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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FC의 첫우승컵! 통영컵 국제축구대회
2006년 2월 23일 통영시의 주최로 통영공설운동장에서
제3회 통영컵 국제프로축구대회가 개막하였다.
참가팀은 대구FC, 인천유나이티드, 베이징 현대(중국슈퍼리그, 현재 베이징 궈안),
퀸즐랜드 로어FC(호주 A리그)로 총 4개의 팀이 참가했다.
대회 방식은 4개의 팀이 풀리그제로 승점이 가장 높은 팀이 우승을 차지하는 방식이었다.
그간 대구FC는 터키 안탈리아로 전지훈련을 다녀왔는데 박종환 감독 특유의 지옥의
훈련 프로그램 덕분인지 2월 23일 오전 11시 30분에 열린 첫경기에서 베이징 현대를 상대로
전반 32분 윤주일의 골. 후반 24분 이상일의 헤딩골로 승부를 마무리 지었다.
베이징 현대는 후반 40분에 한골을 만회하는데 그쳐 3대1 낙승을 거두었다.
통영컵에서 오장은 선수의 모습
이틀뒤인 2월 25일 오후2시에 펼쳐진 인천유나이티드와의 2차전에서는 후반 13분에
이상일의 골로 1대0으로 승리하면서 우승에 한발짝더 다가섰다.
대회 마지막날 2월 27일 오후3시에 열린 퀸즐랜드 로어FC와의 경기에서는 0대0으로 비겼지만
2승1무, 승점7점을 기록해 1승2무로 2위를 기록한 퀸즐랜드 로어FC를 제치고
대구FC가 구단 창단이후 처음으로 우승컵이라는 것을 갖게 된다.
대회에서 맹활약을 펼친 이상일은 득점왕과 최우수선수상을 차지하기도 한다.
폭풍영입
2006시즌을 앞두고 대구FC는 많은 선수들을 영입한다.
골키퍼에는 서울에서 기회를 얻지못하던 백민철을, 수비수에는 부산과 성남에서 활약했던
김현수를 영입했고 미드필더로는 실업팀인 울산현대미포조선에서 활약하던 진경선,
울산현대에서 기회를 잡지못하던 하대성을 영입했다.
특히 공격진은 많은 변화가 이루어졌는데 전남으로 이적한 산드로 히로시와
진순진의 공백을 매꿔야 했고 더욱이 살림꾼 역할을 해주던 인지오 마저 떠나버려
새로운 얼굴들이 많이 합류하게 된다.
그리하여 영입한 공격진으로는 성남과 인천에서 활약했던 고공플레이에 능한
황연석과 성남에서 자리잡지 못하던 공격수 서관수를, 또한 가브리엘, 에듀, 지네이 라는
브라질 출신 공격수 3명을 추가로 영입하면서 공격진을 두텁게 만들었다.
이후 여름이적시장에서 수원에서 10년간 활약한 이병근과 브라질 출신 공격수 제펠손을
영입하기도 한다.
1998년 동국대가 춘계대학축구연맹전 준우승을 차지할 때 맹활약했던 백민철 선수는 이후
2000년 안양LG에 입단하였으나 당시 안양에는 신의손과, 원종덕이라는 쟁쟁한 골키퍼들이
골문을 지키고 있었던터라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결국 상무입대를 결심하여 상무에서 나쁘지 않은 활약을 펼쳤으나 전역후 돌아온 서울에서
또다시 기회를 잡지못하자 2006년 대구FC에 입단하게된다.
대구FC의 2선발 골키퍼로 많은 사람들이 예측했지만 어느새 주전을 차지하여
2011년 박준혁 선수나 나타날때까지 대구FC의 최후방을 든든히 막아주었다.
안정적인 경기운영과 매경기마다 환상적인 선방을 보여주면서 많은 팬들은
‘민철신’이라고 찬양하기에 이르렀고 2007년부터 2009년까지 막장을 달리던
팀 전술 속에서도 꿋꿋히 활약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후 박준혁 선수의 급성장으로 2012시즌 경남FC로 이적하여 현재까지도 활약하고 있다.
2012년 대구FC 10주년 역대 베스트11에 선정되기도 한다.
