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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풍무(149)
[소림을 더 사랑했기에 용서할 수 없소이다]
죽음.
어떻게 생각하변 탄생과 마찬가지로 죽음 또한 일상적인 일이라 할 수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세상 곳곳에는 생을 마감하는 자들이 수두룩하다.
죽음은 그 사람의 일생을 정리하는 자연 현상에 불과하다.
슬픈 곡소리와 함께 장례가 치러지고, 땅속에 묻히는 것으로 그 사람은 다른 이들의 기억 속에서 차차 잊혀져 간다.
대개가 그렇듯 한 인간의 죽음은 세상사에 별다른 영향을 주지 못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죽음도 있다. 나라를 다스리던 황제의 죽음이나 막강한 권력자의 죽음은 세상을 변화시키는 매개체가 되기도 한다.
동창제독 하후장설의 죽음이 그랬다.
하후장설의 시체를 처음 발견한 이는 황실 경비병이었다.
시체를 방불케 하는 인물이 자금성 태화문(太和門)에서 발견되었을 때만 해도 경비병은 그를 하후장설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하후장설의 미움을 산 어떤 중신이 본보기로 죽임을 당했을 거라 여겼다. 그래서 시체를 치우지도 못했다. 자칫 하후장설의 눈 밖에 나기라도 하면 태화문에 걸린 사람처럼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양팔이 잘린 시체를 안쓰러운 눈으로 쳐다보던 경비는 어느 순간 깜짝 놀라고 말았다. 시체인 줄 알았던 그것이 살아 있었던 것이었다.
몇 번이고 망설이던 경비는 결국 참다못해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놀랍게도 태화문 상층부에 박히듯 걸려 있는 사람은 동창제독 하후장설이었던 것이다.
경비는 자신이 오줌을 지린 줄도 알지 못했다.
황제보다 더한 권력을 휘두르던 자, 아니 어쩌면 새로운 황제로 등극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돌던 자였다.
그랬던 자가 시체처럼 변하여 태화문에 걸려 있다니.
병사는 태화문 사건을 상부에 알렸고, 하후장설의 죽음은 빠르게 외부로 퍼져 나갔다.
얼마 전 있었던 소림혈사가 문제가 아니었다.
두 명만 모이면 하후장설의 죽음을 놓고 쑥덕댔다. 밥을 먹을 때 반찬으로 하후장설의 죽음이 올랐고, 술안주로 하후장설의 죽음이 올랐다.
누구랄 것 없이 하후장설의 죽음을 입에 올렸다.
그것은 혁신을, 새로운 변화를 의미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세인들이 놀랐다 한들 이들에 비할까. 하후장설의 죽음으로 가장 큰 변화를 맞은 곳은 다름 아닌 무림이었다.
변화의 첫발은 마교가 먼저 끊었다.
어느 날 갑자기 강호 전역으로 퍼진 초대장이 그것이었다.
삼가 모습니다.
강호 무림은 많은 사건을 겪고 있소이다.
수천 무림인을 살해한 귀광두의 출현이 그 하나고, 강호 물미의 정신적 지주였던 소림사와 무당파의 멸문이 그 둘이외다.
정의가 땅에 떨어지고, 무림인의 위상은 나날이 추락하고 있소이다.
이에 암문(暗門)을 비롯한 십대문파 연합체인 사령계(死靈界)는 더 이상 침묵할 수 없다는 결정을 내렸소.
정의를 구현하고 무림의 위상을 바로 세우기 위해 그동안 미뤄 왔던 일을 하고자 하오.
오는 이 월 초하루, 운남 점창산에서 개파를 하고자 하오니 많이 참석하여 축원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십대문파 대표 잠마제 고천악 배상.
초대장을 접한 강호 무림인들은 너털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사령계(死靈界)라고 했지만 그들은 마교가 아닌가.
오백 년 전, 불사삼괴의 한 종류인 불사삼강으로 혈겁을 자행했던 그들이 정의 운운하는 모양새가 무림인의 눈에는 우습기 짝이 없었던 탓이다.
하지만 대놓고 욕을 할 무인은 아무도 없었다.
천붕회에서 별다른 활약을 보여 주지는 못했지만, 북황련이나 남천벌과 동등한 위치에 있었다. 정식 개파만 하지 않았을 뿐 이미 무림 삼강의 한곳으로 인정받고 있다는 의미였다.
초대장을 접한 많은 무인들이 각처에서 길을 나섰다.
하후장설의 죽음으로 무림의 숨통이 트인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위기감 때문이었다.
황실에서 중원 무림을 통제하지 못하는 상황에 직면해 있고, 전쟁은 불가피한 선택이 아니라 필연적으로 일어날 수밖에 없다는 절박감 때문이었다. 전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떤 세력에 속해 있어야 한다는 압박감이 무림인들을 서두르게 했던 것이다.
새로운 세력의 탄생.
어떤 세력에 속하지 못한 무인들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는 환영할 일이다. 하지만 강호 물미의 주인임을 자처하고 있는 이들은 결코 달가워할 수가 없다.
특히 새로운 세력을 배후에 두고 있어야 하는 남천벌 입장에서는 마교의 개파대전은 더더욱 눈엣가시였다.
“마교가 아닌 사령계라........”
마창산 정상을 쳐다보며 혼잣말을 하는 인물. 오십 년이란 짧은 기간 동안 강남을 석권한 남벌황 남효운이었다.
마치 환자의 얼굴을 보는 듯 남효운의 얼굴은 추레했다.
연이어 터지는 악재에 심력 소모가 많았던 탓이었다. 귀광두로 인하여 수많은 수하들을 잃은 일은 그렇다 쳐도 마교의 개파는 충격적이었다. 단지 그들이 마교였다면 남효운이 이처럼 고민하지 않을 것이다. 사령계, 아니 정확한 명칭은 지저사령계(地底死靈界)이리라.
무량남씨세가의 모태가 되었던 곳.
남효운의 고민은 거기에 있었다.
비록 잊혀진 역사이지만, 무량남씨세가는 분명 지저사령계에 속해 있었고 마신가(魔神家)의 가신이었다.
