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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풍무(147)
[네놈들 때문에 고자가 됐단 말이다]
불제자라면 마지막 순간이 되어서도 갖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살인의 충동이다.
짐승은 물론이거니와 인간에 대한 살인 충동을 가져서는 더더욱 안 된다. 살기 자체를 품지 않는 게 진정한 불제자로 나아가는 길인 것이다.
열여덟 명의 승려들.
깊은 어둠 속에 가부좌를 하고 있는 그들의 몸에서 잔인한 기운이 스멀거리며 피어올랐다.
그것은 살아 있는 생명체를 죽이고자 하는 살기(殺氣)였다. 그것도 다름 아닌 인간을.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알지 못했다.
백팔 번을 새기라 했고, 그 일이 끝날 때까지 묵언수행을 하라고 하셨다. 사부가 죽고 사형제들이 죽었을 때도 침묵했다.
사부가 찾아가라고 햇선 백산 사조가 울부짖고 있을 때도 침묵했다. 묵묵히 글을 새겼다.
열 손가락의 손톱이 전부 닳아 없어졌지만 멈추지 않았다.
한 번을 새기고, 두 번을 새기고, 세 번을 새겼다. 단전을 채웠던 내공이 고갈되어도 끊임없이 글을 새겼다.
광풍무(狂風舞)라 했다.
처절하게 살았던 백산 사조의 삶이라 했다.
천하를 향해 분노를 쏟아낼 수밖에 없었던, 묵안혈마가 될 수밖에 없었던 그분의 기록이라 했다.
백여 번을 새겼을 때 최초의 변화가 나타났다.
단전은 진작 말라 버렸고, 석판을 파고들었던 손가락 대신 붉은 피로 광풍무를 새기는 중이었다.
텅 비었던 단전에서 미약한 움직임이 감지되었다. 처음엔 그게 무엇인지 몰라 무시했다.
그런데 그 기운은 점점 커져 갔다. 차갑게 식었던 단전이 따뜻하게 변하고, 그곳으로 엄청난 기운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화들짝 놀란 광자는 손을 멈추고 내부를 관찰했다.
그런데 묘하게도 손을 멈추는 순간 내부에서 일던 변화도 덩달이 멈춰버린 것이었다.
다시 광풍무를 새기는 작업을 시작했다. 이번에는 어떤 생각도 하지 않았다. 정성을 다해 광풍무를 새기는 작업에만 열중하기로 했다.
어느 순간 광자는 자신을 잊었다.
절로 손이 움직였다. 거대한 나한상이 머릿속에 그려지고 천지를 쪼개는 무상각이 보였다.
아홉 개의 연꽃이 춤추는 광경이 그려지고 물을 박차고 오르는 용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을 내리누르며 거대한 물체가 눈앞으로 나타났다. 그것은 도(刀)였다. 피처럼 붉은 광채를 뿌리는 도는 사방을 향해 진득한 살기를 뿌려대고 있었다.
망연한 눈으로 광자는 도의 움직임을 좇았다. 때로는 원을 그리기도 하고, 때로는 공간을 횡으로 자른다.
수직으로 떨어진 도가 아래에서 위로 사선을 그린다. 그리고 붉은 피가 사방으로 퍼지는 모습이 보였다.
그러면서도 광자는 광풍무를 새기는 작업을 멈추지 않는다.
광풍무를 새기는 행위는 이미 그의 일부분이 되었기 때문이리라.
움찔!
광풍무를 새기던 광자의 신형에서 두 번째 변화가 찾아왔다. 수면을 박차고 나오는 해처럼 그의 단전에서 붉은 기운이 비치기 시작하더니 전신으로 퍼져 나갔다.
온통 붉은 빛을 뿌려대는 신형이 조금씩 움직이는 듯하더니 허공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손가락에서 흘러나온 피로 새겼던 석판에 깊은 자국이 남았다.
그러한 변화는 비단 광자만 겪는 현상이 아니었다.
백산에게 우거지상이라 불렸던 광오의 몸에서는 검붉은 광채가 솟구쳐 나왔고, 광혜의 몸에서는 청색 운무가 뭉클거리며 솟아 나왔다.
단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면, 그들의 손은 여전히 석판 위를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었다.
운기행공(運氣行功).
본인 스스로도 감지하지 못한 상태에서 십팔나한들은 운기행공을 하고 있었다.
지하 장경각에 각양각색의 색들이 요동쳤다.
반 자가량 떠올랐던 십팔나한의 신형이 점점 높이 올라거더니 반 장 높이에서 머물렀다.
휘리링!
순간 광자를 비롯한 십팔나한의 몸에서 미약한 소리와 함께 바람이 불어 나오기 시작했다.
처음 그들의 몸에서 흘러나온 바람은 미약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점점 강해지더니 마침내 십팔나한의 가사가 찢어질 듯 펄럭였다.
열여덟 개에 달하는 작은 회오리바람이 생겨났다.
광자의 몸을 휘감아 도는 바람은 붉은색이었다. 광오의 몸을 휘감아 도는 바람은 검붉었다.
광혜의 몸을 휘감에 도는 바람은 청색이었다. 어지러이 뒤엉킨 열여덟 개의 바람이 지하 장경각을 가득 채웠다.
끊임없이 불던 회오리바람이 일제히 멈추는 순간 광자의 눈이 번쩍 떠졌다.
잠시 동안 광자는 전면을 쳐다보았다. 십여 장의 석판이 사방에 뒹굴고 있었다.
처음엔 광풍무를 한 번 새기는 데 수십 장의 석판이 들어갔다.
하지만 점차 석판의 수는 줄어들었고 급기야 한 장에 모든 것을 새겨 넣고 말았다.
백팔 번을 새기라 했던 사부의 유명을 드디어 달성한 것이다.
“바람[風]이 되기를 원하셨던가!”
광자의 입에서 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광풍무를 새기면서 알게 된 사실이다. 사부님의 말처럼 그 안에는 무공만 들어 있는 것이 아니었다. 사조님의 삶이, 인생이 들어 있었다.
