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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풍무(145)
[오십 년이 걸렸다.]
중원은 투쟁의 역사를 가진 곳이다. 수많은 민족들이 어울려 살기에 강성한 부족이 나타나면 어김없이 그들은 중원의 주인이 되었다.
까닭에 중원을 차지한 자들이 가장 경계하는 사항은 외세의 발호다.
황실은 물론 무림마저도 외세의 발호에 예의주시하고 있다.
그러다가 강성한 변방 세력이 나타나면 정사 구분 없이 하나로 뭉쳐 그들을 정벌하군 했다.
오십 년 전까지는 분명 그렇게 했었다.
하지만 귀마겁 이후 지리멸절한 중원 무림은 변방을 살필 겨를이 없었다. 파괴된 강호 무림을 건설하는 일만 해도 벅찼던 것이다.
중원무림에서 북황련과 남천벌이 한참 태동하기 시작한 비슷한 시기에 변황 무림에서도 세력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대막 천화궁, 신강의 악마사원, 서역 소뢰음사, 남해의 지옥군도, 일명 변황사패천이라 불리는 네 곳이었다.
전장 삼십 장, 다섯 개의 돛대, 삼 층 선실, 좌우에 포진해 있는 이십 문의 철포, 그리고 돛대 끝에 매달린 흰 태양이 수놓아진 검은 깃발.
수많은 산호초로 이루어진 섬 사이에 정박한 배는 위압적이었다. 선수의 거대한 거북 머리의눈에서는 금방이라도 광망이 쏟아져 나올 것 같다.
남해의 제왕 또는 바다의 학살자라 불리는 이 배는 현무호(玄武號)란 이름으로 불리고 있었다.
“어서들 오시오!”
선실 최상층에서 청삼을 걸친 중년인이 방금 들어선 세 사람을 환한 미소로 맞았다. 언뜻 보기에 왜소해 보이는 이자가 현무천가의 장자이자 남해 지옥군도의 수장인 풍제(風諸) 단목사우(端木獅宇)였다.
“도주를 뵈오이다!”
어깨가 훤히 드러난 짧은 단삼을 걸친 삼 인이 그 자리에 무릎을 꿇으며 우렁차게 외쳤다.
“반갑소. 그래 진전은 있었소? 참! 앉으시오.”
여전히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단목사우는 말했다.
“도주님 덕분에 완성했습니다.”
어깨가 드러난 단삼을 걸친 건장한 인물이 단목사우를 향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커다란 도를 허리에 차고 있는 그는 해왕도(海王刀) 청리양(靑鯉陽)으로 해풍막(海風幕) 막주였다.
“두 분은........?”
단목사우는 시선을 돌려 두 사람을 보았다. 그들은 폭풍막과 혈풍막을 이끄는 폭풍창(暴風槍) 갈세안(葛世安)과 마경권(魔鯨拳) 제안중(諸雁中)이었다.
“소신들로 완성했습니다!”
두 사람 역시 청리양과 마찬가지로 공경한 얼굴로 대답했다.
“수고들 하셨소. 이제 귀환하도록 하시오.”m
“도주님!”
삼 인은 감격스런 얼굴로 머리를 숙였다.
지옥군도는 중원 최남단에서 활동하는 해풍막(海風幕)과 남해군도 부근에서 활동하는 폭풍막(暴風幕), 그리고 해남도와 대만 부근에서 활동하는 혈풍막(血風幕)으로 구성되어 있다.
지금껏 십수 년간 활동하던 근거지를 떠나 남해군도로 귀환하란 말은 중원 진출이 임박했음을 의미한다.
삼 인이 감격해 하는 이유였다.
“그렇소. 우리 지옥군도의 활동 무대를 장강과 황하로 옮길 예정이오. 그전에 해야 할 일이 있소이다.”
“하명하십시오, 도주님!”
“광혈지옥비가 바다로 들어왔다고 하오.”
“광혈지옥비가 나타났단 말입니까?”
삼 인은 놀란 얼굴로 물었다.
“그렇소. 그대들이 무공에 전념하고 있는 사이에 중원은 광혈지옥비로 몸살을 앓았소.”
단목사우는 그간 수합된 정보를 바탕으로 중원에서 일어났던 일을 상세하게 설명했다.
“세상에....... 묵안혈마란 말을 믿으십니까?”
청리양은 경악한 얼굴로 소리쳤다. 광혈지옥비의 출현만 해도 엄청난 일이거늘 묵안혈마라니.
“본인 입으로 직접 묵안혈마라고 하는데 믿어야 하지 않겠나. 그런데 묵안혈마가 대단하기는 했나 보구먼. 자네들까지 입을 다물지 못하는 것을 보면 말이네.”
단목사우는 삼 인을 쳐다보며 빙그레 웃었다. 광혈지옥비란 말에도 그리 놀란 얼굴을 하지 않았던 이들이 묵안혈마란 한마디에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다.
중원 무림인도 아니고 변황 무림인인 그들이.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지옥군도가 세워질 수 있었던 이유가 그들 때문이었으니까요.”
청리양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실상 따지고 보면 지옥군도를 비롯한 변황사패천의 오늘이 있게 한 장본인들이 바로 천붕십일천마다. 그들이 무림을 초토화시키는 바람에 중원 무림인의 감시가 느슨해졌고, 그 기회를 틈타 변황 무림은 성장했던 것이다.
“그런데 도주님은 정말로 묵안혈마라 생각하십니까?”
청리양은 의아한 얼굴로 단목사우를 보며 물었다.
“내가 그를 묵안혈마 본인이라 믿는 이유는 간단하네.”
“무슨?”