오오! 민철신!
1995년 부산에서 선수생활을 시작한 김현수 선수는 1997년 부산이 3관왕을 이룰 때
수비의 중심으로 활약하였고 2000년에는 성남으로 이적했다.
성남에 둥지를 튼 첫시즌만에 K리그 베스트 11에 선정되었고 2002시즌까지
3년 연속으로 선정된 뛰어난 실력을 가진 수비수였다.
2004년에는 당시 창단팀인 인천유나이티드로 이적해 플레잉코치로 활약했고
이듬해 2005년 전남드래곤즈로 이적했으나 단한경기도 출장하지 못해 6개월만에
계약을 해지하였다.
이후 유럽진출을 모색하였으나 실패하고 2006년 대구FC에 입단하게 된다.
대구FC의 수비의 중심축으로 활약하고 2007년에는 대구FC의 주장으로 활약했다.
2007시즌 마지막 경기인 FC서울과의 경기로 은퇴하여 대구FC U-18팀 감독을 거쳐
현재는 대구FC의 코치로 있다. 2012년 대구FC 10주년 역대 베스트11에 선정되기도 한다.
남다른 포스를 내뿜고 계신듯한 김현수 선수
1996년부터 2006년 여름까지 수원블루윙즈에서만 활약한 이병근 선수는 수원에서만 300경기
이상을 출전하며 수원과 많은 희노애락을 함께한 선수이다.
하지만 2005년 차범근감독의 구상에서 제외되기 시작하면서 은퇴의 기로에 몰렸지만
선수생활을 계속하겠다는 의지가강해 2006년 여름이적시장에서 대구FC로 합류하게 된다.
이후 친정팀 수원을 상대로 골을 넣기도 하는등 좋은 모습을 보여주었으나
많은 나이로 인해 2007년 시즌을 마치고 앞서 서술한 김현수 선수와 함께 은퇴를 선언한다.
많은 수원팬들에게는 낯선모습일수 있는 이병근 선수의 모습
2003년 부천SK에 입단했지만 별다른 활약이 없어 시즌이 끝난 뒤 바로 방출을 당한
진경선 선수는 2004년 실업팀인 울산미포조선에 입단하지만 십자인대 파열로
1년 반 가까이를 재활의 시간으로 보내게 된다.
하지만 엄청난 노력으로 부상도 극복해내고 선수 본인의 기량 또한 높은 단계로 끌어올리는데
성공하여 2006년 대구FC에 입단하면서 우여곡절 끝에 프로무대 복귀에 성공한다.
방출과 부상의 시간동안 많은 고난을 넘어서 그런지 2008년까지 강한체력과 넓은 활동량,
집요함을 무기로 엄청난 활약을 보여주어 대구에서 없어서는 안 될 선수로 자리잡게된다.
이후 2009년에 전북현대로 이적하게 되고 2009년 전북의 리그우승에 큰보탬이 되었다.
현재는 강원FC에서 활약하고 있다. 2012년 대구FC 10주년 역대 베스트11에 선정되기도 한다.
포항과 경기중인 진로벤경선 선수의 모습
울산현대에서 2004년부터 2005년까지 소속되어있었지만 2004년 교체로 2경기를 나서본 것이
전부였던 하대성 선수는 2006년 대구FC로 합류하면서 급성장 하게된다.
2006년에는 같은 미드필더이지만 엄청난 활약을 펼친 오장은에게 가려진 측면이 없잖아 있었지만
오장은이 떠난 2007년부터 활약하기 시작하여 2008년에는 당시 엄청난 활약을 펼친 이근호,
에닝요와 더불어 대구FC에서 중심선수로 자리잡게된다.
2008시즌이끝나고 전북현대로 진경선 선수와 함께 이적하였으며 2010년에는 FC서울로
이적해 2010년과 2012년 FC서울의 우승에 많은 도움을 주게된다.
현재는 FC서울의 주장으로 활약하고 있으며 2013 동아시안 컵에서
대한민국 국가대표팀의 주장을 맡기도 했다.
2012년 대구FC 10주년 역대 베스트11에 선정되기도 한다.
