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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글 스크랩 조선시대 신천지와 이상향
잠실/맥(조문희) 추천 0 조회 78 14.12.13 11:09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

 

 

 

조선시대 신천지와 이상향

 

 

송기호(서울대학교 국사학과 교수)

 

 

I

 

1990년대에 ‘~토피아’, ‘~피아’란 말이 브랜드 끝에 붙는 것이 유행한 적이 있다. 이것은 물론 16세기에 영국의 토머스 모어(1478~1535)가 만든 ‘유토피아’ 란 말에서 유래된 것이다.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는 현실과 거리를 두고 멀리 떨어져 있는 초승달 모양의 섬으로 그려져 있다.

 

 

"그들의 연대기에 따르면 우리가 그곳에 도착하기 전까지 그들은 ‘적도 너머의 사람들’(그들은 우리를 이렇게 부릅니다)에 대해 거의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오직 한번 1200년 전에 배 한 척이 폭풍우에 밀려 유토피아에 온 적이 있습니다. 로마인들과 이집트인들 몇 명이 바닷가에 표류하였다가 그곳에 영구히 거주하였습니다.1)"

1) 토머스 모어 지음, 주경철 옮김,『유토피아』을유문화사, 2007 p.59

 

 

서양의 유토피아에 대응할 수 있는 것이 도연명(365~427)의 ‘도화원기(桃花源記)’에 나오는 무릉도원인데, 무릉에 살던 어부가 길을 잃었다가 방문한 세계가 그곳이다. 그곳도 외부세계와 단절되어 있는 곳으로 설정되어 있다.

 

 

그림 1. 몽유도원도(안견 그림)의 도원 부분

 

 

"고기잡이를 업으로 하는 무릉(武陵)의 어떤 사람이 계곡을 따라가다 길을 잃고 말았는데, 홀연히 복사꽃 숲을 만났다. 물가의 양편 수백 걸음 안에 다른 나무는 없었고, 향기로운 풀이 아름답게 자라고 떨어진 꽃잎은 어지럽게 날리고 있었다. 그 어부는 대단히 신기하여 다시 앞으로 나가 보니 숲이 끝났다. 숲이 끝나고 물줄기도 사라진 곳에 문득 산이 나타났다. 산에는 작은 입구가 있었는데 마치 광선이 비치는 것 같았다. 그는 배를 버리고 그 입구로 들어갔는데, 처음에는 극히 협소하여 겨우 사람이 통행할 정도였다. 다시 수십 걸음을 들어가자 넓고 탁 트인 곳이 보였다.

 ··· 이 사람이 왔다는 것을 들은 마을 사람들은 모두 찾아와 바깥세상의 일을 물었다. 그들은 자기들의 조상이 진(秦)나라 때의 난을 피하여 처자와 마을 사람을 이끌고 이 절경으로 와 다시 나가지 않았기 때문에 외부의 인간 세계와 격리되었다고 하며, 지금이 어떤 세상이냐고 물었다.2)"

2) 陳正炎·林其錟 저, 李成珪 역, 『中國大同思想硏究』 지식산업사, 1990 p.225

 

 

유토피아는 섬에 설정되어있고, 무릉도원은 육지 어딘가에 숨어있는 것으로 되어있다.

 

세종 때인 1447년에 안견이 안평대군의 꿈을 그림으로 표현한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는 무릉도원을 형상으로 잘 보여준다(그림 1).

왼쪽에는 현실세계가 펼쳐져 있고, 오른쪽에는 복사꽃이 만발한 무릉도원이 그려져 있는데, 두 세계는 험준한 산 속에 나 있는 좁고 구불거리는 길로 연결되어 있어 감히 범접하지 못할 듯하다.3)

우리 역사에서도 이처럼 알려지지 않은 섬이나 산 속 어딘가에 이상적인 피난처가 있을 것으로 생각해왔다.

 

3) 安輝濬·李炳漢, 『安堅과 夢遊桃源圖』 예경산업사, 1991

 

 

 

II

 

조선 전기에는 새로 개척해가던 북방 어딘가에 신천지가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김방귀가 고하기를 “북청 사람 최득의 말에, 신유년(1441) 8월 같은 마을에 사는 일곱 사람과 함께 갑산 서남쪽 산골짜기 사이에서 산에 올라가 6일간을 가니 큰 절이 멀리 보였습니다. 그래서 굵은 새끼를 나무에 맨 뒤에 그 새끼줄을 붙잡고 내려가서 절에 다가가니 중 아홉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중이 우리를 데리고서 서북쪽 작은 길을 따라가니 인가 70여 호가 살고 있었습니다. 우리들은 그 사람들에게 가서 ‘어디에 또 사람 사는 마을이 있는가.’라고 물으니, 그 사람들이 ‘또 한 마을에는 100여 호가 살고, 또
한 마을에는 80여 호가 산다.’고 대답했습니다. 우리들은 그러한 말을 듣고 왔다고 하였습니다.”고 하였다.

이런 김방귀의 말을 믿을 수 없지만, 이처럼 새로운 땅이 있다는 것은 우리나라 사람뿐 아니라 야인(野人, 여진족)들도 역시 떠들고 있는 것이다. (세종실록 24년<1442> 2월 8일)"

 

 

그림 2. 신천지로 지목된 삼수, 갑산 일대

 

 

이것은 세종의 지시 내용으로서, 함경도 갑산 어딘가에 신천지가 있다고 하였다. 왕은 사람들이 이곳으로 숨어들어갈 것을 염려하여 수색하도록 독려하였다.

