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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글 스크랩 창자가 하루에 아홉 번 뒤틀리다(腸一日九回) - 신정근ㅣ성균관대 동양철학과 교수
잠실/맥(조문희) 추천 0 조회 52 14.12.15 09:54 댓글 1
게시글 본문내용

창자가 하루에 아홉 번 뒤틀리다

장일일구회(腸一日九回)

 

궁형을 당하여 신체가 변한 역사가 사마천의 초상화.

 

반고의 사마천 비평

헤로도토스(Herodotos, 484?-425? BC)는 <역사>에서 페르시아 전쟁을 기록했다. 헤로도토스는 과거의 사건을 시가(詩歌)로 다루지 않고 사실로 다루었기 때문에 역사의 아버지로 불린다. 중국에는 헤로도토스의 <역사>보다 더 이른 역사서로서 <서경(書經)>과 <춘추(春秋)>가 있다. <서경>은 부족 사회를 안정시킨 요(堯)임금과 순(舜)임금의 이야기를 다루고, <춘추>는 주(周)나라의 천자가 유명무실해지면서 실력 있는 제후들이 패자(覇者)로 활약하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헤로도토스의 <역사>에 맞먹을 만한 개인 저작으로는 사마천(司馬遷, 145?-86 BC)의 <사기(史記)>와 반고(班固, 32-92)의 <한서(漢書)>가 있다. 사마천이 반고보다 150년 앞서 활약했으므로 최초의 역사가 칭호는 사마천에게 돌아갈 듯하다.

사마천은 <서경>처럼 고대의 제왕(帝王)에서 시작해서 한(漢)나라 초기까지 통사(通史)를 썼다. 반면 반고는 한(漢)나라의 건국에서 시작해서 전한(前漢)의 멸망까지를 다루었다. 반고는 한초(漢初) 부분을 집필할 때 <사기>의 문장을 그대로 옮기면서 자구를 바꾸거나 빼는 간단한 수정 작업을 가했다. 요즘 기준에서 보면 반고는 사마천의 저작을 표절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반고도 ‘최초의 역사가’라는 타이틀을 사마천에게 준다고 해서 반대하지 않을 듯하다. 반고는 역사를 미화하지도 않고 은폐하지도 않았다며 <사기>를 ‘실록(實錄)’으로 추켜세웠다.

반고는 사마천의 저술을 일부 베꼈다고 하더라도 역사 서술의 원칙마저 답습하지 않았다. 반고는 위대한 선배 역사가를 위해 전기를 썼다. 반고는 전기의 끝에 선배의 삶을 부정적으로 총평했다. 역사 서술과 관련해서 “황로도가(黃老道家)를 육경(六經)보다 앞에 두고 뜻있는 처사(處士)보다 간웅(姦雄)을 내세우고 권세와 이익을 높이면서 빈천을 부끄럽게 여겼다.”, 인생과 관련해서 “제 몸을 온전히 지키지 못하고 궁형(宮刑)을 당하고서 가라앉았던 마음과 힘을 돋우어 일으켰다.”, 전체적으로 세상 돌아가는 이치에 두루 밝아서 제 한 몸을 건사하는 명철보신(明哲保身)을 못했기 때문에 사마천이 글과 삶에서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고 보았다. 반고는 선배에 대해 칭찬할 것은 칭찬하지만 반대할 것은 분명히 반대했다.

젊은 시절의 배낭여행

중국의 위대한 역사가 사마천은 젊은 시절을 어떻게 보냈을까? 사마천은 물고기가 급류를 거슬러 오르면 용이 된다는 용문(龍門)에서 태어났고 집안은 농사와 목축을 했다. 6세 때 용문에서 한제국의 수도 장안으로 이사를 갔고 10세부터 고대 전적을 배웠다. 그 이후의 행적은 묘연하다. 아버지 사마담(司馬談)은 천관(天官)을 맡았지만 일정 지역을 통치하는 치민(治民)의 경력을 갖지 못했다.

고대 사회에서 천관은 하늘의 메시지를 읽어내는 능력으로 인해 권력의 정점에 있었다. 당시의 천관은 전문직이지만 오로지 황제의 관심사를 만족시켜주는 것에 불과했다. 사마천은 세습되는 가문의 직업에 자부심을 느끼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문서, 역사, 별자리, 역법을 맡으니 점술과 제관의 신분에 가까워서 본래 황제가 데리고 놀면서 광대처럼 대우받으니 세상 사람들이 깔보았다.”(<한서> 중 ‘보임안서’)

