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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풍무(144)
[정말 사리가 생겼나 봐!]
충격! 경악!
천붕회가 패하고, 남천벌이 패하고, 북황련이 패했다.
강호 무림 최고 세력이었던 그들끼리의 전쟁이 아니었다.
삼천여 명의 무림인이 한 명에 졌다. 한 명을 피해 삼천여 무인들은 도망을 쳤다고 했다.
소실산 숲에는 피의 강이 만들어졌다고 했다.
묵안혈마(墨眼血魔), 붉은 눈과 광혈지옥비를 휘날리는 그는 파멸안이라고 했다.
망연자실한 얼굴로 강호를 주시하고 있는 그들의 귓전에 또 다른 소식이 들려왔다.
태화궁에 불길이 올랐다!
세인들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무당산을 쳐다보았다.
소림에 이어 무당파까지 멸문을 당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과거처럼 누가 무당파를 쳤는지 알아보려고 하는 사람은 없었다. 소림을 쳤던 것처럼 이번에도 역시 황실이 했을 거라 생각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강호인들은 고개를 들어 북경을 쳐다보았다. 황실에서 어느 선까지 강호 일에 관여할 것인지 궁금했던 탓이다.
“쿡!”
하후장설은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 무당파의 멸문은 그도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소림사의 일에 비협조적이었던 무당파를 징계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그런데 자신보다 먼저 선수를 친 곳이 나타난 것이다.
물론 현 상황에서 무당파를 칠 만한 곳이 북황련이나 남천벌, 또는 마교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문제는 무당파 멸문의 책임을 고스란히 황실에서 떠안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왕 이렇게 되 일.......”
“접니다, 합하!”
그때 밖에서 천태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오너라! 알아보았느냐?”
“네, 합하! 무당파를 공격한 곳은 북황련과 남천벌이었습니다.”
“무슨 말이냐? 설마 두 문파가 합작을 했다는 말이더냐?”
하후장설은 놀란 얼굴로 천태진을 주시했다. 북황련과 남천벌의 합작 또한 염두에 두지 않았던 일이다. 다른 곳을 몰라도 두 세력만큼은 절대 합쳐질 수 없다고 여겼었다.
그런데 합작이라니.
“지금까지 올라온 보고에 의하면 그렇습니다. 그리고 무당파도 텅 비어 있었다고 합니다.”
“빌어먹을! 어디로 갔다고 하더냐?”
“그게......”
천태진은 말끝을 흐렸다. 귀광두에 모든 이목을 집중하고 있던 터라 무당파에 대해 신경을 쓰지 못했다,
“변수가 생긴 건가?”
창밖으로 시선을 돌린 하후장설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무당파 도이들이 피하고자 마음을 먹었다면, 동창의 감시망을 파악하고 있었다는 말이 된다. 무당파를 멸문시키지도 못하고 그 부담만 자신이 떠안게 되어 버렸다. 기분 좋은 일이 아니었다.
“어쩌면 잘됐는지도.......”
이내 표정을 풀었다. 장기적으로 보면 무당파는 북황련과 남천벌의 적이 될 것이기에 그리 나쁜 상황만은 아니다.
“귀광두는?”
“그는 산동성에서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갔다고 합니다. 산동성 관할 수군이 추격하고 있습니다.”
“바다라....... 참! 하고 있는 일은 잘 되고 있느냐?”
비릿한 미소를 머금던 하후장설은 문득 생각난 듯 물었다.
“네, 합하! 남은 천붕회 문파에 소림사 중을 잡아들이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좋다. 명심해라, 천태진. 기회가 생겼을 때 완전하게 뿌리를 뽑아야 한다는 사실을. 그만 물러가라!”
“존명!”
하후장설을 향해 넙죽 고개를 숙인 천태진이 무릎걸음으로 물러났다.
“사영(邪靈)!”
천티진의 기척이 완전하게 사라지자 하후장설의 입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부르셨습니까, 가주님!”
일순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전면 벽에서 빠져나온 검은 그림자가 하후장설을 향해 부복하는 것이었다.
“지옥군도(地獄群島)에 연락을 보내라. 광혈지옥비가 바다로 나갔다고.”
“알겠습니다, 가주님!”
촛불처럼 일렁이던 그림자는 하후장설을 향해 고개를 숙이더니 처음 나왔던 벽으로 스며들었다.
“귀광두, 귀광두, 귀광두........”
하후장설은 귀광두를 반복해 불렀다. 묘한 일이다 싶었다. 자꾸만 귀광두라는 이름이 눈아 밟혔다. 첫 만남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던 놈. 녀석 때문에 모든 일이 틀어질 것 같다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천붕회 전체보다 오히려 귀광두의 이름이 더욱 크게 느껴져 내심 찜찜했다. 과거의 경험에 비추어 볼 때 그런 자들은 반드시 죽여 없애야만 후환이 없다. 하후장설이 변황사패천의 한 곳인 지옥군도를 동원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바다 또한 우리 무극계 관할 하에 있다는 사실을 너는 모를 것이다. 네놈이 도망칠 곳은 한 곳밖에 없다. 죽은 자들만이 갈 수 있는 저승말이다.”
하후장설의 목소리가 실내를 타고 스산하게 울렸다.
끼루룩! 끼룩!
아득한 수평선을 백산은 망연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강호무림을 떠나고자 했고, 원하는 대로 이루어졌다. 이대로 바다를 따라 남으로 가면 다시는 강호로 나오지 않을 참이다. 두 여인과 같이 동사군도에 정착할 것이다.
그런데 마음이 편치 않았다. 마치 무엇인가를 빠뜨리고 온 것처럼 허전하기 그지없었다.
“쿡! 나도 무림인이 다 됐나 보군.”
시야에서 사라져 간 육지를 다시 돌아보며 픽 웃었다. 내심 어이가 없었다. 수천 명을 살해하고 도망치듯 무림을 떠나고 있는 상황이다. 그곳에 무슨 미련이 있다고.
“아쉬운 모양이네?”
뒤에서 다가온 광치가 백산의 얼굴을 빤히 보며 물었다.
“아쉽다기보다는 왜 그런 것 있잖아. 뒷간에 갔다가 그냥 나온 기분 말이야.”
“그걸 변비라고 부른다. 성질 더러운 것들이 자주 걸리는 거지. 그나저나 몸은 어때?”
