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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토마스 주남여사님의 천국은 확실히 있다 원문보기 글쓴이: 천국 복음
여리고의 그 황막한 광야는 차라리 친근하게 느껴졌다.
이곳에 몇번을 왔었기 때문일까?
이 광야는 옛적 여호수아의 영도를 받은 200만명이 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을 들어 온 가나안의 첫 지경이다.
이스라엘에서도 보기 드문 그렇게 거대한 광야가 펼쳐져 있는데도
이상하게 그냥 어릴적 공을 차며 뛰놀던 동네의 공터마냥 편안하다.
그 한켠의 인적이 드문 곳으로 차를 몰고 갔다.
드디어 눈앞에 끝없이, 길게 드리운 철조망이 보이고 요르단과의 국경지대에 왔다.
일순 갑작스런 회리바람처럼 긴장이 일었다.
"지금이 몇시냐?"
나의 물음에 앞자석에 있던 진상이 침착하게 말했다.
"아홉시에 온다고 했는데...기다려 봐야지요.
시간이 거의 다 됐으니..."
그 때, 갑자기 핸드폰의 벨이 울렸다.
진상이 급히 전화를 열어 히브리어로 누군가와 대화를 한다.
다큐멘터리로 잔뼈가 굵은 나는 대화하는 사람들의 표정을 살펴 그 의미를
간파하는 것이 거의 체질이다.
진상이의 얼굴로 보아 반신반의다.
"좋은 일이냐?"
"우리(유대인 가이드)가 연락을 했다는데요....
아홉시에 군인들이 온다고 했다는데..."
흠...하고 깊은 숨이 절로 나왔다.
국경을 수비하는 이스라엘의 군인들은 안 올지도 모른다.
무작정 국경으로 가보라는 가이드의 말를 듣고 온 것이다.
요단강을 따라 이스라엘과 요르단의 국경이 구분되고 그 경계를 몇 겹의 철조망으로
막아 놓았다.
그 중에서 여리고 근처의 이 국경 저 안쪽은 세레요한이 세례를 주던 곳이고,
예수님이 그에게 세례를 받으신 성지(聖地)로 알려져 있다.
그 세례 이후에 성령께서 비둘기의 형상으로 예수님에게 임하셨고,
하나님 나라를 여는 공생애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며칠전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르고자 다시 온 이스라엘에서 제일 먼저 이곳을 찾았다.
그러나 음산한 분위기만 감도는 이 철조망이 그 세례터를 가로 막고 있었다.
거의 직격탄으로 쏟아지는 뜨거운 태양아래 그곳을 막막히 바라다 보았다.
눈을 뜨기조차 힘든 강한 햇살과 무더위 때문에 세례터는 커녕 요단강조차
거의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당연히 들어가기란 힘들 것이라 생각하고 왔지만 너무나 아쉬움이 컸다.
"주님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시고...공생애를 시작한 그 곳에서
이 촬영을 시작하고 싶었습니다...그런데 ...갈 수가 없습니다...주님..
주님이 기뻐하시면 그곳을 촬영하게 해 주세요."
약간은 무모하지만 나는 철조망을 붙들고 그렇게 기도했다.
주님의 인도하심은 당연히 깊고 우리의 지각을 뛰어 넘는 평강으로 이끌며
측량할 수가 없다.
나는 그것을 굳게 믿는다.
그러나 이곳을 오랫동안 아무도 들어가지 못한 것이다.
짙은 아쉬움을 남기고 바람에 광야를 구르는 가시덤불처럼 황망히 떠나야 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며칠 후에 나는 또 다시 이곳에 온 것이다.
이 철조망 앞에 다시 선 것이다.
오랫동안 들어 가지 못한 이 곳을 열어 줄 것이란 한줄기 희망을 품은 채...
"형..저기 군인들이 오는것 같아요!"
긴장감 속에서 카메라를 끄지 않던 동훈이가 외쳤다.
사해 쪽으로 길게 이어진 국경을 따라 먼지를 일으키며 중무장한 차가
거칠게 달려 오고 있었다.
"아홉시에 올 것이라 더니...정말 인가보다!!..."
모처럼 느끼는 긴장 속에서 나는 속으로 기도만 하고 있었다.
'주님..그 세례터를 꼭 촬영하게 해 주세요.
거기서 기도하게 해 주세요.'
여러 명의 이스라엘 군인들이 우리 보다 더 긴장된 표정으로 차에 타고 있었다.
