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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황의 국화문장
1대 진무 천황(神武天皇)
15대 오진 천황(応神天皇)
29대 겐메이 천황(元明天皇)
55대 몬토쿠 천황(文德天皇)
96대 고다이고 천황(後醍醐天皇)
북조 2대 고묘 천황(光明天皇)
100대 고코마쓰 천황(後小松天皇)
110대 고코묘 천황(後光明天皇)
122대 메이지 천황(明治天皇)
천황(天皇, 덴노, Emperor of Japan)은 일본의 상징으로 일본 황실의 대표이자 국민 통합의 상징이다. 헌법에 명시된 천황의 지위는 “일본국의 상징이며, 일본 국민 통합의 상징”으로 규정되어 내각의 조언과 승인에 의해 법률이나 조약의 공포 등의 행위로 제한된 권한을 가진다.
일본에는 비리법권천 (非理法權天)이라는 격언이 있는데, 이는 천황의 절대권을 의미한다. 일본 황실의 계보가 한 번도 끊어지지 않고 존속되었다고 주장하는 의미로 만세일계 (萬世一系)라는 말이 있다. 일본 제국 때에는 세계 만방이 모두 천황의 지배하에 있다는 팔굉일우(八紘一宇)라는 이념이 천황제 파시즘과 황국사관의 근본사상이 되었다.
역사적으로 천황은 명목상으로는 임금이지만 실제 권력은 없는 상징적인 허수아비였던 기간이 긴 것으로 유명한데 사실 일본 역사 초창기에는 주변 다른 나라들처럼 천황이 실제 군주로서 통치를 했다. 즉, 일본도 고대에는 동시대 백제나 신라와 크게 다를 바 없이 임금이 직접 율령에 의한 정치를 하는 고대 국가였다.
그러나 헤이안 시대 중기에 후지와라가가 외척으로 권력을 독점하면서 귀족 섭관정치로 변모하며, 국풍이 발달하면서 한국이나 중국과의 교류도 감소한다. 이 때부터 중앙집권이 약화되고 일본 특유의 이중적인 권력 체계가 발달하기 시작했으며, 이렇게 약 1천년 동안 대정봉환과 메이지 유신 이전까지의 천황은 실제 정치는 셋칸, 간파쿠, 쇼군 등에게 위임하고 명목상 일본 정부인 조정의 수장으로 수도인 교토나 직할 영지 등 일부 지역에서만 직접적인 통치를 했다.
무사 정권은 천황 자리를 찬탈하지는 않고 "신으로부터 권력을 위임받았다"는 정통성을 내세우기 위해 그대로 두었는데 일본 역사상 또라이가 없었던 것은 아니라서 타이라노 마사카도는 교토와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던 반도 땅에서 거병해 본인을 신황이라 일컬으며 천황이 되려고 시도한 적이 있었지만, 결국 조정에서 보낸 쇼군의 군대에 토벌당했다. 또한 현대에는 옴진리교의 교주인 아사하라 쇼코가 천황을 폐위시키고 자신이 새로운 나라를 세우려고 일본 정부와 천황가를 전복하려는 시도를 했으나 실패하고, 2018년(平成30) 7월 6일 오전에 사형이 집행되었다.
이렇게 일본의 명목상 지배자로서 상징성을 가진 존재이기는 하지만, 실제로 전제 군주로서 스스로 권력을 행사한 시기는 나라 시대부터 헤이안 시대 중기까지 200년 정도 밖에 되지 않았으며, 가신들에게 이리저리 휘둘리다가 센코쿠 시대 이래로는 권력을 잃은 단순한 얼굴마담 같은 존재로 전락했다. 무엇보다 쇼군이 실질적으로 일본을 다스리던 막부 시대에는 그런 현상이 절정에 달했다. 무로마치 시대에는 토키 요리토오라는 다이묘가 천황의 가마에 화살을 쏘는 일도 있을 정도였다.
