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부모님과 조부모님세대가 식민지백성으로 살던시절 망국의 한을 달래주던 노래가 있었다
노래의 주인공은 이애리수(1910~2009)란 이국적인 이름을 가진 여성이다
앨리스를 한자음으로 바꾼 이름 이애리수는 외삼촌인 희극배우 전경희의 영향을 받아 유년 시절인
9세가 되던 해에 신파극단인 신극좌에 입단하면서 데뷔하여, 배우 및 가수로 활동하며 연예계 활동을
시작했고, 1922년 민중극단을 거쳐 1928년 취성좌(聚星座)라는 극악단에서 황성(荒城)의 적(跡)을 불렀고,
1932년 콜롬비아 레코드에서 음반을 발표해 50,000장을 판매됐다. 당시 오디오가 엄청난 고가라
이를 보유한 가구가 적었던 때였으므로 50,000장은 엄청난 양이었다.
황성의 적은 훗날 후배가수 남인수가 황성옛터로 재취입하여 남인수노래로 많이 알려졌지만
훨씬 선배인 이애리수의 노래이다. 1920년대와 30년대를 풍미하던 이 미모의 여가수는
1935년이후 연애사건으로 인하여 장안을 떠들썩하게한후 당사자와 결혼하고 가요계를 떠났는데
훗날 100세를 눈앞에 둔 나이에 일산의 노인병원에 계신게 발견되었다
황성의 적은 망국의 아픔을 안고 일제시대를 살아가던 우리 선조들이 가장 사랑하던 노래였고
박정희 전대통령의 18번지이기도 했다
황성옛터에 밤이 되니 월색만 고요해 / 폐허에 서린 회포를 말하여 주노나 /
아 외로운 저 나그네 홀로 잠못 이뤄 / 구슬픈 벌레 소리에 말없이 눈물져요
성은 허물어져 빈터인데 방초만 푸르러 / 세상이 허무한 것을 말하여 주노나 /
아 가엾다 이 내 몸은 그 무엇 찾으려 / 덧없는 꿈의 거리를 헤매어 있노라
나는 가리라 끝이 없이 이 발길 닿는 곳 / 산을 넘고 물을 건너 정처가 없이도 /
아 한없는 이 심사를 가슴 속 깊이 품고 / 이 몸은 흘러서 가노니 옛터야 잘 있거라”
- 왕평 작사. 전수린 작곡. 이애리수 노래 -
이 노래의 작곡자는 전수린. 연대는 이 나라의 무대예술이 유랑극단의 어설픈 무대에 명맥을 유지하던 1928년이었다.
이해, 어느 날 바이올린 주자로 순회악극단에 몸을 담고 있던 전수린은 공연의 여가를 빌어 옛 고려의 수도였던
개성만월대를 들르게 되었다.
비록 잡초만 우거져 인적은 없으나 옛 왕조의 영화는 무너진 성터에 자취를 남기고 있었다. 때마침 보름달이 밝게 뜬 가을 밤,
잡초에 가려 폐허가 된 옛 궁궐의 터는 떠돌이 악극단원들의 마음을 울렸고 곧바로 오선지에 슬픈 멜로디와 가사를 써내려갔다.
그로부터 며칠 뒤, 순회극단은 황해도 배천군에 묵고 있었다. 마침 후줄근하게 비가 내리는 날이어서 단원들은
어쩔 수 없이 여인숙 침침한 골방에서 소일하고 있었다.
이런 때면 으레 피게 마련인 잡담의 꽃도 이젠 그 씨가 끊어졌던지 모두가 입을 다물고 있었으며, 그러다 보니
답답하기까지 한 침울한 공기가 방안을 메우고 있었다. 허기야, 허구한 날 거듭되는 유랑에 이젠 정말 지친 것인지도
모르겠다. 모두가 까닭 모를 한숨들을 몰아쉴 때 '전수린(본명 전수남)'은 바이올린을 더듬어 꺼냈다. 바이올린에서는
침울한, 그러나 감미로운 애수를 동반한 조용한 선율이 흘러나왔다.
이때 굳게 감긴 그의 눈에는 며칠 전 옛 고려왕조 수도였던 개성 만월대에서 느낀 감회가 어리고 있었다.
푸르고 차기까지 한 달빛, 그 달빛 아래 잡초를 스치는 바람 소리의 적막감, 흩어진 옛 기화, 기둥 없는 궁터의 초석들,
그렇게 작곡가 전수린은 개성 만월루방초 우거진 고궁 옛 성터에서 뼈저리게 느껴지는 민족의 슬픈 감회를 오선지로
나타내었다. 이렇게 해서 '황성 옛터'(황성의 적, 荒城의跡)의 선율은 태어났다. 이 선율에 그 악극단의 대표였던 왕평이
작시해서 가사를 붙였고 노래는 이애리수(1910~2009)가 맡아 연습했다.