천오백 년의 세월이 흘렀고, 마신가의 가신이었다는 과거가 현실에 영향을 미치지는 못한다. 하지만 께름칙한 건 어쩔 수 없었다.
“이것도 자격지심인가?”
가슴 한구석이 답답해지는 것 같아 남효운은 거칠게 고개를 흔들었다. 그때 밖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버님!”
아들인 남세옥이었다.
“모셔라!”
남효운은 낮게 말했다. 뒤이어 회의실 안을 아홉 명이 들어와 남효운을 향해 포권을 취했다.
“벌주, 뵙습니다.”
남효운을 향해 고개를 숙인 일행은 각자의 자리를 찾아 앉았다.
“으음!”
남효운의 입에서 나직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이가 빠진 듯 듬성듬성 비어 있는 빈자리가 거슬렸다.
남천벌은 무량계(無量界), 천음계(天陰界), 환령계(幻靈界), 성천계(星天界)의 사계(四界)와 영자각, 도부각, 율사각, 사궁각, 인자각, 전사각, 독각, 요화각의 팔 각으로 이루어져 있다.
명 달 전만 해도 회의실에는 전부 남천벌 수뇌 열두 명이 자리했다. 그런데 지금은 여덟 명밖에 없다. 아직 전쟁을 시작하지도 않은 상황에서 손실이 너무 컸다.
“심려 놓이십시오, 벌주! 빈자리가 많지만 남천벌은 강남의 주인입니다. 마교 따위가 넘볼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오른편에 앉은 육십 대 인물이 남효운을 향해 말했다. 환사(幻邪) 유청(劉靑). 환령계의 계주답게 유청의 신형은 연체동물처럼 흐느적거렸다. 그의 독문무공인 환환무체공(幻幻無體功)을 운용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유 계주의 말이 맞습니다, 벌주! 하지만 그들은 무시할 수 없는 곳입니다. 다른 곳도 아니고 지저사령곕니다. 뭔가 특단의 조치가 필요합니다.”
유청의 말을 받은 이는 성천계(星天界)의 계주인 유성마검(流星魔劒) 기대음(基大陰)이었다.
“특단의 조치라면 어떤 걸 말하는 거요.”
남효운은 기대음을 보며 물었다. 물론 기대음과 같은 생각을 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사령계가 정식 개파하여 안정을 되찾기 전, 무엇인가를 해야 하는데 딱히 떠오르는 생각이 없었다.
금일 회의를 소집한 이유가 그 때문이기도 했다.
하지만 기대음이라 하여 특별한 방법이 있을 리가 없었다. 그저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는 생각에 말을 했을 뿐이었다.
“그건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일행을 가만히 주시하던 남세옥이 어색한 얼굴로 말문을 열었다. 벌주인 아버지를 대신하여 무량계를 이끌고 있지만, 최근 계주가 되어서인지 아직은 지금과 같은 자리가 익숙지는 않았다.
“이건 제 의견이 아니고 대법(大法)에 들어가기 전, 천음계주 양천리가 남긴 의견입니다.”
“그래? 그가 방법을 제시했단 말이더냐?”
남효운을 비롯한 인물들은 안타까운 얼굴을 했다. 단전을 잃고 폐인이 되었지만 양천리는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무공이 없어도 괜찮으니 천음계를 이끌어 달라고 했지만 그는 단호히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고 역천귀혼대법(逆天鬼魂大法)을 택했다.
인간의 신체를 버리고 마혼혈시(魔魂血屍)로 다시 태어나기 위해서였다. 모든 것을 잃는 대신 그는 한 가지를 얻는다. 죽지 않는 신체와 불사삼요를 조종할 수 있는 권한이 그것이다.
그런데 그가 현 상황을 예견하고 방법을 제시했다고 한다.
그의 충정이 고마울 따름이었다.
“그는 저에게 이것을 남겼습니다.”
일행을 둘러본 남세옥은 품속에서 종이를 꺼내 일행 앞으로 펼쳤다.
개전(開戰)!
남세옥이 펼친 종이를 쳐다본 일행은 흠칫 표정을 굳혔다.
전쟁, 현 상황을 타개할 방법으로 양천리는 전쟁을 주문한 것이다.
“그리고 이런 말을 했습니다. 국면에 끌려가는 것보다 끌고 가야 한다고 하더군요. 개전의 첫 목표는 안휘성과 하북성으로 하되 안휘성은 오 할의 전력을, 하북성은 일 할의 전력을 투입하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의 의견을 듣고 싶소이다.”
나직하게 신음을 뱉어낸 남효운은 심각한 얼굴로 앉아 있는 수하들을 보며 물었다. 오 할과 일 할, 남궁세가는 멸문시키라는 의미고, 하북팽가는 북황련으로 위장하여 공격을 가하라는 말이다.
“소신은 찬성입니다. 지금 남궁세가나 하북팽가는 소림과 무당의 멸문을 방조했다는 비난을 받고 있습니다. 강호 무림인들뿐 아니라 일반 양민들까지도 그들의 욕을 하는 실정입니다. 어쩌면 지금이 그들을 없앨 수 있는 호기일 수도 있습니다.”
“다른 분들은 어떻습니까?”
고개를 끄덕인 남효운은 재차 물었다.
“소신도 유 계주의 의견에 찬성합니다.”
기대음을 비롯한 대부분 수장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말은 제쳐 두더라도 국면을 장악해야 한다는 말 때문이었다.
“좋소이다. 그럼 천음계주의 말대로 합시다. 공격 시기는 사령계가 개파하는 때로 하겠소이다. 환령계와 성천계가 수고해 주시오. 그리고 하북팽가는 독각에서 나서 주셔야겠소. 한 치의 소홀함이 없도록 만전을 기해 주시길 바라오.”
“알겠소이다, 벌주!”
남효운을 향해 고개를 숙인 일행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성공하리라 보느냐?”
수하들이 전부 빠져나가자 남세옥을 향해 남효운은 물었다.
역천귀혼대법의 성공 여부를 묻는 말이다.
불사삼요를 다스릴 수 있는 요왕(妖王)이 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누구도 도전하지 않았던 이유는 역천귀혼대법의 폐해 때문이었다. 성공 확률 일 할, 반인반마. 역천귀혼대법의 단점이었다.
