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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풍무(150)
[빛 좋은 개살구.]
무림을 향해 칼을 뽑았던 하후장설의 죽음.
사령계라 개명한 마교의 개파.
연일 혈겁을 자행하면서 십팔마승이란 별호로 불리기 시작한 소림의 마지막 후예.
그리고 복건성 해안가에서 발견된 수백 구에 달하는 시신들까지.
연이어 들려오는 소문에 강호 무림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단순히 소문이라고 치부하기엔 그 소문들이 주는 파장은 너무 컸다.
어떤 불길한 일이 일어날 징조일지도 모른다는 조심스런 추측이 나돌기 시작했다.
그런 강호의 분위기를 제일 먼저 파악한 곳은 무림 문파 중 가장 방대한 조직력을 보유한 개방이라 할 수 있다.
개방의 분위기는 침통했다.
하후장설의 죽음이 가져다준 파장이었다.
지금껏 개방에서 행했던 모든 일은 하후장설의 손에서 벗어나기 위함이었다. 정확하게는 황실이라 해야 옳다.
황실의 손에서 살아남기 위해 개방은 최고 원로인 파면신개를 파문시켰는가 하면 소림을 무림공적으로 지목하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그런데 그 모든 일을 하게 했던 하후장설이 사망한 것이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개방의 개봉 총타.
한 인물이 호연작을 보며 나직이 물었다.
파면신개가 파문된 이후 개방의 최고 원로가 된 수석장로 개왕 진청일이었다.
진청일의 얼굴은 근심이 가득했다.
최고 원로인 파면신개를 파문시키면서까지 천붕회를 위해 일을 했지만 결과는 참담하다. 아니, 결과만 놓고 본다면 개방은 최악의 수를 두었다고 할 수 있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하지만 소림의 멸문이 가져온 파장은 컸다. 무림인들의 차가운 시선이 문제가 아니다. 직접적인 식량 공급처인 양민들의 외면이 개방을 힘들게 하는 원인이었다.
개방은 전통적으로 정파에 속한다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다. 하지만 개방이 정파가 되어야만 하는 이유를 알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게 양민들 때문이란 사실은 더더욱 모른다.
무인이라 하지만 개방은 거지들의 모임으로부터 시작했다.
거지, 일명 구걸하여 먹고사는 자들을 말한다. 요컨대 공짜로 음식을 줄 사람들이 없다면 거지는 전부 굶어 죽는다.
구걸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음식을 적선해 주는 이들에게 나쁜 사람으로 인식되어서는 안 되고, 그러기 위해서는 정파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
마인의 집단이라 찍힌 자들에게 누가 음식을 나눠 주려 하겠는가.
거지라는 직업을 바꾸지 않는 이상 개방은 정(正)을 추종할 수밖에 없고 정파의 편에 서야 한다.
그런데 작금에 와서는 양민들로부터 거지들이 외면당하고 있다.
먹다 남은 음식이라도 건네주던 양민들이 그마저도 없다며 거절해 버린 것이다. 비단 한두 곳에서 일어나는 일이 아니었다.
중원 전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이었다.
그 모든 게 소림 때문이었다. 양민들은 소림 멸문의 직접적인 원흉으로 개방을 꼽았던 것이다.
어쩌면 구걸하여 먹고 사는 개방 방도가 굶어 죽는 초유의 사태가 생길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만일 지금과 같은 사태가 계속된다면 방도들은 폭도로 변할지도 모릅니다.”
진청일이 하고 싶은 말이다. 혹여 배고픔을 참지 못한 방도들이 힘으로 음식을 강탈하는 사태가 생길까 봐 그게 걱정이었다.
만일 그런 일이 발생한다면 가뜩이나 인식이 나빠진 상황에서 개방은 끝장나고 말 것이다.
“남궁세가와 팽가에 부탁을 해두었소이다. 올해 말까지는 자금이 올 테니 조금만 참아 보시오. 그리고 석가장에도 부탁을 해두었소이다.”
“수고하셨습니다.”
장로 일행은 죄송한 얼굴을 했다. 한 문파를 이끄는 수장으로서 타 문파에 고개를 숙이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인데, 호연작은 기꺼이 그렇게 한 것이다.
자존심을 죽이고 고개를 숙인 그의 행동이 고맙기 그지없었다.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우리가 굶었으면 굶었지, 방도들 배를 곯게 해서는 안 되지요. 자금은 걱정 말고 방도들이나 동요하지 않도록 하십시오. 개방의 힘은 그들에게서 나온다는 사실을 명심하시고요. 참! 북경이나 남쪽에서 들어온 소식 있습니까?”
시무룩한 얼굴을 하고 있는 장로들의 모습 때문이었을까. 호연작은 화제를 돌렸다.
십팔나한의 등장은 이미 예견했던 일이라 그다지 놀랄 만한 소식은 아니었다. 하지만 하후장설의 죽음과 복건성 해안에서 발견되었다는 수백 구의 시신은 전혀 뜻밖의 사건이었다.
“하후장설의 죽음은 사령계가 관련되어 있는 걸로 밝혀졌고, 남쪽 해안가에서 발견된 시체들은 지옥군도 무인들로 밝혀졌습니다.”
오른편에 있던 자가 품속에서 조그마한 첩지를 꺼내 호연작에게 내밀었다. 정보를 담당하는 주개(酒?) 노백순(魯白淳)이었다.
“정말입니까? 그들이 왜? 설마.......”
깜짝 놀란 호연작은 노백순의 얼굴을 주시했다. 퍼뜩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 생각 때문이었다. 지금껏 하후장설이 보였던 행보를 보면 그는 결코 권력의 최정점에 서 있는 자의 모습이 아니었다. 마치 무림 세력의 하수인처럼 보였던 것이다.
“방주님, 짐작대롭니다. 그는 평범한 자가 아니었더군요. 무극계라는 세력에 속해 있던 자였습니다. 무극계는 변황사패천의 주인이었고요.”
“그랬군.”
호연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후장설이 죽자마자 바로 개파대전을 하겠다고 나선 마교를 이상하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제야 그 이유를 명확하게 알게 된 것이다.
“그럼 지오군도는?”