조정의 권위가 가장 초라하던 시절인 센고쿠 시대에는 대궐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 허름한 집에서 그림이나 글을 팔아서 살았다. 105대 고나라 덴노(재위 1526~1557)의 경우에는 즉위식을 치를 돈도 없어서 유력한 센고쿠 다이묘인 고호조(後北条)나 오우치(大內), 이마가와(今川) 등의 가문의 지원으로 즉위 10년 만에야 즉위식을 거행할 수 있었으며, 천황 자신도 자신의 어필을 팔아서 황실 수입에 보탰다고 한다. 또 궁녀들이 매춘을 하고, 동네 아이들이 천황을 무시하며 던지는 돌을 맞고 다녔던 시절도 있었다고 한다. 물론 에도 막부 시기에는 쇼군가였던 도쿠가와 가문의 막대한 후원과 더불어 고위 사무라이 및 쇼군가와의 유착으로 인해 권세를 누린 적도 있지만, 그 시기에도 당연히 정치적 실권은 쇼군과 그를 중심으로 한 막부에게 있었고, 천황은 그냥 바지사장에 불과했다.
이렇게 천황을 쥐고 흔들던 에도 막부가 무너지고 대정봉환으로 일본 제국이 성립되자 신정부의 주요 인사들은 에도 막부가 정당한 군주인 천황을 핍박했다고 보고, 구스노키 마사시게 등 과거 천황에게 충성한 충신이라고 판단되는 인물들을 찬양하기도 했다. 그 중 도요토미 히데요시도 있었는데 도쿠가와 이에야스처럼 천황을 허수아비로 취급하지 않고 존중했다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그 도요토미 히데요시조차 조선 침략을 하지 말라는 고요제이 덴노의 어명을 무시했다.
자신들 말대로는 일본 최초의 국가로 생각되는 야마토(大和)로부터 신의 피가 끊기지 않고 계속 이어져 내려오며 일본을 통치했다고 하여 '만세일통(万世一統)의 천황'라고 불리운다. 하지만 '천황'이라는 명칭이 사용된 건 비교적 최근이며 피나 이름이 끊긴 듯한 애매한 시기도 있었다. 예를 들면 일본의 패전 직후인 1954년 미즈노 유(水野祐)가 주장한 '3왕조 교체설'이 대표적이다. 그는 "일본 황실의 역사는 10대 스진 덴노에서 15대 오진 덴노까지의 고왕조, 16대 닌토쿠 덴노에서 25대 부레츠 덴노까지의 중왕조, 26대 케이타이 덴노 이후의 신왕조로 구분할 수 있다."고 하면서 "스진 덴노 이전의 천황은 역사상 실재하지 않는 허구의 인물"이라고 주장하였다.
이 학설은 많은 비판 혹은 보충의 대상이 되었으나 이후 '기마민족 정복설'이나 '규슈 왕조의 야마토 지역 정복설' 등 다양한 왕조 교체설의 시초가 되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이런 학설들이 주류로 인정받지는 못하지만, 분명한 것은 '만세일계'라는 것은 허구적인 관념에 가깝다는 것이다. 다만 3왕조 교체설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확실한 것은 케이타이 덴노 이래 일본 천황의 역사는 최소 1500여 년 동안 끊기지 않았으며, 현존하는 왕조 중 가장 오래되었다는 것이다.
헤이안 시대 말기에는 천황이 태상황으로 물러나거나 상황(上皇)이 출가하여 법황(法皇)으로 물러난 뒤에야 오히려 실권을 가지게 되고 천황은 사실상 태자 정도의 지위에 불과한 시대도 있었다. 이를 인세이(院政)라고 한다.
