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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집안 혼사가 있어 큰할아버지 독립유공 표창장 사진을 겨우 받았다. 기력 없는 당고모가 겨우 보훈청에 가서 받아오셨단다. 1892년생 할아버지가 2019년에야 독립운동 사실이 확인되었다.
오늘 집안 사람들이 다 모여 저마다 가진 기억을 꺼내 놓고 퍼즐 맞추듯 복기를 해보니, 형제가 금을 캐서, 돈을 모아서 만주로 보내곤 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
그때마다 가족들에게는 수운교에 헌금했다고 거짓말했는데, 내가 나중에 수운교에 가서 확인해 보니 그런 거금을 낸 신자 명단에 우리 가족 이름은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의문투성이였는데 당숙 증언으로 그 돈이 만주로 갔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만주로 간 돈'이 어디에 쓰였는지 우리는 상상만 할 뿐이다.
아버지 사촌들이 모두 무학력이고, 내 육촌들이 나와 내 막내동생 빼고는 기본 교육 밖에 받지 못한 까닭을 이제야 알았다.
배 고픈 시절, 우리는 왜 이리 가난하냐고 따진 적이 있었다.
거지처럼 살던 육촌 사촌 동생들 때문에 마음 아프고, 지금도 아프다.
이 표창장 한 장으로 어려서 못먹은 점심 저녁을 대신한다. 독립이 뭔지 건국이 뭔지 그 역사적인 뜻조차 잘 모른 채 이미 죽어간 아버지 형제들과 육촌 사촌들에겐 여전히 가슴이 아플 뿐이다. 더이상은 증명이 안되니, 우리들은 우리 스스로 정신 보상하자고 했다. '자랑스런 집안'이란 것으로 지난 아픔을 다 잊자고.
- 이계빈 할아버지 초상과 독립유공 표창장고 훈장. 1892년생으로 삼일만세운동을 하시다가 경찰에 잡혀 태형 70대를 맞은 기록이 발견되어 2019년 독립유공자가 되었다. 다만 집안 재산을 독립자금으로 만주에 보낸 사실은 아직 증명되지 않았다. 덕분에 우리 집안은 모두 가난하게 살았다.
해마다 추석, 설 명절, 기일마다 이 할아버지 초상화 앞에서 제사를 드린 기억이 생생하다. 두 할아버지가 워낙 가까워 우리 두 집안은 언제나 손자들까지 모여 함께 제사를 드렸다.
오늘은 집안 혼사가 있어 부천에 다녀왔다.
지난 삼일절에 몸이 불편해 큰할아버지의 독립유공 표창장을 받으러 가지 못하셨던 당고모도 오시고, 살아 있는 3형제가 다 오셨다.
표창장은 뒤늦게 받아와 지금은 큰할아버지의 장손이 보관하고 있다면서 사진을 받았다.
사진이 비뚤어져 마음에 안든다.
장손 즉 형이 사진을 바르게 찍지 못했다. 잠시 키보드를 놓고 형에게 전화 걸어 다시 찍어 보내라니, 지금 9시 12분이건만 잠을 자려고 누웠다며 내일 찍어 보낸단다. 형 나이 72세다.
(오래 전에 큰당숙모가 96세로 돌아가신 날, 친척들이 모여 무슨 얘긴가 하다 이 형이 '나 올해 환갑이야." 하길래 모두 놀란 적이 있다. 환갑인데 등산 다닌다, 환갑인데 뭐 한다, 이러면서 자랑할 때 우리 동생들은 "와!" 하면서 감탄했었다. 그런데 이제 형은 72세고, 나는 그 환갑을 넘겼다. 웃음이 난다. 3월 31일 아침에 사진이 왔다.)
오늘 6촌들이 거의 다 모인 자리에서 대통령 표창장 사진을 문자로 돌려보이면서 우리 집안이 얼마나 자랑스러운지 서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3.1절 100주년 앞두고 기쁜 일이 생기다 >
그런 중에 뜻밖의 사실을 알아냈다.