이 또한 의문이었다. 변황사패천의 한 곳인 지옥군도 또한 무극계라는 단체의 하수인이었다. 그런 자들이 떼거리로 몰살을 당했다면, 바다에서 대규모 전쟁이 있었다는 말이 된다.
그런데 전쟁의 징후는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았다.
“그건 방금 드린 첩지에 있습니다.”
노백순의 말에 호연작은 쥐고 있던 첩지를 펼쳤다.
천천히 글을 읽어 내려가던 호연작은 일순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리고 조금 전 보았던 부분을 다시 읽어 보았다. 사지가 절단된 특이한 시체에 관한 내용이었다.
특이하게도 시체는 팔꿈치와 무릎 부분이 잘려 있었다고 했다.
시체를 발견했던 복건 지부장은 누군가 일부러 잘라 냈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쓰여 있었다.
하지만 그 정도만으로는 호연작이 지금처럼 놀라지는 않을 터였다.
시체의 허리에 감겨 있던 일 장 길이의 검은 줄이라는 대목 때문이었다. 천잠사로 되어 있는 줄의 양 끝에 작은 낫으로 추측되는 무기가 달려 있었는데 절반이 부러져 나갔다고 되어 있었다.
“혹시 얼굴에 대한 건 없었소?”
몇 번에 걸쳐 첩지를 읽어보던 호연작은 고개를 들어 장로들을 쳐다보았다.
“오랫동안 물에 잠겨 있어서 알아볼 수 없을 지경이었다고 합니다.”
“그렇겠지....... 어떻게 생각하시오?”
고개를 끄덕인 호연작은 재차 물었다.
“시체를 보지 못해 뭐라 말씀드리긴 뭣하지만 제 생각으로는 귀광두인 것 같습니다.”
진청일의 말에 동의하는지 나머지 장로들 또한 고개를 끄덕였다. 일행을 쳐다보던 진청일은 말을 이었다.
“제가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죽어간 지옥군도 무인들의 수 때문이기도 하지만 하후장설이 무극계 하수인이었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하후장설이 무극계 하수인이었고, 무극계가 변황사패천의 주인이란 사실이 밝혀지자 안개가 걷히는 기분이었다.
“귀광두를 쫓다 바다에서 놓친 하후장설은 바다의 지배자인 지옥군도에 연락을 했을 겁니다. 그리고 귀광두는 수천 명을 향해 덤벼들 정도로 무모한 놈입니다. 지옥군도가 그저 변방 세력인 줄 알고 무작정 덤벼들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황실을 장악할 정도로 힘을 가진 곳이 무극계이고 그들의 하수인이 변황사패천이라면 지옥군도의 힘은 세간에 알려진 것보다 훨씬 강할 것이다.
그런 자들의 시체 오백여 구가 해안가로 떠밀려 왔다. 그럼 수장된 자들 또한 비슷한 수가 될 터이고, 귀광두와 같이 있는 동료들은 그들과 같이 수장되었음에 분명하다.
진청일의 말에 호연작을 비롯한 나머지 장로 일행은 고개를 끄덕였다.
“무극계에 대해서는 좀 더 알아보고 그 시체는 개봉으로 운송하도록 하시오. 서두르시오.”
“알겠습니다. 그럼!”
느닷없는 호연작의 명령에 장로들은 바쁘게 움직였다.
“쿡!”
장로들이 나가자 호연작은 나직이 웃음을 토해 냈다. 확인할 필요도 없이 묵안혈마의 죽음은 기정사실일 것이다. 귀광두, 아니 묵안혈마. 손수 죽이고 싶어도 방법이 없었던 자가 죽었다는데 실감이 나지 않았다.
오십 년 동안 기다렸던 복수를 했는데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결국 죽었더냐. 죽었단 말이더냐. 네놈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살아 있는 천붕십일천마는 없다. 전부 죽었단 말이다. 하지만 끝났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너희들은 끝났을지 모르지만 이 호연작은 이제 시작일 뿐이란 말이다. 이제 호연작으로 해야 할 마지막 일을 마치고 나는 다시 태어나게 될 것이다. 그때는 개방 방주가 아닌 정파의........”
호연작은 입엣말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분명한 건 있었다. 호연작은 개방 방주라는 신분 외에 또 다른 분신이 존재한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호연작은 꿈에도 알지 못한 사실이 있었다.
북방 금지로 보냈던 그들이 아직 살아 있고, 이미 중원의 심장이라는 북경에 도착해 있는 이도 있다는 사실을.
“하함!”
따분한 듯 섯다는 연신 하품을 했다. 북경 전역에서 연일 피의 숙청이 이어지고 있지만 섯다와 모사 두 사람에게는 먼 나라 이야기였다.
하후장설과 천태진을 제거함으로써 북경에 온 목적을 달성했다. 하지만 두 사람은 떠날 수가 없었다. 뒤따라오는 일행과 보조를 맞추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소식 없는 아랫도리를 고쳐 주겠다고 했던 주홍의 약속. 그것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다.
“모사야, 주홍 그 자식 말이다, 대가리에 기름칠을 무지하게 했나 봐. 머리통 굴리는 소리가 밖으로 새어나오는 것 같더라.”
하후장설이 죽는 순간부터 북경을 장악해 가는 주홍의 모습은 놀랍기 그지없었다. 지금까지 하후장설 측근으로 있던 수많은 중신들이 처형을 당했으나 주홍은 아직 얼굴을 보이지 않고 있다.
그 모든 일이 금의위를 장악한 장철웅에 의해 행해지고 있었다.
놀랍게도 처형당하는 그들의 죄목은 공신 살해 죄였다.
하후장설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그들에게 뒤집어씌워 처형을 시키고 있는 것이다.
“하후장설이 죽었다고 당장 황제로 등극할 수 있는 건 아니잖아. 군부도 설득해야 할 테고 현 황제를 따르는 자들도 자기편으로 끌어들여야 하니까. 앞으로 많은 시간이 걸릴 거다.”
“그럼 형님에게 내려진 반역자란 꼬리는 언제 떨어지냐?”
“그건 그가 북경을 완전하게 장악하고 모습을 드러낸 순간이 되겠지. 안 그렇소, 왕야?”
