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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비지심(是非之心)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마음으로, 맹자(孟子)가 제시한 사단(四端) 중 하나이다.
是 : 옳을 시(日/5)
非 : 그를 비(非/0)
之 : 의 지(丿/3)
心 : 마음 심(心/0)
중국 전국시대의 사상가 맹자는 공자의 뒤를 이어 유학(儒學)을 발전시킨 인물이다. 그는 인간의 본성이 선(善)하다고 보는 성선설(性善說)을 주장하였으며, 사람에게는 누구나 차마 다른 사람에게 모질게 하지 못하는 마음인 '불인인지심(不忍人之心)'이 있다고 하여 성선설을 뒷받침하였다.
또한 불인인지심에 대한 근거로 '모든 인간이 지니고 있는 네 가지의 마음'인 '사단(四端)'을 제시하였다. 사단에는 측은지심(惻隱之心), 수오지심(羞惡之心), 사양지심(辭讓之心), 시비지심(是非之心)이 있으며, 이것을 확장함으로써 인간의 본성을 가리키는 네 가지 덕성인 인(仁), 의(義), 예(禮), 지(智)의 사덕(四德)으로 발전하게 된다고 보았다.
이 중 시비지심(是非之心)은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마음을 가리킨다. 맹자는 "옳고 그름을 가리는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다(無是非之心 非人也)"라고 표현하였으며, "시비지심은 지혜의 시작이다(是非之心 知之端也)"라고 하여 사덕(四德) 중 하나인 지(智)가 시비지심으로부터 비롯된다고 주장하였다.
시비지심(是非之心)
시비지심(是非之心)은 사단(四端)의 하나이다. 단(端)은 실마리의 뜻으로, 사람의 본성에서 우러나는 네 가지 마음씨란 뜻으로 곧 인(仁)에서 우러나는 측은지심(惻隱之心), 의(義)에서 우러나는 수오지심(羞惡之心), 예(禮)에서 우러나는 사양지심(辭讓之心), 지(知)에서 우러나는 시비지심(是非之心)의 네 가지이다.
다음은 맹자(孟子)의 사단설(四端說) 가운데 나오는 말로, 맹자(孟子) 공손추편(公孫丑篇)에 있는 말이다.
無, 惻隱之心, 非人也.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없는 것은 사람이 아니다.
無, 羞惡之心, 非人也.
부끄러운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다.
無, 辭讓之心, 非人也.
사양하는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다.
無, 是非之心, 非人也.
옳고 그름을 아는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다.
惻隱之心, 仁之端也.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어짐의 극치이다.
羞惡之心, 義之端也.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은 옳음의 극치이다.
辭讓之心, 禮之端也.
사양하는 마음은 예절의 극치이다.
是非之心, 智之端心.
옳고 그름을 아는 마음은 지혜의 극치이다.
이 말은 맹자가 독창적으로 주창한 인성론으로서 사단설(四端說) 또는 성선설(性善說)이라고도 한다. 성선설이란 사람의 본성은 선(善)이라고 보는 학설이다.
맹자에 따르면 사람의 본성은 의지적인 확충작용에 의해 덕성으로 높일 수 있는 단서를 천부적으로 가지고 있다. 측은(惻隱), 수오(羞惡), 사양(辭讓), 시비(是非)의 마음이 4단(四端)이며, 그것은 각각 인(仁), 의(義), 예(禮), 지(智)의 근원을 이룬다.
맹자(孟子)의 정치사상의 핵심은 왕도정치인데, 이 왕도정치가 가능한 것은 사람의 본성이 선(善)하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것이다. 곧 사람의 본성은 착하다고 보고 그 마음을 확대하여 나가면 인(仁), 의(義), 예(禮), 지(智)라는 4가지 덕(德)을 완성하게 되고, 다시 이 덕행으로 천하의 백성들을 교화시킴으로써 왕도정치가 실현된다고 보았다.
맹자는 왕도정치의 정신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사람은 다 사람에게 차마 못하는 마음이 있다. 왕이 먼저 백성에게 차마 못하는 마음이 있으면, 백성에게 차마 못하는 정치가 있다. 백성에게 차마 못하는 정치를 행하면 천하 다스리기를 손바닥 안에서 움직일 수 있다.
여기서 사람에게 차마 못하는 마음이란, 사람에게 해(害)를 가하는 것을 차마 하지 못하여 사람의 불행을 앉아서 차마 보지 못하는 마음을 말하는데, 이 마음으로 천하를 다스린다면 마치 손바닥 위에서 물건을 굴리는 것과 같이 아주 쉽게 공(功)을 거둘 수 있다는 말이다.
맹자는 사람에게 차마 못하는 마음은 사람에게 본래 있는 것이라며 성선설(性善說)을 입증하고 있다. 사람들은 다 사람에게 차마 못하는 마음이 있다고 하는 까닭은 이러하다.
이제 사람들이 어린아이가 막 우물에 빠지는 것을 보면, 다 놀라고 불쌍한 마음을 가진다. 이는 그 어린아이의 부모와 사귀려 함도 아니며, 마을 사람들과 벗들에게 칭찬을 받기 위하여 그러는 까닭도 아니며, 그 원성(怨聲)을 듣기 싫어서 그렇게 하는 것도 아니다.
맹자는 사람들은 다 차마 못하는 마음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앞의 이야기로 설명하고 있다. 곧, 어린아이가 위험에 처했을 때 사람들은 누구나 두려워 근심하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들어 반드시 달려가 구하려고 하는데, 이는 사람에게 차마 못하는 근본 마음이 본능적으로 행동하게 할 뿐이라는 것이다.
맹자가 살던 시절 인간의 본성에 대한 이론(異論)으로 세가지가 있었다. 인간의 본성은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다는 것, 인간의 본성은 선해질수도 있고 악해질수도 있다는 것, 어떤 사람들의 본성은 선하지만 다른 사람들의 본성은 악하다는 것 등이다.
이 중 첫째의 입장은 고자(告子)의 견해이다. 고자는 맹자와 같은 시대의 철학자인데, 맹자는 그와 오래도록 논쟁을 벌였다. 고자는 인간의 생리적인 욕망이 곧 본성이라고 주장했다.
식욕이나 색욕은 대표적인 본성으로서, 이같은 생리적 본성에 대해 선하다든지 악하다든지 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이러한 인간에 대해 인(仁)과 의(義)의 도덕적 덕목을 심어서 인성을 바꾸는 것은 어디까지나 후천적인 교육을 통해서라고 말한다.
이에 대해 맹자는 인간의 본성에는 인의(仁義)를 행할 수 있는 본래의 덕성이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본성은 선한 것으로서, 본성에 내재한 인의(仁義)의 덕성을 잘 간직하고 키워서 꽃을 피울 때 성인 군자가 된다고 주장했다.
맹자는 고자가 말하는 동물적인 본능을 인간의 본성으로 보지 않고, 인간만이 독특하게 가지고 있는 인의(仁義)의 덕성이 진정한 인간의 본성이라고 보았다는 점에서 고자와 차이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맹자의 성선설이 모든 인간은 성인처럼 선하다는 주장이 아니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그러나 맹자의 성선설에도 의문은 있다. 맹자가 말한 이상적인 인간관과는 달리 현실에서 인간들은 끊임없이 악한 행동을 하고 있다. 인간이 모두 선한 본성을 지니고 있다면 악은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악은 사사로운 이익에서 비롯된다.
자연은 개인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마구 훼손하면 망가지듯이, 본래 선한 인간의 본성도 사사로운 이익에 빠지면 본성이 발현되지 못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본성에 없던 악이 나타나고 혼란이 생겨나는 것이다. 즉, 인간의 악은 본성에 의한 것이 아니라 외부 환경에 의한 것이다.
맹자가 직접 든 예를 그대로 따와서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나무가 빽빽이 들어찬 산이 있었다. 그런데 사람들이 매일 산에 올라가 나무를 베어 내고, 소들이 풀을 뜯어 먹어서 산이 헐벗게 되었다. 사람들은 헐벗은 산의 모습만을 보고 본디 나무가 없는 산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이 산의 본 모습은 아닌 것이다.
사람도 마찬가지로, 외부환경이 사람의 착한 마음을 자라지 못하게 했기 때문에 악한 행동을 하는 것이지 악인들에게도 선한 본성은 내재해 있다는 것이다. 사람이 살아가는 동안 놓고 살기 힘든 것이 시(是)와 비(非)라는 개념이라고 한다. 옳음과 그름 또는 Yes와 No의 적용에 대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시비(是非)를 분별해야 하는 여건도 문제가 되지만 결국 사고력의 한계에서 기인하는 문제이기도 하다. 사고력의 한계는 시비를 가려 납득할 수 있는 분별을 만들어 내는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
분별을 가리며 살아가는 것에 익숙해지다 보니 시비 이외의 길은 생각하기 어렵다. 교육받은 사회적 가치를 기반으로 시비와 분별력은 적극적으로 개발되어 왔는지 모르겠지만, 시비 그 자체의 시비에 대한 고민에 다가설 기회는 거의 없었지 않나 싶다.