청리양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강자이기 때문일세. 천하를 향해 전쟁을 감행할 정도로, 묵안혈마라는 이름을 뛰어넘을 정도의 강자 말이네.”
“그렇다 해도.......”
청리양은 말끝을 흐렸다. 단목사우의 말을 듣고 보니 그럴싸했다. 남들이 어떻게 말하든 귀광두는 이미 천하제일인이 되었다.
그런 그가 중원 무림을 향해 묵안혈마 본인이라며 떠들 필요가 없다.
오히려 묵안혈마보다 더 뛰어난 무인으로 기억되려고 해야 하지 않겠는가.
“뭐, 그가 묵안혈마 본인인지 아닌지는 중요한 게 아니오.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천하제일인이 된 그가 바다로 도망을 쳤다는 사실이오. 우리 지옥군도가 장악하고 있는 바다로 말입니다.”
“그렇군요, 광혈지옥비를 원하십니까?”
고개를 끄덕인 청리양은 단목사우를 직시하며 물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갈세안과 제안중 역시 잔뜩 긴장한 얼굴로 단목사우를 주시했다.
청리양의 말은 단순한 물음이 아니었던 탓이다.
천하제일인이 되겠냐는 간접적인 물음이었다. 용황신가를 넘어서겠냐는 물음.
“허허! 자네들이 내 얼굴에 금칠을 하려는가. 내가 광혈지옥비를 가질 자격이나 있던가.”
“광혈지옥비의 주인으로 어울리는 분은 제가 알기론 도주님밖에 없습니다. 도주님이 원하신다면 목숨을 걸겠습니다.”
청리양이 확신하듯 말했다.
십 년 전이었다면 결코 지금과 같은 말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 그를 향해 고개를 숙이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난 십 년 동안 자신은 물론이고 두 동생마저 변화시킨 사람이 단목사우다.
그는 지옥군도를 가족으로, 형제로 대했을 뿐 지배하지 않았다. 수많은 무공비급과 영약이 그의 손을 거쳐 지옥군도의 수하들에게 지급되었다.
자신들 또한 그가 전해 준 무공을 익혔고, 과거보다 세 배 이상 강해졌다. 더불어 지옥군도의 힘 또한 과거에 비해 몇 배 강해지게 되었다.
단목사우를 진심으로 따르게 된 이유였다.
“아직은 목숨을 걸어야 할 때가 아니라는 건 자네들도 알지 않는가.”
“그럼, 광혈지옥비를 용황신가에 넘기겠다는 말이십니까?”
청리양은 재차 물었다.
“그럴 순 없겠지. 아깝기는 하지만 수장시켜야지 별수 있겠는가.”
“알겠습니다, 도주님!”
삼 인은 단목사우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기회가 올 때까지 힘을 기르며 기다리겠다는 말이다. 언제까지나 용황신가의 하수인으로 살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어선으로 위장한 정찰선을 전부 내보내도록 하게. 그리고 그의 행적이 발견되더라도 섣부른 공격을 해서는 안 되네. 그가 묵안혈마 본인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일을 추진하도록 해야 하네.”
“존명!”
고개를 숙인 세 사람이 밖으로 나갔다.
“묵안혈마, 당신은 나의 우상이었소. 내 아버지보다 당신을 더 닮고 싶었소이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오. 당신을 닮도록 최선을 다 할 것이오. 당신이 죽더라도.........”
어선으로 위장한 백여 척의 정찰선이 바다로 나가는 모습을 지켜보며 단목사우는 중얼거리듯 말했다.
잠룡(潛龍).
현무천가의 장남인 단목사우는 승천하기 위한 비를 기다리는 용(龍)이었다.
바다는 참으로 여러 모습이다.
때로는 호수처럼 잔잔하고, 때로는 일 장 높이에 달하는 파도를 만들어 위협하기도 한다.
아침볕을 받은 바다는 물감을 풀어놓은 것처럼 붉디붉고, 달이 비추는 밤이면 바다는 은빛 광채로 눈이 부시다.
“오늘은 안개네?”
이른 새벽 선실을 나온 주하연은 수면을 뿌옇게 채운 안개를 보며 환한 미소를 머금었다. 아무리 보아도 물리지가 않는 것이 꼭 백산과 닮았다.
“하연아!”
뒤에서 설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언니, 저것 좀 봐. 예쁘지, 그치?”
환하게 웃으며 주하연은 전면 안개를 가리켰다. 수면으로부터 뭉클거리며 솟아오르는 안개는 보면 볼수록 신기했다.
“예쁘네. 그런데 너 물고기 가지러 간다고 하지 않았어?”
안개 가득한 바다를 쳐다보던 설련이 웃으며 말했다.
“맞다. 아침 준비하다가 나왔지.”
자신의 머리를 툭툭 친 주하연은 수면을 향해 양손을 빠르게 뿌렸다. 물속으로 들어가 있는 유몽을 부르는 방법이었다.
“부르셨습니까?
“고기는 많이 잡으셨어요?
고개를 불쑥 내민 유몽을 향해 주하연은 환하게 웃으며 물었다.
“보십시오.”
싱긋 미소를 머금은 유몽은 기다란 줄을 배 위로 던졌다.
“어부가 다 됐네요.”
꼬치 꿰듯 아가미가 꿰인 십여 마리의 물고기를 보며 슬쩍 미소를 물었다. 처음 바다로 들어갔을 때와는 천양지차였다.
반 시진도 채 되지 않아 수십 마리의 물고기를 건져 올리고 있다.
“주공은?”
“다 나았어요. 지금 신개 할아버지와 말씀 나누고 있어요. 들어가 보세요.”
“알겠습니다. 그럼 수고하십시오.‘
두 사람에게 고개를 숙인 유몽은 선실로 향했다.