갑산은 삼수와 더불어 압록강 상류에 있는 지명으로 우리나라에서 제일 험한 산골을 상징한다(그림 2).

그래서 ‘어떤 어려움이 닥치더라도’란 의미로 ‘삼수갑산을 가더라도’란 관용어가 생겨났다. 그렇게 험준한 산속 어딘가에 새로운 땅이 있고, 그곳은 찾기도 어렵고 접근하기도 어려운 길을 통해 현실세계와 연결되어 있다는 믿음은 무릉도원의 생각과 상통한다.

이듬해에는 벽동(碧潼)에 사는 산골사람 박정이 역시 갑산에서 새 땅을 발견했다고 보고하였다.

 

 

"지난 12년간 매 둥지를 찾으려 궁벽한 산속을 돌아다니다가 우연히 한 곳에 들어갔더니 무려 40여 가구가 살고 있었는데, 그 우두머리는 김인우라 하였습니다.
김인우 등이 나를 보고 머물기를 청하기에 열흘 가량 있으면서 술도 같이 마시며 자세히 그들의 내력을 물어보니, 모두 우리나라에 적을 두지 않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곳은 사방이 막혀서 바람이 적고 날씨가 포근했는데, 지름길 하나만 있어 겨우 출입할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습속이나 말, 음식, 집, 밭가는 쟁기 따위도 우리나라 것과 차이가 없었습니다. 곡식은 기장과 조를 심을 뿐인데, 해마다 풍년이 들어 곡식이 쌓이고 쌓여서 부유하기가 비할 데 없었습니다.

 

내가 작별하고 돌아올 때 김인우가 “그대가 만일 부역에 견디기 어려우면 여기와서 함께 살되 남에게는 알리지 말라.”고 말하기에, 내가 그리 하기로 허락하고 돌아왔습니다. 가족을 이끌고 길을 떠나 그곳에 가서 살려고 했더니, 길을 잃고서 딴 곳으로 가게 되어 거기서 살고 있습니다." (세종실록 25년<1443> 1월 10일)

 

 

이 역시 오솔길로 현실세계와 연결된 이상향을 언급하고 있다.

나중에 다시 찾아가려 했으나 결국 찾지 못했다는 말은 ‘도화원기’에 “이렇게 며칠을 머문 후에 그가 작별하고 떠날 때, 그 안의 사람들은 자기들의 존재를 바깥사람들에게 말하지 말 것을 부탁하였다. 어부는 밖으로 나와 그 배를 타고 길을 찾아 나오며 곳곳에 표지를 남겨 놓았다. 그는 군(郡)의 관청에 이르러 태수를 찾아가 여차여차하였음을 말하였다. 태수는 즉시 사람을 파견하여 그가 갔던 곳을 따라 일전에 남긴 표지를 찾았으나, 끝내 헤매기만 하였을 뿐 그 길을 찾지 못하였다.”고 한 대목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박정의 보고는 허위로 밝혀졌다. 그를 데리고 가서 조사하게 했더니 도중에 도망가버리고, 새 땅이란 것도 갑산군 남면 능귀리로서 이미 알려진 곳이었다. 그러나 새 땅이 어딘가에 있을 것이라고 조정에서 굳게 믿고 있었고, 이를 찾아내려고 노력했으나 끝내 허사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렇게 북방에 신천지가 있을 것이란 생각은 40년 뒤인 성종 때에 와서 되살아났다. 다음은 신천지를 찾으려 할 때에 곽치희가 세종 때의 경험을 왕에게 아뢴 내용이다.

 

"신이 기해년(1419) 무렵에 이성현감으로 있었는데, 병사 한 명이 와서 “북청·갑산·삼수 중간에 빈 땅이 있어 숨어사는 사람이 몇 집 됩니다.”고 고했습니다. 신이 그의 말을 감사에게 알리니, 감사가 신으로 하여금 가서 살펴보게 했습니다. 신이 사흘 동안을 가니 빈 땅이 있었는데 매우 평탄하고 넓었으며 토질이 비옥했습니다. 민가 셋이 있기에 물어보니 단천의 정병(正兵) 봉족(奉足)이 도망해 와서 군역을 피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 백성들이 서북쪽을 가리키며  “저 속에도 사람들이 살고 있습니다.”고 하기에, 신이 몇 리를 더 들어가 보니 수목이 하늘에 닿고 나무들이 자빠져 길을 막아 넘어가기 어렵기에 전진하지 못하고 도로 나와 단지 지도만 그려 감사에게 보고했었습니다." (성종실록 15년<1484> 9월 21일)

 

찾는 데에 헛수고만 했지만, 그래도 백성들 사이에는 신천지가 어딘가 있을 것이란 믿음을 버리지 않았다.

다음은 곽치희가 새 땅을 찾으러 갔다가 돌아와 보고한 말이다.

 

"신들이 처음 영안도[함경도]에 가서 새 땅이 있는지 여부를 널리 물어보았고, 또한 신고하는 사람에게는 중한 상을 주겠다고 백성들에게 유시했지만, 신고하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습니다. 다만 그 도(道) 사람들이 “새 땅은 토질이 비옥하여 벼 이삭 하나의 크기가 거의 허리 둘레만하고 연 줄기를 도끼로 베어내야 한다.” 고 말하므로, 듣는 사람 다수가 거기에 가서 살려고 하여 간혹 재산을 모조리 처분하고 처자와 부모를 이별하고 가는 자가 있기도 합니다. (성종실록 16년<1485> 2월 1일)"

 

 

새 땅이 얼마나 비옥한지 과장된 것은 사실 백성들의 염원을 담고 있다. 실컷 먹어보고 싶은 생각은 동양이나 서양이나 마찬가지였다.