불사삼요를 조정하는 제군이란 존재가 있는 상황에서 요왕이 되겠다며 대법에 도전할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제군의 말로는 본인의 의지에 달렸다고 합니다. 살고자 하는 의지가 얼마나 강하냐에 따라 떠났던 혼이 돌아올 수 있답니다.”
“그럼 성공 확률이 더 높아지겠구나.”
“그렇습니다. 녀석에게는 살아야 할 이유가 있으니까요.”
남세옥은 슬쩍 미소를 지었다. 양천리가 살아야 할 이유는 귀광두 때문이다. 귀광두를 없앨 유일한 방법이 반인반마의 마혼혈시라 생각했기에 양천리는 역천귀혼대법을 택한 것이다.
“어느 정도 강해질 거라 보느냐?”
“그건 제군도 모른다고 하더군요.”
“남천벌이 강해지는 건 좋은 일인데.......”
남효운은 말끝을 흐렸다. 성공한다면 엄청난 고수가 탄생하는 일이지만 왠지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심려 마십시오. 마혼혈시는 아버님을 거역하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그보다는 고수를 더 영입해야겠습니다.”
“그건 나도 알고 있다. 하지만........”
남효운은 이내 말을 끊었다. 아들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기 싫어서였다. 하지만 마음에 걸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만일 양천리가 완전한 마혼혈시로 태어난다면 그는 남천벌 최고수가 된다. 벌주라는 자신보다 강자가 남천벌에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강호 무림에 고수가 남아 있을 거라 보는 게냐?”
고수 영입 건에 대해 묻는 것으로 남효운은 불편한 심기를 숨겼다.
“강호 무림에는 활동하는 고수보다 은거기인이 더 많다고 했던 분이 아버집니다. 마교 때문에 새로운 인물들이 나오지 않겠습니까.”
“그랬지. 그 일은 네가 맡도록 하거라!”
남효운은 흐뭇한 얼굴로 아들을 쳐다보았다. 무량계를 맡길 때만 해도 잘해나갈지 걱정이 앞섰다. 하지만 아들은 더 이상 품안의 자식이 아니었다. 녀석은 어느새 훌쩍 어른으로 성장해 있었다.
“참! 귀광두에 대한 소식은 있느냐?”
“바다로 나간 다음부터는 소식이 끊겼다고 합니다. 개방에서도 별다른 말이 없는 걸 보면 놓친 것 같기도 하고.”
하지만 두 사람은 알지 못했다.
그들이 있는 곳에서 동쪽으로 수천 리 떨어진 바다 위에서 백산을 비롯한 나머지 일행이 지옥군도 선단을 향해 붉은 살기를 쏟아내고 있다는 사실을.
이미 위하(渭河)에서 물을 익힌 잠영루 살수들에게 있어서 바다는 육지와 다름없었다. 물속에서조차 그들의 신형은 분간하기 힘들 정도로 은밀했다.
파도처럼 물살이 일렁인다 싶으면 순식간에 바다는 붉은색으로 변했다. 물살을 가르며 움직이는 잠영루 살수들은 도살자(屠殺子)였다.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칠백 년만에 돌아온 혈뇌문 문도의 무공 또한 가공했다.
커다란 원을 그리며 빙빙 돌아가는 혈묘(血錨)는 물속이나 수면을 가리지 않았다.
혈묘가 검은 광채를 뿌리며 물을 퍼 올리면 어김없이 혈풍막 무인들이 죽어 나갔다.
잘리는 게 아니라 찢겨 나가는 무인들의 수가 더 많았다.
“네놈들이 주력인가?”
바다 위를 걸어 다가오는 자들을 보며 철웅은 중얼거리듯 물었다. 오십여 명의 몸에서 흘러나온 기운은 지금껏 상대했던 자들과 달랐다.
일정한 형태로 늘어선 그들의 모습은 마치 바다거북을 보는 듯했다.
“진식(陣式)인 모양이군.”
머리와 발, 그리고 꼬리에 해당하는 부근에서 소용돌이치는 물살을 보며 철웅은 빙그레 웃었다.
상대의 강함이 만족스러웠던 탓이다. 몇 차례 싸움을 하지는 않았지만 문주를 제외하면 아직 가슴을 뛰게 만드는 상대를 만나지 못했다.
그런데 앞에 있는 진을 대하자 온몸에서 전율이 일었다.
“기대해도 좋다. 시작한다!”
거북의 머리에 해당하는 자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낮게 소리쳤다.
일순 현무천광진이라 했던 진에서 기묘한 현상이 나타났다. 거북의 등에 해당하는 부근에서 묵빛 광채가 흘러나오는 듯하더니 이내 둥근 반구를 형성했다.
더욱 놀라운 광경은 다음이었다.
오십 명으로 구축한 현무천광진이 물속으로 잠수해 들어가는 것이었다.
“이것 봐라?”
철웅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오십 명이나 되는 많은 인원임에도 불구하고 물속으로 잠수하는 현무천광진의 움직임은 전광석화처럼 빨랐다.
놀람도 잠시 철웅은 재빨리 수면 아내로 가라앉았다.
“허!”
물속으로 들어간 철웅은 낮게 탄성을 질렀다. 거대한 거북 모양을 한 그들이 무서운 속도로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자세를 잡은 철웅은 혈묘의 끝을 불끈 틀어쥐었다.
뒤이어 그는 내심으로 커다란 고함을 질렀다.
일순 철웅의 몸이 검게 물들고, 그의 손을 떠난 혈묘는 물살을 뚫고 거북 모양을 하고 있는 현무천광진을 향해 돌진했다.
바로 그 순간 현무천광진에서도 변화가 생겼다. 쩍쩍 갈라진 거북 등에서 솟구친 백색 광채가 머리 부분을 향해 빠르게 이동했다.
뒤이어 수십 개의 백색 광채는 눈에 해당하는 부분으로 모이는 듯하더니 두 줄기 광채가 물속을 갈랐다.
쿠우웅!