어둠 속을 돌아다보며 모사는 낮게 물었다.
“전 대협 말이 맞네. 내가 전면에 나설 때가 바로 하연이와 그가 반역자에서 벗어나는 날이네.”
장철웅을 비롯한 십여 명의 금의위를 대동한 주홍이 다가오며 말했다. 북경의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홍의 얼굴은 암울했다. 딸인 하연이 때문이었다.
수천 무림인의 추격을 뚫고 귀광두와 함께 바다로 도망쳤다고 했다.
왕야의 외동딸이, 자신의 딸이 무림인의 공격을 받다니.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씩이나. 마음 같아서는 지금 당장이라도 황실을 장악하여 그들에게 내린 반역자의 굴레를 벗겨 주고 싶었다.
하지만 아직은 그렇게 할 수가 없다.
북경을 완전하게 장악하고 절차를 밟아 황제에 등극하기까지는 앞으로도 많은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때까지는 참을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다.
“그건 그렇고, 우림 그만 가야겠소.”
주홍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섯다가 지나가는 투로 말을 꺼냈다.
“아직 일행이 도착하려면 멀지 않았는가. 벌써 가는 건........”
의아한 얼굴로 주홍은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 물론 북경 대부분을 장악했다지만 앞으로도 어떤 변수가 생길지 모르는 상황이다. 조금만 더 머물러 줬으면 싶었다.
‘염병할 놈!’
섯다는 내심 욕설을 뱉어냈다. 떠나겠다는 말은 다분히 형식적인 말에 불과했다. 일도 끝났으니 이제 약속을 이행하라는 의미로 꺼낸 말이었는데, 머리가 복잡한 주홍이 알아차리지 못한 거였다.
“험험! 그게 아니고, 대강 일이 정리되었으니 이제는.”
답답한 듯 헛기침을 하던 섯다는 자신의 아랫도리를 툭툭 쳤다.
“아!”
그제야 섯다가 한 말의 의미를 알아차린 주홍은 고개를 끄덕였다.
“가세.”
반 시진 정도를 걸어 일행이 도착한 곳은 북경 서쪽 연화지라 불리는 아담한 호수 근처였다.
“왕야도 이런 곳을 이용하는 거요?”
주변을 둘러보던 모사는 놀란 얼굴로 물었다.
겉보기에는 일반 가옥처럼 생겼지만 눈앞의 건물들은 홍등가가 분명했다.
“여길 일반 홍등가라 생각하면 큰코다치네.”
두 사람을 안내하여 정화루(情火樓)란 자그마한 간판이 걸린 주루 후문 쪽으로 걸음을 옮기며 주홍은 말했다.
“물건 달린 놈들을 상대로 장사하는 곳인데 다르면 얼마나 다를까.”
“그럴까?”
두 사람을 향해 싱긋 미소를 지은 주홍은 장철웅을 안으로 들여보냈다. 잠시 후, 소란스런 소리와 함께 담 안쪽이 환하게 밝아지는 듯하더니 후문이 활짝 열렸다.
“전하!”
그리고 궁장 머리를 한 여인이 주홍 앞에 무릎을 꿇으며 울먹였다.
“오랜만이구나. 그동안 잘 있었느냐. 많이 야위었구나.”
‘어라? 저 자식 봐라? 우리 때문이 아니었잖아!’
두 사람 사이가 심상치 않음을 감지한 모사가 인상을 찌푸렸다.
“야!”
기분이 상한 모사가 섯다의 옆구리를 꾹 찔렀다.
하지만 섯다는 모사의 부름에 대답할 경황이 없었다.
한량 짓도 꽤 했고 많은 주루도 경험해 보았다. 하지만 그 많은 주루들 중 지금 눈앞의 건물처럼 화려한 곳은 일찍이 보지 못했다.
지금 자신들이 들어와 있는 곳은 후원이 분명했다. 희미한 불빛을 받은 후원은 사방에서 광채가 솟구치고 있다. 마치 은가루를 바닥에 뿌려 놓은 듯했다.
후원 중앙에 앉은 자그마한 연못과 정자, 그리고 바닥에 깔린 융단까지. 지금 서 있는 곳이 실내인지 밖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갑자기 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듯했다.
모사 또한 섯다와 다르지 않았다. 처음엔 주홍 앞에 무릎 꿇은 여인의 미모 때문에 주변을 살필 겨를이 없었다.
그런데 섯다의 옆구리를 찌르며 본 내부의 전경은 엄청났다.
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썅! 세월이 흐르긴 흘렀구나. 이 섯다를 놀라게 할 주루가 있다니. 그래 봐야 지가 홍루지!”
[사내자식이 이까짓 것 가지고 뭘 놀라고 그래? 날 믿어, 임마.]
모사에게 전음을 보낸 섯다는 고개를 거칠게 흔들었다.
[너 자신........ 있냐?]
의심스러운 눈으로 섯다를 쳐다보며 모사가 물었다. 한량 짓을 많이 해서 섯다란 별명을 얻게 된 녀석이지만, 지금 들어온 정화루는 과거 그가 다녔던 주루와는 차원이 다르다.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아랫도리가 오그라들 판인데, 더구나 자신들은 작동불능이 아닌가.
“험험! 제법 잘 꾸며 두었구먼. 총관, 뭐 하는가? 안내하지 않고.”
가슴을 활짝 편 섯다는 한편에 서 있는 여인을 향해 말을 걸었다.
“네? 아, 알겠습니다. 따라오십시오. 그리고 소첩은 화정 부인이라 합니다.”
섯다의 지목을 받았던 여인이 화들짝 놀라며 길을 잡았다.
그녀는 정화루의 총관이 아닌 루주인 수란의 침모 화정 부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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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데 와서는 당당하게 행동해야 해, 임마. 안 그러면 사람 우습게 본단 말이야. 촌스럽게 굴지 말고 대범하게 행동하란 말이야.]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모사의 행동을 힐난하고는 있으나 섯다 또한 기절할 지경이었다. 한눈에 보아도 수백 냥을 호가할 물건들이 사방에 널려 있었다.
하지만 섯다의 놀람은 시작에 불과했다.
[섯다야, 신발 벗어야 하는 것 아냐?]