그리고 1928년 늦은 가을 이 노래는 단성사에서 '이애리수'가 불렀고 사람들의 입을 통해 널리 전해지게 된다.
이후 '황성옛터'는 1932년 ‘황성(荒城)의 적(跡)’이라는 제목으로 빅터레코드에서 정식 음반으로 발매된다.
당시 서울극단 취성좌 공연 때였다. 청순한 여가수 이애리수의 등장은 만장 관중의 환호성 섞인 박수를 받았다.
박수가 지나고 다시 정숙해 졌을 때..., 황성 옛터에 밤이 되니 월색만 고요해.....장내는 갑자기 숙연해졌다.
특히 나라를 잃은 아픔을 폐허에 빗댄 가사와 슬픈 왈츠의 곡조는 많은 사람들을 눈물짓게 했고, 조선총독부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전국으로 급속히 퍼져나갔다.
당시 이 노래가 배달의 민족혼을 일깨운 데 비상한 관심을 끌자, 작곡자와 작사자를 함께 구인해서 혹독하게 조사하는
한편 노래는 금지곡으로 못 박고 말았다. 그러나 일본 경찰의 심한 조사에도 불구하고 노래는 입에서 입으로 숨어서 전해졌다.
그뿐만 아니라 이 노래를 금지했던 일본인들조차 "조선의 세레나데"라고 하여 즐겨 애창하였으니 그만큼 이 노래가
담았던 예술성과 호소력은 컸던 것이라 할수있다.
하늘을 찌를 것 같았던 이애리수의 인기는 1935년을 기점으로 서서히 기울기 시작한다. 왜냐하면 왕수복과 선우일선을
비롯한 기생가수의 출현, 이난영, 전옥 등 새롭고 모던한 창법과 감각을 지닌 후배가수들에게 가요팬들의 시선이 쏠리게
된 것이다. 창가풍의 단조로운 음색에 익숙한 이애리수의 노래는 인기 반열에서 급격히 퇴조하게 된다. 묵은 것을 정리하고
새로운 시간의 질서를 구축하는 변화의 거친 물결은 그 자체가 너무나 비정하고 막을 수 없는 이치일 테이다. 한 잡지사가
조사한 레코드가수 인기투표 결선에서도 이애리수의 노래는 앞 순위에 오르지 못하고 점점 그녀의 이름은 대중들의 관심권에서
멀어져갔다.
이러한 때 이애리수는 그녀의 노래를 몹시 사랑하던 한 대학생과 우연히 만난 이후 사랑에 빠지게 된다. 연희전문 졸업반
학생이던 배동필(裵東弼)! 하지만 이미 배동필에게는 부모가 맺어준 처자가 있었던 것이다. 이애리수에게도 지난날 그녀의
노래를 사랑하던 이광재란 자산가 청년과 진작 정분을 맺어 세 살 바기 아기가 하나 있었던 처지였다. 그러니까 사회적 지명도가
높은 젊은 유부남 유부녀가 불륜으로 만나 사랑을 키워간 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 뿐만 아니라 대학생과 가수라는 현격한
신분의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두 사람 사이에는 불행한 난관이 수렁처럼 자꾸만 앞을 가로막았다.
만날 기회조차 잃어버린 그들은 이승에서 이룰 수 없는 사랑을 저승에서라도 이루겠다는 일념으로 깊은 밤 몰래 만나
칼모친이라는 수면제를 다량 삼키고, 그것으로도 모자라 손목을 면도칼로 그어서 유혈이 낭자한 모습으로 정사를 시도한다.
이런 아슬아슬한 정황이 집주인에게 발견되어 긴급히 경성제국대학병원으로 입원을 하게 된다.
그토록 완고하던 배동필 부모는 결국 두 사람의 부부로서의 사랑을 승낙하게 된다. 두 사람 사이에는 2남7녀의 자녀가 태어났고,
이애리수는 무대를 아주 떠나서 현모양처로만 살아갔다.
그런데 지난 2008년, 뜻밖의 기사 하나가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다. 그것은 왕년의 가수 이애리수가 경기도 일산의 한
노인병원에 입원해 있다는 놀라운 사실이 보도가 되었기 때문이다. 무대를 떠나 종적을 감춘 지 어언 70여년! 세월이
흘러서 가수는 호호백발 할머니의 모습으로 우리 앞에 그 모습을 나타내었다. 20대 시절의 사진과 현재의 얼굴모습을 찍은
두 장의 사진은 오랜 세월이 흘러갔으나 그 선과 윤곽이 또렷하게 닮아있었다. 언론에서는 특집을 준비하고 인터뷰 프로그램을
제작할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2009년 3월31일 99세를 일기로 한 많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 참조 : 이동순교수의 그시절 그노래 -
첫댓글 이애리수 - 황성의 적
https://youtu.be/IC8fYLSPIO4?si=BApQSi5hEwcM4Z5R
PLAY
『겨울 새벽녘 방 안에서 껴안고 있는 고민에 찬 두 남녀』
---매일신보---
1930년대 신문 같은데
예전 주간지였던 선데이 서울에서 독자의 호기심을 유발시키던 제목이 연상됩니다.
