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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도(全羅道)의 특산물(特産物)! 중추절을 맞아! (1편)
○ 조선국(朝鮮國)의 토산물(土産物)이란, 「조선(朝鮮)이란 나라 안(內)에서 생산(生産)되는 여러 산물(産物)」을 말하는 것이고, 토산물(土産物)이란 말 그대로, 그 땅에서 생산(生産)되는 여러 가지 산물(産物)을 말하며, 이것들은 풍토(風土)와 직접적(直接的)인 관계(關係)가 있다.
○ <해동역사(海東繹史) 물산지(物産志)>를 보면, 조선(朝鮮) 영토(領土)에서 산출(産出)되는 많은 토산품(土産品)들을 설명(說明)하고 있는데, 반도(半島)조선(朝鮮)에서, 산출(産出)될 수 없는 것들이 소개(紹介)되어 있다. 이러한 것들을 보면서 느끼는 것은,
◉ 반도조선(半島朝鮮)이란 거짓의 역사(歷史), 고의적(故意的)으로 조작(造作)한 역사(歷史)이야기라는 것을 알 수 있으며,
◉ 우리 카페에서 주장(主張)하고 있는, 대륙조선(大陸朝鮮)이란 올바른 역사(歷史), 진실(眞實)의 역사(歷史) 이야기라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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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해동역사(海東繹史) 물산지(物産志)에서 발췌(拔萃) :
《조선(朝鮮)에는 날짐승으로는 꿩, 비둘기, 참새, 메추리가 많고, 들짐승으로는 고라니, 사슴, 노루, 포(麅)가 많다. 해산물로는 곤포(昆布), 해의(海衣), 여방(蠣房), 거오(車敖)가 있고, 생선으로는 금문(錦紋), 이항(飴項), 중진(重唇), 팔초(八梢), 잉어, 붕어 등이 있다. 특이한 물산으로는 필관(筆管), 산장(酸漿), 자근(紫芹), 백호(白蒿), 수료(水蓼)의 싹, 당귀(當歸)의 싹이 있고, 과일로는 배, 밤, 대추, 감, 개암[榛], 잣[松], 살구, 복숭아, 밀감[柑], 귤(橘), 매실, 오얏, 석류, 포도가 있고, 가죽으로는 호피(虎皮), 표피(豹皮), 균피(麕皮), 녹비(鹿皮), 호피(狐皮), 학피(貉皮), 예피(皮), 초피(貂皮)가 있고, 꽃으로는 장미, 철쭉, 작약, 모란, 도미(酴釄), 정향(丁香), 산반(山礬), 앵두꽃, 오얏꽃이 있다.》
(2) 해동역사(海東繹史) 물산지(物産志)에서 발췌(拔萃) :
《대명일통지 : 조선국(朝鮮國)의 토산(土産)으로는, 금(金), 은(銀), 철(鐵), 석등잔(石燈盞), 황칠(黃漆), 과하마(果下馬), 장미계(長尾鷄), 봉밀(蜂蜜), 초피, 예피, 장피(獐皮), 녹비(鹿皮), 해표피(海豹皮), 팔초어(八梢魚), 여방(蠣房), 귀각(龜脚), 죽합(竹蛤), 해조(海藻), 곤포(昆布), 메벼[秔], 기장[黍], 보리, 삼[麻], 송(松), 인삼(人葠), 백부자(白附子), 복령(茯苓), 유황(硫黃), 개암, 배, 밤, 핵도(核桃), 귤(橘), 매(梅), 죽(竹), 차(茶), 목단(牧丹)이 있다.》
해동역사(海東繹史)주석(註釋) : 포(麅) : 큰 사슴을 말한다. 《조선부》 자주(自注)에, “포는 노루와 같은데, 뿔이 하나이고, 그 고기는 매우 맛있다. 산(山)에서는 포가 나지 않는다.” 하였다.
