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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 & 창경궁 관람과 서울거리예술 축제까지
▲트랭글 괴적
▲안국역 3번 출구로 나와 원남사거리 방향 쪽으로 이동 창덕궁으로 간다.
▲창덕궁 앞 은행나무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 임진왜란 때에도 타지 않고 남은 오래 된 건축물이다.
(사진을 잘 못 찍어 죄송)
개설
사적 제122호. 창덕궁은 1405년 태종 때 건립된 조선왕조의 왕궁이다.
처음에는 법궁(法宮)인 경복궁에 이어 이궁(離宮)으로 창건되었지만, 이후 임금들이 창덕궁에
머무는 것을 선호해왔고 특히 임진왜란 이후 법궁인 경복궁이 복구되지 못하면서 창덕궁은
고종 때까지 법궁의 기능을 하였다.
이처럼 오랜 기간 동안 지속적으로 사용되면서 다양하고 복잡한 왕실 생활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에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내용
조선의 태조 이성계는 수도를 한양으로 정하고 경복궁을 창건했지만 제2대 정종은 옛 도성인
개성으로 다시 수도를 옮겼다.
제3대 태종은 개성에 남으려는 대신들의 반대 의견을 무릅쓰고 1404년(태종 4) 다시
한양 천도를 결정하였다.
이 때 경복궁이 존재하고 있었지만 새로 창덕궁을 건설하고자 하였다.
이는 경복궁에서 있었던 정치적 사건에 대해 태종이 꺼려한 이유가 컸지만, 두 개의 궁궐을
동시에 운영하는 양궐체제가 성립하는 계기가 되었다.
1405년 10월에 공사가 끝났으며, 10월 25일 창덕궁으로 이름 붙였다.
이 때 완성된 창덕궁의 규모는 외전 74칸, 내전 118칸이었다.
임진왜란 중 소실된 궁궐들 중 제일 먼저 복구를 시작한 것은 창덕궁이었다.
창덕궁이 먼저 복구된 까닭은 그전까지 임금들이 주로 거처하던 곳이 창덕궁이었으며, 경복궁은
풍수지리상 불길하다는 의견이 가세되었기 때문이다.
창덕궁 복구 공사는 선조 말에서 광해군 초까지 이루어졌다.
그러나 중건하고 약 10년 후 1623년 인조반정 때 외전 일부를 제외한 대부분의 전각이
소실되고 말았다. 이후 25년간 방치되었다가 1647년에 복구되었다.
이후 효종대에는 대비를 위해 수정당, 만수전 등이 건축되었고, 현종대에는 집상전이 건축되었다.
숙종대에는 제정각을 건축해서 각종 천문기기를 설치했고, 청심정, 영타정, 사정기비각, 능허정, 애련정 등을
지으면서 후원을 본격적으로 꾸몄다.
정조는 학문을 중심에 둔 정치를 구현하기 위해 각종 시설을 건축했다.
규장각을 중심으로 봉모당, 개유와, 열고관, 서고, 서향각 등을 세워 역대 임금의 자료와 새로 구입한
도서류를 보관하고 연구할 수 있도록 했다.
또 세자를 위한 공간도 크게 확장했다. 중희당과 수강재가 대표적이다.
그러나 1803년(순조 3) 12월 선정전 행각에서 시작된 화재가 인정전을 비롯한 내전의 상당 부분을 불태웠고,
곧 재건공사가 시작되었다.
창덕궁의 마지막 대화재는 1917년 11월에 일어났다. 대조전 서쪽 행각의 온돌에서 시작된 화재는
내전 영역 대부분을 불태웠다.
복구공사는 경복궁의 강녕전과 교태전 등의 전각을 이건하는 것으로 주요 부분을 충당했다.
이때의 재건공사는 창덕궁의 원래 모습을 크게 바꾸어 놓았다.
또 자동차 차고와 전등, 탁자, 의자, 커튼 등 근대식 설비와 가구의 도입도 건축의 면모를 바꾸는데 일조했다.
대한제국의 황실 가족들은 창덕궁의 낙선재 영역에서 마지막까지 거주했다.
▲창덕궁 안으로 들어와서
▲진선문
▲인정문을 들어서니
▲창덕궁 인정전
국보(1985.01.08 지정). 평면은 앞면 5칸, 옆면 4칸이며, 중층이나 내부는 통층으로 되어 있다.