백산을 향해 이죽거린 광치가 걱정스런 얼굴로 물었다. 백산의 상태가 시상치 않았던 탓이었다.
“차차 나아지겠지. 아직 몸이 적응하지 못해서 그런가 봐.”
백산은 어색하게 웃었다. 만다라(曼茶羅)를 얻지 못할 때부터 이미 예상하고 있던 일이다. 육체가 광혈지옥비의 힘을 완전하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정신 상태로 보면 분명 만다라를 얻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운기행공에서 만다라를 만들 수가 없다. 만다라를 이루지 못한 상태에서 무리하게 광혈지안을 끌어올린 대가를 치르고 있는 것이다.
“앞으로 광혈지안은 끌어올리지 마라. 추측에 불과하지만 잘못하면 몸이 망가질 수도 있다.”
지금껏 구양중과 의견을 나눈 끝에 내린 결론이었다. 상단전을 열어 자신의 몸으로 만들었다지만 그는 분명 과거의 백산이 아니다. 광혈지안을 끌어올리는 행위로 몸을 혹사하다 보면 어느 순간 영혼 이탈 현상이 생길 수도 있는 일이기에 하는 말이었다.
“이제 광혈지안을 끌어올릴 일이 있겠냐. 참! 멀미는 어떠냐?”
“멀미? 말도 마라. 죽는 줄 알았다.”
환한 미소를 머금으며 광치는 너스레를 떨었다. 배를 탄 일행을 가장 괴롭힌 것은 멀리서 쫓아오는 군선이 아니었다. 출렁이는 파도를 이기지 못하고 치미는 멀미가 가장 골칫거리였던 것이다.
물론 무공을 이용하여 허공에 떠 있거나, 내공을 운용하여 심신을 다스리면 멀미는 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하루 이틀 타고 가는 것도 아니고, 남쪽 동사군도에 도착할 때까지 며칠은 걸릴 터인데 그때까지 내공을 운용하고 있을 수도 없는 일.
결국 일행은 몸으로 부딪쳐 나가기로 결정을 보았다.
“쿡! 그 곰 말이다, 지금도 일어나지 못하고 있다. 말이 된다고 생각하냐? 닻을 무기로 쓰는 녀석이 가장 먼지 쓰러지는 것 말이다.”
광치는 짓궂게 웃었다. 내공을 풀고 배에 적응하기로 한 일행 중 가장 먼저 쓰러진 사람은 놀랍게도 배와 가장 친할 것처럼 보였던 철웅이었다. 배를 타기 전에 먹었던 오만 가지 음식을 전부 게워낸 철웅은 엉금엉금 기어 선실로 들어가 지금까지 나오지 않고 있다.
“그래서 사람은 일을 해야 하는 거야. 애들 전부 집합시켜!”
뒤편을 흘끔 쳐다본 백산은 선실까지 들릴 정도로 커다랗게 고함을 질렀다. 잠시 후, 해쓱한 얼굴을 한 철웅과 잠영루 살수 일행이 갑판으로 모였다.
“지금부터 저놈들에게서 도망치도록 한다. 너희들은 선저로 내려가서 노를 젓고, 광치와 철웅 너희들은 선미에서 물을 향해 장력을 쏴! 설련이나 하연도 마찬가지고!”
“그럼, 오빠는?”
“난 환자 아니냐. 환자가 일하는 것 봤냐? 그리고 살수 넌 나 좀 보자.”
주하연을 향해 사악하게 웃은 백산은 선실로 들어가며 유몽을 불렀다.
“광치야, 봐라. 평소에 주공을 잘 모시니까 나는 열외 시켜 주지 않느냐. 큰 주모님, 작은 주모님, 수고하십시오.”
환한 미소를 머금은 유몽은 설련과 주하연을 향해 꾸벅 고개를 숙이고는 부리나케 백산을 쫓아갔다. 하지만 유몽은 얼굴에 떠올랐던 미소를 금세 지워야 했다.
“선장 말을 들으니까 날 걸ㄹ 먹는 바닷고기 맛이 죽인다고 하더라.”
“그러니까 주공은 지금 저더러 물고기를 잡아오란 말입니까?”
유몽은 어이없다는 얼굴로 백산을 빤히 쳐다보았다. 얕은 강도 아니고 지금 있는 곳은 주변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망망대해. 이곳에서 물고기를 잡아오라니.
“몸이 많이 편찮으신 모양인데 들어가서 푹 주무십시오. 깨어날 때쯤 되면 동사군도에 도착해 있을 겁니다.”
공연히 따라왔다는 생각에 몸을 돌리려는 순간.
“우리 둘이 먹다가 살수 네가 죽어도 모른다고 하더라. 맛이 없으면 동사군도에 도착할 때까지 물 밖 구경은 힘들 줄 알아!”
“제길!”
“풋! 하하하! 호호호!”
인상을 확 구기며 몸을 돌리는 유몽을 보며 일행은 통쾌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웃지 마십시오. 그나저나 여긴 얼마나 깊은 거야?”
설련과 주하연을 향해 소리를 지른 유몽은 물속으로 시선을 주었다. 그러고는 부르르 몸을 떨었다. 문득 지금이 겨울이란 생각이 떠올랐던 탓이었다.
“형님, 선장이 그러는데 밧줄 묶고 들어가랍니다. 배를 잃어버리면 찾을 수 없답니다.”
“끄응!”
나직한 신음을 내지른 유몽은 재빨리 선수로 걸음을 옮겼다. 광치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잠시 후.
밧줄을 허리에 감은 유몽이 물속으로 뛰어들고, 선미에서 강력한 폭음이 울렸다.
촤악!
선저에서 잠영루 살수 일행이 노를 젓고 선미에서 장력을 치자 배는 무서운 속도로 물살을 가르며 나아갔다. 순식간에 군선을 멀리 떨어뜨리며 나아가던 배는 어느 순간 수평선에 삼켜진 듯 모습을 감췄다. 그리고 조그마한 배를 쫓아 나아가던 군선들이 일제히 방향을 틀었다.
십년, 강산이 변한다는 긴 세월이다. 그 세월 동안 헤어져 있던 사람이 만나면 부둥켜안고 울든지, 아니면 기쁨에 환성일 지르는 게 보통 사람들의 모습이다.