그분은 바람처럼 자유로운 삶을 꿈꾸었다.
그 옛날 철가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사형, 나가시죠.”
뒤늦게 운기행공을 마친 광오가 광자 곁으로 다가오며 말했다.
“어떤 광경을 보게 될지.‘
사부님이 마지막으로 주고 간 검은 보자기를 들어 올린 광자는 말끝을 흐렸다. 소림의 멸문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다.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다.
“그래도 봐야지. 눈으로 확인해야지.”
입술을 깨문 광자는 지상으로 나가는 계단에 발을 올렸다.
한 걸음, 한 걸음, 오랜만에 걷는 걸음 때물일까. 쉬이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아니, 소림의 모습을 봐야 한다는 사실이 두려워서다.
그러나 광자의 발은 어느새 마지막 계단을 밟고 있었다.
몇 번의 손놀림으로 기관을 움직여 밖으로 가는 석판을 열었다.
광자는 눈을 감았다.
눈을 찌르는 빛 때문이 아니었다. 생기가 느껴지지 않는 소림의 모습. 메마른 바람만 불고 있는 소림사의 모습을 차마 볼 수가 없어서 눈을 감아 버렸다.
“보겠습니다. 멸문당한 소림을 보겠습니다.”
먼저 간 사부에게 하는 말일까.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광자는 번쩍 눈을 떴다. 그리고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아미타불!”
아무것도 없었다. 천불전도, 나한전도, 백의전도........ 그리고 소림을 채웠던 승려들도.
온통 시체들로 가득한 소림은 공동묘지처럼 삭막했다.
물끄러미 전면을 쳐다보던 광자의 시선은 한곳에 고정되었다. 종류와 고루가 있는 곳, 만든 지 얼마 되지 않은 듯, 누런 황초를 드러낸 봉분 두 개가 있었다.
아마 마을 사람 중 누군가가 몰래 만들었을 것이다.
“사부님!”
북채 두 개가 나란히 놓여 있는 무덤을 보며 광자는 무릎을 꿇었다.
울 수가 없다. 사숙이 치는 종소리를 들었기에, 사부가 치는 북소리를 들었기에 울어서는 안 된다.
새로운 소림을 만들 때까지는 결코 울 수가 없다.
“광오 사제, 목탁을 찾아보게.”
말없이 봉분을 주시하던 십팔나한들은 폐허 이곳저곳을 뒤지기 시작했다. 한참 동안 폐허를 뒤지던 십팔나한은 각각 목탁을 찾아 광자가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잠시 후.
데엥!
둥둥! 둥둥둥! 둥둥! 둥둥둥!
똑! 또르르르! 똑똑! 또르르르르!
“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시(觀自在菩薩 行心般若波羅蜜多時)! 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照見五蘊皆空 度一切高厄)!”
폐허로 변한 소림사에서 범종 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고루에서 북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 아래서 목탁 소리와 더불어 반야심경을 암송하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계곡을 가득 메웠던 종소리는 숭산으로 퍼져 나갔다. 숭산으로 퍼져 나갔던 북소리는 소실산을 타고 올랐다. 소실산을 타고 올랐던 목탁 소리는 태실산으로 스며들었다. 태실산으로 스며들었던 반야심경의 독경 소리는 하늘로 솟구쳐 올랐다.
그것은,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소림의 외침이었다.
뒷날 아침까지 이어지던 그 소리는 일출과 함께 뚝 그쳤다. 그리고 소림은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적막함과 황량한 모습으로.
임자 만났다 또는 된통 걸렸다는 말은 일이 마음먹은 대로 안 될 때 흔히 쓰는 말이다.
지금 섯다의 상황이 그랬다.
그가 사방을 포위하고 있는 자들과 맞닥뜨린 건 반 시진 전이었다. 검붉은 갑주에 음습한 기운으로 무장한 녀석들을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별것 아닌 걸로 여겼다.
기껏해야 군부의 무인들 중 좀 강한 자들로만 여겼다.
그런데 아니었다. 다섯 명씩 조를 짜 사방에서 압박해 들어오는 그들은 대단한 무공을 지닌 고수들이었다.
“씨팔 좃됐네!”
나직한 욕설을 뱉어낸 섯다는 주홍을 쳐다보았다. 적의 정체를 알고자 함이었다. 하지마 주홍이라 하여 그들을 알 리가 없었다.
다만 하후장설의 숨겨진 힘이 아닐까 하는 추측만 할 뿐이었다.
“나도 처음 보는 자들일세. 아마 하후장설의 세력이지 싶네.”
“그건 나도 알고 있소. 저 정도로 강한 놈들을 길러 낼 무림 문파가 강호상에는 없다는 게 문제 아니겠소.”
물론 지금 상황은 모사와 계획했던 일이다. 하후장설 주변의 고수들을 끌어내기 위해 밖에서 작업을 했는데 생각보다 엄청난 자들이 걸려든 것이다.
더구나 다섯 명씩 조를 짠 자들은 무슨 진식이라도 구축했는지 강기를 머금은 공격이 먹히지 않았다. 마치 솜이 물을 흡수하듯 그것들을 흡수해 버렸다.
“참! 천태진, 그 자식이 내시 놈의 부하가 된 게 언제요?”
문득 짚이는 게 있어 섯다는 물었다.
“아마 십오 년 전부터 그랬을 거요.”
“그럼 천태진을 보낸 새끼는 황제 녀석이 아니라 내시 놈이었겠구먼.”
“십중팔구는........”
주홍은 인상을 찌푸렸다. 지금껏 많은 날을 이들과 같이 했지만 황제 뒤에 폐하를 붙인 경우는 한 번도 없었다. 대부분 놈이 아니면 그 자식으로 황제를 부르고 있다.
이들에게 황제가 어떤 존재인지 궁금하기 짝이 없었다.
“어이, 철갑옷! 한 가지만 물어볼게. 혹시 무극계라고 알아?”