1405년에 건립되었으며, 임진왜란 때 소실되자 1610년에 중건했고, 1803년(순조 3)에
불탄 것을 다음해에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창덕궁, 정1품부터 정9품까지 조례때 서있어야 할 위치가 표시되어 있다.
창덕궁의 인정전(조선 후기), 국보 제225호
▲인정전 내부
대조전
보물 제816호. 1405년에 건립되었으며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광해군 때 중건했다.
인조반정 때 다시 소실된 것을 1647년에 다시 지었고, 1833년에 또다시 화재로 소실된 것을 복원했다.
▼창덕궁 안의 부속 건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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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정전 측면 모습
▲선정전. 청기와를 얹은 건물로, 왕과 신하들이 회의를 하던 곳이다.
선정전
보물 제814호. 앞면 3칸, 옆면 3칸의 단층 팔작기와집이다.
창덕궁을 창건할 때 건립되었으나 인조반정 때 소실되어 1647년에 중건했다.
장대석을 바른층쌓기한 한 단의 월대 위에 넓은 장대석 바른층쌓기 기단을 만들고 다듬은 초석들을
놓은 다음 그위에 12개의 평주와 2개의 고주를 세웠다.
기둥과 창방 위에 평방을 놓고 공포를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놓은 다포식 구조이다.
공포의 짜임은 외3출목·내4출목으로 살미의 끝은 날카로운 앙서로 되어 있고 내부는 교두형으로
되어 있지만, 삼제공과 사제공 끝은 운형으로 초각되어 있다.
가구는 전면에 세운 2개의 고주와 뒤쪽 평주에 대들보를 걸고, 대들보 위는 우물천장으로 가렸다.
바닥에는 현재 카펫이 깔려 있는데, 이것은 본래 전바닥이었던 것을 일제가 변형시킨 것이다.
어칸 뒤쪽으로 가는 2개의 기둥을 세워 벽체를 만든 다음 어좌와 일월오악병풍을 두었으며, 그 위쪽은
보개천장으로 꾸몄다.
축부의 중앙 어칸에는 띠살문짝을 달았고, 나머지 칸에는 높은 머름을 두고 그 위쪽으로 띠살창호를 달았다.
처마는 겹처마이고, 양성을 하지 않은 채 치미와 용두를 얹어놓았다.
희정당 내부 모습
인정전이 창덕궁의 상징적인 으뜸 궁궐전각이라면
희정당은 왕이 가장 많이 머물렀던 실질적인 중심 건물이라고 할 수 있다.
원래 이름은 숭문당이었으나 1496년(연산 2)에 희정당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중전마마도 알현하고
내용
보물 제815호. 정면 11칸, 측면 4칸의 2익공식 팔작지붕건물. 창덕궁의 편전(便殿)은 본래 선정전이었는데
이 건물은 내전에 속한 건물이었으나 조선 후기에 이 건물을 편전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건물의 창건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며, 1496년(연산군 2)에 궁내의 수문당(修文堂)이라는 건물이
소실되었다가 재건되면서 당호를 희정당이라고 바꾸면서 창덕궁의 한 건물로 등장하게 되었다.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1609년(광해군 1)에 창덕궁이 재건될 때 다시 지어졌으며,
다시 인조반정 때 소실되었다가 1647년(인조 25)에 재건되었다.
이 때에는 인경궁(仁慶宮)의 건물을 철거하여 그 자재로 세웠다.
1833년 또다시 소실되어 이듬해 재건되었으나 1917년에 화재로 타 버리고 1920년에 다시
세워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건물이 여러 차례 불에 탔다가 재건되면서 규모도 달라지고 건물의 용도도 바뀌었는데,
처음에는 규모가 크지 않았던 것 같다.
인조 때 재건될 때에는 15칸에 지나지 않았으나 뒤에 편전으로 이용되면서 규모가
늘어나 현재의 큰 건물이 되었다.
희정당은 외전에 속하는 인정전·선정전의 동쪽에, 외전건물들과는 축을 약간 달리하여 놓여 있으며,
희정당의 북쪽에는 내전의 정당인 대조전이 있다.