하지만 남궁미령은 울 수도 웃을 수도 없었다. 특별히 가슴이 차갑다거나 냉철한 이성을 가져서도 아니다.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버린 남편 때문이었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훌쩍 젊어진 모습은 분명 기꺼워해야 마땅했다. 하지만 그건 남편이 아니었을 때의 이야기다. 젊어 보인다는 소리를 많이 듣긴 했다. 하지만 육십 대 이하로는 내려간 적이 없다. 그런데 남편인 석두는 갓 사십대로 보인다. 아니, 많이 쳐줬을 때 사십대란 이야기지, 검게 탄 얼굴이 제 피부색을 되찾으면 삼십대라 해도 믿을 정도다.
“제기랄!”
석두를 뚫어져라 쳐다보던 남궁미령은 급기야 욕설을 뱉어 내고 말았다.
“저기........ 부인, 이건 고의가 아니었소. 그 빌어먹을 승천무극대혼진을 빠져나오다 보니.......”
“그래서, 마누라 폭삭 늙은 건 생각도 안하고 혼자만 젊어졌다 이거지요? 창피해서 어떻게 사람들을 만나요! 아예 젊은 첩을 들이시지 그래요? 아이고, 내가 미쳤지! 저런 인간을 찾는다고 무작정 북으로 오다니. 아이고!”
급기야 남궁미령은 그 자리에 철퍼덕 주저앉아 대성통곡을 했다. 새파랗게 젊어진 남편을 보자 느닷없이 설음이 밀려왔다. 앞으로는 같이 외출을 할 수도 없을 것이다.
밖으로 나가서 같이 저녁을 먹을 수도 없고, 옷감을 사러 갈 수도 없다. 돈 많은 귀부인이 젊은 서방을 들였다고 손가락질 받을 터인데 그 수모를 어떻게 견딘단 말인가.
석두는 미칠 지경이었다. 지금의 상황을 예견했고 많은 고민을 했었다. 하지만 달리 방법이 있을 리가 없다. 무공이 강해져 반노환동한 것을 어떻게 하란 말인가.
“첩이라니 무슨 말을 그렇게 하는 거요. 당신 때문에, 당신이 아니었다면 그곳에서 죽었을 거란 말이오.”
[뭐 해, 새끼들아! 어떻게 좀 해줘.]
남궁미령을 달래던 석두는 모사를 향해 눈을 흘기며 전음을 보냈다.
[부부 싸움은 칼로 물 베기라 했던 사람이 형님 아니오? 안으로 들어가서 한번 눌러 주면 될 것 아뇨! 아주 힘껏!]
[이 미친놈아, 그건 젊었을 때 이야기지. 이 사람이나 나나 나이가 팔십이라고.]
[아따! 되게 말 많네. 사십이나 거꾸로 처먹고도 멀쩡한데 그까짓 것 한번 한다고 어디가 덧나겠소? 잔말 말고 시도해 보시오. 혹시 아오, 늘그막에 자식이라도 볼지?]
‘끄응!’
석두는 내심 신음을 뱉어 내고 말았다. 육십을 넘어가면서부터 두 사람은 부부관계를 가져 본 적이 없었다. 사이가 나쁜 것도 아닌데 어느 날 갑자기 시들해진 것이다. 두 사람은 당연하게 받아들였고, 서로에게 불만이 없었다.
그런데 이십 년이 지난 지금 관계를 가져 보라니.
[태몽 꾸면 꼭 말해주시오!]
석두를 향해 짓궂은 미소를 던진 모사는 일행을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부인, 보는 눈도 있는데 그만 들어갑시다.”
“그렇겠지요. 나 같은 년하고 같이 있는 게 창피하겠지요.”
“하여간 좋게 말로 하면 안 들어! 끙차!”
낮게 소리친 석두는 남궁미령은 번쩍 안아 들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어머! 이 양반이? 무슨 짓이에요!”
불쑥 가슴을 파고드는 석두의 손길에 남궁미령은 화들짝 소리쳤다.
“가만있어 봐! 당신 살 냄새 좀 맡고 싶어서 그래. 십 년 만이잖아.”
“어머머, 노망났어요? 손 치우지....... 허억! 당신?”
석두의 손을 잡아 빼려던 남궁미령의 눈이 사정없이 커졌다. 안고 있는 줄 알았던 그의 왼손이 무복을 뚫고 아래로 파고든 것이었다.
“도련님들이 보시잖아요!”
남궁미령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의 손길이 아래로 파고든 건 이십 년 만이다. 아니, 이제는 그와 관계를 갖고 살았는지조차 기억나지 않는다.
그런데 그의 손길이 닿자마자 불덩이가 치밀어 올랐다. 느닷없는 몸의 반응이 당혹스럽고 창피하여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나이를 생각해요. 우린 팔십....... 하악!”
한번 붙은 불은 끄려 한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었다. 석두의 손이 부드럽게 움직이자 남궁미령은 저도 모르게 거친 비음을 토해냈다.
“팔십이면 어때, 몸은 이렇게 젊은데.”
남궁미령을 침상에 눕힌 석두는 하나밖에 없는 손을 빠르게 놀려 그녀의 옷을 벗겨 나갔다.
잠시 후 참상 위에는 팔십이라고는 믿기 힘든 아름다운 나신이 나타났다. 꾸준히 무공을 연마하고 몸 관리를 해온 그녀의 몸은 상상 이상이었다.
“그동안 왜 당신과 잠자리를 하지 않았는지 모르겠어.”
거친 숨을 뱉어내며 석두는 찢듯이 옷을 벗었다.
“이럴 게 아니라 얘기를 좀 해요. 지금 이러고 있을 시간이. 남궁세가가 위험....... 우읍!”
하지만 남궁미령은 마을 끝맺지 못했다. 두툼한 입술과 함께 아래로 침입한 손길이 머릿속을 하얗게 태워 버렸던 탓이었다.
“하아아!”
전율적으로 밀려드는 쾌감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강호 사정을 말해야 한다는 사실도 잊고 남궁미령은 석두의 손길에 젖어들었다. 자신도 모르게 커다란 신음을 지르고 있다는 사실도 알지 못했고, 그 신음이 벽을 타고 밖으로 새어 나가고 있다는 사실은 더더욱 몰랐다.
“좋다! 형님은 성공한 것 같고!”
내공을 집중하여 방 안의 동정을 살피던 모사는 만족스런 미소를 머금었다. 형수가 미칠 듯이 소리를 지르는 것은 석두 형님의 거시기 성능이 정상 작동하고 있다는 의미가 아니겠는
가. 아니, 성능이 더 향상된 듯 보였다.