해동역사(海東繹史)주석(註釋) : 밀감[柑], 귤(橘) : 《조선부》 자주에, “밀감[柑]과 귤(橘)은 전라도(全羅道)에서 난다.” 하였다. 《재물보》 권7 물보 2에, “밀감나무는 귤나무와 같으나 가시가 적다. 우리말로는 ‘감쑥’이라고 한다.” 하였다.
(3) 해동역사(海東繹史) 물산지(物産志)에서 발췌(拔萃) :
《귤(橘), 유자[柚], 감(柑) : 고려(高麗)의 무주(武州)에서는 귤(橘)과 유자(柚)가 생산된다. 《연번로속집(演繁露續集)》 조선(朝鮮)의 과일로는 배, 대추, 개암이 가장 많아서 어딜 가나 있다. 감(柑)과 귤(橘)은 전라도(全羅道)에서 난다. 조선부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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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동역사(海東繹史) 물산(物産)편에서 인용(引用)한, 위의 글 (1).(2).(3)을 보자.
➊ 《귤(橘)은 조선(朝鮮)의 특산물(特産物)인데, ‘전라도(全羅道)에서 나온다.》’고 하였다. 과연 옳은 설명(說明)일까?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을 보면 :
➠ 왕조실록(王朝實錄) / 太宗實錄 24卷, 12年(1412 壬辰) / 명 영락(永樂) 10年) 11月 21日(壬寅) : 《遣上林園別監金用于濟州,移裁柑橘數百株于順天等沿海郡. : 상림원 별감(上林園別監) 김용(金 用)을 제주(濟州)로 보내어, 감귤(柑橘) 수백 주(株)를 순천(順天) 등의 바닷가에 위치한 고을에 옮겨 심게 하였다.》고 하였으며,
➠ 왕조실록(王朝實錄) /太宗實錄 26卷, 13年(1413 癸巳 / 명 영락(永樂) 11年) 10月 20日(丙寅) : 《移種柑橘數百株于全羅道海傍諸郡.遣上林苑別監金用,往濟州移之. : 감귤(柑橘) 수백 그루를 전라도의 바닷가 여러 고을에 옮겨 심었다. 상림원(上林苑) 별감 김용(金 用)을 보내어 제주(濟州)에 가서 옮기게 하였다.》하였다.
➋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제주(濟州)목 형승(形勝)>보면 :
《고득종(高得宗)의 홍화각기(弘化閣記)를 인용하여,「집집마다 귤(橘)과 유자(柚子)요, 곳곳마다 준마(駿馬)로다」하였다. 토산(土産)편에는 : 「대모(玳瑁)ㆍ자개[貝]ㆍ앵무라(鸚鵡螺) 이상 세 물건은 모두 우도(牛島)ㆍ대정(大靜)ㆍ가파도(加波島)에서 난다.」고 하였으며, 「감(柑) 황감(黃柑)ㆍ유감(乳柑) 등 몇몇 종류가 있다. 귤(橘)·금귤(金橘)ㆍ산귤(山橘)ㆍ동정귤(洞庭橘)ㆍ왜귤(倭橘)ㆍ청귤(靑橘)의 다섯 종류가 있는데, 청귤(靑橘)은 열매를 맺어 봄이 되어서야 익고, 때가 지나면 다시 말랐다가 때가 이르면, 다시 익는다.」고 하였다. 또한 제주(濟州)에는 “귤림서원(橘林書院)”이라는 서원(書院)도 있었고 한다.
➋ 영농(營農)과학(科學)이 무지하게 발달(發達)했다는 현세(現世)에도, 귤(橘)은 오직 제주도(濟州道)에서만 생산(生産)이 된다. 이것은 기후(氣候)와 토질(土質)에 관계(關係)있는 바, 어디서든 재배(栽培)가 되지 않는다는 의미(意味)다.