중세 말기에 영국 농민들이 꿈꾸었던 이상향은 다음과 같았다.

 

"기름과 우유와 꿀과 포도주의 강이 흐르고, 교회와 수도원은 온통 음식으로 만들어졌다. 벽은 고기로, 지붕은 과자로, 첨탑은 푸딩으로 되어 있어, 군주만이 먹을 수 있는 좋은 음식을 누구나 마음대로 먹을 수 있다.

잘 구워진 거위가 “뜨끈뜨끈한 거위요” 하면서 돌아다니고, 잘 익은 종달새가 사람의 입을 찾아 날아든다.4)"

4) 김영한, ?이상사회와 유토피아? 『한국사 시민강좌』 10, 1992 p.170

 

이런 사회는 존재할 수 없다. 그럼에도 이를 찾아나서는 것은 현실에 대한 탈출구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이보다 80년 뒤인 선조 때에도 강계 부근에 있다는 서해평(西海坪)이란 도피처가 보고 되었다.

 

 

"서해평은 원래 우리 땅이지만 멀리 떨어져 있어 지킬 수가 없는 곳이다. 다만 오랑캐들이 와서 살면서 번성할까 걱정하여 가끔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몰아냈고, 말을 듣지 않을 땐 격퇴하였다.

땅이 비옥하여 채소나 곡식이 잘되기 때문에, 금지하는 것을 어기고 오랑캐들이 몰래 들어와 살면서 몰아내도 다시 돌아왔다. 강계에서 그곳을 가려면 길이 아주 좁아 겨우 발 하나 붙일 정도인데, 위는 절벽이고 아래는 깊은 시내가 흘러 허공교(虛空橋)라는 이름을 붙였다." (선조수정실록 1년<1568> 5월 1일)

 

유몽인이 1622년에 지은 『어우야담』에도 그런 북방 신천지가 언급되어 있다.

 

"내가 일찍이 들으니, 우리나라 산천은 험하고 깊어서 사람의 발자취가 이르지 못하니 진(晉)나라 사람의 무릉도원과 같은 곳이 한둘이 아니라고 한다.
오직 묘향산 북쪽은 세상에 드물게 인적이 통하지 못하였다. 가정(1522~1566)·융경(1567~1572) 연간에 어떤 백성이 작은 송아지를 지고 길이 없는 골짜기로 들어갔다. 관리는 그가 도망친 백성으로 생각하고 추궁해 캐물으니, 그는 비옥한 들판이 아주 깊은 곳에 있는데 소와 말이 들어갈 수 없고 반드시 망아지나 송아지를 사람이
지고 들어가 키워서 사용할 수 있다고 말했다. 관가에서는 군관을 시켜 그 백성을 따라가 길을 알아두게 했는데, 험한 곳에 올라 쉬다가 여러 날 길을 잃었다. 그 백성이 제대로 알려주지 않았다고 하여 관가에서 노하여 그를 죽였다고 한다.5)"

5) 유몽인 저, 현혜경 등 역주, 『어우야담』 3, 전통문화연구회, 2003 p.159

 

 

이 뒤로 북쪽 경계에 있다는 신천지는 더 이상 등장하지 않는다. 북방 개척에 따라 그럴 가능성이 있는 곳이 사라진 데에 원인이 있을 것이다. 이에 따라 조선후기에는 이상적인 땅이 육지가 아닌 바다로 옮겨갔다. 중국에서 무릉도원의 관념이 시대가 지나면서 해인국(海人國)으로 변모한 것이나 유럽에서 유토피아가 섬으로 그려진 것과 유사하다. 다음은 중국 북송 초기의 작품에 그려진 해인국 모습이다.

 

 

"뱃머리에 기대 바라보니 섬에서 사람들이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습니다. 노를 저어 가 보았더니, 울타리를 친 초가집이 100여 호 있었고, 자세히 보니 조그마한 경작지도 있었습니다.

등을 내놓고 엎드려 해를 쪼이는 사람도 있었고, 발을 물에 담그며 앉아 있는 사람도 있었으며, 그물과 낚시로 물고기와 자라를 잡는 남자도 있었고, 약초를 캐는 부인도 있었습니다. 모두 희희낙락함이 인간 세계에서는 있을 수 없는 풍경이었습니다.6)"

6) 陳正炎·林其錟 저, 李成珪 역, 앞책 p.286

 

 

우리 역사에서는 이러한 섬으로 오래전부터 울릉도가 지목되어 왔다(그림 3). 울릉도를 무릉도(武陵島)라고도 불렀으니, 이 말은 무릉도원의 영향을 받은 것이 분명하다. 울릉도는 현실적인 섬이었으면서도 이상향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울릉도가 있다. <울진현 정동쪽 바다 가운데에 있다. 신라 때에 우산국이라 불렀고 무릉 또는 우릉(羽陵)이라고도 하였다. 사방 100리가 되는데 지증왕 12년에 항복해왔다. ···> (『고려사』 지리지, 울진현)"

 

이 설명으로 보아서 울릉도란 말도 ‘우산’과 ‘무릉’이 융합되어 만들어진 듯하다. 이 섬에 대해서 조선 태종 때에 보고한 내용이다.

