뒷산을 오르다 보니 지난밤에도 눈이 살짝 다녀가셨나 봅니다
곳곳 응달엔 동물을 비롯해 사람들 발자국이 찍혀있었습니다.
그곳에 찍히는 순간 과거가 되어 녹아 없어지겠지만요.
눈이 녹아 없어지는 것처럼, 우리가 살다 보면 지워지는 것들이 엄청 많을 테지요.
그렇지만 첫사랑 같은 소중한 기억은 절대로 지워지지 않습니다.
가장 또렷이 되살려내는 것은, 눈 내린 풍경에서입니다.
추억은 지난 시간의 그림자라서 때때로 그 시절의 나와 만나지는 시간이 주어집니다.
호랑이 등처럼 남은 잔설과 대나무 잎들이 부딪히는 소리와 새들의 지저귐이
화음으로 들리는 완벽한 풍경은 잠시 타임머신을 탄 듯한 느낌을 선물해 주었습니다.
산길을 오르는 길목엔 작은 대숲이 있어서 운치를 더해줍니다.
있어야 할 곳에 작은 군락을 이루고 하늘 향해 가지를 쭉쭉 뻗었습니다.
대숲의 잎새들이 2월을 살랑이고 봄은 양지뜸 바위벽에서 태아처럼 웅크리고 있는 곳이지요.
찔레나무 덤불에서 오목눈이 떼들이 날아올라 대나무숲으로 몸을 감추는 순간
숲이 흔들리자 햇살도 궁금한지 사이사이로 비집고 들어가 않더라구요.
대나무는 가만히 비켜줄 뿐 금세 제 자리를 잡고 꼿꼿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나무도 아닌 것이 풀도 아닌 것이
곧기는 어이 저리 곧으며
속은 어이 비었는고
저러고도 사철 푸르니
그를 좋아 하노라
윤선도의 시가 생각나 그 자리에서 읊조려 주었다고 아침편지에 자랑질을 합니다.
우수지나 내리는 눈과 비는 깊숙이 얼어있는 땅 밑에 봄소식을 알려주기 위한 우체부 역할을 하는 것이지요.
풍요로움을 상징한다는 눈과 봄비!
곳곳이 물기 머금어 촉촉한 것을 보니 풍요로움이 뭔지 조금은 알 것도 같습니다.
풍요롭다는 것은 내 마음이 마르지 않고 사랑으로 늘 촉촉이 젖어 있다는 뜻도 되니까요.
오시는 봄을 불러다 마음속에 앉혀놓고 나누는 그런 봄날 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