그들의 두 손에는 전투용 총들이 꼭 쥐어져 있었다.
"샬롬!"
군인들 중에 한 여군이 리더인양 다가오자 진상이 자연스럽게 인사를 건넸다.
다른 이들에 비해 아주 표정이 착해 보이는 아담한 키의 여군이었다.
그녀 역시 샬롬으로 인사를 하더니 히브리어로 이곳을 가기로 한 팀이냐고 물었다.
진상이 그렇다고 하자 특별한 질문도 없이 자기들이 먼저 가서 살피고 올테니
그 때 따라 오라고 했다.
'드디어 그곳을 가는 것인가요?'
웬만해선 긴장을 하지 않는 내 안에서 묘한 기운이 감돌았다.
차창으로 이스라엘 군인들이 그 국경선의 철조망으로 겹겹히 닫은 큰 문을
천천히 여는 것이 보였다.
'이스라엘 군인들이 예수님의 세례터를 열어 준다.'
그것은 영화속의 한 장면인양 현실적으로 느껴지지가 않았다.
'이것은 놀라운, 예언적인 장면이다.
이스라엘 군인들이 그 문을 열어 주고 있는 것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2천년 동안이나 자기들이 그토록 기다리고 대망해온 메시아가 왔는데도
알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하던 그들을 가리운 그 수건이 이제 벗겨질 것이다.'
내 안에 이런 말들이 창조의 시간처럼 자꾸만 만들어 졌다.
이런 무모한 발상은 어디서 솟아난 것일까?
내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이 주시는 것인가?
난 이상하게 그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먼저 국경에 들어가서 살피고 온 군인들이 우리에게 따라 오라고 손짓을 한다.
차를 몰고 그들을 서서히 뒤따라 들어갔다.
"드디어 들어 간다...예수님의 세례터로...
오! 주님 감사합니다.! 할렐루야!"
내가 나즉히 외치자 여기 저기서 감사가 자동으로 튀어 나왔다.
참으로 예수님의 손이 움직여 주신 것이 아니면 이 일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주님이 기뻐하시면 이 곳을 들어가 촬영하게 해 주세요."
처음에 이곳에서 드린 그 기도를 들으신 것일까?
그렇다 이것은 주님이 기뻐하신 일인 것이다.
그 기도를 들으시고 움직여 주신 것이다.
측량못할 하늘의 손이 천사들을 움직인 것이다.
2.
처음 그 아쉬운 기도를 하고 요단강 국경을 끼고 갈릴리로 치달아 갔었다.
멀리 차창밖에 이어진 메마른 요단강 흔적을 보면서 짙은 허허로움만 뒤따르고 있었다.
그것을 달려려고 갈릴리 호수 근처에 관광객들을 위한 세례터에 가서 발을 담그고
촬영을 하기도 했다.
여리고 근처보다 물과 나무도 많고 촬영을 위한 그림이 되는 곳이었다.
그러나 그곳은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신 곳이 아니다.
이 일은 요한이 세례를 베풀던 곳 요단강 건너편 베다니에서
일어난 일이니라 요1:28
요한만이 세례요한의 세례터에 대한 지명(地名)을 기록하고 있다.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의 대화가 있었던 곳을 가리키던 말씀이다.
그 베다니는 지금 요르단 지경에 있다.
우리가 들어가지 못한 그 건너편 지경이 베다니인 것이다.
성지순례자들이 요르단을 통해 그곳으로 갔다는 말을 간혹 들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에서 주님의 세례터로 간 이들에 대한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
결국 예수께서 세례를 받고 광야로 와서 공생애를 시작한 곳은 이스라엘의 광야다.
성령이 곧 예수를 광야로 몰아내신지라
막1:12
이 곳에서 세례를 받으시고 성령님의 기름부음 가운데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신
주님은 그 성령님께 이끌려 광야로 가셔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셨다.
하늘 아버지는 주님을 그 황막한 빈들로 자꾸만 내모셨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막1:11)하시고 내모신 것이다.
아버지는 사랑하는 자녀들을 광야로 가게 하신다.
이 아버지의 마음을 깊이 만져야 그 사랑을 이해하리라.
그리고 자청하여 광야로 걸어 가리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걸어 도달한 그 지점에서, 가나안 정복의 그 시작점에서
다시 주님은 그 모든 것을 축약하여 광야로 가신다.
그 여정 속에 이스라엘의 모든 언약과 길들이 함축되어 녹아 있다.