 

 

그림 3 . 도피처의 하나였던 울릉도 (규장각 소장 여지도에서 )

 

 

"신이 일찍이 강원도 도관찰사로 있을 때에 들었습니다.
무릉도의 둘레는 7식(息, 210리)이고 옆에 작은 섬이 있으며, 밭 50여 결을 부칠 수 있다고 합니다. 들어가는 길은 겨우 한 사람이 통행할 정도라서 나란히 갈 수 없다고 합니다. 옛날에 방지용이란 자가 15집을 이끌고 들어가 살면서 때때로 거짓 왜구가 되어 도적질을 했다고 합니다. 그 섬을 아는 자가 삼척에 있으니, 그 사람을 시켜서 가서 살펴보게 하소서. (태종실록 16년<1416> 9월 2일)"

 

 

특히 조선시대에는 사람들을 모두 육지로 불러들여 섬을 비우는 공도정책(空島政策)을 실시하면서 동해의 섬들이 더욱 더 이상향으로 지목되었다. 동해에 있다고 전해진 ‘요도’나 ‘삼봉도’가 그러한 예이다. 다음은 세종이 강원도 감사에게 이른 말이다.

 

"세상에 전하길, 동해 가운데에 요도(蓼島)가 있다고 한 지가 오래고, 또 그 산의 모양을 보았다는 자도 많다고 한다. 내가 두 번이나 관리를 보냈으나 찾지 못했는데, 지금 병사 최운저가 “일찍이 삼척 봉화현에 올라 멀리 바라보았고, 그 뒤에 무릉도에 가다가 또 이 섬을 바라보았다.”고 말하고, ··· 남회가 바다를 전부 뒤졌으나 결국 찾지 못하고 돌아왔으니, 요도란 말은 허망한 것이다.(세종실록 27년<1445> 8월 17일)"

 

이보다 실록에 더 자주 등장하고 조선후기까지도 꾸준히 언급된 섬이 삼봉도(三峯島)이다. 특히 성종 때에 집중적으로 등장한다.

 

"김한경의 말에 “청명한 날이면 경흥에서 삼봉도를 멀리 바라볼 수 있는데, 회령에서 동쪽으로 배를 타고 7일 밤낮을 가서 도착하였고, 북쪽으로 나흘 밤낮을 항해하여 돌아왔습니다. 전 해에 사람을 보내어 무릉도(茂陵島)를 찾아가게 했는데, 울진에서 동쪽으로 배를 타고 하루 밤낮을 가서 도착했고, 서쪽으로 사흘 밤낮을 항해하여 돌아왔습니다.”고 하는데, 그가 말한 지세에는 의심스러운 점이 있다. 세상에 전하기를, “무릉도의 북쪽에 요도가 있는데 갔다 온 사람이 하나도 없다.”고 하니, 이것도 의심스럽다. (성종실록 4년<1473> 1월 9일"

 

부령 사람 김한경이 삼봉도를 안다고 해서 성종이 그를 불러서 물어보았고, 그 결과를 함경도 관찰사에게 유시한 말이다. 왕이 의심하고 있지만 삼봉도 수색 작업은 계속되었다.

 

"영안도 관찰사 이극균이 급히 “영흥사람 김자주가 ‘삼봉도에 가보았고, 또 그 모양을 그려 왔다.’고 말하므로, 김자주를 보내어 바치게 합니다.”고 아뢰었다.

그에게 명하여 물어보게 하니, 김자주가 “경성 바닷가에서 배를 타고 3박 4일을 가니 섬이 우뚝 솟아 있었습니다. 사람 30여 명이 섬 입구에 벌여 섰고, 연기가 났습니다. 그 사람들은 흰옷을 입었는데, 얼굴은 멀리서 보았기 때문에 자세히 알 수 없었으나 대개 조선 사람이었습니다. 붙잡힐까 두려워 다가갈 수 없었습니다.”고 대답하니, 겹옷 두 벌을 하사했다. (성종실록 7년<1476> 10월 22일)"

 

며칠 뒤에 김자주를 심문하여 알아낸 섬 모습은 다음과 같다.

 

"지난 9월 16일에 경성 땅 옹구미에서 배를 출발하여 섬으로 향했는데, 같은 날 부령 땅 청암에 도착하여 잤고, 17일에 회령 땅 가린곶에 도착하여 잤고, 18일에는 경원 땅 말응대에 도착하여 잤고, 25일에 서쪽으로 섬과 7, 8리 남짓 떨어진 거리에 정박하여 바라보니, 섬 북쪽에 세 바위가 벌여 섰고, 그 다음은 작은 섬이 있고, 다음은 암석이 벌여 섰으며, 다음은 가운데 섬이고, 그 섬 서쪽에 또 작은 섬이 있는데, 모두 바닷물이 통하고 있었습니다. 또 바다 섬 사이에는 사람 모양같이 따로 서 있는 것이 30개나 되므로, 의심이 나고 두려워서 곧바로 갈 수가 없어 섬 모양을 그려 왔습니다. (성종실록 7년<1476> 10월 27일)"

 

삼봉도는 단양에 있는 도담삼봉처럼 봉우리가 세 개라서 붙여진 이름일 것이다. 그런데 무릉도와 다르면서 몇 개의 바위섬으로 묘사된 것으로 보아서 독도인 듯하지만, 사람이 많이 살고 있는 점에서는 독도가 아닌 듯도 하다.