➌ 그렇다면 해동역사(海東繹史)가 편찬(編纂)되기 휠 씬 이전(以前)의, <세종실록(世宗實錄) 지리지(地理志) 전라도(全羅道)> 편을 찾아보자. 전라도(全羅道)의 산물(産物)은, 수많은 종류(種類)가 나열되어 있는 이중에서 오늘의 주제(主題)와 관계(關係)있는 것만을 이야기하자.
➠ 공물(貢物)로 궁중(宮中)에 바쳤다는 것 중에서 :「유감(乳柑). 동정귤(洞庭橘). 금귤(金橘). 푸른 귤[靑橘]. 산 귤(山 橘). 대모(玳瑁) 약재(藥材)로는, 영릉향(零陵香). 곽향(藿香). 회향(茴香)」등이 있다. 《世宗 151 地理志 / 全羅道 / 玳瑁. 中略. 乳柑. 洞庭橘, 金橘, 靑橘, 山橘. 中略. 零陵香, 藿香, 茴香. 中略》고 하였는데, 이를 뒤집을 논리(論理)가 없다.
➠ 그러면 유감(乳柑)은 무엇이고, 동정귤(洞庭橘)은 또 무엇이며, 또한 금귤(金橘)은 무엇인가? 더하여 청귤(靑橘)은 또 무엇이고, 산귤(山橘)은 무엇이란 말인가!
➠ 이게 다 무엇인가? 이것들이 모두 반도(半島) 전라도(全羅道) 땅에서 나는 귤(橘) 종류(種類)란 말인가? 기가 막힌 이야기다. 감(柑)은 또 무엇일까? 감(柑)은 감자나무란 뜻이고, 감자나무는 귤(橘)나무의 한 종류(種類)이며, 밀감((蜜柑)이란 꿀처럼 단맛이 강한 귤(橘)을 말하는데, 귤(橘)이나 감(柑)이니, 감귤(柑橘)이나 밀감(蜜柑)이나 하는 것은 거의 비슷한 것들인데, 다르게 부르고 있을 뿐이다.
➍ 전라도(全羅道)에서 동정귤(洞庭橘)이 나온다는 이야기는, 전라도(全羅道) 땅에 동정호(洞庭湖)가 있지 않고서는 불가능(不可能)한 이야기다. 그렇지 않나? 더하여 금귤(金橘)이니, 청귤(靑橘)이니, 산 귤(山橘)이라 함은 다 무엇일까? 해남도(海南島)를 여행(旅行)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해남도(海南島)의 금귤(金橘)은, 그 맛이 일품(一品)이라고 전한다.
동정귤(洞庭橘) : 동정호(洞庭湖)주변(周邊)에서 나오는 귤(橘)을 말하고,
금귤(金橘) : 껍질을 벗기지 않고, 함께 먹는데, 아주 맛이 좋은 귤(橘)이라고 하며,
청귤(靑橘) : 열매를 맺어 봄이 되어서야 익고, 때가 지나면 다시 말랐다가 때가 이르면, 다시 익는다는 귤(橘)을 말한다고 한다.
산귤(山橘) : 산(山)에서 자생(自生)하는 귤(橘)나무에 열린 귤(橘)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한다.
왜귤(倭橘) : 이것은 설명(說明)키 어려운 이야긴데, 아마도 전라도(全羅道) 또는 제주(濟州)가 왜(倭)와 가까이 있었기 때문에, 왜국(倭國)에서 자라는 귤(橘)니 좀 특이(特異)한데, 왜귤(倭橘)과 같은 종류의 귤(橘)을, 왜귤(倭橘)이라고 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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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해동역사(海東繹史) 제45권 예문지(藝文志) 4 ○ 경적(經籍) 4 / 중국 서목(中國書目) 2 동국기사(東國記事) 편에 : 고려국해외사정기(高麗國海外使程記)【남당(南唐)의 장료가 고려(高麗)에 사신(使臣)으로 와 지나면서 본 바를 기록한 책이라고 ‘통지(通志) 예문략’에서 설명(說明)하고 있음 / 해동역사(海東繹史)】에서 말하기를 :
《고려(高麗)의 속군(屬郡) 가운데 “강주(康州)”가 있는데, 이 지역은 「고려(高麗)에서 남(南)쪽으로 5천 리 되는 곳에 있는바, 중국(中國)의 명주(明州)와 서로 마주 보고 있다. 강주(康州)의 인근(隣近) 군(郡)은 무주(武州)라고 하는데, 여기에서는 귤(橘)이 생산되는바, 그 기후로 말하면 여요(餘姚)와 아주 비슷하다.」 그러니 「고려(高麗)는 명주(明州)와 비스듬하게, 서로 마주 보고 있는 것으로, 대개 중국(中國)과 고려(高麗)는, 서로 동서(東西)로 마주 보고 있으면서, 서북(西北)쪽으로 약간 치우쳐 있는 것이다.」 연번로속집(演蘩露續集)》라고 하였다.