할아버지 형제는 넷인데, 첫째는 어려서 어머니를 잃어 청양 장승개에 뿌리를 내리고, 새 어머니가 낳은 둘째와 셋째와 넷째가 내 고향 운곡에 살았다. 우리 집안은 산과 전답을 충분히 갖고 있었는데, 이상하게도 세 집 모두 자식들이 교육을 받지 못했다. 당시 우리보다 한 줄기 더 직계인 종손은 비슷한 나이에도 일본 유학을 시켰는데, 대신 나머지는 일절 교육을 받지 못했다. 큰당숙도 그랬다. 학교 못갈 뻔한 나를 데려다 중학교에 다니게 한 형은 큰당숙의 아들인데, 그래도 이 형은 공주사대를 나왔다. 하지만 둘째, 셋째, 넷째네 모든 형제가 초등학교 교육조차 받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모두 가난하게 살았다. 모든 육촌이 점심과 저녁을 거의 먹지 못한 채 어린 시절을 보냈다.
넷째인 우리집만이 아니라 셋째네도 늘 굶고, 초등학교도 쉬엄쉬엄 다니는 정도였다. 둘째네는 태극도에 빠져 부산으로 아예 이사가 버렸는데, 거기도 마찬가지다.
이처럼 아버지 사촌들은 도무지 교육을 받은 사람이 없다. 우리 아버지도, 숙부들도 다 무학이다.
게다가 모두 다 가난하게 살았다.
- 내 할아버지 啓大(1900.4.15~1966.3.12 음력), 아버지 相範(1923.12.21~2000.3.11 음력)
우리 할아버지는 독립유공자가 되신 할아버지의 친동생으로 9살 터울이나 난다.
계빈 할아버지는 태어나자마자 아버지를 잃은 고아가 된 동생을 늘 손을 잡고 다니셨다고 한다.
1940년경에 우리 할아버지도 큰할아버지처럼 집안 재산을 만주로 몰래 보낸 걸 보면 틀림 없다고 생각한다.
내가 중학교 다닐 때쯤, 우리 할아버지 사촌인 집안 할아버지 한 분이 살아 계실 때 만세운동을 했노라는 장황한 말씀을 직접 들은 적이 있는데, 그때는 그게 중요한 사실인지 몰랐다.
내 아버지 상범은 일제에 강제 징용당해 대전 집결지까지 갔다가 거기서 탈영, 해방될 때까지 숨어 살았다.
숙부 윤범(1927.9.20~2012.4.26 음력)은 육이오전쟁 이전인 1948년에 국군에 입대했다가, 여수순천의 국군반란 진압에 투입되자 즉각 탈영, 결국 우리 아버지가 1954년에 28세 나이로 대신 입대했다.
오늘 셋째네 여동생이 이제야 말한다.
나보다 한 살 어린 이 여동생은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어른들이 무척 아끼고, 나도 아껴 내가 대학다닐 때 우리 형제들과 더불어 셋집에 함께 살기도 했다. 그런 이 동생도 초등학교만 나왔다. 이 집에서는 오늘 아들을 결혼시킨 형만 중학교를 나왔을 뿐이다. 우리집에서는 나하고 막내만 중학교에 들어가고, 구기자와 고추 덕분에 대학까지 졸업할 수 있었다. 두 집 통틀어 대학 졸업자가 우리 둘 뿐이다.
이제 본론 말한다.
이 여동생이 오늘 처음 증언하는 내용이다.
동생도 어려서 들은 말씀이 무슨 뜻인지 모르고 기억만 하고 있다가 이제야 "아!" 하고 털어놓는 것이다.
당숙(표창장 받은 분의 큰아들 瓊範)이 여동생(당숙의 둘째딸 載淑)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단다.
- 우리 아버지는 늙고 힘들어(1901년생인 우리 할아버지보다 9살 많은 1892년생이다. 1945년경이라면 대략 54세다.) 대신 내(당숙은 우리 아버지보다 한 살 많은 1923년생으로, 1945년이면 23세다. 그러면 큰할아버지 나이 32세에 첫 아들을 낳았다는 계산이 나온다. 우리는 이 할아버지 20대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잘 모른다. 막연히 1919년의 삼일만세운동, 이어진 독립운동과 관련이 있다고 추정할 뿐이다)가 아버지 심부름을 많이 다녔단다.