“그러니까 그놈이 너를 안다고 했다는 말이냐? 귀광두가 아닌 묵안혈마를 알고 있다고?”
파면신개는 놀란 얼굴로 소리를 질렀다.
지금 두 사람은 호연작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먼저 말을 꺼낸 사람은 백산이었다. 소림에서 호연작이 했던 말이 마음에 걸렸던 까닭이었다. 그는 자신이 묵안혈마임을 믿는다고 했다. 아니, 백산임을 믿는다고 했다.
“신가의 후예는 아닌 것 같은데........”
백산은 말끝을 흐렸다. 오신가의 후예였다면 광혈지옥비가 인식했을 것이다. 하지만 호연작에게서는 어떤 기운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그랬었군. 장중도 녀석과 한통속이었어. 이 죽일 놈을!”
파면신개는 부르르 몸을 떨었다. 후개로 선출되었던 장중은 어느 날 갑작스럽게 부각된 인물이었다. 그것도 호연작에 의해.
“개방이 걱정이군요. 어찌될지.”
백산은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개방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은데.”
“왜?‘
광치를 돌아보며 백산은 물었다. 천붕십일천마에게 원한이 있는 자가 개방 방주를 하고 있다면 개방의 미래는 뻔하다. 그런데 걱정하지 말라니.
“놈이 가진 유일한 세력이기 때문에 없앨 수 없다는 거지.”
“그렇겠군.”
광치의 말에 파면신개는 고개를 끄덕였다. 남궁세가나 하북팽가까지 목표로 두었다면 호연작은 개방의 힘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어야 한다. 그가 개방을 정리할 시기는 천붕회가 완전하게 사라진 다음이 될 것이다.
“그보다 몸은 어때?
“몸? 똑같지, 뭐. 일단 육지에 닿아야 운기행공을 해 보든지 하지.”
백산은 어색한 얼굴로 말했다.
며칠이 지났지만 몸 상태는 변화가 없다. 나아지지도, 그렇다고 악화되지도 않은 채, 내상 당한 상태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몸에 대해 말하지 않은 게 있는지 생각해 봤어?”
“전부 다 했어, 임마. 상단전을 이용해서 단전을 비롯하여 각 장기들, 그리고 심장까지 전부 치료했어. 뛰는 것도 확인했....... 심장!”
말을 이어가던 백산은 느닷없이 소리쳤다. 몸에 나타난 증상을 전부 말했다고 생각했었는데 한 가지가 빠졌던 것이다.
“심장? 잘 뛴다고 했잖아?”
“물론 밖에서는 잘 뛰지. 그런데 물속에서는 안 뛰어. 다른 장기들도 마찬가지고.”
“그러니까 물속에서는 여전히 강시와 같은 상태라는 거냐?”
“그랬던 것 같아.”
“그걸 왜 이제 말해, 임마!”
광치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머릿속이 환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상단전을 이용하여 모든 기능을 살렸다고 했지만 그것은 절반에 불과했다.
“대장, 네 머리 때문이다.”
“그럼?”
“다시 물속으로 기어들어 가야지.”
“될까?”
백산은 의심스런 얼굴로 물었다. 다른 장기들처럼 머리는 죽어 있지 않았었다. 관 속에 들어가 있던 십 년을 제외하면 항상 깨어 있지 않았던가. 그런데 그곳을 치료해야 한다니.
“글쎄, 그건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아니니까. 일단 시도를 해 보지 그래?”
“알았다.”
자리를 털고 일어난 백산은 선실을 나왔다.
“오빠, 먹고 싶은 거 있어요?”
고기를 들고 주방으로 가던 주하연이 백산을 발견하고 물었다.
“볼일 좀 보고!”
싱긋 미소를 문 백산은 주하연과 설련을 향해 손을 흔들더니 바다로 뛰어들었다.
“정지하라!”
백산이 뛰어들자마자 광치는 선저를 향해 고함을 질렀다.
“오라버니?”
영문 모를 얼굴로 설련이 광치를 불렀다.
“치료하러 들어갔다.”
“배고플 텐데 아침이라도 먹고 가지.”
설련은 백산이 들어간 바다를 보며 걱정스런 얼굴로 말했다.
“물속에 들어가면 먹을 것 천진데 뭘 걱정하냐? 오늘은 무슨 고기를 잡았나.”
주하연의 손에 들린 고기를 보며 광치는 호들갑을 떨었다.
하지만 주하연은 광치를 보고 있지 않았다. 방금 백산이 들어간 물속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배고플 텐데.......”
“어이구, 장가 못간 놈 서러워서 살겠나.”
주하연의 손에서 생선을 받아 든 광치는 툴툴거리며 주방으로 향했다.
물속으로 뛰어든 백산은 천천히 해저로 가라앉고 있었다. 수면을 가득 덮은 안개 때문인지 물속은 깜깜했다.
얼마나 내려갔을까. 오십여 장 정도 내려왔다고 생각한 순간 딱딱한 지면이 발에 닿았다.
‘머리라........’
내심 중얼거린 백산은 그 자리에 가부좌를 틀고 눈을 감았다.
잠시 후, 그의 머릿속에는 완연한 모습을 보이는 인체도가 나타났다. 각각의 장기들을 찬찬히 짚어 가던 백산의 심안(心眼)에 머리가 잡혔다.
‘그랬군.’
씁쓸하게 웃었다. 완전하게 자신의 몸이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백회혈을 제외한 나머지는 대부분 검은색이었다.
‘응?’
한참 동안 머리를 향해 생기를 밀어 넣던 백산은 의아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검은 탁기가 빠져나가며 제 색을 찾아야 할 머리는 어떤 변화도 보이지 않았다.
