씨는 다른 성씨보다 100여 년 이상 앞서 족보를 갖춘 셈입니다.
장흥위씨의 인구는 현재 남한에 약 3만 2천 명 정도로 추산됩니다. 북한 지역 종인까지 포함하면 약 4만 명 안팎이 될 것으로 보입니다. 전해오는 기록에 따르면 세종 때 장흥 용산에 살던 자공 할아버지께서 손자와 함께 북방 미지의 개척에 나서 관북 지역에 정착하였다고 전해집니다. 따라서 북한에 거주했던 장흥위씨 역시 모두 장흥을 뿌리로 하는 후손들입니다.
북한 지역 종인은 약 1만 명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되며, 해방 이후 남하한 관북 종인들까지 포함하면 그 후손 또한 적지 않을 것입니다.
통계청의 2015년 인구주택총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에는 성씨가 5,582개, 본관별 성씨는 36,744개에 이릅니다. 전통적인 고유 성씨는 250~300여 개 수준이지만, 귀화인의 증가로 새로운 성씨가 크게 늘어난 결과입니다.
이처럼 수많은 성씨와 본관 가운데는 지금까지도 족보를 간행하지 못한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그런 점에서 장흥위씨가 18세기에 이미 초보를 편찬하고, 이후 지속적으로 족보를 이어온 것은 매우 자랑스러운 역사라 할 수 있습니다.
특히 1999년에는 8권 분량의 『대동보(大同譜)』를 간행하였습니다. 이전 임자보보다 훨씬 많은 관북 종인들이 참여하여 남과 북의 후손을 아우르는 진정한 의미의 대동보를 완성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더욱 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