우리 아버지와 작은 할아버지(내 할아버지 啓大)는 늘 둘이서 청양장, 운곡장을 돌아다니셨는데, 큰 금덩어리를 몇 개씩 들고 논 산다, 밭 산다 떠들며 다니셨다.
그러다가 불쌍한 과부를 만나 주었느니, 불쌍한 거지를 만나 주었으니 하는 말씀 끝에 늘 빈 손으로 돌아오곤 하셨다. 또 돈을 들고 나가 역시 땅 산다며 나가기는 하는데 올때 보면 빈 손이었다. 당시에는 금광에서 금을 많이 캤는데, 이 금이 매번 적선으로 사라졌다. 수운교(지금의 대전 수릿골에 있는)에서도 사람들이 와서 돈을 가져갔다고도 하고, 어쨌든 아버지와 작은 아버지는 땅 한 조각 사지 못하고 그렇게 살다 가셨다.
여기까지는 나도 어려서 하도 들어 아는 얘기다. 대체 무슨 마음이 그리 좋길래 여기저기 적선하며 살았나 궁금할 정도였다.
그래서 내 막내동생 재구와 함께 수운교 본부에 찾아가 기부자 명단을 뒤져보기도 했다. 없었다. 우리가 어려서부터 전설처럼 들은 내용이 막상 수운교에는 흔적이 없었다.
이런 중에 여동생이 오늘 전혀 다른 증언을 했다.
다시 당숙의 증언으로 들어간다.
- 난 만주가 그렇게 무서운 곳인지 몰랐다.
갈대밭 같은 곳에 숨어 있다가 사람을 만나곤 했는데, 당시 만주 풀밭에서 칼에 찔려 죽는 사람이 아주 많았다.
아버지가 뭘 꽁꽁 싸서 아무 곳에 가서 아무런 사람을 만나면 전하라, 이런 간단한 밀지만 받고 만주에 가기를 여러 번 했다. 워낙 젊을 때라 바람 같이 돌아다니기는 했는데, 전하라는 그 물건이 뭔지, 접선하는 사람이 누군지 전혀 알지 못했다. 그냥 상대를 확인하고 물건을 건네주기만 하면 곧바로 기차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뿐 아버지는 아무 말도 안했다.
가끔 수운교에서 온 사람들이라고 하여 집에 며칠씩 머물다 가곤 했는데, 그 사람들이 다녀가면 있던 돈이나 금이 사라지기도 했다.
당시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아버지는 내게 교육을 시키지 않았다. 배우면 안된다고 했다. 그래서 우리 형제들, 작은아버지네 사촌들이 다 학교를 못갔다.
- 이계빈 할아버지(1892.6.26~1958.1.20 음력)와 큰아들 경범(1923~2003.11.08 음력).
큰아드님 경범(내게는 당숙)은 약 20세 무렵 만주를 드나들며 '누군가에게 뭔가를 전해주고' 오곤 하였다.
경범 당숙은, 돌아가실 때까지 자신이 무슨 일을 했는지 알지 못했다.
여기까지다.
육촌들이 두런두런 이야기를 맞춰가며 추정해보니 집 산다, 땅 산다 품고 다니던 금이며 돈이 죄다 만주로 간 것이다.
만주로 갔다는 게 무슨 뜻인지 우리는 안다.
큰할아버지의 독립유공 사실은 지난 삼일절에야 겨우 밝혀져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아마도 삼일만세운동 자료가 밝혀진 모양인데(독립운동하다 태형 70대를 맞았다는 일경 자료가 발견되었단다. 더 자세한 건 알아봐야 한다), 만주까지 돈을 전달한 사실은 아직 모를 것이다. 어른들이 다 돌아가셔서 증명할 길이 없다. 그래도 상관없다. 우리만 알면 된다.
우리는 이제야 우리 집안의 가난이 무슨 뜻인지 알게 되었다.
초등학교만 나온 내 여동생의 머리로는 당숙의 이야기가 무슨 뜻인지 몰랐던 것이다. 막상 만주로 돈 심부름 다닌 당숙도 내용을 잘 모르고, 살기 팍팍해 그것이 무엇인지 알려고도 하지 않았던 것같다.