➊ 고려(高麗)에서 오천(五千)리 떨어진 곳에 “강주(康州)”가 있다. 이 말은 고려(高麗)의 황도(皇都)를 기준(基準)했을 것이니, 당시 고려(高麗) 황도(皇都)는 개경(開京)이었으므로, 개경(開京)으로부터 5천리 남쪽에 “강주(康州)”가 있게 되는데, 인근(隣近)에 무주군(武州郡)【목포(木浦) : 고려사(高麗史)지리지(地理志) 해양현(海陽縣)조】이 있다고 하였다. 결국(結局) 개경(開京)으로부터 5천리되는 곳에 “무주군(武州郡)”이 있었다는 말과 같다.
➋ 문제(問題)는 : 조선(朝鮮)의 강주(康州)는 : 경상도(慶尙道) 진주(晉州)이고,
조선(朝鮮)의 무주(武州)는 : 전라도(全羅道) 목포(木浦)이다. 광주라고 한다.
이러한 지리적(地理的) 위치(位置)로 볼 때, 강주(康州)주변에 무주군(武州郡)이 있을 수 없으며, 이렇게 경상도(慶尙道) 내륙(內陸)지방에 있는 강주(康州)와 바다 건너 장강(長江)의 하구(河口)변에 있는 명주【明州:항주】가 『서로 마주보고 있다』는 말은, 인간(人間)세계(世界)에서는, 불가능(不可能)하다.
➠ 이러한 기록(記錄)속으로 따라가 보면 : 명주(明州)나 강주(康州), 무주(武州)등의 이러한 지명(地名)은 대륙(大陸)의 장강(長江)이남(以南)으로부터 운남성(雲南省)에 이르는 곳에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➌「개경(開京)=개성(開城)」으로부터 반도(半島) 무주군(武州郡)까지는, 2천리(千里)정도라고 하더라도, 그 나머지 3천리는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무주군(武州郡)에서 3천리(千里)라면, 유구(琉球)=오키나와까지 갈 거리(距離)라고 보며, 직(直) 서쪽으로 항주만(杭州灣)일 것이다.
➍ 그래서 무주군(武州郡)의 기후(氣候)가 “여요(餘姚)”와 비슷하기 때문에, 이곳에서 「귤(橘)이 생산(生産)된다.」고 설명(說明)하고 있다. 또한 「명주(明州)에서 고려(高麗)는, 비스듬하게 마주보고 있으며, 중국(中國)과 고려(高麗)는 동서(東西)로 마주보고 있는데, 약간 서북(西北)쪽으로 치우쳐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여요(餘姚)는 : 항주(杭州)라고 한다.
➎ 중국(中國) 곧 대륙(大陸) 땅에서, 특히 산동성(山東省)에서 보면 정동(正東)이요, 강소성(江蘇省)과 절강성(浙江省)에서 보면 동북(東北)이요, 복건성(福建省)에서 보면 북(北)쪽이나 약간 동북(東北)쪽으로 치우친 방향(方向)이다. 동(東)쪽과 동북(東北)방향이지, 서북(西北)방향(方向)은 될 수 없는 지세(地勢)다. 이게 말이 되는 소린가!
