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표 교수님의 정년퇴임을 축하하며
우린 입사동기였지요. 1997년 9월 1일자로
모교의 교수가 되었지요. 같은 불교대학 교수였지요.
모교의 강단을 지킨 지도 18년 6개월이나 흘렀지요.
입사는 동기였으되 정년은 동기가 아니네요.
열 살이나 더 형님인 교수님은 10년이나 더 빨리
나가시네요. 부럽네요. 이제 그 무겁던 의무의 짐
다 내려놓고, 길이 멀다 한탄 하지 않으셔도 되니
얼마나 좋겠는지요.
그렇습니다, 교수님은 부처가 간 길도 가지
않으셨지요. 언제나 고난의 길을 선택했지요.
불교학도 다 하기 급급했던 시대에, 불타 교설을
새롭게 말해보자면서 시도 쓰셨지요. 시인이 되셨고,
시집도 2권이나 내셨지요. 불교학만 해야 되는 줄
알았던 시대에 종교학도 겸하셨고, 불타 교설을
탐구만 해야 하는 줄 알았던 시대에, 아니다,
그래서는 안 된다. 시대에 맞는 새로운 해석이
필요하다, 외치셨지요. 극복의 기수들, 일본
가마쿠라 신불교의 기수들 도겐(道元)스님을 보라,
신란(親鸞)스님을 보라며, 일본불교의 가치를
알아 보셨지요. 창조에서 해석으로, 다시 해석에서
창조로, 우왕좌왕 하셨지요.
홀로 생각해 보았지요. 참으로 통할 수 있는 점이
많았는데 ---. 대화는 많이 못 했구나. 서로
제 각기 달려가는 그 길에서 달려갔을 뿐이지요.
속마음을 알뜰살뜰 나누지 못했구나. 그 점이
아쉽지만, 그것만으로도 된 것이 아닌지요. 족보가
연결되지는 않았지만, 어떤 면에서 우리의 투쟁
목적은 같았지요.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동지였지요.
결사의 도반이었지요. 교수님은 대중결사, 못난 저는
홀로결사, 그것만이 달랐지요. 그래서였는지,
자주 통하지는 못했지만, 이제 저는 알았지요.
만나지는 못했어도, 어쩌면 우리는 서로서로
지음(知音)이 될 수 있었음을, 이제는 알았지요.
늦게나마 알았지요.
(2015년 12월 1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