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요한복음 6장 1~13절/오병이어의 이적 속에 숨겨진 영적 비밀
오늘 본문의 오병이어의 사건은 요한복음 6장 47~48절의 말씀으로 연결이 됩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 이와 같이 오병이어의 표적은 생명의 떡으로 비화되고 있습니다. 또한 요한복음 6장 53~54절을 보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와 같이 오병이어의 표적은 일용할 양식에 관한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속죄양이 되심을 나타내고 있는 사건인 것입니다. 장차 우리를 위하여 죽으시게 될 것을 상징하는 것으로서 이 사건을 상징화시키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병이어의 표적은 예수님께서 어떻게 이와 같이 대단한 기적을 일으킬 수 있는 분이신가? 하는 데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이 사건을 통해서 예수님은 왜 당신이 피 흘리시고 살을 찢지 않으면 안 되는가 하는 점을 중요하게 메세지화 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해서 예수님을 이해할 때에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먹을 것이 없는 곳에서도 먹을 것을 만들어 내실 수 있는 분으로 부각시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보고자 하는 점은 오병이어의 표적이 담고 있는 메시지가 무엇인가 하는 점입니다.
떡과 잔
오병이어의 표적은 사 복음서에 다 기록되어 있지만 마태복음 14장을 살펴보면 다른 세복음서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은 다른 표현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14장 17-19절에 “제자들이 가로되 여기 우리에게 있는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뿐이니이다 가라사대 그것을 내게로 가져오라 하시고 무리를 명하여 잔디 위에 앉히사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에 제자들에게 주시매 제자들이 무리에게 주니"
요한복음 6장과 마태복음 14장이 같은 사건을 기록하고 있지만 차이가 나는 부분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14장에서는 떡을 나누는 방법에 대한 묘사가 좀 더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 14장에서는 떡을 나누어주는 방법에 있어서 구체적으로 표현되어 있는데 '떡을 떼어' 나누어 주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와 같이 떡을 나누는 방법에 있어서 '떡을 뗀다'는 표현에는 아주 중요한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이 굳이 그렇게 표현함으로 우리에게 전달하고 싶은 내용이 있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11장 23-25절에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또 식후에 또한 이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이 말씀은 주의 만찬에 관한 말씀입니다. 여기서도 떡을 '떼어' 주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떡을 뗀다는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그의 몸을 상하실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상한다는 의미는 보통으로 상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예수께서 죽으실 것을 상징합니다. 그러므로 그냥 떡이라고 하지 않고 '뗀 떡'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떡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떼신 떡입니다. 이것은 단지 상징으로만 그치는 추상적인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친히 죽으실 사건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의 만찬에서 나누는 살과 피는 그냥 살과 피라고 하지 않고 '뗀 떡'이라고 하고, 포도즙이라고 하지 않고 꼭 '잔'이라고 말합니다.
성경의 기록은 어느 한 자도 무의미하게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말씀들은 깊은 뜻들을 가지고 의도된 것으로서 철저히 간섭된 글자들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대신한 죽음, 즉 대속사역을 상징하여 흘리신 피이기 때문에 반드시 포도즙을 말할 때에는 흘리신 피를 담은 것으로서 '잔'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은 개개인의 사사로운 이익 때문에 예수님을 따라다녔습니다. 본문에는 '떡을 뗀다'라는 구체적인 묘사가 없지만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면서 그 떡을 떼어 나누어주신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보리떡이 다섯 개입니다. 한 개라면 큰 덩어리겠지만 다섯 개라는 숫자를 보아 그 보리떡은 작은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니 그냥 나눠줘도 쉽게 먹을 수 있었을 텐데 굳이 떼어서 나누어 주셨을까요? 바로 여기에는 주님의 다른 의도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이러한 행동은 이 오병이어의 사건으로 예수님 자신이 모든 인류의 죄를 대신 담당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대신 죽으실 것을 매세지화 하여 확실히 하고자 하시는 의도가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병이어의 사건이 대속사역에 대한 메시지를 담고 있는가 하는 것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선, 이 사건은 여기에 모인 무리들에 의하여 요구된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 모인 무리들은 떡을 달라고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더 깊이 들어가서 영생에 관한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본문 2절을 보면 큰 무리가 모인 것은 다만 호기심 때문이었습니다. "큰 무리가 따르니 이는 병자들에게 행하시는 표적을 보았음이러라." 