“몇 번 했는가는 내일 물어보면 되고, 문제는 내 물건인데....... 왜 반응이 없지?”
일순 모사는 인상을 찌푸렸다. 아득한 기억을 더듬어 보면 남녀의 방사하는 소리에도 몸은 무섭게 반응했었다. 소리만 들어도 뇌리를 관통하는 아찔한 느낌이 왔었다.
그런데 지금은 머릿속을 꿰뚫는 느낌도 없고, 아래쪽도 신호를 보내지 않고 있다. 문득 소살우 말대로 허우대만 멀쩡한, 빛 좋은 개살구가 된 건 아닐까 하는 생각에 더럭 겁이 났다.
“섯다, 넌 반응이 오는 모양이구나.”
거친 숨소리를 흘려 대는 섯다의 모습에 모사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과거에 계집을 좋아한다고 해서 섯다란 별명이 붙은 그가 아닌가. 그가 된다는 말은 곧 자신도 문제가 없다는 의미다.
슬쩍 미소를 지으며 섯다의 모습을 보던 모사는 의아한 얼굴을 했다. 숨만 가쁘게 쉬고 있을 뿐 몸에서는 어떤 열기도 흘러나오지 않고 있었다. 요컨대 발정기를 맞은 개꼴이 아니라는 것이다.
“야, 새끼야!”
“가만 좀 있어 봐, 새꺄! 지금 한창 홍련이의 알몸이 떠오르려던 참인데.”
모사가 어깨를 툭 치자 섯다는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너도?”
해쓱한 얼굴로 모사가 물었다. 표정으로 보건대 그의 거시기도 소식을 보내지 않음이 분명했다. 담 너머에서 남녀의 방사 소리가 확연히 들려오고 있는데 어린 시절 품었던 기녀의 알몸을 떠올리고 있다니.
“시팔! 그럼 반백 년 동안 동작 그만하고 있던 것이 하루아침에 작동하겠냐? 작동하면 그게 더 이상한 거야, 임마.”
모사에게 하는 말이 아니었다. 엄청난 방사 소리를 듣고서도 꼼짝도 하지 않는 자신의 그것을 보며 위안하는 말이다.
“그러니까 저 인간은 이십 년 만이라서 쉽게 되는 거고, 오십 년 동안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던 우리는 시간이 더 걸릴 거라 이 말이지? 차차 나아지겠지?”
“그럴 거야. 아니, 반드시 그래야 한다고! 그리고 저 안에 있는 것들은 우리 식구잖냐. 그래서 반응을 보이지 않는 걸 거야. 따라와!”
두 주먹을 틀어쥔 섯다는 다급한 얼굴로 몸을 날렸다.
잠시 후, 섯다와 모사가 도착한 곳은 객잔 뒤쪽 야트막한 구릉 한쪽, 어둠을 뚫고 모락모락 김이 오르는 온천이었다.
“여기가 좋겠다.”
심각한 얼굴을 한 섯다가 한쪽을 가리켰다. 커다란 바위로 가려진 그곳은 온천을 내려다보기엔 최적의 장소였다.
“헉!”
바위틈으로 고개를 내밀었던 모사는 재빨리 입을 틀어막았다.
많았다. 삼 장 폭의 온천에는 눈부신 나체들이 즐비했다. 고개를 돌릴 필요도 없었다. 그저 눈만 뜨고 있으면 모든 게 다 보였다.
중원 여인들과는 달리 풍만한 몸매의 수신가 여인들은 숨이 막힐 정도로 아름다웠다.
[대충 보지 말고 세세하게 관찰해. 오십 년 전에 잃었던 감각을 되살려야 한다고.]
행여 들킬세라 섯다는 전음도 아닌 심어를 보냈다. 두 사람의 노력은 눈물겨웠다. 반노환동을 겪게 했던 모든 내공을 두 눈에 집중하여 여인들의 몸을 관찰했다. 상하로 흔들리는 가슴을, 달덩이 같은 둔부를, 거뭇거뭇한 아래쪽까지 세세하게 쳐다보았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과거에 몸이 정상일 때 기녀들과 관계를 가졌던 광경을 떠올리며, 때로는 숨을 헐떡여 보기까지 했다. 그러나 아래쪽의 그것들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무슨 잘못을 했는지 고개를 처박고는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다.
“휴우, 씨팔!”
급기야 모사는 깊은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한두 명도 아니고 싱싱한 처자들이 떼거리로 목욕을 하고 있다. 그런 광경을 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반응이 없다니. 기가 막혔다.
“냄새난다. 그만해라, 자식아!”
아랫도리에 손까지 집어넣고 주물럭거리는 섯다를 보며 모사는 쓰게 웃었다. 열여덟 처녀에게 장가들겠다는 꿈이 날아가고 있다. 첩을 얻겠다는 것도 아니고 새장가도 아니다. 비록 나이가 팔십이나 되었지만 총각장가가 아닌가.
“씨팔! 몸속에 사리가 생겼는가 보다. 그게 아니라면 꼼짝도 안 할 리가 없다고.”
온천에서 시선을 돌린 섯다는 모사 곁으로 털썩 주저앉으며 투덜거렸다.
“젠장, 별은 좃나게 밝네.”
“맞다, 좃나게 밝다.”
측은한 얼굴로 서로를 쳐다보던 두 사람은 동시에 밤하늘을 향해 고개를 쳐들었다.
설원을 뚫고 흑룡강성에 들어섰을 때만 해도 기대에 부풀었었다. 강호에 가 봐야 더 이상 할 일도 없을 터이고, 어떻게든 장가를 가서 자식이나 키우고 살고 싶다는 소박한 꿈을 꾸었다. 과거에는 독인이 되어 생명체 주변으로 다가서지 못해 여인을 접하지 못했지만 독성지체를 이룬 지금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더구나 반노환동하여 얼굴까지 젊어졌다. 장가를 가라는 하늘의 계시라 여겼었는데......
한참 동안 말없이 하늘을 쳐다보던 모사가 나지막이 말을 건넸다.
“그만 가자! 여기 있다가 들키기라도 하면 더 우습게 된다.”
마지막 한 가지 방법이 남아 있기는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뭔가를 기대한다는 자체가 우스운 노릇인 것이다.
“그래 가자!”