하지만 섯다의 물음에 대한 대답은 엉뚱한 곳에서 나왔다.
“하후장설이 무극계의 군사라고 하더구먼.”
“엥?”
어이없다는 얼굴로 섯다는 주홍을 쳐다보았다. 상대가 무극계에서 나온 자들임을 알고 있는 사람이 지금껏 침묵하고 있었다니. 바보가 된 기분이었다.
하지만 섯다의 놀라움은 육한수에 미치지 못했다.
“그걸 어떻게 알았는가?”
온몽마혼대 선두에 있던 육한수는 상대를 압박해야 한다는 사실도 잊고 질문을 던졌다.
하후장설이 무극계 군사라는 사실은 무극계에서도 극히 일부분만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런데 눈앞에 있는 자가 알고 있었다.
“지저사령계에서 나왔는가?”
지금 상황에서 염두에 둘 만한 곳은 그곳밖에 없기에 하는 말이다. 일반 무림 문파에서 동창제독이자 무극계 군사인 가주를 노리고 무림인을 파견했다는 자체가 어불성설인 게다.
‘이것들이?’
섯다는 태연한 척하려고 안간힘을 썼다. 지저사령계, 그 말 또한 조우령에게 무수히 들었던 말이다.
과거 일대 파멸안이 나타날 때까지만 해도 지저사령계에는 신가라 불렸던 많은 부류의 가문이 살고 있었다고 했고, 수신가도 그들 중 한 부류라고 했다.
하지만 지저사령계는 파멸안에 의해 괴멸당하여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고 했다. 그것도 천오백 년 전에.
그런데 그곳을 언급하는 자가 있다니.
‘재밌는 일이 벌어지겠군.’
슬쩍 미소를 머금은 섯다는 고개를 끄덕이며 육한수를 향해 말했다.
“맞다. 나는 그곳에서 나왔다. 정식 출범하기 전에 세상을 둘러보기 위해 나왔는데....... 내시 놈이 설치고 있더란 말이지. 너도 알다시피 그건 반칙이잖아.”
섯다는 입에서 나오는 대로 대충 내뱉었다. 지저사령계에 대해 자세히 알지도 못할뿐더러 놈들을 혼란스럽게 하는 게 목적일 뿐, 실제 두 곳을 상잔시킨다거나 할 생각은 없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받아들이는 육한수는 심각했다.
무극계가 황실을 먼저 장악하려 했던 이유는 중원 어딘가에 있을 지저사령계의 존재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곳에서 나왔다는 자가 나타난 것이다.
[어정인, 너는 제독가로 달려가라!]
“지저사령계라....... 그곳에서의 신분은?”
부하에게 전음을 보낸 육한수는 싱긋 미소를 물며 물었다. 지저사령계에서 나왔다는 말을 듣자마자 가슴 저 밑에서 뜨거운 기운이 차올랐다. 그것은 시작은 같았지만 다른 이념을 가진 숙명의 적에게서 느껴지는 투기였다.
“사풍대(邪風隊)의 대주다. 지저사령계의 주력이라 할 수 있는 곳이지.”
‘씨팔, 광풍대란 이름은 아무래도 잘 지어진 것 같아. 한 자만 바꿨는데도 무식하게 멋있는 단체가 만들어지잖아.’
스스로 생각해도 그럴싸하다는 듯 섯다는 만족스런 미소를 머금었다.
“사풍대(邪風隊) 대주라. 나는 운몽하후세가의 운몽마혼대의 대주 육한수다. 그대와 일전을 결하고 싶다!”
심장을 비집고 나올 듯한 투기를 견디지 못한 육한수는 진을 이탈하여 전면으로 나서며 소리쳤다.
상대가 이기어도술을 터득한 강자라지만 결코 패하리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자신 또한 최근에 이기어검술의 한 자락을 잡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번 대결로 이기어검술의 실체를 잡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육한수라 했던가? 무극계에 그대 같은 인물이 있을 줄은 생각지 못했다. 그댄 멋진 친구다. 지저사령계에서도 많은 인물이 있지만 그들보다 훨씬 낫다. 죽더라도 이름은 기억해 두마. 나는 장대근이다.”
육한수를 향해 엄지손가락을 치켜든 섯다는 감탄한 얼굴로 말했다. 하지만 그의 내심은 좋아 죽을 지경이었다.
어떻게 돌파구를 만들까 내심 고심하고 있었다. 그런데 놈이 알아서 해주니 그보다 좋은 일이 어디 있겠는가.
더구나 하후장설에게 보고를 하러 가는 놈까지.
‘조또, 물건만 서면 만사형통인데!’
자신의 머리에 감탄하던 섯다는 와락 인상을 구겼다. 머리부터 시작하여 몸까지 모든 것들이 젊어졌는데 정작 필요한 그놈은 아직 팔십대다.
주홍이 치료해 주겠노라고 장담했지만 내심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가만! 나를 이렇게 만든 놈들이 저 자식들이잖아? 니들 다 죽었다, 새끼들아!’
무심한 눈으로 이편을 쳐다보는 운몽마혼대를 향해 섯다는 살기를 흘렸다. 그런 섯다를 쳐다보며 육한수는 검을 뽑아 들었다. 투기가 극에 달했을 때 대결을 하고 싶었다. 상대의 피를 봐야만 폭발적으로 뛰는 심장이 진정될 것이다.
“나의 무공은 귀령마검법(歸靈魔劒法)이라 부른다!”
낮게 소리친 육한수는 가슴 앞으로 귀령마검을 수직으로 세웠다.
그의 몸에서 흘러나온 검붉은 기운이 몸을 완전하게 감싸는 순간, 육한수의 입에서 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염왕귀혼(閻王歸魂)!”
따라라랑!
듣기 거북한 소리와 함께 검붉은 운무와 휩싸인 육한수의 신형이 섯다를 향해 빛살처럼 날았다.
주홍을 뒤편으로 밀어낸 섯다는 낮게 고함을 내질렀다. 번쩍 들어 올려진 오른쪽 다리가 검은 기운을 흘리며 허공을 수직으로 잘랐다.