일상의 경험을 거슬러 올라가보면 시비는 불협화음을 만들어 내는 중요한 원인이다. 시비의 분별은 보편성과 사회적 대세라는 원칙을 따르기 때문에 그렇다. 시비의 검증을 위한 잣대는 보편성으로 포장되었지만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다. 덕분에 검증을 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시비 분별은 결국 불만족의 원인이다.
시비는 머리로 따져지고, 인식하지 못하는 순간 조작은 이루어진다. 그래서 시비의 분별을 만들어 내는 근원을 찾아보고자 하는 노력도 의미가 있다. 선(禪)을 수행하는 사람들은 시(是)와 비(非)를 놓아야 한다고 끊임없이 강조한다. 머리로 생각하여 시비를 가리려 하지 말라는 말이다.
머리로 생각하는 순간 이미 시비의 순수성은 사라질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시비를 버려야 시비를 알수 있다고 하는 말은 생각 자체를 버려야 한다는 말이다. 생각이 만들어 지는 지식, 사리를 통한 판단에서 벗어나라는 말이다.
선각(先覺)들은 是속에 非가 있고, 非속에 是가 있음을 깨달으라고 말한다. 시비는 절대적이지 못하기에 수렴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기준임을 깨달으라 말한다. 옳고 그름이라는 단순함에 빠져드는 것을 경계하라는 말이다. 깨달은 이들이 나누는 선문답의 기본 원리는 그런 것이라고 한다. 是와 非의 분별심에서 벗어나도록 만드는 것이다.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는 불교의 대표적인 선문답이 있다. 불성이 있다 해도 답(答)이 아니고, 불성이 없다 해도 답(答)이 아니라고 한다. 의 분별에서 벗어날 수 있을 때 그 답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유가(儒家)에서는 시비지심(是非之心)이 없으면 인간이 아니다고 말한다. 그만큼 인간이 벗어나기 힘든 것이 옳고 그름에 대한 집착이 아닐까 생각된다. 지금까지 이렇게 是와 非의 분별에 지나치게 집착해온 것은 아닌지 반성해야 한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르다 말할 수 있는 것은 이미 고정된 생각으로 부터 나온다. 是와 非를 가만히 들여다 볼 수 있는 여유를 주고 싶다. 복잡한 세상사를 바라볼 때 그리고 세상사를 만들어내는 것을 바라볼 때도 말이다.
일상과 상황을 시비의 분별로만 바라보고자 하는 편협함을 이제 버려야 할 것 같다. 시비를 나누려 하지 않고 시비를 무시하려고도 하지 않는 그런 마음을 가질 수 있다면, 그 속에 섞임으로 숨겨져 있는 중도의 진정한 모습을 찾을 수 있다. 아울러 세상사를 시비와 그 외의 그 무엇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될 것이다.
시비지심(是非之心)의 유혹을 이겨내기 어려운 것이 인간의 본성이라면, 유혹을 넘어 바로 섰던 사람들의 뒤를 쫒아가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사회학자인 앤서니 기든스가 사회구성체 논쟁에 제 3의 길을 있음을 주장했던 것처럼 우리가 살아가고, 받아들이고, 변별력을 가지는 것에도 제 3의 길은 있을 것이다.
시비라는 당연성의 수렁에서 자신을 건져내기 위한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是속에 非가 있고, 非속에 是가 있음에서 무엇을 낚아내야 할 것지, 그 낚아냄을 통해서 무엇을 깨달아야할 것인지 열심히 참오해야 할 것이다.
맹자는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착한 본성을 인(仁), 의(義), 예(禮), 지(智)로 보았다. 인(仁), 의(義), 예(禮), 지(智)는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마음속에 간직되어 있다가 어떤 상황이 벌어지면 감정으로 나타난다고 맹자는 말했다. 물에 빠지려는 아이를 보고 측은한 감정이 본래 우리 마음속에 인(仁)이라는 씨앗이 있다는 증거라고 말한다.
인(仁)의 뜻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고 사람을 알아보는 것이다. 그리고 의(義)의 뜻은 나의 잘못을 부끄러워 하고, 남의 잘못을 미워하는 마음이다. 또, 예(禮)의 뜻은 자기가 대접받고 싶은 대로 남을 대접하는 정신이 바로 '예'라고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지(智)는 내가 어떻게 해야 될지 판단할 수 있는 마음이다.
이렇게 마음속의 인(仁), 의(義), 예(禮), 지(智)가 네 종류의 정서로 나타난 것을 맹자는 사단(四端)이라고 하였다. 이때 본성과 사단의 관계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인(仁) : 측은지심(남의 불행한 처지를 보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
의(義) : 수오지심(자기의 잘못을 부끄러워하고 남의 잘못을 미워하는 마음)
예(禮) : 사양지심(남에게 양보하는 마음)
지(智) : 시비지심(옳고 그름을 가리는 마음)
인성(人性)의 전체성(全體性)이라는 측면에서 맹자가 인(仁), 의(義), 예(禮), 지(智)를 들었다. 맹자는 시비지심(是非之心) 지지단(智之端)이라 하였다. 시시비비(是是非非)는 인(仁), 의(義), 예(禮)를 판단하고 실천하는 동력이다. 그것이 있음으로 해서 인(仁)은 인(仁)이요, 의(義)는 의(義)요, 예(禮)는 예(禮)일 수 있다. 판단과 실천이 강조되는 유교적 윤리관은 따라서 그만큼 지(智)를 강조하고 있는 사상이다.
논의를 좀더 명확히 하기 위해 사단을 기하학적 도형으로 그려 가시화할 필요가 있겠다. 인(仁)이란 주객일체(主客一體)를 통해 원융(圓融) 원만을 지향하는 것으로서 원형으로 그림 그려진다. 기독교의 사랑이나 불교의 자비가 모두 여기 인(仁)과 상통하며, 구조적으로는 통합원형을 실현하는 혼융일체형(混融一體形)이다.
의(義)는 주체와 객체를 너와 나로 뚜렷히 나누는 성질이다. 그래서 천평과도 같은 좌우 수평의 구조를 그리며, 주객대칭형으로 나타난다.
예(禮)란 질서의 원리다. 사양이나 공경이라는 말이 이미 시사하고 있듯, 이는 수평적인 관계가 아니라 시간적으로는 선후, 공간적으로는 상하의 구조를 그린다. 예(禮)란 그래서 상하수직의 기하학적 도형을 통해 상하조응의 안정된 무게 중심을 잡아 사회적 질서를 실현하는 것이다.
인(仁), 의(義), 예(禮)는 이렇듯 원형, 수평, 수직의 도형으로서 안팎, 좌우, 상하의 공간배치를 그려내는데, 지(智)란 시비지심으로써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 시비란 옳고 그름이다. 어떻게 보면 인(仁), 의(義), 예(禮)는 서로 상충된다. 너와 내가 하나로 어우러지는 인(仁)과 너와 나를 둘로 엄별하는 의(義)가 서로 다르며, 이런 점에서 너와 나를 상하, 또는 선후의 관계로 준별하는 예(禮) 역시 별종의 심성이다.
그런데 이렇게 서로 다른 방향을 지향하는 운동들이 실제적으로는 하나의 마음속에 공존하고 있다. 원리적으로는 충돌하면서도, 현실적으로 하나의 마음에 모두 포함되어 있는 이러한 심성에 대해 이미 있는 그대로이므로 받아들여야 할 뿐이라는 설명은 설득력을 얻기 어렵다.
비록 방향을 달리하는 운동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마음이라는 하나의 공간에 공존시킬 수 있는 요인이 찾아져야 한다. 그러한 요인이 설명되지 못하면 인간은 지극히 모순 덩어리에 불과하다.
아직 설명되지 않은, 시비지심의 지(智)란 여기에 적중할 것으로 보인다. 시시비비란 판단이다. 판단은 객관적인 사태와 일치할 수도 있고, 그러지 못할 수도 있다. 시시(是是)란 객관적 사태와 주관적 판단 내용이 일치하는 것이요, 비비(非非)란 그렇지 못한 경우다.
논리학에서 말하는 소위 진리치(眞理値)란 명제의 진리성과 허위성을 말하는 바, 이는 곧 시시비비와 상통하는 개념일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여기서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 옳은 것은 옳다 하고, 그른 것은 그르다고 말하는 것, 또는 옳은 것은 하고, 그렇지 못하면 하지 않는 실천적 측면까지가 이 말 속에는 들어 있다.
