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의 월요시편지_399호]
배추벌레의 허공답보
박완호
주름진 초록의 길, 엉성하게 포개진 배춧잎이 잔바람에 푸르르 떨린다
배추벌레 하나 울퉁불퉁한 길바닥을 삼켜가며 공중을 걸어간다 한 발 한 발 배추벌레가 지나간 보폭만큼 허공의 부피가 자란다
초록이 꺼진 자리에 숭숭 생겨나는 구멍들, 길 하나가 지워지고 다른 길 하나가 문득 떠오른다
하나를 버리는 건 결국 또 다른 하나를 낳는 일, 나의 전부라고 여겼던 이가 지워진 자리에 시나브로 피어나던 사람처럼, 혹은 나처럼
배추벌레가 사라진 자리에 날아드는 배추흰나비들, 그리고 나의 허공인 당신, 당신들
- 『너무 많은 당신』(시인동네,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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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완호 형의 신작시집, 『너무 많은 당신』에서 한 편 고릅니다. "배추벌레의 허공답보"
허공답보...예전에 고등학교때 애독했던 무협지에 자주 등장하던 단어이지요... 무림의 강호의 진정한 고수들은 허공답보요 능공허도라 하늘을 능히 사뿐사뿐 걸어다니는 경지에 이른 자들이지요... 배추벌레의 허공답보라니 저 배추벌레도 대단한 무림고수인가 싶은데... 실은 무협지와는 상관이 없지요.^^
요즘 자그마한 텃밭을 하나 가꾸고 있는데... 감자며 옥수수며 열무며 심었는데... 농약을 안 치니까 그런지 정말로 이런 저런 벌레들이 먼저 구멍숭숭 뚫으며 맛있게 식사를 합니다. 벌레도 좀 먹고 살아야지 그런 생각으로 그냥 놔두고 있습니다. 그런데 나는 무심코 지나친 그 구멍들을 박완호 형의 밝은 눈은 놓치질 않았으니 형이 고수는 고수인가 봅니다.^^
'하나를 버리는 건 결국 또 다른 하나를 낳는 일, 나의 전부라고 여겼던 이가 지워진 자리에 시나브로 피어나던 사람처럼, 혹은 나처럼 / 배추벌레가 사라진 자리에 날아드는 배추흰나비들, 그리고 나의 허공인 당신, 당신들'
나의 전부라고 여겼던 이가 지워진 자리에 시나브로 피어나는 사람... 나의 허공인 당신, 당신들... 과 만나고 헤어지며 인연을 쌓고 지우는 것... 그게 또 한 삶이겠다 싶은 아침입니다.
허공인 당신, 당신들이 문득 그리운... 뜨거운 여름날 아침입니다.
2014. 6. 9.
강원도개발공사 홍보팀장
박제영 올림
첫댓글 잘하면 이소룡도 등장하고 취권도 나오겠는데요.하하
하긴 당랑권도 나오긴 하더구만, 시인들은 모두 무협지를 잔뜩 읽은 무림고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