➏ 고려(高麗)가 서북(西北)방향이 되려면, 남당(南唐)은 금릉(金陵)에 있었으니, 그 서북(西北)방향이 되는 곳은, 낙양(洛陽)과 개봉(開封) 땅이 된다. 【남당(南唐)은 937년, 이경(李璟) 건국(建國), 금릉(金陵)에 도읍(都邑)했으며, 975년 망한 나라이다. 고려국해외사정기(高麗國海外使程記)는 남당(南唐)의 ‘장료’가 고려(高麗)에 사신(使臣)으로 와 지나면서 본 바를 기록한 책】 이는 당시(當時) 남당(南唐)의 도읍지(都邑地)가 금릉(金陵)이기 때문이다.
➏ 중국(中國)은 서(西)쪽에, 고려(高麗)는 동(東)쪽에 있는 방향(方向)이라면, 어떤 경우(境遇)라도 서북(西北)방향(方向)은 될 수 없다. 그러나 역설적(逆說的)으로 「남당(南唐)과 중국(中國) 즉 고려(高麗)라면 서북(西北)방향이 된다.」 위의 기록(記錄)대로 서북(西北)방향(方向)으로 치우쳐 있게 된다. 또 ‘고려(高麗) 강주(康州)’와 ‘남당(南唐)의 명주(明州)’가 내륙(內陸)에서 호수(湖水)나 장강(長江)등지로 인해, 서로 마주보고 있을 수 있다.
➐ 오늘의 주제(主題)는 귤(橘)이다. 고려(高麗)의 전라도(全羅道) 땅에서, 『유감(乳柑). 동정귤(洞庭橘). 금귤(金橘). 푸른 귤[靑橘]. 산 귤(山 橘)』이 생산(生産)되어 공물(貢物)로 조정(朝廷)으로 보냈다는 이야기다. 이렇게 많은, 다양(多樣)한 귤(橘) 종류(種類)가 생산(生産)되었다고 하는데, 오늘날 그 흔적(痕迹)은 어디에, 어떻게 남아있으며, 기후(氣候)나 토질(土質)등은 어떻게 달라져, 그 많은 다양(多樣)한 귤(橘)나무들이 사라져 간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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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러한 산물(産物)이 나오는 곳이 “반도(半島) 전라도(全羅道) 땅」일 수 있다면, 차라리 조선(朝鮮)역사(歷史)는 폐기(廢棄)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역사(歷史)가 아닌, 전설(傳說)의 고향(故鄕)같은 얘기가 되기 때문이고, 또 선조(先祖)들을 능욕(凌辱)하는 이런 행위(行爲)를 스스로 자행(自行)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다. 이러한 산물(産物)이 산출(産出)되는 것은, 대륙(大陸)의 남쪽 땅이며, 이곳은 곧 조선(朝鮮)의 전라도(全羅道) 땅이란 것도 말이다. ‘고전번역원’의 원문(原文)이 대륙조선(大陸朝鮮)으로 조작(造作)된 것이 아니라면, 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 논자(論者)들께서는, 좀 더 많은 노력(努力)을 기울여, 반도조선(半島朝鮮)에 대한 확고(確固)한 증거(證據)를 제시(提示)해야 되지 않을까 한다.
그렇다고 유물(遺物)유적(遺蹟)을 발굴(發掘)하면서, 쇠꼬챙이로 긁고, 파서 글자를 만드는, 그런 일은 해서는 안 되는 일이다. ‘반도(半島)조선왕조(朝鮮王朝)!’ 그대들의 주장(主張)이 옳다고 확신(確信)한다면 당당(堂堂)하게 나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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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며칠 전엔가, 뉴스를 보니, 국방(國防)의 의무(義務)를 다하는 많은 군(軍) 장병(將兵)들에게 대통령(大統領)께서 선물(膳物)을 주셨다고 하였는데, 발표(發表)한 내용(內容)을 보니, 지금 내가 17-18세기 봉건(封建)왕조(王朝) 시대(時代)에 살고 있는 것인가? 하는 착각(錯覺)을 했다?