대구FC시절의 하대성 선수, 지금과는 많이 다른 모습
192cm라는 큰키를 이용해 성남에서 공격수 활약한 황연석선수는
1995년 노상래와 함께 유력한 신인왕 후보로 거론되었던 경력이 있었다.
2003년 까지 성남에서 활약하면서 4회의 리그 우승을 안겨주었다.
2004년 신생팀이었던 인천유나이티드로 이적하였으나 2005시즌이 끝날 때 까지 3골밖에
기록하지 못했다.
이후 2006년 대구FC로 합류하고는 2007년까지 6골을 기록하는데 그쳤고
2008년 대구와의 재계약에 실패한뒤 고양국민은행으로 이적하게 된다.
현재는 해성중학교 감독으로 있다.
고양국민은행 시절의 황연석선수(중앙, 16번)
뒤에 전북유니폼을 입고있는건 개그맨 김대범 조재진 선수
가브리엘은 1년계약으로 대구FC에 입단하였다.
17경기에 나서며 2골 3도움을 기록하였고 당시 함께 합류한 브라질 선수인 에듀, 지네이와
호흡을 맞췄지만 세명의 선수가 합쳐 한시즌 동안 9골을 넣는데 그쳤다.
특히 가브리엘은 풀타임을 소화할 체력부족과 K리그 특유의 압박에 적응에 어려움을 보였다.
결국 와이프가 한국생활에 적응하지 못하자 팀과 합의하여 시즌중반 대구FC를 떠나게되고
뒤이어 제펠손이 대구FC에 합류하게 된다.
애처가 가브리엘 선수
가브리엘에 이어 대구FC에 입단한 에듀는 2006년 4월 리그 데뷔골을 넣었지만 부상을 입어
부상이후 제대로된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결국 시즌 통틀어 3골을 넣는데 그치며 2006시즌이 끝난뒤 대구FC를 떠나게 된다.
에두와 함께 대구FC에 합류한 지네이 또한 시즌을 통틀어 4골 1도움이라는 실망스러운 결과를
안고 시즌종료후 대구FC를 떠나야 했다.
에듀선수 지네이선수
가브리엘을 대신해 여름이적시장에서 영입한 제펠손은 3경기 출장에 그치며 시즌종료후
다른 외국인 선수들과 함께 대구FC를 떠나야만했다.
대구관광객 제펠손선수
시즌시작의 전조
통영컵 우승으로 대구FC의 분위기는 한껏 고무되어 있었다.
따라서 3월 4일에 동성로 대구백화점 앞에서 통영컵 우승과 리그개막을 기념하는
팬미팅 행사를 가지기도 했다.
춤추는 오장은선수와 하대성선수
시즌 개막직전 3월 10일에는 대구지하철공사와 협조하여 대구지하철 2호선 대공원역에
대구FC 테마역을 조성하고 대공원역과 대구월드컵경기장(현재 대구스타디움)간 셔틀버스를
운행하기로 한다.
대구FC 테마역으로 조성된 대공원역(현재는 이렇지 않습니다.)
그에 앞서 3월 2일에는 대구FC 사무국에 한통의 편지와 함께 의문의 박스 하나가 배달되었는데
박스에는 1500만원의 현금이 들어있었고 편지에는 '대구FC를 사랑하는 대구시민의 한 사람으로
서 대구FC가 발전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기부하고자 한다‘라는 내용으로 홈경기 이벤트를 위해
사용해줄 것을 당부하였고 홈경기에서 대구가 이기거나 비겼을시에 대구선수 가운데 MVP선정을
부탁하였다.
이에 대구FC는 기부금을 투명하게 사용하겠다는 의미로 리그개막경기를 후불제관람,
정확히는 후원금 관람으로 티켓없이 경기에 입장하여 경기가 끝난뒤 별도로 마련된
후불함에 입장료는 내도되고 내지 않아도 되는 방식이다.
MVP선정은 3월 19일 홈경기부터 소설 키다리 아저씨에서 따온 ‘키다리 MVP’를 제정하여
선수들에게 수여하였다.
시즌 개막이후 3월 27일에는 대구FC 맴버쉽카드를 발급하여 대구FC 제휴가맹점에서
할인과 다양한 서비스를 받을 수 있게 했다.