잘못했나 싶어 다시 한 번 생기를 밀어 넣어 보았다. 하지만 결과는 같았다. 애당초 머리는 강시 상태가 아니었기에 당연한 결과인지도 몰랐다. 결국 생기를 이용한 치료는 효과가 없다는 말이 된다.
‘그럼?’
실망한 얼굴로 백산은 인체도를 주시했다. 딱히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운기행공으로도 치료되지 않았던 곳이 머리가 아니었던가.
‘저곳은 왜 더 검지?’
머릿속을 하나씩 더듬던 백산은 일순 놀란 얼굴을 했다. 다른 곳에 비해 유독 검은색을 띤 곳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뇌호혈? 설마, 기억이란 말인가!’
백산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기억의 중추라는 뇌호혈, 문제는 그곳에 있었다. 과거의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뇌호혈은 죽어 있다. 결국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것들은 영혼의 기억에 불과했을 뿐이었다.
‘빌어먹을!’
내심 욕설을 뱉어냈다. 버리고자 했던 과거 때문에 몸이 망가지고 있었다. 영혼은 과거를 기억하고 있지만 소령의 몸은 백산의 과거를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완전한 백산으로 거듭나기 위해선 어린 시절부터 하나씩 되짚어야 한다.
그 빌어먹을 과거를.
‘해야 한다면.’
이내 표정을 다잡았다. 설련과 주하연을 위해 몸을 정상으로 만들어야 한다. 처절했던 그 삶을 다시 떠올리고 몸이 기억하도록 해야 한다.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힌 백산은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사냥을 나갔다가 돌아왔을 때 보았던 마을의 광경.
마을 사람들을 찢어발기던 혈랑 떼와 그런 혈랑을 무심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던 무림인들.
혈랑 떼의 움직임을 좇던 백산은 어느 순간 질식할 듯한 살기를 쏟아 냈다. 어머니였다. 도망치는 어머니를 향해 커다란 혈랑 한 마리가 달려들고 있었다.
‘안 돼!’
백산은 저도 모르게 고함을 질렀다. 그리고 곁에 서 있는 아버지를 불렀다. 어머니를 구해 달라고, 어머니를 구해야 한다고 울부짖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움직이지 않았다. 자신의 손을 틀어쥔 채 혈랑의 먹이가 되고 있는 어머니의 마지막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힘이 없었기에, 아니 바로 곁에 자식이 있었기에 당신은 움직이지 않았다. 혈랑 떼가 겁나서가 아니었다. 쏟아지는 비를 튕겨 내는 무인들. 우막을 만들고 서 있는 무인들이 있었기에 아버지는 활을 쏘지 못했다.
마을 사람들이 전부 혈랑에게 도륙당한 다음에야 아버지는 마을로 들어갔다. 그러고는 한 줌도 되지 않는 어머니의 흔적을 모아 무덤을 만드셨다.
어머니의 무덤을 만들고 무림 문파를 찾아 세상을 떠돌았던 기억. 자식에게 무공을 가르치기 위해 그들에게 무릎을 꿇었으나 어느 한 곳 받아 준 곳이 없었다.
그랬던 그분이 무림인들에게 살해당하여 마령호의 먹이로 던져졌다.
과거로 돌아간 백산은 자신을 잊고 시간을 잊었다.
복수를 위해 만상투인루의 생사투인이 되었던 일과 부인이었던 조천영을 만났던 사연들.
그 사연들 속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때로는 환하게 미소를 짓는가 하면, 때로는 살을 엘 듯한 살기를 토해 냈다.
검은색이었던 뇌호혈이 점차 본래의 색을 되찾아 가고 있다는 사실도 백산은 알지 못했다.
광혈지옥비를 통해 천지간의 기운이 흘러드는 것도 알지 못했다.
“으아아!”
물속이라는 사실도 잊고 백산은 처절한 고함을 내질렀다. 소령을 보았다. 천영의 품에 안겨 있던 소령은 숨을 쉬지 않고 있었다.
아비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 버린 아이.
젖을 떼지도 못했던 아이였다. 이제 막 아비를 알아보기 시작한 아이였다. 그런데 먼저 가 버렸다.
그런 소령을 안고 천영은 울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손끝만 스쳐도 바로 터지고 마는 광천뢰 수십 개가 그녀와 추렴의 발밑에 있다.
결국 자살을 택했다. 동생들에게 미안하고, 혼자 남겨질 소운에게 미안했지만 그럴 수밖에 없었다.
“죽여 버린다! 전부 죽여 버린단 말이다!”
일순 감고 있던 눈이 번쩍 떠졌다. 백산의 눈에는 핏물이 가득했다. 광혈지안의 혈안이 아닌 핏물로 범벅인 혈안이었다. 물결을 따라 흘러가는 피를 바라보던 백산의 몸이 천천히 떠올랐다.
열두 자루의 광혈지옥비에서 천력이 흘러들었다.
그의 몸에서 흘러나온 붉은 광채가 먹물처럼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하지만 백산은 자신의 몸에 이는 변화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저 물살을 따라 흘러가는 핏물을 주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몸 주변을 둥글게 에워쌌던 혈광이 어느 순간 우담화로 변했고 그 우담화가 개화하여 만다라가 되었음에도 백산은 알지 못했다.
소령의 죽음이, 천영의 죽음이, 추렴의 죽음이, 소운의 죽음이, 그리고 형제들의 죽음만이 머릿속을 헤집고 다녔다.
“놀랍군. 묵안혈마의 진정한 힘이 저 정도인가?”