아버지 사촌형제들을 모조리 학교에 안보낸 게 혹시라도 일제 소학교 교육을 거부한 것인지, 이런 것조차 알 수가 없다. 당신들은 양반 집안이라고 한문 서적을 잔뜩 쌓아놓고 공부하신 분들이 왜 자녀들은 교육을 안시켰는지 이유를 모른다.
큰할아버지는 일경을 피해 도망다니느라 장남을 서른두 살에 낳은 것으로 보아, 그럴 겨를이 없었던 것같다.
내 형제들, 당숙네 형제들 모두 어려서 지독하게 가난하게 살고, 거의 교육을 받지 못했다.
지금도 그럭저럭 살 뿐 크게 잘 사는 사람은 없다. 나 하나 겨우 밀리언셀러 작가로서 이름을 겨우 드러냈을 뿐이다.
나는 지금도 어려서 점심 못먹은 한, 저녁 못먹은 한을 잊지 못하고 있다. 어머니는 돌아가실 때까지 제대로 밥을 먹이지 못한 사실을 미안하게 생각하셨다.
아버지 형제들, 아버지 사촌형제들이 모두 교육을 받지 못해 독립이 뭔지, 국가가 뭔지 잘 모르고 사셨다. 그래서 오늘에 이르도록 자신들의 아버지가 무슨 일을 하며 산 분인지 알지도 못했는데, 하늘에서 뚝 떨어지듯 독립과 국가 수립에 공을 세웠다는 표창장이 날아들어 그 편린을 조금씩 주워 모르는 중이다.
우리 같은 집안이 어디 한두 곳이겠는가.
이제 내 가난한 유년의 삶을 더는 생각하지 않겠다.
아울러 왜 우리 형들이 맨주먹으로 세상에 내던져졌나 따지지 않겠다.
할아버지들이 금덩이와 돈을 들고다니다가 다 수운교에 냈느니 어쩌니 할 때 "왜 아버지는 가만히 있었느냐?"고 물은 게 바보같은 질문이었다는 걸 이제야 깨닫는다. 하도 배가 고파 "왜 우린 논도 없고 밭도 없어? 금덩이로 샀어야지!" 따지면 아버지는 "우리 아버지, 큰아버지가 하시는 일을 어떻게 따지느냐"고 말씀하셨었다.
우리 할아버지, 큰할아버지의 아버지인 증조할아버지 定憲은 1856년생인데 돌아가신 해가 1902년이다. 우리 할아버지가 1901년생인데 그 이듬해에 돌아가신 것이다. 그러니 9살 많은 형 계빈이 갓난 동생 계대를 손잡고 돌아다닌 건 아마도 어려서부터 몸에 밴 습관이었을 것이다. 이래서 우리 할아버지는 큰할아버지 말씀을 거역하지 못했을 것이고, 금을 캐든 돈을 벌든 '나라 위해 내놓으라' 하면 다 내놓았을 것이다. 삼일운동도 형 따라다녔을 게 뻔하지만 큰할아버지는 아마도 '불량분자' 기록이 있고, 우리 할아버지는 형의 배려로 빠져 있어 독립유공자가 되지 못하셨을 뿐이다. 계빈 할아버지 입장에서는 늘 '어린 동생'을 보호한다는 생각 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것이 가까운 우리 집안 어른들의 내력이다.
중시조부터 병마사, 수군절도사, 포도대장 등 무관의 요직을 맡아온 우리 집안의 혈통 그대로 독립운동에 나선 것에 대해 나는 이의가 없다.
또한 아버지 형제와 사촌들을 모두 가난하게 만들고, 우리 자식들을 다 가난하게 만든 할아버지 형제들을 원망하지는 않는다.
어쩌면 일제 식민지가 30년 이상 계속되다 보니 어르신들의 의지가 꺾였을 수 있다. 이런 나라에서 내 자식들을 출세시켜 뭐하겠느냐는 자포자기 심리도 있었을 것이다.