주님은 그것을 이루시기 위하여 오셨다.
그곳이 바로 여리고 근처 유대광야인 것이다.
나는 그 여정을 그대로 따라가고 싶었던 것이다.
그 후 부터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기 위하여 땀이 변하여 피가 되기까지
헌신과 충성으로 매진하신 주님의 마음과 형상을 만지고 싶었던 것이다.
이번 촬영에서 꼭 가고 싶었던 곳들이 몇군데 있었다.
먼저는 갈릴리 호수가에 근처에 있는 '한적한 곳'을 꼭 가보고 싶었다.
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 하시더니 막1:35
나는 남들이 주목하지 않는 이 한구절에 오랜동안 붙들려 있었다.
참으로 가슴이 뭉클한 이 풍경을 그리곤 하였는데, 새벽에 이 한적한 곳에 가시기 전에,
'해질 무렵'부터 수없이 찾아 온 병자들과 귀신들린 자들, 연약한 이들을
밤새워 치유하시고(눅5:40-41) 그곳을 가셨던 것이다.
그 황혼 녁을 나는 어릴 적 부터 무척이나 그리워 하고 사랑하였다.
마치 루오의 그림 <교외의 그리스도>의 그 황혼에 물든 그리스도....그 옆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서 있는 작은 아이...그것이 바로 나라고 은밀히 상상한 것이다.
잃어버린 영혼을 찾아 오신 주님은 그들을 천국 복음으로 가르치시고 치유하시고
하늘의 긍휼로서 부둥켜 안으셨다.
밤새워 일일이 그 가난한 자들에게 손을 얹으시던 그리스도의 열심을 소유하고 싶었다.
그 처절한 긍휼과 사랑의, 하늘의 손을 내 작은 카메라에 담아 내고 싶었다.
그런데, 주님은 새벽 미명에 그 풍경을 슬며시 빠져 나오신다.
그리고 한적한 곳에 가셔서 홀로 기도하신 것이다.
'에레모스'(Eremos)라고 헬라어는 그곳을 표현하였다.
그 말은 '광야'를 뜻하며, ''빈들', '외진 곳'을 의미한다.
예수님은 당신의 놀라운 표적과 이적을 보고 몰려 오는 군중들을 피해
그 외진 곳으로 가서 기도하셨다.
나는 그 곳을 너무나 가보고 싶었다.
그 한적한 곳에 서서 기도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곳이 어디인지 알 수가 없었다.
일반적인 성지순례란 갈릴리 가버나움 회당터나 베드로에게 "내 양을 먹이라"고 하셨던
그 기념교회, 팔복 기념교회등을 가서 설명을 듣고 사진을 찍는 것이다.
에레모스란 지명은 그 어디에도 나와 있지 않았다.
"주님이 기도하신 그곳을 가서 기도하고 촬영하고 싶습니다.
그 길을 열어 주세요."
역시 촬영준비를 하면서 이런 기도를 하였다.
그런데 우연히 서점에서 발견한 한 고고학 책에서 그 '에레모스 산'이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더욱 더 그곳을 꿈꾸었다.
(이곳에 대한 이야기는 갈릴리에서 더욱 깊게 나눌 것이다)
그리고 요단강의 그 '세례터'를 가고 싶었던 것이다.
참으로 나란 종자는 늘 이렇게 남들이 가지 않는 길들에 대한 갈망을 안에 키우고 산다.
물론 그곳을 들어간 자가 최근에 없다는 정보 정도는 알고 있었다.
아는 후배가 몇년전 요르단 쪽 국경으로 몰래 들어가 촬영을 하다가
국경 수비대에 체포되어 곤욕을 치루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런데도 막연히 그곳을 가고 싶고, 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품고 갔던 것이다.
주께서 기뻐하시면 말이다.
역시 그런데 그 가로 막았던 국경의 장벽이 기적처럼 한순간에 열린 것이다.
수십년 닫혀 있던 그곳이...
어떻게 이 일이 가능했던 것일까?
갈릴리 촬영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우리는 광야 깊은 곳을 탐험하기 위해
짚투어(Jeep Tour)를 했다.
일반적인 차량으로는 갈 수 없는 곳에 예수님의 흔적들이 있다.
특히 가보고 싶었던 곳이 '아사셀의 산'이다.
나는 이곳 또한 너무나 가보고 싶었다.