화정 부인을 뒤따르던 모사가 주춤 멈춰 서며 물었다. 먼지 한 톨 보이지 않는 실내는 신발을 신어야 할지 아니면 벗고 들어가야 할지 가늠이 서지 않았던 것이다.
[임마, 저년이 하는 대로 따라 하면.......]
문손잡이를 붙들고 공손하게 고개를 숙이고 있는 화정 부인의 모습 때문이었다.
“뭐 하고 있는가! 앞장서지 않고.”
“소첩은 대인 뒤를 따르겠습니다.”
‘제길! 에라 모르겠다!’
[벗어 임마!]
화정 부인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섯다는 모사를 향해 낮게 소리치더니 주홍에게서 옷과 함께 얻었던 신발을 재빨리 벗었다.
곁에서 섯다의 눈치만 살피던 모사 또한 섯다를 따라 신발을 벗은 건 불문가지. 순간 환한 불빛 아래 때가 덕지덕지 낀 두 사람의 맨발이 드러났다.
“킥!”
일순 화정 부인의 입에서 나직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정화루에 들어와 내실에서 신발을 벗는 사람도 처음 보았고, 족의(足衣)를 신지 않은 맨발 또한 처음 보았다.
더구나 그 발에서는 지독한 냄새마저 풍겨 나오고 있었으니.
[야, 새끼야! 신발을 신어야 하는 것 아냐?]
화정 부인의 웃음소리를 들은 모사의 얼굴이 홍당무처럼 붉어졌다.
하지만 모사와는 달리 섯다의 얼굴은 태연했다.
“허허! 몰라서 신발을 벗은 게 아니다. 너도 보다시피 우린 맨발이 아니냐. 그래서 발을 먼저 씻고 싶어서 그런 거니라. 처음 와 본 게 아니란 말........조또!”
섯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발을 씻고 싶다는 말까지만 해야 했다. 처음이니 뭐니 하는 말을 아예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슬쩍 눈을 돌려 화정 부인을 바라보던 섯다는 내심 안도의 숨을 쉬었다. 그녀는 여전히 공손한 얼굴로 서 있었다.
어쨌든 오십 년 전 광풍대 최고 한량이었던 섯다의 실수는 그렇게 무마되는 듯했다.
“따라오십시오!”
애써 웃음을 지운 화정 부인은 두 사람이 했던 것처럼 신발을 벗고 올라서 안으로 안내했다.
“우선 이곳에서.......”
“허허! 씻기도 전에 봉황실로 안내를 하면 어쩌란 말이냐. 먼저 욕실로 안내하도록 하거라!”
살아 있는 봉황이 새겨진 문을 보며 섯다는 조금 전 실수를 만회하려는 듯 점잖게 알은체를 했다.
“맞아. 처자도 조금 전 발 냄새 때문에 인상을 찌푸렸으면서 방으로 안내를 하면 어떡하란 말인가!”
고개를 끄덕이며 모사가 맞장구를 쳤다.
“죄송합니다. 그럴 의도는 아니었습니다.”
화정 부인은 죄송스런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조금 전, 신발을 벗는 그들을 보며 웃었던 것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이미 이들에 대해서는 언질을 받았다. 왕야와 동일한 수준으로 대접을 하라고 했던 것이다.
그런 그들에게 비웃는 듯한 웃음을 들켰으니.
“괜찮아. 방을 잘못 찾은 게 뭐 큰 잘못이라고 그러는가. 살다 보면 실수할 때도 있는 거지. 완벽한 사람은 없는 거란 말이네. 욕실이 어딘가? 저기가 욕실인가.......”
화정 부인의 어깨를 토닥인 섯다는 몸을 돌려 한편 구석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아니, 옮기려 했다.
하지만 그는 발을 뗄 수가 없었다.
화정 부인의 손이 허리춤을 붙잡고 있었던 탓이었다.
“저기....... 여기가 욕실입니다.”
섯다를 향해 고개를 숙인 화정 부인은 이번에도 역시 조금 전처럼 조심스럽게 욕실 문을 열었다.
[너 이 개자식, 지금부터 주둥아리 닥치고 가만있어. 뭐가 한량이야, 새꺄.]
“끄응!”
섯다는 저도 모르게 신음을 뱉어 내고 말았다. 모사의 말처럼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게 나을 듯싶었다. 욕실일 거라 생각했던 곳은 창고였고, 방이라 생각한 곳이 욕실이었다.
공연히 알은체하다고 오히려 창피만 당한 꼴이 되어 버린 것이었다.
“세월이 많이 흘러서 그래. 내가 한량일 때는 이런 자재로 욕실 문을 만드는 주루는 없었단 말이야.”
입 다물라는 모사의 말에도 불구하고 변명하듯 말을 꺼낸 섯다는 욕실 안으로 들어갔다.
“억!”
이번엔 비명 소리가 튀어나왔다. 천국에 들어온 건지, 아니면 사람 사는 곳에 있는 건지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욕실은 화려했다.
대리석 욕조에서는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뿐이라면 섯다가 이렇게 놀라진 않았을 것이다.
욕조 주변으로 둘러서 있는 희미한 그림자들. 그것들은 분명 여인들이었다.
“대인의 목욕 시중을 들어줄 아이들입니다.”
“세상에.......”
모사 역시 섯다와 다르지 않았다. 말로만 듣던 무릉도원이 바로 이곳이었다. 향긋한 냄새가 흐르는 실내에 반라의 여인들이 대기하고 있다니. 순간 머릿속으로 뜨거운 기운이 밀려오는 듯했다.
“저기....... 전 대인은 이쪽 욕실로 가셔야 합니다.”
“그런가? 난 또 둘이 같이 하는 걸로 알고.”
머리를 긁적인 모사는 재빨리 화정 부인이 붙들고 있는 문 안으로 몸을 들이밀었다.
“그런데....... 총관.”
곤혹스런 얼굴로 안쪽을 주시하던 섯다가 조심스럽게 화정 부인을 불렀다.
“하명하실 일이라도 있습니까?”
“다른 게 아니고 저 애들 계속 여기에 있을 건가?”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끄응! 특별한 문제가 있는 건 아니고........ 혼자 하고 싶어서 말이네.”