소용돌이치는 바다를 바라보며 광치는 감탄한 얼굴로 말했다. 물속에서 이는 변화로 백산의 상태를 짐작할 수 있다.
몸도 마음도 파멸안이 된 백산은 더 이상 피를 토하지도 않을 것이고 힘겨워 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이제 완전한 묵안혈마가 된 것이다.
“동생, 겨울에도 고기가 많이 잡히는가 보네.”
당연하다는 얼굴로 물속을 바라보던 유몽이 멀리어선을 가리키며 물었다. 지금껏 보지 못했던 배들이 심심찮게 목격되곤 했던 것이다.
“강에서만 산 제가 알리 있습니까. 고기가 많은가 보지요.”
대수롭잖게 광치는 말을 받았다.
바다에 어선이 있는 건 당연한 일이라 여겼을 뿐 별다른 의미를 두지 않았다.
하지만 그 배들이 단순한 어선이 아니라는 것을 광치 일행은 알지 못했다.
남해군도에서 떠나온 지옥군도의 정찰선이었다는 사실을.
“여기가 북경이란 말이지? 여길 밟는 데 오십 년이 걸렸다니........”
밤을 잊은 듯 환하게 밝혀진 북경 밤거리를 보며 모사는 비틀린 웃음을 토했다. 오십 년 전, 북경에서 잘살아 보겠다는 꿈을 안고 백산을 비롯한 광풍대원들은 뇌룡현을 떠나왔다.
거창한 꿈을 꾼 것도 아니었다. 기껏해야 북경 뒷골목의 건달이 되는 꿈을 꾸었을 뿐이다.
그런데 북경이 있는 하북성 경계인 산서성 대동에서 그 꿈이 깨지고 말았다. 두 분 형수와 소령, 그리고 수많은 형제들이 죽었다.
북경에서 살기를 원했던 그들이.
“씨팔! 감동이 봇물처럼 밀려드네. 난 신 신고 못 걷겠다.”
아득한 눈으로 북경 시가지를 쳐다보던 섯다는 신발을 벗어 멀리 내팽개쳤다.
걸레, 쌍칼, 송곳, 곱창, 뱁새, 칼날, 도치, 덕대, 찍새. 광천뢰를 들고 적을 향해 달려들었던 녀석들의 얼굴이 못 견디게 보고 싶었다.
“앞으로 일이 끝날 때까지 맨발로 다닐란다.”
“거 좋은 생각이다.”
고개를 끄덕인 모사 역시 신발을 벗어 던지며 소리쳤다. 오십 명의 광풍대원들이 밟아 보고 싶었던 곳. 그곳을 가장 먼저 밟게 되었다. 심지어 자식을 정계에 진출시켰던 석두마저도 북경 땅을 밟지 않았다.
광풍대원에게 있어서 북경은 애환의 장소였다.
“돈 좀 있소?”
맨발로 주위를 빙빙 돌던 모사가 느닷없이 주홍을 보며 물었다.
“그렇네만........”
두 사람의 행동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주홍은 고개를 끄덕였다. 참으로 놀라운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흑룡강성에서 출발하여 이곳까지 오면서 귀광두에 대한 많은 소문을 들었다. 반역자가 된 그를 무림공적으로 선포했다는 말을 들었고, 강호무림과 황실을 상대로 전쟁을 치르고 있다는 말도 들었다.
소림과 무당이 멸문당하고 귀광두에 의해 수천 무림인들이 도륙 당했다는 말마저 들었다.
입이 떡 벌어질 엄청난 사건이 중원에서 일어났고, 그 당사자가 자신들의 형님임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어떤 표정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비릿한 조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놀라움을 대신할 뿐이었다.
“육십 명 정도가 들어갈 객잔 하나 잡아 주시오. 좋은 곳일 필요는 없고 잠만 자면 되오.”
“알겠네.”
두 사람의 의도를 눈치 챈 주홍은 주변을 둘러보다가 한편으로 향했다.
“눈이 오려나.......”
취풍루(翠風樓) 주인 장정은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창밖을 쳐다보았다. 잔뜩 찌푸린 하늘 탓인지 하늘엔 별 하나 없었다. 이런 날이면 십중팔구 눈이 온다는 사실은 그간 경험으로 알고 있다.
“손님도 없는데 오늘은 일찍 들어가........”
눈가에 맺힌 눈물을 찍어내며 중얼거리던 장정은 흠칫 문을 주시했다. 가까이에 기척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무림인이고 남자라.......”
낮게 중얼거리며 문을 주시하는 장정의 시야에 안으로 들어선 중년인의 모습이 잡혔다.
“어서 오십시오!”
중년인의 모습에 잠시 고개를 갸웃하던 장정은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나며 고개를 숙였다. 상당히 낯익은 얼굴이었다.
“음식 장만 좀 해주게. 육십 명 정도가 먹을 걸세.”
“지금 육십 명이라 했습니까?”
잘못 들었나 싶어 장정은 확인하듯 되물었다. 지금 북경에서는 단체 모임이 금지되어 있다. 열 명 이상 모이는 술자리나 회식은 동창의 허락을 얻어야한다. 그런데 그가 알기로는 동창에 어떤 보고도 접수되지 않았다.
“왜, 뭐가 잘못됐는가?”
“아, 아닙니다.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일순 표정을 바꾼 장정은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바닥을 내려다보는 그의 눈은 예리하게 빛났다. 동창 첩형의 일인인 그가 이곳에서 객잔을 운영하고 있는 이유는 수상한 자들을 가려내기 위해서다.
“반 시진 후에 오겠네. 음식은 몰라도 술과 술잔은 부족함 없이 준비해야 하네.”
“알겠습니다, 대인!”