힘없이 대답한 섯다는 모사를 따라 일어섰다. 이어 두 사람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터벅터벅 산을 내려왔다.
“어디 다녀오세요?”
목욕을 하러 가는 중이었던지, 산을 오르던 조우령이 두 사람을 발견하고는 말을 건넸다.
“네, 형수님! 약초가 있나 하고 산을 올랐습니다. 그럼........”
무슨 말을 했는지조차 모르고 대강 얼버무린 두 사람은 조금 전과 마찬가지로 터덜터덜 걸음을 옮겼다.
“약초? 이 밤에 무슨 약초를 캔다고........”
어깨가 축 처진 두 사람을 보며 조우령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반노환동한 그들은 아프고 싶어도 아플 수 없는 사람들이다. 아니, 이미 괴물의 수준에 올랐다고 봐야 한다. 그런데 느닷없이 약초라니.
“오랜만에 중원으로 돌아와서 그런가........”
객잔을 향해 가고 있는 두 사람을 지켜보던 조우령은 이내 몸을 돌렸다.
다음날.
석두가 들어갔던 방에서는 작은 실랑이가 일어났다. 잘 자고 일어난 남궁미령이 밖으로 나가지 못하겠다고 한 것이었다. 간밤의 일 때문이었다.
팔십이 넘은 노인네가 객잔이 떠나가도록 소리를 질렀으니. 십년 전에도 최고 무공을 지녔던 도련님들이었고, 지금은 반노환동까지 해 버렸다. 그들이 전부 들었을 터인데 차마 얼굴을 볼 자신이 없었다.
“어젯밤에 할 말이 있다고 하지 않았소?”
“할 말? 맞다!”
그제야 북방으로 왔던 이유를 떠올린 남궁미령은 제 머리를 치며 소리쳤다.
“큰일 났어요. 천붕회가 위험해요.”
언제 그랬냐 싶게 남궁미령은 서둘러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신수가 훤합니다, 제수씨. 세상에 저 얼굴 좀 봐라. 완전히 새 색시구먼.”
식당에 도착하자마자 일휘는 두 사람을 향해 질시의 말을 쏟아냈다.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변할 수 있는지. 단지 하룻밤을 자고 나왔을 뿐인데 남궁미령의 얼굴에는 광채가 흘렀다. 오히려 나이 어린 수신가 여인들이 더 추레해 보였다.
“지금 장난칠 때가 아니다. 우리가 없는 동안에 심각한 일이 발생한 모양이다. 거기 형수님도 이쪽으로 오세요. 그리고 왕야도 오시지요.”
“형수? 헉!”
조우령을 향해 시선을 돌렸던 남궁미령은 짧게 비명을 내질렀다.
“그 이야기는 나중에 해줄 테니까 우선 당신이 가져온 소식부터 들어 봅시다. 너희들은 안 올 거냐?”
심드렁한 얼굴로 한쪽 구석에 앉아 있는 모사와 섯다를 석두가 불렀다. 그러나 한숨만 내쉬고 있을 뿐, 듣는 척도 하지 않았다.
“저 자식들 왜 저래?”
의아한 얼굴로 석두는 소살우를 보며 물었다.
중원에 도착하자마자 가장 좋아했던 녀석들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지금 표정을 보면 초상난 사람처럼 침울하기 그지없다.
“하여간 사내자식들이 쫀쫀해서는........”
자신과 남궁미령의 관계 때문에 삐졌다고 생각한 석두는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성능이 어쩌고저쩌고 했던 녀석들이라 간밤에 귀를 세우고 있었음에 분명하다. 내심 미안하기도 했다.
“그럼 그곳에서 들어.”
두 사람을 향해 짧게 말한 석두는 남궁미령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러니까, 그가 소림사에 나타나면서 시작됐어요.”
남궁미령의 입에서 중원의 상황이 하나둘씩 흘러나왔다. 백산을 만났던 일부터 시작하여 소림사에서 개최되었던 천붕회까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백산이 반역자로 지목되었고 천붕회에서 그를 잡으러 나섰다는 말까지 했다.
“그러니까 형님이 살아났단 말입니까? 분명히 백보신권과 용왕유권을 시전했고요?”
남궁미령의 말을 듣던 일휘가 모사와 섯다를 쳐다보며 놀란 얼굴로 소리쳤다.
“모사야, 들었냐? 너희들이 성공했단다. 형님을 다시 인간으로 만들었단다.”
반역자가 되었다는 말은 들리지도 않는지 일휘는 싱글벙글한 얼굴로 섯다와 모사를 향해 말했다.
“일휘 도련님! 그보다는 백산 사숙이 반역자가 되었다니까요?”
답답한 듯 남궁미령이 소리를 질렀다.
“뭐 그런 걸 가지고 놀라고 그러십니까. 한두 번 겪어 본 것도 아닌데. 그나저나 천붕회가 걱정이네. 공연히 형님 잡는다고 설치다가 된서리 맞지나 않았는지.”
“뻔하지, 뭐. 남궁무 그 자식 또 그랬을 거야. 난 자식보다 가문이 더 중요합니다. 그가 설사 묵안혈마 본인이라 해도 어쩔 수 없습니다. 가문을 살리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할 겁니다. 안 그렇습니까, 형수님?”
남궁미령의 말을 듣고 있던 소살우가 그녀를 보며 이죽거렸다.
“그건........”
남궁미령은 말문이 막혔다. 소살우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 동생은 분명히 그렇게 말했고, 지금쯤은 귀광두를 잡으러 출동했을 것이다.
“그럼 지금은 무림공적이 되었겠구먼. 하여간 그 인간은 지지리 복도 없어요. 어째 하는 일마다 그 모양이니?”
구석에 있던 모사가 낮게 쫑알거렸다.
“거지발싸개같이 타고난 걸 어떻하겠냐, 임마. 그나저나 어쩔 거요?”
모사의 말을 받은 섯다가 일행을 보며 물었다.
“어쩌긴 뭘 어째, 새꺄. 만일 형님 신상에 문제라도 생겼다면....... 과거고 나발이고 씨를 말려 버릴 거다.”
소살우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어렸다.
“하여간 성질머리하고는.”
소살우의 모습을 보며 모사는 나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형님으로 인정하기는 했지만 소살우의 마음속에서 백산은 여전히 아들인 소령이다. 아들을 걱정하는 아비의 마음이기에 딱히 할 말이 없다. 만일 그의 말처럼 백산 형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다면 천붕회 소속 문파는 살아남을 생각을 버려야 한다.