인(仁), 의(義), 예(禮)가 인간 관계를 설정하는 것이라면, 지(智)란 이러한 관계를 올바로 정립시키는 데 필요한 판단의 기준이며, 실천의 원리다. 시비지심의 지(智)는 주로 인간의 행위나 도리에 관계되고, 진위를 가리는 지(知)란 객관적 사태에 대해 적용된다. 지(智)는 주관적인 지(智)이고, 지(知)는 객관적인 지(知)로도 구분이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유학(儒學)이라는 것이 워낙 윤리적인 측면을 강조하는 것인 만큼 진리치에 대한 판단 준거를 知(지)보다는 智(지)에 두었을 것으로 안다. 그래서 인(仁), 의(義), 예(禮)라는 것이 인간 관계를 설정하는 바탕이라면, 이들을 준별해내는 것은 智(지)인 것이다.
시시비비의 智(지)는 곧 인간 관계에 대한 당위론적 규범을 제시하는 형태로 나타나게 된다. 인(仁)을 인(仁)으로, 의(義)를 의(義)로, 예(禮)를 예(禮)로 실현토록 하며, 그것의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이 곧 지(智)다.
측은지심(惻隱之心)을 베풀어야 할 상황에서는 인(仁)을, 수오지심(羞惡之心)을 발동시키는 상황에서는 의(義)를, 공경과 사양지심(辭讓之心)을 발휘할 상황에서는 또 예(禮)를 실천할 수 있어야 是(시)고, 그렇지 못하면 非(비)다.
다음으로 仁(인)이나 禮(예)에 비해 義(의)는 현실적으로 큰 힘을 가진다. 이것이 잘못 발동되면 문제는 심각해진다. 인(仁)과 예(禮)에 비해 의(義)가 작용했을 때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보다 큰 파장을 불러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앞에서 의(義)에 대한 구조를 도시(圖示)한 바 있지만, 의(義)란 항상 주체와 객체가 상대적 관계에 있을 때 성립되는 인성이다. 예(例)를 들어 보면, 주체가 우리나라요, 객체가 우리나라를 침략한 왜구였을 때, 의(義)가 발동하여 주체를 부정하려는 객체를 다시 부정하여 결과적으로는 주체 긍정을 도모하려는 의병활동이 활발했다.
그러나 의(義)를 실천하는 동일한 원리가 이렇듯 건설적으로만 작용하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그 의(義)가 반드시 긍정적으로만 작용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즉 주체와 객체가 나누어지는 상황에서는 어떤 경우든 항상 이것이 발동한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의(義)를 통제하고 감시할 수 있는 것은 앞에서도 말한 시시비비의 지적 판단력이다. 의(義)는 그 작용력도 중요하지만, 오히려 의롭게 그것이 사용되어야 한다. 따라서 의(義)가 단지 억센 승벽심으로 작용하려 할 때 얻어지는 결과는 '과하면 부족함만 못하다'는 지혜를 끝내 거역하고 마는 꼴이 되고 만다.
어린 아이가 우물에 빠지는 것을 보았을 때, '아! 저걸 어쩌나' 하는 마음결(情)이 이는데 여기에는 놀람과 두려움과 애긍(愛, 哀, 惻隱之心)과 불행을 싫어하는 마음(惡, 羞惡之心)과 누구의 과실로 이렇게 된 것을 함께 보았다면 그렇게 만든 사람 또는 物(물)에 대한 분노(怒, 羞惡之心), 빨리 구해야 한다는 마음(欲)과 그 판단(是非之心) 등이 순간적으로 하나가 되어 나타난다. 사단(四端) 외에 칠정(七情) 없고 칠정(七情) 외에 사단(四端)은 없는 것이다.
시비지심(是非之心)
옳고 그른 것을 가릴 줄 아는 마음
옳고 그른 것이 물론 시비(是非)다. 옳고 그른 것을 따지는 것도 역시 시비다. 옳고 그른 것이 명확히 구별될 것 같은데 일상에서 끝없이 시비가 일어나는 것은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도덕적인 문제는 주관적이라 시비를 가리기 어렵고, '참깨가 기니 짧으니 한다'는 속담대로 차이가 별로 없는 것에도 무조건 자기가 옳다고 우긴다.
전후 사정을 따지지 않고 불문곡직(不問曲直) 나서는 사람도 많다. 남의 말에 쌍지팡이 짚고 나서는 사람이다. 그렇다고 흑백이 분명한데 검다, 희다 가리지 않아도 속 터진다. 이렇게 해도 저렇게 해도 어려우니 시비가 끊이지 않는 모양이다.
사람은 누구나 태어날 때부터 선한 본성을 가졌다고 하는 성선설(性善說)은 맹자(孟子)의 독창적 인성론이다. 사람들은 남의 고통을 견디지 못하는 인성을 갖고 태어나는데 측은지심(惻隱之心)부터 시작하는 사단(四端)이 그것이다.
맹자가 제자 공손추(公孫丑)와 문답한 내용에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마음이 없다면 사람이 아니라고까지 말한다. 부분을 보자. 공손추 상편(上篇)이다.
無惻隱之心 非人也,
측은하게 여기는 마음이 없다면 사람이 아니고
無羞惡之心 非人也,
부끄러워하는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며,
無辭讓之心 非人也,
사양하는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고,
無是非之心 非人也.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마음이 없다면 사람이 아니다.
이 네 가지의 마음이 각각 仁(인) 義(의) 禮(예) 智(지)의 근원을 이루는 단서라고 했다. 이 중에서 '시비를 판단하는 마음이 지의 단서(是非之心, 智之端也)'라 하고 선악을 옳게 또는 그르게 여길 줄 아는 것이 사람이라는 이야기다.
사람은 시비 속에서 살아간다. 채근담(菜根譚)의 충고를 들어보자.
聽鶯啼則喜, 聞蛙鳴則厭.
꾀꼬리 소리는 좋아하고 개구리 울음은 싫어한다.
見花則思培之, 遇草則欲去之.
꽃을 보면 가꾸려 하고 잡초를 보면 뽑으려 한다.
사람의 심정이 보통 이렇지만 어느 것인들 하늘의 뜻에 따르지 않는 것이 없으니 괜히 건드리지 말고 천지자연 그대로 두라는 뜻이다. 어지간한 것은 지나치고, 적이라도 명확히 옳은 것은 치켜 주며, 같은 편이라도 그른 것은 그르다고 하면 시비가 줄어든다.
시비지심(是非之心)
옳고 그름을 따지는 마음
맹자에 의하면 사람은 본성(本性)을 깨닫고 완성할 수 있는 단서를 천부적으로 가지고 있으며 그것이 곧 측은(惻隱), 수오(羞惡), 사양(辭讓), 시비(是非)의 마음이다. 이 4단(四端)의 마음을 확충시켜 나아갈 때 '인의예지'의 네 가지 덕성을 완성하게 된다. 맹자의 사단설은 사회윤리적 측면으로 적용되어 인정(仁政)론의 기초가 되었다.
인간의 본성을 알기 힘든데 알기 힘든 본성인 인의예지(仁義禮智)를 알 수 있는 단서가 되는 마음이 곧 사단(四端)이다. 이 사단을 차마 타인을 해치지 못하는 마음이라는 불인인지심(不忍人之心)에 근거해서 처음으로 설파한 학자가 맹자(孟子)이다.
그리고 그 불인인지심(不忍人之心)을 넷으로 구분하여 다음의 사단설을 주장하였는데 그 가운데 옳고 그름을 헤아리는 마음인 시비지심(是非之心)은 인간의 지(智)적 본성을 증명하는 단서이다.
이 시비지심 때문에 세상의 경제활동이 다양하게 돌아간다. 무슨 이야기일까? 단일하게 확정된 사안에 대해서는 이렇다 저렇다 할 것이 없다. 경제적으로 보면 이런 것이 가격이다. 가격은 변동은 하지만 어느 때의 가격은 고정되어 있으므로 그 가격 자체에 대해서 시비를 따지지는 않는다. 그러나 가치는 다르다. 어느 상품이나 물건의 가치는 보는 이에 따라 달리 매길 수 있다. 이 때 작동되는 마음이 시비지심이다.
이 시비지심이 올바르게 작용된다면 남들보다 그 가치에 대해 더 높은 값을 매기게 되니 이렇게 보면 가치란 주관적 가격이다. 주관적 가격은 말 그대로 주관에 따라 다 다르니 가격과 가치는 괴리가 있는 것이 당연하다. 향후 미래에 펼쳐질 세상에 대해 준비를 하여 이익을 취하려거든 당장의 신제품의 가격만 보지 말고 그 가치를 생각해 보아야 하는 이유이다. 비트코인도 그 중의 하나가 아닐까 하는데 부디 시비지심의 지적 본성을 발현해보길 권한다.
시비지심(是非之心)과 지(智)
옳고 그른 것을 판단하는 능력 역시 맹자는 측은지심이나 수오지심처럼 '마음'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이 '지(智)' 즉 앎의 단서라고 말한다.