손에 들린 조그마한 금 조각을 보며 장정은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금이라.......”
고개를 숙인 채 장정은 내심 중얼거렸다. 의심스러운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남루한 옷차림과는 달리 사내의 손에서는 금덩이가 나왔다. 더구나 그는 얼마냐고 묻지도 않았다.
‘좀 더 지켜봐야겠군.’
“손님이다. 육십 인분을 준비해라!”
이내 태연스런 얼굴로 장정은 주방을 향해 소리쳤다. 수상한 자가 분명했지만 무작정 보고를 올릴 수는 없는 일이었다. 더구나 그는 혼자가 아니라고 했다. 상황을 좀 더 지켜본 후에 보고여부를 결정할 작정이었다.
힐끔거리며 밖을 쳐다보기를 반 시진.
열다섯 개에 달하던 탁자에 음식이 가득 채워졌고, 그 앞으로 정확하게 육십 개의 술잔이 놓였다.
“오는군! 그런데.......”
싱긋 미소를 머금던 장정은 의아한 얼굴로 창밖을 주시했다.,
“세 명?”
객잔으로 오고 있는 사람은 조금 전 주문했던 중년인과 털옷을 입은 두 명을 합쳐 세 사람이 전부였다. 혹시 늦게 오는 사람들이 있나 싶어 객잔 밖을 살폈으나 그들 말고는 어떤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어색한 얼굴로 삼 인을 쳐다보고 있는 장정의 귓전에 더 이상 올 사람이 없다는 사실을 증명이라도 하듯, 문 닫으라는 소리가 들려온 건 그 순간이었다.
그때부터 장정은 기묘한 광경을 목격해야 했다.
호피 가죽으로 만든 옷을 입은 두 사람은 각 탁자를 돌며 차려진 음식에 젓가락을 올리고 술을 따랐다. 그리고 채워진 술잔을 보며 나지막이 중얼거리더니 차례로 마시기 시작했다.
그제야 장정은 알 수 있었다.
호피를 걸친 두 사람은 객잔에서 제사를 모시는 중이었다. 그들이 마시지 않는 술잔은 전부 여섯 개. 여섯 명은 생존해 있는 게 분명하리라.
“뱁새야, 임마. 북경이다. 우리가 그렇게도 오고 싶어 하던 북경 말이다. 시팔, 술맛도 별로인 이곳을 왜 그리 오고 싶어 했는지 모르겠다. 별것도 아닌 곳을 말이다.”
바로 앞에 놓인 술잔을 보며 모사는 한숨처럼 중얼거렸다.
“참! 너희들에게 말 안 했지? 제 마누라와 딸도 지키지 못했던 그 등신이 다시 살아났다. 그런데 말이다........”
파삭!
쥐고 있던 술잔이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그 등신이 반역자가 되었단다. 게다가 무림공적까지 되었다고 하데. 더 웃긴 건 남궁세가와 하북팽가 녀석들이 형님을 무림공적으로 선포했다는 거다.”
‘저자들은?’
장정은 경악한 얼굴로 피부가 검게 변해 가는 자를 쳐다보았다. 느닷없이 객잔으로 찾아와 제사를 모시는 두 사람은 대어였다.
반역자 귀광두와 한통속인 자들.
‘가만, 그자는.......’
두 사람이 귀광두와 관련된 자들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처음 객잔에 들어왔던 자의 얼굴을 떠올려 보았다.
부르르!
장정은 격렬하게 몸을 떨었다. 그였다. 역모에 실패하고 북방으로 도망쳤던 자. 적룡왕이라 불렸던 주홍이었던 것이다.
‘침착해라, 장정!’
내심 심호흡을 한 장정은 곁눈질로 주홍을 쳐다보았다.
“나에게 무슨 할 말이 있는가?”
“아, 아닙니다, 대인. 부족한 게 있나 싶어서요.”
장정은 재빨리 시선을 깔았다. 주홍 또한 이편을 쳐다보고 있었던 것이었다.
‘빌어먹을!’
내심 욕설을 뱉어냈다. 자연스럽게 행동하지 못한 자신을 책했다. 슬며시 고개를 들어 주홍을 보던 장정은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주홍의 시선이 다시 두 사람에게 향해 있었던 탓이었다.
주홍을 쳐다보던 장정은 주방으로 시선을 돌렸다.
[침착해라! 보고는 놈들이 이곳에서 나가고 난 다음에 한다.]
장정은 잽싸게 머리를 굴렸다. 주방의 수하들까지 합치면 취풍루에 있는 동창무인은 이십 명.
하지만 역적을 잡겠다고 섣불리 나설 수 없다.
주홍보다는 등을 보인 두 명의 무위가 심상치 않았던 탓이었다.
차라리 그들이 나가는 것을 기다렸다가 보고하는 게 낫다는 결론을 내렸다.
심호흡을 하며 검게 변한 두 사람을 주시하는 장정의 귓전에 조금 전 그 목소리가 재차 들려왔다.
“말이 된다고 생각하냐? 다른 것도 아니고 광혈지옥비를 가진 형님을 공적으로 선포했다는 게 말이 되느냔 말이다!”
스르르!
차려진 음식과 탁자가 가루가 되어 바닥으로 흩어졌다. 참았던 분노가 마침내 앙천마마묵독공으로 표출되고 있는 것이다.
천하제일인이 되었지만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다. 그저 복수를 했다는 사실에 만족하며 쫓기듯 독령곡으로 숨었다. 그리고 단 한 번도 강호 무림으로 나오지 않았다. 단지 백산의 몸을 고치기 위해 몇 번 강호로 나왔을 뿐이다.
남천벌이나 북황련 등 거대 세력이 생겨나고 있음에도 관심조차 주지 않았다.