[헉! 이런 병신! 지금 무슨 소리를 한 거야?]
느닷없이 튀어나온 말에 섯다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분명 그런 소리가 나올 상황이 아니다.
과거 자주 들락거렸던 주루에 있던 기녀들과는 비교 자체가 안 되는 미녀들이 줄줄이 있는데 그들을 내보내라고 했으니, 정말 노망이 났나 싶었다.
하지만 어쩔 것인가, 이미 엎질러진 물.
“알겠습니다.”
“끄응!”
두말없이 고개를 숙이는 화정 부인의 모습에 섯다는 참혹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잠시 후, 욕실 안으로 들어선 섯다는 물속에 몸을 담갔다.
“아냐, 어쩌면 잘 된 일인지도.”
문득 작동하지 않는 아랫도리에 생각이 미친 섯다는 고개를 끄덕였다. 온통 화려함으로 치장된 이곳은 고관대작을 위해 만들어진 욕실이 분명할 것이다. 그들 또한 이곳에서 목욕을 했을 터이고, 반라 여인들의 시중을 받다 보면 사내인 이상 물건은 용솟음쳤을 것이다.
시중을 드는 아이들은 그런 사실을 전부 알고 있을 게 분명하다.
하지만 자신은 어떠한가.
“그러고 보니 여긴 안 서는 게 더 창피한 곳이구먼. 젠장!”
왈칵 짜증이 밀려오자 섯다는 욕조 안으로 머리를 담갔다. 괜히 왔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조금 전 반라 차림의 젊은 처자들을 보았지만 아무런 감흥이 오지 않았다.
‘모르겠다! 술이나 잔득 퍼먹고 바로 떠나는 게........’
섯다는 불쑥 물 밖으로 고개를 쳐들며 인상을 찌푸렸다.
“커억!”
이편을 쳐다보는 검은 눈동자와 마주친 섯다는 사례 걸린 듯 기침을 해댔다.
“등을 밀어 드리러 왔습니다.”
화정 부인은 고개를 푹 숙였다. 아이들을 물리고 손님들의 근황을 전하기 위해 루주를 찾아갔었다. 아이들을 전부 물렸다는 말을 전하고 나오려는 순간, 왕야로부터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불구인 두 사람을 오늘 밤 안으로 정상적인 남자로 만들어 놓으라는 명을 받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 일에 목숨을 걸으라고 했다.
다급해진 화정 부인은 손수 욕실 안으로 들어오고 말았다.
하지만 그런 사정을 알 리 없는 섯다는 거의 벗은 듯한 모습으로 들어온 화정 부인을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너...... 올해 몇이냐?”
“서른여섯입니다.”
“서른여섯이나 먹은 할머니가 총각이 목욕하는 곳에 들어오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 거냐?”
물론 쫓아내려고 하는 말일 뿐이다. 반라의 나삼을 걸친 화정 부인의 몸매는 처녀의 그것에 못지않았다. 폭발적으로 솟은 가슴은 금방이라도 나삼을 뚫고 나올 정도로 탄력이 넘쳤다.
서른여섯이란 나이가 거짓말처럼 느껴지는 엄청난 몸매였던 것이다. 문제는 섯다 자신에게 있었다. 분명 뭔가 소식이 와야 하건만, 머릿속을 비롯한 아랫도리는 잔잔한 수면처럼 편안하기만 했다.
“니미럴!”
“왕야께서 시중을 들라 하셨습니다, 상공. 저에게 맡겨 두십시오.”
슬쩍 섯다의 시선을 피하며 화정 부인은 욕조 뒤로 몸을 옮겼다.
“상공, 몸을 좀 일으켜 주십시오.”
“끄응! 혼자 할 수 있다고........”
화정 부인의 손이 겨드랑이로 파고들자 섯다는 거정하지 못하고 몸을 일으켰다. 여러 명의 여인이 있는 것도 아니고 화정 부인 혼자였기에 시험을 해보고 싶은 생각도 없지 않았다.
“상공은 멋진 몸을 지니셨습니다.”
섯다의 등판을 슬쩍 문지르며 화정 부인은 코맹맹이 소리로 말했다. 벌써 이십 년을 살아온 곳이 정화루고, 어떻게 하면 남자를 흥분시킬 수 있는지 알고 있기에 그녀는 결코 서두르지 않았다.
불능을 치료하기 위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자격지심을 극복하도록 해줘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화정 부인은 섯다와 모사에 대해 좀 더 많은 정보를 알고 왔어야 했다. 애무하듯 등을 쓰다듬고, 남성의 성감대라 할 수 있는 곳을 몇 번이고 건드려 보았지만 섯다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자존심 상하게 만드네.’
화정 부인의 입술이 쌜쭉 말려 올랐다. 루주의 시중을 드는 침모가 되는 바람에 기녀 생활을 많이 하지는 않았지만 남자에 대해선 통달했다고 여겼다. 더하여 자신의 몸을 보고 흥분하지 않을 사람은 없을 거란 자신감도 있었다.
십 년 전만 해도 기녀가 아닌 자신을 노렸던 고관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때로는 권력으로 자신을 취하려는 사람도 있었고, 루주 몰래 선물 공세를 했던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았다.
사내들의 노리개가 되는 게 싫었던 탓이었다. 그런데 자신의 모습에도 전혀 흔들리지 않은 사람을 만난 것이다.
‘그렇다면!’
슬쩍 입술을 깨문 화정 부인은 천천히 움직여 욕조 안으로 이동했다.
“상공, 앞도 제가 하겠습니다.”
섯다의 얼굴을 살피며 화정 부인은 조심스럽게 그의 가슴으로 손을 가져갔다.
‘정말 탐날 정도로 멋진 몸이네.’
화정 부인은 내심 감탄사를 뱉어냈다. 이곳에 있으면서 많은 고관들을 보았다. 하지만 여자만 밝히는 그들은 눈앞의 사내처럼 탄탄한 가슴을 가진 자들이 없었다.
저도 모르게 나직한 신음을 뱉어낸 화정 부인은 조금 전처럼 섯다의 가슴을 가볍게 쓸었다. 가볍게 시작한 그녀의 손길에 점점 힘이 가해지고, 급기야 그녀의 얼굴은 섯다의 턱 밑까지 다가갔다.