물속이기 때문일까. 두 힘이 부딪치는 소리는 그다지 크지 않았다. 하지만 그 여파는 엄청났다. 수면 밖으로 생겨난 물기둥은 십여 장 높이까지 치솟아 올랐다.
“크윽!”
나직한 신음과 함께 철웅의 신형이 수많은 물방울을 남기며 십여 장 뒤로 밀렸다. 철웅이 남긴 것은 물방울뿐만이 아니었다. 하얀 물방울 속에 붉은 피가 점점이 섞여 있었다.
단 일 초 공방으로 내상을 당한 것이다.
“대단하군!”
여전히 그 자리에 머물러 있는 현무천광진을 보며 철웅은 나직한 신음을 뱉어냈다.
오십여 명의 호흡은 완전했다.
물속에서 펼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평지처럼 행동하고 있다. 수십 년 동안 끊임없이 손발을 맞춰 왔다는 의미이리라.
준비된 자들, 현무천광진을 구축한 저들이 그랬다.
“하지만 이 철웅은 칠백 년을 기다렸다. 혈풍뇌전심법의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 칠백 년을 노력했단 말이다!”
낮게 소리친 철웅은 쇠사슬을 끌어당겨 혈묘를 틀어쥐었다.
그의 주변으로 급격한 소용돌이가 생겨나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혈풍뇌전심법을 변형했다고 하지만 바람을 이용하는 기본을 똑같았다. 점점 빠르게 돌아가던 소용돌이는 가운데 통로를 만들었고, 그 속에서 철웅의 고함 소리가 터져 나왔다.
“금강파천혈(金剛破天血)!”
소용돌이를 만드는 건 비단 철웅뿐만이 아니었다.
무서운 속도로 회전하는 혈묘는 지금까지와는 달리 붉은색 광채를 사방으로 뿌렸다.
그것은 혈뇌문 문주만이 도달할 수 있는 광혈지안의 변형이었다.
붉은색으로 변한 혈묘는 백산의 눈처럼 핏빛 광채를 사방으로 뿌렸다. 이어 물속에 거대한 통로가 생겨났다. 혈묘와 그 뒤를 따르는 철웅, 오 장에 달하는 기다란 통로는 마치 바다의 지배자인 수룡(水龍)을 보는 듯했다.
현무천광진의 대응도 신속했다.
등에서 시작한 백색 광채가 거북의 전신을 감싸자 주변 바닷물이 썰물처럼 빠져나가, 그들이 있는 곳은 진공 상태로 변했다.
백색 투명한 막 속에 있는 현무천광단의 모습이 확연하게 보일 때쯤 오십 개의 검이 일제히 전면을 향했다.
그들의 검에서 흘러나온 기운이 갈라진 거북의 등을 타고 흘러 선두의 두 명에게 전해지고, 두 명의 검은 붉은 광채를 뿌리며 다가오는 혈묘를 가리켰다.
“세상에........”
현무천광진 후미, 물속에 몸을 숨기고 있던 유몽은 내심 신음을 토했다. 현무천광진의 강함 때문이 아니었다. 오십여 명의 고수가 펼치는 진은 강할 수밖에 없다.
그가 부러운 눈으로 쳐다보는 사람은 진을 향해 정면으로 달려드는 철웅이었다.
상대가 안 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는 물러서지 않고 있다.
무무함에 있어서는 백산과 다를 바 없는 사람. 그가 바로 철웅이었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이내 정신을 수습한 유몽은 극성의 월영은둔술을 발휘하여 현무천광진 아래로 내려갔다.
거북의 유일한 약점은 배.
더구나 철웅이 펼친 무공과 격돌하는 순간은 아무리 견고한 진이라 해도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다. 잠시 잠깐에 불과할지라도 충격은 진을 흩트려 놓을 것이고, 살수가 노리는 최고의 기회는 그때인 것이다.
“와라!”
현무천광진에서 이는 거센 물살을 보며 유몽은 철류에 정신을 집중했다. 은밀한 살행을 해야 할 때는 검에 내공이 아닌 정신을 집중해야 한다.
철류의 모습이 투명하게 변했다고 느끼는 순간 전면에서 엄청난 충격이 전해져 왔다.
그리고 유몽은 확연하게 볼 수 있었다.
불은 선혈을 남기고 뒤쪽으로 날아가는 철웅의 신형과 거북의 몸통을 형성하고 있는 진식이 일순 흐트러지는 광경을.
“간다!”
순간 유몽의 신형이 물살을 탔고 철류 끝에서 반 장에 달하는 검강이 불쑥 튀어나왔다.
파앗!
붉은 피가 확 퍼지며 주변을 뿌옇게 물들였다.
일순 재차 진을 구축하려던 현무천광단은 주춤했고, 철류는 두 번째 피를 물속에 뿌렸다.
현무천광진 선두에 있던 자의 얼굴이 당혹스럽게 일그러졌다.
진이 구축되지 않은 상황에서 전면으로부터 엄청난 기운이 밀려들고 있었던 것이다. 물을 뚫고 십 장 밖으로 물러났던 상대가 붉은 광채를 뿌리며 재차 달려들고 있었다.
더구나 두 명의 죽음으로 현무천광진은 와해된 상태.
전방에서 무서운 속도로 다가오는 커다란 닻은 혼자 힘으로 상대할 무기가 아니다. 하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진을 정비할 시간을 벌어야 했다.
불끈 주먹을 틀어쥔 그는 전 내공을 검에 주입했다. 반 장에 달하는 검강을 주시하던 자는 전면으로 몸을 날렸다.
하지만 처음 그가 생각했던 것처럼 엄청난 무게를 지닌 닻은 검으로 상대할 무기가 아니었다. 붉은 광채에 접하자마자 검은 맥없이 부서졌고, 사내를 뚫은 닻은 재차 현무천광진을 향해 밀려갔다.
종횡무진, 현무천광진을 휘젓고 다니는 혈묘의 모습이었다.
유몽에 의해 와해된 현무천광진은 더 이상 절대적인 진이 될 수 없었다.
현무천광진이 있던 주변은 그들의 몸에서 흘러나온 피로 붉게 변했다. 가까스로 혈묘를 피해 냈다 하더라도 기다리는 건 죽음이었다. 물속에서 불쑥 튀어나온 철류(鐵流)가 그들의 목을 꿰뚫었다.
