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내가 만난 名문장] 어떤 문장과 영원한 다짐
“콩땜한 장판같이 바래어 가는 노랑꽃 핀 얼굴 보며
이것이 차마 입에 떠올릴 수 있는 말은 아니지만
마지막 성한 몸뚱아리 어느 곳 있다면
그것조차 끼워 넣어야 살아갈 수 있는 사람에게
뿌듯이 주고 갑시다
기꺼이 삶의 어느 부분도 떼어주고 가는 삶을
나도 살다가 가고 싶습니다.(하략)”
―도종환 ‘접시꽃 당신’ 중에서
청소년 시절, 이 시가 들어있는 시집을 읽었다. 시집은 그만큼 어마어마하게 많이 팔렸다. 먼저 세상 떠난 아내를 그리워하는 남편의 순애보는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접시꽃 당신’은 그렇게만 읽어도 무방한 작품이 아니었다. 예술작품은 읽는 사람이 해석하기 나름이라지만, 시인의 시선은 아내 쪽으로만 향하지 않았다.
시인은 자신의 슬픔에만 머물지 않는다. 이제 자신을 나눌 수 없는 날들을 아파해야 한다며, 곧 떠날 아내에게 남은 몸뚱어리마저 주고 떠나자는 시인의 호소는 종교인의 이타주의처럼 다가왔다. 어떻게 살아야 할까 고민하던 사춘기 시절, 시 구절은 화살처럼 박혔다. 나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이들과 나누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마음먹었다.
그 후 도종환 시인이 더 많은 시집을 내고, 그 시집을 계속 읽는 사이 30년 넘는 시간이 지나갔다. 이 시처럼 살았느냐고 묻는다면 그러지 못했다고 고백해야 마땅하다. 지나온 삶은 내가 얼마나 이기적이고 제멋대로인지 알려주기 충분한 시간이었다. 그럼에도 이따금 빈 통장을 털어 어딘가에 꾸준히 돈을 보낼 수 있었던 것은 이 시를 잊지 않고 계속 떠올렸기 때문이었다. 누군가 도움을 청할 때 망설이는 시간이 너무 길어지지 않을 수 있었던 것도 이 시 덕분이었다. 시인도 변하고 나도 변했겠지만 어떤 문장과 다짐은 영원히 그곳에 남아 우리를 지켜본다. 그 긴장과 부끄러움이 가까스로 나를 지켜준다.
✺ 접시꽃 당신 | 도종환 |실천문학사|2011.5.30.
✵ 책소개
1986년 발행 이후 꾸준한 사랑을 받고 있는 도종환 시인의 대표시집 『접시꽃 당신 (출간 25주년 특별한정판)』. 감성적인 언어로 사랑을 노래하는 저자는 이 시집에서 사별한 아내와 그에 대한 그리움을 이야기한다. 저자 특유의 한국적 서정과 생에 대한 깊고 진한 성찰의 자세가 어우러진 시편들은 2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독자들의 가슴을 울리고 있다. 무명 시인이었던 저자를 유명 인사로 만들었던 표제시인 ‘접시꽃 당신’을 비롯하여 ‘옥수수밭 옆에 당신을 묻고’, ‘봄은 오는데’, ‘눈을 쓸면서’ 등 암으로 먼저 떠난 아내를 그리는 시편들과 학교 교사로서 학교와 아이들, 교육에 대한 주제가 담긴 ‘스승의 기도’, 김 선생의 분재‘ 등의 시편들이 수록되어 있다.
✵ 저자 : 도종환 국회의원, 전 장관.
1954년 충북 청주에서 태어났다. 충북대 사범대 국어교육과를 졸업하고 충남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동안 《고두미 마을에서》《접시꽃 당신》《당신은 누구십니까》《부드러운 직선》《슬픔의 뿌리》 《흔들리 며 피는 꽃》《해인으로 가는 길》《세 시에서 다섯 시 사이》《사월 바다》등의 시집과 《그대 언제 이 숲에 오시렵니까》《사람은 누구나 꽃이다》《꽃은 젖어도 향기는 젖지 않는다》 등의 산문집을 냈다. 신동엽창작상, 정지용문학상, 윤동주상 문학부문대 상, 백석문학상, 공초문학상, 신석정문학상, 용아박 용철문학상 등을 수상하였다.