‘니미럴!’
눈앞에 훤히 드러난 가슴을 보면서 섯다는 속으로 욕설을 뱉어내고 말았다. 한량 짓을 많이 했지만 나삼 사이로 슬쩍슬쩍 드러나는 가슴보다 아름다운 가슴은 보지 못했다.
최고의 명품을 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감흥이 없다.
‘휴우!’
아래로 파고드는 화정 부인의 손길을 느끼며 섯다는 내심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은근슬쩍 손을 밀어 넣는 화정 부인은 달랐다.
‘하악!’
터지려는 신음을 급격히 삼켜야 했다. 손끝을 스치는 그것은 난생 처음 대하는 대물이었다.
문득 만져보고 싶다는 생각에 그녀의 손길은 허벅지 근처를 떠나지 못했다. 간지럼을 태우듯 한참 동안 그곳에 머물던 그녀의 손길이 마침내 위로 올라왔다.
‘아냐, 지금은 참아야 한다. 강한 자극을 줬다가 실패하면 영영 불가능하다. 우선은 분위기를 잡는 게 중요해.’
그녀가 손을 빼낸 이유였다. 몸은 정상인 사람이 불능인 경우는 대부분 심리 상태 때문이란 사실을 알고 있기에 취한 행동이었다.
그 다음부터 그녀는 섯다의 목욕을 돕는 데에만 집중했다.
어느새 그녀의 나삼은 물이 젖어 속살이 드러났다. 하지만 짐짓 얼굴을 붉히면서도 그녀는 숨기려 들지도 않았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는 물에 젖은 나삼마저도 벗어 던져 버렸다.
“으음!”
눈앞으로 확 밀려오는 폭발적인 나신에 섯다는 나직한 신음을 흘렸다. 오십 년 만에 대하는 여인의 나신. 우뚝 솟은 가슴과 기름진 아랫배, 그리고 그 아래 풋풋한 초지까지.
입 안에 침이 고이고 숨이 가빠져야 정상이건만........
머리는 기억하고 있는데 몸은 기억을 하지 못하고 있다. 슬쩍 고개를 숙여 아래를 쳐다보았다.
“제길!”
“상공, 제 등 좀 밀어 주세요.”
섯다의 표정이 일그러지자 화정 부인은 재빨리 욕조 왼편에 마련된 단 위로 엎드렸다.
“이거 역할이 바뀐 것 아냐? 그곳에 엎드려야 할 사람은 난 것 같은데........”
“아무나 먼저 해주면 어때요. 상공이 먼저 해주시고 그 다음에 제가 하면 되지요.”
화정 부인은 배시시 웃었다. 어디서 그런 여유가 나온 것일까. 다른 사람도 아니고 왕야의 손님이라 할 수 있는 사람에게 등을 밀어 달라니.
“하여간 요즘 것들은........”
낮게 혀를 찬 섯다는 화정 부인 곁으로 다가가서는 뒤편으로 손을 가볍게 저었다.
쉬이익!
“앗! 차거! 상공, 찬물을 주시면 어떻해요!”
느닷없이 물벼락을 맞은 화정 부인은 낮게 소리를 질렀다.
“임마, 찬물이 얼마나 시원한데. 찬물로 몸을 적신 다음 따뜻한 물로 목욕을 하면 기분은 두 배로 상쾌해진단 말이다.”
재차 손을 흔들자 이번엔 뜨거운 물이 화정 부인의 몸을 덮쳤다.
“빡빡 문질러 주세요.”
화정 부인의 얼굴에 화사한 미소가 감돌았다. 오랜만에 느껴 보는 기분. 어린 시절 어머니가 목욕을 시켜 주실 때마다 했던 말이다.
문득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 같았다.
“오냐, 껍질이 벗겨지도록 문질러 주마. 이 섯다가 여자 등을 밀어줄 줄이야.”
화정 부인의 몸을 싹싹 문지르며 섯다는 낮게 투덜거렸다. 하지만 말과는 달리 섯다의 내심은 필사적이었다.
가슴과 마찬가지로 환상적인 아름다움을 뽐내는 화정 부인의 둔부를 쳐다보며 모든 감각을 집중했다. 심지어는 엉덩이 아래 깊숙한 곳까지 시선을 주었다.
그러나.
“휴우!”
‘씨팔! 이거, 정말 고장 아냐? 어찌 저런 몸을 보고도.......’
“별명이 섯다였어요?”
“그래, 임마. 섯다였다. 여자만 보면 벌떡거린다고 해서....... 그리고 나중에 장대근이란 이름이 생겼고.”
걱정이 되기 시작한 걸까. 섯다의 목소리가 신경질적으로 변했다.
하지만 화정 부인의 얼굴은 태연했다.
“훗! 정말 어울리는 별명과 이름이네요. 그렇게 불릴 만한 자격이 있어요.”
욕조에서 만졌던 그의 물건을 기억해낸 화정 부인은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비로소 그가 편하게 느껴졌던 이유를 알 듯했다. 성(性)조차 없던 사람. 자신 또한 정화루에 오기 전까지는 일남이라 불리지 않았던가.
“저는 수박 두 통이었어요. 이름은 일남(一男)이었고요.”
“캑! 일남이? 사내 이름도 아니고 일남이 뭐냐?”
그녀의 몸을 주무르고 있다는 사실도 잊고 섯다는 낮게 기침을 했다.
“아들을 기대하고 이름을 미리 지어 놓으셨는데 제가 나온 거죠, 뭐.”
“그래서 동생은 사내였냐?”
“아뇨. 여동생이 나왔는데 그 아이는 이남(二男)이 되었어요. 그런데 얼마 살지를 못했지요. 수해가 나는 바람에........”
화정 부인의 얼굴이 아득하게 변했다. 굶기를 밥 먹듯 했던 시절, 장강이 범람하면서 덮친 수마는 식구 모두를 쓸어 가 버리고 말았다.
자신만 홀로 남겨 둔 채.
“참! 별명을 말할 때 수박 두 통이라 하던데 그게 뭐냐?”