현무천가의 최정예인 현무천광단은 살수인 유몽과 철웅에 의해 철저하게 괴멸당하고 있었다.
수중에서 소리 없이 죽어 가는 현무천광단과는 달리 수면 위에서는 처절한 비명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카아악!”
콰과광!
붉은 광채가 수면으로 비춰 들면 어김없이 짐승의 포효 소리가 들려오고, 지옥군도의 배는 암초에 걸린 듯 기울어진다. 붉은 광채를 뿌려대는 열두 자루의 비도는 인간과 배를 구분하지 않았다. 붉은 바람이 스치고 지나가면 오직 폐허만이 남았다.
스쳐도 죽고, 잘려도 죽고, 붉은 혈안에 눈을 마주쳐도 죽는다.
그는 죽음의 폭풍이었다.
“후퇴하라! 후퇴하라!”
급기야 단목사우는 퇴각 명령을 내렸다.
바다 위에 떠다니는 수백 명의 주검은 전부가 지옥군도 무인들이다. 그들 중에는 믿었던 현무천광단도 섞여 있었다.
잡을 수 있는 자들이 아니었다. 폭풍을 거둬 보려 했던 것이다.
떠난다고 했을 때 그대로 두었어야 했다.
이십 년 간의 노력이, 천하를 도모해 보겠다는 꿈이 물거품처럼 스러지고 있다.
그러나 단목사우의 외침에도 불구하고 현무호를 따라 후퇴하는 배는 다섯 척밖에 되지 않았다. 귀광두에 의해 세 척이 파괴되고, 세 척의 배는 조금씩 가라앉고 있었던 것이다.
사양선을 비롯한 잠영루 살수 셋의 작품이었다.
“쫓아라!”
“주공, 이 친구를 먼저 보셔야겠습니다!”
현무호를 쫓아가려는 백산의 귓전에 다급한 유몽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의 품에는 철웅이 축 늘어져 있었다. 내상을 당한 상태에서 무리하게 내공을 끌어올린 결과였다.
“저런, 멍청한 녀석! 상대가 안 되는 줄 알면서 그렇게 무모하게 덤비면 어쩌자는 거야?”
철웅의 상태를 한눈에 알아본 백산은 낮게 소리쳤다.
“주공보다는 훨씬 낫던데요, 뭘.”
주변을 둘러보던 유몽은 싱긋 미소를 지었다. 지옥군도와의 전쟁에서 아군은 부상자 몇 명을 제외하면 사망자는 한 명도 나오지 않았다.
천오백 무인을 상대로 대승을 거둔 것이다.
배로 돌아온 백산은 재빨리 철웅을 앉히고 그의 명문혈에 장심을 붙였다.
“뭐 해? 저 자식들 쫓아가야 할 것 아냐!”
잠시 철웅의 내부를 관찰하던 백산은 걱정스런 얼굴로 쳐다보는 일행을 향해 고함을 빽 질렀다.
과도한 충격으로 인해 내부가 뒤엉켰을 뿐 목숨에 지장을 줄 만한 상처가 아니었던 탓이었다.
“그러니까 대장 네 말은 저놈들을 쫓아가자, 이 말이냐?”
어이없다는 듯 광치는 수평선 너머로 모습을 감추는 지옥군도의 선단을 가리켰다. 자신들이 타고 있는 배는 노와 돛을 제외하면 아무것도 없다. 그런 배로 철포를 탑재한 배를 추격해 가자니.
조금 전이야 방심한 틈을 노린 작전의 승리였을 뿐, 원거리 함포 사격을 받았다면 얼마 버티지 못하고 침몰 당했을지도 몰랐다.
“방금도 이겼잖아!”
“그건........”
“그만 해요, 오빠. 그것보다는 다른 일을 먼저 해야겠어요. 할아버지, 오빠와 비슷한 체구의 시체 한 구를 건져 오세요.”
“그걸 누가 믿냐, 임마! 그리고 시체가 해안으로 밀려가기나 하겠냐?”
주하연의 의도를 알아차린 백산은 슬쩍 미소를 지었다.
아마 자신이 죽은 것처럼 위장하고 싶은 모양이다. 하지만 육지 한 끝 보이지도 않는 망망대해.
이곳에서 자신과 비슷하게 꾸민 시체를 던진다 해도 중원에 닿게 될지 그것도 의문인 상황 아닌가.
“너와 비슷한 시체를 골라 사지를 자른다면 가능성이 있을지도 모르지. 어차피 바닷물에 떠밀려 가다 보면 얼굴은 알아먹을 수도 없게 될 테니까.”
“거기다 한 가지를 더하면 돼요. 극심한 내상을 당한 것처럼 꾸미는 거예요. 밑져야 본전인데요, 뭘.”
파면신개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주하연은 말했다.
“아예 수십 구를 나처럼 꾸미는 건 어때? 그럼 해안으로 밀려갈 가능성이 높아지잖아.”
“그러다 사지가 잘린 시체 두 구가 발견되면요?”
“두 구........? 하나만 하자!”
잠시 뭔가를 생각하는 듯하던 백산은 어색한 얼굴로 말했다.
주하연의 말대로 한 구만 꾸미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다로 몸을 날린 유몽이 백산과 비슷한 체형의 무인을 건져 오자 주하연은 그의 몸속으로 내공을 주입했다. 특별히 내부를 건드릴 필요가 없었다. 광치의 장력에 당했는지 시체의 내부는 엉망으로 망가진 채였다.
잠시 시체를 내려다보던 주하연은 백산을 향해 불쑥 손을 내밀었다.
“허리에 감은 것 내놔요.”
“이것까지? 싫어야.”
눈앞으로 다가온 주하연의 손에 백산은 펄쩍 뛰엇다. 광혈지옥비를 대신하던 마안철겸을 내놓으라는 소리였기 때문이었다.
본인 입으로 밑져야 본전이라 했던 그녀가 아닌가.
그런데 마안철겸을 내놓으라니.
