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呂祖曰(여조왈) 回光之法(회광지법) 原通行住坐臥(원통행주좌와) 只要自得機竅(지요자득기규) 吾前開示云(오전개시운) 虛室生白(허실생백) 光非白耶(허실생백광비백야) 但有一說(단유일설) 初未見光時(초미견성시) 此為效驗(차위효험) 若見為光而有意著之(약견위광이유의착지) 即落意識(즉락의식) 非性光也(비성광야) 子不管他有光無光(자불관타유광무광) 只要無念生念(지요무념생념)
1. 번역 : 여동빈 큰 스승이 말하였다. 돌리며 비추는 법은 본디 멈추거나 앉거나 눕거나 모든 행동에 통하는 것인데 스스로 기틀이 되는 구멍(機竅)을 얻는 것일 따름이다. 내가 앞에서 말한 것처럼 빈 방에 흰 것이 생긴다고 하였는데 빛이 흰 것이 아니겠는가? 다만 어떤 견해를 가지고서 처음에 빛을 보지 아니한 때에 이것이 효험이라고 여겨 만약 빛이 일어났다고 여겨 의식이 그것에 집착하면 곧 집착으로 인해 생긴 마음에 떨어지는데 이는 본성에서 비롯된 빛이 아니다. 그대들은 빛이 있니, 없니 하는 문제에 집착하지 말고 그저 생각을 없애며 생각을 살리면 될 따름이다.
* 태을금화종지 번역 및 이해, 여동빈∙창천 저, 창천소요파, p55, https://docs.google.com/document/d/1do1Tj2IdDtkAvIl1fV-i4rQ-My61X9B1NOY8vNSxyqM/edit)
2. 참뜻 : 얼의 작용을 일으켜 살피는 법에 제한된 대상은 없다. 자연이건 사회이건, 이 세상이건 저 세상이건, 인간의 사소한 행위이건 무엇이건 얼의 작용을 일으켜 살피는 법은 제한 받지 않고 모든 대상의 진리와 진실을 아는 데에 사용될 수 있다. 으뜸가는 신 역시 능히 살필 수 있는데 특별히 그러한 것들에 제한이 있겠는가? 하지만 우선 으뜸가는 신의 마음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
세상에는 으뜸가는 신과 으뜸가는 신의 뜻에 대한 그릇된 견해가 많다. 그러한 견해는 으뜸가는 신의 뜻으로 생긴 효험이 아닌 것도 효험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누군가 효험에 집착하여 으뜸가는 신과 관련도 없는 효험을 겪었다고 하여 으뜸가는 신의 뜻이 나타났다고 착각하고 그에 집착하면 곧 집착으로 인해 생긴 인간의 마음에 떨어져 벗어나지 못 한다. 그대들은 효험이 있니 없니, 으뜸가는 신의 뜻이 있니 없니 하는 문제에 매달리지 말고 그저 넋의 작용을 그치고 얼의 작용을 일으켜 생각하기만 하면 될 따름이다.
何謂無念(하위무념) 千休千處得(천휴천처득) 何謂生念(하위생념) 一念一生持(일념일생지) 此念乃正念(차념내정념) 與平日念不同(여평일념부동) 今心為念(금심위념) 念者現在心也(념자현재심야) 此心即光即葯(차심즉광즉약) 凡人視物(범인시물) 任眼一照去(임안일조거) 不及分別(불급분별) 此為性光(차위성광) 如鏡之無心而照也(여경지무심이조야) 如水之無心而鑑也(여수지무심이감야)
1. 번역 : ‘생각을 없애라.’라는 말은 무슨 말인가? 크게 쉬면서 모든 곳을 얻는 것을 가리킨다. ‘생각을 살려라.’라는 말은 무슨 말인가? 하나의 생각을 한평생 지켜나가는 것이다. 이 생각은 곧 바른 생각인데 평상시 일어나는 생각과 동일한 것이 아니다. 곧 마음은 생각으로 이루어진다. 생각이라는 것은 나타나 있는 마음이다. 이와 같은 마음은 곧 빛이요 곧 꽃밥이다. 일반인들이 사물을 볼 때에는 눈에 의지하여 비추어 보고 나누어 생각하는 데에 미치지 못 하는데 이는 본성에서 비롯된 빛이다. 마치 거울이 마음 없이 드러내는 것과 같고 물이 마음 없이 드러내는 것과 같다.