이스라엘은 대속죄일에 두마리의 염소를 택하여 제비뽑기를 한다.
하나는 대제사장을 위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아사셀을 위한 것'(레16:8)이었다.
이 두번째 염소는 이스라엘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산채로'(레16:10,20)광야의
'무인지경'(無人地境)으로 보내졌다.
그리고 800미터 고지의 아사셀 산에 이르러 절벽에 떨어져 죽게 되는 것이다.
그 염소가 떨어져 온 몸이 부서지고 내장이 파열되면 이스라엘의 죄는 벗겨진다.
그것은 단연코 세례요한이 요단강가에서 예수님을 향하여 말한 바...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요1:29
이 말씀을 위한 예표(豫標)였던 것이다.
아사셀의 산도 여리고 근처에, 아골골짝 근방에 있다고만 들었다.
주변을 물어 봐도 그곳에 가보았다는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
거칠고 험한 그곳은 일반적인 차량으로 갈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에 여러번 오면서도 역시 예수님이 우리의 죄짐을 짊어지신 대속을 상징하는
'아골골짝'이나 '아사셀의 산'에 들어가서 촬영하고 기도하고 싶은 마음이 강하였다.
나는 예수님의 공생애가 요단강 여리고 근처에서 시작된 것이 이 예언과 언약들을
이루시기 위함이라는 혐의만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 진정성을 만지려면 그 현장으로 가서 짙게 살펴 봐야 한다.
하지만 그동안 여러 사람들과 주로 기도하러 오느라 그 깊이에 도달하지 못한
아쉬움을 느꼈다.
그래서 7인의 촬영팀만으로 단촐히 꾸려서 오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런 현장을 적지에 침투하듯 들어갈 수 있는 투어가 있음을 알았다.
짚투어를 위해 나타난 유대인 가이드의 이름은 뜻밖에 '우리'(Uri)여서 우리는 처음부터
웃으며 시작하였다.
그는 일반적인 유대인처럼 낯설게 느껴지지 않는 매우 친근하고 착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우리들은 우리의 랜드로바로 아찔한 놀이기구를 타는 듯한 즐거움 속에
엄청나게 가파르고 거친 광야를 누비고 다녔다.
주님이 걸어가신 광야는 그렇게 험하고 거친 곳이었다.
특히 폭염속에서 촬영을 따라 오느라 고생하던 어린 딸 지우가 신나하여 기분 좋았다.
무엇보다도 이번 여행에 열살이 된 지우를 무척 데려 오고 싶었다.
성경에서만 읽던 그 땅을 눈으로 본다는 것은 얼마나 힘이 되는가!
이미 내가 그것을 경험했기에 아내 지연과 지우를 데리고 온 것이다.
그렇게 아사셀의 산으로 가는 동안 우연히 그 '세례터'를 가지 못한 아쉬움을
가이드 우리와 나누게 되었다.
앞자리에 앉은 진상이가 그와 히브리어로 그런 대화를 하는 중에 갑자기 그가
누군가와 전화를 하는 것이다.
운전 때문에 스피커 폰으로 하던 그는 매우 심각하고 진지하게 누군가와 계속 통화를 했다.
"감독님...우리가 지금 이스라엘을 위해서 예수님의 세례터를 열으라고 말하는 데요."
진상이가 그렇게 통역을 하며 웃었다.
후에 알고 보니 그는 군부대 관계자와 통화를 하는 것이다.
"혹시..내일 오전에 그곳을 가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장담은 할 수 없습니다."
그는 전화를 끊고 우리에게 그렇게 말했다.
우리는 약간 당황했다.
왜 이 유대인 가이드는 갑자기 군부대에 전화를 해서 세례터를 열으라는
그런 말을 한 것일까?
아사셀의 산에 올라 촬영을 하면서도 그것이 한켠에 낚시바늘처럼 의문으로 남았다.
놀랍게도 그 답을 그 날 저녁 전혀 엉뚱한 곳에서 알게 되었다.
참으로 주님의 인도하심과 길들은 측량할 길이 없음을 만진 것이다.
3.
그날 저녁, 예루살렘의 한 집에서 특별한 식사초대를 받았다.
우리는 작업의 경비를 아끼기 위해서 이스라엘에서 신학을 공부하는
어느 선교사님의 집을 빌려 숙소로 삼았다.
"여기에 최근에 오신 감독님의 팬이라는 노 선교사님 부부가 계신데...
감독님 일행을 꼭 식사에 초대하고 싶으시다고 하십니다."