그들의 뇌리에서 잊혀지기를 바랐다.
단지 그것뿐이었다.
“한 판 하자!”
탁자 한 귀퉁이를 잘라내 주물럭거리던 섯다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속임수 없기다!”
달가닥거리는 소리가 들려오는 섯다의 손을 흘끔 쳐다보던 모사는 탁자를 향해 손을 죽죽 내리 그었다. 모사의 손길에 따라 탁자 위에는 열두 개의 네모 칸이 쳐졌다.
한쪽에서 두 사람을 물끄러미 쳐다보는 주홍의 귓전에 말소리가 들려온 건 그때였다.
“이게 뭔지 아시오? 그 옛날 우리가 했던 놀이요. 식물인간이 된 형님을 관 속에 넣고 도망치면서 했던 놀이 말이오. 투자(주사위)라고 한다오.”
광견조원들이 즐겼던 유일한 취미 생활이다. 그 당시, 백산이 누워 있던 관 위에서 투자를 했다. 투자를 하는 도중에 무림공적이 되었고, 전 무림인들의 추격을 받았다.
“가장 먼저 돈을 다 딴 녀석은 덕대였소. 우습게 들릴지 모르지만 우린 이름이 없었소. 이놈은 섯다라 불렸고, 나는 모사라 불렸소. 그런 우리에게 이름을 지어 줬던 분이 바로 형수님이었다오. 이 녀석은 장대근으로, 나는 전영으로, 그리고 가장 먼저 돈을 딴 덕대는 거치웅으로 말이오.”
그때의 녀석의 얼굴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열 개가 넘는 주머니를 들고 녀석은 환하게 웃었다.
처음으로 돈을 땄다며 얼마나 좋아하던지. 싱글벙글하던 덕대는 사타구니 깊숙이 넣어 두었던 종이 한 장을 꺼내 내밀었다. 거치웅이란 이름이 쓰여 있는 종이. 형수님이 지어 왔던 덕대의 이름이었다.
“우리에게 제 이름을 남긴 덕대는 자실용으로 주어진 광천뢰 하나를 들고 마차에서 내렸소. 돈을 다 땄다는 건 운이 좋다는 거니 어쩌면.......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먼저 내린 거요.”
두 번째로 투자에서 돈을 딴 녀석은 쌍칼 종천기였다. 녀석 역시 환한 미소를 지으며 이름자 적힌 종이를 맡긴 다음 광천뢰를 들고 떠났다.
광천뢰는 적을 죽이기 위해 가져간 것이 아니었다. 싸우다 지쳤을 때, 더 이상 도(刀)를 휘두를 힘이 없을 때 자폭하기 위해 가지고 간 것이다.
“우린 마차를 타고 가면서 전부 열 번의 폭발음을 들었소이다.”
그리고 모사와 섯다는 마차를 타고 가면서 열 번의 폭발음을 들어야 했다.
강호인들은 그 사건을 혈광마겁(血光魔劫)이라 기록했다. 오십여 명에 달하는 혈광마인들이 벌인 혈겁이라며.
도망치던 광풍대원을 떼거리로 공격한 자들이 말이다.
“나다!”
주사위를 열심히 굴리던 모사가 일순 환한 미소를 머금었다. 주사위 둘을 합쳐 칠이 나왔던 것이다. 그것도 일과 육으로 이루어진 가장 좋은 칠이.
“젠장, 아무래도 속임수 같은데. 주인장, 혹시 이 녀석이 속이는 것 같지 않았소?”
나직한 욕설을 뱉어낸 섯다는 장정을 쳐다보며 물었다.
“네, 네? 글쎄요, 저는 투자라는 걸 잘 몰라서.”
느닷없이 말을 걸어오자 장정은 화들짝 놀라며 더듬거렸다.
“너처럼 속임수를 쓰지 않았냐고 물었잖아, 임마.”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난 섯다는 장정을 향해 다가가며 속삭이듯 말했다. 이곳이 동창 정보조직 중 한 곳이란 사실은 주홍에게 들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알면서 모른 척하기는. 네놈이 동창 끄나풀이라고 저기 왕야가 말해 줬단 말이다. 동창 첩형이 객잔 주인 노릇을 하고 있는 건 속임수잖아, 아냐?”
“헉! 멈춰라!”
나직한 신음을 뱉어낸 장정은 부하들이 있는 주방 쪽으로 몸을 날리며 고함을 질렀다.
그의 고함소리가 울리자마자 주방에 있던 이십여 명 동창무인들은 기다렸다는 듯 각자의 무기를 뽑아 들었다.
“동창 첩형임을 알고서도 덤빈단 말이냐!”
더 이상 숨길 수 없다고 판단한 장정은 그냥 밀어붙이기로 했다. 아니, 놈들이 날두지 못할 거라 생각했다.
주홍이 무슨 일로 북경에 들어왔는지 알 수는 없지만, 그는 결코 요란하게 움직일 입장이 아니다. 은밀하게 일을 처리하고 도망쳐야 할 사람이 아닌가.
호피를 걸친 두 명이 강해 보이긴 했지만 자신들은 이십 명.
놈들을 잡기 위한 싸움을 하는 게 아니라 외부에 알리기 위한 싸움이라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여겼다.
해서 조금 전 외칠 때도 목소리에 강한 내공을 실었다.
“허, 자식! 목소리는 엄청 크네. 그러다 다른 사람들이 몰려오면 어쩌려고 그래, 임마.”
“건방진 놈들, 감히 예가 어디라고. 쳐라!”
어깨를 으쓱이며 너스레를 떠는 상대의 모습에 장정은 서둘러 공격 명령을 내렸다.