2. 참뜻 : ‘넋의 작용을 없애고 얼의 작용을 일으키라.’라는 말은 ‘생각을 없애며 생각을 살려라.(無念生念)’ 라는 말로 표현되기도 한다. 없애야 할 생각은 무엇인가? 넋의 작용으로 인해 생겨나는 생각이다. 살려야 하는 생각은 무엇인가? 얼의 작용으로 인해 생겨나는 생각이다. 마음은 생각으로 이루어지고 생각은 나타난 마음의 파편이다. 얼은 으뜸가는 신이에게서 비롯된 것이니 얼의 작용을 계속 이어나가면 으뜸가는 신의 생각으로 마음이 이루어지고 나타난 생각은 결국 으뜸가는 신의 뜻이 되는 것이다. 눈과 같은 감각기관으로 처음 인식할 때에는 마음에 전체가 나타나지 부분이 나누어져 나타나지 않는다. 이는 얼의 작용에서 비롯된 것인데 거울이 비추어진 모습 그대로를 드러내는 것과 같고 마찬가지로 물이 비추어진 모습 그대로를 왜곡 없이 드러내는 것과 같다.
少頃即為識光(소경즉위식광) 以其分別也(이기분별야) 鏡有影已無鏡矣(경유영이무경의) 水有象已非水矣(수유상이비수의) 光有識尚何光哉(광유식상하광재) 子輩初則性光(자배초즉성광) 轉念則識(전념즉식) 識起而光杳不可覓(식기이광묘불가멱) 非無光也(비무광야) 光已為識矣(광이위식의) 黃帝曰(황제왈) 聲動不生聲而生響(성동불생성이생향) 即此義也(즉차의야)
1. 번역 : 잠깐의 시간이 지나면 의식의 빛이 되니 그것에 의해 나누어 생각하게 된다. 거울에 비춰진 모습이 있으니 이미 거울은 없어졌고 마찬가지로 물에 모습이 나타났으니 물이 아니다. 빛이 인식되면 어찌 빛이겠는가? 그대들은 처음에는 곧 본성의 빛을 보지만 생각으로 바꾸면 의식이 된다. 의식이 작용하면 빛은 아득해져 찾을 수 없게 된다. 이는 빛이 없어진 것이 아니라 빛이 생각이 된 것이다. <황제>에서 말하길 소리가 움직이면 소리가 생기지 않고 메아리가 생긴다고 하였는데 이것이 곧 그 뜻이다.
* 태을금화종지 번역 및 이해, 여동빈∙창천 저, 창천소요파, p29, https://docs.google.com/document/d/1do1Tj2IdDtkAvIl1fV-i4rQ-My61X9B1NOY8vNSxyqM/edit)
2. 참뜻 : 얼은 접촉한 전체를 보고 들을 수 있게 한다. 그대들의 마음에는 항상 얼이 함께 하는 것이다. 얼은 단지 보고 들을 수 있게 할 뿐만 아니라 그대들이 이해하고자 하면 의식으로 바뀌어 이해할 수 있게 한다. ‘마음에 신이 있어 함께 한다.’는 말에 의식을 일으켜 의식 밖을 살피며 신을 찾는 경우가 있는데 결국 못 찾고서 ‘신은 없다.’라고 외치는 이들이 있으니 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또한 으뜸가는 신의 뜻이 마음에 나타난다는 말에 으뜸가는 신의 뜻을 찾아보다가 결국 못 찾고서 ‘그런 것은 없고 모두 거짓말이야.’라고 말하는데 이 또한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으뜸가는 신의 뜻 역시 생각으로 바뀌어 나타나니 그대들의 생각 속에 으뜸가는 신의 뜻이 있는데 멍청하면 으뜸가는 신의 뜻과 그대들의 멍청한 생각을 구별하지 못하는 법이다.