맴버쉽카드의 모습
무농사의 계절 2006 전기리그
2006년 3월 12일 드디어 대망의 2006 K리그가 개막했다.
대구FC의 개막전 상대는 전남드래곤즈였다. 전남에는 대구에서 활약을 펼쳤던 선수들이
이적해 있었는데 그중 지난시즌 대구FC의 공격을 이끌었던 산드로 히로시와 대구FC의 공격에
무게감을 주었던 진순진이 이제는 전남소속으로 대구를 만나게 된 것이다.
결국 전반 12분만에 산드로히로시 에게 선제골을 내주고 전반29분에 또 한골을 전남에게
내주면서 대구FC는 이대로 끌려가는 경기를 하는가 싶었다.
그러나 전반40분 김현수의 패스를 받아 중거리슛을 성공하고 후반3분 페널티킥을 성공한
나희근의 2골로 대구FC는 극적인 무승부로 경기를 마무리했다.
극적인 2골로 대구는 개막전 패배를 면했고 나희근은 주간 MVP에 선정되는 영예를 안았다.
개막전 경기모습 주장인 이상일 선수가 열심히 공을 쫓아가고 있다.
하지만 다음경기인 성남과의 일전에서 2대1로 패배, 부산과의 경기에서는 4골을 주고받는
난타전을 펼쳤지만 4대4 무승부로 경기는 종료되었고 이어진 경남과의 경기에서 1대0 패배,
수원과의 경기에서 0대0 무승부, 전북과의 경기에서 1대0 패배를 당하면서 6경기동안 승리를
하지 못하게 된다.
이러한 극도의 부진은 외국인 선수들이 기대만큼 활약을 못해주었다는 것이 원인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분석했고 대구FC의 전기리그는 사실상 물 건너 갔다고 평했다.
결국 4월 5일에 펼쳐진 서울과의 경기에서 후반추가시간에 극적인 역전골로 승리를 챙기지만
또다시 이어진 5경기에서 4무 1패라는 성적을 받아들게 되었다.
이후 전기리그 마지막경기인 광주상무와의 일전에서 승리를 챙기면서 2승 7무 4패,
11위로 전기리그를 마감하게 된다.
서울과의 경기에서 승리하여 기뻐하는 선수들
리그컵대회와 월드컵
전기리그가 끝나고 시작된 하우젠컵은 전기리그와 후기리그로 나눠진 정규리그와 다르게
풀리그 방식으로 치러졌다. 다만 홈앤어웨이 방식이 아닌 각팀이 한번만 맞붙는 방식이었다.
5월 14일부터 7월 29일 까지 치러졌고 독일월드컵으로 인해 6월7일부터 7월14일까지
여름휴식기로 정하고 경기를 치루지 않았다.
5월 14일 대구FC의 하우젠컵 첫상대는 또다시 전남이었는데 이번에도 대구FC는 쉽게 무너지지
않는 경기를 선보였다. 전반 13분만에 송정우가 선제골을 터트렸지만 전남에게 2골을 내주면서
1대2로 전반을 마쳤다.
후반4분 가브리엘의 골로 2대2 동점을 만들었으나 4분만에 다시 전남에게 골을 내주었고
3대2로 대구FC의 패색이 짙어만 가고 있었다.
그러나 후반 39분과 42분 지네이가 3분동안 2골을 터트리면서 대역전극을 선사했고 대구FC는
4대3이라는 극적인 역전승으로 하우젠컵을 시작했다.
그러나 이경기에서 모든 힘을 소비했던건지 다음 부산과의 일전에서는 북한국가대표 안영학에게
K리그 데뷔골까지 헌납하면서 5대1이라는 큰점수차로 패배했고 이어진 경남과의 경기에선
승리를 거뒀으나 나머지 모든경기를 정말 거짓말 같게도 무승부와 패배만 반복하면서
2승 6무 5패, 14개 팀중 13위라는 성적으로 하우젠컵을 마무리한다.
기록출처 : 대구FC
독일월드컵으로 인한 여름휴식기 기간동안에 6월 13일에 치러진 대한민국과 토고의 경기에서
대구FC선수들은 시민들과 함께 거리응원을 가져 대구FC의 홍보활동을 함께했다.