확신할 수도 없는 일에 마안철겸을 쓰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내가 시체를 가지고 갈 거다. 물론 물속에 넣은 채로.”
“무슨 소리요? 나랑 같이 동사군도에 은거하기로 해 놓고는?”
마안철겸을 내놓으라는 소리보다 더 놀랐다. 동사군도에서 평생을 보낼 것처럼 따라온 그다. 주하연과 자신이 자식을 낳으면 그 아이를 키워 주겠노라고 했던 그가 아니었던가.
“몰랐으면 몰라도 알고도 모른 척할 수가 없구나.”
파면신개는 어색하게 웃었다. 물론 호연작의 마수에 걸린 개방 무인들이 걱정되기는 했지만 그보다는 주하연의 꿈 때문이었다.
백산을 무림 황제로 만들겠다는 꿈.
“또 그런다. 죽든 살든 그놈들 운명이니까 그만 신경 끄쇼.”
“글세. 늙었는지 갑자기 욕심이 생기는구나. 죽기 전에방주나 한번 해 볼까 하고 말이다.”
주하연을 흘끔 쳐다본 파면신개는 빙그레 웃었다.
“방주? 별일이네. 방주를 하랄 때는 죽어도 싫다더니....... 정말 중원으로 갈 거요?”
백산은 재차 물었다. 방주 자리보다는 개방 무인들이 걱정되어 돌아가려는 것인 줄을 왜 모르랴. 다만 끊임없이 무림을 걱정하는 그의 성정이 바보 같아 하는 말이었다.
모든 것을 잊고 동사군도에 가서 여생을 편히 보냈으면 하는 게 백산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쓸데없는 소리 그만 하고 마안철겸이나 내놔라, 녀석아. 광혈지옥비가 있으면 됐지, 그게 무슨 대단한 무기라고 난리냐!”
급기야 파면신개는 백산의 허리춤을 붙잡아 마안철겸을 풀었다.
“아까운데........”
시체의 허리에 감기는 마안철겸을 쳐다보며 백산은 입맛을 다셨다.
“걱정하지 마세요. 아무도 쓰지 못하게 철겸을 부러뜨려 버릴 테니까요.”
아쉬운 듯 쳐다보는 백산을 향해 주하연은 웃으며 말했다.
“그래 주면 좋고.”
그제야 마음이 놓인 듯 백산은 얼굴을 풀었다.
“육지가 가까웠나 보네. 갈매기가 날아다니는 걸 보니.”
시체를 꾸미는 작업이 끝날 무렵 광치가 하늘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의 말대로 허공에는 많은 수의 갈매기들이 날고 있었다.
“아마 대만이란 섬이 있을 거다!”
파면신개의 말대로였다.
저녁 무렵 일행의 배가 도착한 곳은 복건성 서편에 있는 대만이란 섬이었다. 동사군도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선장의 말에 일행은 섬에 하산하여 생필품과 파면신개가 타고 갈 작은 배를 구입했다.
다음 날 새벽, 작은 배를 뒤에 묶어 일행은 바다로 나왔다.
대만이 보이지 않자 파면신개는 떠날 준비를 했고, 그런 그의 모습을 백산은 어두운 얼굴로 지켜보고 있었다.
“저 바다를 어떻게 가려고........ 저번 때처럼 폭풍이라도 불면.......”
“아예 죽으라고 빌지 그러냐?”
“그런 말이 아니잖아요!”
백산은 버럭 고함을 질렀다.
“걱정 말거라. 철웅이랑 같이 가기로 했다.”
“빨리도 말한다.”
철웅을 향해 고개를 돌린 백산은 그제야 안도의 표정을 지었다.
“정말 중원엔 안 나오실 겁니까?”
“글쎄........ 나가면 또 뭐 할 거냐. 보나마나 사람 쳐 죽이는 일만 할 텐데. 나도 남들처럼 평범하게 살아 보고 싶어서 말이다.”
백산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평범한 삶, 어린 시절 칠성리에 살았던 몇 년이 유일하다. 세상을 살아가는 대부분 사람들이 누리는 그런 삶. 자식을 낳고, 그 자식 키우는 재미에 빠져 사는 그런 생활을 원했다.
그런데 아직도 이루지 못하고 있다.
“알겠습니다. 그럼 떠나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철웅은 아쉬운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주하연이 백산을 설득해 보겠다고 했지만 쉽사리 바뀔 것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일단은 지켜보는 게 나을 듯싶었다.
“우리도 가자!”
파면신개와 철웅이 몸을 돌리자 백산은 선실을 향해 소리쳤다.
백산 일행이 탄 배는 서둘러 남으로 방향을 잡았다.
“녀석아, 강호는 도망치듯 떠난다고 해서 떠날 수 있는 곳이 아니란다. 네가 행복하게 사는 길은 한 가지밖에 없다. 그 한 가지를 이루기 위해 나는 남은 생을 보낼 것이다.”
멀어지는 배를 보며 파면신개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만 가시죠, 어르신!”
“그래.”
한동안 배를 응시하던 두 사람은 노를 젓기 시작했다.
검은 옷에 검은 방갓을 걸친 열여덟 명의 가공할 무인들. 그들이 처음 모습을 보인 곳은 상동성과 하북성의 경계인 유하진(柳河鎭)이었다. 처음 그들을 발견한 자들은 북황련 소속 무인들이었다.
황하를 따라 순찰을 돌고 있는 그들의 눈에 기이한 복장을 한 일단의 무인들이 잡혔고, 여태껏 그래 왔듯 정체를 밝히기 위해 그들을 포위했다.
상대 또한 만만치 않은 무인들이라는 사실을 알았으나 북황련 소속이라는 배경을 믿었다. 더구나 유하진 백사장은 산동성에 속해 있고, 그곳은 북황련 관할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금세 후회했다.
간혹 불호를 읊는 그들은 야차(夜叉)였다.
이십여 명에 달하는 북황련 무인들은 갈가리 찢긴 시체가 되어 백사장에 널렸다.
그리고 살아남은 한 명은 나직한 불호 소리를 들었다.
아니, 살인을 저지를 때마다 그들은 불호를 읊었다.