하였습니다. 이처럼 이들이 예수님을 따라다닌 것이 오직 그를 따라 다니면 병이 치료되는 등 호기심과 일상생활에서의 이익 때문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정말로 그러했다는 사실이 요한복음 6장 24-26절에서 보면. “무리가 거기 예수도 없으시고 제자들도 없음을 보고 곧 배들을 타고 예수를 찾으러 가버나움으로 가서 바다 건너편에서 만나 랍비여 어느 때에 여기 오셨나이까하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이와 같이 예수님을 부지런히 쫓아다니던 사람들의 중요 관심사는 호기심과 일상생활의 이익 이상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생각하기를 "예수님께서 어찌하여 그런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셨는가?"하는 질문을 떠올립니다. 생각해 보면 그들이 예수님을 필요로 하지 않았으며, 생명의 양식을 필요로 하지 않았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구원의 필요성도 전혀 느끼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전혀 감각이 없는 자를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설교를 하시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주셔서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구원의 필요성조차 깨닫지 못하던 자들이었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기독교가 이야기하는 가장 핵심 되는 진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구원의 필요성을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만나서도 예수님께 무엇을 구하여야 하는지를 모르는 자들입니다. 우리가 도대체 어떤 자들인지도 깨닫지 못하는 자들입니다. 그것을 깨닫는 자는 이미 영적으로 거듭난 자들입니다. 영적으로 거듭난 자들은 자신이 죄인인 줄 알고 하나님이 누구인 줄을 압니다. 그러나 거듭나지 않은 자들은 그것을 모르기 때문에 구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에 있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주님께서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죽이시는 방법뿐이었습니다. 가르치고 이해시키고 설득할 문제가 아니므로 자신이 죽는 수밖에 없었다고 복음서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떼어, 즉 대속제물이 되어 죄 값을 치르셨던 것입니다. 이리하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시고,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고, 우리의 영안이 열려 하나님을 감히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기로 결심하거나, 다른 사람들보다 나은 조건이 있어서 예수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시는 것은 아닙니다. 다른 세상의 보통 사람들과 다를 바가 전혀 없었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부름을 받아 주님의 대속의 죽음으로 하나님에 대한 감각이 생긴 자들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지금 하나님께 대하여 감각이 있다는 것보다 더 분명한 구원과 대속의 확실한 결과도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우리가 구원받아서 우리가 하나님께 대한 감각이 살아났다고 해서 생활 자체가 갑자기 변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나아진 게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 생활을 할 때에 왠지 모르게 마음에 걸린다는 사실입니다. 그것밖에는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마음에 걸린다고 해서 즉시 생활이 달라지지도 않습니다. 그냥 걸리는 채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 우리들인 것입니다.
구원은 나에 의하여 결정되는 게 아닙니다.
우리들 중에 태어나서 지금까지 한 번도 부모님 속을 안 썩인 사람이 있습니까? 우리들은 부모님 속 안 썩히고 남에게 피해를 안 끼치고 살아 본 적이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난 이후 하나님의 속을 안 썩이고 처음부터 철이 들어서 살아온 자들이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그냥 겉으로 볼 때에는 악한 짓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왜 그렇게 보입니까? 사회적인 체면 때문입니다. 우리는 생각보다는 훨씬 죄악덩어리이고 지금도 쓸 만한 존재들이 못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세상 사람들과 아주 결정적으로 다른 것이 꼭 하나 있다면 그것은 바로 우리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에 나오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교회에 나오면 무슨 이익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교회에 나오면 무엇을 받습니까? 여러분 스스로를 가만히 돌이켜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기독교와 교회에 대하여 사실 자부심이 있습니까? 대개 우리는 기독교에 대하여 부정적인 편이지 긍정적이지 못합니다. 기쁨보다는 불평이 훨씬 많습니다. 그런데 왜 교회에 나오는 것입니까? 이렇게 신자들 대다수는 스스로의 판단을 그르치며 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에 나오는 자들입니다. 왜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에 나오는 것입니까? 그것은 구원이 나에 의하여, 나의 결정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교회에 나와야 하는 사람들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때로는 기독교와 성경에 대해서 거침없이 불평을 해댐으로 마치 우리가 불신자인 것 같은 느낌이 들 때도 있습니다. 성경을 잘 읽지도 않으면서도 가지고 다니며 소중히 여깁니다.