그 선교사님이 뜻밖에 이런 말을 하였다.
나는 촬영에만 전념하기로 하고 왔기에 아무도 만나려는 계획이 없었다.
특히 오랫동안 꿈꾸었던 어린 딸 지우에게 성경의 땅을 보여 주고 싶었던 차라
가능하면 우리끼리의 시간을 보내고자 하였다.
그런데 예기치 않은 제안에 마음이 베데스다 연못처럼 동(動)함을 느꼈다.
그들이 누군지도 모르는데 이상한 일이었다.
'무언가 이 만남 속에 주님의 뜻이 있다.'
내 영혼에 그것이 느껴지는 것이다.
그래서 선듯 그리하겠다고 했다.
성령님이 주시는 그 마음을 따라가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게 하여 예루살렘의 외곽에 있는 그 집에 갔다.
"중국에서 오래 사역을 하다가 마지막 생애를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해..
부르심을 받고 왔습니다."
미국 뉴저지의 한인교회에서 파송을 받으신 노 선교사님 부부는 인상이 서글서글하였다.
식탁에 가득 차려진, 이 땅에 오면 꼭 먹고 싶었던 엄청난 양의 양고기와 케밥이
기분을 들뜨게 하였다.
"감독님의 책을 다 읽고...영상도 다 보았습니다.
부흥의 여정...하늘의 언어...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한 눈에 손이 커보이고 강력한 기도의 용사처럼 느껴지는 사모님은 내 책의 내용을
거의 외우다시피하고 있었다.
"정말 내 팬이 맞으시군요?!"
양갈비와 케밥에 들뜬 나는 안하던 농담을 마구 해대고 있었다.
"저는 예수님을 닮고자 애쓰는 제자인데..그 중에 가장 본 받은 점이...
바로 예수님의 별명처럼 '먹기를 탐하는 것'입니다.
먹는 것에 대한 즐거움을 무척 추구하는데...저보다 한 수 위 시네요."
그런데 그분들이 정겨운 대화 가운데 뜻밖에 말을 하였다.
하루 전에 그분들도 우리처럼 광야를 짚투어로 다녀왔다는 것이다.
놀랍게도 그 가이드가 바로 '우리'였다는 것이다.
"그 유대인과 영어로 대화하면서 ...얼마나 많은 한국의 크리스챤들이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해서 기도하는지 아느냐고 말했지요.
그랬더니 그 유대인이 매우 감격을 하며 고마워 했습니다."
나는 주님의 인도하심에 전율을 느꼈다.
그가 예수님의 세례터를 가보고 싶어했다는 그 말에 갑자기 군부대에 전화를 해서
강하게 '이스라엘을 위해서 열으라'고 한 이유를 알게 된 것이다.
나는 처음에 그 말을 듣고 좀 오버하는게 아닌가 생각했었다.
'이스라엘을 위해 열으라니!'
그 때 나는 웃었었다.
그런데 그는 매우 진지한 사람이었다.
"유대인들 보다도 한국사람들이 이스라엘의 역사와 이 땅의 회복에
이렇게 진지한 마음을 가진 것에 그는 감동을 했다고 했습니다."
비록 관광 가이드였지만 우리는 자기 민족과 땅에 대한 깊은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너무나 진지하고 겸손하며 열심을 가지고 광야와 역사에 대해 설명을 해주었었다.
하루 전에 만난 한국인 부부를 통해 미리 주께서 감동을 시키신 것이다.
그리고 이스라엘을 촬영하는 우리가 세례터를 가지 못한다고 하자,
그렇게 자기의 일인양 그것을 막고 있는 군부대에까지 전화를 한 것이다.
그동안 아무도 들어 가지 못한 땅을 이스라엘을 위해서 열으라고 외친 것이다.
잠잠한 감격이 영혼을 타고 흘렀다.
'주님이 이렇게 앞서 행하시고...합력하여 선을 이루셨구나.
이 작고 진실된 충성들을 축사하시어 이 문을 여셨구나.'
정말 우리를 초대한 그 노 선교사님 부부는 그 남은 생애를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해
드리기 위해 온 것이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재림을 여는 중요한 코드이다.
구운 양갈비, 케밥과 함께 식탁에는 무르익은 무화과가 있었다.
한 여름이어서인지 조금 맛보니 그 풍부한 단맛이 입안에 그득해 진다.
성경에서 무화과는 이스라엘을 상징한다.