* 말씀1~9, Ⅰ. 진리에 이르는 길, 26번 (참조 : https://cafe.daum.net/ch727411/gfW5/137)
楞巖推勘入門曰(능엄추감입문왈) 不在塵(부재진) 不在識(부재식) 惟選根(유선근) 此則何意(차즉하의) 塵是外務(진시외무) 所謂器界也(소위기계야) 與吾了不相涉(여오료불상섭) 逐之則認物為己(축지즉인물위기)
1. 번역 : 능엄경을 풀이하는 해설서 앞부분에서 ‘티끌에도 있지 않고 의식에도 있지 않고 뿌리를 가려 세운다.’고 하였다. 이것이 무슨 뜻인가? 티끌은 무릇 바깥 일을 가리키니 이른바 바깥 세상을 가리킨다. 나와는 전혀 서로 관계를 맺고 있지 않은데 그것을 쫓아가게 되면 육체(物)를 자기라고 여기에 된다.
2. 참뜻 : 능엄경을 풀이하는 해설서 앞부분에서 ‘티끌에도 있지 않고 의식에도 있지 않고 뿌리를 가려 세운다.’고 하였다. 이것이 무슨 뜻인가? 티끌은 바깥 현상을 가리킨다. 바깥 현상에 집착하다 보면 육체에 집착하게 되고 육체에 집착하면 의식은 결국 뮥체를 자기로 인식하게 된다.
物必有還(물필유환) 通還戶牖(통환호유) 明還日月(명환일월) 借他為自(차타위자) 終非吾有(종비오유) 至於不汝還者(지어불여환자) 非汝而誰(비여이수) 明還日月(명환일월) 見日月之明無還也(견일월지명무환야) 天有無日月之時(천유뮤일월지시) 人無有無見日月之性(인무유뮤견일월지성) 若然則分別日月者(약연즉분별일월자) 還可與為吾有耶(환가여위오유야) 不知因明暗而分別者(부지인명암이분별자) 當明暗兩忘之時(당명암량망지시) 分別何在(분별하재) 故亦有還(고역유환) 此為內塵也(차위내진야) 惟見性無還(유견성무환) 見見之時(견견지시) 見非是見(견비시견) 則見性亦還矣(즉견성역환의) 還者還其識(환자환기식) 流轉之見性(유전지견성) 即阿難使汝流轉(즉아난사여유전) 心目為咎也(심목위구야) 初八還辨見時(초팔환변견시) 上七者(위 일곱 가지는) 皆明其一一有還(개명기일일유환)
1. 번역 : 물체는 반드시 돌아가는 곳이 있으니 통과한 것은 문이나 창으로 돌아가고 밝음은 해와 달로 돌아간다. 남을 빌려 자기라고 하니 마침내 나 아닌 것만 있게 되니 너를 돌려보내지 못하는 상태에 이르면 너가 아니면 누구이겠는가? 밝음은 해와 달로 돌아가지만 해와 달의 밝음을 보는 이는 돌아가지 않는다. 하늘에는 해와 달이 없는 때도 있지만 사람에게는 해와 달의 본성을 보지 못하는 경우가 없다. 그와 같다면 해와 달을 나누어 구별하는 것은 내가 있는 것으로 돌아가지 않겠는가? 밝음과 어둠으로 인해 나누어 생각함이 이루어짐을 알지 못하는 이에게 밝음과 어둠 둘 다 잊혀질 때에는 나누어 생각하는 일이 어찌 있겠는가? 고로 나누어 생각하는 것(分別) 또한 돌아갈 곳이 있다. 이러한 것이 마음에 있는 티끌이다. 오직 본성을 보는 것만 돌아갈 곳이 없다고 하는데 보는 것을 볼 때에는 보는 것은 이러한 봄이 아니다. 즉 본성을 보는 것 또한 돌아갈 곳이 있다. 돌아가는 것은 그 의식이 이리저리 떠돌며 변하며 본성을 보더라도 ‘아난아, 너로 하여금 이리저리 떠돌며 변하게 하는 것은 마음과 눈이 썩은 탓이다.’라는 말처럼 제대로 본성을 보고 있는 것은 아니다. 처음에 여덟 가지 돌아갈 것과 본다는 것을 가려 밝히 때에는 모두 그 하나하나가 돌아갈 곳이 있음을 밝혔다.