용왕유권의 기운을 가득 포함한 검은 기운은 다가오는 육한수를 향해 천천히 밀려갔다.
찌리링!
일 초부터 두 사람의 무공은 강기였다. 같은 색의 강기가 두 사람 중간에서 거칠게 부딪치며 묘한 소성을 남겼다.
“얼레?”
일순 섯다는 놀란 얼굴로 육한수를 쳐다보았다. 그는 물러서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전면으로 한 걸음 다가서며 검을 들어 올리고 있는 것이다.
“염왕현세(閻王現世)!”
이어 날카로운 고함소리와 함께 번쩍 들어 올린 육한수의 검에서 무시무시한 기운이 흘러나왔다.
“놀랍군, 어둠의 힘을 빌려서 쓰는 무공이라니!”
섯다는 감탄사를 발했다. 놀랍게도 육한수의 무공인 귀령마검법은 어둠의 힘을 극대화할 수 있게 만들어진 무공이었다.
검에서 흘러나온 기운은 육한수의 내공에 어둠의 기운이 더해 가공할 힘이 되었다. 무공의 이름처럼 지옥염왕의 현세를 보는 듯했다.
‘가만있어 봐라, 어떻게 요리를 해야....... 그래! 그러면 되겠네.’
고개를 끄덕인 섯다는 육한수가 뿌려대는 검은 기운을 향해 돌진했다.
콰앙!
두 번째 폭음이 터지고 두 사람은 동시에 물러났다.
“동수?”
재빨리 전면의 발자국을 살핀 육한수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두 사람은 공히 다섯 걸음을 물러났고, 발자국의 깊이 또한 비슷했다.
“염왕사무(閻王死舞)!”
조금 상기된 목소리가 육한수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이기어도술을 터득한 무인과 동수를 이루었다는 사실에 고무되었던 탓이었다.
검은 구름이 춤을 추고 있는 듯했다.
떠다니는 구름처럼 이리저리 움직이는 검붉은 기운은 섯다의 주변을 배회했다. 그리고 그 속에서 거슬리는 소성과 함께 날카로운 기운이 쏟아져 나왔다. 염왕사무라 했던 삼 초는 한 번의 공격으로 끝나는 무공이 아니었다.
상대가 지칠 때까지 끊임없이 이어지는 연환공격이었던 것이다.
더하여 공격이 계속될수록 그 세기 또한 강해지는 특징을 가진 무공이었다.
확연히 눈에 띄지는 않았지만 언뜻 보기엔 섯다가 밀리는 것처럼 보였다.
“내 걱정은 하지 말고 마음 놓고 공격하시오.”
자꾸만 뒷걸음치는 섯다를 보며 주홍은 고함을 질렀다. 그가 일부러 물러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잘못 생각한 건가?’
여전히 물러나는 섯다를 보며 주홍은 내심 중얼거렸다. 방어하는 것처럼 보이던 섯다가 이번에는 운몽마혼대 주변을 돌고 있었던 것이었다.
다분히 의도적인 것처럼 보였다.
‘그렇군. 독이었어.’
일순 주홍은 미소를 물었다. 섯다의 의도를 비로소 알아챘다. 그가 노리는 대상은 운몽마혼대였다. 대주의 명예를 지켜 주기 위함인지 운몽마혼대는 진식을 구축하고 있을 뿐 어떤 행동도 취하지 않고 있다.
주홍의 생각대로였다.
연신 몸을 피하고 다니던 섯다는 운몽마혼대 주변으로 무영독을 살포하고 다녔다. 무극계의 인물이란 말을 듣지만 않았어도 지금처럼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승천무극대혼진에서 보았던 그들의 무공은 생각보다 강했다. 자신이 익혔던 앙천마마묵독공보다 강한 무공들도 꽤 있었다.
물론 독성지체를 이뤘기에 패하리란 생각은 하지 않지만 부담이 되는 건 사실이었다.
“효과가 나오는 모양이네?”
조금씩 호흡이 거칠어지는 운몽마혼대를 보며 섯다는 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웃어?”
“그래, 임마. 지금부터는 너를 잡겠다. 가진 바 능력을 전부 발휘해야 할 거다.”
수중의 도를 불끈 틀어쥔 섯다는 육한수가 만든 검은 운무를 향해 뛰어들며 힘차게 도를 그었다.
“천지양단(天地兩斷)!”
순간 육한수는 놀라운 광경을 목격했다. 삼 장 높이에서 시작한 붉은 광채가 지면까지 길게 선을 만들더니 뒤이어 자신을 향해 무자비하게 밀려오는 것이었다.
비단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한 번의 공격을 마친 상대는 재차 같은 자세로 같은 동작을 취했고, 삼 장에 달하는 기다란 붉은 선이 자신을 향해 다가왔다.
“타핫! 타핫! 타핫!”
하나, 둘, 셋, 넷, 다섯.......!
셀 수 없이 생겨난 붉은 선에 육한수는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전면에 붉은 벽이 세워진 것 같았다. 강기를 허공에 남기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경지거늘 그것들로 벽을 쌓다니.
“빌어먹을! 이기어도술을 그런 식으로 펼쳤군.”
낮게 툴툴거린 육한수는 귀령마검에 전 내공을 주입했다. 눈앞으로 다가오는 수십 개의 붉은 강기는 이기어도술의 변형이었다.
검을 굳게 틀어쥔 육한수는 지면을 박차고 허공으로 솟구쳐 올랐다.
“이-얍!”
짧게 소리친 섯다는 양손을 번쩍 쳐들었다. 그러자 그의 전면에 자리했던 강기의 벽 또한 육한수의 신형을 따라 허공으로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의지로 기를 조정하는 이기어도술의 실체. 힘으로 파괴하기 전에는 결코 없앨 수가 없다.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붉은 덩어리를 보며 육한수는 입술을 깨물었다. 뒤이어 그의 귀령마검이 검은 운무를 뭉클뭉클 뿜어내고 육한수의 입에서는 천지를 울리는 고함이 터져 나왔다.