무화과 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 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 아나니 이와 같이 너희도 이 모든 일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을 알라
마24:32,33
어릴적 '휴거'나 종말론'에 한창 관심을 가질 때에 너무나 자주 읽던 말씀이다.
이것은 구약의 예언을 조금만 심도있게 살펴도 이스라엘 민족의 회복과
연관을 가지는 비유다.
앞으로 그 여정을 탐구하면서 더욱 절절히 알수 있을테지만,
예수님의 모든 말씀, 삶의 길 하나 하나에는 구약의 모든 언약과 예언을
통전적으로 종합하고 관통하여 채우시는 그것에 있다.
그 때에 내가 말하기를 내가 왔나이다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이
두루마리 책에 있나이다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 하셨으니 히10:7,9
진정 이것이 주님이 삶이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그것들을 철저히 이루시고자 하는 열정...
촬영하고 탐구하고 뒤따라 가면 갈수록 드러나는 주님의 길이었다.
너무나 깊고 강렬해서 경탄을 금치 못하게 하는 언약에의 순종이었다.
그 행적 하나 하나는 간단한 것이 아니었다.
구약의 약속들과 입체적으로 치밀히 이루시는 것이다.
(후에 벳바게에서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셔서 마르게 하신 그 장면에서 더 깊이
나눌테지만) 마태복음의 무화과 비유도 예레미야24장, 호세아9장, 이사야28장등
무수한 '무화과'를 통해 이스라엘을 향한 예언을 깊이 이해하시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것을 알지 못하는 이들이 구세주라는 자가 애꿎은 나무를 저주했다고 비판하고 있다.
그들 중 어떤 이들은 대단한 지식인이라고 자부하는 신학자들이다.
이 비유들은 동일하게 이스라엘의 '흩어짐'과 '회복'에 대한 예언(렘24:8-10)이다.
그 저주는 하나님의 언약을 지키지 않은 이스라엘이 심판을 받아 온 세상으로
흩어질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예수님은 그 예언들을 온전히 알고 계셨다.
이미 무화과를 저주하시기 전에 성전에 가셔서 뒤엎는 '성전 청소'를 하신 것도
구약의 언약을 철저히 이루시는 것이다.
(히스기야의 터널과 실로암 연못에서 이것도 깊이 다룰 것이다)
이미 이스라엘은 심판이 나무 뿌리에 놓였다.
결국 주님의 무화과 나무의 비유는 이스라엘이 A.D 70년에 성전이 파괴되고
흩어질 것과 그들이 다시 돌아와 민족을 회복할 것을 예언하시는 것이다.
그 뿌리까지 말라버린 이스라엘이 다시 회복될 때....
만일 그것이 가능해 진다면 하나님의 손이 이루신 것이리라.
그 때가 재림이 가까운 때임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런데...그런데 ...
정말 이 주님의 예언처럼 이스라엘은 기적처럼 2천년 만에 다시 돌아와
그 땅을 회복하고 나라를 건국하였다.
1948년 이스라엘은 다시 건국하였고 67년에 불가능할 것 같은 상황에서 예루살렘을
회복하였다.
정말 그 말씀대로 뿌리까지 말랐던 무화과가 다시 잎새를 내기 시작한 것이다.
다시는 여호와의 엄중한 말씀이라 말하지 말라
각 사람의 말이 자기에게 중벌이 되리니 이는 너희가
살아계신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말씀을
망령되이 사용함이니라
렘23:36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백성들과 선지자와 제사장들이 하나님의 말씀은
엄중(嚴重)하다 하면서도 정말 그것이 얼마나 엄중한지를 믿지도 순종하지도
않는다고 책망하셨다.
하나님의 언약과 그 명령을 지키지 않으면 그들을 흩으시고 심판하실 것이란 말씀을
무수히 하셨지만 그들은 그것을 중시하지도 않았다.
그 말씀을 진정으로 경외함으로 두려움으로 받지 않은 것이다.
그리하여 예레미야에게 무화과의 환상을 보여 주시며 그들에게 임할 심판을
예언 하신 것이다.
그 엄하고 무거운 말씀은 그대로 이스라엘에게 임하였다.
그들은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 70년을 고역(苦役)속에 살아야 했다.
나는 이 글을 쓰면서 이 말씀을 두려움으로 발견하였다.
진정 아버지의 말씀은...주님의 말씀은 엄중한 것이다.