오병이어와 마지막 결과의 엄청난 차이
오늘 본문을 깊은 관심을 가지고 보시면 또 하나의 난관이 생깁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그의 몸을 대속물로 주시는 사건의 상징으로 오병이어의 사건을 정하셨다면, 왜 어린 소년의 손에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받으셨느냐 하는 점입니다. 차라리 없는 데서 만드시거나 예수님께서 가지고 오시는 편이 나을 텐데, 왜 다른 사람의 손에서 오병이어를 취하여 이 사건을 일으키셨을까? 하는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거기에는 큰 이유가 있습니다. 오병이어의 사건에 왜 어린 소년이 등장시켜 나오느냐 하는 점은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요구와 상관이 없이 구원을 해결하러 오신 분이라는 메시지가 담겨 있는 것과 똑같이,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얼마나 우습게 보이느냐를 기록한 것입니다. 이 부분을 좀 더 자세히 이해하기 위하여 사건 전체의 흐름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5-7절에 “예수께서 눈을 들어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빌립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로 먹게 하겠느냐 하시니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 것을 아시고 빌립을 시험코자 하심이라 빌립이 대답하되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덕이 부족하리이다.” 조금씩 받는다는 뜻이 무슨 뜻입니까? 배부르게는 못 주고 그저 요기만 하게 한다고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이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한 데나리온은 당시 장정의 하루 품삯에 해당합니다. 장정이 200일을 일 해야 받을 품삯으로도 조금씩 밖에 먹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조금씩 먹는 것과 배부르게 먹는 것 사이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조금씩 먹이는데도 200데나리온이 필요하다고 했는데 나중에 무리들은 배불리 먹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무리들을 위한 비용이 엄청나다는 것을 먼저 전제해 놓은 다음에야 오병이어가 등장합니다. 실제의 필요량이 일천 데나리온쯤에 해당되는데 오병이어가 등장하는 것은 그들에게 요구되는 양에 대하여 이 오병이어가 얼마나 보잘 것 없느냐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이 엄청난 요구 앞에 오병이어는 더욱 보잘 것 없는 것으로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본문 9절에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졌나이다 그러나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삽나이까?” 이렇게까지 말을 해놓고 드디어 이적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오병이어에 숨겨진 엄청난 영적 의미
그 많은 무리들이 어떻게 다 먹었습니까? 본문 11절에 “예수께서 떡을 축사하신 후에 앉아 있는 자들에게 나눠주시고 물고기도 그렇게 그들이 원대로 주시다.” 물고기까지 그들의 원대로 주시니까 그 무리들은 다 배가 불렀습니다. 그리고 배부른 후에 그 남은 것을 거두었더니 열 두 바구니가 넘었다고 하였습니다. 얼마나 의도되어진 내용입니까? 과연 이 사건은 무엇을 의도하기 위한 것이었겠습니까? 그것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실력과 권세와 생명은 세상적인 눈으로는 대접받지 못한다는 이야기를 하시고자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이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셨듯이 우리의 몸을 죽이고 한 말의 밀알 같이 되어질 때에 증거 되고 그 빛을 발하게 된다는 사실을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여기서 스스로 먹을 것이 필요한 이 많은 무리들 앞에서, 이백 데나리온, 아니 천 데나리온쯤 필요한 사람들 앞에서 불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와 같이 보잘 것 없는 모습으로 존재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 무리들 중에서는 아무도 예수님을 우리 영혼의 소원대로, 배부르고 넘칠 만큼 주시며 해결해 주실 분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실제로 그러한 일을 하셨으며, 그 일을 위하여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이것이 오병이어의 기적 가운데 숨겨져 있는 엄청난 메시지입니다. 우리는 이 사건 앞에서 오늘날의 우리 신앙생활을 돌이켜보며 놀라게 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죽임으로 우리를 구원하신 사실과 그로 인해 우리가 이미 배부른 사람이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복음의 사역을 감당함에 있어서 우리가 어떠한 대접을 받을 것인가 하는 점들이 여기에 다 숨겨져 있다는 것입니다.