“염왕무(閻王無)!”
순간 귀령마검에서 흘러나온 검은 기운이 창처럼 변하는가 싶더니 붉은 덩어리를 향해 빠른 속도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찌지잉! 찌익!
비단 천이 찢기는 소리처럼 기이한 소성이 두 사람 사이에서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귀령마검에서 쏟아진 기운을 조정하기 위해 전 내공을 끌어올린 육한수의 얼굴이 붉게 변했다. 이기어검술을 성취하지 못한 자신에게는 아직 무리였지만 지금으로서는 방법이 없었다.
내공의 운용과 마음의 일치. 그 길만이 붉은 덩어리를 막아 낼 수 있을 것이다.
“된다!”
육한수는 희열에 찬 고함을 질렀다. 십여 개에 달하는 강기의 창들이 자신의 의지를 받아들여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왼편으로 의지를 보내자 두 개의 창이 빠르게 움직이는 모습이 보였다. 오른편에 있는 붉은 덩어리를 파괴하라고 의지를 보내자 광포한 속도로 날아가는 검은 창들이 눈에 잡혔다.
드디어 내공과 마음이 하나가 된 이기어검술을 성취한 것이다.
그러나 이기어검을 성취했다는 기쁨도 잠시. 육한수는 허공으로 솟아오르는 상대의 모습을 봐야 했다.
온통 검은색으로 변한 상대의 몸에서는 알 수 없는 기운이 흘러나왔다.
“심검(心劍)?”
육한수는 눈을 감았다. 이기어검을 성취한 순간, 가주인 하후장설과 같은 수준으로 올라선 순간 심검을 목격하다니.
운이 좋은 건지 아니면 재수가 없는 건지 알 수가 없다.
“빌어먹을!”
스스스!
나직한 욕설을 끝으로 육한수의 신형이 가루로 흩어져 사방으로 흩뿌려졌다.
“타핫! 광마선풍!”
육한수의 신형이 가루로 흩어지는 순간 섯다의 입에서 광포한 고함이 터져 나왔다. 육한수의 죽음으로 인하여 넋을 잃고 있는 운몽마혼대를 없앨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던 섯다는 전면으로 도를 날렸다.
붉게 타오르는 불길처럼 이글거리는 도가 운몽마혼대를 향해 빛살처럼 날았고, 그 뒤를 검은색으로 변한 섯다의 신형이 따랐다.
“막아라!”
정신을 차린 운몽마혼대는 고함을 지르며 진을 정비했다.
그러나.
“허억! 진기가 이어지지....... 크아악!”
여기저기서 처절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붉은 광채를 뿜어내는 도와 검은 광채를 발하는 커다란 도. 두 개의 도는 종횡무진 운몽마혼대의 진영을 휘젓고 다녔다.
도(刀)와 도(刀)의 주인이 함께 펼치는 이기어도술. 그것은 광풍도법의 삼 초였다.
더구나 상대는 독에 중독되어 진기조차 제대로 끌어올리지 못하고 있었으니.
“저럴 수가! 놈은 인간이 아니다. 알려야 한다!”
정신없이 백야거를 향해 몸을 날리는 인물. 멀리서 싸움을 지켜보던 이준철이었다. 이준철은 기절할 지경이었다.
이기어도술을 익힌 고수임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호피 사내의 무공은 전율적이었다.
심장이 오그라들어 숨쉬기조차 힘들었다.
깊게 심호흡을 하여 마음을 진정시킨 이준철은 재차 바닥을 찼다.
“정말이더냐? 진정 놈이 지저사령계에서 나왔다고 하더냐?”
운몽마혼대원의 보고를 접한 하후장설은 인상을 찌푸리며 언성을 높였다. 가장 우려했던 일이 발생하고 말았다.
윗선에서 그렇게 찾기를 원했던 자들. 여전히 종적을 찾지 못했다는 지저사령계의 인물이 북경에 나타나다니.
일견 지금까지의 상황이 이해가 갔다.
“잡아 오면 알겠지.”
이내 표정을 수습한 하후장설은 의자 깊숙이 몸을 묻었다. 하지만 그의 얼굴은 밝지 못했다. 뭔가 어긋나고 있는 듯한 느낌 때문이었다.
아들인 하후야의 죽음도 생각지 못했던 일이고, 귀광두를 놓친 것도 예상 밖의 일이다.
그리고 이제는 지저사령계까지.
“그래, 놈의 실력은 어느 정도더냐?”
“싸움이 시작되기 전에 그곳을 떠났습니다. 그래서........”
장한은 말끝을 흐렸다. 지저사령계의 사풍대주란 말만 듣고 바로 떠나왔기에 싸움 결과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다만 호피 가죽을 걸친 자의 무공은 대주에 비해 결코 약하지 않다는 사실만 알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하후장설의 의문은 오래가지 않았다.
득달같이 들이닥친 이준철에 의해 싸움 현장의 소식을 생생하게 들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뭐라고 했느냐! 운몽마혼대가 밀리고 있다고 했느냐?”
이준철의 보고를 받던 하후장설은 벌떡 일어나며 소리를 질렀다. 대주인 육한수가 죽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운몽마혼대는 초극강자를 상대하기 위해 만든 단체다. 다섯 명씩 한 조를 이뤄 구축한 진식에 걸리면 설령 심검을 성취한 무인이라 할지라도 견뎌 내기 힘들다.
그런데 그들이 밀리고 있다니.
“대주께서 일대일로 싸움을 벌였습니다.”
이준철은 떨리는 음성으로 그때의 상황을 다시 설명했다.
“이런, 병신!”
하후장설의 입에서 나직한 욕설이 튀어나왔다. 자신보다 강한 고수를 상대로 대결을 청하다니, 미친놈이 아니면 그럴 수가 없는 일이다.
“사령! 사령, 게 있느냐?”
“부르셨습니까, 가주!”