물으면서도 섯다의 손은 부지런히 움직였다. 겨드랑이 속으로 불쑥 손을 밀어 넣을 때도 있었고, 그녀의 엉덩이를 쓰다듬을 때도 있었다.
섯다의 손길이 스칠 때마다 화정 부인은 나직한 신음과 함께 몸을 꿈틀댔다.
“수박이 뭔지 모르세요?”
“모르니까 묻지, 임마. 처음 들어보는 말이구먼.”
“음! 수박이 뭐냐면, 상공 머리만 한 크기도 있고 좀 작은 것도 있는데, 칼로 잘라 보면 달짝지근한 물이 많아요. 남쪽에서 나는데 여름철에만 구경할 수 있는 거예요.”
“먹는 거란 말인데, 그게 왜 별명이 됐냐고.”
“그건 상공과 같아요. 바로 이것 때문이에요.”
몸을 홱 뒤집은 화정 부인은 우뚝 솟은 가슴을 가리키며 말했다.
“쿡! 어떤 자식이 지었는지 별명은 제대로 지은 것 같다.”
가슴을 가리키는 화정 부인의 모습 때문이 아니었다. 별짓을 다해도 소식을 보내지 않는 그놈 때문에 섯다는 힘없이 웃고 말았다.
“지금부터는 상공의 몸을 주물러 드리겠어요. 엎드리세요.”
자리에서 일어난 화정 부인은 옥으로 만든 단 위의 물을 쓸어 내며 말했다.
“됐어, 임마. 무인이 근육 굳을 일이 어디 있냐. 대충 씻었으니까 그만 나가자.”
“저만 호강했네요.”
배시시 미소를 지은 화정 부인은 입구 쪽에 세워진 장을 열어 침의 비슷한 옷을 내밀었다.
“이거 입으세요. 내의와 옷을 빨아 두라고 했습니다.”
“여기 왔던 다른 놈들도 전부 이런 걸 입었냐?”
“네! 심지어는 벗고 다닌 작자들도 있었어요.”
“끄응!”
낮게 신음을 뱉어낸 섯다는 그녀가 내민 옷을 걸친 다음 욕실로 나섰다.
잠시 후, 그가 안내된 곳은 욕실 못지않게 화려한 장식으로 치장한 아담한 방이었다.
“어서 와라!”
[너 혹시.......]
환한 섯다의 얼굴을 쳐다보던 모사가 잔뜩 기대 어린 얼굴로 전음을 보냈다.
무려 다섯 명의 꽃다운 처자들에게 둘러싸여 목욕을 했다. 하지만 확실하게 고장 났다는 사실만 확인하고 욕실을 나서고 말았다.
[아냐, 임마. 그게 되었으면 내가 술 푸러 왔겠냐?]
눈을 흘긴 섯다는 모사 앞에 놓인 술잔을 들어 훌쩍 털어 넣었다.
“기다려 보자. 준비를 했다니까 방법이 나오겠지.”
초조한 얼굴로 모사는 연신 방문을 흘끔거렸다. 벌써 몇 잔의 술을 마셨는지. 혹시 술기운을 빌리면 제대로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주거니 받거니 두 사람은 먼저 들여온 술을 전부 마셨다.
술을 가져다 달라고 고함을 지르려는 순간, 갑자기 방 안의 불이 꺼지며 나직한 음률이 흘러나왔다.
사람의 심금을 자극하는 그것은 무림에서 환락음이라 불리는 음공이었다. 뒤이어 음악 소리에 맞춰 무희들이 나와 춤을 추기 시작했다.
붉은 홍등, 그리고 반라의 무희들.
보는 것만으로도 호흡이 가빠질 광경이었다.
하지만 그녀들의 춤은 시작에 불과했다. 점차 음률이 고조되고 무희들은 옷을 하나둘씩 벗어 던지며 알몸을 드러냈다. 어느 순간부터 그녀들의 입에서 끈적끈적한 비음마저 흘러나오자 방 안은 온통 후끈 달아올랐다.
“섯다야, 쟤 어떠냐?”
무희들의 모습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모사가 가슴과 엉덩이가 유난히 탐스러운 무희를 가리키며 은근하게 물었다.
“쟤? 음! 정말 뻑 가게 잘 빠졌네. 저 정도면 상급 정도는 된다.”
좀 전에 보았던 화정 부인의 몸을 떠올리며 대답했다. 그녀에 비해 다소 부족한 듯하지만 그 부족한 면이 매력인 듯도 싶었다.
“그럼 저 애는?”
이번엔 모사가 가리킨 무희는 금방 가리킨 무희의 오른편에 있는 여인이었다.
“신음 소리 죽이는 애?”
“그래, 임마. 저런 소리는 처음 들어 보는 것 같아서 말이다.”
“보통 저런 애들은 교화란 기명을 많이 쓰거든? 신음 소리만 가지고도 남자 여럿 잡는다. 몸매는 중급!”
“호! 신음 소리로 사내를 잡아먹는단 말인데....... 그 정도만 해도 어디냐? 그럼 저년은?”
“밑이 깨끗한 애?”
“그래, 임마.”
“저런 애는 보통 그 짓으로 남자를 잡는 유형이거든. 저런 애들과 관계를 가질 때는 절대 위를 허용해서는 안 돼. 무조건 정상 체위로 관계를 갖도록 하고 빠른 시간에 끝내야 해. 만족시켜 주겠다고 달려들면 그날로 바로 염라대왕과 면담을 한다고.”
목을 그어 보이는 시늉을 하며 섯다가 말했다.
“그래서 재수 없다고 했던 건가? 그럼 저기 울창한 애는?”
“허미! 쟤는 거기에 거름을 주나 왜 저리 울창해.”
모사가 가리킨 울창녀를 쳐다보던 섯다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녀 또한 화정 부인만큼이나 특이했던 것이다.
“쟤도 깨끗한 애와 마찬가지야. 극도의 쾌감을 주지만 남자를 상하게 하는 경우가 많아.”
“끌려가면 안 되는 계집?”
“맞다. 여자에게는 미안하지만 독하게 마음먹고 한 번으로 끝내야 해. 두 번이 세 번이 되고, 세 번이 네 번 된단 말이야. 그러다 보면.”
“저승행이다, 이 말이지? 그럼 저년은?”