2. 참뜻 : 많은 이들이 변하고 사라질 육체를 자기라고 생각하지만 육체는 끝없이 변하니 어떤 모습이 너인가? 육체를 너라고 여기면 나는 너일뿐 나는 없게 되고 너 또한 없게 된다.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켜 달을 보라고 했더니 손가락을 보는 이들이 있다. 그러한 이들은 손가락을 달로 여기니 손가락도 달도 모두 사라지는 것이다. 변하지 않으며 참되게 보고 이해하는 이가 있으니 이러한 이는 돌아가는 것들을 살펴보면 찾을 수 있다. ‘본성을 본다.(見性)’라고 말하는 이가 있는데 이런 자는 정말 으뜸가는 신을 보고 있는 것일까? 의식을 일으키는 순간 으뜸가는 신을 찾을 길이 없는데 어찌 으뜸가는 신을 볼 수 있을까? 실상 으뜸가는 신을 보는 일은 일어날 수 있지만 그러한 사실은 세월이 흘러 자기도 모르게 무릎을 탁 치며 ‘아하, 그랬구나!’ 하면서 깨닫고 감동받는 것이지 으뜸가는 신을 보고 있는 경우를 인식하는 경우란 없다. 그러하기에 ‘본성을 본다.(見性)’는 것도 ‘돌아갈 곳이 있다.(見性亦還矣)’라고 여동빈이 말하고 있는데 ‘내가 본성을 보고 있소.’라고 말하는 이는 착각하고 있거나 거짓말하고 있다는 말이다.
故留見性(고유견성) 以為阿難柱杖(이위아난주장) 究竟見性(구경견성) 即帶八識(즉대팔식) 非眞不還也(비진불환야) 最後并此亦破(최후병차역파) 則方為眞見性(즉방위진견성) 眞不還矣(진불환의) 子輩回光(자배회광) 正回其最初不還之光(정회기최초불환지광) 故一毫識念用不著(고일호식념용불착)
1. 번역 : 고로 본성을 본다는 것이 남아서 아난으로 하여금 지팡이(柱杖)를 들고 다니는 것처럼 집착하게 하였다. ‘본성을 본다.’는 것을 깊이 생각해보면 여덟 가지 종류의 의식(八識)을 동반하기에 참으로 돌아갈 곳이 없는 것은 아니다. 최후에는 이 또한 깨뜨려야 참되게 본성을 보게 되는 것이다. 참된 것은 돌아가지 않는다. 그대들이 돌리며 비추는 일을 한다는 말은 최초의 돌아가지 않는 빛을 돌리는 것을 가리킨다. 고로 털 한오라기의 의식에 따른 생각이 일어나지 않는다.
* 승려들이 사용했던 지팡이인데 가지가 붙어 있어 물의 깊이를 측량할 수 있는 지팡이이다.
* 눈[眼], 귀[耳], 코[鼻], 혀[舌], 몸[身], 의식[意], 마나식(manas-vijnana), 아뢰야식(alaya-vijnana)을 가리킨다. 마나식은 육체와 결합하여 자기를 인식하는 의식을 가리키고 아뢰야식은 육체를 얻기 이전부터 존재하는 의식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2. 참뜻 : 기어코 으뜸가는 신을 보고 으뜸가는 신의 뜻을 얻겠다는 생각은 그 자체가 의식을 일으킨다. 오랜 기간 마음을 갈고닦는 이들이 세상에 남겨진 으뜸가는 신의 뜻을 이해할 수는 있어도 결국 직접 으뜸가는 신을 보지 못하고 으뜸가는 신의 뜻을 얻지 못하는 이유는 다른 것은 다 내려놓아도 직접 으뜸가는 신을 보고 으뜸가는 신의 뜻을 얻겠다는 집착만은 버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하기에 최후에 가서는 으뜸가는 신을 보고 으뜸가는 신의 뜻을 얻겠다는 생각조차 내려 놓아야 한다. 그대들이 얼의 작용을 일으킨다는 말은 세상을 있게 하고 의식을 있게 하는 으뜸가는 신을 강림시켜 으뜸가는 신의 작용을 일으키는 것이다. 그런 상태에서는 집착으로 인해 생긴 의식이 조금도 작용하지 않는다.