“운몽사령대(雲夢死靈隊)를 데려가라!”
“가주!”
벽에서 튀어나온 사령은 흠칫 놀라며 하후장설을 불렀다. 자신들이 떠나면 가주는 혼자 남게 된다. 또 다른 방수가 있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가주의 곁을 떠나야 한다는 사실이 못내 걸렸던 탓이다.
“난 백야 하후장설이다!”
하후장설은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알겠습니다, 가주!”
사령은 고개를 숙였다. 지금 상황에서 하후장설을 거스른다는 것은 섶을 지고 불속에 뛰어드는 것과 같다. 일단 그의 명령을 따라야 하리라.
“속히 다녀오겠습니다.”
그 수밖에 없다. 최대한 빠른 시간에 지저사령계 녀석을 정리하고 돌아오는 수밖에.
“나를 따르라!”
사령의 목소리가 울리자 안쪽으로 통하는 벽을 제외한 삼면에서 그림자처럼 생긴 자들이 속속 튀어나왔다.
“반 시지면 되리라!”
어정인과 이준철을 따라 몸을 날리는 부하들을 보며 사령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톡! 톡! 톡톡톡! 톡톡!
“또 두드리고 있군.”
탁자를 두드리는 손을 멈추며 하후장설은 쓰게 웃었다. 언제부터인가 모르게 생긴 버릇이다. 일이 풀리지 않을 때나 마음이 심란할 때면 무심결에 탁자를 두드려 댔다.
“별일 없겠지. 아니, 없어야 한다! 절대로.......응?”
기름때가 잔뜩 묻은 그곳을 쓱 문지르던 하후장설의 얼굴이 흠칫 굳어졌다. 문밖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던 탓이었다.
벌컥!
재빨리 내공을 동원하여 문을 열었다.
“여어! 안녕하신가, 내시! 나이를 먹어서 그런가? 한곳에 오래 있으면 허리가 결려서 말이야. 아이고! 자식들 빨리 좀 나가지, 힘들어 죽는 줄 알았네.”
정원 한편에서 일어나 허리를 툭툭 두드리는 인물. 천태진의 집을 떠났던 모사였다.
“놀랍군. 백야거로 숨어드는 자가 있을 줄이야.”
당혹한 얼굴로 하후장설은 모사를 쳐다보았다. 백야거는 안쪽에서 허락하지 않으면 개미 한 마리 얼씬할 수 없는 곳이다.
더구나 북경에 나타난 살인자들 때문에 특급 경계령이 내린 상황이 아닌가. 그런데 자신의 집무실 바로 앞 정원에서 자객으로 보이는 자가 나타나다니.
“헌데 자객치곤 너무 쉽게 모습을 드러낸 것 아니냐?”
“얼레? 내시 네 눈엔 이 전영이 자객으로 보인단 말이야? 주홍에게 말해서 쌈빡한 옷으로 구해 입던지 해야지.”
여전히 호피를 걸치고 있는 제 모습을 보며 모사는 인상을 찌푸렸다.
“그가 죽지 않고 돌아온 모양이군.”
주홍이란 말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하후장설의 얼굴은 태연했다. 자신감 때문이었다. 주홍을 따르는 자들은 전부 처형한 상태고, 설령 돌아왔다 해도 그가 설 자리는 없다.
다만 눈앞에 있는 자, 자신을 향해 내시라고 태연하게 말하는 자가 걸릴 뿐이었다.
더구나 운몽사령대가 빠져나가는 순간을 기해 나타났다. 육한수를 죽인 자와 같은 패거리임에 분명할 터였다.
“쩝! 이름값도 못하는 자식이 황제가 되겠다니. 내시 새끼조차 우습게 보는 놈이 황제는 무슨.”
“죽일 놈!”
말끝마다 내시를 들먹이는 모사의 어투에 하후장설의 눈자위가 꿈틀거렸다. 이어 그의 몸에서 진득한 살기가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문득 녀석의 말투에서 한 인물이 떠올라 더욱 분노했다. 귀광두, 동창제독인 자신을 향해 당당하게 내시라 불렀던 놈.
“맞다! 꼭 물어볼 게 있었는데 그냥 넘어갈 뻔했네.”
하후장설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던 모사는 머리를 툭툭 치며 바보처럼 웃었다.
“다른 게 아니고, 자식이 있었다고 들었다. 너도 보다시피 난 얼굴이 젊잖냐. 그런데 그놈이 내시 물건처럼 작동을 안 한단 말이야. 그래서 네 녀석을 만나면 꼭 물어보고 싶었다. 자식을 낳게 된 비결을 말이다.”
“이익.......!”
“아아, 그렇다고 내 말을 곡해하지는 말고, 굳이 말해 주기 싫다면 즐겨 먹는 음식 정도만 말해 줘. 너도 알잖아, 고개 숙인 남자는 사회생활을 하기 힘들다는 사실 말이야. 은혜는 반드시 갚을게.”
참으로 간절한 말이었다. 싸움을 하러 온 건지, 아니면 고자를 고치는 방법을 물으러 온 건지 모사의 얼굴 표정을 봐서는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죽으면....... 더 이상 쓸 일이 없을 텐데 알아서 뭐 할 거냐?”
폭풍 같은 기세를 흘리며 하후장설의 신형이 전면으로 날았다.
“치사한 자식! 뒈진 물건 세우는 방법 좀 가르쳐 달라는데 그게 무슨 엄청난 비밀이라고.”
빈정거리듯 말을 하고 있지만 모사의 표정은 신중했다. 하후장설의 몸에서 흘러나온 기도가 그만큼 대단했기 때문이었다.
하후장설의 손이 허리께로 이동하는 모습을 쳐다보던 모사는 양손을 힘차게 내밀었다.
쉬이익!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그의 양손에서 검붉은 광채가 쭈욱 뻗어나갔다.
“몽환일수유(夢幻一須臾)!”
번쩍!