 

성종 이후에는 삼봉도에 대한 언급이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이것은 지리 지식이 확대되면서 새로운 땅에 대한 믿음이 사라져갔기 때문이다. 다만, 영조 때에 황부가 배를 만들어서 이곳으로 가려 한 사건이 발생하여 다시 한 번 등장한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날이 갠 때에 두리산 봉화대에 오르면 겨우 그 섬 모양을 볼 수 있는데 누운 소와 같다.”고 하므로, ··· 이에 앞서 북도안무사(北道安撫使)가 아뢰기를 “삼봉도는 예전부터 서로 오간 일이 없는데, 황부는 죄인의 아비로서 배를 만들어 들어갈 생각을 했으니, 매우 흉악하고 교활합니다.···”고 하였다. (영조
실록 4년<1728> 6월 9일)"

 

이처럼 함경도 사람들을 중심으로 동해 바닷가에 삼봉도가 있다는 생각을 꾸준히 가지고 있었고, 여차하면 그곳으로 가려고 일을 꾀하곤 하였다.

 

 

 

III

 

아무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섬이 있다는 생각은 사그라들었지만, 그 꿈은 소설 속에 다시 새롭게 등장한다.

허균이 지은 ‘홍길동전’에 보이는 율도국이 바로 그렇다.

 

"남중(南中)의 율도국이란 나라가 있으니 비옥한 들 수천리의 진짓 천부지국(天府之國)이라. 길동이 매양 유의하던 바라. 여러 사람을 불러 왈, 내 이제 율도국을 치고져 하느니, 그대들은 정성을 다하라 하고 즉일 진군할 새, 길동이 스스로 선봉이 되고, 마숙으로 후군장을 삼아 정병 5만을 거느려 율도국 철봉산에 다다라 싸움을 돋우니, ·

·· 왕이 치국 3년에 산에는 도적이 없고 길에 떨어진 것을 줍지 않으니 가히 태평세계러라.

 ··· 왕이 치국 30년에 홀연히 병을 얻어 붕하니 나이 72세라. 왕비 이어 붕하매 선릉에 합장한 후 세자 즉위하여 대대로 계계승승하여 태평으로 누리더라."

 

홍길동이 바다 가운데에 있는 율도국(?島國)을 점령하여 태평한 세계를 이루면서 대미를 장식한다. 이 소설은 허균(1569~1618)이 광해군 때에 지은 것이니 17세기에 해당한다.

이로부터 150년쯤 뒤에 박지원(1737~1805)은 ‘허생전’을 지었다. 변산반도에 있던 수천명의 도적들을 이끌고 빈 섬으로 들어가 유토피아를 이룩한 얘기도 역시 삼봉도의 전승에 뿌리를 둔 것이다.

 

 

"이 때 허생은 2천명이 1년 먹을 양식을 구해놓고 섬에서 도적들과 약속한 날짜를 기다린다. 도적들로 한 사람 뒤떨어지는 놈없이 일제히 모여들었다. 그들은 모두다 백년지기인 양 다정했다.

평화스런 이 섬 속은 그들의 낙원을 이룩했으며 본국에도 도적으로 인한 근심은 없어져 버렸다. 그들은 나무를 베어다가 집을 짓고 대나무를 가꾸어 울타리를 만들었다. 기름진 땅에서 곡식이 무성해서 김매주지 않아도 잘 익고 한 포기에 이삭이 아홉씩이나 나왔다. 이렇게 삼년을 지나자, 그동안 먹고 남은 곡식을 배에 싣고 나가사키 섬에 가서 팔았다.

 ···허생은 남녀 2천명을 불러놓고 “내가 처음에 너희들과 함께 이 섬에 올 적에는 먼저 부자가 되어가지고 그 다음으로 학문을 가르치고 의관의 법도도 마련하려 했더니 이곳은 땅도 좁고 내 덕도 적어서 이제 더 살 수가 없겠기에 나는 이 섬을 떠나려 한다. 떠나는 마당에 너희에게 부탁하는 것은 아이가 나거던 수저를 받드시 오른손으로 들도록 가르치고 하루라도 먼저 난 사람에게는 음식을 먼저 먹도록 사양하게 하여라.”

허생은 자기가 타고 나갈 배 한 척만 남기고 모두 태워버리면서 “이 섬에서 딴 곳으로 가지도 말고, 딴 곳에서 이 곳으로 오지도 말라.” 하였다. 또 은 50만량은 바닷 속에 버리면서 “이담에 이 바다물이 마르면 얻어가는 사
람이 있을테지. 백만량은 우리나라에서도 다 쓰지 못할 텐데 더구나 이런 좁은 섬에서야 무엇에 쓰겠느냐.” 하였다. 또 2천명 중에 간혹 글자를 배워서 아는 사람은 이들을 모조리 골라서 데리고 나오면서 “이 섬 속에 뒷근심을 없애야 한다.” 하였다. 허생은 이리하여 본국으로 돌아왔다."

 

 

육지건 섬이건 새로운 땅이 있다는 믿음은, 끊임없이 현실로부터 도피하려는 생각과 궤를 같이 한다. 현실의 어려움에서 벗어나 아무런 제약이 없는 새 세상에서 살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신천지는 현실 도피처였다.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신천지에 숨어들어갈 궁리를 했다.

 

"의금부에서 “종 원단 등이 무릉도에 숨어 살자고 모의했으니, 곤장 100대를 때리게 해주십시오.”라고 아뢰니, 윤허했다. (세종실록 1년<1419> 3월 29일)"

 

반면에, 조정에서는 이곳을 찾아내서 숨어 있는 사람들을 잡아오는 데에 진력했다.