보도(報道)자료(資料)에 따르면 : 「박근혜 대통령(大統領)은, 장병(將兵)들에게 격려(激勵)카드와 특별(特別)간식(間食)도 하사(下賜)할 예정(豫定)이다.」라고 발표(發表)를 했다고 하는데, 국가(國家)를 지키기 위해, 24시간 노고(勞苦)가 많은 장병(將兵)들에게 아주 좋은 일이며, 지도자(指導者)로써 당연(當然)히 해야 할 일이다.
문제(問題)는 보도(報道)자료(資料) 글 중에서 “하사(下賜)”라는 단어(單語)이다. 하사(下賜)라는 말은, 한글이 아닌 한문(漢文)의 단어(單語)로써,
➊ 하사(下賜) : 「왕(王)이나 국가원수(國家元首)등의 높은 사람이 아랫사람에게 금품(金品)이나 물건(物件)을 주는 것」이라는 뜻이고, 또
➋ 하사(下賜) : 봉건(封建)왕조(王朝)시절에 왕(王) 또는 나라의 군(君), 또는 주(主)가 신하(臣下) 또는 백성(百姓)에게 주는 것으로 사용(使用)되는 말이다. 이때 즉 봉건(封建)왕조(王朝)때의 주인은 주군(主君)=왕(王)이다. 그래서 하사(下賜)라는 말이, 적절(適切)하게 사용(使用)됐으며, 하사(下賜)를 받은 자(者)는 그것을 최고(最高)의 영광(榮光)으로 여겼다.
➌ 그러나 단어(單語)나 말은, 시대(時代)에 따라 그 뜻이 변화(變化)되어, 작금(昨今)의 시대에 “하사(下賜)”라는 단어(單語)의 용도(用途)는, 결코 적절(適切)치 않다. 나라의 주인(主人)인 국민(國民)을 상대(相對)로 사용(使用)해서는 안 되는 말이다. 왜냐하면 민주주의(民主主義) 국가(國家)에서, 주인(主人)은 곧 국민(國民) 한 사람, 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 나라의 주인(主人)에게 누가 하사(下賜)를 한 단 말인가? 장병(將兵)들은 국민(國民)들이 아닌가?
➍ 공주(公主)가 여왕(女王)이 되어, 신하(臣下) 또는 백성(百姓)들에게 노고를 치하(致賀)하는 뜻에서 선물(膳物)을 하사(下賜)했다는 말은 타당(妥當)하지만
➎ 나라의 주인(主人)인 국민(國民)에게, 대통령(大統領)이 선물(膳物)을 하사(下賜)한다는 말은 웃기는 말이다. 위의 보도자료 문장을,「박근혜 대통령(大統領)은, 장병(將兵)들에게 격려카드와 특별(特別)간식(間食)도 제공(提供)할 예정(豫定)이다.」라고 한다고 해서 잘못된 표현(表現)이 되는가? 대통령(大統領)의 위신(威信)이 깎이는가? 체면(體面)이 깎이는가? 아주 적절(適切)한 문장(文章)이지!
➏ 대통령(大統領)의 뜻은 아닐 것이지만, 참모(參謀)들의 의식수준(意識水準)이 의심(疑心)가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자(者)들이 대통령(大統領)을 모시고, 나라를 운영(運營)한다니, 작금(昨今)에 벌어지고 있는 사회(社會)의 여러 안타까운 사건(事件)들이 매끄럽게 처리(處理)되지 못하고 떠도는 이유(理由)를 알만하겠다.
◉ 대통령(大統領)이나, 또 대통령(大統領)을 좌우(左右)에서 모시고 있는 참모(參謀)들은, 옛 봉건(封建)왕조(王朝)시절의 주군(主君)을 모시는 그런 일이 아닌, 나라(國家)와 국민(國民)들을 위한, 봉사(奉仕)하는, 그런 자리라는 것을 항상(恒常) 잊어서는 안 된다고 본다.