오늘날 우리는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작용 또는 앎을 관장하는 작용은 머리에 있는 뇌라고 생각하는데, 맹자는 연민을 느끼거나 정의감을 느끼는 것과 마찬가지로,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일 역시 마음이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지식 또는 지혜의 영역에 대해서도 맹자는 오늘날의 상식과는 다르게 생각했다. 오늘날 우리에게 지식이나 지혜가 관여하는 부분은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일보다는 경험적인 학습이나 견문에 의해 얻게 된 정보, 또는 그에 바탕을 둔 판단력을 의미한다.
맹자에게도 시비지심이 판단력을 의미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정보에 바탕을 둔 판단력이 아니라, 옳고 그름, 즉 가치를 판단하는 능력이다. 게다가 그것은 경험적인 것이 아니다. 맹자는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능력이 이미 타고날 때부터 내 마음에 주어져 있는 선천적인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옳고 그름이라고 하면, 이미 인이나 의의 기준만 가지고도 결판이 나있다. 인과 의는 옳은 것이고 불인과 불의는 그른 것이다. 그것 외에 어떤 다른 옳고 그름이 있을까? 실제로 맹자는 지의 실질에 대해 인과 의 "이 두 가지를 알아서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이루상 27)이라고 설명한다.
'맹자' 안에서 지의 덕목이 언급되는 경우도 인과 관련해서이다. 예를 들어 "인은 하늘이 내려준 높은 벼슬이고 사람이 머무는 편안한 집인데, 막는 사람도 없는데 인하지 못하다면 지혜롭다고 할 수 없다"(공손추상 7)라고 한다.
여기서 보면 지(지혜)는 인이 좋은 것을 알고 그것을 실천하는 것이다. 비슷한 예로, 정치를 하려 한다면 선왕의 도, 즉 왕도정치를 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으면 지혜롭지 못하다(이루상 1)고 하는 이야기도 실려 있다.
즉 맹자가 말하는 시비지심, 그리고 지혜[智] 어느 것이 인한 것인지, 어느 것이 의로운 것인지를 판단하고 그 선택을 유지하는 능력이다. 그리고 그것은 타고난 마음이다. 이미 가려져 있는 시비, 즉 인과 의와 불인과 불의를 잘 아는 마음이다.
성선설(性善說)
정의
인간의 성품이 본래부터 선(善)한 것이라고 보는 맹자(孟子)의 학설이다.
내용
순자(荀子)의 성악설(性惡說)과 대립되는 이론이다. 맹자는 '천명지위성(天命之謂性)'이라고 한 '중용'의 내용을 계승해 성을 만물에 내재된 하늘의 작용, 즉 천명으로 파악함으로써 만물은 성, 즉 천명을 중심으로 볼 때 모두 하나라고 하는 만물일체사상(萬物一體思想)을 확립하였다.
그리고 하늘의 작용이 천지 자연의 대조화(大調和)를 연출하고 있으므로 그 하늘의 작용을 성으로 이어받은 인간도 성의 움직임을 따르면 인간 사회는 저절로 조화를 이루게 된다는 의미에서 성선설을 주장하였다.
하늘의 작용인 천명은 만물을 낳고자 하는 작용으로 이해할 수 있는데, 맹자에 의하면 이 천명의 작용은 여천지동류(與天地同流)로 표현된 바와 같이 유(流) 즉 '흐름'의 개념으로 파악된다. 모든 존재자의 근저에서 흐르고 있는 이 '흐름'은 형이상학적인 개념이다. 맹자에 의하면 모든 존재자의 존재하는 현상들은 이 '흐름'에 편승하여 조화를 이룬 상태에서 유지되는 것으로 설명된다.
이러한 '흐름'을 존재의 본질로서 이어받고 있는 인간의 성은 남을 사랑하는 작용으로 나타나는데, 만물을 낳고자 하는 천명이나 남을 사랑하는 인성(人性)은 모두 인간의 의식이나 감정의 밑바닥에서 흐르는 인간 행위의 원동력이다.
인성의 내용으로서 설명되는 구체적인 예는 맹자에 의하면, 인의예지(仁義禮智)로 설명된다. 인(仁)은 측은지심(惻隱之心), 의(義)는 수오지심(羞惡之心), 예(禮)는 사양지심(辭讓之心), 지(智)는 시비지심(是非之心)이 나타나는 바탕이 된다.
측은지심의 구체적인 예로 맹자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즉, 사람들은 어린아이가 우물에 들어가려 하는 것을 언뜻 보면 다 깜짝 놀라며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생기는데, 이는 그 어린아이의 부모와 교제하기 위한 것도 아니고 동네의 친구들에게 어린아이를 구해 주었다는 명예를 얻기 위함도 아니며, 어린아이를 구해 주지 않았다고 비난하는 소리가 싫어서도 아니라는 것이다.
이 측은지심과 같은 성의 작용은 인간의 생각이나 판단을 초월해 존재하는 만인 공통의 것이며 그러한 의미에서 이를 천명이라 설명하는 것인데, 이러한 성이나 천명의 작용을 맹자는 선(善)이라고 한 것이다. 그러므로 맹자가 성선이라고 했을 때의 선은 인간의 의식이나 생각이 개입된 판단에 의해 이루어진 도덕적 행위를 표현한 말이 아니라, 의식을 초월해 그 밑바닥에서 흐르고 있는 성의 움직임 그 자체를 표현한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의미의 선은 '주역'의 '계지자선 성지자성(繼之者善 成之者性)'이라 했을 때의 선의 개념처럼 악에 대립되는 상대 개념이 아니라 상대 개념의 선악을 초월한 절대 개념이다.
맹자의 성선설에 관한 구체적인 내용을 '맹자' 고자장(告子章)에서 펼쳐진 고자와의 논쟁에서 살펴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① 성은 기류(杞柳) 즉 버드나무와 같고 의는 배권(桮棬 : 나무를 구부려 만든 술잔)과 같으니, 인성을 가지고 인의라 하면 버드나무를 가지고 그릇이라 하는 것과 같이 되어버리기 때문에 옳지 않다고 한 고자의 말에 대해, 맹자는 답했다. "자네는 능히 버드나무의 성질을 이용해 그 그릇을 만드는가 아니면 버드나무의 성질을 없애어 그릇을 만드는가, 만약 버드나무의 성질을 없애서 그릇을 만든다면 사람의 본성을 없애서 인의를 만드는가"라고 되물으며, 버드나무로 만든 그릇은 버드나무의 성질을 이용해 만드는 것처럼 성과 인의도 일직선상에서 파악되어야 함을 설명하였다.
② 성은 고여 있는 물과 같아 동쪽으로 터놓으면 동쪽으로 흐르고 서쪽으로 터놓으면 서쪽으로 흐르게 되어 물의 흐름이 동서로 정해져 있지 않은 것처럼, 인성에도 선과 악으로 나누어져 있지 않다고 하여 성선설에 반대한 고자에 답했다. 맹자는 물의 흐름은 동서로 나누어져 있지 않지만 상하로는 나누어져 있는 것이니, 인성이 선한 것은 물이 아래로 흐르는 것과 같다고 함으로써 성선의 선이 절대 개념임을 강조하였다.
③ '생지위성(生之謂性)'이라 하여 성을 생(生)으로 해석함으로써 성을 육체적인 생명 현상으로 파악한 고자에 대해, 맹자는 개의 성과 소의 성, 사람의 성은 천명으로서의 근원은 같지만 현상 속에서 구체화되어 나타날 때는 다른 양상으로 나타난다고 함으로써 성은 육체적인 생명 현상이 아니라 선천적인 것임을 설명하였다.
④ 식(食)이나 색(色)을 좋아하는 것과 같은 육체적인 생명 현상이 성이며 또 맹자가 성의 내용으로 설명한 인의예지 가운데 인은 심(心)의 안에 있지만 의는 저 사람이 연장자이기 때문에 내가 연장자 대접을 해주는 것과 같이 심의 바깥에 있는 것이므로 인의예지의 성을 인간의 심 내부에 있는 선험적(先驗的)인 것이라고 한 맹자의 성설(性說)을 옳지 않다고 고자가 비판하였다.
고자의 비판 대해, 맹자는 연장자를 보고 연장자로 대접하는 심의 작용이 의이기 때문에 연장자로 대접하는 작용은 심 속에 있는 것이며, 따라서 성의 내용이 된다고 답변해 성의 내면적 선천성을 설명하였다. 성선설에 반해, 인간의 육체가 가지는 기본적인 욕구를 성으로 파악한 순자는 투쟁으로 나아가는 육체적인 욕구의 방향성에 주목하여 성악설을 주장하였다.
그 밖에 중국 철학 사상에서 전개된 성설을 보면, 성에는 선이나 악이 결정되어 있지 않다는 고자의 성무선무악설(性無善無惡說), 모든 사람의 성에는 선과 악이 동시에 내재해 있다는 양웅(揚雄)의 성선악혼효설(性善惡混殽說), 사람 중에는 선한 성을 가진 자, 악한 성을 가진 자, 그리고 선으로 인도하면 선하게 되고 악으로 인도하면 악하게 되는 중간자의 삼품(三品)으로 구분된다는 한유(韓愈)의 성삼품설(性三品說) 등이 있다.