사마천은 20세에 배낭여행을 떠나게 된다. 무슨 생각으로 머나먼 여정을 나서게 되는지 아무런 설명이 없다. 예나 지금이나 인생의 청년기는 낯선 사회적 자아를 곱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열병을 앓기 마련이다. 사마천의 여정을 보면 20대의 열병을 어느 정도 헤아려볼 수 있다. 사마천은 장안에서 출발하여 한수(漢水)를 통해 남쪽 장강(長江) 유역에 이르렀다. 장강에서 배를 타고 안후이 성의 회수(淮水) 유역으로 이동했다. 도중에 그는 저장성의 회계산(會稽山)에 올라서 우(禹)임금이 묻힌 무덤을 찾고 후난 성의 구의산(九疑山)에 올라서 순(舜)임금의 사적을 살폈다. 또 사마천은 모함으로 제 뜻을 펼치지 못하고 죽은 초나라의 굴원(屈原)이 거닐던 곳에 들렀다. 그 뒤 행선을 북쪽으로 잡고서 공자의 고향을 들러 지역의 유풍(遺風)을 살피고 귀로에 공자처럼 곤란을 겪기도 했다.(<사기> 중 ‘태사공자서’)

사마천은 20대에 자아 찾기의 일환으로 고대 성왕과 위인의 유적지를 찾는 힘든 여정을 떠났다. ⓒ신소언

교통편도 숙박시설도 발달하지 않았을 시절에 머나먼 길을 다녔을 사마천의 용기가 대단하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사다리꼴 모양의 여정을 보면 순임금과 우임금처럼 문화영웅의 사적, 공자와 굴원처럼 가진 기량을 제대로 펼치지 못했던 불우한 현자의 고향으로 구분된다. 이것은 사마천이 단순히 견문을 넓히는 여행이 아니라 자아를 찾는 순례라고 할 수 있다.

그는 긴 순례를 마친 뒤 장안으로 와서 22세에 낭중(郎中)이 되었다. 낭중은 높은 관직이 아니지만 황제의 시종관으로 당시 출세 코스로 알려져 있다. 자주 황제를 접하는 일이 많은 만큼 언제라도 깜짝 발탁될 기회가 많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사마천은 20대에 가문의 직업을 끊임없이 밀어내고자 했고 마침내 순례를 끝내고 치민(治民)의 역할을 꿈꾸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순례 중 만난 역사적 인물, 즉 순임금과 우임금 그리고 굴원과 공자를 통해서 치민의 꿈을 확실하게 결심했을 것이다.

아버지의 유언과 항복한 친구를 위한 변명

사마천은 20대의 배낭여행을 통해 천관이 아닌 치민의 길을 걷고자 결심하고 그렇게 나아갔다. BC 111~110년에 걸쳐 사마천은 낭중으로 오늘날 쓰촨 성의 파촉(巴蜀) 지역과 윈난 성의 쿤밍(昆明) 지역을 정벌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하지만 한창 잘 나가던 중 위기가 찾아왔다. 마침 무제가 태산에 가서 자신의 역사적 성취를 하늘에 알리는 봉선(封禪) 의식을 거행했는데, 사마담은 주무관이었지만 다른 일로 참여하지 못했다. 평생 한 번 볼까 말까 한 성스런 행사를 놓치자 사마담은 끓어오르는 분노를 억제하지 못하고 괴로워하다 죽었다. 이렇게 새 출발의 길이 열리는 즈음에 사마담이 분사(憤死)했던 것이다. 사마천의 인생은 궤도 수정이 불가피했다. 사마담은 죽기 전에 아들에게 자신이 이루지 못했던 꿈을 대신 이루어주기를 바라는 유언을 남겼다.

“내가 죽거든 너는 반드시 태사가 돼라! 태사가 되어 내가 하고자 했던 논저를 잊지 마라!”(余死, 汝必爲太史! 爲太史, 無忘吾所欲論著矣!)

사마담은 나날이 기울어져 갔던 가문의 위업을 되돌리기 위해서 육경(六經)에 버금가는 저술을 하고자 했다. 천관에 머무는 한 치민할 수 없지만 논저를 통해 치민의 길을 열 수 있기 때문이다. 육경과 같은 논저는 지난날의 사람이 살아온 길을 평가하고 앞날의 사람이 살아갈 삶을 설계하도록 하는 점에서 치민에 참여할 수 있는 것이다. 사마천은 <사기>의 저술을 인생의 돌파구로 삼아서 집필에 맹진했다.