건물 앞의 왼쪽에 연못이 있고 작은 뜰이 마련되어 있었으나, 1920년에 재건되면서 건물 남면에
자동차의 진입을 위한 돌출된 지붕이 설치되는 등 많은 개조가 이루어졌다.
장대석을 5단 쌓은 기단 위에 모난 초석을 놓고 방주를 세웠다.
외진주(外陣柱 : 바깥기둥) 위에 창방을 돌리고 일반적인 형태의 2익공을 결구하였으며, 주칸에는
운공(雲工 : 장여와 도리를 가로 받친 물건)을 두어 주심도리를 받게 하였다.
익공의 내부는 보아지가 되어 퇴량을 받게 하고, 퇴량의 내부는 고주에 결구되었다.
고주 상부는 팔각(八角)인 주두를 놓고 그 위에 사각(四角)의 재주두를 두어 대들보를 받았으며,
대들보 상부에 붙여 우물천장을 가설하였다. 지붕은 각 마루를 양성하고 용두·잡상을 두었다.
정면 9칸, 측면 3칸을 거실로 하고 주위는 툇간으로 하여 통로로 사용하였는데, 이 중 정면 3칸을
통칸으로 하여 응접실로 하고 서쪽은 회의실로 꾸미고 동쪽은 여러 개의 방으로 나누었다.
이 건물은 1920년에 재건할 때 한식을 위주로 하면서 양식을 가미하여 응접실과 회의실은 바닥마루,
유리창문, 문 상부의 휘장, 벽체 등을 양식으로 꾸미고 양식 탁자를 놓았다.
현재 응접실 좌우에 김규진(金圭鎭)의 <금강산도>·<해금강도>가 있다.
조선 말기와 한말에 걸친 궁궐편전의 건축형태를 남기고 있는 점에서 주목된다.
▲세자 저하도
낙선재는 낙선재를 포함해 석복헌(錫福軒)과 수강재(壽康齋) 등을 통틀어 그리 부른다.
1847년(헌종 13)에 지어진 비교적 최근의 궁궐이다.
헌종은 여덟 살의 어린 나이에 순종의 왕위를 이어받았다.
재위 3년에 효현왕후를 맞았으나 그녀는 6년 후 세상을 떠났다. 다음해 계비의 간택이 있었다.
헌종은 관례를 깨고 직접 간택에 참여했다. 하지만 자신이 마음을 둔 경빈 김 씨가 아닌 효정왕후가
새 왕후로 결정됐다.
효정왕후가 3년 동안 후사의 기미가 없자 헌종은 이를 핑계 삼아 경빈 김 씨를 후궁으로 맞아들였다.
낙선재는 후궁 경빈 김 씨를 위해 헌종이 직접 지은 궁궐 속의 궁궐이다.
원래는 창경궁 권역에 속했다.
낙선재는 헌종의 서재와 사랑채 역할을 했고 석복헌은 경빈 김 씨의 처소로 쓰였다.
수강재에는 헌종의 할머니이자 선대왕 순조의 비 순원왕후가 기거했다.
또한 그 사이에는 6각 정자인 평원루(平遠樓, 상량정), 숙종 때 지은 취운정(翠雲亭) 등의
전각 주변으로 후원을 조성했다. 계단식 정원인 화계도 꾸몄다.
그 공간마다에 헌종과 경빈 김 씨의 사랑이 피어났으리라.
▲낙선재를 둘러본다. 형판글씨는 중국에서 온 문인의 친필이라 한다.
이 문을 들어서면 즐거운 일이 생길 것 같은 예감..
▲6각 정자인 평원루가 보인다. (상량정) 일반인들의 출입을 막고있었다.
▲낙선재 뒷뜰 후원이 잘 꾸며져 있다.
▲고궁 담장과 구절초 절묘한 조화
▲석복헌, TV 연속극에도 주연으로 소개된 경빈 김씨가 살던곳, 이곳은 헌종의 후궁인 경빈 김씨의 처소였다고,
석복헌ㆍ 錫福軒
1848 헌종 14년에 경빈 김씨 처소로 낙선재 동쪽 옆에 지음
(1849 헌종이 23살로 승하하자, 경빈 김씨는 퇴궁하여 순화궁(인사동 태화관터)에
살다1907 76세로 생을 마감했다 )
1926 ~1966 : 순종 승하후 순정효황후가 윤비(1894~1966) 가 은거하다 별세
▲계단위에 소나무,낙선재 터는 지형을 회손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에 궁궐을 지었다고,
▲창덕궁 관람을 끝내고 창경궁 으로 이동한다.