날카로운 고함소리와 함께 하후장설의 허리춤에서 푸른 광채가 폭발적으로 터져 나왔다. 그의 허리춤에서 시작한 두 줄기의 푸른 광채는 어둠을 가르는 빛줄기처럼 공간을 파고들었다.
쿠앙! 콰앙!
검붉은 광채와 푸른 광채가 물결처럼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그 여파는 하후장설의 집무실까지 미쳤다.
쿠르릉!
대들보가 무너지고 지붕이 내려앉기 시작했다.
하지만 하후장설은 뒤쪽까지 신경 쓸 틈이 없었다. 물러서던 몸이 멈추자마자 재차 허공을 박찼다.
“몽환광섬극(夢幻光閃極)!”
하후장설의 연검이 무수한 궤적을 그리자 그곳으로부터 셀 수 없이 많은 광선이 비처럼 쏟아졌다. 어둡던 동굴이 무너져 햇살이 들어올 때의 모습이 이러할까.
몽환광섬극. 수십 개의 빛살 중 어떤 것이 실체인지는 무공을 펼치는 하후장설 또한 알지 못한다. 펼칠 때마다 실체가 달라지는 점이 몽환검법의 최고 장점이었다.
모사의 대응도 신속했다.
조금씩 뒤로 물러나며 양손과 발을 빠르게 휘저었다. 그러자 그의 앞으로 검붉은 광채가 생겨나고, 그 방패는 하후장설이 쏘아 보낸 푸른 광채를 향해 밀려갔다.
“차앗!”
모사의 입에서 두 번째 고함이 터져 나왔다. 하나의 방패로는 부족했던지 또 다른 강기를 전면으로 뿌려대고 있었다.
쿠앙!
“애걔?”
허무하게 스러지는 검붉은 방패를 보며 모사는 어색하게 웃었다. 하후장설이 펼친 검법에는 이기어검의 기운이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히죽!
뒤편을 향해 고개를 돌린 모사는 사악한 미소를 머금었다. 권력의 상징인 듯, 화려하기 그지없는 수많은 건물들이 눈에 들어왔다.
쿠웅!
“으아아아악!”
처절한(?) 고함을 내지르며 모사의 신형이 실 끊어진 연처럼 뒤편으로 빠르게 날아갔다.
“놈!”
하후장설은 의아한 얼굴을 했다. 단 이 초 만에 상대를 물러나게 할 줄은 생각지 못했던 탓이다. 속임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설사 속임수라 해도 상관없다. 선공은 곧 승리를 의미하므로.”
이내 고개를 저었다. 비슷한 실력을 가진 자들끼리의 싸움은 선공하는 자가 훨씬 유리하다. 공격하는 자의 내력 소모가 수비하는 자보다 훨씬 적기 때문인 것이다.
콰과쾅!
커다란 폭음과 함께 하후장설 집무실 전면의 건물이 폭격을 당한 것처럼 무너지기 시작했다.
“크아악! 아악!”
미처 도망치지 못한 자들이 있었던지 무너진 건물 잔해 속에서 비명 소리가 흘러나왔다.
“몽환천광쾌(夢幻天光快)!”
하지만 하후장설은 아래쪽에서 들려오는 비명 소리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더욱 내공을 끌어올려 몸을 날리며 몽환검법의 삼 초를 펼쳤다.
가솔들보다 놈이 먼저였다.
놈을 잡아 없앤 다음 수습해도 늦지 않을 터였다.
“으아아아악!”
모사의 입에서 두 번째 비명이 터지고 또 다른 건물 하나가 모래성처럼 허물어졌다.
“놈! 그렇다고 하여 내가 멈출 줄 알았더냐!”
광포하게 고함을 지른 하후장설은 재차 연검을 휘둘렀다. 그의 푸른 연검에서 푸른 광채가 모사를 향해 쏟아지고, 조금 전과 마찬가지로 모사는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뒤로 밀린다.
그리고 또 하나의 건물이 뿌연 먼지를 남기며 쓰러진다.
쫓는 자와 도망치는 자. 두 사람의 모습을 보면 분명 그랬다. 더하여 하후장설이 이기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었으니.
모사의 신형이 파고들었던 건물 아래는 지옥을 보는 듯한 끔찍한 광경이 벌어지고 있었다.
건물 잔해에 깔려 신음을 내지르던 그들은 이내 한 줌 핏물로 녹아 바닥으로 스며들었다.
건물 안으로 파고든 순간 모사가 아래를 향해 앙천마마묵독공을 시전해 버린 것이었다. 아니 굳이 독공을 시전할 필요가 없었다.
온통 검은색으로 변한 그의 몸 자체가 이미 극독이었다.
그런 상황을 아는지 모르는지 하후장설은 더욱 거칠게 공격을 가했고, 모사는 끊임없이 물러났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허공을 날며 쉴 새 없이 공격을 주고받던 두 사람은 동시에 멈춰섰다.
“어라? 내시 새끼, 아직 두 채가 더 남았는데 벌써 그만하면 어떻해?”
“이럴 수가.......”
그제야 정신이 돌아온 하후장설은 놀란 신음을 뱉어 냈다. 북경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했던 백야거는 폭풍이 휩쓸고 간 자리처럼 황폐했다. 건물이 무너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더욱 공격에 박차를 가했다. 조금이라도 빨리 끝내 피해를 줄이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어느새 남아 있는 건물은 아무것도 없었다.
대문 앞에 온전한 모습으로 있는 건물은 곡간과 창고뿐.
아울러 무너진 건물에서는 어떤 인기척도 감지되지 않았다.
부상당한 가솔들의 신음 소리가 흘러나와야 함에도 말이다.
“독(毒)인가?”
“독? 맞다! 병을 치료해 달라고 해놓고는 증상을 말하지 않았네. 나는 지난 오십 년간 독물만 먹고 살았거든. 혹시 그 때문에 물건이 서지 않는 게 아닐까?”
“개자식, 끝까지!”
진득한 살기를 흘린 하후장설은 연검을 들어 올리며 전면을 향해 몸을 날렸다.