작은당숙이 육이오전쟁이 발발하자 소위로 전선에 나갔는데, 1950년이면 큰할아버지 연세가 58세에 이른 때다.
그 나이에 작은아들을 전쟁터로 떠민 것으로 보아 큰할아버지는 뚜렷한 국가관을 갖고 계셨던 것같다.
큰할아버지 이계빈(啓濱), 우리 할아버지 이계대(啓大), 두 분께 죄송한 마음으로 절 올린다.
특히 큰할아버지는 내가 태어나던 해 봄에 돌아가셔서 나하고는 단 하루도 이승의 인연이 없다.
높은 뜻은 받드나 자식들을 거두지 못하신 점에 대해서는 여전히 서운하다.
우리 할아버지, 큰할아버지, 하늘에서도 자손들을 굽어 살펴주시기를...
* 이계빈 할아버지의 아들(사진 오른쪽이 장남 경범, 왼쪽이 차남 향범),
친동생인 우리 할아버지의 아들(사진 맨앞이 장남인 내 아버지, 아버지 뒤가 동생 윤범).
경범은 만주를 드나들며 어른들 심부름을 하고,
상범은 일제에 징용당해 끌려가다 탈영하고, 윤범은 여수순천 사태 때 진압군에서 탈영하고,
맨왼쪽 향범은 지독하게 가난한 가족을 살리기 위해 태백 탄광에서 일하다 진폐증으로 사망했다.
*** 3월 31일, 사진 질이 안좋아 계빈 할아버지 장손인 형에게 다시 찍어 보내라고 통화하던 중에,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계빈 할아버지가 평생 아침마다 기도하던 자리가 아직도 있다는 사실을 말해주었다.
지금은 집터가 사라지고 없다.
"다른 건 다 파묻었는데 이 기도터는 그래서는 안될 것같아 뜯어다 밭에 갖다 놓았다."
할아버지가 기도할 때면 고드름이 거꾸로 섰다는 이야기를 어려서부터 당숙모한테 듣고 자랐다.
마침 내 큰형이 시골집에 가 있어서 그 기도터 돌을 찾아오라고 하니, 형이 다녀왔다. 그러고는 빈 손이다.
"뭐 시멘트 덩어리고, 중요한 것같지 않아서 그냥 왔다."
사진을 찍어 달라고 해도 형은 그게 뭐 그리 중요하냐고 반문한다.
알고 보면 우리 형이나 표창장 갖고 있는 장손이나 다 피해자다.
하는 수없이 계빈 할아버지 친손자인 재옥 동생에게 전화해서 그 시멘트 덩어리를 다 주워다 너희 집 마당에 일단 갖다 놓으라 하니, 오늘 산불조심 기간이라 출근(공무원이다)했는데, 어쨌든 내 말대로 하겠단다.
이 동생은 나보다 겨우 한 살 어릴 뿐인데, 집이 가난해 국민학교를 너무 늦게 들어가는 바람에 내가 무지 큰형인 줄 알고 살아왔다. 어찌어찌 10급으로 시작해 지금 7급인데, 올해 정년 퇴직이다.
할아버지가 독립의 그 날을 기다리며 새벽마다 기도한 자리를 되찾게 되어 매우 기쁘다.
독립하고 정부 수립한 이후에도 할아버지는 1958년 봄에 돌아가실 때까지 기도를 멈추지 않았다고 한다. 나는 그해 가을 추석에 태어났다.
계빈 할아버지는 멀고 가까운 동네 사람들이 도인으로 여기고, 집안에서도 큰어른으로 모셨단다.
시멘트 덩어리, 별 것 아니지만 잘 보관하겠다. 비바람에 삭아 흙으로 사라질지언정...
*** 재옥 동생이 기어이 기도단(檀)을 찾아 모셔왔다.
반갑다. 할아버지의 정신을 되새기는 우리 집안 성물로 삼고자 한다.
- 독립유공자이신 계빈 할아버지는 매일매일 이 기도단에 맑은 물을 한 사발 올려 놓은 다음 기도하셨단다.
장손자인 재일 형이 뭔지는 몰라도 귀한 것같아 이렇게 밭에라도 옮겨놨으니 오늘 찾아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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