예수님은 그것을 깊이 이해하고 붙드신 것이다.
그 가지(무화과 나무의)가 연하여 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줄 아나니 이와 같이 너희도 이 모든 일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을 알라
이것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엄중하신 말씀이다.
그러나 그것에 가장 놀라고 주목하며 주님의 다시오심을 등불에 기름을 예비하고
깨어 있어야 할 교회가 그것을 무시하게 되었다.
이스라엘 백성처럼 말이다.
남을 무어라 하기전에 내가 그러한 것이다.
그저 그런 말씀은 종말론에 심취한 이들의 전유뮬이라 치부한 것이다.
진리를 엄중하게 듣지도, 그 심령에 새기지도 않는 것이다.
나는 무화과를 쪼개어 한 입 배어 물며 그것을 생각했다.
언제부터인가 종말이나 이스라엘에 대한 말씀들을 나누는 것이 금기처럼 되어 버렸다.
극단적인 종말론자들, 휴거론자들이 물의를 일으킨 이후에 교회에서 '재림'이나
'종말'에 대하여 말하는 것을 쉬쉬하게 된 것이다.
지금의 교회가 타락하여 심판을 받은 이스라엘을 대치하는 '영적 이스라엘'이
되었다는 것이다.
말세에 대한 것이나 계시록등에 대한 말씀연구조차 스스로 자가검열을 통해 비켜 나갔다.
마귀의 음험하고 치밀한 계략에 속고 농락을 당하는 것이다.
오늘날 교회의 가장 큰 연약함과 변질의 근원에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신앙과
갈망의 부재가 있음을 간파해야 한다.
마귀는 어찌하든지 주님의 재림을 막으려 할 것이다.
그 날에는 자기의 때가 끝이 날 것을 잘 알고 있기에...
그러나 우리의 사랑이신 예수님은 곧 재림하실 것이다.
우리가 안전하다 평안하다 하는 그때에 갑자기 오실 것이다.
이것이 엄중하신 진리의 경고요 약속이다.
그 주님의 다시 오심과 이스라엘의 회복은 너무나 긴밀한 연관속에 있다.
이것 역시 엄중하신 주님의 말씀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중시하지 않았다.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입술로는 하나님이 말씀이 엄중하다고 말하나
진정으로 믿지 않는 것이다.
마귀는 이것 역시 곡해와 변질로서 우리의 영적시야를 가로 막았다.
성경이 말하는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언약과 그 비밀을 우리에게서 빼앗아 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아브라함의 축복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려는 수작이다.
음부의 권세를 깨트리고 '천국의 열쇠'를 소유한 영광스러운 그리스도의 교회가
나타나는 것을 훼방하려는 것이다.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있다 함을 면키 위하여 이 비밀을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치 아니 하노니 이 비밀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 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완악하게 된 것이라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
롬11:25,26
오늘 우리는 '이방인의 충만 한 수'가 차는 열방의 회복을 위하여 땅 끝까지 증인 됨의
선교적 추구를 힘쓰고 있다.
그러나 성경의 약속은 그것만이 아니다.
오늘 우리가 놓치고 있는 또 한가지는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을 것'이란 말씀이다.
성경은 이 두가지를 명확하게 계속 말하고 있다.
이것은 엄중한 진리다!
그러나 우리는 '이스라엘의 구원'을 잃어버린 것이다.
성경은 무수히 그것을 말하지만 우리는 주목하지도 받지도 않았다.
내가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하라
마28:20
우리는 이 말씀을 섬세히 듣지 않앗다.
주님이 가르치신 모든 것, 명하신 모든 것을 온전히 붙들어야 하는데,
우리의 속한 교단과 개인적 지식의 경험과 성향의 체질을 따라 부분적인 것들만
취한 것이다.
그것은 우리로 한 부분만 아는 연약한, 반쪽의 기름부음에 들어 가게 하였다.
온 이스라엘과 열방의 회복...
이 두가지의 언약을 온전히 취할 때, 음부의 권세를 파하는 '갑절의 기름부음'이 임할 것이다.
흑암의 세력은 우리로 하여금 이스라엘을 모르거나, 불편해 하거나, 교회가 영적 이스라엘로
그들을 대치하였다는 개념을 주입하였다.
바로 내가 그런 생각으로 살아온 장본인이다.
오늘 우리가 애쓰고 추구하나 여전히 연약한 것은 무언가를 놓치고 있기 때문이다.