특히 이른바 '남북조시대'라고 하여 천황이 2명이나 있던 시대가 있었다. 하나는 원래 천황, 다른 하나는 당시 무로마치 막부가 추대한 새 천황. 가끔은 남조가 우세하기도 했지만 점차 막부가 세력을 넓혀가고 규슈를 완전 복속시키면서 결국 북조 쪽으로 기울고 만다. 결국 아시카가 요시미츠의 알선으로 남북조 두 가문이 왕위를 번갈아가며 계승할 것과 전국의 천황 직속령인 "고쿠가레(국아령, 国衙領)"를 다이가쿠지계의 소유로 삼을 것을 조건으로 남조의 히로나리 친왕이 북조의 고코마츠 덴노에게 삼종신기를 넘겨 남북조가 통일되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남조 세력이 압도적으로 불리한 상황이었기에, 당초에 약속했던 교대 계승은 당연히 지켜지지 않았고, 남조의 혈통은 권력에서 밀려나게 된다. 이 시기의 남조 혈통을 후남조라고 부르는데, 약간 남은 기록이 있기는 하나 결국 '서진의 남조(가칭)'라는 한 왕자가 어느 절에 의탁하였다는 기록을 끝으로 남조의 계통은 완전히 단절되었다.
메이지 시대에는 남조의 정통을 인정했다. 1911년(메이지 44년)에 메이지 덴노의 명으로 남조 2대를 정통 천황으로 인정하고 종래의 96대부터 100대까지의 천황을 '북조'로 보고 정통에서 제외하였고 남조의 노리요시 친왕, 히로나리 친왕은 천황이 아니었으나 즉위한 것으로 보고 고무라카미 덴노, 고카메야마 덴노로 추숭했다. 1926년(다이쇼 15년)에 다이쇼 덴노의 명으로 남조를 정통으로 한 이후에도 즉위의 여부에 대해 의견이 갈린 유타나리 친왕에 대해서도 즉위한 것으로 보고 조케이 덴노로 시호를 올렸다.
하지만 이 때문에 자신이 남조의 후손으로 황위를 이을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차례차례 나타나, 총합 약 50여 명 정도가 나타났다. 그 중에는 나름대로 큰 반향을 일으킨 사람도 없지는 않지만 지금은 모두 근거 없는 주장으로 추정된다.
쇼군과 천황의 관계는 흔히 만세일계로 상징되는 정통성의 천황, 권력을 위임받은 실권자 쇼군이라는 도식으로 설명되지만, 그것도 무로마치 막부 시절까지의 이야기이다. 센고쿠 시대부터는 이미 그 권력의 정통성도 원래부터 쇼군에게 있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여기에 에도 막부대까지 오면 쇼군이 금중병공가제법도를 제정해 천황에게 이런저런 규정을 강요하는 등 사실상 하급자 취급을 받았다. 쇼군이 직접 천황이 되지 않은 것은 초기에는 천황의 상징성 때문이었지만, 그 이후에는 천황이 진짜로 아무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이덕일은 "중세 일본의 천황은 제사장 역할 그 이상 이하도 아니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다만 천황과 조정을 이루는 공경들은 당대의 일본 상류사회를 이끄는 셀럽처럼 인식되었고, 아무리 정치적인 실권이 없다고 한들 적어도 문화적인 측면에서는 그들을 무시할 수 없었다. 역대 쇼군들은 황녀와 혼인함으로서 황실 전체를 막부 권위의 상징처럼 여겼다. 그래서 에도 막부 때는 아이들이 고나라 덴노에게 했듯이 돌을 던졌다가는 목이 달아나는 수도 있었다.
그러다가 에도 시기 중기 이후 오규 소라이 등으로 대표되는 유교적 통치이념이 지배층에게 퍼지자 천황이 다시 쇼군의 윗사람이라는 인식이 부활했다. 천황과 쇼군이 주고받는 친서를 살펴보면 이 시기부터 천황이 슬슬 윗사람인 것처럼 행동하기 시작한다.
그러다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의 구심점이자 절대권력으로 옹립되어 막부에서 권력을 돌려주면서 '일본 제국'의 심볼과도 같은 존재가 되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의 패전 이후 천황이 신이 아닌 인간임을 밝히는 '인간선언' 때문에 '신의 후예' 정도로 약간 위상이 내려갔다. 일본 제국 때에 로마 교황이 유럽을 포용하듯이 천황도 아시아를 포용해야 한다는 보편적 천황제(普遍的天皇制)는 끝내 정계, 학계 등에 등장하지도 못하고 무산되었다.