“씨팔놈! 방법 좀 가르쳐 달라니까 괜히 사람을 잡고 지랄이야. 나도 더 이상 못 참겠다, 새꺄!”
지금껏 도망치던 것과는 달리 검게 변한 모사의 신형이 하후장설을 향해 돌진했다.
“네가 죽어야 할 이유 하나는 내 형님을 가지고 놀았다는 거야.”
번쩍 들어 올린 다리를 사정없이 내리찍으며 모사는 소리쳤다.
콰앙!
“크윽!”
하후장설의 입에서 짓눌린 듯한 비명이 흘러나왔다. 일 장가량 밀린 하후장설은 경악한 얼굴로 모사를 쳐다보았다. 지금껏 끊임없이 밀렸던 녀석이 이번에는 한 걸음 다가와 있었다.
“아무런 타격도 없단 말이더냐?”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소리쳤다. 설령 거짓으로 도망쳤다 해도 백여 번의 공격을 허용한 자다. 그런데 놈은 여전히 멀쩡했다. 그동안 싸움을 했다는 사실이 무색할 정도였다.
“웃기는 놈일세. 내가 물건이 고장 나 쓰지는 못한다면 내시 새끼에게 당할 정도는 아냐, 임마!”
나지막이 이죽거린 모사는 재차 오른발을 들어 올렸다.
똑같은 자세, 똑같은 동작, 그리고 똑같은 말이 흘러나왔다.
“네가 죽어야 할 두 번째 이유는 내 형님을 몰라봤다는 거야!”
슈아악!
“허헉!”
대여섯 개에 달하는 검붉은 광채가 창처럼 찔러오자 하후장설은 헛바람을 들이키며 물러났다. 하지만 물러났다고 하여 검붉은 광채를 떨쳐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결국 몽환검법 이 초를 펼칠 수밖에 없었다.
“커억!”
“네놈이 죽어야 할 세 번째 이유는 내 형님을 우습게 봤다는 거야.”
팡! 팡팡팡! 팡팡팡!
모사의 발이 허공에 무수한 흔적을 남겼다. 덩달아 그의 양손까지 움직이자 하후장설의 전면에는 셀 수 없이 많은 점들이 생겨났다.
“이건?”
깜짝 놀란 하후장설은 재빨리 검을 들어 둥글게 막을 쳤다. 마치 밤하늘에 떠 있는 별처럼 보이는 그것들은 왠지 모를 두려움을 안겨 주었던 것이다.
“네놈이 죽어야 할 네 번째 이유는 내 형님을 반역자로 선포했다는 거야.”
“누구냐!”
원을 그리듯 주변을 둥글게 감싸는 검은 덩어리를 보며 하후장설은 낮게 소리쳤다. 반역자란 말 때문이었다.
“독을 사용하는 자, 그리고 두 사람. 설마.......!”
하후장설은 해쓱한 얼굴로 상대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상대는 많이 쳐줘야 이제 사십 정도. 결코 그들일 리가 없는 것이다.
“그 설마가 맞아, 새꺄. 그리고 내가 형님으로 부르는 사람은 묵안혈마고!”
말을 마침과 동시에 모사의 신형은 하후장설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백산에게 틈틈이 배웠던 무상신법이었다.
“어떻게.......?”
오른팔이 있던 자리가 허전해졌음에도 불구하고 하후장설은 알아차리지 못했다. 천붕십일천마의 두 사람, 독천쌍마였다.
더욱 황당한 노릇은 귀광두를 향해 묵안혈마라고 한다.
운 좋게 광혈지옥비를 얻은 게 아니라 묵안혈마 본인이라니.
믿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상대는 대답을 해주지 않았다. 다만 좀 전보다 차가운 목소리만이 들려올 뿐이었다.
“네가 죽어야 할 마지막 이유는 우리를 고자로 만드는 데 일조를 했다는 것이다. 차라리 젊게 해주질 말든지, 젊어지게 했으면 거시기의 성능을 복구시켜 주든지. 너도 사내니까 알 것 아냐. 먹고 싶어 죽겠는데, 미치도록 먹고 싶은데 못 먹을 때의 기분 말이다. 내가 그래, 개자식아!”
이번에는 하후장설의 왼팔이 떨어져 나갔다.
“크아악!”
그제야 정신이 돌아왔는지 하후장설은 처절한 비명을 내질렀다.
“죽인다!”
검을 휘두르기 위해 오른팔을 들어 올렸다. 아니, 들어 올리려 했다. 하지만 마음뿐, 그의 오른편에는 아무것도 올라오지 않았다.
“병신! 팔이 없어진 지가 언젠데.”
또 한 번의 무상신법이 펼쳐지자 하후장설은 단전에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뿐만 아니라 벌어진 입 안으로 붉은 주먹이 박혀 드는 걸 망연한 눈으로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자결을 방지하기 위한 광견조만의 손속이 오십 년 만에 나타난 것이었다.
“죽여 다오!”
하후장설은 애원했다.
“말했잖아. 나도 그러고 싶은데 주홍이 안 된다고 하더라. 네 녀석은 산 채로 자금성 성문에 걸리게 될 거다. 그리고 그동안 네놈을 따랐던 것들은 전부 참수를 당하게 된다. 한 놈도 남김없이 전부.”
하후장설의 양팔을 지혈한 모사는 그를 허리에 끼고 백야거를 나섰다. 섯다가 있는 곳으로 가기 위해서였다.
훗날, 역천혈사라 기록된 북경혈사의 시작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모사와 섯다의 활약으로.
첫댓글 감사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
즐감하고 감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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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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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독 감사 ..
잘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즐감하고 갑니다.
즐감합니다.
잘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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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독 ㄳ
감사합니다 .
잘 보고 갑니다. 감사 합니다..............................................
재미 있게 읽고 갑니다
항상 건강 하고 행복 하세요
감사 하고 사랑 합니다
잘보고갑니다
감사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0^
감사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
잘 보고 갑니다. 감사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