“걱정 마시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묵안혈마요.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는 괴물 말이오.”
“네 입으로 그랬잖아, 임마. 과거보다는 약할 거라고. 광혈지안은 될 수 없을 거라고.”
소살우는 빽 소리를 질렀다. 흑색지안 상태만 해도 천하제일인이라고 할 수 있다. 아니, 승천무극대혼진을 겪지 않았다면 아무런 걱정을 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승천무극대혼진에서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무극계란 이름으로 불리고 있는 곳. 그들의 무공은 엄청났다. 자신들이 반노환동을 하게 된 이유가 바로 무극계란 곳의 무공 때문이지 않았던가.
“우릴 북방으로 보낸 놈들. 그 새끼들이 누구라고 생각하는 거냐?”
소살우가 화를 내는 건 그 때문이었다. 승천무극대혼진은 이천 년 전에 구축된 진이지만 그곳을 알고 있는 자들이 강호에 있다. 그렇다면 결론은 한 가지. 자신들을 북방으로 보낸 놈들이 바로 무극계의 후예가 된다는 말이다.
“개자식들. 반역자 좋아하네. 오십 년 전 지들을 살려준 게 누군데. 황실이고 나발이고.......”
진득한 살기를 흘리던 소살우는 고개를 홱 돌려 주홍을 쳐다보았다.
“으음!”
소살우를 주시하던 주홍의 입에서 신음이 흘렀다. 전율적이었다. 분명 얼굴은 환하게 웃고 있다. 그런데 그 웃음을 대하는 순간, 온몸이 얼어버릴 듯한 충격이 머릿속을 강타했다. 옴짝달싹할 수가 없었다. 말로만 들었던 천붕십일천마의 힘을 다시 한 번 절감하는 순간이었다.
“하후장설이란 놈이 황실을 장악하고 있네. 그래서 반역을 시도했던 것이고.”
간신히 말을 꺼낸 주홍은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귀광두를 처음 만났을 때, 나이에 비해 유달리 눈이 깊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 이유를 비로소 알았다.
무슨 사연인지는 모르지만 그는 오십 년 전 천하제일인이었던 묵안혈마였다. 그런 자를 이융하려 했다니. 문득 등줄기가 축축하게 젖어 들었다.
“자네들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지금 난 마음이 편하네. 아니 기뻐서 고함이라도 지르고 싶네. 왠지 아나? 대의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내가 버렸던 하연일 귀광두가 구했을 것이기 때문이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요?”
소살우는 놀란 얼굴로 주홍을 쳐다보았다. 덥수룩하게 기른 수염과 추레한 얼굴 때문에, 왕야라는 말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런데 사람이 변한 듯, 주홍의 모습이 갑자기 커 보였다.
“도와달라는 말을 하고 싶네. 구차하게 명나라를 위해 힘이 되어 달라는 말은 하지 않겠네. 나를, 이 주홍을 도와줄 순 없겠는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주홍은 소살우를 직시했다. 잠시 두 사람의 눈싸움이 이어지고 주홍은 그 자리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 현 황제의 친동생이자 적룡왕이라 불렸던 자. 그가 자신들 앞에 무릎을 꿇었으나, 소살우 일행은 누구도 놀란 표정을 짓지 않았다. 무심한 얼굴로 그를 쳐다볼 뿐이었다. 잠시 주홍을 쳐다보던 소살우는 나지막이 말을 꺼냈다.
“난 지금껏 살아오면서 무릎을 꿇는 자들을 많이 보았소. 아니, 당신 같은 처지가 되면 대부분 무릎을 꿇습디다. 도와 달라고 하는 말도 똑같소. 그런데 말이오. 일이 끝나고 나면 무릎을 꿇었던 그들은 고개를 돌리고 모른 척합디다. 언제 내가 너에게 도움을 청했냐는 듯 안면을 까 버린단 말이오. 그리고 녀석은 상전이 됩니다. 제가 잘나서, 저 혼자 힘으로 모든 것을 이룬 것처럼 말이오. 나는 그런 거지같은 상황이 싫소이다.”
“내가 어떻게 하면 되겠는가!”
“한 가지만 물어봅시다. 황제가 되어서도 지금처럼 무릎을 꿇을 수 있겠소?”
‘저 인간이?’
환한 미소를 머금고 있는 소살우를 보며 모사는 화들짝 놀랐다. 수십 년 동안 소살우와 같이 생활했지만 그가 원하는 대답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하지만, 분명히 알 수 있는 건, 대답을 잘못하면 주홍은 이 자리에 뼈를 묻어야 한다는 것이다.
“꼭 대답을 듣고 싶은가?”
“듣지 않아도 상관없소. 당신을 죽이고 떠나면 그만이니까. 묵안혈마 백산을 이용한 사실만으로도 내가 당신을 죽일 이유는 충분하오. 그는 내 삶이자 생명이오.”
“좋네, 대답하지. 만인이 보는 앞에서라면 무릎을 꿇지 못하네. 하지만 단둘이 있는 곳이라면 내 무릎은 언제라도 구부러질 걸세. 그게 내 대답이네.”
말을 마친 주홍은 눈을 감았다. 천자의 자리. 아무에게나 무릎을 꿇어서는 안 되는 자리다. 황권이 약해졌기에 하후장설과 같은 자가 나왔고, 백성들이 핍박받고 있다. 황제는 누구보다 강해야 한다는 생각은 어린 시절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이들의 도움을 받기 위해 신념을 거스를 수는 없는 일이다.
“좋소이다. 도와주겠소이다. 하지만 큰 기대는 하지 마시오. 팔십이 넘은 노인네들이니까 오랫동안 돕지도 못할 거요. 저 새끼들을 데리고 가시오.”
“이거 왜 이러쇼! 가고 싶으면 형님이나 가시오. 우린 지금부터 백산 형님을 찾으러 갈 거란 말이오.”
소살우가 자신들을 가리키자 모사는 정색하며 소리쳤다.
“황실에 가면 좋은 약이 많이 있다고 하더라. 들리는 말로는 불구를 치료하는 약도 꽤 있다는 것 같던데. 석두 형님, 안 그렇소?”
“맞다. 나도 승에게 들었는데 내시들이 복용하곤 했다고 하더구나. 불구를 치료하는 데는 왓다라고 하더라.”