이 둘은 이승에서 이루지 못한 사랑 저승에서라도 이루겠다는 일념으로
수면제을 먹고 자해를 한 상태로 집주인에게 발견돼
어찌어찌 정구충 박사의 응급처지 후 외부로 알려 경성제국대학병원으로 이송...
뇌피셜이긴 하지만
사랑을 얻기 위해 당사자 둘은 시나리오를 짰고,
집 주인과 정구충 박사에게
자초지종을 말하고 도움을 구해 연극을 했을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그 와중에 약간의 출혈은 감수했을 테고요. ㅎ
30년대 신문인데 조금 자극적으로 톱기사에 올랐네요
진실여부는 당사자만 아실테고 그후 두분은 아들딸
많이 낳고 오래오래 행복하게 사셨다고 합니다
황성의 적('황성옛터'로 더 알려져있지요)이 세상에 나온지 곧 100년이 되는군요.
옛날 가수 이애리수 님의 독특한 목소리는 잊을 수가 없지요.
한 번 듣고 갑니다.
어릴때부터 노래는세월따라를 많이 들어서
그분들 창법이 익숙합니다
당시는 창가형식이었다가
점차 바퀴어 현대에 이르렀겠지요
암울한 일제시대 망국의한을 위로위안 받고 달래준 노래가 이애리사가 부른 황성옛터이군요 당시5만장 음반 레코디 판매 되었으면 엄청난 인기유명곡이군요
가사도 시대의 분위기 배경을 잘 표현했네요 옛날 동네 어르신들이 허름한 대포집에서 막걸리에 취하시면
나무젖가락으로 장단 맟추며 황성옛터를 구슬피게 부르시는것을 보았습니다
근데 나는70넘어서도 황성옛터 유명한노래를 한번도 부른적이 없어 유감이네요 하하하
가수가 인기가 있어 붙었다 떨어지는 남여 관계 사건은 별로 관심없어 통과하고 껄껄껄
황성옛터 노래 탄생 배경 시대 분위기상 흥미있게 읽고 느끼고 노래도 잘 감상했습니다 감사함니다 오늘하루도 행복 필승
보통 남인수의 노래로 많이 알려졌지만 이애리수가 최초불렀고
그후 취입해서 대히트를 쳤습니다
예전엔 어르신들 뿐아니라 제또래들도 대포집에서 젓가락 두들기며
옛노래 많이 불렀습니다. 그후 포크송이 대세라 통키타치고 많이 불렀는데
지금은 트로트가 대세인것 같습니다. 즐감해주셔서 감사드리고
무더위에 건강히 잘보내시기 바랍니다 !
흔히 우리가 즐겨불렀던 황성옛터...의
본곡 이었는데 남인수 선생의 곡으로 더 유명
해진 것 같습니다.
그당시 5만장의 음반 판매량이면 대단한 힛트곡 이었지요.
반갑습니다. 이애리수를 알기전엔 모두들 남인수선생의
노래로 알고 계셨을겁니다.
이애리수님은 남인수님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로 애절하게 들립니다
당시 5만장이면 지금의 백만장을 넘는 수치일겁니다
이애리수님이 참 단정하고도 고우시네요.
저 여린 외모 속에 그런 열정이 숨어 있었다니,
목숨을 걸고 쟁취한 사랑, 그 이후엔 평생에 걸쳐 그 사랑에 충실했군요.
황성 옛터 노래에 얽힌 이야기도 잘 되새기게 해 주신 글 감사합니다.
달항아리님 반갑습니다
저는 어릴때부터 옛노래를 좋아해 당시 라디오프로 노래는 세월따라와
가요무대를 많이 봤습니다. 이애리수님은 목숨을 걸고 이룬 사랑답게
가요계는 완전히 떠나 아들딸 많이 낳고 오래오래 행복하게 사신것 같습니다
댓글 감사드리고 무더위 건강하게 잘 보내시기 바랍니다 ^^!
이얘리수라는 원로가수를 그산님글에서 알게되었네요 감사합니다
로사리님 반갑습니다
지난번 글에 한국최초 가요인 강남달의 김서정님과
이정숙님의 사연을 올렸고 이번엔 이애리수님의 노래와
인생을 올려봤습니다. 댓글 감사드리고 행복한 여름
보내시기 바랍니다 !
어쩜 귀한 자료 찾아 주셨어요 잘 읽고 갑니다 수고 하셨습니다
넵 감사합니다
오늘도 행복한 하루 보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