진리의 온전한, 본질적인 모든 것을 붙들지 못하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나는 그 '대치신학'에 사로잡혀 있었다.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예수님을 못 박은 유대인들은 이제 버림을 받았고
예수님을 받아들인 우리 교회가 진정한 영적인 이스라엘로 대치 되었다는 사상이다.
그리하여 유대인들에 대하여 미움은 아니어도 불신과 하나님 나라에서 이제는 끊어졌다는
판단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날마다 진리의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구하는 길 위에서 나는 아버지의 마음과
언약을 만나게 되었다.
중엄한 진리는 이렇게 선언한다.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냐
그럴수가 없느니라 롬11:1
나는 충격을 받았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스라엘을 버린 적이 없다고 하는데도 나는 그들이
버림을 받았다고 오랫동안 생각했다.
진리를 온전히 보지 않고 막연한 전통과 생각들, 사상들에 사로잡혀 있던 것이다.
역시 그것이 이스라엘의 패착이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경외함과 중엄한 것으로 보지 않았다.
그들을 비판할 것도 없이 내가 그러고 있는 것이다.
나는 성경을 정확히 읽지 못했음을 알고 깊이 깊이 회개하였다.
내가 지금 이스라엘, 그 땅으로 이토록 댓가를 지불하며 가는 것은 그 회개의 여정이다.
"마라나타! 주여!..어서 오시오소서!"
이것이 최근 수건이 벗겨진 나 영혼의 간절한 갈망중에 갈망이다.
그전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던 재림에 대한 열정을 성령님이 열어 주셨다.
이렇게 여전히 부끄러운 걸음이라도 열방을 치달으며 땅 끝에서 땀흘리고
씨를 뿌리는 까닭은 내 사모하는 그 영광의 주님을 속히 보고자 함이다.
그 간구의 여정 속에서 진리의 성령님께서 '이스라엘 회복'에 대한 눈을 열어 주셨다.
아니, 내 손을 꼭 잡고 그 언약의 지평으로 이끌어 가셨다.
이것은 유행이나 자아로 부터 나온 전략적 추구가 아니다.
(이것을 후에 더욱 깊이 다룰 것이다)
밤 깊은줄 모르고 양갈비와 무화과, 보이 차를 먹으며 우리는 이런 대화들을
오랫동안 나누었다.
모처럼 말이 통하는 어른들을 만나니 나는 약간 흥분하여 마구 수다를 떨었다.
이 노 선교사님 부부도 오랜 섬기던 중국 땅에서 그렇게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아
이 땅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다고 했다.
그러니 얼마나 이 땅에 대한,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진정성을 소유했겠는가?
그들은 더욱 깊숙히 이 언약의 땅을 살펴 보고자 했다.
그리하여 짚 투어를 하는 가이드에게 광야로의 동행을 부탁한 것이다.
그렇게 하여 그 문제적 가이드 '우리'를 만났고 그 한 유대인을 회복하기 위해
기도하며 많은 대화를 나눈 것이다.
그 진지함이, 그 간구하는 열망의 에너지가 유대인 우리의 마음을 움직인 것이다.
후에 알아 보니 우리는 이 부부에게 이미 감동을 했던 것이다.
그리고 다음날 만난 우리가 예수님의 세례터를 가고자 하는 것을 알고
그렇게 자청하여 애를 쓴 것이다.
이 모든 것의 중심과 진실을 살피시는 주님께서 그 일들을 연결하신 것이다.
이것을 생각하니 울컥 감격이 솟았다.
짚투어를 하는 유대인 가이드는 그 '우리'만이 아닐터이다.
그러나 마음이 착하고 진실된 그 유대인을 택하여 주님이 그렇게 이끄신 것이다.
그렇게 하여 우리는 예수님의 세례터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무엇을 도모하기 전에 진정으로 주님의 마음과 사랑으로
이 땅을 위해 기도하고 종이 되어 섬긴다면...아무리 강팍한 유대인들이라도 문을 열것이다.'
나는 앞서 인도하는 이스라엘 군인들을 바라 보며 그렇게 생각하였다.
'이제 잎사귀가 돋았으니 그 열매들을 볼 날이 무르익었다.
이제 이스라엘은 주님의 그 '때'(Kairos)가 된 것이다.'
그렇게 문이 열리고 군인들이 호위하는 가운데 주님이 세례를 받으신 그 요단강에
발을 담구었다.
그토록 와 보고 싶던 그 요단의 강물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