기독교 진리는 숨겨져 있습니다.
여러분은 예수 믿게 된 것으로 인해 어떤 대접을 받으리라고 생각하십니까? 우리가 갖고 있는 진리와 생명 때문에, 우리가 갖고 있는 권세 때문에 우리가 세상에서 얼마나 잴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성경은 한마디로 자랑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본문 41-42절에 보시면 “자기가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라 하시므로 유대인들이 예수께 대하여 수군거려 이르되 이는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 그 부모를 우리가 아는데 자기가 지금 어찌하여 하늘로서 내려왔다 하느냐?” 여기서 사람들이 예수님의 부모들을 안다는 말은 속속들이 다 안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그 부모를 알고 그 형제를 다 아는데, 그리고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보잘 것 없는 집안의 사람으로 알고 있는데, 어찌 감히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라고 말하느냐는 뜻입니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 기독교의 비밀이 있습니다. 기독교의 비밀은 숨겨져 있기 때문에 아무도 그것을 귀히 여기지 않는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예수님을 믿어서 육신적으로 잘된 일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신자들이 기독교에 대하여 자부심을 갖고 있지 않듯이, 세상도 기독교에 대하여 아무런 관심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일 때문에 얼마나 많이 우리 스스로가 예수 믿는 자라는 사실을 감추며, 스스로 힘없는 자로 여기며 살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세상에서 유일한 생명의 떡을 나누어줄 자라는 사실을 아십니까? 우리는 생명의 떡은 아니지만 그 떡을 나누어줄 왕 같은 제사장들입니다. 우리는 거저 주시는 이 생명의 떡에 배부른 자들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거저 나눠주는 사명으로 부름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자꾸 그 일을 거부하려합니까? 그것은 우리를 세상적인 눈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세상적인 눈으로 볼 때에 우리가 자랑스러워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미 가진 자이면서도 가진 자라는 생각이 없습니다. 또한, 우리는 이미 크게 승리한 자들인데도 승리자라는 의식이 없습니다. 우리가 어떤 힘을 가졌으리라 것은 감히 상상도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되어버렸습니까? 그것은 예수님께서 지는 길을 택하시고, 죽는 길을 택하셨다는 것을 우리가 아무리 이해하려고 해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지금까지 예수님을 믿어 오시면서 예수 믿는 것 때문에 어떤 이익을 보셨다고 생각하십니까? 솔직히 생각해 보십시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별로 큰 이익을 본 일이 없다고 생각되지 않습니까? 예수를 믿었기 때문에 공부를 더 잘하게 되었거나, 직장에서 이익을 더 보았다거나 하는 세상적인 차원으로 볼 때에 많은 이익이 있었다고 생각되지 않는 것이 당연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그와 같은 것들을 약속하기보다도 더 영적인 것들을 약속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영원을 준비하는 사람들입니다. 마치 고등학교 3학년 학생이 대학 입시를 위해 일 년을 어두움과 그늘 속에서도 묵묵히 걸어가듯이 우리는 이 짧은 인생을 영원을 준비하는 자로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고등학교 3학년 가운데는 공부를 열심히 해서 밤낮으로 졸리고 끄떡거리면서 1년을 보내는 자와 매일 노는 학생 사이에 누가 더 당당하며 누가 더 소망 속에 있으며 누가 더 자랑스럽겠습니까? 인생에 있어서 다음 세대 즉, 내세가 있다는 것을 모르는 자들에게는 이 세상이 유일하게 몸부림칠 장소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지 모릅니다.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알고, 나를 위하여 몸 버려 피 흘려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며, 그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인생이 잠깐이라는 것을 아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더욱 우리는 죽고 난 다음을 준비해야 되는 줄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준비하며 살고 있지를 않습니까? 그 이유는 바로 세상에서 보란 듯이 영광을 취하는 모습으로 살고 싶기 때문인 것입니다. 세상적으로 할 말이 있고 큰 소리 칠 수 있기를 바라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가 진정으로 자랑해야 할 것이 처음부터 알려진 것이 아니라고 이야기합니다. 아무도 관심을 두는 것이 아니라고 말해줍니다. 아사야 53장을 찾아보면 이것이 이미 구약에서부터 철두철미하게 예언되고 계획된 일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사야 53장 1-3절에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고 보지 않음을 받은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우리가 그를 귀히 여겨서 그 분이 우리에게 보답으로 구원을 주신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그 분을 위한 적도 없고 관심을 가진 적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분이 먼저 우리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려 우리를 구속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되어 우리가 거듭난 자요, 그를 아는 자가 된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들에게도 그와 같은 길을 갈 것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가야할 자로 부름 받았다는 사실을 새롭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썩는 밀알이 되십시오.