2015년 09월 28일 <글쓴이 : 문무(文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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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대한민국은 희망이 없다>고 하면, 많은 이들로부터 비난이 있을 것입니다.
지금 대한민국 각 분야에서 벌어지고 현상, 특히 집권측들과 나라를 방위해야 할 막중한 책임을 갖고 국민들의 혈세를 엄청나게 사용하고 있는 자들의 하는 꼬라지를 보면, 이 나라가 왜 더 이상의 발전은 없는가를 알 수 있을 것 같네요. 최고권력기관들은 할 일없이 명예훼손이라는 웃기는 사건에 국민혈세를 쏟아 봇고 앉았고, 야당이란 자들은 이전투구에 대들보 썩어 주저앉는 줄 모르고 싸움질로 낼 새는 줄 모르고 주저 앉아있고, 도무지 무슨 짓들을 하는 건지........국민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일들만 골라서 하려는 건지, 참 대단한 자들입니다.
선생님 말씀중에 남당(南唐)이 금릉에 있었다면 왕건이 고려를 창업할 당시에 후삼국시대가 잠깐 있었는데 견훤의 백제, 왕건의 고려, 그리고 후당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당시 신라의 도읍지는 낙양이었는데 사실 이곳은 서안과 더불어 중앙조정이 있는곳인데 즉 신라이전에도 중조가있었을뿐만 아니라 그 이후로도 조선때까지 경기, 기내 라불리는 중앙권력의 핵심지역 이었을겁니다. 따라서 역사조작세력들이 만들어 놓은 후삼국 "고려,백제, 신라"라가 실은 고려, 백제, 후당이 아닐까 추정해봅니다. 이것을 중조인 신라와 지방제후인 당을 바꿔치기한것이 틀림없다 생각합니다. 신라는 경상도와 아무 관련이 없고 오히려 남당이 아닐까요
그리고 남당이 후에 남명이 되는것이 아닌지 알 순 없지만 이것도 그렇다고 조심스럽게 추정해봅니다. 1911년 손문이 중화민국을 건국했을당시 그가 남경에서 찍은 사진을봤는데 그와 함께 큰 초상화로 그린 주원장을 배경에 같이 찍은 흑백사진을 본적이 있습니다. 아무래도 뭔가 수상하지 않습니까? 뿐만 아니라 옛 고사성어에서 본 기록인데 후삼국 당시 왕건과 견훤이 치열하게 대립하고있을때 홀연히 견훤은 낙양에 있는 경순왕을 뵈알하고 돌아가는 기록이 있습니다. 우리가 알고있는상식으로는 불가능한것 아닐까요? 그래서 중국아이들이 고구리백제신라는 반도에 왔으니까 그 빈자리를 당으로 채웠을거라 생각됩니다.
특산물인 동정귤은 동정호의 귤?
특산물인 왜귤은 왜의 귤?
그럼... 전라도는 그 일부가 왜놈들의 땅이었다는 말인가요?
전라도의 왜귤을 "왜귤과 같은 종류의 귤"이라고 설명하시면,
어느 누군가가 전라도의 동정귤을 "동정귤과 같은 종류의 귤"이라고 주장한다면 어떻게 되나요??
본문을 보시면 알겠지만, 왜귤이란 어떤 것인지를 모르니, 왜에서 나는 귤과 비슷한 모양의 귤이 아닐까? 한 것인데, 이것이 잘못 된 표현일까요? 정확하게 모르기 때문에 ? 이렇게 해 놓은 것입니다. 오해 없으시길 바랍니다.
저도 왜귤이 어떤건지 모르지만,
왜귤은 말그대로 왜귤 자체라고 봅니다.
그 비슷한 게 아니라...
"왜귤=왜에서 나는 귤"
특산물/토산물은 그 땅에서 나는 것이라 말하므로...