검은 옷에 방갓을 걸친 열여덟 무인들이 두 번째로 나타난 곳은 산동성의 노산(盧山)이었다. 처음과 마찬가지로 그때도 그들은 자의로 모습을 드러낸 것이 아니었다.
수하들을 살해한 범인을 쫓던 북황련 무인들이 그들을 막아섰기 때문이었다. 이번에 그들을 막아선 자는 평범한 무인이 아니었다.
십정의 일인인 장쾌권 전육이란 자가 북황련 전밀사 오십 명을 데리고 나타난 것이었다.
십정의 일인이란 화려한 별호를 가진 전육이지만 그 또한 처음 막아섰던 자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상대의 무공을 알아봤다는 것이었다.
백보신권(百步神拳), 전육의 가슴을 강타한 두 줄기의 붉은 광선은 소림 신공의 하나인 백보신권이 분명했다.
열여덟 명의 흑의 방갓인들은 소림을 떠났던 십팔나한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더 이상 십팔나한이란 별호로 불리지 못했다. 두 번에 이은 혈전으로 인하여 어느새 십팔마승(十八魔僧)이라 칭해지고 있었다.
처얼썩!
“아미타불!”
차가운 바닷바람이 불어오는 황해를 보며 불호를 읊는 방갓인들. 검은 승복을 걸친 열여덟 명의 승려는 이제 십팔마승으로 불리기 시작한 광자 일행이었다.
“어디서 찾는단 말인가?”
하얀 포말을 남기고 사라지는 파도를 광자는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소문을 좇아 백산 사조의 흔적을 더듬었다. 그리고 그분이 배를 타고 바다로 떠났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어디로 갔는지, 어디서 그분을 찾아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더구나 그분은 무림공적이자 반역자. 누구에게 물어볼 형편도 아니어서 더욱 답답했다.
“사형, 이럴 게 아니라 남쪽으로 가 보는 게 어떻습니까?”
한편에 가만히 서 있는 광오가 넌지시 말을 건넸다.
“들은 말이라도 있는가?”
“사실인지는 모르지만 사부님께서 하셨던 말이 생각나서요. 그러니까 혈광마겁 때 구천마검 석두 그분이 무공을 익혔던 곳이 동사군도였다는 말을 들은 것 같습니다.”
“정말인가?”
광자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어쩌면 그곳으로 가기 위해 배를 띄웠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광오는 말끝을 흐렸다. 동사군도가 있는 광동성까지 수천 리 길. 돈이 없는 자신들로서는 육로를 택해야 하는데 순탄한 길이 될 것 같지 않아서였다.
“무림인들 때문인가?”
“그렇습니다, 사형!”
“상관없네. 우린 어차피 십팔마승(十八魔僧)이 되었네. 우린 돌아오지 못할 강을 건너 버린 거야. 중생을 구제해야 할 이 손으로 그들을 죽이고 있으니 말이네. 하지만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네.”
나직하니 말하던 광자는 진득한 살기를 쏟아 냈다. 이편으로 빠르게 다가서는 기척이 감지되었던 탓이다.
“사형!”
“쿡! 나는 말이네, 부처님보다 소림을 더 사랑했나 봐. 사부님의 죽음이 사숙들의 죽음이, 또 사형제들의 죽음이 막 화가 나. 그들에게 살수를 펼친 황실에 화가 나고, 그들을 구하지 못했던 내 자신에게 화가 난단 말이네.”
말을 하면서 광자는 몸을 돌려 십팔나한의 전면으로 나섰다. 그가 나섬과 동시에 다른 나한승 또한 일정한 방위를 점하며 전면을 주시했다. 열여덟 명의 나한승들이 정해진 방위에 자리하자 그들의 몸에서 투명한 기운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십팔나한진(十八羅漢陣)이었다.
잠시 후, 십팔나한 앞으로 백여 명의 무인들이 떨어져 내렸다.
“정말 십팔나한이군.”
무인들 앞으로 나선 자가 놀란 눈으로 십팔나한을 보며 말했다. 그는 산동악가의 수석장로인 와선창(渦旋槍) 악선(岳仙)이었다.
“이제 와서 마음이 변한 건가? 아니면 강호 무림이라 우습게 보는 건가?”
강렬한 살기를 뿌리는 십팔나한진을 보며 악선은 비릿한 조소를 머금었다.
“아니외다, 악 시주. 우린 변하지 않았소이다. 우릴 막지만 않으면 누구도 상할 일이 없을 거요. 하지만 우리 소림을 막아서면 용서하지 않을 참이요. 누가 되었든지.”
“그게 무광의 뜻인가?”
“또 틀렸소이다, 악 시주. 사부님의 뜻이 아니라 부처님보다 소림을 사랑했던 내 뜻이오. 부처님보다 사형제들을 더 사랑했던 십팔나한의 뜻이오!”
광자는 차분하게 말했다. 칠백 사형제들의 죽음을 원망할 마음은 없다. 다만, 한 가지만 보여 주고 싶을 뿐이다.
힘이 없어서, 약해서 멸문당한 게 아니라는 사실을.
“소문대로 마(魔)로 접어들었군. 그대들이 어떤 길을 택하든 상관할 바 아니지. 나는 무림공적인 그대들을 없애면 그만이니까. 준비하라!”
슬쩍 미소를 문 악선은 대기하고 있던 수하들을 향해 소리쳤다.
그가 데려온 오십 명의 무인들은 악가 최 정예인 창천대(槍天隊)였다. 굳이 악가 최 정예라는 창천대를 출병시킨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상대가 소림의 십팔나한이기 때문이다.
소림 진의 최고봉은 백팔나한진이 아니라 십팔나한진이란 사실은 문파를 경영하는 수뇌들은 대부분 알고 있다. 실질적으로 소림을 대표하는 무공이 바로 십팔나한인 것이다.
십팔나한을 이긴다 함은, 곧 소림을 이겼다는 말과 통한다. 산동악가의 의도는 거기에 있었다.
북황련에서 서열 오위에 머물고 있는 산동악가의 위상을 높일 수 있는 제물로 소림의 자존심이라 부르는 십팔나한을 택한 것이었다.