✵ 목차
제1부 접시꽃 당신
접시꽃 당신 13/병실에서 16/암병동 18/옥수수밭 옆에 당신을 묻고 20/당신의 무덤가에 21/저만큼 22/섬 23/오월 편지 25/유월이 오면 27/저무는 강 등불 곁에서 29/그대 가는 길 31/꽃씨를 거두며 33
제2부 인차리
초겨울 37/겨울 일요일 38/인차리 1 39/인차리 2 40/인차리 3 41/인차리 4 43/인차리 5 44/인차리 6 45/인차리 7 46/우산 48/봄은 오는데 49/사랑방 아주머니 50/쑥국새 52/씀바귀 무덤 53/감꽃 54/세월 55/천둥소리 56/당신과 나의 나무 한 그루 58/구름처럼 만나고 헤어진 많은 사람 중에 60/영원히 사랑한다는 것은 61
제3부 적하리의 봄
저녁기도 67/당신의 부활 68/아홉 가지 기도 70/옥천에 와서 72/적하리의 봄 74/묵도 76/유산 79/감잎 80/봉숭아 81/가을 저녁 82/저 가을 구름 바람 위로 83/시월비 84/당신이 떠난 뒤로는 85/사랑의 길 87/그대 떠난 빈자리에 88/달맞이꽃 90/하나의 과일이 익을 때까지 93/접시꽃 꽃씨를 묻으며 95
제4부 마늘밭에서
마늘밭에서 99/장다리꽃 100/눈을 쓸면서 101/화랑에서 104/수몰민 김시천 106/너의 피리 108/어떤 연인들 110/씀바귀 112/다시 부르는 기전사가 115/행주치마 117/앉은뱅이 민들레 118/서리아침 120/미리내 122/스승의 기도 124/돌아온 아이와 함께 126/목감기 129/김 선생의 분재 130/채마밭에 서서 131/답장을 쓰며 135/초판 시인의 말 137
✵ 출판사서평
“백만 독자가 사랑한 도종환 대표시집
”1986년 초판 발행 이후, 꾸준한 사랑을 받고 있는 『접시꽃 당신』이 출간 25주년을 기념하여 특별한정판으로 출간되었다. 시인과 인연이 깊은 판화가 이철수의 특별판에 걸맞은 표지 글씨와 그림이 시집을 더욱 깊고 따뜻하게 만들었다.
접시꽃같이 소박하고 지순한 아내를 암으로 먼저 떠나보낸 후, 회환과 비탄을 담아냈던 이 시집은 출간 당시, 영화로도 제작될 만큼 시단은 물론 문화예술 전반에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 우리 문단에서 시집이 그토록 큰 사랑을 받으며 베스트셀러에 오른 일은 그전은 물론 이후에도 찾아보기 힘들다.
실천문학사의 시집 시리즈인 ‘실천시선’의 한 권인 『접시꽃 당신』은 그동안 시리즈의 표지가 새로워질 때마다 일순위로 개정되어왔다. 최근에도 안상수 디자인으로 바뀐 실천시선 시리즈에서 허수경 시집과 함께 가장 먼저 개정된 시집이 『접시꽃 당신』이었다. 그만큼 많은 독자들이 꾸준히 찾는 시집이라는 반증이기도 하다.
또 한 가지 특이한 점은 ‘망부가’라고 할 수 있는 이 시집이 선물하고 싶은 책으로 많이 꼽힌다는 점이다. 전국의 헌책방에서 흔하게 접할 수 있는 시집 중 한 권이기도 한데 거기에 소장된 대부분의 『접시꽃 당신』 앞장에는 누군가에게 선물한 것임을 짐작게 하는 메모가 적혀 있다.“
한국 사랑시의 영원한 고전
”왜 우리는 『접시꽃 당신』을 이토록 사랑하는가. 25년이라는 긴 시간, 한결같이 애틋한가. 표면적으로는 먼저 간 아내에 대한 그리움과 슬픔을 노래한 시집이지만 그 밑바닥을 관통하는 시인 특유의 한국적 서정과 생에 대한 깊고 진한 성찰의 자세 때문일 것이다.
실천문학사는 『접시꽃 당신』 출간 25주년을 기념하여 긴 시간, 변치 않은 독자들의 성원에 보답, 헌정하고자 3천 부, 특별한정판으로 출간하였다.
사랑과 감사의 마음을 담아 가까운 이들에게 선물하기 좋도록 시집의 앞장에는 짧은 메모 페이지도 만들었다.