▲창경궁
본래 세종이 상왕으로 물러난 태종의 거처를 마련하기 위해 지은 수강궁이었다.
그후 1483년 수강궁 자리에 별궁인 창경궁을 건립했다.
임진왜란 때 화재로 소실된 것을 1616년 다시 세웠으며, 1624년 이괄의 난으로 소실된
많은 전각들이 1633년에 중건되었다.
1656년에 요화당·난향각·취요헌·계월각 등 4개의 전각을 지었다.
1909년 일제가 궁 안에 동물원과 식물원을 만들었으며, 1911년에는 박물관을 짓고 창경원으로
격을 낮추어 불렀다.
1984년 일제가 철거했던 문정전과 월랑 등을 복원하고 정비하면서 다시 이름을
창경궁으로 환원했다.
이 궁궐의 전체적인 배치는 창덕궁처럼 지형의 높고 낮음을 그대로 두고 꼭 필요한 곳만을
골라 집터를 잡고 정원을 꾸민 것이 특징이다.
사적 제123호로 지정되었다.
▲풍기대, 지금의 풍향계
▲앙부일구
▲성종 태실및 태실비
▲팔각칠층석탑
▲춘당지
▲대온실로 이동
▲온실 내부
▲백송
▲괴목..한쪽면만 가지고 살아가는 대단한 느티나무
▲양화당
▲통명전
▲조선시대 도자기
▲영춘헌
▲경춘전과 환경전
▲ 숭문당과 함인정
▲명정전
▲창경궁을 관람하고 홍화문으로 이동중
▲홍화문
창경궁은 세종대왕이 상왕인 태종을 모시고자 1418년에 지은 수강궁이 그 전신이다.
이후 성종 임금 대로 와서 세조의 비 정희왕후, 덕종의 비 소혜왕후, 예종의 비 안순왕후를 모시기 위해
명정전, 문정전, 통명전을 짓고 창경궁이라 명명했다.
창경궁에는 아픈 사연이 많다.
임진왜란 때 전소된 적이 있고 이괄의 난이나 병자호란 때에도 화를 입었다.
숙종 때의 인현왕후와 장희빈, 영조 때 뒤주에 갇혀 죽임을 당한 사도세자의 이야기 등이 창경궁 뜰에 묻혀있다.
사적인 창경궁은 일제강점기에 일제에 의하여 창경원이라 격하되고 동물원으로 탈바꿈 했었으나,
일제의 잔재를 없애기 위한 온 겨레의 노력으로 1987년부터 그 옛날 본래 궁의 모습을 되찾게 되었다.
홍화문, 명정전(조선 왕조의 정전 중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임), 통명전, 양화당, 춘당지 등이
있으며 구름다리를 통하여 종묘와 드나들 수 있게 되어 있다.
▲창경궁을 나와 원남사거리에서 새로 개통한 궁궐 담장길로 엘리베이트를 타고 이동
▲지난 7월 새로 복원한 궁궐과 종묘를 이어주는 궁궐 담장길,340m의 길이는 금방 끝나지만
일제가 갈라 놓은 곳을 다시 이어진 길을 의미깊게 걸어본다.
서울엔 산을 뚫어 터널을 만든 게 아니라, 도로 위에 터널을 짓고 다시 그 위에 숲을 만든 곳이 있다.
서울시가 2022년 7월 창경궁과 종묘를 연결하면서 만든 녹지다. 일제가 갈라놓은 지 90년 만에
다시 두 곳을 연결했다.
야생동물이 아닌, 역사를 위한 숲을 만든 것이다.조선시대 창경궁·창덕궁과 종묘는 담장 하나 사이에
두고 숲으로 이어져 있었다.
창경궁은 창덕궁과 함께 ‘동궐’이라 불렸고, 왕실 가족의 생활공간으로 쓰였다.
종묘는 역대 조선 왕과 왕비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조선시대 종묘는 사직과 더불어 왕조의 근간으로 여겨졌다.
일제강점기 창경궁과 종묘의 역사성은 훼손됐다.