송대에 완성된 성리학에서는 특히 맹자의 성을 본연지성(本然之性), 순자의 성을 기질지성(氣質之性)으로 파악해 맹자의 성선설과 순자의 성악설을 통합하였다. 한편, 인성론(人性論) 중심으로 발달한 한국 유학에 있어서는 성론이 철학의 중심 과제가 되어온 것은 사실이나, 맹자의 성설이 주로 수용되고, 다른 성설은 수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성설이 다양하게 전개되지 않고 맹자의 성설을 전제한 상태에서 주로 성을 실천하기 위한 수양 철학(修養哲學)이 발달하였다.
퇴계 철학에 있어서의 경사상(敬思想)이나 율곡 철학에 있어서의 경사상이 바로 성의 실천을 위한 수양 철학인 것이다. 그리고 기질지성의 문제는 한원진(韓元震)의 인물성상이설(人物性相異說)을 중심으로 전개된 호학(湖學)과 실학(實學)에서 취급되었으나 한국 유학의 주류를 형성하는 데까지 발전하지는 못하였다.
사단설(四端說)
요약
중국의 맹자가 주창한 인간의 도덕적 본성에 관한 학설이다.
본문
중국 전국시대(戰國時代)의 유가(儒家) 사상가인 맹자(孟子)가 주창한 인간의 도덕적 본성에 관한 학설로,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선(善)을 향한 네 가지 단서(端緖)를 마음에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사단(四端)이라고 일컫는 그 네 가지 단서는 안타까운 처지에 놓인 사람을 가여워하는 측은지심(惻隱之心), 잘못을 부끄러워하고 싫어하는 수오지심(羞惡之心), 겸손히 남에게 양보할 줄 아는 사양지심(辭讓之心), 옳고 그름을 가릴 줄 아는 시비지심(是非之心)이다.
맹자는 이로부터 인(仁), 의(義), 예(禮), 지(智)의 네 가지 덕이 싹튼다고 보았으며, 이러한 사단설(四端說)을 바탕으로 인간이 본래부터 선한 본성을 지니고 있다는 성선설(性善說)을 주장했다. 때에 따라서는 '사양지심'이 '공경지심(恭敬之心)'으로 바뀌어 나타나기도 한다.
사단설은 '맹자(孟子)'의 여러 곳에서 되풀이해서 나타난다. '고자장구상편(告子章句上篇)'에서 맹자는 성무선악설(性無善惡說)을 주장한 고자(告子)를 비판하면서 인간이 자신의 성정(性情)에 따르면 선해질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측은지심, 수오지심, 공경지심, 시비지심은 사람이면 누구나 가지고 있다(惻隱之心人皆有之 羞惡之心人皆有之 恭敬之心人皆有之 是非之心 人皆有之)"고 강조하며, "측은지심은 인, 수오지심은 의, 공경지심은 예, 시비지심은 지(惻隱之心仁也 羞惡之心義也 恭敬之心禮也 是非之心智也)"라고 했다.
공손추장구상편(公孫丑章句上篇)에서는, 인간은 모두 남의 고통을 차마 지나치지 못하는 '불인인지심(不忍人之心)'을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 어린아이가 우물에 떨어지려는 것을 보면 누구나 저절로 놀라며 측은한 마음을 지니게 된다는 것을 예로 들며, "측은지심, 수오지심, 사양지심, 시비지심이 없으면 사람이라고 할 수 없다(無惻隱之心非人也 無羞惡之心非人也 無辭讓之心非人也 無是非之心非人也)"고 강조했다.
아울러 이를 바탕으로 "측은지심은 인, 수오지심은 의, 사양지심은 예, 시비지심은 지의 단서(惻隱之心仁之端也 羞惡之心義之端也 辭讓之心禮之端也 是非之心智之端也)"이며, "사람이 이 사단을 지니고 있는 것은 사지를 지니고 있는 것과 같다(人之有是四端也 猶其有四體也)"고 하였다.
사단칠정(四端七情)
풀이
사단(四端)과 칠정(七情)을 합한 말이다. 사단은 인의예지(仁義禮智), 칠정은 희로애락애오욕(喜怒哀樂愛惡欲)을 말한다.
유래 및 용례
'맹자(孟子)' 공손추상(公孫丑上)에 나오는 말이다. 맹자의 이 사단론은 성선설(性善說)에 바탕을 둔 정치 이론에서부터 출발한다.
사람은 누구나 남에게 차마 못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 옛 성왕(聖王)들은 남에게 차마 못 하는 마음을 가지고 남에게 차마 못 하는 정치를 했다. 남에게 차마 못 하는 마음으로 남에게 차마 못 하는 정치를 행하면 천하를 다스리는 것은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놀리는 것과 같다.
이른바 사람이 다 남에게 차마 못 하는 마음을 가졌다는 것은, 지금 사람들이 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지려 하는 것을 보면, 그 순간 누구나가 놀라며 슬퍼하고 아파하는 마음을 갖게 된다. 그것은 어린아이 부모에게 잘 보이려는 것도 아니요, 이웃 친구들의 칭찬을 듣기 위해서도 아니며, 흉보는 소리가 싫어서 그런 것도 아니다.
이것을 놓고 보면, 측은해하는 마음이 없는 것도 사람이 아니며, 부끄러워하는 마음이 없는 것도 사람이 아니며, 사양하는 마음이 없는 것도 사람이 아니다. 측은해하는 마음은 인의 실마리요, 부끄러워하는 마음은 의의 실마리요, 사양하는 마음은 예의 실마리요, 옳다 그르다 하는 마음은 지의 실마리다.
사람이 이 사단을 가진 것은 그가 사체(四體; 四端)를 가지고 있는 것과 같다. 이 사단을 가지고 있으면서 스스로 못 한다고 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해치는 사람이요, 임금을 보고 못 한다고 하는 사람은 임금을 해치는 사람이다.
무릇 사단이 나에게 있는 것을 모두 키워 나가 이를 충실하게 할 줄을 알면, 그것이 불이 처음 타기 시작하는 것과 같고, 샘물이 처음 솟아나는 것과 같다. 참으로 계속 키워 나가게 되면 천하도 능히 다스릴 수 있고, 참으로 키워 나가지 못한다면 부모도 제대로 섬길 수 없다.
단(端)은 끝이란 뜻인데 그것은 처음 시작되는 끝을 말한다. 우리가 어떤 사건을 해결하는 단서(端緖)를 찾았다고 할 때의 단서와 같은 뜻이다. 우리말의 실마리에 해당한다.
인의예지(仁義禮智) 중에서 인(仁)의 실마리는 측은지심(惻隱之心), 의(義)의 실마리는 수오지심(羞惡之心), 예(禮)의 실마리는 사양지심(辭讓之心), 지(智)의 실마리는 시비지심(是非之心) 등이며 보통 인의예지(仁義禮智) 이 네 가지를 말하게 된다.
사단칠정(四端七情) 논쟁
조선시대 퇴계 이황(李滉)과 고봉 기대승(奇大升) 간에 전개된 사단(四端)과 칠정(七情)에 관한 이기론적(理氣論的) 해석을 둘러싼 논쟁을 말한다.
이황(李滉)은 이(理)와 기(氣)가 시간상, 공간상 분리되어 발동한다는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주장하였고, 기대승(奇大升)은 이(理)와 기(氣)의 시공상의 분리를 생각하지 않는 이기겸발설(理氣兼發說)을 주장하였다. 양자는 모두 기발(氣發)에 의한 것이라는 입장인 기발일도론(氣發一途說)을 견지한다.
성리학의 쟁점은 크게 태극(太極), 이기(理氣), 심성(心性)의 문제를 중심으로 제기되어 왔으며, 특히 조선시대 성리설의 논쟁은 주로 심성 문제에 집중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언적을 중심으로 '태극' 개념의 논쟁도 일어났으나 극히 한정된 인물들 사이에서 벌어진 것이었다. 이에 비해 '심성' 개념의 문제를 둘러싼 논쟁은 조선시대 전반을 통해 광범하고 지속적으로 전개됨으로써 한국성리학의 특징을 이루는 주요 논쟁으로 자리잡았다.
이처럼 심성론이 조선시대 성리학에서 큰 비중을 지니고 다양한 논쟁을 거치면서 발전해 왔던 것은 인간의 도덕적 근원을 밝히고 인격의 실현을 위한 실천근거를 해명하는 문제를 다루기 때문이다.
곧 도덕적 근원을 심성 안에서 인간의 자주적 의지의 결정에 의해 드러나는 마음의 주체성에서 찾을 것인지, 아니면 인간내면의 근원으로서 보편적이고 초월적인 본체에서 찾을 것인지에 따라 사단칠정논쟁이 중대한 쟁점으로 부각되었던 것이라 볼 수 있다.