“모사야!”
모사가 가리킨 무희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섯다가 점잖게 불렀다.
“목소리 깔지 말고 묻는 말이나 대답해, 임마.”
무희들의 몸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빠르게 말했다.
“지금 우리가 여기 왜 있는 거냐?”
“왜 있기는, 임마! 고장 난 놈들 고쳐 보려고........ 니미 씨부랄!”
급기야 모사는 욕설을 뱉어 내고 말았다.
사내를 복상사시킬 정도의 미녀들이 떼거리로 벗고 춤을 추는 상황이다. 보통 남자들 같으면 충혈된 눈으로 여인들을 쳐다보며 숨을 헐떡거려야 한다.
그런데 자신들은 그런 여자들의 점수를 매기고 있었다.
술까지 잔뜩 처먹은 놈들이.
“너, 술 취하냐?”
“술? 그러고 보니 물 먹은 것 같네? 좃또! 그럼 춘약도 안 받을 것 아냐!”
급기야 모사는 고함을 지르고 말았다. 한 방울만 마셔도 뼈까지 녹는다는 독을 오십 년간 밥처럼 먹고 산 자신들이다.
술을 비롯한 춘약이 받을 리가 없다.
일순 머릿속이 하얗게 변해 버렸다. 마지막 방법으로 춘약을 생각하고 있었고, 가장 기대를 걸었던 방법이다. 그런데 지금 와 생각하니 그것도 의미 없는 짓이었다.
“으아아! 어떤 새끼가 한밤중부터 오입질을 하는 거야! 앙? 그냥 자라! 그냥 퍼질러 자란 말이다!”
모사의 고함소리가 정화루 곳곳으로 퍼져 나가자 여기저기서 들려오던 신음 소리가 뚝 그쳤다.
“무슨 일인가?”
느닷없는 고함 소리에 놀란 주홍이 두 사람이 있는 곳으로 오며 물었다.
“아니외다. 어디서 고양이 우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서 말이오. 왕야, 돈 있으면 좀 주시오.”
“돈? 얼마나 필요한가?”
주홍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두 사람이 쓸 정도의 돈은 이미 주었고, 수신가의 무인들은 북경에 거주지를 마련해 주기로 했다.
그런데 돈이라니.
“중이 될 팔자로 태어났으니, 소림사 폐허에 암자나 지어야 겠소이다.”
“설마, 환락음(歡樂音)과 환락마화무(歡樂魔花舞)까지 펼쳤는데!”
나직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환락루주 수란이었다.
그녀는 경악한 얼굴로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 방금 무희들이 추었던 춤은 단순한 춤이 아니었다. 사공 중에서도 극악한 사공으로 통하는 무공이다.
웬만한 무인들은 오성에 달하는 환락음만 들어도 짐승으로 변한다. 그런데 방금 이들에게 시전한 환락음과 환락마화무는 십이성이었다.
부처님도 벌떡 일어나 무희들에게 덤벼들 정도거늘.
방금 왕야와 자신이 이성을 잃고 격렬한 정사를 치르게 된 원인이 바로 환락음 때문이질 않았던가. 아니, 굳이 무공이 아니더라도 춤을 추고 있던 아이들은 정화루 최고의 미인들이다.
기가 막혀 말이 나오지 않았다.
“긴말 필요 없고 돈 좀 줄 거요, 말 거요? 돈이 없다면 여기 있는 물건 몇 개 가져가고.”
“아닙니다. 드리겠습니다.”
이번에도 역시 대답한 사람은 수란이었다.
수란은 뒤에서 있는 화정 부인에게 눈짓을 했다.
“밖에서 기다리겠소!”
“그렇다고 지금 가려는가?”
주홍은 놀라 물었다. 설마 하니 오늘 밤 바로 떠날 줄은 생각지 못했던 탓이었다.
“그럼 뭐 할 거요. 설마 날 내시로 앉히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건.......”
“그럴 리가 있는가. 어찌 그대들을. 하지만 자주 연락을 취해 주게.”
말릴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주홍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북경에서 두 사람이 할 일은 없다. 차라리 물미에 나가 그곳을 정리해 주는 게 나을 듯싶었다.
“그럼 다음에 뵙겠소이다.”
주홍을 향해 포권을 취한 두 사람은 창문 너머로 몸을 날려 버렸다.
“그렇다고 그런 행색으로 나가면 어떻하나. 옷은 가지고.......”
불쑥 두 사람이 사라져 버리자 주홍은 씁쓸한 미소를 짓고 말았다. 그러다 곁에 있는 정화루 루주를 향해 낮게 말했다.
“수란, 화정 부인을 딸려 보내도록 하시오. 당분간은 계속 연락을 취하고 있어야 하오.”
“알겠습니다, 전하!”
잠시 후.
정화루 정문으로 화정 부인을 태운 사두마차가 소리 없이 나왔다.
“유화(流花)야, 기다려라!”
멀리 보이는 두 사람을 보며 화정 부인이 말했다. 그들은 커다란 나무 아래 고개를 떨군 채 앉아 있었다.
“섯다야, 정말 비참하다. 이렇게 해서 살아야 하는가 싶기도 하고.”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 되지 않는다.
눈이 툭 튀어나오고 목이말라야 할 그 상황에서 점수를 매기다니. 손짓만 해도 품 안으로 뛰어들 미녀들을 두고 점수라니.
“나도 그래, 임마. 지금 난 울고 싶다. 진짜 울고 싶어. 부처님마저 안 들어 주면 그땐 어떻하냐?”
섯다 또한 다르지 않았다. 모사의 질문을 받아 준 자신이 저주스럽도록 미웠다.
“그땐 정말 죽어야지. 난 내시로는 절대 못 산다.”
모사가 단호하게 말했다. 두 사람이 소림사로 가겠다는 건 주홍에게 말했던 것처럼 중이 되고자 해서가 아니었다. 마지막으로, 정말 마지막으로 불심에 기대 보기 위해서였다.
두 사람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정말이지 울고 싶은 밤이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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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건강 하고 행복 하세요
감사 하고 사랑 합니다
잘보고갑니다
감사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0^
감사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
잘 보고 갑니다. 감사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