귤 맛있죠. 원래 귤은 다 익으면 파란 색입니다. 그런데 파란거 팔면 사람들이 안 사요. 그래서 후숙을 시켜서 나온 귤이 주황색입니다. 종류도 다양하죠. 제주도 귤은 근세에 심은 것입니다. 말도 근세에 키우기 시작한 거죠. 전라도에서도 귤이 나옵니다. 여수에서 제배를 하는데요. 누군가 역사적으로 복원을 시킨다고 여수에다가 심은 것인지 아니면 우연의 일치인지 모르지만 전라도에서 귤이 나옵니다. 누군가 역사 왜곡을 완성하려고 옮겨 놓은 것인지는 모르겠네요.
배에 관하여...
1920년대 일제가 한반도의 농산물을 조사해 기록한 것에는 황실배, 청실배, 함흥배, 봉화배 등 이름이 알려진 33종 등 총 59종의 배가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한반도에서의 본격적인 배 재배는 일제강점기 때부터 시작하였고...
이때에 일본에서 개량한 배 품종이 대거 들어와 심어졌습니다.
일본 개량 배 품종은 재래종과는 그 크기부터가 달라 순식간에 한반도에 번졌다고 하네요.....
유자에 대한 자료가 있어 올립니다.
(2. 한국유자 재배상의 문제점
가. 동해대책 미흡
유자는 상록과수 이므로 겨울철에도 잎에 저장양분을 가지고 있다. 이때 잎 등에 저장됐던 탄수화물 등이 이듬해의 개화 및 착과상태를 좌우한다. 따라서 월동중의 착엽정도는 수체 영양상태를 좌우하기도 하지만, 직접 결실량과 관계가 있다.
그러나 유자 재배지역인 전남, 경남지역은 유자재배 적지보다 북쪽에 위치해서 겨울철에 한해를 받아 낙엽되기 쉽다. 따라서 기상적, 생리적 원인에 의한 월동 중 낙엽을 줄이는 것이 유자생산에 가장 중요한 문제이다.)
'운명=자연'님께서 '왜귤'에 대해 말씀을 하셨습니다. 왜귤은 그저 왜귤입니다. 맞습니다. 문제는 전라도 땅에서 나는 귤의 이름이 왜귤이라는 것에 있죠. 그 이전의 역사서에서는 진한과 변한(후대의 신라와 백제)은 왜와 경계하고 있다고 한 기록을 상기하면, 왜 땅에 나는 귤과 전라도에서 나는 귤이 같은 종류의 귤(橘)일 수 있습니다. 문제는 왜귤에 대한 것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만 있다는 것이죠. 신증동국여지승람은 문제가 좀 있는 기록입니다. 이런 점을 감안하면 위의 게재내용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대한 '이병도'의 말은 : <구한(舊韓) 말경에 자획의 심한 완결(刓缺)을 가진 대본에 의거하여 일인이 현대 활자로 재인한 《신증동국여지승람》(공3책)이 있으나 아무 이용의 가치가 없고, 기타 일인 소간의 고서간행회본(공3책)과 그 후 일제 시대에 역시 일인들이 간행한 조선사학회본(공4책)이 나왔고, 근자에는 서울대학 도서관 소장본을 저본으로 한 동국문화사의 영인본(影印本)(전1책)이 나왔으나, 아직 이것을 알기 쉽게 국어로 번역한 책은 나오지 아니하였다.>고 한 것을 보면, 편찬 당시의 원본은 없다고 보며, 일제에 의해 왜곡된 것만이 돌아다니고 있다고 보며, 조선사 왜곡은 조선인의 손에 의해 만들어집니다
조선사에 대한 깊은 애정과 많은 성원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많은 분들이 열열히 성원해 주시고, 염려해 주시는 분들이 있어, 조선사의 진실찾기는 희망이 있다고 봅니다.
회원님들께 감사드립니다. 늘 건강하시길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