사단(四端), 칠정(七情)의 문제는 심성론(心性論)의 한 주제로서, 송대 성리학자인 장횡거가 제기한 '심통성정(心統性情)', 곧 '마음이 감정과 본성을 통섭한다'는 명제에 따르면 심성론 속에서도 감정의 유형을 제시한 개념이다. 마음(심)의 문제로는 마음이 이(理)인가 기(氣)인가의 쟁점과 더불어 인심(人心), 도심(道心)의 문제가 제기되고 있으며, 성품(성)의 문제로는 인성(人性)이 물성(物性)과 같으냐 다르냐의 쟁점이 등장한다.
사단(四端)과 칠정(七情)은 마음의 작용으로 나타나는 감정의 양상으로서 서로 다른 경전에서 나온 것이다. '사단(四端)' 즉, 측은지심(惻隱之心), 수오지심(羞惡之心), 사양지심(辭讓之心), 시비지심(是非之心)은 '맹자' '공손추상'에서 나오는 용어로서 인간의 성품이 선하다는 증거로 확인되는 선한 감정의 양상이요, 사단의 마음(감정)은 인간의 성품인 인(仁), 의(義), 예(禮), 지(智)의 끄트머리(단/端)라 설명하고 있다.
'칠정(七情)' 즉, 희노애구애오욕(喜怒哀懼愛惡欲)은 '예기' '예운(禮運)'에서 나오는 것으로 인간의 자연스러운 감정(人情)의 양상을 제시한 것이다. '중용'에서 희로애락(喜怒哀樂)의 네 가지 감정을 언급한 것도 '칠정'과 같은 성격의 감정을 가리키는 것으로 본다.
사단(四端)과 칠정(七情)의 감정은 마음의 작용이 밖으로 나타나는 양상인 만큼 경험적으로 가장 쉽게 확인될 수 있는 현상이다. 이에 비해 성품은 마음의 본체요, 마음은 본체로서의 성품과 작용으로서의 감정을 동시에 포섭하고 있는 존재로 이해된다.
사단(四端)과 칠정(七情)은 서로 다른 경전에서 나온 감정의 두 가지 유형인데 이 양자를 어떻게 연관시켜 파악할 것인가의 문제에 부딪치게 되었으며, 또한 이 양자를 이(理)와 기(氣)의 개념으로 어떻게 분석할 수 있는가의 문제가 제기되면서 논쟁의 초점으로 부각되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곧 심(心), 성(性), 정(情)의 인성론적 개념을 이(理)와 기(氣)라는 존재론적 기본범주로 해명하고 있는 것이요, 특히 인간의 감정이 이(理)와 기(氣) 개념과 어떻게 연결되는가에 따라 인간 감정 속에서 선(善)과 악(惡)의 발생근원을 확인하는 윤리적 문제로 연결되고 있는 것이다.
사단칠정론의 쟁점은 이(理)를 주로 해서 보느냐 기(氣)를 주로 해서 보느냐에 따라 주리론(主理論)과 주기론(主氣論)으로 나누어 볼 수 있고, 또 이(理)의 작용으로 보느냐 기(氣)의 작용으로 보느냐에 따라 이(理)가 발동하는 것으로 보는 이발설(理發說)과 기(氣)가 발동하는 것이라 보는 기발설(氣發說)로도 나눌 수 있다.
또한 사단(四端)과 칠정(七情)에서 이(理)와 기(氣)가 분리될 수 없는 통합적 작용이라 보는 혼륜설(渾淪說)과 이(理)와 기(氣)의 어느 쪽이 주도적으로 작용하는 것이라 보는 분개설(分開說)로 나누어진다. 이처럼 이(理)와 기(氣)개념의 인식에 따라 사단(四端)과 칠정(七情)의 해석에 대립적 입장이 제기될 수 있으며, 이에 따라 격렬한 논쟁으로 발전할 수 있는 소지가 마련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단(四端)과 칠정(七情)의 문제는 인간의 감정을 설명하는 서로 다른 개념들이기 때문에 성리학이 이 두 개념을 통합하여 세련된 해석을 시도하면서, 먼저 이 두 개념들이 서로 어떠한 연관관계를 가지고 있는지 밝히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사단(四端)과 칠정(七情)에 대해 주자(朱子)는 "사단은 이가 발동한 것이고, 칠정은 기가 발동한 것이다(주자어류)"라고 하여 두 유형의 감정양상을 이(理)와 기(氣)에 각각 소속시켰으나 가볍게 스쳐 가는 문제였을 뿐 더 이상의 토론이 전개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들어오면서 사단과 칠정의 문제는 가장 널리 퍼지고 오래 지속되었던 중대한 쟁점으로 확립되었다.
곧 권근(權近)은 '입학도설(入學圖說)'에서 '사단'을 성(性, 理之源)에 소속시키고 성의 발동이라 보며, '칠정'을 심(心, 氣之源)에 소속시키면서 칠정의 발동에서 절도에 맞는(中節) 경우는 성의 발동이 되지만 절도에 맞지 않는 경우는 곧바로 성의 발동이라 할 수 없다 하여, 사단과 칠정을 분별시키고 있다.
또한 유숭조(柳崇祖)는 "이(理)가 발동함에 기(氣)를 끼고 있으니 사단의 감정이요. 기(氣)가 발동함에 기(氣)가 따르니 칠정의 싹이다(대학잠/大學箴)"라 하여 사단에서는 (理)가 발동의 주체가 되면서 기(氣)가 내포되어 있으며, 칠정에서는 기(氣)가 발동의 주체가 되고 (理)가 따르고 있는 것이라 하여 사, 칠을 주리(主理), 주기(主氣)로 파악하는 해석의 선구가 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의 사단과 칠정에 대한 정의는 개인적 해석에 머물렀던 것이다.
그러나 성리학의 일대 논쟁으로 발전하게 된 사단과 칠정의 문제는 16세기 중엽 정지운(鄭之雲)이 그린 '천명도(天命圖)' 속에 "사단은 이에서 발동하고, 칠정은 기에서 발동한다"고 언급하였는데, 1553년 퇴계는 이 '천명도'를 수정한 '천명신도(天命新圖)'에서 "사단은 이가 발동한 것이고 칠정은 기가 발동한 것이다"라 고치는 데서 발단하였다.
당시 조선사회의 대표적 석학인 퇴계가 수정한 견해에 대해 청년 유학자인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이 이(理)와 기(氣)를 지나치게 이원화시키고 있는 것이라는 비판적 의견을 제시하였고, 퇴계와 기대승 사이에 왕복 편지를 통해 논쟁이 벌어져 8년간에 걸친 정밀한 분석과 진지한 토론의 성리학 논쟁으로 전개되었던 것이다. 당시 퇴계는 영남의 예안(현 안동)에 살았고, 기대승은 호남의 광산(현 광주)에 살아서 서울을 중개로 멀리 떨어진 지역 사이에 벌어진 논쟁으로서 전국적 관심의 본격적 논쟁으로 발전하였다.
이러한 퇴계의 입장은 칠정과 사단을 분별하여 상대시킨 것(七對四)으로서 '대설(對說)'이라 한다면, 기대승의 입장은 칠정을 사단에 포함시키는(七包四) 견해로서 칠정에 근거하여 사단이 발생한다는 '인설(因說)'로 제시되고 있다.
여기서 퇴계는 이(理)가 발동하면서 기(氣)를 타고 있는 사실을 비유하여 사단은 사람이 말을 타고 나갈 때 사람이 적극적으로 말을 몰아 바른 길로 가는 것과 같으며, 칠정은 사람이 말을 타고 있지만 말이 가는 데로 맡겨 두는 것으로 말이 때로 길을 벗어나듯이 오(惡)에 빠질 수도 있다고 하였다.
퇴계는 기대승의 예리한 지적을 받아들여 두 차례 자신의 견해를 수정하였는데, 이때 그는 "사단은 이(理)가 발동하는 데 기(氣)는 따르고 있으며, 칠정은 기(氣)가 발동하는 데 이(理)는 타고 있다"고 하여 이(理)와 기(氣)가 각각 발동의 주체가 되지만(互發) 어느 경우에도 이(理)와 기(氣)가 서로 떠나는 것은 아니라(相須) 하여 이른바 '호발설(互發說; 이기호발설)'을 제시한다.
이 논쟁이 끝날 무렵 기대승은 퇴계의 인격과 학문 자세를 깊이 흠모하여 자신의 일원론적 입장을 완화함으로써 "감정이 발현함에는 혹 이가 발동하고 기가 갖추어지기도 하며, 혹 기가 감응하는 데 이가 타기도 한다"고 하여 퇴계의 입장에 접근함으로써 논쟁을 끝맺게 되었다.