이 시절에도 천황이 절대 군주였는지는 일본 근대사를 차분히 곱씹어야 할 일이다. 일본 제국 시절에 중요한 것은 천황이 전 일본을 다스리는 신국(神國)의 계승자라는 '이미지', 즉 권위를 지닌 구심점이었기 때문이다. 메이지 덴노는 메이지 유신을 주도한 실세들의 눈치를 보고 그들의 뜻에서 어긋나지 않게 행동하였다. 보통 다른 사람에 의해 군주가 된 사람들이 대체적으로 그렇듯이.
메이지 시대 초기에 천황의 위치는 민중에게도 대단히 모호하게 여겨졌다. 당시 일본인들은 오랫동안 쇼군과 다이묘, 사무라이들의 지배를 받았지 천황의 지배를 받은 것은 아니었으며, 그랬기에 천황이 무엇인지도 잘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현인신(아라히토가미)'이라는 개념조차도 민간의 생각과 지배층의 생각이 잘 맞아떨어지지 않았다. 메이지 시대 초기 천황이 행차할 지역에 사전 파견된 정탐꾼이 그 지역의 민심에 대해 기록한 점이 이러한 점을 잘 드러난다. "천황께서 행차하시니 길을 닦으라고 명령해서 길을 청소했다. 천황의 행차라는 것은 정말로 귀찮기 그지없다." 게다가 행차를 위해 뭘 만들라고 하면, 적당히 대충 만든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이를테면 메이지 초기에는 천황의 행차에 돈을 집어던지는 일이 꽤나 자주 벌어졌는데, 신에게 돈을 바쳐서 경의를 표하는 민간 신토의 전통을 그대로 천황에게 적용한 것이다. 돈만이 아니라 천황의 행차가 지나가면 춤이나 노래 또는 음식을 바치는 사람도 나타났다. 이것은 민간인들이 자신들이 아는 민간 신토의 방식으로 신이라고 하는 천황에게 경의와 숭배를 나타내려 했던 것이다.
하지만 천황에게 서양의 절대 군주와 같은 권위를 씌우려 했던 일본 정부는 이런 행동에 기겁하였고, 금지와 억압으로 이런 전통을 단절시켰다. 같은 이유로 현인신인 천황이 존재하는데 신과 소통한다고 자처하는 것은 불경스럽다는 이유로 기존 신토계의 무속인들도 탄압당했으며, 이는 현재 일본 신토에서 무녀가 아르바이트 직업화하고 궁사(신관)는 사실상 신사 관리인화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당시 일본 민중들 사이에 거의 민중종교로 자리잡고 있던 불교가 특히 된서리를 맞아서 신불분리령에 수반한 폐불훼석(廢佛毁釋)으로 전국 각지에서 사찰들이 파괴되고 많은 승려들이 강제 환속당했다.
메이지 정부는 천황에게 서양의 황제와 같은 권위를 덧칠하려 했다. 제국주의 열강의 위협 아래 최대한 빨리 이 일을 해치우기 위해서는 전 국민을 상대로 한 세뇌 작업이 필요했으며, 당연히 폭력과 억압이 덤으로 따라붙을 수 밖에 없었다. 일제강점기 초기의 '헌병경찰'도 일본에서 하던 짓을 식민지로 가져온 것에 불과했다. 학교에서는 메이지 정부의 입맛에 맞게 각색된 신화를 사실로 가르쳤고, 천황의 사진과 초상화인 어진영(御眞影)을 모셔 놓고서는 천황을 섬기게 만들었다. 불타는 학교에 그 어진영을 구하려고 뛰어들어갔다 죽는 교사의 일화가 전설적인 미담으로 그려지고, 2차 세계대전 때는 군함이 피격당해서 함내에 화재가 발생했는데도 함내에 걸린 어진영을 다른 구축함에 옮기겠다고 뻘짓을 해서 많은 사람들이 죽는 일이 나올 정도였다. 나중엔 궁성요배를 식민지를 포함한 모든 사람에게 강요했다. 다이쇼 데모크라시의 실패와 몰락은 이미 여기서 예견되었던 것이다.