“싫소, 그래도 안 갈라오. 이 나이에 무슨 영화를 볼 거라고 그 시궁창으로 간단 말이오. 차라리 지금처럼 사는 게 낫소.”
소살우와 석두가 계속하여 종용을 했지만 섯다와 모사는 고개를 흔들었다. 마지막 수단으로 생각한 춘약을 시험해 보지 못했던 탓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의 거절은 거기까지였다.
“어제 온천에 검은 쥐 두 마리가 나타났다고 하드만. 그런데 그 쥐들이 방귀를 뀌면........”
“아버님, 그게 무슨 말이죠?”
“씨팔 것들이 귀는 밝아서는!”
낮게 욕설을 뱉어낸 두 사람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뭐 하쇼, 갈 준비 안 하고?”
“지금 떠나잔 말인가?”
오히려 놀란 사람은 주홍이었다. 도와 달라는 말을 하기는 했지만 지금 당장 떠나자고 할 줄은 몰랐다.
“노망난 것들하고 같이 있어 봐야 더 이상 나올 것도 없는데, 지금 가야 할 것 아뇨.”
“우린 소림사에 있을 테니까 그곳으로 와라. 내가 요정을 꼬셔서 밤톨 두 알 얻어 놓을게.”
도망치듯 객잔을 나서는 두 사람의 등 뒤에 대고 소살우는 쾌활하게 소리쳤다.
“에라, 이 도둑놈들아!”
“훗!”
멀리서 들려오는 모사의 고함소리에 조우령은 낮게 웃음을 흘렸다. 지금껏 같이 오면서 느낀 거지만 이들을 보고 있으면 팔십대 노인이란 생각이 들지 않는다. 티격태격하는 모습이 마치 동네 개구쟁이들을 보는 듯했다.
“참, 아버님! 조금 전에 정말 그를 죽이려고 하셨어요?”
“당연히 죽이려고 했지. 저런 자들과 적이 되면 뒷감당을 못하거든. 그럴 바에아 차라리 이곳에 묻어 버리고 가는 게 낫지.”
“그러다 정말 황제가 되면 어쩔래?”
어이없다는 듯 소살우를 쳐다보던 석두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정말로 소살우는 주홍을 없애 버리려 했다. 만일 그가 자신이 아닌 명나라를 위해 도와 달라고 했더라면 뒷말은 해볼 기회도 없었을 것이다. 주홍이 황제가 되고 싶다고 정직하게 말했기에 살아서 나갔다고 봐야 한다.
“어쩌긴, 그랬더라면 난 반역자를 없앤 충신이 되는 거지.”
손을 들어 올린 소살우는 목을 긋는 시늉을 하며 싱긋 웃었다.
“아가야, 만두 다 됐겠다.”
“맞다!”
화들짝 놀란 조우령은 주방을 향해 달음질쳤다. 그동안 말로만 주워들었던 만두를 처음 찌는 날이었던 것이다.
“만두 만드는 법은 또 언제 가르쳤냐?”
“오다가 심심해서 가르쳤지. 뭐, 그래도 형님이 가장 좋아하는 건 만두 아뇨.”
“미친 새끼. 아들이란 말을 하든지 아님 형님이란 말을 말든지 하여간 여러모로 사람 헷갈리게 만들어.”
“또 어딜 가는 거요? 오랜만에 만나서 급한 건 알겠는데 며늘아기가 만든 만두 시식은 하고 가쇼.”
“형님은 식은 만두를 좋아했다는 것도 몰라? 남겨 둬, 임마.”
“젠장, 나도 새장가를 가든지 해야지. 나이 생각도 좀 하고 살아. 젊은 애들도 아니고 새벽부터........”
두 사람을 향해 소리치던 소살우는 찔끔하며 입을 닫았다. 갑자기 남궁미령이 도끼눈을 뜨고 쳐다보았던 것이다.
“아버님, 만두 가져왔습니다.”
“그, 그래! 어디 맛좀 볼까? 너도 앉아서 먹자.”
“네!”
조우령은 긴장된 얼굴로 소살우를 쳐다보았다. 태어나서 처음 만들어 본 음식. 수십 번에 걸쳐 들었던 대로 만들었지만 어떤 맛이 나올지는 알 수가 없다.
“어떻습니까?”
“음! 일단은 합격이다. 아주 좋아. 그런데 말이다, 방금 그 인간들 너도 봤지?”
“네!”
조우령은 얼굴을 붉혔다. 주방에서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부부 관계를 하러 간다고 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부부란 저렇게 살아야 한다는 말이다. 겉모습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서로를 생각하고 위해 주는 마음이 있으면 행복은 저절로 따르는 게 가정이란 말을 하고 싶구나.”
“무슨 말인지 잘 알겠습니다.”
“굳이 강요하지는 않을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거라. 우린 다만 너희들을 도울 핑계가 필요했을 뿐이다. 준비들 시켜라. 오늘부터는 조금 빨리 움직이도록 해보자. 만두는 맛있게 잘 만들었다. 남은 것은 따로 담아서 가져오도록 해라.”
“식으면 맛이 없을 텐데요.”
“참! 그 말을 안 했구나. 그 인간은 식은 만두만 먹었다. 천영 형수님과 가졌던 마지막 만찬에서 먹었던 음식이 식은 만두였거든. 그런데 그 멍청한 인간이 물을 준비 못했다는 거야. 그래서 제 입으로 만두를 씹어서 먹여 주었다고 하더라. 식어 빠진 만두를 말이다.”
“알겠습니다.”
조우령은 고개를 숙였다. 그에 대한 말을 들으면 자꾸만 눈물이 쏟아질 것 같다. 어떤 사람이기에, 도대체 얼마나 부인을 사랑했기에 음식마저 가렸을까 하는 생각과 함께, 그런 사랑을 받아보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다.
[너 언제까지 형수님을 세뇌시킬 거냐?]
딴청을 부리던 일휘가 소살우를 향해 전음을 보냈다. 지금껏 곁에서 소살우를 지켜보았다. 처음에는 소살우를 도와 백산의 처절했던 삶을 이야기하곤 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럴 필요가 없었다. 소살우 혼자만으로도 차고 넘쳤던 탓이었다.
오히려 다섯 명이 하는 것보다 소살우 혼자 이야기하는 것이 더한 감동을 주곤 했다.