퇴계가 세상을 떠난 2년 뒤부터 율곡과 성혼(成渾) 사이에 사단칠정 논쟁이 다시 일어났다. 이때 성혼은 퇴계의 입장을 지지하였고, 율곡은 기대승의 입장을 지지하였는데 이것이 7년간이나 계속되었다.
율곡은 사단과 칠정의 양쪽 모두 기(氣)만이 발동하고 이(理)는 발동함이 없이 기(氣)를 타고 있다는 하나의 길만을 인정하여 '일도설(一途說)' 또는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을 제기하였으며, 성혼은 사단과 칠정이 주리(主理)와 주기(主氣)의 양면으로 설명할 수 있다는 양면설을 제시하였다.
사칠논쟁이 지닌 시대적 성격을 음미해 보면, 퇴계의 호발설이 지닌 이원론적 경향은 사화(士禍) 말기에 살면서 탐욕적인 권력집단과 의리를 추구하는 선비집단과의 갈등 속에서 의리(선)의 순수성을 밝히려는 입장을 반영한 것이라면 율곡의 일도설이 지닌 일원론적 경향은 명종 말기에서 선조 초기에 사림정치가 시작하는 시기에 정치적 참여와 사회적 통합을 추구하는 시대적 요구와 연관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또한 사칠논쟁은 퇴계와 율곡을 중심으로 논쟁의 당사자들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당시 조선사회의 성리학자들 사이에 전국적 관심을 불러일으킴으로써 한국성리학사에 최대의 논쟁으로 대두되었다.
이 논쟁 이후로 퇴계의 입장을 지지하는 영남학파와 율곡의 입장을 지지하는 기호학파가 학파로서 확고하게 정립되어 갔으며, 그 양립된 입장이 수백 년을 내려오면서 반복되는 논쟁으로 성리학적 인식을 심화시켜 갔다.
그 과정에서 두 입장을 종합하거나 새로운 쟁점을 제기하면서 한국성리학의 독자적 수준을 확보하였던 것이다. 곧 한국성리학은 사칠논쟁을 계기로 인성론의 문제를 심화시킨 점에서는 중국성리학의 수준을 넘어서는 발전을 이루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 사칠논쟁은 기본적으로 인간의 도덕성의 근원을 묻는 것이므로 주희가 '중용장구'의 서문에서 제기했던 인간 마음의 두 가지 양상으로서 기질적 욕심의 사사로움에서 발생하는 마음인 '인심(人心)'과 천명으로서의 성품의 정당함에 근거하는 마음인 '도심(道心)'을 사단과 칠정과 어떻게 연관시켜 해석할 것인가 하는 문제로 진전될 수 있다.
그리하여 도심(道心)과 인심(人心)이 사단과 칠정에 속한다는 퇴계의 입장과 서로 분립하는 것이 아니라 시작과 끝이 된다는 율곡의 입장이 대립하여 인심(人心)과 도심(道心)의 문제가 논쟁의 쟁점으로 제기되기도 하였다.
사단칠정 논쟁은 그 후 영남학파와 호남학파에서 각각 퇴계와 율곡의 입장을 계승하면서 논쟁이 계속되었다. 17세기 후반 영남학파의 대표적 인물인 이현일(李玄逸)은 퇴계를 옹호하고 율곡을 비판하면서 사단과 칠정은 전혀 다른 것으로 칠정을 사단에 분배하여 통합시킬 수 없음을 강조하고, 칠정은 사단을 포함하는 것이 아니라 사단을 가로질러 지나가는(橫貫) 것이라 한다. 또한 그는 이(理)는 작용하지 않는다는 율곡의 견해에 대해 이를 불필요한 군살(혹)로 붙어 있는 것으로 보는 오류라 비판하였다.
퇴계의 성리설을 따르는 실학자인 성호(星湖) 이익(李瀷)은 이(理)가 발동하고 기(氣)가 따라간다는 한 가지 길만을 인정하는 '이발일도설(理發一途說)'을 제시하여 퇴계의 주리설을 한층 더 강화하고 율곡의 '기발일도설(氣發一途說)'에 정면으로 대립하는 입장을 밝히기도 하였다.
이익은 그 동안의 사칠논쟁을 정리하고 종합하여 '사칠신론(四七新論)'을 저술하였으며, 여기서 그는 사람이 배를 타는 비유로서 사람이 배를 타고 키를 잡고 방향을 결정하는 것은 사단에서 이가 발동하는 것과 같으며, 사람이 키를 잡고 있어도 바람이나 물살로 인해 배가 다른 방향으로 떠내려가는 상태는 기가 발동하고 이는 타고만 있을 뿐인 칠정의 상태와 같은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기대승은 '물에 비친 달과 하늘의 달의 비유(水月諭)'에서 물에 비친 달을 물이라 할 수 없다 하여 이(理)가 기(氣)를 떠나서 자기를 드러내지 못하는 것임을 밝혔는데, 이익은 이에 대해 성품과 감정의 문제는 지각이 있으나 달과 물의 관계는 지각이 없으며 성품은 감정을 주재하나 달은 물을 주재하지 못한다 하여 비유가 적절하지 못함을 비판하였다.
정약용은 초기에 '기(氣)가 발동하고 이(理)가 타고 있다'는 율곡의 견해에 동의하고 있지만, 그는 사물은 자립하는 존재요 이(理)는 의존하는 개념이라 인식함으로써 성리학의 이개념을 벗어나고 있는 점에서 율곡과도 차이를 드러내고 있다.
또한 그는 퇴계와 율곡의 이기(理氣)개념을 재평가하면서, 퇴계는 오로지 인간의 성정에서 논의한 인성론적 입장이라 하고, 율곡은 천지만물을 전체로 논의한 우주론적 입장이라 제시하여, 퇴계와 율곡의 이기(理氣) 개념이 서로 다른 영역에서 설정된 것으로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그는 사칠논쟁의 개념적 근거를 재검토함으로써 쟁점을 지양시키는 새로운 지평을 열어 주었다.
▶️ 是(이 시/옳을 시)는 ❶회의문자로 昰(시)는 동자(同字)이다. 해(日)처럼 정확하고 바르다(正)는 뜻이 합(合)하여 옳다를 뜻한다. ❷회의문자로 是자는 ‘옳다’, ‘바르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是자는 日(해 일)자와 正(바를 정)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正자는 성(城)을 향해 진격하는 모습을 그린 것으로 ‘바르다’라는 뜻이 있다. 이렇게 ‘바르다’라는 뜻을 가진 正자와 日자가 결합한 是자는 ‘태양(日)은 올바른 주기로 움직인다(正)’는 뜻이다. 즉 是자는 태양은 일정한 주기로 뜨고 진다는 의미에서 ‘올바르다’와 ‘옳다’라는 뜻을 가지게 된 것으로 해석한다. 是자는 때로는 ‘이것’이나 ‘무릇’이라는 뜻으로 가차(假借)되어 쓰이기도 한다. 그래서 是(시)는 (1)옳음. 옳은 것 (2)도리(道理)에 합당함 (3)이. 이것. 여기. 이곳 등의 뜻으로 ①이, 이것 ②여기 ③무릇 ④이에(접속사) ⑤옳다, 바르다 ⑥바르게 하다 ⑦옳다고 인정하다 ⑧바로잡다 ⑨다스리다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옳을 가(可), 옳을 의(義),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아닐 불(不), 아닐 부(否), 아닐 불(弗), 아닐 미(未), 아닐 비(非)이다. 용례로는 옳으니 그르니 하는 말다툼을 시비(是非), 옳다고 인정함을 시인(是認), 그릇된 것을 바로잡음을 시정(是正), 바로 앞에서 이야기한 날을 시일(是日), 마찬가지로나 또한을 역시(亦是), 만일에 또는 가다가 더러를 혹시(或是), 도무지나 전혀를 도시(都是), 변하여 온 사물의 처음 바탕을 본시(本是), 나라의 근본이 되는 주의와 방침을 국시(國是), 옳다고 여기에 확정되어 있는 그 정당의 방침을 당시(黨是), 회사나 결사의 경영 상의 방침 또는 주장을 사시(社是), 학교의 기본 교육 방침을 교시(校是), 민족 정신에 비추어 옳다고 여기는 주의와 방침을 민시(民是), 다른 것이 없이 곧을 변시(便是), 자기 의견만 옳게 여김을 자시(自是), 지나치거나 모자람이 없이 꼭 들어 맞음을 칭시(稱是), 시비를 가릴 줄 아는 마음을 시비지심(是非之心), 옳은 것은 옳다 그른 것은 그르다고 한다는 시시비비(是是非非), 옳고 그르고 굽고 곧음 또는 도리에 맞는 것과 어긋나는 것을 시비곡직(是非曲直), 옳으니 그르니 하고 시비를 제대로 판단하지 못하는 일을 시야비야(是也非也), 어저께는 나쁘다고 생각한 것이 오늘은 좋다고 생각됨을 작비금시(昨非今是), 겉은 옳은 것 같으나 속은 다름을 사시이비(似是而非) 등에 쓰인다.
