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평균수명, 기대수명
이병수
얼마 전 모 대학 병원장을 지낸 Y박사의 건강강연을 들었다. 노령들에게 많은 시사점을 주었다. 의학의 발달로 우리의 평균 수명이 급격히 높아짐으로써, 건강관리를 웬만큼만 하면 100살까지 살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는 것이었다. 평균수명과 관련해 기대수명에 대한 이야기도 들었다.
나는 고희가 되는 해에 ‘앞으로 몇 살까지 살다 갈꼬?’ 하는 느닷없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있었다. ‘82세 정도가 적당하겠다’ 는 결론을 얻었다. 근거가 있었다. 내 아버지는 고혈압으로 인한 심장마비로 72세에 작고하셨기에, 자식인 내가 임종도 못하였다. 혈압관리를 잘 해드리지 못한 후회막급의 심정으로 어머님 때에는 결코 전철을 밟지 않겠다는 마음다짐을 단단히 하였던 바, 다행히 어머니는 20년을 더한 92세까지 모실 수 있었다. 그러나 90세가 넘어서는 치매 증세가 생겨 모시는 데 약간의 애로가 있었으므로, 장수가 꼭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었다. 그래서 나는 아버지 어머니의 중간인 82세정도 살다 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보았었다.
간혹 고령 환자들이 수용돼있는 노인병원에 병문 가서 중풍, 관절염, 치매 등을 앓으면서 제 몸을 제대로 간수하지 못하고 간병사의 신세를 지고 있는 딱한 상황을 볼 적엔 만감이 교차되고, 저렇게라도 하여 오래 살아야 할까 하는 의아심도 갖게 된다. 그들은 목숨이 붙어 있으니까 생존은 하고 있다. 그러나 반신불수가 되어 자기 생활은 포기상태로 연명만 하고 있다. 사람은 생활하기 위해 태어났는데, 생활을 하지 못하는 생존이 인생으로서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인명경시자란 지탄을 받을지 모르지만, '안락사'를 법적으로 허용해야 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조차 든다.
요즘 나의 주위에서는 쉴새없이 나이 순서와는 관계없이 하나둘씩 저승 행차를 하고 있다. 어떤 친구는 화장실에 갔다가 실족해 넘어져 뇌진탕으로 말문을 닫았고, 또 한 친구는 바둑 두다가 '어지럽다' 하고 슬며시 쓰러져 119 구급차에 실려 갔는데, 끝내 눈을 뜨지 못했다.
그런데 나는 지금 당초의 기대(희망)수명 82세를 3년이나 넘기고 말았으니 처음 기대수명에서 덤의 인생을 살았다. 그 동안 내 마음에도 변화가 일었다. 슬그머니‘ 어머니만큼 92세까지 살다 갈까?’ 하는 욕심이 생겼다. 때마침 아전인수격으로 합리화시킬 구실도 생겼다. 어느 생명공학자가 ‘사람은 70세를 넘기기가 어렵지, 70세만 넘기면 100세까지 살기는 그리 힘들지 않다’는 발표를 한 것을 읽었다. 이어서 우리나라 평균수명이 80세를 넘어섰다는 보도도 있었다.
내가 고희 때, 기대수명을 82세로 잡았던 것을, 그 후 10년을 연장해 92세로 수정했는데, 그러고 보니 앞으로 살아갈 날이 7년이 남아 있다. 우리나라 100세 이상 장수자 961명에게 ‘장래 소망������에 대한 설문조사를 했더니, <편안히 빨리 죽는 것>이란 응답이 23,8%, <자손 잘 되기>가 21,8%, <건강회복>이 16,8%이고, <더 오래 살고 싶다>는 응답자는 3,8%에 불과 했다. <장수>보다는 <건강>이 최대 소망임을 말해주고 있다.
오래 살기를 원하는 것은 인간의 상정이다. 그러나 소망하는 만큼 오래 살아지는 것은 아니니, 여기에 조물주가 조절해놓은 인생의 묘미가 있다 하겠다. 절대권력을 쥐고 있던 진시황은 오래 살기 위해 불로초를 구해 먹는 등, 온갖 수단을 강구해 보았건만, 50세를 못 채우고 황천길 불귀의 객이 되고 말지 않았는가.
'인명은 재천'이라는데, 수명을 어찌 자기 뜻대로 할 수 있으랴. 팔순을 넘긴 내가 '몇 살까지 살다갈꼬?' 운운하는 자체가 부질없는 일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희망이 있어야 삶의 의미와 보람이 있다고 할 것인즉, 나는 수필을 쓰면서 살고 싶다는 희망만은 죽는 날까지 붙들고 가고 싶다. 늙은이의 과욕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