하지만 세상은 그를 그냥 내버려두지 않았다. 한나라는 대대로 북쪽의 흉노(匈奴)로 인해 골머리를 앓아왔다. 이로 인해 사마천의 친구 이릉(李陵) 장군에게 위기가 닥쳐왔고 그 위기는 사마천의 인생을 집어삼켰다 . BC 99년에 무제는 이광리(李廣利) 장군이 기병 3백 명을 이끌고 흉노 정벌에 나서고 이릉이 후방에서 보급부대를 이끌며 이광리를 지원하게 하려고 했다. 이때 이릉은 무제에게 기병 없이 보병 5천 명으로 흉노를 정벌하겠다고 수정 제의를 했다. 처음에는 그의 호언대로 연전연승을 거두었지만 결국 물자 부족과 중과부적으로 이릉은 생포가 되었다. 이 패전 소식을 뒤이어 이릉이 흉노 병사들에게 군사 훈련을 시킨다는 첩보가 날아들었다. 나중에 오보로 밝혀졌지만 패배에 이은 배반 소식은 조정을 들끓게 만들었다. 상황은 여론재판 식으로 흘러가서 이릉의 가족은 참형을 당하게 되었다.

사마천은 이러한 사태 전개에 몹시 당황했다. 이릉의 승전보가 전해질 때 사람들은 자신의 일인 양 환호하더니 단 한 차례의 패전이 알려지자 이릉은 역적이 되어버렸다. 사마천은 이릉과 낭중 동기이기는 하지만 평소 술 한 잔 나눠본 적이 없는 사이였다. 하지만 멀리서 지켜볼 때 이릉은 제 한 몸보다는 나라를 위해 헌신하는 국사(國士)의 품격을 지니고 있었다. 치민의 길로 나아가던 사마천이었지만 더 이상 가만히 있지 못하고 이릉을 변호하다가 황제를 속인다는 죄목으로 궁형에 처해졌던 것이다. 사마천이 생각하기에 사실을 사실대로 말한 것은 누구라도 할 수 있는 평범(平凡)한 일인데 황제에게 도전한 비범(非凡)한 사건으로 둔갑한 것이다.

죽음을 앞둔 친구에게 답장 편지를 쓰다

BC 95년에 사마천은 황제의 시중을 드는 중서령(中書令)이 되었지만 깊은 고독과 환멸에 빠졌다. 답답하지만 누구에게 속이야기를 하지 않던 사마천은 감옥에서 죽음을 기다리던 친구 임안(任安)이 떠올랐다. 무제가 병에 걸리자 강충(江充)은 려태자(戾太子)가 궁에 인형을 묻어 놓는 흑주술을 했다고 주장했다. 궁지에 몰린 려태자는 군사를 일으켜 자신의 결백을 주장했을 때 임안은 이를 집안 문제로 보아 사태 진압의 책임자임에도 관망하던 태도를 취했다. 사건이 일단락된 뒤에 임안은 눈치를 보며 제 목숨을 아낀 죄로 사형을 받게 되었다. 임안은 황제를 곁에서 모시는 사마천에게 추현진사(推賢進士)의 역할을 요구하면서 자신의 구명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다.

사마천은 편지를 받고서 쉽사리 답장을 보내지 못했다. 바쁘기도 했지만 환관인 자신이 딱히 뭐라고 할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때가 바야흐로 BC 91년 11월이 되었다. 한 달만 지나면 임안은 저세상 사람이 될 운명이었다. 시간을 늦추면 영영 답장을 보낼 수 없다는 생각이 들자 사마천은 임안의 요구대로 나설 수 없는 자신의 처지를 격정적으로 표현하는 ‘보임안서(報任安書)’라는 불후의 글을 썼다.

이 편지에서 사마천이 죽음의 나락에 떨어졌다가 어떻게 자신을 다시 일으켜 세웠는지를 고해성사하듯이 자신의 심경을 솔직하게 털어냈다. 사마천은 궁형을 받은 뒤로 몸은 살았지만 마음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정하지 못했다.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 되어버렸다. 몸은 풀려나 건강을 되찾았지만 감옥이 있었던 일과 궁형을 당하던 장면 등이 수시로 떠올라 심신이 피폐해졌다. 또 치민의 길을 열어서 가문을 일으키려는 꿈이 무너졌다고 생각하니 더더욱 회한이 몰려들었다.

“이 때문에 창자가 하루에도 아홉 번이나 뒤틀렸다. 집에 있으면 멍하니 정신이 나간 듯하고 밖에 나가면 어디로 가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치욕을 떠올릴 때마다 땀이 등골에서 나서 옷을 적시기 일쑤였다.”(是以腸一日而九回, 居則忽忽若有所亡, 出則不知所如往. 每念斯恥, 汗未嘗不發背霑衣也.)

 

어렵게 살아났지만 다시 자살까지 생각했다. “사람은 원래 누구나 한 번 죽기 마련이다. 그 죽음은 태산보다 무겁기도 하고 털보다 가볍기도 한다.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이다.”(人固有一死. 死有重於泰山, 或輕於鴻毛. 用之所趨異也.) 의미 있는 죽음을 생각하면 사마천은 치욕스럽지만 살아야겠다는 마음을 굳게 먹었다.