▶️ 非(아닐 비, 비방할 비)는 ❶상형문자로 새의 좌우로 벌린 날개 모양으로, 나중에 배반하다, ~은 아니다 따위의 뜻으로 쓰인다. ❷상형문자로 非자는 ‘아니다’나 ‘그르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갑골문에 나온 非자를 보면 새의 양 날개가 그려져 있었다. 그래서 非자의 본래 의미는 ‘날다’였다. 하지만 후에 새의 날개가 서로 엇갈려 있는 모습에서 ‘등지다’라는 뜻이 파생되면서 지금은 ‘배반하다’나 ‘아니다’라는 뜻으로 쓰이고 있다. 그래서 지금은 飛(날 비)자가 뜻을 대신하고 있다. 그래서 非(비)는 (1)잘못, 그름 (2)한자로 된 명사(名詞) 앞에 붙이어 잘못, 아님, 그름 따위 부정(否定)의 뜻을 나타내는 말 등의 뜻으로 ①아니다 ②그르다 ③나쁘다, 옳지 않다 ④등지다, 배반하다 ⑤어긋나다 ⑥벌(罰)하다 ⑦나무라다, 꾸짖다 ⑧비방(誹謗)하다 ⑨헐뜯다 ⑩아닌가, 아니한가 ⑪없다 ⑫원망(怨望)하다 ⑬숨다 ⑭거짓 ⑮허물, 잘못 ⑯사악(邪惡)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아닐 부(不), 아닐 부(否), 아닐 불(弗), 아닐 미(未),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옳을 시(是)이다. 용례로는 남의 잘못이나 흠 따위를 책잡아서 나쁘게 말함을 비난(非難), 옳은 이치에 어그러짐을 비리(非理), 예사롭지 않고 특별함을 비상(非常), 부정의 뜻을 가진 문맥 속에서 다만 또는 오직의 뜻을 나타냄을 비단(非但), 제 명대로 살지 못하는 목숨을 비명(非命), 보통이 아니고 아주 뛰어남을 비범(非凡), 법이나 도리에 어긋남을 비법(非法), 번을 설 차례가 아님을 비번(非番), 사람답지 아니한 사람을 비인(非人), 잘못되거나 그릇된 행위를 비행(非行), 불편함 또는 거북함을 비편(非便), 결정하지 아니함을 비결(非決), 사람으로서의 따뜻한 정이 없음을 비정(非情), 옳으니 그르니 하는 말다툼을 시비(是非), 옳음과 그름을 이비(理非), 간사하고 나쁨을 간비(姦非), 아닌게 아니라를 막비(莫非), 그릇된 것을 뉘우침을 회비(悔非), 이전에 저지른 잘못을 선비(先非), 교묘한 말과 수단으로 잘못을 얼버무리는 일을 식비(飾非), 음란하고 바르지 아니함을 음비(淫非), 같은 일이 한두 번이 아니라는 비일비재(非一非再), 중도 아니고 속인도 아니라는 비승비속(非僧非俗),꿈인지 생시인지 어렴풋한 상태를 비몽사몽(非夢似夢), 예가 아니면 보지도 말라는 말을 비례물시(非禮勿視), 모든 법의 실상은 있지도 없지도 아니함을 비유비공(非有非空) 등에 쓰인다.
▶️ 之(갈 지/어조사 지)는 ❶상형문자로 㞢(지)는 고자(古字)이다. 대지에서 풀이 자라는 모양으로 전(轉)하여 간다는 뜻이 되었다. 음(音)을 빌어 대명사(代名詞)나 어조사(語助辭)로 차용(借用)한다. ❷상형문자로 之자는 ‘가다’나 ‘~의’, ‘~에’와 같은 뜻으로 쓰이는 글자이다. 之자는 사람의 발을 그린 것이다. 之자의 갑골문을 보면 발을 뜻하는 止(발 지)자가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발아래에는 획이 하나 그어져 있었는데, 이것은 발이 움직이는 지점을 뜻하는 것이다. 그래서 之자의 본래 의미는 ‘가다’나 ‘도착하다’였다. 다만 지금은 止자나 去(갈 거)자가 ‘가다’라는 뜻으로 쓰이고 之자는 주로 문장을 연결하는 어조사 역할만을 하고 있다. 그래서 之(지)는 ①가다 ②영향을 끼치다 ③쓰다, 사용하다 ④이르다(어떤 장소나 시간에 닿다), 도달하다 ⑤어조사 ⑥가, 이(是) ⑦~의 ⑧에, ~에 있어서 ⑨와, ~과 ⑩이에, 이곳에⑪을 ⑫그리고 ⑬만일, 만약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이 아이라는 지자(之子), 之자 모양으로 꼬불꼬불한 치받잇 길을 지자로(之字路), 다음이나 버금을 지차(之次), 풍수 지리에서 내룡이 입수하려는 데서 꾸불거리는 현상을 지현(之玄), 딸이 시집가는 일을 지자우귀(之子于歸), 남쪽으로도 가고 북쪽으로도 간다 즉, 어떤 일에 주견이 없이 갈팡질팡 함을 이르는 지남지북(之南之北) 등에 쓰인다.
▶️ 心(마음 심)은 ❶상형문자로 忄(심)은 동자(同字)이다. 사람의 심장의 모양, 마음, 물건의 중심의, 뜻으로 옛날 사람은 심장이 몸의 한가운데 있고 사물을 생각하는 곳으로 알았다. 말로서도 心(심)은 身(신; 몸)이나 神(신; 정신)과 관계가 깊다. 부수로 쓸 때는 심방변(忄=心; 마음, 심장)部로 쓰이는 일이 많다. ❷상형문자로 心자는 ‘마음’이나 ‘생각’, ‘심장’, ‘중앙’이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心자는 사람이나 동물의 심장을 그린 것이다. 갑골문에 나온 心자를 보면 심장이 간략하게 표현되어 있었다. 심장은 신체의 중앙에 있으므로 心자는 ‘중심’이라는 뜻도 가지고 있다. 옛사람들은 감정과 관련된 기능은 머리가 아닌 심장이 하는 것이라 여겼다. 그래서 心자가 다른 글자와 결합할 때는 마음이나 감정과 관련된 뜻을 전달한다. 참고로 心자가 부수로 쓰일 때는 위치에 따라 忄자나 㣺자로 바뀌게 된다. 그래서 心(심)은 (1)종기(腫氣) 구멍이나 수술한 구멍에 집어넣는 약을 바른 종이나 가제 조각 (2)나무 줄기 한 복판에 있는 연한 부분 (3)무, 배추 따위의 뿌리 속에 박인 질긴 부분 (4)양복(洋服)의 어깨나 깃 따위를 빳빳하게 하려고 받쳐 놓는 헝겊(천) (5)초의 심지 (6)팥죽에 섞인 새알심 (7)촉심(燭心) (8)심성(心星) (9)연필 따위의 한복판에 들어 있는 빛깔을 내는 부분 (10)어떤 명사 다음에 붙이어 그 명사가 뜻하는 마음을 나타내는 말 등의 뜻으로 ①마음, 뜻, 의지(意志) ②생각 ③염통, 심장(心臟) ④가슴 ⑤근본(根本), 본성(本性) ⑥가운데, 중앙(中央), 중심(中心) ⑦도(道)의 본원(本源) ⑧꽃술, 꽃수염 ⑨별자리의 이름 ⑩진수(眞修: 보살이 행하는 관법(觀法) 수행) ⑪고갱이, 알맹이 ⑫생각하다 따위의 뜻이 있다.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물건 물(物), 몸 신(身), 몸 체(體)이다. 용례로는 마음과 몸을 심신(心身), 마음이 움직이는 상태를 심리(心理), 마음에 품은 생각과 감정을 심정(心情), 마음의 상태를 심경(心境), 마음 속을 심중(心中), 마음속에 떠오르는 직관적 인상을 심상(心象), 어떤 일에 깊이 빠져 마음을 빼앗기는 일을 심취(心醉), 마음에 관한 것을 심적(心的), 마음의 속을 심리(心裏), 가슴과 배 또는 썩 가까워 마음놓고 믿을 수 있는 사람을 심복(心腹), 본디부터 타고난 마음씨를 심성(心性), 마음의 본바탕을 심지(心地), 마음으로 사귄 벗을 심우(心友),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한다는 심심상인(心心相印), 어떠한 동기에 의하여 이제까지의 먹었던 마음을 바꿈을 심기일전(心機一轉), 충심으로 기뻐하며 성심을 다하여 순종함을 심열성복(心悅誠服), 마음이 너그러워서 몸에 살이 오름을 심광체반(心廣體胖), 썩 가까워 마음놓고 믿을 수 있는 사람을 심복지인(心腹之人) 등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