 

"당초에 강원도 평해 사람 김을지?이만·김울금 등이 무릉도에 도망가 살았는데, 병신년(1416)에 국가에서 김인우를 보내서 모두 데리고 나왔다. 계묘년(1423)에 을지 등 남녀 28명이 다시 그 섬에 도망가 살았는데, 금년 5월에 을지 등 7명이 아내와 자식은 그 섬에 남겨두고 작은 배를 타고 몰래 평해군 구미포에 왔다가 발각되었다. 강원도 감사가 잡아 가두고, 평해군에서 급히 보고해왔다. 이에 이들을 다시 데려오기로 하고서, 김인우가 군인 50명을 거느리고 무기를 갖추고 3개월 양식을 싣고 바다를 건너갔다. 그 섬은 동해 가운데에 있고, 김인우는 삼척 사람이었다. " (세종실록 7년<1425> 8월 8일)

 

이처럼 매번 섬으로 도망친 사람들을 찾아내오곤 했고, 때로는 백성들을 무마시키면서 돌아오도록 설득하였다. 다음은 성종 임금이 삼봉도에 살고 있는 백성들에게 유시한 말이다.

 

 

"이제 듣건대 너희들이 처자를 데리고 섬에 가 있으면서 장차 오래 거주할 뜻을 가졌다고 한다. 내가 생각하건대 너희들이 본래 죄를 범한 것이 없는데 조·부의 고장을 버리고 헤아릴 수 없는 위험을 무릅쓰며 외로운 섬에 의지해 살고 있으니, 이것이 어찌 즐거워서이겠는가? 이는 분명 살던 곳의 수령이 백성을 어루만지는 내 뜻을 체득하지 못한 채 여러가지로 침해하여, 그 괴로움을 이기지 못해서 구차스럽게 임시로 쉴 계책을 한 것이니, 어찌 가엾지 아니하랴?"  (성종실록 10년<1479> 9월 12일)"

 

도피처는 비단 동해에 있는 섬만이 아니었다.

 

"병조에서 “전라도 백성 가운데 바닷섬에 숨어 들어간 자가 많으니, 관리를 보내서 데려오게 하소서.”라고 아뢰었다. 임금이 ··· 데려올 계책을 물으니, 심회 등이 아뢰기를 “바닷가 백성으로 여러 섬에 숨어 들어가서 고기를 낚거나 소금을 굽는 것을 생업으로 삼는 자가 있고, 혹은 농사로 생활하는 자도 있으며, 내왕하면서 장사하는 자도 있습니다. 그런데 잡아들이라는 명령이 내린 것을 들으면 가족을 데리고 무인도로 깊숙이 들어갔다가 조금 늦추어지면 돌아오기도 하고, 혹은 아주 돌아오지 않는 자도 있으니, 참으로 작은 일이 아닙니다. 속히 데려오는 것이 마땅 하지만, 지금 만약 쇄환한다고 언명하면 저들이 분명 놀라고 의심하여 깊이 숨을 것이니, 불시에 나가서 잡아들이는 것이 마땅합니다.”고 하였다. (세조실록 7년 <1461> 8월 6일)"

 

조선 초기인데도 국가의 통제 밖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이 제법 많이 불어난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이렇게 도피처로 들어간 사람들은 때로 집단을 이루어 세력을 형성하기도 했으니, 율도국이나 허생전의 얘기도 이런 사례에서 유추되었을 것이다.

 

다음은 전라도 관찰사가 보고한 내용이다.

 

 

" 도내 해변과 먼 포구, 깊은 골짜기 등에 비옥한 공한지가 많이 있는데, 향리·역졸·공노비와 사노비 및 변방에서 옮겨 온 군인과 백성 등에서 떠도는 자와 도망해온 자들이 속속 들어가 살면서 한 무리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힘있고 부유한 자가 스스로 괴수가 되어 이들을 불러들이고 긴 울타리로 둘러쳤습니다.

울안의 호구가 수십여 가구에 이르는데도, 1가구라고 일컬으면서 사람 숫자를 숨기고 누락시킵니다. 혹은 남의 처첩을 빼앗기도 하고 혹은 우마를 함부로 도살하는 등 방자한 행동에 거리낌이 없지만, 가까운 마을 사람들은 그들의 위세를 두려워하여 감히 입을 열지 못합니다.

도망해 간 노비의 주인이나 도망해 온 처첩의 남편이 앞에 나타나 붙잡으려 하면 힘을 합해 서로 돕고 협박해 강제로 도로 빼앗습니다.


그 울 안은 마치 호랑이 굴같이 되어 감히 탐문해 찾아낼 수가 없습니다. 관청에 보고해서 잡으려 하면 미리 북문을 열어놓아 몰래 산으로 피신하고, 이미 붙잡힌 자도 한 울 안 사람들이 합세해 몽둥이를 들고 길목에서 탈취해 가는 풍습을 이룬지 이미 오래 되어 쉽게 변모시킬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무뢰배들이 한 굴안에 모여서 세력을 믿고 악한 짓을 하고 있으니, 이를 조장해서는 안됩니다. 청컨대 긴 울타리를 철거하여 무리를 이루어 악한 행동을 하는 조짐을 막으소서. (세조실록 1년<1455> 10월 13일) "

 

이곳은 국가에서 용인하지 않은 해방구였다. 그렇지만 고대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국가에서도 인정하는 도피처가 있었다.

 

 

" 또 여러 나라에는 각각 별읍(別邑)이 있으니 그것을 ‘소도’라 한다. 그곳에 큰 나무를 세우고 방울과 북을 매달아 놓고 귀신을 섬긴다. 다른 지역에서 그 지역으로 도망온 사람은 누구든 돌려보내지 않으므로 도적질하는 것을 좋아하게 되었다. 그들이 소도를 세운 뜻은 사찰과 같으나, 행하는 바의 좋고 나쁜 점은 다르다."