“소림은 더 이상 자비로운 곳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우린 십팔나한이 아니고 십팔마승이란 말이다! 대마근접(大魔近接)!”
속삭이듯 말하던 광자의 입에서 천둥 같은 고함소리가 터져 나왔다. 뒤이어 등에 묶었던 곤(棍)을 빼는 나머지 십팔나한도 광자의 외침에 화답하듯 우렁차게 외쳤다.
“출항마진(出降魔陣)!”
천지를 떠올린 듯한 외침 소리와 함께 십팔나한진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홉 명의 승려들이 뒤로 빠지며 각자의 곤을 전면 승려의 명문혈에 가져다 대었다.
일순 전면에 있던 아홉 승려의 몸이 폭풍을 맞은 듯 부르르 떨었다.
후미에 있던 동료의 곤을 타고 그들의 내공이 물밀듯 밀려들었던 것이었다.
광자의 얼굴이 붉게 변했다. 곤을 타고 들어온 사제의 내공은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엄청났다. 온 몸의 혈도가 터질 것 같았다. 이를 악문 광자는 곤을 번쩍 치켜들며 소리쳤다.
“일타수지(一打囚地)!”
“대마위축(大魔萎縮)!”
-한 번의 타격으로 땅을 가두니 대마가 위축되고.
웅장한 외침 소리와 함께 전방에 있던 아홉 명의 십팔나한은 번쩍 들어 올렸던 곤을 전방으로 쭉 내밀었다.
일순 엄청난 광경이 벌어졌다.
아홉 개의 곤에서 쏟아진 기운이 전면을 향해 가공할 기세를 머금고 뻗어 나가는 것이었다.
“허억! 막아라!”
아홉 개의 곤에서 흘러나온 기운이 심상치 않음을 감지한 악선은 재빨리 물러서며 고함을 내질렀다.
악선의 명령을 받은 창천대는 재빨리 수비 진영을 만들며 전면으로 창을 찔러 넣었다. 그들 또한 이미 진식을 구축하고 있었던 터라 대응은 빨랐다.
그러나.
쿠쿠쿵! 콰콰광!
“크아악!”
“아아악!”
처절한 비명 소리가 바람을 타고 울렸다.
“이럴 수가!”
악선의 얼굴이 해쓱하게 변했다. 십팔나한진에 대해서는 많은 연구가 있었고 대처할 방안도 마련했다.
지금 악가 무인들이 구축한 진이 그것이었다. 본래소림의 십팔나한진은 상대를 포위한 상태에서 가장 큰 효력을 발휘한다. 요컨대 포위하지 못하면 별다른 위력을 발휘하지 못한다고 했다.
그런데 지금 보여 주는 엄청난 기운은 무엇이란 말인가. 단 한 번의 격돌로 인하여 악가 무인 십여 명이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하지만 악선의 놀람은 시작에 불과했다.
“이타수천(二打囚天)!”
“대마복지(大魔伏地)!”
-이타에 하늘을 가두니, 대마가 머리를 조아리네.
범종 소리처럼 울리는 웅장한 외침 소리와 함께 열여덟 명의 승려는 동시에 오 장을 전진하며 처음과 마찬가지로 곤을 뻗어 냈다.
“크아악!”
“아악!”
“커어억!”
창천대, 악가의 최정예, 갖가지 별호로 불리던 그들은 십팔나한의 상대가 아니었다. 두 번째 주고받은 공수에서는 처음보다 더 많은 수의 창천대 무인들이 죽어 나갔다.
“이럴 수는 없다고! 이럴 수가 없단 말이야!”
악선은 고래고래 고함을 내질렀다. 십팔나한의 힘이 이 정도로 강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그들의 곤에서 쏟아진 힘은 인간의 힘이라 부를 수가 없었다. 하늘에서 쏟아지는 천력이었다.
그건 소림의 비밀이었다.
지금 십팔나한이 펼치는 진식은 십팔나한진의 종진(縱陣)이라 부르는 진식이다. 소림 역사상 단 한 번밖에 펼치지 않았던 진식.
오십 년 전 백산을 상대로 펼쳤던 것이 유일했다.
묵안혈마 백산을 상대로 양패구상을 했던 종진. 그 진법이 악가 무인들을 무차별하게 도륙하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더욱 광포한 함성 소리가 울려 퍼졌다.
“삼타수천지(三打囚天地)!”
“대마소멸(大魔消滅)!”
-삼타에 천지를 가두니, 대마가 사라지네.
“사타천지번복(四打天地飜覆)!”
“오! 서방정토(西方淨土)!”
-사타에 천지가 정화되니, 그곳이 서방정토니라.
일순 악선은 눈을 감고 말았다. 동시에 펼쳐진 십팔나한진의 삼초와 사 초, 거센 물보라를 뿌리던 파도가 잠잠해지고 불어오던 바람마저 숨을 죽였다.
창천대가 있는 십장 주변은 진공 상태로 변한 듯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저게 소리의 힘인가.”
바람에 흩어지는 꽃가루처럼, 머리부터 시작하여 가루로 흩어지는 창천대의 모습에 악선은 처지도 잊고 중얼거렸다.
결코 방심해서 당한 게 아니다. 나름대로 창천대는 최선을 다했지만 소림의 십팔나한은 넘을 수 없는 벽이었다.
소림의 힘이었다.
“빌어먹을!”
나직한 욕설과 함께 악선의 신형 또한 머리부터 시작하여 가루로 흩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아미타불!”
무심한 얼굴들, 흔적조차 남기지 못하고 사라진 악가 무인들을 보고도 나한승들은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다만 습관처럼 그들의 입에서는 나직한 불호만 흘러나올 뿐이었다.
“앞으로도 마찬가지다. 새로운 소림은 피[血] 위에 세워질 것이다. 우리의 피와 강호 무림인들의 피 위에. 가자!”
십팔마승(十八魔僧)의 되어 버린 자들.
묵묵히 고개를 끄덕인 그들은 광자를 따라 몸을 날렸다.
그들이 움직이는 방향은 남쪽이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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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보고 갑니다. 감사 합니다..............................................
재미 있게 읽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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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보고갑니다
감사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0^
감사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