使汝流轉者(사여유전자) 惟此六根(유차육근) 使汝成菩提者(사여성보리자) 亦惟此六根(역유차육근) 而塵與識皆不用(이진여식개불용) 非用根也(비용근야) 用其根中之性耳(용기근중지성이) 今不墮識回光(금불타식회광) 則用根中之元性(즉용근중지원성) 落識而回光(락식이회광) 則用根中之識性(즉용근중지식성) 毫釐之辨在此也(호리지변재차야) 用心即為識光(용심즉위식광) 放下乃為性光(방하내위성광) 毫釐千里(호리천리) 不可不辨(불가불변)
1. 번역 : 너로 하여금 이리저리 떠돌며 변하게 하는 것은 오직 여섯 가지 감각기관으로 인한 것이지만 너로 하여금 깨달음(菩提)에 이르게 하는 것은 또한 오직 이 여섯 가지 감각기관이다. 티끌과 의식은 모두 사용되지 않는다. 감각 기관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감각 기관 속에 있는 본성을 사용하는 것이다. 이제 의식을 통해 돌리며 비추는 일에서 벗어나면 감각기관 중에 있는 시초의 본성을 사용하게 되고 의식을 통해 돌리며 비추면 감각기관 중에 있는 의식의 속성이 사용하게 된다. 터럭 만큼의 구별이 여기에 있다. 마음을 쓰면 의식의 빛이 되고 내려 놓으면 곧 본성의 빛이 된다. 털끝 만큼의 가치가 천리의 차이가 되니 가려내지 않으면 안 된다.
2. 참뜻 : 얼은 인식을 위해 의식이 된다. 이 의식은 인간의 육체와 결합된 감각기관이다. 얼은 어찌 육체와 결합하여 감각기관이 될 수 있는가? 그 자체가 이미 감각기관을 지니고 있기에 인간화된 감각기관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예로부터 본성의 빛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의식을 일으키지 말라는 말이 있는데 이 말의 참뜻은 의식을 사용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라 인간화된 의식이 있기 전의 의식을 사용하라는 말이다. 그러하기에 여동빈은 여섯 가지 감각기관으로 인해 넋에 지배당하지만 참된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또한 여섯 가지 감각기관을 사용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여기서 여섯 가지 감각기관을 사용한다는 말은 인간화된 여섯 가지 감각기관을 으뜸가는 신의 감각기관으로 되돌리는 것을 가리킨다.
識不斷(식부단) 則神不生(즉신불생) 心不空(심불공) 則丹不結(즉단불결) 心淨則丹(심정즉단) 心空即藥(심공즉약) 不著一物(불착일물) 是名心淨(시명심정) 不留一物(불류일물) 是名心空(시명심공) 空見為空(공견위공) 空猶未空(공유미공) 空忘其空(공망기공) 斯名眞空(사명진공)
1. 번역 : 의식이 끊어지지 않으면 신이 살아나지 않고 마음이 비지 않으면 단(丹)이 맺히지 않는다. 마음이 깨끗해지면 단이 맺히고 마음이 비면 약이 생긴다. 어떠한 사물에도 집착하지 않는 이것을 ‘마음이 깨끗하다.’라고 말한다. 하나의 사물에 머무르지 아니하는 이것을 가리켜 ‘마음이 비어있다.’라고 말한다. 비어 있음을 보는 비어 있음은 비어 있는 것이 아니다. 비어 있음을 잊은 비어 있음, 이것이 참된 비어 있음이다.
2. 참뜻 : 넋의 작용을 일으키는 의식의 작용이 중단되지 않으면 얼은 작용하지 않고 집착으로 인해 생긴 마음을 내려놓지 않으면 으뜸가는 신의 마음이 드러나지 않는다. 마음에 넋의 작용이 그치면 으뜸가는 신의 마음을 형성하는 씨앗이 생긴다. 현상에 집착하지 않는 일을 가리켜 ‘마음이 깨끗하다.(淨)’라고 말하고 한 사물에 사로잡히지 않는 현상을 가리켜 ‘비어 있다.(空)’라고 말한다. 사물에 사로잡히지 않는 현상을 인식하는 순간은 의식이 일어난 관계로 사물에 사로잡힌 것이 되니 사물에 사로잡히지 않되 사물에 사로잡히지 않는 것조차 인식하지 못하는 순간이 진짜로 사물에 사로잡히지 않는 순간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