 (『삼국지』 위서 마한전)

 

한반도에서 고대국가가 형성되던 무렵의 상황이다. 큰 나무에 방울과 북을 매달아 놓은 것으로 보아서 성황당같은 느낌이 든다. 그러면서도 나쁜 짓을 하더라도 이곳으로 숨어들면 잡아들이지 못하는 신성지역이었다. 이곳에는 국가의 권력이 미치지 못하는 종교 관할 지역이었다. 이런 관례는 고대사회에 보편적이었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에서는 아실리(Asillie) 또는 아실럼(Asylum)이라 해서 난민들을 보호해주고 구제해 주는 곳이 있었다.

 

신천지는 도피처이면서 다른 한편으로 이상향이었다. 삼봉도는 토지가 비옥하고 각종 세금도 없는 낙원이었다.

 

"이극돈이 “ ··· 영안도[함경도] 사람들은 어리석고 미혹됨이 아주 심하여 유언비어를 많이 믿으니, 어떤 사람이 삼봉도의 좋은 점을 말하면 사람들이 모두 거기 가서 거주하려고 합니다. ···”고 아뢰니, 임금이 “삼봉도는 토지가 비옥하여 백성들이 생업에 편히 종사할 수 있는 곳인데, 관청의 부역을 피하면서 나라를 배반하고 임금을 잊고 있으니, 분명히 스스로 돌아오지는 않을 것이다. ···”고 말했다. (성종 실록 10년<1479> 윤10월 26일)"

 

그러기에 무릉도원에 비겨서 삼봉도를 설명하기도 했다.

 

"옛날에 무릉 사람 황진이 고기잡이 하다가 우연히 도원(桃源)에 도착하여 그 이전 시대인 진(秦)나라의 난리를 피해 와 있는 사람들을 보았다고 했는데, 그 뒤에 어부들이 길을 잃은 자가 한 사람만이 아니었지만 이른바 도원이라는 것은 보지 못했습니다. 삼봉도의 유무도 아득하여 알 수 없는데, 순전히 김한경의 말만 믿고서 200여 명이나 되는 사람으로 하여금 바람과 파도를 예측할 수 없는 험한 지경을 범하게 한다는 것은, 신으로서는 매우 위험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성종실록 11년<1480> 3월 11일)

 

삼봉도가 이상향으로 그려지면서 사람들이 그곳으로 도피해가길 원했지만, 점차 이 생각은 삼봉도에서 구세주가 나와서 이 세상을 구제할 것이란 생각으로 발전하게 된다. 선조 때에 등장한 노비 도적인 길삼봉(吉三峰)도 백성들이 이상향으로 생각하는 삼봉도를 자기 이름으로 삼아서 자신이 이상향의 건설자임을 내세웠던 것으로 보인다. 정여립의 반란 사건(1589)이 일어났을 때에 최영경이 바로 길삼봉이라 지목되어 죽임을 당했다.

 

 

"사축 최영경은 본래 산림에 은둔한 처사일 뿐이다. 효도와 우애의 행실은 본디 흠이 없지만, 조용히 있지 못하고 함부로 세상일을 말했고, 벗을 잘못 택하여 그릇된 사람을 가볍게 믿었으니, 잘못한 것이 전혀 없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를 가리켜 길삼봉이라 한 말은 근거가 전혀 없습니다.

그가 평소에 정철의 간사한 정상을 가차없이 드러냈기에, 정철 무리가 역적의 변을 틈타 모함할 계책을 짜낸 것입니다. (선조실록 24년<1591> 8월 13일)"

 

서인 당파를 대표했던 정철(1536~1593)이 동인을 가차없이 처벌하면서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시골에 있던 최영경(1529~1590)을 길삼봉으로 지목했던 것이다.

 

삼봉도는 정감록과 결합되면서 장차 섬에서 정진인(鄭眞人)이 나와서 이 세상을 구제할 것이란 믿음으로 발전했다. 이씨 왕조 다음에는 계룡산에 정씨가 800년간 도읍할 것이란 말이 정감록에 나온다. 도교 용어인 진인은 성인(聖人)을 의미한다. 다음은 숙종 때에 반역죄로 처형된 중 여환에 관한 기록이다.

 

"여환이라는 자는 본래 통천의 중이다.

··· 양주에 사는 정씨 성을 가진 무당 계화 집에 와서 머물면서, 자기 처를 용녀부인이라 하고, 계화는 정성인(鄭聖人)이라 이름하였다. (숙종실록 14년<1688> 8월 1일)"

 

영조 때에도 정도령을 사칭한 인물이 등장한다.

 

"이삼이 “호남과 영남 사이에 정팔룡(鄭八龍)이라고 일컫기도 하고 정도령(鄭都令)이라고 일컫기도 하는 자가 있기에 포교를 보내서 잡아왔더니 손에 철퇴를 들고 스스로 배수일이라고 일컬었는데, 사람 됨됨이 매우 요상하고 흉악했습니다.”
고 아뢰었다. (영조실록 5년<1729> 4월 9일)"

 

이러한 정진인은 주로 섬에서 나와 민중을 해방시켜줄 것으로 생각되곤 했다. 다음은 영조 4년에 일어난 ‘이인좌의 난’ 잔당으로 지목된 이지서를 잡아들인 사건이 영조 24년(1748)에 있었는데, 이 당시 오명후를 심문한 내용을 보면 그런 정황을 엿볼 수 있다.