이어서 6월 18일부터 7월 8일까지는 강원도 양구에서 박종환감독 특유의 지옥의 전지훈련을
가졌다.
또 플레이오프를 먹질 못하니...2006 후기리그
8월 23일 재개된 정규리그에서는 또다시 첫상대로 전남을 맞이하여 오장은의 골로 1대1 무승부로
후기리그 시작을 알렸다.
하지만 박종환감독의 전술이 팀에 녹아들기 시작했던건지 오장은선수의 잠재력이 폭발했던건지
대구FC의 행보는 전기리그나 하우젠컵에서 보여주었던것과는 다른 행보를 보이기 시작한다.
9월 23일 전북과의 경기에서는 오장은이 생애 첫 해트트릭을 터트리며 3대1로 승리했고
이어진 서울과의 경기에서도 오장은이 골을 터트리며 2대0 승리를 챙겼다.
계속된 리그 경기에서도 오장은은 중요한 순간마다 골을 터트리거나 팀을 구하는 활약을 펼쳤고
결국 10월 8일 대한민국과 가나의 경기와 10월 11일 대한민국과 시리아와의 경기에서 국가대표로
발탁된다. 이후 오장은 선수는 12월에 열린 카타르 도하 아시안게임에서도 국가대표로 활약한다.
이러한 오장은 선수의 활약 덕분인지 대구FC의 순위는 나날이 상위권을 향해 달려갔으며
어느새 4강 플레이오프 티켓을 다투는 위치까지 올라오게 되었다. 그러나 10월 30일 열린
울산과의 마지막 홈경기에서 1대0으로 패배하면서 플레이오프 진출의 꿈은 저멀리 날아가게
되었다. 사실 2005년 시즌과 마찬가지로 전기리그에서 극도의 부진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면
후기리그 4위라는 성적에 힘입어 플레이오프 진출은 가능했을 것이다.
아쉽게 시즌을 마무리한 대구는 8승 10무 8패 통합순위 7위로 2006년 K리그를 마무리 한다.
(현재까지 대구FC가 기록한 리그 최고순위)
기록출처 : 대구FC
구단주가 생겼어요
2006년 7월 31일 언론사에서는 김범일 대구시장이 대구FC의 구단주를 맡게될것이라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동안 대구FC는 구단주없이 대표이사와 단장체제로 구단을 운영해 왔는데 이는
다른 시도민 구단과 다른 운영형태였고 이 때문에 후원사 유치나 재정적인 어려움이 있어왔다.
그리고 약 2개월뒤 9월 20일 대구FC는 임시주주총회를 열어 김범일 대구시장을 구단주로
추대했고 전임 단장이었던 최종준 단장을 대표이사로, 전임 이인중 대표이사는 대구FC의
이사회회장을 맡게 되었다.
작년에 만난 전남을 또다시 만나다. 2006 FA컵
2006년 FA컵은 이전에 비정상적으로 한 장소에서 몰아서 경기를 치뤘던 방식을 버리고
정상적으로 정규리그와 병행해서 경기가 진행되었다.
4월 19일에 있었던 32강전 대구FC와 대구대학교의 경기는 2대1로 대구FC가 손쉽게 승리를
가져갔다. 7월 12일 열린 16강전 또한 대진운이 좋아서 대학팀인 중앙대학교를 만나 6:0이라는
대승을 거두었다.(대구FC의 역대 최다점수차 승리)
그러나 8월 12일 열린 8강전 에서 2005년에 대구FC를 탈락시켰던 전남드래곤즈를 만나게
되는데 셀미르에게 전반 2분만에 골을 헌납하면서 2대0 패배로 지난해와 마찬가지로 전남을
만나 탈락하게 된다. (2006년에는 중요한순간마다 전남을 만난 것 같다.)
기록출처:대구FC
새로운 스폰서
정규리그가 종료된지 4일이 지난 2006년 11월 9일 키카와의 2년간의 용품후원 계약이 만료된
대구FC는 이탈리아의 로또와 2년간 9억상당의 용품후원 계약을 맺게된다. 이후 2007시즌부터
새로운 유니폼을 입고 경기를 나서게 된다.