“이런! 모사야, 얘들이 조금 전 우리가 했던 말을 제대로 듣지 못했나 봐!”
살기를 펄펄 날리며 달려드는 동창무인들을 보며 섯다는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들었다 해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 저놈들이 혈광마겁이 뭔지 알겠냐?”
“맞다, 놈! 우린 강호 일에는 관심 없다. 오직 한 가지, 반역자만 색출하면 된단 말이다.”
섯다의 가슴을 향해 검을 찔러 가던 자들 중 한 명이 진득한 살기를 흘리며 말했다. 그의 얼굴은 득의만면했다. 피부가 검게 변하고, 술잔과 탁자를 가루로 만들어 버리는 가공할 자였지만, 그 또한 칼에 찔리면 죽게 되는 인간임이 분명할 것이다.
전부 네 자루의 검 끝이 놈의 심장을 향하고 있다.
더구나 놈은 어떤 방비도 하지 않고 있다. 아니, 엉겁결에 당해서 방비를 하지 못하는 게 분명했다.
심장에 바람구멍을 내 버릴 듯 빠르게 나아가는 검을 보며 동창무인은 비릿한 조소를 머금었다.
그러나.
챙! 챙챙! 챙!
“허억!”
네 명의 입에서 헛바람 빠지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날카로운 쇳소리와 함께 자신들의 검이 부러져 버린 것이었다.
그들이 처한 상황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상대의 가슴에 검이 박히는 상상을 하고 있던 그들은 나아가던 몸을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앞에 있는 자를 먼저 없애고 그 여세를 몰아 뒤편에 서 있는 자마저도 없애 버리려 했던 것이다.
“이 나이가 되도록 장가를 가보지 못했다지만 남자를 탐할 정도는 아냐, 자식들아.”
네 명의 동창무인들이 품 안으로 들어오자 양팔을 좌우로 벌리며 섯다는 말했다. 활짝 펴진 그의 양팔에서 검은색 바람이 불어오는 듯하더니 이내 가운데로 모아졌다.
“끄아악!”
“커억!”
“저럴 수가........!”
장정은 벌려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바람처럼 흘러나왔던 검은 기운은 엄청났다. 그 검은색 기운이 부하들의 몸을 스치자마자 부하들의 몸이 눈처럼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그래, 독이야. 존재 자체를 지워 버리는 독.”
슬쩍 미소를 머금은 섯다는 멍한 얼굴로 자신을 쳐다보는 동창 무인들을 향해 걸었다.
“맞다. 이 말을 안 했네. 북경에 있는 동창 지부들을 전부 알고 싶거든? 저기 있는 녀석들이 죽기 전에 생각을 해놔야 할 거다.”
“건방진 놈, 죽여라!”
[정면 공격은 삼가고 시끄럽게 시간을 끌어라! 고함도 크게 지르고.]
[알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동창무인들은 고함을 내지르며 몸을 날렸다. 공격을 위해 움직이는 게 아니었다. 장정의 말처럼 시간을 끌기 위해, 다른 동료들을 불러 모으기 위해서였다.
“죽어라!”
간간이 고함까지 질러가며 섯다와 모사의 주위를 빙빙 돌았다.
“쯧! 싸움은 두 사람이 합의를 해야만 멈출 수 있다. 혼자서 그만 두려고 해 봐야 안 된다는 거지.”
낮게 혀를 찬 섯다는 주변을 빙빙 돌고 있는 자들을 향해 돌진했다.
번쩍 쳐든 다리를 횡으로 쓸어대자 그의 다리에서 흘러나온 검은 광채가 긴 흔적을 남겼다.
용왕유권을 응용한 기술을 섯다도 사용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한편에서 구경하고 있던 모사도 나서며 남아 있는 동창무인들 주변으로 발을 휘둘러 댔다.
그의 발에서도 역시 검은 광채가 흘러나왔다.
“크아악!”
검은색 광채에 잡힌 무인 한 명이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털썩 쓰러졌다. 일순 남은 동창무인들은 기절할 듯 놀라고 말았다.
쓰러진 동료의 몸이 급속도로 녹고 있었던 것이다.
허공에 남겨진 검은색 줄은 독을 잔뜩 포함한 거미줄이었다.
동창무인들의 몸이 급격하게 느려졌다. 거미줄처럼 길게 이어진 광채에서 흘러나온 독 기운이 그들의 몸을 마비시켜 가고 있었던 탓이었다.
“아이고, 힘들다. 이 짓도 못해 먹겠구먼.”
사방으로 열심히 거미줄을 만들던 섯다가 제자리에 멈춰 섰다.
“생각해 봤냐?”
허공을 가득 채운 검은 광채를 향해 슬쩍 손을 흔든 섯다는 장정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으으!”
신음을 뱉어내며 장정은 주춤주춤 물러났다.
녀석의 뒤로 거미줄에 걸린 벌레처럼 되어버린 부하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들의 몸이 천천히 녹아 가고 있었다.
“말해라! 이름하고 위치만 말하면 편하게 보내주마.”
“수양루, 천향루, 광양루, 정설루, 백화루.........”
그 외에도 장정은 북경의 현 상황부터 시작하여 하후장설을 따르는 자들까지 긴한 정보를 털어 놔야 했다.
“그날도 첫눈이 왔다. 소령과 형수님들이 납치되었던 그날도 오늘처럼 첫눈이 왔단 말이다.”
점점이 떨어지는 눈발을 쳐다보며 섯다는 씹어뱉듯 말했다.
“오늘 밤, 첫눈을 시작으로 북경은 지옥이 될 거다.”
곧이어 세 사람의 신형이 눈발을 뚫고 남쪽으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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