이 세상 많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을 사랑하여
오래도록 서로 깊이 사랑하는 일은 아름다운 일입니다
그 생각을 하며 하늘을 보면 꼭 가슴이 메입니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서로 영원히 사랑하지 못하고
너무도 아프게 헤어져 울며 평생을 사는지 아는 까닭에
소리 내어 말하지 못하고 오늘처럼 꽃잎에 편지를 씁니다
소리 없이 흔들리는 붓꽃잎처럼 마음도 늘 그렇게 흔들려
오는 이 가는 이 눈치에 채이지 않게 또 하루를 보내고
돌아서는 저녁이면 저미는 가슴 빈자리로 바람이 가득가득 몰려옵니다
뜨거우면서도 그렇게 여린 데가 많던 당신의 마음도
이런 저녁이면 바람을 몰고 가끔씩 이 땅을 다녀갑니까
저무는 하늘 낮달처럼 내게 와 머물다 소리 없이 돌아가는
사랑하는 사람이여
-「오월 편지」에서
✺ 접시꽃 당신/ 도종환
옥수수 잎에 빗방울이 나립니다.
오늘도 또 하루를 살았습니다
낙엽이 지고 찬 바람이 부는 때까지
우리에게 남아있는 날들은
참으로 짧습니다
아침이면 머리맡에 흔적 없이 빠진 머리칼이 쌓이듯
생명은 당신의 몸을 우수수 빠져나갑니다
씨앗들도 열매로 크기엔
아직 많은 날들을 기다려야하고
당신과 내가 갈아엎어야 할
저 많은 묵정밭은 그대로 남았는데
논두렁 덮은 망촛대와 잡풀가에
넔을 놓고 한참을 앉았다 일어섭니다
마음 놓고 큰 약 한번 써보기를 주저하며
남루한 살림의 한구석을 같이 꾸려오는 동안
당신은 벌레 한 마리 함부로 줄일 줄 모르고
약한 얼굴 한번 짖지 않으며 살려 했습니다
그러나 당신과 내가 함께 받아들여야 할
남은 하루하루의 하늘은
끝없이 밀려오는 가득한 먹장구름입니다
처음엔 접시꽃같은 당신을 생각하며
무너지는 담벼락을 껴안은 듯
주체할 수 없는 신열로 떨려왔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에게 최선의 삶을
살아온 날처럼, 부끄럼없이 살아가야한다는
마지막 말씀으로 받아들어야 함을 압니다
우리가 버리지 못했던
보잘 것 없는 눈 높음과 영욕까지도
이제는 스스럼없이 버리고
내 마음의 모두를 더욱 아리고 슬픈 사람에게
줄 수 있는 날들이 짧아진 것을 아파해야 합니다
남은 날은 참으로 짧지만
남겨진 하루하루를 마지막 날인 듯 살 수 있는 길은
우리가 곪고 썩은 상처의 가운데에
있는 힘을 다해 맞서는 길입니다
보다 큰 아픔을 껴안고 죽어가는 사람들이
우리 주위엔 언제나 많은데
나 하나 육신의 절망과 질병으로 쓰러져야 하는 것이
가슴아픈 일임을 생각해야 합니다
콩땜한 장판같이 바래어 가는 노랑꽃 핀 얼굴보며
이것이 차마 입에 떠올릴 수 있는 말은 아니지만
마지막 성한 몸뚱아리 어느 곳 있다면
그것조차 끼워 넣어야 살아갈 수 있는 사람에게
뿌듯이 주고 갑시다
기꺼이 삶의 어느 부분도 떼어주고 가는 삶을
나도 살다가 가고 싶습니다
옥수수 잎을 때리는 빗소리가 굵어집니다
이제 또 한번의 저무는 밤을 어둠 속에서 지우지만
이 어둠이 다하고 새로운 새벽이 오는 순간까지
나는 당신의 손을 잡고 당신 곁에 영원히 있습니다
- 1986년 시집 <접시꽃 당신> (실천문학사)
[참고문헌 및 자료출처: 〈내가 만난 名문장, 어떤 문장과 영원한 다짐(서정민갑 대중음악평론가), 동아일보 2022년 08월 15일(월)〉, Daum, Naver 지식백과, 인터넷 교보문고/ 글과 사진: 이영일∙고앵자 생명과학 사진작가∙채널A 정책사회부 스마트리포터 yil2078@hanmail.net]
첫댓글 고봉산 정현욱 님
도종환
그이름 저는 시인으로만 존경하고 정치인으론 존경하고싶지 않은 인물이네요
사랑하는 아내를 잃고 썼다는 '접시꽃 당신을' 을 읽든날 우리나라 최고의 서정시인으로 우러러보고 저도 그런 시를 써보겠다고 잠을 설친적도 있지만 종내 실패하고 말았는데
이토록 훌륭한 시인이 왜 그 험한 정치판에 뛰어들었을까 하는 의문은 지금도 지울수가 없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