일제는 1907년 창경궁을 동물원과 식물원으로 만들고, 4년 뒤 이름을 창경원으로 격하했다.
이후 1932년 광화문~창덕궁 돈화문~대한의원(서울대병원)을 잇는 ‘종묘관통도로’(현 율곡로)를 개설했다.
창경궁과 종묘를 도로로 갈라놓은 것이다.
왕이 창덕궁, 창경궁에서 종묘를 참배할 때 이용하던 종묘 북문인 ‘북신문’도 그 과정에서 사라졌다.
▲새로 복원된 궁궐 담장길을 걸어보며 그 의미를 되새겨 본다.
▲종묘 북문 북신문
▲지난 7월 90년만에 완공된 궁궐 담장길
▲서울시는 2010년 11월부터 12년간 연결·복원 공사에 나섰다.
도로를 넓히고, 터널을 만들고, 궁궐 담장(503m)을 쌓았다.
일제가 허문 궁궐 담장은 주변에 원형이 남아 있는 담장과 옛 그림 <동궐도> 등을 참고해 복원했으며
서울시는 “공사 중 발굴한 종묘 담장 석재와 기초석의 30% 이상을 재사용했다”고 설명했다.
궁궐 담장 따라 산책길도 냈다. ‘궁궐 담장 길’(340m)이라 이름 붙였다.
그 길가에 북신문도 복원했다.지하철 3호선 안국역 3번 출구에서 서울대병원 방향으로
5~10분 걷다보면 터널이 나온다
▲일본의 지배하에 쌓은 담장이라 일본의 연호가 들어가 있다고 한다.ㅠ
▲월남 이상재 선생 동상
▲종묘 정문, 들어가 보고 싶지만 오늘은 서울광장에서 열리고있는
서울 거리예술축제장으로 이동해야 해서 시간이 없다. 다음을 기약하고 통과한다.
▲종묘 하마비와 전교
▲종로 3가에서 서울 광장으로 이동하여 그 동안 코로나로 3년만에 열리고 있는 서울 거리예술 축제에
프로그래머로 활동중인 며늘아이를 격려하고 응원차 음료수를 준비하여 축제장에 도착한다.
▲주말을 맞아 많은 시민들이 공연자들과 하나가 되어 거리예술 축제를 흥겹게 즐기고 있다.
▲돌아 버리겠네?라는 작품명, 관객들로 부터 뜨거운 박수 갈채를 받은 공연, 땀이 범벅이된 공연자들
▲외국인 공연자들이 관람객들과 함께 순식간에 만든 작품
▲서울 시청과 광장 모습
▲서울 광장의 바닥 분수, 장난꾸러기 꼬마가 춥지는 않을까?
10월의 첫날 첫 주말이다.
이번 서울 광장에서 열리고 있는 서울 거리예술축제 프로그래머로 큰 행사를
준비한 며늘의 작품을 구경하기 위해 우리부부의 모든 일정 취소하고 오전 시간에
창덕궁과 창경궁 새로 복원한 궁궐 담장길을 걸어 보기로 하고 안국역 3번 출구로 나와
경복궁으로 이동한다.
500년 역사가 고스란히 묻어있는 궁궐을 둘러보며 화려한 단청의 건물들이 옛스럽고
우리의 섬세하고 미려한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건물 양식들이 화려하고 아름답다.
또 낙선재 같은 곳은 화려하지 않고 단아한 건물들.. 궁궐 주변의 많은 수목들도 고목이 되어
건물들과 함께 한 세월로 그 기품을 보여주고,
궁궐과 주변의 부속 건물들을 돌아보고 일본의 통치하에서도 건재하고 몇번의
화마에도 불구하고 재현해 새로 복원한 건물들이 남아 있어 후세들에게 엄숙한 교훈을 남겨준다.
17세기까지 살았던 낙선재를 둘러보며 헌종의 후궁인 경빈 김씨를 떠올려 보며
엄숙한 마음 뒤로하고 창덕궁을 나와 창경궁으로 이동 하여 춘당지와 대온실 창경궁을 둘러보고
홍화문으로 나와 원남 사거리 방향으로 이동하여 90년만에 새로 복원한
궁궐 담장길로 향한다.