예수님의 전 생애에 걸쳐서 가장 중요한 싸움이 바로 그 분이 죽으로 오셨다는 것 때문에 감춰지고 경멸당하고 어려움을 당하는 것을 그 분 자신이 기꺼이 감수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이것을 사건을 통하여 극적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6장 14절에 “그 사람들이 예수의 행하신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죽으러 오신 것은 모르고 단지 세상의 승리자요, 세상적인 능력으로 모든 일을 해결할 자로 알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15절에 보면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이 와서 자기를 억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삼으려는 줄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가시니라" 했습니다. 이와 같이 사람들은 영혼의 구원 문제의 해결을 요구하지 않고, 세상적인 차원에서 임금 삼을 생각만 하였던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붙들어 억지로 임금을 삼으려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러한 사람들을 피해서 산으로 가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아무도 나를 임금 삼아주겠다고 하지 않는데도 내가 임금이 되어야만 일을 하겠다고 그러지 않습니까? 그러면서 이 문제가 해결되어야만 하나님 앞에 할 일이 있고, 헌신할 것이 있고, 봉사할 것이 있다고 그러지 않습니까? 물론, 유치한 신앙의 첫걸음은 그렇게 시작이 됩니다. 이번에 아들만 낳게 해주신다면 제가 이 아들을 하나님께 바치겠습니다. 어차피 없는 셈 치겠다 이것입니다. 그런 식으로밖에는 우리가 하나님께 바치지 않습니다. 우리는 원래 있었던 것으로는 하나님께 바치지 않습니다. 이번에 그 땅이 그린벨트만 해제되면 이 땅을 교회에 바치겠습니다. 어차피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니까요. 그러나 그런 식으로 말고 여러분의 생살을 잘라서 내놓을 마음은 없으십니까?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하신 일입니다. 이것이 오병이어의 사건입니다. 주님은 자신을 떼어서 요구하지도 않은 우리를 먹이사 그의 백성으로 삼으신 사건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 배부른 것입니다. 이제 주님은 당신의 뒤를 이를 제자로서 우리를 부르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생에서 할 일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은 것을 가지고 가는 길이 아닙니다. 한 번밖에 없는 이 인생을 그리스도를 위하여 썩는 밀알로 파묻는 일입니다. 먹다 남은 음식찌끼를 파묻지 마시고 여러분 자신을 파묻으십시오. 우리 자신을 파묻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것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그렇게 할 때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배부름을 얻는지 모릅니다.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 죽으심으로 온 인류가 배불렀습니다. 오늘날도 예수님의 뒤를 이어 예수님처럼 자신을 죽이고 파묻음으로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렇게 하는 일을 통하여 기뻐하시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오병이어 같은 사람들입니다. 우리 자신을 죽여서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첫댓글 그런즉 아들들아 나에게 들으며 내 입의 말을 버리지 말고 네 길을 그에게서 멀리 하라 그의 집 문에도 가까이 가지 말라(잠 5: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