그 결과로, 실제 권력이야 어쨌건 근대 일본에서 천황의 상징성과 신성함은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신성불가침의 수준으로 격상되었다. 심지어 메이지 덴노가 잠시 묵었던 집에서는 그가 썼다는 물건과 자리에 투명 덮개를 덮어 박물관의 전시물 다루듯 하였고 메이지 덴노가 마시고 목욕했다는 우물물은 "신이 사용한 물이니 신령함이 깃든 만병통치약일 것이다"라고 해 사람들이 줄을 서서 그 물을 받아갈 정도였다고 한다. 천황이 잠시 머무는 집이더라도, 지역에서 유지 가문이어야 하고 가족 중 죽은 이가 없어야 하며 집안에 우환이 없어야 하는 등, 까다로운 조건을 걸고 각별히 신경을 써 머물 집을 뽑았다.
대신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천황이었던 히로히토는 단순한 신성불가침의 대상이나 얼굴마담이 아닌 꽤나 실권이 있었던 국가원수였다는 연구결과가 나오기도 한다. 히로히토가 직접 영향력을 행사했던 케이스는 단 3차례가 있다. 첫째는 다나카 기이치 총리를 질책해서 물러나게 한 사건, 둘째는 2.26 사건 당시 "이유가 어떠하건 내 허락도 없이 내 군대를 마음대로 움직여 반란을 일으킨 자들은 내 신하가 아니다", "장군들이 가만 있겠다면 내가 직접 근위사단을 지휘해 진압하겠다!"고 까지 할 정도로 강경한 태도를 보여서 반란 진압의 계기를 마련한 점, 셋째로, 패전 과정에서도 '성단(聖斷)'을 내리는 등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한 바 있다. 이 외에도 전쟁 당시 히로히토는 일본 육해군의 동향을 일본 내에서 가장 잘 파악하고 있었으며, 작전을 수정하라고 지시한 사실도 있다.
이 외에도 메이지 덴노 역시 시기에 따라 나름 권력을 지녔다고도 한다. 사실 실권이 없어 보인 것도 따지고 보면 어려서 뭘 몰랐거나, 아니면 실제로는 히카루 겐지로 대표되는 일본의 이상적인 지도자 유형에 따라 신하들에게 다 맡기느라 그랬다는 얘기도 있다. 지도자는 생각 없이 인생을 즐기고, 실제 일은 아랫것들이 다 하는 이런 문화 때문에 일본은 굳이 천황이 아니라도 막부나 번, 군부에서 유난히 중간층의 영향력이 강했다.
대일본제국 헌법 등에서도 나타나 있듯이 실제로는 일본의 국사 중에서는 천황이 아니면 권신이라 할지라도 함부로 못 건드리는 영역이 있었고, 메이지 6년의 정변이나 종전 당시 상황에서 볼 수 있듯이 진짜 답이 없으면 천황이 나서서 일을 해결하기도 했다. 또, 메이지 시대 말년에는 이토 히로부미도 없고 어지간한 신하들도 슬슬 나이를 먹고 은퇴를 했기 때문에 메이지 덴노 본인이 힘을 발휘했다.
사실 히로히토는 서자였던 할아버지와 아버지와는 달리 다이쇼 덴노의 정실인 데이메이 황후에게서 태어난 적장자였기에, 정통성에 흠이 없었던 것은 말할 필요도 없고 미래의 군주로 태어나고 자랐다. 그리고 그가 천황으로 즉위했을 무렵엔 메이지 유신을 주도한 실세들은 이미 다 죽고 없었다. 히로히토를 위협할 힘을 가진 것은 일본군 뿐이었지만, 당시 일본군의 육군과 해군은 견원지간이었고, 그 둘 모두는 특이하게도 "내각의 통제는 거부하지만 최고 지휘관인 천황에게만은 절대 복종한다"고 맹세했다.