궁궐에서 종묘를 이어 주는 길을 일본인들이 산 허리를 잘라 도로를 내어 민족정기를 말살
시키려 한 만행으로 길이 끊겼었다.
의미있는 이 길에 새로 복원 된 북신문과 궁궐 담장길이다.
340m의 길지 않은 길이지만 종묘와 궁궐을 이어 주었다는 것에 의미를 부여하고 싶은 길이 였다.
다만 아쉬운건 하루 빨리 문화재청과 서울시가 합의를 해 한장의 입장권으로 종묘와 창덕궁,창경궁을
자유롭게 연결시켜 고궁을 즐거운 마음으로 관람할 수 있기를 기대하며 아름다운 우리 문화 고궁을
둘러보는 초 가을의 의미있는 시간을 마무리 하고 종묘 담장길을 걸어 종로3가에서 서울 광장으로
이동하여 거리예술 축제장에서 공연 부문에 능력을 인정하는 며느리도 만나보며 칭찬과 격려도
해 주고 재미있는 공연들도 즐겁게 보며 오후 시간을 보내고 귀가 길에 든다.
처음 가 본 창덕궁과 창경궁 궁궐 담장길까지 걸어보고 공연까지..하루에 많은 것을 즐기며
의미있는 10월의 첫날 첫 주말을 아내와 함께 가을 마중을 제대로 한 하루였다.
우리 10월에도 즐겁고 행복 하자~~~
여기까지...
감사 합니다.
2022. 10. 1.
가곡
첫댓글 요즘 볼것도 많고 갈곳도 많아 행복한 고민을 해 봅니다. 후기 즐감하고 갑니다.
다녀 가셨군요. 안녕하시지요?
걷기 좋은 가을철 볼 것도 갈 곳도 많은 계절인데 마음만
바쁜거 같습니다.
즐감 하셨다니 감사 합니다.
남은 연휴 즐겁게 보내셔요.
오랜만에
산과 들에서 벗어나 시내에서,고궁에서
가을을 즐기고 오셨군요
고궁의 단풍구경은
아직인것 같습니다
10월말쯤
창덕궁 후원(비원)과
창경궁 단풍 나들이 예정인데
가곡님부부 덕분에
미리 보게 됐습니다
감사합니다
남은 연휴도
즐겁게 보내세요
오랫만에 고궁을 걸어 보았습니다.
창덕궁 후원을 둘러보려 하였는데 시간이 맞지 않아
패스 했습니다.
단풍이 들면 정말 좋은 풍경이 될 거 같습니다.
저희도 단풍들 때 다시 한번 가 볼까 합니다.
즐거운 연휴 되세요.
감사 합니다.
10월말쯤 고궁걷고 청진동 해장국집에서
수육과막걸리 한잔 해야겠습니다,
좋은정보감사합니다.
가을 단풍이 절정일 때 가면 정말 좋을 거 같습니다.
저희도 단풍 시기 보며 다시 한번 가려고 합니다.
이번에 창덕궁 후원을 시간이 안 맞아 못 가보고 그냥 와서 아쉬움이 남습니다.
단풍들 때 꼭 한번 다녀 오시길 강추 합니다.
수육과 막걸리 한잔도 잊지 마시고요.ㅋ
개천절 연휴 즐겁게 보내셔요.
감사 합니다.
산에 단풍이 지고나면 늘 고궁나들이를 다녔지요
올해도 11월초에 다녀올까 합니다
창덕궁과 창경궁은 50년전 남편과 데이트장소로
즐겨 찾았던 곳이지요
덕분에 잠시 추억속으로 들어가네요
수고하셨어요 즐감하고갑니다
50년전 데이트장소^^
저도 아내와둘이서 덕수궁 돌담길 돌아
국회의사당, 동아일보사~~
재건 데이트코스^^
반갑습니다.
물안개님의 50년전 데이트 장소였군요.
단풍이 들면 최고의 단풍 명소가 되겠지요.
추억을 떠올리며 이번 가을에도 다녀 오시겠네요.
즐거운 시간 되시기 바랍니다.
감사 합니다.
@죽산 죽산님도 덕수궁 돌담길이 데이트 코스였군요.ㅋ
노란 은행잎이 아름다운 계절이 오면 덕수궁 돌담 길을 걸으시며
옛 추억을 떠올려 보시지요.
감사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