소살우가 이야기하는 방식은 참으로 놀라웠다. 아니, 절묘하다고 해야 했다. 일상적인 대화처럼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어떤 계기가 주어지면 느닷없이 백산의 이야기를 꺼내 조우령의 감성과 모성을 한껏 자극한다. 지금처럼.
아마 조우령은 주방에서 눈물을 찍어내고 있을 것이다.
[세뇌는 무슨. 사실 그대로 알려 주고 있을 뿐이구먼. 지금까지 거짓말한 적은 한 번도 없었소. 형님의 삶이 지랄 맞아서 그런 거지.]
소살우는 싱긋 미소를 머금었다. 실상 적절한 순간을 포착하여 조우령의 심성을 자극하는 건 있지만 거짓을 말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지금껏 얘기했던 모든 것들이 전부 백산의 삶이었다. 그의 처절한 삶에 감동 받고 우는 사람이 조우령이다.
[그리고 저 종도면 최고의 며느릿감 아니오? 시아버지 입장에서는 당연한 거니까 신경 쓰지 마시오. 형님도 장가가서 자식을 낳아 보면 내 심정을 알게 될 거요.]
[에라, 이 도둑놈아!]
[참! 마음에 드는 처자는 없었소?]
[왜? 장가라도 보내 주려고?]
[당연히 보내 줘야지. 이번에는 내가 무릎을 꿇어서 형님 장가보내 줄 테니까 마음에 드는 처자가 있으면 망설이지 말고 말하시오.]
[노망났다고 욕한다, 임마. 장가는 무슨....... 근데 수신가 여자들 예쁘기는 하더라.]
[어이구, 언제 그것까지 봤소? 목석인 줄 알았더니 제법 여자도 보이긴 하는 모양이네? 마음에 드는 아이라도 있소?]
놀란 얼굴로 일휘를 보던 소살우는 주방을 흘끔거리며 전음을 보냈다.
[씨팔, 나도 남자다, 새끼야. 오른쪽 다리만 있었어도 진작....... 조옥상이라고 하던데.]
[몸매 빵빵한 애? 나이가 몇인데?]
[내가 그것까지 어떻게 아냐, 임마. 개만 보면 가슴이 벌렁벌렁 뛰어.]
[목도 바싹바싹 타지? 얼굴 못 보면 몸에 힘도 없는 것 같고?]
[그걸 어떻게 아냐?]
[어떻게 알기는, 내가 겪었던 일이니까 그러지. 좌우간 형님은 큰일 났소. 그건 약도 없는 병이오.]
일휘를 빤히 쳐다보며 소살우는 빙그레 웃었다. 우습게도 일행 중 가장 먼저 여자에게 빠진 사람은 일휘가 되었다.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형님은 가만 계시오.]
“아가, 잠깐 이리 와 봐라!”
[너 무슨 말을 하려고 그래, 임마!]
소살우가 조우령을 부르자 일휘는 질겁한 얼굴로 전음을 보냈다.
“네, 아버님!”
일휘의 짐작대로 주방에서 많이 울었는지 눈이 충혈된 조우령이 두 사람 곁으로 다가왔다.
“다른 게 아니고, 왜 조옥상이란 아이 있잖아.”
[살우, 너 죽을래?]
급기야 일휘의 얼굴이 해쓱하게 변했다.
[주둥이 닥치고 듣기나 하쇼]
“그 아이를 눈여겨봤는데 자질이 출중한 것 같더구나.”
“네?”
조우령은 놀란 얼굴로 소살우를 보았다. 조옥상은 그녀도 잘 아는 아이였다. 나이에 비해 조숙한 것을 빼면 그다지 뛰어난 아이가 아니다. 해서 상승무공조차 가르치지 않았다. 그런 아이에게 자질이 출중하다니.
“그 아이는 별로.......”
“그건 네 판단이고 우리가 보았을 땐 최고였다. 제자로 키우고 싶을 정도로 말이다.”
“정말이십니까?”
“날 실없는 사람으로 만들 참이냐?”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놀란 눈으로 소살우를 쳐다보던 조우령은 연신 고개를 숙였다. 부탁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들에게 너무 부담을 주는 것 같아 차마 말을 하지 못했다. 그런데 무공을 가르쳐 주는 것만 해도 고마운데 수신가의 아이를 제자로 삼겠다니.
“고맙다는 말은 일휘 형님에게 해라. 옥상에게 무공을 가르칠 사람은 저 형님이니까.”
“감사합니다.”
누군들 어떠하랴. 조우령은 일휘를 향해 몇 번이고 고개를 숙였다.
“참! 조옥상 그 아이에게는 비밀로 하는 게 좋겠다. 부담이 크면 무공 익히는 게 힘들어지니까.”
“알겠습니다, 아버님. 곁에서 수발드는 걸로 하겠습니다.”
“그럼 되겠구나. 어차피 한쪽 다리가 없는 병신이니까. 그런데 옥상 그 아인 올해 몇이냐?”
“이제 열여섯 살로 알고 있습니다.”
“헉! 저런 도둑놈 새끼 봤나!”
소살우는 저도 모르게 욕설을 뱉어냈다.
“아버님!”
“아니다. 잠시 딴생각을 했구나.”
일휘를 향해 눈을 부라린 소살우가 재빨리 손을 내저었다.
[에라, 이 도둑놈아! 아무리 장가를 가고 싶어도 그렇지, 열여섯이 뭐냐! 천벌을 받을 거다, 도둑놈아!]
[나도 몰랐다고 했잖아, 임마!]
얼굴이 벌게진 일휘가 소살우를 향해 소리쳤다. 지긋한 나이는 아닐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 열여섯밖에 되지 않을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하여간 소원대로 해줬으니 알아서 하쇼.]
“그만 가자꾸나.”
어쩔 줄 몰라 하는 일휘를 쳐다보던 소살우는 재빨리 객잔을 나섰다.
“석두 아직 안 나왔잖아!”
어색함을 모면하기 위해 일휘는 소리를 질렀다. 방으로 들어간 두 사람이 나올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어지는 고함소리에 일휘 또한 재빨리 객잔을 나서고 말았다.
“오입하는 것들은 냅두고, 우리끼리 간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
잘읽었습니다
즐감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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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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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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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
잘 보고 갑니다. 감사 합니다..............................................
재미 있게 읽고 갑니다
항상 건강 하고 행복 하세요
감사 하고 사랑 합니다
잘보고갑니다
감사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0^
감사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