새로운 감독, 흑역사의 시작
2006년 정규리그가 끝나갈 즈음 박종환 감독의 재계약 여부가 관심사로 떠올랐다.
2003년 창단때는 2년계약, 이후 2005년부터 1년계약을 해왔지만 2006년 정규리그가
끝나갈때가 되어도 박종환 감독의 재계약 소식이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울산과의 경기에서 패배하면서 플레이오프 티켓을 놓친것과 박종환 감독의 고령,
팀 분위기의 변화를 이유로 정규리그가 종료되기도 전에 대구FC는 재계약 포기와 신임감독
모집을 발표했다.
이후 한달 가량 지났을 11월 23일 대구FC의 차기감독 후보그룹이 4-5명으로 압축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고 당시 J리그 오이타 이사를 맡고있었던 황보관, 16세이하 청소년 대표팀 감독을
맡고있었던 박경훈(현재 제주유나이티드 감독), 그리고 변ㅂㅈ가 유력한 후보로 거론되었다.
(저때 박경훈 감독을 임명했다면 대구FC의 역사는 아주 엄청나게 크게 달라졌을지도...)
이후 5일이 지난 11월 28일 변ㅂㅈ를 계약기간 2년, 연봉 1억5천만원으로 계약했다는 소식이
들려왔고 대구FC의 폭풍같은 시간이 시작되었다.
[혐오주의] 그분이 오신날.jpg
오는자와 떠나는자
12월 18일 대구FC는 2군리그 MVP에 선정된 이근호를 인천유나이티드로 부터 영입했다고
공식발표했다. 대신 창단맴버로 활약한 윤주일을 인천에 내어주게 되지만 2007 K리그가
개막하자 결과적으로 엄청남는 장사였음이 밝혀지게된다.
당연하게도 이근호 선수는 훗날 2012년 대구FC 10주년 역대 베스트11에 선정되기도 한다.
오오!! 더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합니다.
그러나 오장은 선수는 FA로 풀리게 되어 대구FC를 떠나는가 남는가에 대한 기로에 서있었다.
오장은 선수는 대구FC와 2차 우선협상까지 벌였으나 연봉에 대한 의견차를 좁히지 못했고
대구FC는 폭등해버린 오장은 선수의 몸값을 감당할 능력이 없어서 결국 울산현대로
이적하게 된다.
12월 22일 치러진 2007 K리그 신인 드래프트 에서는 2번 지명으로 2004년 대학선발과
2005 동아시안컵 대표팀에 승선했던 건국대학교 출신 이성환을 영입한다.
추가
2006년 12월 17일 오후4시 대구FC의 창단맴버이자 살아있는 전설은 아니고 레전드인
'박종진 선수'가 대구 월드컵컨벤션웨딩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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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근호가 이적 당시 2군리그 mvp였구나..
재미있게 보고갑니당...혐오주의 ㅋㅋㅋㅋㅋ 방심하다 터졌삼
항상 재밌게보구갑니다~~
홍순학 , 오장은 , 진경선 , 하대성 , 에닝요 , 루이지뉴 , 이근호 , 송제헌 , 김기희 지금 유명한 선수들은 다 ~ 대구출신이네요 ㅎㅎ
2006년 부터 슬슬 낯익은 이름들이 나오네요~
이근호가 등장하는 다음편~국축뉴비로써 정말기대됩니다ㅋ
통영컵 직관 갔었는데...오랜만에 추억 속으로 여행했네요!
아.... 박경훈 감독 진짜 아쉽네요..... 에듀는 공지키는건 그럭저럭해줬는데 지네이는 국내선수보다 더 못하고... 가브리엘은 발만 빠르던.... 송정우가 버터비터 골 넣고 기뻐하는 감동이 어제 같네여...
삭제된 댓글 입니다.
김현수코치 경력에 현풍고 우승시킨 감독이란 타이틀도달아주세요~^^!!............자 이제 공격 앞으로의 두시즌이 엄청기다려지네요~^^
윤주일 ㅠㅠㅠ 이 다음해부터가 이근호 - 장ㄴㅅ - 에닝요 .. 대구FC역사에 남을 최강공격진이 만들어지는해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