고통에서 발분(發憤)하여 <사기>를 완성하다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자 사마천은 지난날의 자신처럼 곤경과 치욕을 겪은 사람이 어떻게 했는지 궁금해졌다. 그는 곤경에 허우적거리지 않고 그것을 헤쳐 나갔던 선배의 자취를 되새기면서 사마천은 자신이 해야 할 임무를 다시 자각하게 되었다. 예컨대 주문왕(周文王)은 감옥에 갇혀서 <주역>을 썼고, 공자는 진(陳)과 채(蔡) 지역에서 굶주림으로 고통을 겪으며 <춘추>를 지었고, 좌구명(左丘明)은 눈을 잃고서 <국어(國語)>를 지었다. “이들은 모두 하고자 하는 뜻에 막히고 맺힌 바가 있어서 자신의 길을 펼칠 수 없었다. 따라서 지난날의 일을 풀이하여 다음 세대에게 생각을 펴 보이려고 했다.”(此人皆意有所鬱結, 不得通其道, 故述往事, 思來者.)

따라서 사마천이 겪은 치욕은 사회적으로 버림을 받아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하는 포기가 아니라,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운명에 의해 비록 당할지라도 떨쳐 일어나야 하는 재기의 사건이 된다. 재기의 의지를 불태우면서 사마천은 쓰다가 그만 둔 미완의 <사기> 집필을 끝내겠다는 발분을 하게 되었다.

사마천은 ‘보임안서’ 등에서 심경을 내보일 때 욕(辱) 자를 써서 자신이 당한 고통을 드러내고 분(憤) 자를 써서 자신을 다시 일으키는 에너지를 표현했다. 특히 후자는 훗날 사상문화와 예술문학의 창작 계기를 발분, 서분(舒憤), 즉 울분(鬱憤)의 표출로 설명하는 기원이 되었다. <사기>는 발분지서(發憤之書)라고 불리며 한때 저평가를 받았다. 정제되지 않은 감정과 거친 표현은 단아하고 엄정한 역사 서술을 중시하는 사람들의 동의를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마천은 발분을 오히려 부정의에 대한 과감한 비판, 약자에 대한 따뜻한 시선, 시대를 일군 무명의 인물에 대한 애정으로 전환시켰다.

황후이지만 사실상 황제였던 여태후(呂太后)를 황제의 본기에 올리면서 그이가 질투에 눈이 멀어 척(戚)부인에게 가했던 광적 행위를 숨김없이 표현했다. 진승(陳勝)은 품팔이꾼이었지만 진(秦)나라의 붕괴를 촉진하는 반란을 일으켜서 잠깐 왕이 되었으므로 그를 제후의 세가에 올렸다. 유협(游俠), 혹리(酷吏), 화식(貨殖) 열전에서 오늘날 미시사나 생활사에 해당되는 인물마저 역사의 무대로 초대했다. 왕과 대부가 주인공인 <서경>과 <춘추>에 견주어보면 <사기>는 참으로 역사의 확장이라고 할 수 있다. 사마천은 체제가 아니라 공정한 신(역사의 판관)의 관점에서 벌거벗은 인간의 모습을 그려냈던 것이다.

만약 사마천이 궁형을 당한 뒤 모욕을 이기지 못하고 자살했다면 우리는 위대한 역사서인 <사기>를 읽을 수 없었을 것이다.

 

신정근 성균관대 동양철학과 교수. 서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한 후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석ㆍ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성균관대 동양철학과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마흔, 논어를 읽어야 할 시간>(2011), <인문학 명강, 동양고전>(공저, 2013), <불혹, 세상에 혹하지 아니하리라>(2013), <신정근 교수의 동양고전이 뭐길래?>(2012), <논어>(2012), <어느 철학자의 행복한 고생학>(2010)> 등이 있고, 역서로는 <소요유, 장자의 미학>(공역, 2013), <중국 현대 미학사>(공역, 2013), <의경, 동아시아 미학의 거울>(공역, 2013) 등 30여 권의 책이 있다. 앞으로 동양 예술미학, 동양 현대철학의 새로운 연구 분야를 개척하고, 인문학과 예술의 결합을 이룬 신인문학 운동을 진행하고자 한다.

 

  출처 : 네이버캐스트 인문과학>철학>동양철학 2013.11.12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rid=237&contents_id=41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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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작성자 14.12.15 12:49

    첫댓글 요즘 창자가 하루에 수없이 뒤틀리는 중개사들이 많아 보여 올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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