만주사변 이전까지 히로히토는 공공연하게 민간정부를 지지했는데, 문제는 내각이 천황의 신임을 등에 업고 군부를 컨트롤하려고 하면 군부는 통수권이 천황에게 있지 내각에 있는게 아니라면서 반발하는 것이었다. 군부는 이른바 통수권 간범이라는 논리로 내각과 정당정치를 역적도당으로 만들어버리고, 이를 막으려는 궁중 중신들까지도 역적/간신배 딱지를 붙여 탄핵했으며 1930년대 중반에 들어서면 '천황기관설' 등 천황을 현대적 정책결정과정의 일원으로 편입시키려는 이치키 기토쿠로 등 히로히토 측근들의 시도를 격렬하게 공격, 축출시키고 메이지 시대의 원로였던 사이온지 긴모치까지도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그 극에 달한게 2.26 사건으로, 쿠데타군에게 총리대신이 살해당한 줄 알았던 히로히토는 쿠데타 당일 새벽에 반란군의 요구를 거부하고 자신이 직접 통수권을 행사하면서 육군에게 즉시 쿠데타군을 진압하도록 명령했으나, 육군상 가와시마는 이를 무시하고 쿠데타군과 3일이나 지리한 대치전과 협상을 벌였으며 심지어 반란을 진압해야 할 계엄사령관 가시이는 사태 마지막 날까지도 육상과 참모차장에게 천황에게 대권을 쥐어주고 유신을 선언토록 하자고 설득하고 있었다. 결국 진압작전이 시작되자 궁지에 몰린 쿠데타군의 투항으로 사태가 마무리되었다.
이 사건은 히로히토의 통수권이 얼마나 유명무실하였는지를 입증해보였다. 더군다나 사이토 마코토나 다카하시 고레키요 등 유력한 측근들이 살해당하고 권위를 실추당한 히로히토는, 쿠데타군이 자신의 바로 아래 남동생인 지치부노미야 야스히토 친왕과 접선하여 황위 교체를 노렸다는 뜬소문까지 퍼지면서 자신의 위치까지 위협받기에 이르렀다. 히로히토가 무력화되는 시기도 바로 이 2.26 이후이다. 히로히토가 1937년 우가키 가즈시게를 총리로 임명하자 육군이 반발하여 무산시키고 하야시 센주로를 내세워 총리대신에 앉힌 사건이 가장 대표적이다. 육군에겐 천황에게 대놓고 거역할 힘이 있었던 것이다.
이제부터는 현인신이라는 천황조차도 군부의 눈치를 봐야 했다. 실제로 작전회의에서도 히로히토가 직접 의견을 내는 경우는 거의 없었고, 군 수뇌부들이 낸 의견들을 듣고 다수가 찬성하는 쪽으로 승인해주는 일이 대부분이었다. 심지어 몇몇 작전에 관해서는 히로히토도 "이 작전이 실제로 가능하기나 한 건가?"라며 태클을 걸기도 했으나, 결국 수뇌부 다수가 찬성하면 본인의 의견은 접어버리고 "다수가 찬성했다면 짐 또한 반대하진 않겠소."라며 결국 승인을 해주었다. 심지어 태평양 전쟁의 개전도 이런 식으로 이루어졌다.
히로히토의 아들인 아키히토 천황이 과거사에 대해 잘못을 통감하며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 받았다"고 언급할 때 사람들이 그제서야 일본의 모든 사람이 과거사 인정과 사과에 대해 마냥 부정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때문에 이후 천황 호칭에 대한 논란의 상당부분이 사그라들기도 했다. 실제로 아키히토에 대한 한국 여론의 인식은 상당히 긍정적이며, 부정적이던 사람들도 아키히토의 발언들을 찾아보고 나서는 오히려 호의로 변하는 경우가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