 

 

"사람들의 말이 많이 흉흉하여, 혹 말하기를 왜(倭)가 오는데 실은 왜가 아니고 다른 것이 왜의 모양을 하고 오니, 이는 대개 무신난[이인좌의 난]의 잔당으로 섬에 있는 자들이라 운운했습니다.7)"

7) 정석종, ?조선후기 이상향 추구경향과 삼봉도? 『민족사의 전개와 그 문화』하, 벽사 이우성교수 정년퇴직 기념논총, 1990 p.83

 

 

이지서는 울릉도 월변에 황진기 등 무신난의 잔당이 있어서, 무리를 지어 반드시 한번 올 것이라는 말을 했다고도 한다. 『정감록』과 연계된 1785년 역모 사건 때에도 그와 비슷한 발상이 보인다.

다음은 범인의 심문 내용이다.

 

 

"양형이 공초하기를 " ··· 조선은 산천, 천문, 지리에서 모두 셋으로 갈라질 조짐이 있는데, 임자년에 도적이 일어나는 사변이 있고 그 뒤에 마땅히 셋으로 갈라졌다가 다시 합쳐서 하나로 된다고 합니다.

셋으로 갈라지는 성씨는 정가?유가?김가이지만, 필경에는 정가가 합하게 되어 하나가 되는데, 그는 남해의 섬 가운데에 있으며, 유가는 통천에 있으며, 김가는 영암에 있다고 합니다. 임자년에 정가가 먼저 해도에서 군사를 일으키면, 유가?김가가 이를 따라서 일어난다고 합니다. 그래서 신은 이렇게 주고받은 말을 홍복영에게 전하였는데, 임자년(1792) 2월에 배가 바다 가운데에서 온다고 하였습니다.”고 하였다.

 ???홍복영에게 군사를 일으킨다는 말을 물으니, 공초하기를 “

··· 또 들으니 ‘무신년(1788)에 신병(神兵)이 바다를 건너온다.’고 하였으나 바다섬 이름은 잊어버리고 기억하지 못합니다. 그 중에 정씨 성을 가진 신인(神人)은 지금 나이가 13살입니다. ···”고 하였다. (정조실록 9년<1785> 3월 1일)

 

 

 

IV

 

어느 나라이건 이상향이나 이상시대를 꿈꾸지 않은 곳은 없다. 우리 역사에서 유토피아는 단연 요순시절이나 무릉도원이었다. 요순 시절은 중국 전설시대의 두 임금이 통치하던 태평성대를 가리킨다.

무릉도원은 이미 언급했듯이 도연명이 지은 소설이다. 가장 이상적인 사회를 그린 대동사회(大同社會)도 대도(大道)가 행해진 사회로서 『예기』에 등장한다.
조선시대에 실시된 대동법도 이 사상에서 나온 것이요, 대학가 축제를 대동제로 명명한 것도 이와 관련된 듯하다. 우리가 꿈꾼 이런 이상사회들은 중국에서 가져온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중국인의 꿈만 있었는가? 홍길동의 율도국이니 허생전의 무인도 개척은 소박하게나마 우리의 고유한 꿈을 반영한다. 다만 온 사회에 두루 퍼지거나 외국에 알려질 정도로 보편화되지 않은 한계는 있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신라시대에 경주 땅이 부처님의 땅이라 생각한 것도 이상향을 현실에서 찾은 것이라 볼 수 있다. 불국사도 부처가 사는 땅에 세워진 절이란 뜻이다.

 

민중들에게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졌던 구세주는 바로 미륵이다. 미륵은 아직 부처가 되지 않은 채 도솔천에 머물다가 언젠가 지상에 내려와 중생들을 구제할 것으로 여겨져왔다. 미륵이 나타나면 새로운 이상세계가 펼쳐질 것이란 믿음이 있었으므로, 미륵은 바로 이 세상을 구해줄 구세주였다. 그러기에 신라시대 화랑은 흔히 미륵의 화신으로 여겼다. 궁예가 미륵불을 자처한 것도 세상을 구제하겠다는 염원을 표현한 것이다.

 

그러한 염원은 고려 후기부터 조선 초기 사이에 유행했던 독특한 행위로 나타났다.닷가에 향나무를 묻어두는 매향(埋香)을 함으로써 장차 미륵이 이 세상에 내려왔을 때에 만날 수 있도록 비는 것이다.

바닷물에 오랫동안 잠겨 있던 향나무는 침향(沈香)이라 해서 불상을 조각하는 데에 사용하거나 희귀한 약재로 이용되었다. 이에 따라 우리나라 해안가에서는 곳곳에서 매향한 뒤에 세운 비석이 발견된다.8)

 

 

그림 4 . 고성 삼일포 매향비 (규장각 소장 관동십경 에서 )

 

 

1309년에 세워진 고성 삼일포 매향비는 조선시대 그림에도 등장한다(그림 4). 또 미군사격장 소음 문제로 유명해진 화성시 매향리마을 이름도 여기서 유래되었을 것이다.

 

1901년에는 전북 고부에 살던 강일순(1871~1910)이 증산교를 창시했다. 그가 “나를 보고 싶으면 금산사 미륵불로 오라.”고 말했듯이 미륵신앙에 바탕을 둔 종교였다.

집안에 우환이 있으면 할머니는 의례 미륵님께 치성을 드렸고, 지방에 다니다보면 이름모를 불상은 모두 미륵불로 불리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만큼 1천년 이상 면면히 민중의 소망을 담고 있는 것이 바로 미륵이다.

 

8) 李海濬, ?埋香信仰과 그 主導集團의 性格 -14, 5세기 埋香事例의 分析-?『金哲埈博士華甲紀念史學論叢』 지식산업사, 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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